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전까지 슬펐던 마음이 모두 날아가 버렸다. 신은지는 미간을 누르면서 진선호를 노려 보았다.“마지막은 좀 좋게 가면 안 돼요? 다시 침대에 눕고 싶은 거냐구요.”진선호는 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이건 모르시겠죠. 원래 남자란 갖고 싶은 걸 손에 넣으면 도전욕이 사라져요.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다른 여자에게 눈이 돌아가요. 그 전에 위기감을 조성하는 겁니다. 은지 씨 주위에는 항상 다른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면 절대로 한눈팔지 못할 거예요.”“...”신은지는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왜 자신도 같이 욕하시는 거예요?”박태준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향했다. 계단에 서 있는 두 사람은 석양 빛에 한 몸이 된 것 같았다. 출중한 외모의 남녀는 커플처럼 어울렸다. 나란히 서있는 모습은 마치 한 폭 그림 같았다. 순간 넘을 수 없는 선이 생겼다는 느낌이 들었다.그는 두 사람을 보면 볼수록 화가 났다. 분명 자신이 신은지의 남편이자 남자 친구이다.하지만 자신과 신은지가 어울린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줄곧 자신에게 까칠한 신은지의 모습 때문에 서로 어울린다는 것도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박태준은 계단 위로 올라가 신은지 옆에 섰다. 억지로 두 사람이 그려진 그림 속에 들어갔다.따뜻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심지어 석양의 빛도 공격적이게 보였다. 신은지가 설명을 하기도 전에 박태준이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넣었다.상대가 거절할 까봐 오히려 힘을 주어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열기 가득한 품 안에 잡히고 말았다.박태준은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회사로 마중 나온다고 하지 않았어?”신은지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자신이 언제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인가. “박 대표님, 아직도 유치원 다니시나 봅니다? 퇴근하면 누가 데리러 와줘야 직성이 풀리나 봐요.”진선호는 옆에서 그를 더 자극했다. “은지 씨, 자신을 보살필 수 있는 남자를 찾아야 해요
상대방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온몸이 다 아파요.”진선호: “…”진선호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이지만 지금 조금 흔들렸다. 뭐가 잘못되었는지 지난 20여 년 동안 잘 풀리다가 올해 갑자기 그동안 누적된 불운이 전부 터진 것처럼 재수가 없었다. 이 일은 진선호의 책임이 아니지만 해야 할 일은 하지 않을 수 없었다.진선호는 고개를 돌려 사방을 둘러보았다. 지금은 차가 없지만 차 한 대만 오면 그와 그녀는 여기서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진선호는 다리를 다쳐 쪼그려 앉을 수 없었다. 그래서 허리를 굽혀 물었다. “움직일 수 있습니까? 심하게 다치지 않았다면 길가로 부축해 드릴게요. 거기서 구급차를 기다립시다. 길 한복판에 있는 건 너무 위험해요.”이렇게 말을 하고 있을 때, 손에 있던 전화가 연결되었다.진선호: “안녕하세요. 여기 운해대로인데 구급차가 한 대가 필요합니다. 부상자…”진선호는 고개를 숙여 상대방의 증상을 묻어보려고 했는데 휴대폰을 든 손이 붙잡혔다. “저 괜찮아요. 병원에 가지 않아도 돼요.”여자는 바닥에서 일어나 눈앞을 가리고 있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초라하지만 환하고 예쁜 얼굴을 드러냈다. 갸름한 얼굴에 큰 눈망울, 이목구비는 또렷하고 아름다웠다. 길고 촘촘한 속눈썹이 내리깔고 있는 눈을 가려서 눈 밑의 정서를 알 수 없었다.진선호는 그녀가 멀쩡하게 서 있을 수 있고 얼굴에도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이 없는 것을 보고 부상이 심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래도 다시 물었다. “병원에 가보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 만약 내상이라도 있으면.”“…”신시은은 진선호를 한 번 쳐다보더니 바닥에 닳아 피투성이가 된 팔꿈치를 그에게 내밀었다. “팔과 무릎이 까졌어요. 붕대 좀 감아주세요.”차에 구급상자가 없어서 진선호는 곧바로 사람을 진료소로 데려갔다.붕대를 감은 후, 진선호는 의사 책상 위에 있는 메모지로 자신의 전화번호를 적어서 신시은에게 건네주었다. “그쪽이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했으니 배상으로 1
