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실 문 앞에서는 이지안 비서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대표님, 부르셨습니까?”조진범은 시선을 살짝 내리깐 채 여전히 그 초대장을 바라보며 이지안 비서에게 말했다.“이 초대장 직접 갖고 가서 꼭 진안영에게 손수 전달해주세요. 저와 안영이 사이의 약속이니까요.“초대장을 받아든 이지안 비서는 꽤 놀란 기색을 보였다.조진범과 진안영이 이혼한 지 벌써 8개월이나 되었다. 원래라면 이제 서로 완전한 남남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자신의 대표님은 아직도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듯 보였다. 굳이 이 결혼식 초대장을 보내는 이유가 상대를 자극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자극하기 위해서인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남녀 사이에 갑자기 어느 한쪽이 승부욕을 품는 순간, 이미 진 게임이나 다름없다.부하직원이었던 이지안은 딱히 뭐라 말도 못 하고 초대장을 직접 진안영에게 전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미 진안영 자매가 함께 사는 집을 알고 있었고 그 집을 찾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하지만 진안영의 집안일을 도와주던 둘째 아가씨는 몇 달 전 이사를 하더니 설날에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그 말에 이지안은 멍해졌다.몇 달 전에 이사했는데 설날에 오지도 않았다니?친절한 진씨 가문의 가정부는 그녀에게 다른 방법을 하나 제시해주었다.“차라리 큰 아가씨네 회사로 가보시는 게 어때요? 큰 아가씨께서는 틀림없이 둘째 아가씨의 행방을 알고 계실 거예요. 그것도 아니라면, 큰 아가씨께서 이 초대장을 둘째 아가씨한테 대신 전해줄 수도 있고요.”이지안 비서는 그녀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그녀는 진은영의 회사로 찾아갔고 다행히도 진은영이 이지안 비서를 만나주었다.진은영은 매우 바빠 보였다. 이지안 비서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을 때도 진은영은 여전히 서류에만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고 발소리를 들었음에도 고개조차 들지 않은 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진범 씨가 보낸 사람이에요?”이지안은 민망한 듯 대답했다.“네.”진은영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이지안을 바라
이지안은 그런 조진범의 눈빛에 방금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설명해주었다. 물론 진은영이 청첩장을 찢고 조진범에게 죽지도 않냐는 저주를 내렸다는 일은 생략했다. 모든 것을 알려준 이지안이 조용히 물었다.“대표님, 안영 씨 행방, 계속 찾아볼까요?”조진범은 다시 등을 돌렸다.그는 창밖의 석양을 계속 바라보았다. 이지안이 돌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느꼈던 그 설렘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조진범은 진안영이 B 시에 없다면 분명 H 시에 있는 하도경을 찾아가 함께 살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다만 그 둘이 왜 아직도 결혼하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하도경의 집안에서 반대했기 때문이 아닐까.조진범은 눈이 시큰해질 때까지 꽤 오랫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결국, 생각 정리를 마친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그만둬요.”조진범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지안은 그가 새신랑이라기보다는 실연당한 남자에 더 가깝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조진범과 정지혜의 지난 6개월간의 교제를 떠올려 보았지만 정말 싱겁기 그지없었다. 조진범이 진심으로 정지혜를 사랑하는 것 같은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이지안은 하려던 말을 가까스로 삼켜냈다.이지안이 자리를 뜨고 나서도 조진범은 다시 한참 동안 홀로 서 있었다. 책상 위의 휴대폰이 울릴 때가 되어서야 그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정지혜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오늘 밤에 그녀 아버지의 생신 축하파티가 있을 예정이니 예비 사위로서 반드시 참석해 체면을 세워달라는 내용의 전화였다.정지혜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조진범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알겠다는 대답을 내놓았다.