전화 너머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이내 나유성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선물, 마음에 들어?"신은지가 산처럼 쌓여있는 용품들을 바라보며 미간을 짚었다."유성아, 임산부 용품이고 유아용품이고, 나 다 필요 없으니까 환불해줘.""조금 지나면 다 쓸 일이 생길 텐데, 그냥 두지. 너 회사 다니느라 이런 거 고를 시간도 없잖아."나유성이 서류를 펼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어차피 환불 안 되는 물건이니까 그냥 가지고 있어. 정 마음에 걸리면 며칠 뒤에 중요한 모임이 있는데, 거기 갈 때 입을 연회복이나 좀 골라줘.""유성아, 나 임신 아니야. 그러니까 정말 필요 없어."그 말을 들은 나유성이 더듬거리며 물었다."임신이… 아니라고?"목소리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 수 있었다. 신은지가 다시 한번 확고히 진실을 전했다."응, 임신 아니야. 태준이가 실종된 뒤로 주주들이 자꾸 딴 마음을 품으니까, 아버님이 임시방편으로 그렇게 공표하신 거야."비록 본격적으로 나연그룹 경영에 참여한지 1년밖에 안 됐지만, 나유성은 어렸을 적부터 이쪽 업계에 발을 들여놓고 산 사람이었다. 신은지가 너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그는 충분히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된 거였구나....'나유성이 머리를 짚으며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환불은 안 될 거야. 거기 직원들도 힘들게 물건들을 가져왔을 텐데, 다시 가져가라고 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필요 없으면 내가 가져가서 다른데 다가 기부할 테니, 그대로 둬.”물건을 산 사람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니, 신은지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 물건이면 아이가 일년을 써도 다 쓰지 못할 것 같은 양이었다. 거기에 더해 임산부용 옷이며, 귀저기며…. 40평이나 되는 거실에 발 디딜 곳이 없을 정도로 뭐가 많았다.통화하고 얼마 되지 않아 나유성이 도착했다. 신은지가 전화할 때만 해도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많구나. 빨리 옮기긴 해야겠다
'다 들어놓고, 이제 와서 사과는, 재수 없어.'진유라가 속으로 투덜거리며 물잔을 들었다. 그러는 사이 곽동건이 또다시 훅 치고 들어왔다."전 여자를 사귄 적도 없고, 바람 맞아본 적도 없고 다른 여자한테 고가의 차를 선물한 적도 없어요."다른 남자가 이런 말을 했다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알고 있는 곽동건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그럼, 우리 혼인신고서 언제 낼까요?""풉."진유라는 자기도 모르게 머금고 있던 물을 뿜고 말았다.굵은 물방울이 그의 준수한 얼굴을 타고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진유라는 당황한 나머지 바로 손으로 그의 얼굴을 닦아주려다가, 아차 하고 얼른 옆에 있던 티슈를 꺼내주었다. 곽동건은 무표정한 얼굴로 티슈를 받아 자신의 얼굴을 닦았다. 진유라가 당황하며 사과를 건넸다."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네요. 다음에 농담하실 때 제발 깜빡이 켜고 좀 들어오세요."하지만 곽동건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어떻게 깜빡이 켤까요?""눈빛으로 신호를 보내면 되지 않을까요? 최소한 마음 준비는 할 수 있도록."진유라가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그녀는 속으로 부디 곽동건이 이 일로 트집 잡지 않길 바랐다. 곽동건은 항상 진지한 편이었고, 진유라는 당황한 나머지 자각없이 말을 하고 있었다. 둘 중 누구도 이 대화의 흐름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는 모습이었다.신은지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둘 사이에 어색하게 끼어 있었다. 곽동건이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알겠어요. 다음엔 미리 알려드릴게요."달달한 분위기를 견디다 못한 신은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제가 좀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네요. 천천히 얘기 나누세요."진유라도 안절부절, 곽동건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저도... 이만 가봐도 될까요?"“오늘 예정됐던 맞선 상대, 저예요.”그녀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뭐라고요?""어머님께 어떻게 전해드리면 될까요? 자기 여자한테만 꼬리를 흔
