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지는 작업 도구를 가지러 갔다. 준비를 해준다고 했지만 신은지는 본인 것을 쓰는 것이 편했다. 별장에서 나오자 진유라는 신은지를 붙잡고 조용히 말했다. “은지야, 이 별장 느낌이 안 좋아. 내가 방금 1층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가정부가 나를 도둑 취급하면서 화장실까지 따라왔다니까? 그리고 내가 대충 봤는데 숨겨져 있는 cctv가 5개 정도나 돼. 아마 숨어 있는 게 더 있을 거야.” 진가 집안 산하에 기술 회사가 있기 때문에 진유라는 cctv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정당한 일이면 cctv를 이렇게 많이 설치했겠어? 집안 곳곳에 cctv가 설치되어 있어서 아마 모기가 들어와도 암컷인지 수컷인지 알 수 있을 정도야.”신은지도 마음이 무거웠다. 신은지는 상대가 스스로 어머니와의 친분을 밝혔기 때문에 옛날 일을 쉽게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방금 전 상대의 태도를 보니 험난한 길이 예상되었다. “네 말이 맞아.” 신은지는 진유라의 말에 수긍하며 말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차를 타고 산 아래로 내려오는 길에 쏜살같이 지나가는 진선호의 차를 보았다.진선호는 좁은 산길에서 과속을 했다. 진유라는 자신을 향해 질주하는 진선호의 차를 피할 수 없어 부딪힐 것 같았다. 진유라가 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이때, 진선호도 진유라 차 바로 앞에서 급정거를 했다. 두 사람이 급정거를 하자 바닥에 타이어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깜짝 놀란 진유라는 핸들을 잡은 채 멍하니 있었다.그리고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다행히 사고가 나지는 않았다. 진유라는 맞은편 차가 매우 낯익었다. 잠시 후, 진유라가 한참 생각에 빠졌을 때… 사이드미러로 뒤차에서 사람이 내리는 것이 보였다. 키가 훤칠한 진선호는 차에서 내려 성큼성큼 진유라의 차를 향해 걸어왔다. 진선호는 평소 장난기 많던 표정은 사라지고 매우 진지했다. 잠시 후, 진선호는 조수석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은지를 훑어보고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말했다.“무슨
“쯧쯧…”고연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내둘렀다. 두 사람은 워크숍에 직접 참여한 적은 없지만 눈으로는 많이 보았다. 게임은 워크숍에서 빠질 수 없는 항목 중 하나이다. “유성이가 워크숍을 하는 게 이번이 처음이지? 되게 적극적이네? 나도 가서…” 박태준은 고연우의 말을 듣지도 않고 앞으로 쏜살같이 뛰어갔다. 신은지는 게임에 적극적으로 임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동료들이 옆에서 ‘절대 떨어뜨리지 마! 한 사람 밖에 안 남았어, 조금만 힘내!’라며 응원했다. “A조 파이팅! 은지 씨, 나 대표님, 보너스는 두 사람한테 달려 있습니다! 절대 떨어뜨리면 안 돼요!”동료들의 응원에 힘을 입어 승부욕이 생긴 신은지는 긴장감 속에 열쇠고리를 나유성의 빨대에 옮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열심히 호흡을 맞췄다. 하지만 빨대가 힘이 없어서 자칫 잘못하다가 열쇠고리에 찌그러질 것 같았다. 긴장감은 더욱 고조되었다. 오늘 날씨는 덥지 않아 에어컨을 틀지 않아서 신은지의 손에서 땀이 났다. 하지만 신은지는 집중했다.신은지가 어렵게 나유성 빨대로 열쇠고리를 걸려고 할 때, 누군가 신은지의 팔을 잡아당겼다. 열쇠고리는 ‘툭’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떠들썩했던 현장 분위기는 순간 마치 일시정지를 누른 듯 조용해졌다.그리고 모두들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박태준과 진선호가 양쪽에서 신은지의 팔을 잡고 있었다.두 사람은 성격이 아예 상반되지만 지금 이 순간 얼굴 표정은 얼음장처럼 싸늘했다. 나유성은 입에 물고 있던 빨대를 빼고 말했다. “워크숍에 관련 없는 사람은 모두 나가 주세요. 아니면 경호원 부르겠습니다.” 이전에는 여자 셋이었지만 지금은 남자 셋이다. 게다가 세 남자의 팽팽한 신경전을 보아 자칫 잘못하다가 몸싸움이 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여주인공인 신은지는 세 남자에게 선택받았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차라리 쥐구멍에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눈치 빠른 사회자는 직원들을 데리고 옆방으로 옮겨 워크숍을 계속해서 진행했다.현장에는 신은
