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지 말에 찬성하는 진유라는 몇 마디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유성 앞에서 박태준 험담을 할 수 없어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잠시 후, 진유라는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신은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엄마가 여행 가서 네 선물 사 오셨어. 상할까 봐 빨리 전해주려고 왔어.”“이모한테 고맙다고 전해드려.” “아 맞다, 지난번에 그 꽃병은 어떻게 됐어? 집주인이 출국한다고 미리 받을 수 없냐고 물어봤어.” 신은지는 대답했다. “다 됐어. 집에 가서 가져다줄게.” 주문은 진유라가 받았으니 진유라에게 꽃병을 주면 된다. 진유라는 신은지의 집 열쇠를 가지고 있으니 직접 가지고 가겠다 하려고 했다. 하지만 조급해 하는 신은지의 모습에 말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명 신은지는 집에 물건을 가지러 간다는 핑계로 박태준에게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신은지의 의도를 파악한 나유성은 웃으며 말했다. “은지야, 일 있으면 갔다 와. 내가 태준이 옆에 있을게.”박태준은 손발이 멀쩡해 병간호가 전혀 필요 없었다. 하지만 신은지는 나유성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 신은지가 없을 때 박태준을 봐 줄 사람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렇지 않으면 박태준이 또 어떤 꾀를 부릴지 모른다. “유성 오빠, 그럼 부탁할게. 진짜 빨리 올 테니까 잠깐만 있어줘. 병실은 507호야.”신은지는 아직 박태준의 아내이다. 게다가 박태준이 입원한 것도 신은지 때문이다. 나유성과 박태준의 사이는 좋지만, 나유성이 병간호할 이유는 없다. 때문에 신은지는 나유성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나유성은 웃으며 말했다. “알겠어. 빨리 가 봐.” 이때,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박태준은 로비에서 나유성과 신은지가 서로 마주 보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박태준은 신은지가 자신을 보고 환하게 웃었던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거렸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신은지가 박태준을 보고 웃었던 것은 차가운 웃음이 아닌, 비웃음이었을 것이다. 신은지는 병실에 박태준과 함께 있었을 때는 가시 돋은 장미였지만, 밖에
나유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미안한데 나는 그날 밤 은지가 나를 찾아온 줄 정말 몰랐어. 아마 웨이터가 돈만 챙긴 것 같아.” 그날 밤 신은지는 누구든 쉽게 믿었다. 하지만 진유라는 나유성이 뭐라고 말하든 거짓말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진유라는 나유성에게 말했다. “은지는 오빠 한정판 시계를 보고 오빠라고 확신했었어요.” 신은지는 그날 밤 박태준과 밤을 보내고 강제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날 밤 긴장한 신은지는 나유성을 기다리면서 술을 몇 잔 더 마셨다. 그때, 누군가 들어와 술에 취해테이블에 엎드려 있는 신은지를 일으켰었다. 하지만 술에 취한 신은지는 상대방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만 보았었다. 이전에 나유성은 신은지에게 자신의 시계는 한정판으로 전 세계에 단 하나뿐이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또한 웨이터에게 팁을 주고 나유성을 데리고 오라고 했으니 신은지는 당연히 나유성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게다가 남자에게 나는 향기도 매우 익숙한 향이었다. 때문에 신은지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상대방을 따라 나갔었다. 신은지는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려고 했으나 너무 취해서 하관 밖에 보이지 않았었다. 남자의 하관을 보고 나유성이라고 생각한 신은지는 남자에게 결혼 문제는 생각해 봤냐고 물었었다. 남자는 ‘응’ 이라고 대답했었다. 그렇게 신은지는 나유성이 결혼을 동의한 거라고 생각했었다. “시계?” 마침 그 문제의 시계를 차고 온 나유성은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며 말했다. “이거?”나유성은 몇 년 전 모임에서 시계를 잃어버렸었다. 그리고 그 후 시간이 지나고 박태준에게 받았었다. 나유성에게 고가의 한정판 시계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잃어버려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만약 박태준이 그날 밤 모임에서 시계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그 후에 나유성에게 돌려주지 않았다면 나유성은 시계는 새까맣게 잊었을 것이다.짜증이 난 진유라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집에 한정판 시계가 넘치나 봐요?”“미안, 나 먼저 가볼게.”