신은지는 순간 이해를 못 했다. 그러다 문득 아까 나유성이 그녀의 이름으로 기부했다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어제 받은 선물 중에 옷도 포함되어 있었긴 했다.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나유성의 성격상 선의를 베풀어도 어디서 자랑하고 다닐 스타일은 아니었다. 이번에 기부한 물건들이 다 고가이긴 했지만, 몇 트럭씩 기부하는 사람들과 비교할 바가 못 됐다. 그런데 이 사실을 육정현이 알고 있다니, 이상한 상황이었다.“우연히 들었어요."애매한 대답이 돌아왔다."그냥 써도 됐을 텐데, 왜 기부했어요?"육정현은 어찌 되었든 경쟁상대였고, 그녀는 자신이 임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만약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재경그룹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유성이가 너무 많이 사서, 도무지 다 쓸 수 없을 것 같아 기부했어요. 썩혀 버리느니, 필요한 사람한테 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육정현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나유성 씨가 선물한 거라고요? 누가 그러던 가요?"하지만 그의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한 신은지는 계속해서 상황을 설명했다. "물건 배달 온 직원에게 물어보니까, 굉장히 다정하게 생긴 사람이 샀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아는 사람 중에 그 말에 부합하는 인물은 유성이 뿐이라서요.""하."그가 헛웃음을 지으며 따지기 시작했다. "유아용품 사러 가는 사람 중에 다정한 표정을 짓지 않는 사람이 있나요? 다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에 물건을 사러 갔을 텐데, 짜증스러운 얼굴을 하겠어요? 신은지 씨, 생각을 너무 일차원적으로 생각하신 것 같네요."신은지는 잠시 할말을 잃었다. "맞는 말씀이긴 한데요...."육정현이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녀의 해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기분은 점점 더 안 좋아졌다. 이때, 갑자기 그가 물었다. "나유성 씨는 신은지 씨가 어떤 취향인지 잘 아나 봐요?"신은지는 어떻게 이 질문에 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물건이 포장 온대로 다시 돌려보냈기 때문에, 나유성이 그녀의 취향대로
뜨거운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식도에서 시작된 열기가 점점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윤정현의 얼굴에 어느덧 홍조가 일렁였다. 그가 마신 술의 도수는 무려 52도였다. 그 독한 것을 멋모르고 원샷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대표님. 술 잘 드시네요."진영웅이 옆에서 육정현의 술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온갖 칭찬의 말들을 쏟아내며 어떻게든 그가 계속해서 술잔을 들게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이런 흔한 수법에 당할 육정현이 아니었다. 워낙 잘난탓에, 웬만한 입바른 소리엔 흔들림이 없었다. 진영웅이 아무리 애를 써도 그는 쉽사리 다시 잔을 들지 않았다. 끄떡없는 육정현의 모습에 진영웅은 필살기를 써보기로 했다."육 대표님, 원하시는 일 모두 이루시고 빠른 시일 내에 소원 성취하시길 바랍니다."진영웅은 이 말을 하는 동시에 신은지와 육정현을 번갈아 봤다. 그 눈짓을 알아차린 육정현은 괜히 울컥하고 화가 치솟아 올랐다.그렇게 창과 방패, 술을 먹이려는 자와 술을 거부하려는 자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육정현도 서서히 술에 취한 듯 눈빛이 풀리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덩달아 진영웅과 육정현의 비서도 함께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유일하게 신은지만 임산부로서 배려받아 술을 안 마신 탓에 멀쩡했다. 신은지는 기사를 불러 진영웅과 육정현의 비서를 호텔로 보낸 뒤, 잘 지켜보라고 당부했다. 그런 다음 다시 육정현을 챙기기 위해 룸으로 돌아왔다. "걸을 수 있겠어요?"육정현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풀린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취한 육정현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순하고 순종적이었다. "이제 가요. 가서 쉬셔야죠."신은지가 앞서 나가며 말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뒤에서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낀 그녀가 뒤를 돌아보니, 육정현이 바닥에 앉은 채 그녀를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못 걷겠어요.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요."신은지가 살짝 짜증을 담아 말했다."다리만