박태준은 얼굴을 신은지의 어깨에 묻었다. 따뜻한 몸은 그녀의 등에 밀착했고 건조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여자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 안았다.짜릿한 촉감에 신은지는 움찔했다.남자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네가 지난번에 말했던 거.”“??”지난번에 말했던 거?신은지는 무엇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럴 때 곰곰이 생각하지 않아도 박태준의 뜻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싫어…”신은지도 자신이 왜 거절했는지 알 수 없었다. 몸은 확실히 달아올랐지만 심리적인 이유 때문인지 머릿속이 하얘졌고 모든 대답과 반응을 본능에 맡겼다.신은지가 거절의 말을 채 하기도 전에 박태준은 이미 그녀를 당겨서 침대에 눕혔다.침대 변두리에 무릎을 꿇고 신은지와 마주 보고 있는 박태준의 어두운 눈동자에서는 성난 파도 같은 어둠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박태준에게서 강한 압박감과 정복욕을 느낄 수 있었고 키스로 인해 붉어진 입술은 신은지의 코앞에 있었다.박태준은 참고 있었다.박태준의 팔은 신은지의 몸 양쪽에서 버티고 있었는데 그는 손가락을 조여 주먹을 쥐었다. 목의 핏줄은 성난 듯 튀어나와 있었고 가슴은 심한 기복을 이루고 있었다. 거친 숨소리는 조용한 방에서 메아리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은지, 너도 날 원하고 있어!” 긍정문이었다.신은지는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박태준의 시선을 견딜 수 없었다. 뜨겁고 진지한 눈빛에는 그녀만 보였다. 그 속에는 조롱과 농담 등이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마치 무슨 엄숙한 이야기라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그녀는 머리를 옆으로 돌렸다.신은지가 피하려는 것을 느낀 박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다시 되돌려 강제로 그와 눈을 마주치게 했다. “넌 나를 속일 수 없어. 내가 너랑 키스할 때 넌 즐기고 있었어. 너도 나를 원하고 있어!”“…”신은지의 얼굴은 몹시 뜨거웠다. 하지만 거기가 더 뜨거웠다.박태준의 말 하는 글자 하나하나가 폭죽처럼 그녀의 머릿속에서
그는 박태준과 신은지가 이혼한 줄 몰랐다. 그들이 함께 온 것을 보고 당연히 아직 부부라고 생각했다.나유성이 바로잡았다. “삼촌, 이 두 사람 이미 이혼했어요.”“…” 나유성의 삼촌은 어색해서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그리고 나유성에게 고개를 돌려 또 한바탕 퍼부었다. “됐다. 넌 병원에 가만히 있어. 난 돌아가서 네 숙모 곁에 있어 줘야겠다. 그 지갑은? 내가 내려가는 김에 버려줄게.”입을 잘못 놀린 복수였다.나유성은 입술을 오므렸다. “안 버릴 거예요!”“왜 이렇게 아끼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준 선물이냐?”“… 네,”나유성의 삼촌은 떠나려다가 이 말을 듣고 희한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조카는 성격이 온화하고 예의 바른 신사지만 여자 복이 형편없었다. 그는 조카가 연애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언제? 됐다! 시간 내서 가족들에게 보여줘. 네 엄마 너의 혼사 때문에 머리카락까지 하얘졌어!”나유성은 고개를 들고 신은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워낙 성격이 온화해서 그의 눈빛은 무엇을 보나 애틋한 느낌이었다.지금 감정이 듬뿍 담긴 시선은 ‘바로 이 사람이다’라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녀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데려갈 수 있어요.”나유성의 시선이 신은지에게로 향했을 때, 박태준은 앞으로 한 걸음 나서서 신은지의 앞을 막았다. ‘이 새끼 흑심 품고 있을 줄 알았어! 진작에 이 새끼 혼자 병원에 둘걸…’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공기 중에 번쩍이는 불꽃이 튀는 것만 같았다.나유성의 삼촌은 이 팽팽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하고 박태준에게 인사를 하고 떠났다.그가 떠나자 박태준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박태준은 손을 내밀었다. “지갑은?”나유성은 침대에 기대어 이불에서 손을 넣어 검은색 지갑을 꺼냈다. 브랜드 제품이 아닌 평범한 지갑이었다. 겉보기에는 새것처럼 보였지만 스타일을 보면 오래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박태준은 뒤에 서 있는 신은지를 바라보며 원망하는 말투로 물었다. “네가 줬어?”신은지는 예전에 나유성에게 지갑을 선물한 적이 있었