한 시간 후, 조진범은 차를 몰고 약혼녀의 집에 도착했다. 그는 특별히 희귀 와인 두 병도 따로 챙겨와 정지혜의 아버지와 함께 나눌 생각을 했다.검은색 롤스로이스가 정지혜의 집 앞에 멈추자 안에 있던 조진범은 고개를 들어 정씨 가문의 저택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전 부인의 본가가 떠올랐다. 솔직히 말하면 정지혜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얼어붙었다.정지혜는 기분이 나빴지만 아버지의 생일이기도 했고 집 안에는 많은 친척이 조진범을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탓에 지금 당장 그에게 따질 수도 없었고 다툴 수도 없었다.정지헤는 애써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왔으면서 왜 안 들어오고 있어요? 다들 기다리고 있었는데.”조진범은 그 말에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저녁의 어스름 속에 서 있는 여인은 진안영이 아닌 이해심 많은 그의 약혼녀 정지혜였다. 그의 전 부인도 아니었고 지금 그가 모든 신경을 쏟고 있는 그 사람도 아니었다.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던 조진범은 아무 말 없이 곧장 차에서 내렸다.한 쌍의 남녀가 어스름한 저녁에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은 아주 보기 좋았다. 집 안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서 있던 정씨 가문의 하인들이 계속해서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아가씨, 사위님.”조진범은 고결한 표정으로 하인들의 인사에 응답하지 않았다.왜인지 모르게 마음이 달콤해진 정지혜는 참지 못하고 조진범의 팔에 팔짱을 낀 채 그의 곁에 꼭 붙어 걸어갔다. 그러고는 자신의 얼굴을 넓은 조진범의 어깨에 살짝 기대자 부드러운 그녀의 피부가 고급스러운 재질의 옷감에 닿았다. 머리를 풀고 있었던 덕에 정지혜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훨씬 부드러웠지만 조진범은 여전히 그녀에게 자신의 다정함을 보여주지 않았다.정지혜는 그런 조진범의 모습에 적잖이 실망한 모양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조진범이 다정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지만 그는 어느 여자에게나 다 이런 식으로 행동했다. 이런 남편이라면 먼 곳으로 출장을 가거나 외근을 나간다고 해도 정지헤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정지혜 역시 부부 사이가 지나치게 끈적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진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과 제일 높은 위치에서 만나는 것이었다.두 사람이 거실로 들어서자 정지혜의 아버지가 직접 나와 두 사람을 맞이했다.“진범아.”하지만 이런 식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정지헤의 부모뿐이었다. 다른 친척들은 조진범에게 ‘조 대표
밤이 깊었다.진은영은 잠자리에 들었다...진안영은 수면 가운을 걸친 채 테라스 밖으로 나가 C 시의 야경을 감상했다. C 시는 B 시만큼 번화하지 않아서 그런지 아파트의 테라스에서조차 멀리 이어진 산이 보였다. 그리고 그 산 너머에는 진안영의 어머니가 복역 중인 교도소가 있었다. 모범수로 인정받은 그녀는 3개월 감형을 받아 형량이 줄어든 상태였다.진안영은 고개를 숙여 손에 쥐어진 청첩장을 바라보았다.[신랑 조진범, 신부 정지혜][백년해로]...조진범이 결혼을 한단다.그리고 일부러 진안영에게까지 청첩장을 보냈다. 보나 마나 그는 지금 진안영을 마음속 깊이 증오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녀가 자신의 입으로 하도경의 아이를 가졌다고 말했던 그 순간, 진안영은 조진범과 했던 결혼 생활, 그와 함께 나눴던 사랑들을 모두 지워버렸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이 청첩장이라는 존재가 잠잠하던 그녀의 마음에 돌을 던져버렸다.진안영은 오랫동안 밤하늘 아래에 서 있었다.다음 날 아침, 진은영은 일찍 집을 나섰다.진안영은 진은영을 차까지 바래다주었다.검은색 차의 뒷좌석에 탔다가 다시 차에서 내린 진은영은 동생의 불룩한 배를 살살 어루만지더니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예정일 일주일 남으면 네 곁에 계속 있어 줄게. 아기 태어나면 엄마도 정말 기뻐하실 거야. 아이가 태어난 지 두 달이 되면 우리 같이 엄마한테 아기 보여드리러 가자.”그 말에 진안영도 조용히 자신의 배를 살살 어루만졌다.잠시 후, 그녀가 입을 열어 대답했다.“그래...”...5월 20일은 조진범과 정지혜의 결혼식이 있는 날이다.그리고 진안영은 예정일보다 3일이나 빨리 출산하게 되었다.(조이서가 좋은 곳에서 태어날 수 있게 하려고 진안영이 이를 악문 것이었다.)C 시 제1 산부인과의 고급 산후조리원에는 진은영이 B 시에서 특별히 초청해온 최고의 산부인과 전문의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진안영의 출산 과정에는 문제가 생겼다.난산이었다. 산모가 피를 지나치게 많이 흘리고 있었다.진은
