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에게서 또 다른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여자를 보는듯했다. 그녀의 눈빛은 하늘의 태양보다 더 눈부셨다. 의기소침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지금의 눈빛과는 전혀 달랐다.이러한 눈빛은 그녀가 사채업자에게 쫓기면서 숨어 다닐 때도 보지 못했었다.그때 그녀는 비참했지만 그래도 미래에 대한 기대가 컸고, 미움과 환희, 긴장과 두려움의 감정은 확실하고 분명했다.하지만 겨우 3년인데……“지겨워진 거야, 아니면 나유성도 당신을 좋아하는 걸 알게 된 거야?” 그는 조용하게 그녀를 보면서 잠긴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래서 서둘러 그와 같이 있고 싶은 거야?”“……”얼마나 지났을까, 신은지는 잠긴 목소리로 허탈한 웃음을 지으면서 얘기했다. “박태준, 그래도 부부로 지낸 세월이 있는데 이렇게 서로 상처 주면서 너 죽고 나 죽고 어느 한쪽이 다칠 때까지 싸워야 속이 시원하겠어?”박태준은 눈을 가늘게 떴고, 가슴에 욱신거리는 아픔이 전해졌다. 그리고 그녀를 아예 부숴버리고 싶은 독한 마음이 차올랐다. 그는 머리를 숙이고 낮게 웃으면서 얘기했다. “만약 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당신은 자살할 생각이야? 아니면 나를 죽일 생각이야?”앞에서 이미 신은지는 모든 체력을 다 써버린 탓인지, 그녀는 침묵을 지켰다.“그런 상황에서 사진을 찍고 증거를 남길 생각을 하다니. 신은지 당신을 칭찬해야 할지, 아니면 심장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지.”“……”박태준은 손을 들어 미간을 눌렀다. 이 순간 모든 감정은 정적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너 죽고 나 죽고, 어느 한쪽이 다칠 때까지 싸워야 속이 시원하겠어’라는 그 말 때문인지, 아니면 똑같이 힘들어서 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절박하면 이혼해.”말을 마치고 피곤한 듯 눈을 감았고, 전신의 모공에서도 사람을 근접하지 못하게 하는 듯한 냉담함을 느낄 수 있었다.신은지는 일념으로 이혼을 원했고, 심지어 몇 번은 박태준과 이혼서류를 접수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하지만 그
혼인신고 할 때와 같이, 이혼서류를 작성하고 제출하니 바로 처리되었고 이로써 남남이 되었다.익숙한 곳, 비슷한 서류, 그리고 서로 교류가 없는 두 사람, 이 모든 것은 그들이 혼인신고 할 때와 비슷했고 신은지가 조금 어리벙벙해하고 있을 때 박태준은 이미 모든 절차를 끝내고 돌아서서 나갔다.두 사람은 함께 걸어 나갔고, 신은지는 담담하게 물었다. “어머님껜 당신이 얘기 드릴 거지?”그녀는 차마 강혜정의 실망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박태준은 머리 돌려 묵묵히 그녀를 한참 보다가 무표정으로 얘기했다. “이젠 당신 어머니 아니야, 함부로 부르지 마.”신은지: “……”강태산이 마침 차를 운전하고 왔고 박태준은 기사가 내리기 전에 혼자 차 문을 열고 앉으면서 얘기했다. “출발해요.”오늘 기온이 떨어졌고, 눈은 오지 않았지만 날씨는 흐렸고 윙윙 부는 바람은 칼로 살을 도려내는 듯 추웠다.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신은지를 보면서 강태산이 물었다. “작은 사모님은요?”박태준은 그를 한 번 훑어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절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희망이 있다는 뜻이다. 강태산은 그의 마음을 헤아리고 얘기했다. “오늘 몹시 춥고, 법원은 또 좀 외진 곳이라……”그가 말을 채 끝내기 전에, 길 건너편에서 즐거움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지!”이어서 불그스레한 그림자가 달려왔다. 진유라였다.“이혼 축하해, 친구야.”그녀는 붉은 장미꽃 한 다발을 건네주고 또 자기 옷을 가리키면서 얘기했다. “봐, 이렇게 입으니 꽤 경사스러운 분위기가 나지? 드디어 그 불행하고 혼인 생활에서 벗어난 것을 축하해. 가자, 제2 인생을 맞보게 해줄게. 환비연수, 마음대로 골라봐!”신은지는 꽃은 건네받았고, 절친의 이런 옷차림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너무 오버했어……난 잠시 새로운 사람을 만날 생각이 없어.”아마도 이 결혼생활이 그녀에게 큰 트라우마를 남긴 모양이다. 그녀는 남자가 조금 두렵게 느껴졌다.“그럼, 일단 만나만 봐. 서로 마음에 들면 사귀고, 아니면
