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집에 이렇게 당당히 경호원들의 제재를 받지 않고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가족 아니면 친구밖에 없었다. 박태준은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다급히 팔에 얼굴을 비벼 시야를 가리고 있던 넥타이를 벗었다. 그런 다음 가장 먼저 신은지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그녀는 비교적 멀쩡한 상태였다. 하지만 문제는 박태준, 자신이었다. 풀어 젖혀져 있는 셔츠와 결박되어 있는 손과 발, 아주 가관이었다. 박태준은 점점 불안해졌다. 그는 한쪽으로 수갑을 풀며 한쪽으로 계속 밖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바닥에 카펫이 깔려 있던 탓에 발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계속 울어대는 핸드폰까지, 그가 파악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수갑을 푸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그제야 박태준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이 수갑은 진짜였던 것이다. ‘저번엔 잘 끊어지더니, 오늘은 왜 이러는 거야!’박태준은 자신이 진선호에게 또 속았음을 깨달았다.“망할 진선호!”박태준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문 쪽에서 고연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울리던 핸드폰 벨소리가 뚝 하고 멈췄다.“핸드폰이 왜 여기에….”박태준은 긴장에 몸이 뻣뻣이 굳어버렸다. “들어오지 마…!”다급히 외쳤지만, 가장 우려하던 상황이 펼쳐지고 말았다. 결국 고연우에게 이 모습을 들키고 말았다. 박태준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예의 밥 말아 먹었어? 들어오기 전에 노크할 줄 몰라?”고연우가 어색하게 말했다.“미안, 둘이 벌써 진도가 여기까지 나갔을 줄은 몰랐네.”그는 둘이 다시 만나고 있는 줄도 몰랐고, 함께 잘 정도로 관계가 발전했을 줄은 더더욱 모르고 있었다. ‘누구는 아직 서재에서 독방 신세인데 말이야…. 부럽다, 부러워.’그는 속으로 자기 신세를 한탄했다. 같은 여자라도 성향이 이렇게까지 다를 수 있다는 걸 고연우는 오늘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나 근시야. 어두워서 실루엣밖에 못 봤어. 하지만 아무리 너의 집이라도, 문은 닫고 하는
그림 속 여자는 갸름한 턱선에 얇은 눈썹, 입꼬리가 올라간 웃상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눈동자 속에 담긴 강력한 야망이 인상을 어둡게 만들었다. 신은지가 그려낸 초상화는 작은 반점까지 보일 정도로 매우 생동감이 넘쳤다. 강태민이 미간을 찌푸린 채, 유심히 그림 속 여자를 바라봤다.“이건 젊었을 적 모습이지만, 오관은 달라지지 않았을 거예요. 지금 나이 오십 좀 넘었으니까, 여기서 주름만 좀 더 늘었다고 보면 돼요.”신은지는 남포시에서 스치듯 한미나의 옆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정면은 아니었기에, 놓치는 부분이 있을까 두려워 젊었을 적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초상화를 받아들인 강태민이 말했다.“딱히 인상이 없네요.”아직 조사가 덜 된 상태였기 때문에, 강태민은 당장 답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엄마한테 그림 복원을 의뢰했던 사람도 이 사람이고, 절 만나겠다고 했던 사람도 이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신은지가 남포시에 있을 때 알아본 바를 강태민에게 말했다.“전에 그 두 남자가 절 찾으러 왔을 때도 이 여자 이름을 댔었어요.”“그래서 따라 차에 탔던 거예요? 모르는 사람을 그렇게 막 따라가다니, 목숨이 몇 개라도 되는 줄 아세요? 만약….”강태민이 잠지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앞으론 그러지 마세요. 아무리 복수가 중요하다고 해도, 자기 목숨보단 더 값질 순 없어요.”“좀 전에 하시려던 말씀, 뭐였어요?”신은지는 그가 머뭇거렸던 이유를 알고 싶었다. 하지만 강태민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의 시선에 이질적인 장면이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도 적혀 있지 않은 공백의 비석이었다. 신은지도 강태민을 따라 그 묘비를 살펴보았다.“뭔가 신분을 밝히기에 떳떳하지 못했던 걸까요?”신은지가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정보가 적혀 있어야 할 자리가 공백이라는 것 빼고는 특별할 게 없는 비석이었다. 하지만 신은지는 왠지 모를 호기심이 생겨 더 가까이에 비석을 들여다보았다. “음? 비석에 뭔가 붙어 있어요.”“붙어 있다고요?