이미 알고 있는 일이어서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었다.그래서 신은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업무적인 일이야. 가자.”신은지는 배를 만지며 ‘배가 고프다’고 하려던 말을 “아직 저녁도 못 먹었어.”라고 바꾸었다.이 단어는 머리에 야한 생각밖에 없는 박태준에게 암시적인 의미가 될 것이다.방금 그 여자가 수상 쩍이게 신은지를 한쪽으로 끌고 가서 얘기한 것을 보면 분명 업무 얘기를 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신은지가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아 하는 것을 눈치채고 박태준은 마음이 불편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박태준에게는 아직도 '계약 남자친구'라는 꼬리표가 달려있어서 그에겐 아직 자격이 없었다.“가자. 뭐 먹고 싶어?” 박태준은 먹을 것보다 신은지의 손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신은지의 손을 잡고 싶었다.방금 병실에서 신은지가 손을 뗀 속도는 로켓으로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였던 것을 박태준은 기억한다.박태준이 손을 들었을 때 신은지는 이미 빠른 걸음으로 멀리 걸어갔다. 손을 잡기는커녕 그녀의 옷자락에도 닿지 못했다.신은지의 뒷모습을 보며 박태준은 맥이 빠져 뒤에서 따라갔다. “내가 그렇게 창피하냐?”신은지는 소 한 마리를 삼킬 수 있을 만큼 배가 고파서 박태준의 말에 숨은 뜻을 곰곰이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럴 리가? 너처럼 잘생긴 얼굴도 사람들 앞에 내놓는 게 창피하다면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어?” 박태준은 이 말을 듣고 침울하던 기분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입꼬리는 이미 올라갔지만 애써 얼굴을 굳히며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근데 왜 고연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렇게 빨리 손을 뗐어?”박태준은 이렇게 말하면서 신은지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순조롭게 그녀의 부드러운 손을 손바닥에 감싸 쥐었다. 순간 남자의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만약 고연우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박태준을 주인 만나서 기뻐하는 개로 비웃었을 것이다.신은지는 두 사람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공개하지 않기로 약속했잖아.”박태준: “…”
신은지는 아무리 알아봐도 실마리조차 찾지 못한다는 것을 느꼈다. 한 씨 아주머니는 지난번 남포에서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후로 한 씨 아주머니는 허공에 사라지듯 소식이 끊겼다. 신은지가 고액 투자해 구한 탐정조차도 한 씨 아주머니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 초조해진 신은지는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아버지한테 물어봤어?” 진유라는 신은지에게 물었다. “물어봤었지. 듣자마자 모른다고 하더라.” 신은지는 말했다. “그때는 증거가 없었지만 지금은 어머니 일기장이 있으니 절대 오리발 내밀지 못하실 거야. 꿍꿍이가 있는 사람한테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거야.” “아버지는 지금 구치소에서 판결을 기다리고 있어서 변호사 외에는 아무도 만날 수 없어.” 신은지는 머리카락을 넘기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일은 박태준 아니면 안 돼. 아마 박태준이 알았으면 지난번에 너희 아버지를 반쯤 죽였을 수도 있어.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너희 아버지는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았다는 거야. 면회 갔을 때 네가 물어본 질문에 대답 하나도 안 했잖아.” “이 얘기는 다음에 다시 하자.”신은지는 애매모호하게 대답했다. 신은지는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박태준을 이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강 씨 집안의 권력자인 강태민이 위험하다고 했으면 정말 위험한 것이다. “박태준이랑 화해한 거 아니야? 네 엄마가 박태준 엄마나 마찬가지 아니야? 도와주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진유라는 신은지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아직 계약 남자친구 기간이 안 끝났어. 서로 안 맞으면 헤어질 수도 있어. 그러니까 최대한 엮이지 않는 게 좋아.” 신은지와 박태준은 3년 동안 부부로 지내왔다. 하지만 박태준은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오거나,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박태준은 항상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대표, 신은지는 차를 따라주는 직원이었다.두 사람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신은지가 밥을 전달해 주는 몇 분 밖에 안 됐다.때문에 박태준은 신은지에 대해