박태준이 신은지를 데려가자 나유성과 진선호도 뒤쫓아갔다. 이때, 고연우는 소파에 벌떡 일어섰다.나유성과 친분이 있는 고연우는 이런 일에 끼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막아볼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고연우가 두 사람에게 다가가자 진선호가 비웃으며 고연우 앞을 가로막았다.고연우는 진선호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진선호 씨, 저희 이야기 좀 할까요?”진선호는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웃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무슨 이야기요? 민아 이야기요?”고연우는 방금 전 공손함은 사라지고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정민아 말입니다. 정씨 집안이랑 진씨 집안은 명절에 인사하는 사이지 않습니까? 민아가 집안에 인정을 받았을 때 제가 경인으로 데려왔어요.” 고연우는 전혀 모르고 있던 이야기다. 고씨 집안과 정씨 집안의 사이는 좋다. 하지만 진씨 집안은 전혀 상관이 없다. 게다가 진선호는 대학교도 군사학교로 진학해 기숙사 생활을 했다. 집안 어른끼리는 아는 사이일 수 있지만 자식들 끼리는 그저 인사만 하는 사이에 불과할 것이다. 진선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매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매부’라는 소리에 화가 누그러진 고연우는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 “별말은 아니에요. 빨리 태준이 따라가보세요. 아마 진짜 법원 가는 건 아닐 거예요.”잠시 후, 진선호가 박태준 뒤를 거의 따라잡았을 때 나유성이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잘생긴 도련님 나유성은 잔뜩 찡그린 얼굴로 돌아왔다. “뭡니까?” 나유성은 진선호에게 대답하지 않고 다른 출구로 향했다. 진선호는 굳게 닫힌 문을 보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유성을 따라갔다. 잠시 후, 뒷문으로 나온 진선호는 나유성이 왜 돌아 나왔는지 알게 되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금색 손잡이에는 자물쇠가 걸려있었던 것이다. 물어보지 않아도 누가 한 짓인지 알 수 있었다. 박태준, 정말 쓰레기만도 못하다! 밖으로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지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유성은
박태준 말로는 전망대였지만 사실 텅텅 빈 공터였다. 두 사람도 이른 시간에 왔지만 이미 사람들로 북적거렸다.달을 보러 온 사람들은 등산 장비까지 갖추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올라왔다. 아무 준비도 하지 않고 빈손으로 온 박태준과 신은지와는 완전히 달랐다.다른 사람들의 눈에 두 사람은 달을 보러 오는 사람으로서 자세가 되지 않아 보였다. 한 시간 동안 산을 올라 피곤한 신은지는 박태준을 외면한 채 제일 깨끗한 의자를 찾아 앉았다. 하지만 산꼭대기에 있는 제일 깨끗한 의자도 그다지 깨끗하지 않았다. 요즘 같은 날씨에는 햇빛이 없기 때문에 찬 바람을 맞으면 감기 걸리기 쉽다. 박태준은 외투를 벗어 신은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깔고 앉아. 산꼭대기라 바람이 차.” 산에 올라오면서 땀이 나 외투까지 벗은 신은지가 박태준의 옷이 필요할까?신은지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필요 없어. 나 안 추워.” 박태준은 신은지의 손을 끌어당겨 의자에 겉옷을 깔아주며 말했다. “산 꼭대기는 기온이 빨리 떨어져. 너 감기라도 걸리면 내가 업고 내려가야 되잖아.” 잠시 후, 박태준은 신은지의 눈빛에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말했다. “네 옷도 입어.” 신은지는 반대편 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박태준, 말하지 말고 저리 가. 아니면 천구가 너 때문에 열받아서 달을 먹으러 오지 않을 거야.”고대 신화에는 ‘천구가 달을 먹다’라는 신화가 있다. 박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시간 있으면 책 좀 읽어. 옛날에는…”신은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박태준의 입을 막으며 말했다. “박태준, 입 좀 다물어 줄래? 평소 너처럼 열 마디 물어봐면 ‘응’이라고 한 마디만 해.” 신은지의 손은 매우 부드럽고 향긋한 핸드크림 향이 났다. 게다가 아마 산에 올라오면서 더웠기 때문에 손에 열기도 있었다. 신은지보다 키가 큰 박태준은 신은지를 내려다보았다. 신은지는 별처럼 빛나는 눈동자로 박태준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신은지의 눈빛은 이혼하기 전에 영혼 없던 모습과는