가족란에 등록된 이름은 류정, 관계는 여동생, 전화번호는 010….결정적인 정보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은지는 관리소를 나오기 전, 잊지 않고 서류를 사진으로 남겼다. 류정과 한미나가 동인인물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인물인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올해 6월 6일, 이 사람이 다시 방문할 때나 되어서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전까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신은지가 한숨을 내쉬는 모습을 본 강태민이 옆에서 말했다.“이 부분은 사람 시켜 좀 더 알아보도록 할게요. 아직 배후가 명확해지기 전까진 최대한 몸을 사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신은지도 그의 말에 동의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알겠어요. 그럼 잘 좀 부탁드려요.”신은지와 헤어진 강태민은 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강태석을 만나러 갔다. 강태석의 집은 도시 외곽에 위치한 별장으로, 지난 2년 사이에 새로 개발된 주택 단지였다. 다만 위치가 외진 탓에 입주율이 별로 높지 않아 조용했다. 육지한은 부드럽게 차를 세운 뒤, 경비실을 향해 걸어갔다.“어르신, 집에 계시죠?”경비원들은 단번에 육지한과 그의 옆에 함께 온 강태민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강태민은 강씨 가문의 진짜 실세라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경비원들이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계세요.”육지한이 강태민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강태민은 망설임 없이 운전석에 탑승해 별장 안쪽으로 차를 몰고 갔다. 그 모습을 본 경비원 한 명이 재빨리 무전기를 들었다. 별장 내부 인원에게 보고를 넣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때, 육지한이 그의 팔을 부여잡았다.“어르신이 누군지 몰라요? 형이 동생을 좀 만나겠다는데, 그쪽이 중간에서 왜 끼어들어요?”육지한이 무전기를 빼앗으며 말했다.“저희도 당연히 이러고 싶지 않죠. 하지만 위에서 명령이 떨어진 이상, 아래 사람은 따를 수밖에 없어요. 저한테 딸린 식솔을 생각해서라도, 제발 좀 너그러이 넘어가 주세요.”경비원이 울상을 지으며
신은지는 가는 길 내내 계속 그 무덤에 대해 생각했다. 단순히 이름이 같은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엄마의 무덤인 걸까? 만약 그렇다면, 누가 그것을 세웠을까? 무슨 목적으로?빨간 신호등이 켜졌다. 신은지는 차를 멈추고 다시 한번 서류를 쳐다보았다. “류정….”그런데 이때 갑자기 박태준한테서 연락이 왔다.“응.”“어디야?”박태준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거야 당연히….”신은지가 막 답을 하려던 찰나, 전화 너머 진유라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지야, 너 들켰어. 이 나쁜 놈이….”진유라가 갑자기 하던 말을 멈췄다. 박태준이 맞은 편에서 테이블 위를 가리켰기 때문이다. 테이블 위엔 온갖 케이크와 음료수가 놓여 있었다. 진유라는 울상을 지으며 다시 말을 고쳤다. 뇌물을 받아먹은 대가였다.“박태준 씨한테 속았어.”진유라는 분노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지금 어딘데?”신은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위치 보내줄게.”신은지에게 위치를 보내 준 다음, 진유라는 다시 박태준을 노려보았다. “뭔가 사정이 있었을 거예요. 함부로 거짓말할 얘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히 애 잡지 마시고….”정말 예정에 없었던 일이었다. 진유라는 그저 친구 면접에 따라왔을 뿐이었다. 하필이면 신은지가 그녀의 이름을 대고 거짓말했을 줄은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알았더라면 미리 대비라도 했을 텐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협조하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역시 사업가는 입이 청상유수라고, 함부로 믿는 것이 아니었다.“가보세요.”박태준이 차갑게 말했다.“….”진유라는 속으로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비록 그녀도 여기에 남아 병풍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자기 발로 가는 것과 쫓겨나는 것은 달랐다.“화장실 들어갈 때 얼굴이 다르고, 나갈 때 얼굴이 다르다고…. 아까는 그렇게 열정적으로 같이 차 마시자고 하더니, 너무 하시는 거 아니에요?”자리에서 일어난 진유라가 코웃음을 치며 그를 바라봤다.“연기자 하셔도 되겠어요. 얼굴 바꾸는 실력이 아