신지연은 진유라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건 본인 아니에요? 그쪽이랑 신은지는 한통속이잖아요. 천박한…” 이때, 진유라는 신지연의 말을 더 이상 듣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냅킨을 신지연의 입에 넣어버렸다. 진유라는 식당에서 나올 때 손을 닦고 있다가 허겁지겁 나오는 바람에 냅킨을 들고나왔다. 마침 버릴 곳이 없어서 찾고 있었는데 유용하게 잘 사용하게 되었다. 잠시 후, 진유라는 화장실에서 주저앉아서 무언가 열심히 줍고 있는 신은지를 보았다.“은지야, 화장실 바닥에 주저 앉아서 뭘 그렇게 열심히 찾고 있어?” 진유라가 말했다.“머리카락…”신은지는 본인이 예상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지난번 강이연이 신당동에 갔을 때 신지연에게 둘째 큰아버지와 친자 확인을 해보라고 권유했다.그때 당시 신지연은 자신이 마치 강 씨 집안 혈육이었으면 좋겠다는 표정이었다.신지연의 성격상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난리를 피울 것이다. 하지만 머리카락 몇 가닥으로 본인임을 증명할 수 없다. 이때, 방금 전 자리를 떠났던 신지연이 다시 신은지 앞에 나타났다. 신지연은 신진하가 구치소에 들어간지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나타나 신은지를 가만히 두지 않겠다며 신은지를 보자마자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며 난리를 피웠다.“뭐?” 진유라는 신은지에게 말했다. “신지연 머리카락 남았는지 봐줘.” 신은지는 진유라에게 말했다. “아직 있네!” 진유라는 신지연의 옷에서 머리카락을 한 움큼을 잡으며 말했다. “머리숱 많아서 부럽다!” 진유라는 본인 머리카락을 만지며 비교했다. “대머리도 아닌데 머리카락이 없을 리가 있어요? 뭐 하는 거예요? 신은지 도와주고 출세라도 할 작정이에요? 꿈 깨세요. 요즘은 석사 정도는 나와야지, 알아주지도 않는 학교 나와서는 아무 쓸모 없어요.”신은지는 신지연을 한심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신지연, 오자마자 내 머리끄덩이를 잡은 걸 보면 분명 또 무슨 나쁜 짓을 하려고 했던 게 분명해.” 신은지의 생각이 맞다. 진유라는 신지연의
진영웅은 어두운 얼굴로 경찰서에서 나오는 박태준을 보고 당황했다. 잠시 후, 박태준은 먼저 나간 신은지가 차에 없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사모님은?”“방금 전화를 받자마자 택시 타고 가셨습니다.” 진영웅은 신은지가 떠난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안 붙잡고 뭐 했어?” “붙잡았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붙잡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무슨 수로 써서라도 붙잡으려고 했는데 사모님이 따라오면 아프리카로 보낸다고 하셨어요.” 진영웅은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누구 전화를 받고 간 거야?” 박태준은 별 기대 없이 물었다. 진영웅은 입을 꼭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의 표정은 알고는 있지만 절대 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입 꼭 다물고 뭐해? 빨리 말해.” “대표님께서 뒷조사하라고 하셨던 그 늙은이요. 사모님께서 ‘강 씨 둘째 큰아버지’라고 말씀하는 것만 들었습니다. 그 뒤로는 거리가 멀어서 들리지가 않았습니다.” “너는 말이 너무 많아.” 박태준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 박태준은 본인과 재혼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없는 신은지가 강태민과 가깝게 지내는 것을 보고 한 가지 확신했다.바로 신은지는 아버지의 사랑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이가 많은 남자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신은지가 박태준과 사귀는 것은 젊어서 체력도 좋고,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와주기 때문이다. 늙은 노인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 진영웅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진영웅은 그야말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어차피 신은지는 떠났으니 두 사람이 입씨름을 할 필요는 없다. 이때, 경찰서에서 나온 진유라는 입구에 서서 안 좋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박태준과 진영웅을 마주쳤다. 진유라는 주변을 살펴본 후 물었다. “은지는요?”박태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진유라 앞에서 애서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은지가 저랑 재혼하고 싶지 않다고 그랬습니까?”박태준의 말투는 쌀쌀맞았지만 예의를 갖췄다. 옆에 있던 진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