B시, 가장 럭셔리한 호텔 안.조진범은 정지혜와 결혼식을 올리고 있었다. 오늘 밤 가장 성대한 날, B시의 유명인사들이 거의 모두 JH그룹 회장의 재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곳에 방문했다. 하지만 떠들썩한 분위기와는 달리 신랑은 줄곧 건성으로 그들을 맞이해주었다. 별로 기뻐 보이지 않는 눈치였다.그런데 그때, 진은영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진은영은 원래 냉정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인데 통화가 연결되고 건너편에서 들려온 그녀의 목소리는 당장이라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세계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그런데 그녀가 이토록 무너지는 것도 정상이었다. 그런 가정에서 딸로 태어나 태어날 때부터 썰렁한 대우를 받으며 자랐고 이제 엄마까지 감옥에 갇혀버렸다. 게다가 현재 그녀의 여동생은 피를 쏟아내고 있다. 그녀는 지금 거의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맞서 싸우고 있다.휴대폰에서 진은영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안영이 임신한 거 당신 애라고요. 그러니까 오든 말든... 알아서 하세요!”...휴대폰이 조진범의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지만 다행히 카펫이 깔려있어 깨지지는 않았다. 조진범은 즉시 휴대폰을 주워들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진은영에게 다시 물었다.“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당장 갈게요.”“C시 XX 산부인과병원.”...전화를 끊은 조진범은 곧바로 옆에 있던 이 비서에게 지시를 내렸다.“지금 당장 전용기를 준비해 주세요. C시로 가겠습니다.”그 말에 이 비서는 잠깐 넋을 잃고 말았다.오늘 밤 여주인공인 정지혜도 덩달아 넋을 잃고 말았다. 사실 그녀는 방금 조진범의 통화 소리를 전부 다 들었다.진안영이 조진범의 아이를 임신했다.그리고 현재 진안영이 아이를 낳고 있다.그런데 조진범이 지금 C시에 가면 그들의 결혼식은? 남겨진 정지혜는?다시 정신을 차린 정지혜가 다급히 조진범의 팔을 잡아당겼다.정교한 메이크업은 현재 거의 일그러져버렸고 그녀의 목소리에는 날카로움을 띠고 있었다.“조진범 씨, 30분 후에 우리는 결혼 서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자 진안영은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다.그녀는 분만대 위에 힘없이 누워있었다.그 순간, 그녀는 마치 청력을 잃은 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와 동시에 어둠 속에서 분홍색 꽃봉오리가 꽃을 피우고 물을 빨아들인 꽃잎이 조용히 자라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잠시 후, 진안영의 청력이 돌아왔다.의사들이 다급하게 그녀를 치료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간호사는 갓 태어난 작은 여자아이를 따뜻한 물이 조심조심 씻기고 있었다. 그 작은 체구에서 울려 퍼지는 울음소리가 꽤 컸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진안영의 눈에서도 맑은 눈물이 도르륵 눈가를 타고 흘러내렸다.이 아이는 진안영이 낳은 아이였다.희고 가녀린 진안영의 손이 남자의 손에 단단히 잡혀 있었다. 마치 그녀가 깊이 사랑해 마지않는 남편이라도 되는 것처럼.조진범은 아이를 확인하지도 않고 진안영의 몸 상태가 걱정되어 계속 그녀의 곁만 지키고 있었다. 검고 깊은 눈동자는 그녀를 조금이라도 놓칠까 집요하게 따라붙으며 진안영을 쳐다보고 있었다. 조진범은 자신들이 이미 반년 전에 이혼한 사이임을 잊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오랜 시간 동안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어버린 듯했고 자신의 청첩장을 직접 보내던 그 날의 냉담함마저도 잊은 것 같았다.이 순간, 그는 그저 진안영이 보고 싶었다. 그녀가 완벽하지 못한 사람이라도 상관없었다. 지금 조진범은 진안영과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하지만 아쉽게도 진안영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그녀는 오늘이 조진범의 결혼식 날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진안영은 두 사람은 이미 오래전에 이혼을 마쳤고 서로에게 자유를 주었다는 사실도 잊지 않았다.진안영은 조금씩 조진범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며 최대한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하지만 조진범은 진안영이 그럴수록 오히려 그녀의 손을 더 꽉 잡았다.그는 허리를 반쯤 굽힌 채 아내를 깊이 사랑하는 남편이라도 된 듯한 시선으로 진안영을 바라보았다.아이를 다 씻기고 연핑