나유성은 함부로 책임지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보기에는 다정한 사람 같지만 사실 뼛속까지 차가운 사람이어서 그와 진정으로 속마음을 나누기는 무척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 그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 외에도 괴로움과 후회가 느껴졌다."그러니까 그날 밤, 너는 정신이 멀쩡했다는 거야?""응."박태준은 신은지가 얌전하게 자신을 따라온 이유도 자신을 나유성으로 착각해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자게 된 것도 모두 그가 강요한 것이었다.박태준의 대답을 들은 나유성은 주먹을 들고 박태준의 얼굴을 향해 날렸다. 그는 싸움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제대로 된 훈련을 받았다.그와 같은 배경을 지닌 사람들은 늘 원수나 어긋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의 먹잇감이 되곤 했기 때문이었다.나유성의 주먹은 무척이나 셌다.박태준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뒤로 한걸음 물러서며 이어지는 나유성의 주먹을 막았다. 동시에 발로 나유성의 무릎을 가격했다.병실은 크지 않고 방음도 좋지 않아 소란스러운 소리는 밖까지 전해졌다.신은지는 병실로 들어서던 나유성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곤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밖에서 서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나누던 말도 모두 듣게 되었다.신은지가 다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박태준이 나유성의 어깨 위로 주먹을 날리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박태준은 나유성의 얼굴을 때리려고 했지만 나유성이 피한 덕분에 주먹이 어깨로 떨어진 것이었다."유성아…" 신은지가 얼른 나유성에게 다가가 고통스럽게 미간을 찌푸린 그를 보더니 다시 박태준에게 눈길을 돌렸다."너 미쳤어?""비켜."흐린 날씨 덕에 낮임에도 불구하고 병실 안은 불이 켜져 있었다. 밝은 빛이 박태준 얼굴 위로 비쳐 사람의 등골을 더욱 서늘하게 만들었다.신은지는 머리를 묶어 올려 남자 손바닥만 한 작은 얼굴만 드러냈다. 옅은 옷차림을 한 그녀는 공격성이라곤 일도 없는 가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새끼를 보호하려는 어미처럼 나유성 앞을 막아서
그렇게 무식한 주먹질이 사납게 연이어 서로에게 떨어졌다. "박태준…"신은지는 긴장감에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하지만 그 한마디로 분노에 눈이 먼 남자를 막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의 주먹질이 더욱 거세졌다.나유성은 싸움을 자주 하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박태준을 이길 수 없었다. 신은지는 박태준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화가 난 남자에게는 이성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신은지도 하마터면 그에게 밀려날 넘어질 뻔했다.하지만 신은지는 박태준이 손을 뿌리칠 때를 노려 그의 팔목을 단단히 잡아 자신의 몸무게를 전부 그 위로 실었다.박태준의 힘이 아무리 세다고 해도 그런 신은지를 한 번에 뿌리칠 수는 없었다.그리고 드디어 그의 이성도 천천히 돌아오는 듯했다. 하지만 마음속의 화는 여전히 가라앉지 않는 듯했다. "신은지, 지금 나유성을 보호하려는 거야?"박태준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그는 다시 진선호와 싸웠던 그때가 생각났다. 신은지는 현장을 떠나려고 했지만 경비원이 그 앞을 막아서 억지로 그곳에 남아 개의치 않는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었다. 그저 싸움이 빨리 끝나고 돌아가 쉬고 싶다는 얼굴이었다.하지만 이번에 그녀는 자신의 안위도 상관하지 않고 다가와 자신의 앞을 막아섰다.역시 마음에 두고 있는 것과 마음에 두고 있지 않은 것은 확실히 달랐다.신은지가 나유성을 보니 그의 얼굴과 옷에는 피가 얼룩져 있었다. 그 피가 어디에서 나온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그는 서 있었지만 몸이 휘청거려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을 것 같았다."나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신은지의 눈빛을 느낀 나유성이 그녀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신은지는 그런 그를 보니 더욱 미안해졌다.그녀는 방금 전, 그저 박태준을 벗어날 생각으로 박태준이 자꾸 자신이 나유성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을 듣곤 인정했을 뿐인데 이 미치광이가 이렇게 사람을 죽일 듯이 때릴 줄 누가 알았을까.나유성은 보기만 해도 싸움을 할 줄 모르는 사람 같았다. 그녀가 막지 않았다면 나유성은 박태준에게 맞아 죽었을 수도 있