신은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6월 13일이 무슨 날인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단오절? 그건 좀 더 빨랐나?”박태준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우리 혼인 신고한 날이잖아.”그러자 신은지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우리 이혼한 거 아니었어?”막상 말을 내뱉고 나니, 신은지도 아차 한 기분이 들었다. 이혼한 것도 맞지만, 최근에 다시 합친 것도 맞기 때문이다. “그걸 기억하고 있다니.”딱히 비꼬는 말은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었다. 부부의 연을 맺고 3년, 그동안 박태준은 한 번도 결혼기념일을 챙긴 적이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혼인신고 날짜도 기억 못할 줄 알았다.“당연하지. 그걸 어떻게 잊어?”박태준이 삐진 듯, 심통 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왜 전엔 한 번도 얘기하지 않았어?”결혼한 상대를 마음에 두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신은지는 이해되지 않았다. 3년 내내 데이트는 물론이고 단둘이서 식사한 적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매년 사람 시켜서 선물 보내 줬잖아.”신은지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언제?”신은지는 과거를 떠올려 보았다. 박태준은 그녀를 항상 차갑게 대했지만, 물질적인 부분에서는 아낌없이 지원해 줬었다. 그 덕분에 결혼생활 내내 그녀는 부족함이 없이 생활했었다. 계절마다 매장에서 새 시즌을 준비하듯, 새로운 옷들이 드레스룸을 채웠었다. 그러다 문득, 유독 6월에만 드레스룸이 두 번 바뀌었던 것이 떠올랐다. 당시 이 부분이 의아하긴 했으나, 딱히 전달받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그러려니 지나갔었다. 거기에 선물이 포함되어 있었을 줄이야,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런데 막상 넌 리액션도 없고, 선물은 포장지도 뜯지 않은 채 드레스룸에 방치되었다고 하지, 내 기분이 어땠는지 알아?”“….”그녀의 입장에선 억울했다. 옷이 한두 벌도 아니고, 매번 바뀌는데 어떻게 다 확인한단 말인가?“말없이 보내면 내가 어떻게 알아? 최소한 쪽지라도 보냈어야지. 그것도 아니면, 다른 사람한테 대신 말 전달해도
박태준은 신은지에게 매우 다정하고 사려 깊게 대하지만 애정표현을 거의 하지 않았다. 아마도 박태준이 다른 남자들처럼 달콤한 말을 잘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말 한마디가 유난히 마음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신은지는 자신의 생각을 흐트러뜨리는 박태준의 눈빛을 피하며 손을 뺐다. 박태준은 그녀의 손을 놓기는커녕 더욱 꽉 잡았다. "내가 널 그렇게 오랫동안 좋아했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할 말이 없어?” 박태준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말했지만, 이 질문을 하며 얼마나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인지는 자신만이 알 것이다. 그는 신은지의 대답을 기다렸다. 신은지는 입을 다물고 일부러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겁주고 싶었지만 표정관리를 못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바보, 고백을 엉뚱한 사람한테 하면 어떻게 해.” "네가 거기 있는 걸 보고 지나갔는데...... 생각도 못했어.” 정말 우연의 일치일 것이다. 신은지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화가 나 말했다. "하늘이 어두워져야 고백할 수 있는 남자에게는 아내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늘에 계신 분이 생각하셔서 우리를 인연으로 만들어 주시지 않은 것 같네.”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오지만 그는 정말 바보 같은 사람이다. 박태준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눈 속에 드러난 자신의 생각을 감췄다. "어둠 속에서 고백하는 이유는 네가 분명히 거절할 것을 알기 때문이야.”비록 박태준이 시치미를 떼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그는 슬프고 속상했지만 이미 오래전 일이다.그후, 박태준은 전예은과 사귀었고 비록 그가 감정이 없었다고 말했지만, 돈과 자원을 주며 총애하는 것은 아무래도 좀 달랐을 것이다.그러나 박태준의 이런 모습을 본 신은지는 마음이 약해져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증서를 받으면서 ‘사랑의 날’ 이라고 하지 않았어? 나한테 하루 종일 커피만 사줄 생각이야?”박태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나며 말했다."아직 시간은 이르니 밥부터 먹고 영화나 보러 가자, 어때?”"그래."11시가 넘어서자 해가 중천에 떳다.문을 열