좁은 산길에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신은지는 박태준의 손을 잡고 앞사람의 손전등 불빛을 따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핸드폰 배터리가 없으면 구조 요청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핸드폰 플래시를 사용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사람들의 생각은 모두 같았다. 지금까지 핸드폰을 보면서 달이 뜨기만을 기다렸기 때문에 이미 배터리가 몇 퍼센트 남아 있지 않았다. 이때, 신은지는 갑자기 오른쪽 어깨가 어딘가에 부딪히는 것을 느꼈다. 뒷사람이 기다리지 못하고 비집고 달려온 것이다.신은지는 뒷사람 때문에 옆에 있는 숲 쪽으로 휘청했다. 박태준은 신은지가 옆으로 휘청하자 순간 잡고 있던 손을 더욱 꼭 붙잡았다. 신은지는 다행히 숲으로 굴러떨어지지 않았지만 발을 삐끗했다. 이때, 앞에 있던 사람들과 이미 멀어지고 말았다. 밤이 어두워지자 산속은 칠흑같이 어두워져 앞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빗줄기가 더욱 거세져 두 사람은 쫄딱 젖은 생쥐 꼴이 되었다. “박태준, 나는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밑에 내려가서 사람을 불러와.” 신은지는 옆에 있는 나무에 기댄 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산속은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캄캄해서 손정등을 켜야 한다. 하지만 박태준의 핸드폰 배터리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아마 한 시간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만약 다리가 다친 신은지를 데리고 간다면 두 사람은 절대 산에서 내려갈 수 없을 것이다. 박태준은 아마 고연우에게 빨리 데리러 오라고 전화를 해놨을 것이다. 잠시 후, 박태준은 손전등을 켜고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이 불빛마저도 매우 희미해서 발밑만 밝힐 수 있었다. “배터리 낭비하지 말고 빨리 가.” 신은지는 재촉하며 말했다. 박태준이 자기 핸드폰을 버리지만 않았어도 좀 더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펜션 구경은 하지도 못하고 달을 보러 나왔다가 달은 구경도 못하고 산속에 갇히게 되었다. 박태준은 플래시를 끄고 고연우에게 문자를 했다. 하지만 산속이라 신호가 잘 잡히지 않았다. 잠시 후, 박태준
신은지가 아무 말도 없자 박태준은 신은지가 화가 난 줄 알았다.잠시 후, 박태준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러니까 절대 나한테 벗어날 생각하지 마.” 신은지는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은지야…” 박태준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눈살을 찌푸리며 신은지의 이름을 읊조렸다. “은지야…” “신은지…” 박태준이 신은지의 이름을 아무리 불러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당황한 박태준은 놀란 마음에 무릎 꿇고 앉아 신은지를 내려놓았다.평소 티셔츠 한 장도 다림질하여 입는 부잣집 도련님인 박태준은 질퍽한 신갈에 무릎 꿇고 앉아 신은지를 부둥켜안았다. 신은지의 조그마한 얼굴은 차갑게 얼어 창백했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신은지는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추워서 기절한 것이다. 박태준은 신은지의 뺨을 때리며 말했다. “은지야, 정신 차려! 연우 곧 올 거야, 잠들면 안 돼!” 신은지의 뺨을 때리는 박태준의 손은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하지만 신은지의 얼굴은 박태준의 손보다 백배는 더 차가웠다. “너 안 일어나면 키스할 거야.” 박태준은 신은지를 감싸 안아 비를 막아주며 말했다. 이때, 박태준이 뺨을 때려서인지 ‘키스’라는 말 때문인지 신은지는 박태준에 품에서 눈을 비비며 말했다. “나 너무 졸려. 좀만 잘 테니까 깨우지 마.”신은지는 체온이 점점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박태준은 절대 신은지가 잠들게 가만히 두지 않았다.신은지가 반응을 하자 박태준은 신은지의 어깨를 흔들며 말했다. “우리 이야기 좀 할까?” “무슨 이야기를 해?” 잠들 뻔한 신은지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박태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신은지가 하는 일에 대해 전혀 모르는 박태준은 할 말이 없었다. 결혼 생활 3년 동안 두 사람은 대화도 잘 하지 않았다. 박태준은 아무리 생각해도 신은지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나유성 이야기?” 박태준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신은지는 박태준의 말을 들어주려고 했지만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신은지는 사람들이 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지만 고개를 들어 볼 힘이 없었다.