저녁에, 박태준은 고연우의 전화 한 통에 엔조이 클럽으로 불려 갔다.룸에 들어가니, 뜻밖에도 나유성이 와 있었고 그의 몸에는 아직 상처가 나 있었다. 그는 캐주얼 한 스웨터와 바지를 입었고 손에는 술잔을 든 채 술을 마시고 있었다.박태준은 눈살을 찌푸리고 성큼성큼 걸어갔다.두 사람 사이에 고연우가 앉아있었고, 두 사람은 서로 아는 척하지 않았다. 분위기는 싸해졌고 옆에서 술을 따르던 웨이터는 자신도 모르게 등을 곧게 펴고 어둠을 찾아 몸을 숨기려 했다.고연우는 나른하게 등받이에 기댔고 긴 두 다리는 꼬고 앉아서 실눈을 하고 서로 아는 척도 하지 않으며 술만 마시는 두 사람을 보면서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젠장, 짜증 나서 못 봐주겠네. 친구로 지낸 세월이 얼만데, 고작 싸움 좀 했다고 서로 다시 보지 않을 것처럼 행동할 거야?”그가 두 사람을 불러낸 것은 둘 사이를 화해시켜 주려고 한 것이다.박태준은 차갑게 눈을 치켜떴고,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으며 거칠고 억압적이었다. “난 쟤랑 할 말이 없어.”고연우: “너 입 다물어. 초딩이야? 한번 싸웠다고 절교하게?”박태준은 불쾌한 듯 그를 쳐다보았고, 그는 귀찮아하며 손사래를 쳤다. “됐어. 너 오늘 이혼해서 기분이 안 좋으니, 내가 넓은 아량으로 이쯤 할게.”옆에서 두 사람이 이혼했다는 얘기를 들은 나유성은 술을 마시려던 동작을 잠시 멈췄고, 몇 초 후 다시 머리를 들어 술잔의 술을 원샷했다.고연우는 손을 들어 미간을 만졌다. 그제야 학창 시절 담임이 그를 다른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라고 권고할 때의 심정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시로 그들의 뺨을 후려치고 싶은 포학한 정서가 올라왔다. “유성, 태준이가 신경 쓰는 것은 그저 네가 신은지를 대하는 태도일 뿐이야. 앞으로 신은지를 여동생으로만 생각하겠다고 얘기하면 끝날 일이야.”나유성의 목소리는 쉬고 나지막했다. 술을 많이 마신 탓이다. “그럴 수 없어. 네가 물어봐, 그때 쟤가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고연우: “……”박태준은 표
진성호는 웃으면서 얘기했다. “당신 이 주스를 30분 넘게 들고 있었어요. 그렇게 아쉬우면……” 그는 하던 얘기를 잠시 멈췄다가 진솔하게 얘기했다. “다른 사람을 한번 만나봐요. 예를 들면 나 같은 사람? 나 역시 괜찮은 사람입니다. 여자의 기분을 잘 풀어주고 싸움도 잘하고, 바깥일도 잘하고 집안일도 잘해요. 요리도 배울 준비가 되어있고, 칠, 팔십 대의 노인처럼 울적해하는 당신을 싫어하지도 않아요. 이렇게 좋은 남자를 빨리 잡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게 됩니다.”신은지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친구에게 손을 뻗을 수는 없어요.”“그럼 당신은 여기에 있는 하는 행동이 계집애 같은 남자들에게 흥미가 있어요?” 진성호는 얘기를 하면서 진유라에게 눈총을 쏘았다. 그와 신은지를 위한 자리를 마련할 것을 약속 했었지만, 바지를 벗겨도 성별조차 구분할 수 없는 남자들을 데려와서 술을 같이 마시고 있으니. 신은지는 너무 오래 들고 있어서 따뜻해진 주스를 내려놓고 하품을 하면서 얘기했다. “관심 없어요. 그래서 난 돌아가서 잠이나 자야겠어요.”밤샘의 후유증은 며칠 동안 비몽사몽인 동시에 인지능력과 기억력이 저하된다.그녀가 일어서서 간다는 얘기를 들은 진유라 역시 함께 일어섰다. “그럼 같이 가자. 네 기분을 풀어주려고 마련한 자리인데 주인공인 네가 가면, 우리가 여기에 더 있을 이유도 없어.”여러 사람이 함께 룸을 나섰고, 우려하던 일은 일어났다. 신은지는 박태준을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엔 엘리베이터 앞에서 딱 마주쳤다.그 뿐만 아니라 전예은, 그리고 나유성과 고연우도 함께 있었다.신은지는 속으로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중얼거렸고 일부러 그를 피하지 않고 그저 앞만 바라보면서 그들을 무시했다.지금 엘리베이터는 1층에 있었고, 무슨 영문인지 올라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전예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다정함에 도도함이 묻어났다. “은지야, 여기서 이렇게 만나네.”“……”신은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재경그룹.박태준은 신입 비서가 몇 번이나 말을 잇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눈빛에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야?”그는 평소 카카오톡도 별로 사용하지 않았고, 용건이 있으면 바로 전화하는 타입이라 인스타그램은 더더욱 몰랐기에 이미 들끓는 화제가 되었다고 해도 그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비서는 태블릿을 그의 앞에 놓았고 신은지가 답장한 댓글 2개를 붉은 펜으로 표시해 두었다.