신은지가 답했다."벗으면 뽀뽀해 줄게요."만약 그가 박태준이라는 것이 확인되면 뽀뽀하고, 아니면 바로 그를 내쫓아버릴 생각이었다. 육정현이 단호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싫어요. 거짓말이잖아요. 뽀뽀 안 해주면, 제 여자 친구 아니에요."윽박지르고 달래도 통하지 않자, 신은지는 방법을 바꿔 애교 어린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진짜 여자 친구 맞는데....""잠깐만요."그런데 이때, 육정현이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핸드폰 녹음기를 켰다. "아까 한 말 다시 해봐요."신은지는 할말을 잃었다. 인내심이 완전히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더 이상 입씨름하기 싫었던 그녀는 곧바로 그의 바지춤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하지만 동작이 너무 컸던 탓일까, 바지가 아닌 상의가 위로 젖혀지고 말았다. 신은지의 눈이 충격으로 동그랗게 떠졌다. 그의 몸엔 온통 울퉁불퉁한 상처들로 가득했다.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그 상처들을 매만지며 물었다. "이 상처들, 어떻게 된 거예요?"얼마나 아팠을지 도저히 상상조차 가지 않는 상처들이었다. 그의 상체는 온전한 피부가 거의 없을 정도로 흉측한 상처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 순간, 신은지는 차라리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박태준이 아니길 바랐다. 박태준이 이런 고통을 당했을 걸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때, 육정현이 고분고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맞았어요. 밥도 안 주고, 물도 안 주고, 새카만 방에 가두고 절 때렸어요.""누가요?"상상만 해도 숨이 턱턱 막혔다. 아무리 길게 봐도 최근 몇 개월 사이에 난 상처들로 보였다. 해외에 있다가 최근에 자신의 가문으로 돌아온 걸로 알고 있는데, 도대체 이 상처들은 어떻게 난 것인지 그녀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설마 육씨 집안 사람들이 이런 거예요?"신은지는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육정현이 그녀를 애처롭게 바라보며 답했다. "몰라요. 누군지 모르겠어요." "아프지 않아요?"그동안 육정현은 꾸준히 자신이 박태준이 아니라며 주장했기 때
새벽 5시, 습관적으로 깨어났다. 눈을 뜨고 주변을 살펴본 육정현은 완전히 낯선 환경에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이 생각나면서 비로소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차렸다. 천장에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쳤고 주위가 고요했다. 육정현은 고개를 돌려 침실 쪽을 바라봤지만 방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가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지만 같은 공간에서 함께 자는 신은지를 생각하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육정현은 오래 누워 있지 않고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길가에 주차된 낯익은 차가 눈에 들어왔다. 운전기사는 차 옆에 서서 육정현이 아래층으로 내려온 것을 보며 재빨리 차 문을 열었다. "육 대표님.” 육정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여기 있어?” 육정현은 운전기사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었다. 운전기사는 자신도 모르게 차 안을 들여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운전기사가 무슨 말을 할지 육정현은 이미 알고 있었다. 육정현은 차 앞으로 걸어가서 안에 앉아 있는 기민욱을 보았다. 흰색 캐주얼 옷을 입은 기민욱은 잘생긴 얼굴로 천천히 걸어오는 육정현을 보며 고개를 돌려 육정현을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형!” 육정현이 말했다. "여긴 어쩐 일이야?” "형 집으로 찾아갔었는데, 형이 없어서 비서에게 전화했지. 형이 어젯밤에 신은지 씨와 약속이 있었다고 알려줬어." 기민욱은 말을 하며 뒤에 있는 아파트를 한 번 쳐다보았다. "형이 평소에 일어나는 시간을 선택하고 운에 맡겼는데, 형이 정말 여기에 있을 줄은 몰랐지.” 육정현은 허리를 숙이고 차에 올라타 운전기사에게 말했다. "회사로 가죠.” 기민욱은 환한 표정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형, 어젯밤에 잘 잤나 봐.” 휴대전화를 확인하며 메시지에 답장을 하던 육정현은 기민욱의 말에 고개도 들지 않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형, 신은지 씨 좋아하지? 사실 형이 정말 신은지 씨를 좋아한다면 그게 불가능한 것도 아니잖아. 내가 아버지한테