진안영은 혈액 팩 두 팩을 주입하고 체력을 조금 회복했지만 여전히 허약했다. 조씨 집안 가족들도 감히 더 방해하지 못하고 진아현을 확인한 뒤, 근처에 호텔을 잡고 병실을 떠났다. 그렇게 병실에는 조진범만 남게 되었다.VIP 병실은 새것처럼 깨끗했다.진은영은 조진범과 마주 보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서로를 탓하고 있었다. 진은영의 마음속에서 조진범은 무책임한 쓰레기 남이고 조진범은 진즉 말해주지 않은 진은영을 탓했다.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새벽 병동에서 가장 큰 인기척은 진아현의 달콤한 숨결뿐이었다. 작은 손가락이 움찔거리며 웅크리더니 아현이는 작은 주먹을 꼭 쥐고 꿈나라에 빠졌다. 조진범은 아현이의 귀여운 모습에 마음이 녹아내릴 것 같았고 다시 보니 윤곽은 그를 닮았지만 전체적인 이목구비는 엄마를 똑 닮아 부드럽고 아름다운 완벽한 외모였다.한참 즐겁게 보고 있는데 녀석이 갑자기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으앙...”아이는 예쁜 얼굴을 잔뜩 찡그리더니 실눈에서 콩알만 한 눈물 몇 방울을 쥐어짜 냈다.구슬피 우는 아이에 조진범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났다. 그는 아현이를 품에 안고 이리저리 달래주려 애썼지만... 아이는 어떻게 달래는 거지? 조진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꼬마는 더욱 세게 울기 시작했다. 정말 울음소리가 하늘을 진동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조진범이 쩔쩔매고 있는데... 입구 벽에 기대어 있던 진은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쟤 지금 배고픈 거잖아요. 바보.”진은영이 비아냥거리며 그를 조롱했지만 조진범은 굳이 그녀에게 따지지 않았다. 그는 아이를 안고 진안영을 바라보았는데 그녀는 베개에 반쯤 기댄 채 아이를 안기 위해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조진범은 진안영의 건강을 걱정하며 머뭇거렸다.“그렇게 피를 많이 흘려서 아이를 먹일 수 있겠어? 먼저 분유를 타 마시면 안 되나?”그러나 진안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그녀는 아까 전부터 줄곧 그와 이야기를 하지
...진은영은 단숨에 하고 싶었던 말을 전부 털어놓았다.사실 평소에는 이런 말을 하지 않는 건데 그가 직접 C시에 찾아와 감정이 더 격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씩씩거리는 진은영에 비해 유이준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진은영은 그의 눈빛 속에 담긴 감정을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방금, 유이준은 사실 그녀에게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이다. 후회한다는 말 한마디만 해주면, 진은영이 그의 품에 안겨만 준다면,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마음이 있었다. 심지어 결혼까지 해줄 수 있다. 누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그 사람의 입을 꿰매어 버릴 것이고 유이준의 아내로서 그 누구도 진은영에게 손가락질할 수 없을 것이다.유이준이 고개를 숙이고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그의 바람과는 달리 진은영은 그를 원하지 않는다. 가정이 초라하다고 하지만 진안영도 조진범과 결혼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유이준은 왜 안된단 말인가... 아니, 이유는 한가지뿐이다. 유이준은 조진범이 아니니까.유이준이 몸을 기울여 담배꽁초의 불을 꺼버렸다.그는 양복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맞은편 진은영에게 건네주고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진은영 씨, 이게 진짜 당신의 이유인 거죠? 사실 당신은 조진범을 좋아하고 있었는데 정작 조진범의 마음에 든 여인은 당신이 아닌 진안영일 줄 생각지도 못했겠지. 그래서 당신은 날 찾아온 거고... 하지만 어떡하지? 이것 참 아쉽게 됐네요. 전 조진범과 별로 닮지 않아서 말이에요.”그 사진을 움켜쥔 진은영의 손가락이 흠칫 떨렸다.그 사진은 몇 년 전의 비즈니스 접대 자리 사진인데 그날 그녀는 처음으로 조진범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조진범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감출 수 없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처음으로 그녀의 마음을 움직인 남자였다.... 그래, 조진범을 좋아했다는 건 인정할 수 있다.인생에서 다들 한 번쯤은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한 적이 있지 않나?사실 유이준의 선공에 진은영은 충분히 해명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