오전에 간호사가 박태준에게 쫓겨난 뒤로 그 누구도 507 베드가 있는 병실에 들어가지 않았다. 박태준은 여전히 방금 전과 같은 차림을 하고 침대 옆에 앉아있었다. 손등 위의 상처는 이미 피딱지가 앉았고 창밖의 하늘은 점점 어두워져 완전히 어둠에 잠겼다.박태준은 굳어버린 동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가끔 눈을 깜빡이지만 않았다면 생명력이 없는 조각으로 오해할 정도였다.병실은 방음이 되지 않아 바깥의 말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런 소리들이 병실로 전해져 박태준을 더욱 외롭고 쓸쓸하게 만들었다.밤이 되자 바깥의 소리도 사라졌고 병실은 더욱 조용했다."철컥."문을 여는 소리가 조용한 병실에서 유난히 선명하게 들렸지만 박태준은 눈도 뜨지 않고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꺼져."하지만 들어선 이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병실로 들어섰다.퍽 하는 소리와 함께 문 옆에 있던 의자가 누군가의 발길질에 나뒹굴었고 물건들을 치우는 시끄러운 소리와 발걸음 소리는 침대 옆에 닿고서야 멈추었다.박태준은 눈을 뜨고 눈앞의 이를 확인하고도 의아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왜 왔어?"이런 때 병실에 감히 발을 들일 수 있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그리고 이렇게 요란스러운 소리를 낼 수 있는 이는 더욱 적었다.고연우는 우아한 몸짓으로 박태준의 옆에 앉았다. 거기 말고 다른 곳에는 앉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박태준에게 담배를 건네더니 자신도 불을 붙였다."나는 뭐 오고 싶어서 온 줄 알아? 원장님께서 내 비서한테 전화해서 너 끌고 가라고 한 거야. 죽어도 여기 병원에서 죽지 말래."박태준은 담배 연기를 뱉어내는 남자를 보곤 담담하게 말했다."병원에서는 담배 금지야.""그런 거 그렇게 따지는 놈이 병원에서 싸움을 해? 그것도 져놓고 치료도 못하게 하고, 다른 사람이 나한테 전화해서 너 끌고 가게 만드냐? 원장님은 네가 여기에서 죽을까 봐 걱정하고 있는데 너 지금 나한테 병원에서 담배 피우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전예은은 그런 신은지가 꼴 보기 싫어 싸늘하게 말했다."저랑 태준 씨는 그저 친구입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추잡하지는 않습니다. 당신이랑 나유성이야 말로 이상한 거 아닌가요? 신은지 씨 지금 무슨 자격으로 나유성을 돌보고 있는 거죠?"전예은은 방금 간호사에게서 사건의 전말을 모두 전해 들었다."이 가게 병원에서 꽤 먼 걸로 아는데 정말 정성이 지극하시네요, 태준 씨를 위해 준비한 건 있나 몰라."전예은이 신은지가 들고 있는 봉투를 보더니 말했다.신은지가 그 말에 대답하려던 찰나, 병실에서 나오는 박태준이 보였다. 그는 이미 상처를 다 처리하고 하얀 붕대를 감고 있었다.그를 보니 오늘의 말이 생각난 신은지는 기분이 더러워졌다."파리처럼 저를 지켜보고 있을 시간에 제가 박태준이랑 이혼하고 나면 어떻게 박태준 사모님 자리에 앉을 수 있을지나 생각해 보는 건 어때요?"그때 박태준이 전예은을 보며 그녀에게 다가와 말했다."가자, 데려다줄게.""응."신은지를 바라보는 전예은의 눈빛 속에 우월감과 멸시가 담겨있었다.전예은은 박태준이 신은지에게 눈길 한 번 돌리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그녀는 박태준이 이번에는 정말 마음을 접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상적인 남자라면 자신을 배신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박태준같이 고고한 남자는 더더욱 그랬다.고연우가 퇴원 수속을 마치고 차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박태준이 조수석의 문을 열고 들어와 앉았다."예은이 먼저 데려다줘.""너는? 신당동으로 가려고? 아니면 내가 오늘 너랑 같이 있어 줄까? 너 혼자 있다가 죽으면 시체 거둬줄 사람도 없잖아.""필요 없어."고연우는 남자끼리 박태준을 달래줄 생각이 없었다.전예은을 데려다주고 난 뒤, 박태준이 물었다."한잔할래?""너 죽고 싶어서 환장했냐? 이러고도 술이 마시고 싶어? 자기 명줄 줄이지 못해서 안달이구먼."말을 하던 고연우가 박태준을 힐끔 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죽어도 소용없어, 신은지가 너를 위해서 평생 혼자 살 리가 없어."그