이런 일에 관하여 비서는 뭐라고 설명을 해드리기 참 난감했다.박태준은 신속하게 그 내용을 읽어 내려갔고 마지막에 그 댓글에서 멈췄다. 남자는 성 장애가 있기에 부부 사이 기본적인 의무조차 수행하지 못했다.옆에 서 있는 비서는 숨조차 크게 내쉬지 못했다. 그는 박태준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지만, 그에게서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저기압을 느낄 수 있었다.일 분……오 분……시간은 계속 흘러 10분이 지나갔지만, 박태준은 입을 열지 않았고, 태블릿에서 눈길을 떼지도 않았다. 스크린이 이미 잠겨졌음에도 불구하고.비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박 대표님, 홍보팀에서 이 댓글 통제 여부에 관하여 전화문의를 했습니다.”사실 그들은 이미 이 댓글과 관련하여 통제 처리를 했었지만, 대중들이 박 대표님에 대한 열기가 너무 높아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 일은 박 대표님의 의견이 가장 중요했다.박태준은 입가에 살짝 웃음기가 어렸지만, 눈매는 유난히 차가웠다. “통제해. 네티즌에게 눈 가리고 아웅하는 꼴을 보여줄 일이 있어?”비서는 어리둥절해하며 솔직한 성격을 참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이런 일은 증명하기 어려운 일 아닙니까? 음란물 유포 역시 불법인데요.”박태준: “나가!”……신은지는 그 댓글에 회답하고 전화를 핸드백에 넣었다. 그래서 자신의 그 말이 얼마나 센세이셔널한 효과를 냈는지 전혀 몰랐다.그녀는 집 아래에서 간단히 식사하려고 휴대폰을 꺼냈고, 그때 휴대폰 화면을 가득 채운 메시지와 부재중 전화를 보고 그 댓글이 큰 화제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박태준은 머리를 숙여 그녀에게 키스하려고 했고, 손은 그녀의 등의 곡선을 따라 내려와 잘록한 허리를 감싸 안았다.신은지는 가까이 다가온 그를 보고 입을 벌려 그의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힘껏 깨문 탓에 순간 피가 났고, 피비린내가 입안에서 진동했다.“스읍……”박태준은 가볍게 숨을 쉬고 그녀를 놓아주었다. 하지만 신은지가 미처 손을 빼고 그를 밀치기 전에 그는 그녀의 오른손을 잡고 손가락을 도어락에 댔다.“띠리.”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남자는 그녀의 힙을 받치고 그녀를 훌쩍 들어 안았다. 신은지의 몸은 허공에 붕 떴고 상반신은 그에게 기댄 채 두 다리도 그의 허리를 감는 자세가 되었다.박태준은 문을 열고 들어갔고 그녀를 현관 수납장 위에 앉혔다.이 과정은 몇 초 동안에 이루어졌고, 신은지는 미처 반항하기 전에 이미 박태준은 그녀의 스웨터를 걷어 올렸다.그제야 그녀는 자신과 박태준이 체력적으로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남자는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리고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얘기했다. “입술을 무니 기분이 좋아?”신은지는 그의 핍박에 그의 눈을 보게 되었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분노를 분출하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박태준은 이러한 그녀의 태도를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더 즐거워하면서 웃었고, 웃음에는 예전의 차가움과 비아냥거림이 사라졌다. “조금 있으면 더 기분이 좋을 거야.”그는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고, 미세한 신체적인 변화를 신은지는 모두 감지할 수 있었다.뒤에는 벽이 있고, 앞에는 건장한 남자의 몸이 있었기에 신은지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그녀의 다리는 아직 그의 허리에 붙어 있었기에 뛰어내릴 수도 없었다.그녀는 짜증 나고 또 화도 났다. “박태준……”이름을 부르자 박태준의 피 묻은 입술은 이미 그녀의 목에 닿았다. 그는 그녀를 물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키스한 자리는 약간 따끔거렸고, 그가 얼마나 힘껏 키스했는지 알 수 있었다.신은지는 아픔을 잘 참지 못하는 성격인지라, 박태준