하지만 박태준은 눈을 부릅 뜨고 산에 올라오고 있는 사람을 봤다. 놀랍게도 고연우가 아니었다. 남자는 만반의 준비를 했다. 방수 효과가 좋은 우비를 입고 검은색 군화를 신어 비에 젖어 미끄러운 산길에도 문제없었다. “은지 씨…” 남자는 박태준 품에 안겨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신은지를 향해 달려갔다.남자는 바로…진선호였다. “왜 혼자 왔습니까?” 박태준은 진선호를 보자 긴장이 풀렸다. “얼어 죽었는지 보러 왔습니다. 살아있으니 알아서 내려오세요.” 진선호를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신은지의 상태를 확인하며 말했다. “……” 박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선호는 주머니에 손전등을 꽂은 후 박태준 품에 안겨 있는 신은지의 팔목을 잡았다. 박태준은 무의식적으로 진선호의 손을 잡았다. 강한 힘은 아니었지만 진선호를 멈칫하게 만들었다.잠시 후, 진선호는 차가운 눈빛으로 박태준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말했다.“은지 씨랑 여기서 얼어 죽을 겁니까?”진선호는 비가 내리기 시작할 때 차를 몰고 산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고연우보다 일찍 도착했다.다행히 진선호 차에 등산 장비도 모두 있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진선호도 박태준처럼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었을 것이다. 고연우는 진선호에게 박태준이 신은지를 데리고 절대 법원에 가지 않을 거라고 입이 닳도록 말했다.하지만 몸값이 몇 억 이상이 되는 박태준이 허름한 전망대에 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진선호는 이런 전망대가 있는지 전혀 몰랐다. 진선호는 차를 몰고 산 아래로 향했다. 진선호는 박태준이 절벽인 산길에서 자신보다 빠르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위험한 길이지만 진선호는 매우 익숙해서 눈 감고도 운전할 수 있었다. 역시, 박태준은 보이지 않았다. 진선호는 잠시 망설이다 핸들을 돌려 다시 산으로 향했다.전망대를 찾느라 고생을 한 진선호는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 “이런 허름한 곳까지
“……” 고연우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고연우는 박태준에게 호의를 베풀다가 자신의 무덤을 판 셈이다.잠시 후, 고연우는 말했다. “아, 이건 업무용 핸드폰이야. 우리 영화 드라마 제작 기획사에 지원한 여자 연예인들인데? 무슨 문제 있어?”고연우는 그저 박태준에게 아무 여자나 한 명 소개해 주고 싶을 뿐이다. 늦은 밤, 박태준은 병원에 도착해 간호사에게 신은지가 있는 병실을 물었다.“선생님, 지금 면회 시간이 지났습니다. 지금은 다른 환자분들에게 방해가 될 수 있으니 내일 다시 오세요.” 이때, 박태준은 한 병실에서 보온병을 들고나오는 진선호를 보았다.박태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간호사에게 말했다. “그럼 저 사람은 왜 아직도 있습니까?”“저분은 환자 가족이니 당연히 같이 계시는 거죠.” 간호사는 박태준의 표정에 잔뜩 겁을 먹고 박태준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며 말했다. “가족…” 박태준은 간호사가 ‘가족’이라고 말하자 더욱 굳어진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가족이라고요? 신원 확인 제대로 했습니까?”“본인이 환자분 남편이라고 했어요…” 간호사는 진선호의 첫인상을 절대 잊을 수 없었다. 잘생긴 외모에 남자답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환자를 들어안고 계단을 올라갈 때 환자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모습에 모든 간호사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하지만 그야말로 못 먹는감이었다. “남편이요? 혼인 신고서 봤습니까? 저 사람이 남편이라고 하면 남편이 맞는 건가요? 거짓말이면요?” “……” 박태준이 다짜고짜 따지자 간호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병원에서 무슨 혼인 신고서까지 확인을 할까?게다가 환자가 죽을 병에 걸린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보호자 사인은 그저 형식적이었을 뿐이다.이런 상황에서 60~70대 노인이 환자의 남편이라고 했어도 캐묻지 않는다. 그 당시 응급상황이었기 때문에 보호자 서명이 필요했었다. 때문에 진선호는 남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나유성도 병실에서 나왔다. 당직실 앞에 서 있는 박태준을 본 나유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