박태준은 어이가 없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나는 단지 영화 속의 배신자와는 내가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어. 나는 전예은과 키스도 잠도 자지 않았고 결혼에 대해 이야기한 적도 없어!” “……” “내가 전예은한테 잘해줬던 이유는 전예은 아빠 때문에 그랬어. 그리고 나는 네가 질투하는지 안 하는지도 보고 싶었어.” 결국 신은지는 질투는 하지 않았고, 그 모습에 오히려 박태준이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었고, 완전히 제 발등을 돌로 찍은 것과 다름없는 결과를 낳았다. 신은지는 일어나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질투했어.” "응?” "내 말은, 너 정말 멍청하구나……” 신은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태준은 벌떡 일어나 그녀를 품에 껴안았다. 박태준은 뒤에서 신은지를 껴안고 턱을 그녀의 어깨에 대며 말했다. "실버, 나 방금 들었어.” "그런데도 뭘 물어.” "다시 한번 듣고 싶어. 넌 나에게 달달한 말은 해 주지도 않을뿐더러 날 좋아한다고 말한 적도 없어. 결혼생활에서 말한 적도 없어. 그때 내가 너에게 잘하지 못하지는 했지만, 우리가 다시 만나고 있는 지금도 너는 나에게 그런 말을 단 한 번도 해주지 않았어.” "내가 널 싫어하면 어떻게 재결합을 해? 내가 정신이 나갔어?” 하지만 박태준은 포기하지 않고 보챘다. "내가 스스로 느끼는 것과 직접 듣는 것은 달라.” 그 순간 영화관 작업복을 입은 사람이 모습이 문 앞에서 왔다 갔다 했다. 신은지는 급히 자신의 허리에 감겨 있는 박태준의 손을 끌어내리며 말했다. "빨리 나가자. 청소 아주머니가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어. 이 깜깜한 곳에서 우리가 오랫동안 나가지 않았으니 무슨 낯간지러운 일이라도 하는 줄 오해하겠어.” 박태준의 팔은 마치 무쇠처럼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그는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하자 신은지에게 키스하기 시작했다. 박태준의 입술이 신은지의 목선을 따라 그녀의 얇은 귓불에 닿았다. 박태준의 과감한 행동에 신은지는 온몸을 긴장한 채, 손으로 그의 탄탄한 팔 근육을
박태준은 진선호의 어이없는 논리에 비웃으며 말했다. "차 빌려줬을 뿐인데 내가 잘못했다?” "나는 당시에게 몸을 다쳐 교통법상 운전을 할 수 없었어요.” "허...” 박태준은 차갑게 웃었다. “정말, 화를 낼 가치도 없게 만드는 재주가 있네요.” 신은지는 어이없다는 듯 양미간을 비비고 있었고 두 남자는 전생에 원수라도 만난 듯 말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한테 뭘 도와달라는 거예요? 정말 이 사람을 신당동으로 데려갈 수는 없잖아요? "아마 이 여자가 기억을 잃은 이유는 무슨 일을 마주하기 싫어서 그런 것 같아요. 내가 남자라서 이런 게 이해도 잘 안 되고 그래서 은지 씨가 좀 말해 보라고요.” 진선호는 사람이 이렇게 기억을 쉽게 잃을 수 있다는 걸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신은지는 거실 쪽을 보았다. 신은지는 신시은에 관해 알지도 못할뿐더러 사교적인 스타일도 아니라 어떻게 신은지를 설득해야 할지 몰랐다. "경찰서에 데리고 안 갔어요?” "갔었어요. 그런데 저 아가씨가 교통사고로 머리가 어떻게 된 거지 경찰한테 자기가 내 약혼녀라고 말했어요. 나는 너무 싫어서 그냥 버리고 오고 싶었다고요.” 당시 신시은의 진술을 녹음한 사람이 마침 여경이었는데, 여경은 진선호를 쳐다보며 신시은을 데려가서 잘 말하라고, 헤어지더라도 잘 헤어지라고 말했다. 그 여경이 신시은 한쪽 말만 믿는 것도 당연했다. 신시은의 겉모습이나 보이는 성격은 모두 어른들이 좋아할 만한 귀엽고 착한 여자처럼 보였다. 만약 진선호가 피해자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순진해 보이는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웃음을 참지 못한 신은지는 진선호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황급히 고개를 숙였지만, 신은지의 들썩이고 있는 어깨가 스스로를 돕지 못했다. 한때 학교에서 학생들 사이에 군림하며 선생님들을 화나게 만들었던 진선호가 어린 아가씨에게 말려들게 될 줄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신은지가 물었다. "무슨 프로그램을 봐요?” "아무거나요. 그냥 TV를 켜고 아무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