박태준은 신은지 집에서 나온 후 회사에 가려고 했지만, 강혜정의 전화 한 통에 저택으로 불려갔다. 주차하고 그는 먼저 미간을 만졌고 또 담배를 한 대 피운 후 차에서 내렸다.거실의 분위기는 싸했다.가정부 아줌마는 집에 없었고, 그의 부모님은 차가운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었고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왔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박태준은 스스로 신발을 바꿔 신었다. “아버지, 어머니.”그가 앉으려고 할 때 강혜정은 눈총을 쏘면서 얘기했다. “누가 앉아도 된다고 했어? 하긴, 박 대표님께서 얼마나 대단하신 인물인데. 이혼과 같은 이런 큰일조차 미리 얘기도 해주지 않고 바로 해버리고, 이혼 후에도 우리에게 알리지도 않았는데 소파에 허락 없이 앉는 것은 일도 아니지!”박태준: “……”그는 강혜정이 화낼 것을 예상하고, 시간을 내서 차분하게 얘기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실검이 터질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그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어머니, 화나시면 저한테 화내세요.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지 마시고.”“내가 트집을 잡아?” 강혜정은 화가 나서 이놈의 머리를 비틀고 싶었다: “은지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어? 우리 집에 시집와서 3년 동안 며느리로서 할 도리를 다했어. 네가 그 방면으로 부족한 것도 참아주고, 인상 쓰고, 사람을 달랠 줄 몰라도 다 참아준 여자를, 네가 기어코 공개석상에 나서지도 못할 전예은 때문에 이혼해야겠어?”이혼 후 이틀 동안, 박태준의 귓가에는 늘 ‘신은지’라는 세 글자가 맴돌았다. 그는 머리가 아팠고, 튀는 미간을 손으로 누르면서 시선을 옆에 있는 박용선에게 돌렸다.박용선은 도움을 줄 수 없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는 그저 옆에 들러리처럼 앉아 있을 뿐, 집안의 소소한 일이든 큰일이든, 그에겐 결정권이 없었다.박태준: “정말 남자의 체면을 구기시네요. ”박용선: “아비가 너에게 전처 결혼식에 갈 축의금은 마련해 줄 수 있어.”박태준: “……”강혜정의 높아진 목소리에 그는 정신이 돌아왔다: “얘기해 봐, 너 지금 후회하고
강혜정은 신은지와 쇼핑하러 가려고 했었고, 그 참에 그녀의 마음을 염탐해 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런 장면을 목격하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고, 난처한 나머지 미소를 띠고 있던 얼굴마저 굳었다. 어쩌다 보니 우아하고 각종 상업적인 자리에 많이 참석해 본 귀부인을 말더듬이로 만들어 버렸다: “이거, 두리안 너 먹어, 두 사람 같이 먹어. 은지야 우린 다음에 다시 약속하고, 너……”그녀는 소유욕이 강한 진성호를 보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옆에 있는 박태준을 잡고 자리를 떴다.“……” 신은지는 미처 한 마디도 못한 채 두 사람을 보내게 되었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그녀는 자신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진성호의 손을 물리쳤다. “당신 그렇게 할 일이 없어요? 기어이 이렇게 해야겠어요?”“할 일이 없는 건 저 사람이 아닌가요? 이혼했는데 아직도 당신 앞에서 얼쩡거리고. 예전에 저 사람과 결혼한 것도 혹시 철면피처럼 달라붙어서 하는 수 없이 결혼을 한 것 맞죠?”신은지가 돌아서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그도 따라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손으로 막았다: “일해야 해서요. 당신도 그만 돌아가요. 전 나쁜 마음을 먹지 않아요.”진성호: “……”문은 인정사정도 없이 닫혔다.신은지는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묶으면서 작업실로 걸어갔다. 사실 진성호의 말은 맞는 부분이 없었다. 박태준은 그녀에게 매달린 적이 없었고, 그땐 그녀가 먼저 침대에서 그와 결혼하겠다고 했었다. 비록 박태준이 승낙했지만 얼굴에는 비아냥거림이 가득했었다. 후에 그녀는 욕실에 가서 샤워하면서 이성을 되찾으니 후회되어서 그한테 빚을 갚을 돈만 빌리려고 했었고 박태준은 흔쾌히 대답했다.만약 언론에서 두 사람이 함께 호텔에 있은 일을 폭로하지 않았다면, 아마 두 사람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역시 박태준 그 놈이 문제이다. 늘 남에게 피해를 주고 자신에게도 불똥이 튀는 일을 만드니!‘쾅쾅’ 밖에서 조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또 들렸다.신은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문을 열었다. “진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