그때 경호원이 먼저 반응하고 몸을 돌려 바깥을 바라봤다. 전예은이 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사모님, 분명 오해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 제가 별장을 나설 때만 해도 대표님께서 술에 취하셔서 정신도 못 차리셨습니다."하지만 신은지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그녀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손이 떨리는 탓에 몇 번이나 휴대폰이 떨어질 뻔했다.경호원은 그런 신은지를 보며 조마조마해했다, 그리고 그녀를 힐끔거리며 반응을 살폈다.하지만 신은지가 휴대폰을 들고 안으로 들어갈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경호원은 예상과 다르게 움직이는 신은지를 보곤 그녀를 불렀다."사모님, 지금 뭐 하시는…"거실로 들어선 신은지가 불을 켜자 눈 부신 불빛이 쏟아져 내렸다.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하고 소파 위에 있던 두 사람은 그렇게 피할 새도 없이 신은지 앞에 드러났고 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두 사람을 카메라에 담았다.전예은의 손은 마침 박태준의 셔츠 단추 위에 있었다. 그녀는 오늘 어깨가 드러난 까만 색의 스웨터를 입고 있어 신은지가 문 앞에서 봤을 때, 소파에 막혀 옷을 입지 않은 것처럼 보였던 것이었다."태준 씨가 방금 물을 쏟아서 그랬어요, 날씨가 추우니 젖은 옷을 입고 자면 감기 걸릴 수도 있으니까."전예은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박태준에게서 떨어질 생각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신은지를 비웃듯 그녀를 향해 웃었다."사모님께서 뭐라고 하시는 건 아니겠죠? 지금 유성 씨 신경 쓰느라 다른 걸 신경 쓸 틈이나 있겠어요?"박태준은 술을 많이 마신 덕에 소란스러운 상황에도 깨지 않았다.그리고 전예은이 박태준의 단추를 풀어주려던 찰나, 박태준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가라앉은 목소리로 경고하듯 말했다."꺼져, 내 몸에 손대지 마.""태준 씨, 나 예은이야."박태준의 말을 들은 전예은이 말했다.하지만 박태준은 그 말을 듣고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뿌리치려는 뜻을 보였다. 분명 그는 잠든 상태였는데."태준 씨…"그때, 전예은
박태준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에게서 또 다른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여자를 보는듯했다. 그녀의 눈빛은 하늘의 태양보다 더 눈부셨다. 의기소침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지금의 눈빛과는 전혀 달랐다.이러한 눈빛은 그녀가 사채업자에게 쫓기면서 숨어 다닐 때도 보지 못했었다.그때 그녀는 비참했지만 그래도 미래에 대한 기대가 컸고, 미움과 환희, 긴장과 두려움의 감정은 확실하고 분명했다.하지만 겨우 3년인데……“지겨워진 거야, 아니면 나유성도 당신을 좋아하는 걸 알게 된 거야?” 그는 조용하게 그녀를 보면서 잠긴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래서 서둘러 그와 같이 있고 싶은 거야?”“……”얼마나 지났을까, 신은지는 잠긴 목소리로 허탈한 웃음을 지으면서 얘기했다. “박태준, 그래도 부부로 지낸 세월이 있는데 이렇게 서로 상처 주면서 너 죽고 나 죽고 어느 한쪽이 다칠 때까지 싸워야 속이 시원하겠어?”박태준은 눈을 가늘게 떴고, 가슴에 욱신거리는 아픔이 전해졌다. 그리고 그녀를 아예 부숴버리고 싶은 독한 마음이 차올랐다. 그는 머리를 숙이고 낮게 웃으면서 얘기했다. “만약 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당신은 자살할 생각이야? 아니면 나를 죽일 생각이야?”앞에서 이미 신은지는 모든 체력을 다 써버린 탓인지, 그녀는 침묵을 지켰다.“그런 상황에서 사진을 찍고 증거를 남길 생각을 하다니. 신은지 당신을 칭찬해야 할지, 아니면 심장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지.”“……”박태준은 손을 들어 미간을 눌렀다. 이 순간 모든 감정은 정적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너 죽고 나 죽고, 어느 한쪽이 다칠 때까지 싸워야 속이 시원하겠어’라는 그 말 때문인지, 아니면 똑같이 힘들어서 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절박하면 이혼해.”말을 마치고 피곤한 듯 눈을 감았고, 전신의 모공에서도 사람을 근접하지 못하게 하는 듯한 냉담함을 느낄 수 있었다.신은지는 일념으로 이혼을 원했고, 심지어 몇 번은 박태준과 이혼서류를 접수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하지만 그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