기민욱은 휴대전화를 노려보았다. 그는 육정현이 사진을 보고 전화를 걸어 자신에게 질문을 하는 장면을 상상하면 할수록 기분이 좋아졌다. 흐렸던 기민욱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기민욱이 육정현에게 보낸 메시지는 마치 바다에 가라앉은 듯 고요했다. 기민욱은 사진 속 놀란 표정의 신은지를 차가운 얼굴로 쳐다보며 말했다. "정말 싫어.” 얇은 입술과 치켜 올라간 턱, 오만하고 도발적인 모습은 아까 신은지 앞에서 보였던 순둥이 같은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는 택시를 잡아타고 곧장 육영 그룹으로 갔다. 육정현의 비서는 기민욱과 육정현의 관계를 알고 있었기에 기민욱이 아무렇지 않게 그의 사무실로 들어가는 것을 말리지도 못했다. 기민욱은 육정현의 사무실로 들어가기 전에 노크를 했다. 기민욱은 당황한 보좌관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당신이 새로 발령받은 비서예요?" "네." 그 비서는 사장실 비서팀 사람이 아닌 육정현이 직접 지명한 비서였다. 기민욱은 그를 쳐다보다가 한참 뒤에 말했다. "듬직해 보이네요. 우리 형 안목이 역시 좋네요. 잘 지내봐요. 이전의 방 비서처럼 눈치 없이 굴지 말고요. 멀쩡하게 걷다가도 계단에서 굴러떨어질 수 있어요.” "……” 새 비서는 기민욱이 자신을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들어와." 안에서 육정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민욱이 문을 밀고 들어갔지만 육정현은 서류를 들여다볼 뿐 고개를 들지 않았다.”무슨 일이야?” "형, 내가 방금 뭐 하러 갔는지 맞춰봐." 기민욱은 육정현의 뒤로 가서 그가 손에 들고 있는 서류들을 내려다보았다. 기민욱의 낮은 목소리에는 고혹적인 웃음이 가득했다. 육정현이 말했다. "신은지 씨를 찾아갔잖아.” "내가 보낸 사진 봤어?” "응." 기민욱은 육정현의 얼굴을 보았지만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메시지를 봤으면서 왜 답장을 안 해?” 기민욱은 휴대전화를 꺼내 음량을 무음으로 바꾼 뒤, 최신 통화
기민욱의 전화를 받은 후, 신은지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오후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저 여자의 타고난 직감이었다.진유라는 오후에 신은지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에 자신의 집에 와서 밥을 먹으라고 했다. "엄마가 얼마 전에 초원으로 여행 가서 소고기와 양고기를 한 트렁크 사 왔어. 최근에 어떤 전문가가 얼린 고기를 먹으면 좋지 않다고 해서 엄마가 매일 고기 요리를 하고 있어. 매일 고기만 먹었더니 몸에서 누린내가 나는 것 같아.” 신은지는 진유라가 지금 틀림없이 자신의 몸 냄새 맡기 위해 킁킁 걸이고 있을 거라는 것을 생각하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곧 겨울인데, 내가 털 있는 옷을 입고 나가면 양이 우리에서 튀어나온 줄 알 것 같아. 그러니까 빨리 와서 나 좀 도와서 고기 좀 먹어.” 신은지가 대답했다. “알았어.” 신은지도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어서 진유라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진씨 가문의 집은 습지 공원에 인접한 호수 한가운데 있는 섬에 위치해 있었다. 신은지는 차를 다리 위에 세우고 백화점에서 구입한 진유라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드릴 선물을 들고 걸었다. 최근 섬에 조성된 인공 관광지는 조명 쇼, 음식, 고성, 전통 공연으로 인기를 끌고 있었다. 매일 저녁 7시가 되면 그 도시의 자동차 번호판을 달고 있는 차는 관광지 안으로 들어가질 못했다. 이제 겨우 6시가 넘었는데 이미 붉은 조명들과 함께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나마 진씨 가문 집은 상업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고급 단지의 별장 단지에 살고 있어 조용한 편이었다. 신은지가 문을 두드리자, 이내 진유라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왔다. 왔어. 잠깐만!” 문이 열리자 신은지가 미처 들어가기도 전에 진유라가 뛰어나와 문을 쾅 닫았다. 진유라 어머니의 꾸짖는 소리가 문안에서 들려왔다. "나이도 먹을 대로 먹었는데 아직도 이렇게 천방지축이면 어떻게 해! 빨리 은지를 들어와서 앉게 해. 은지나 되니까 너랑 말 섞어주는 거지, 다른 사람이었어 봐. 당장 너와 관계를 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