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이혼을 제기했을 때 진안영이 끝까지 거부했다면 결말은 달라졌을가?조진범도 알 수 없었다.조용한 방에서 테이블 위에 놓아둔 핸드폰이 울렸다.조진범이 다가가 보니 조은혁이 걸어온 전화였다.조진범이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에서 조은혁의 호통 소리가 들렸다.“조진범 이 자식! 아내더러 싸인을 하게 해? 정신 나간 거 아니야? 이혼하고 다시 안영이 같은 좋은 여자 만날 수 있을 것 깉아?”“예전에 안영이가 말을 잘 듣는다고 하셨잖아요.”...조진범은 핸드폰을 쥐고 밖의 석양을 바라보았다.그는 잠시 후 입을 열었다.“아빠, 나랑 안영은 더 이상 가능성이 없어요. 지금 이혼 안 하고 아이가 생기고 이혼하면 더 큰 상처예요... 그럴 필요가 없죠!”조은혁이 냉정하게 말했다.“이혼, 이혼! 이혼밖에 모르지? 왜 좋은 일을 바라지 않는 거야?”조은혁은 전화를 끊었다.그는 박연희 몰래 담배에 불을 붙였지만 피울 생각이 없이 멍을 때렸다.조진범의 결혼 생활이 순탄하지 않는 건 그의 탓이다.조진범은 어렸을 때 유년시절이 없었고 동생들을 잘 보호해야 된다고 훈육했기에 조진범은 감정은 뒤로 놔두고 사업에 너무 몰입했다.그 점을 견디지 못하고 조민희와 진안영은 하나둘 떠나간 것이다.아비로서 조은혁은 너무 마음이 아팠다....조진범은 고개를 숙여 핸드폰을 들여보았다.그는 이 비서를 불러 영혼 없이 물었다.“아버지에게 안영이가 싸인한 걸 얘기했나요?”이 비서는 안절부절못했다.조진범은 알아차렸다.모든 건 그의 아버지 뜻이었다.그는 이 비서를 난처하게 하지 않고 나가라고 지시했다.이 비서가 나간 후 사무실은 다시 조용해졌다.조진범이 익숙한 고요함이었다.하지만 오늘은 가슴이 허해지는 느낌을 받았다.이유는 그도 잘 몰랐다.저녁이 된 후 조진범은 기사를 부르지 않고 직접 운전하여 아무 데나 돌아다녔다...정신을 차리니 진안영의 학교에 도착했다.가을에 들어서니 모든 나무들은 금빛을 띠었다.그의 아내는 손에 박스를 들고 학교 문 앞에서 키
진안영은 재빨리 알아차렸다.조진범은 자신과 하도경이 함께하는 모습을 보고 오해한 것이다.그녀가 선 곳의 가로등이 켜지며 원래도 하얀 그녀의 얼굴을 더욱 창백하게 비추었다.진안영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핸드폰을 꽉 쥐었다.“네. 그 사람이랑 같이 있으면 좋아요.”진안영은 깊게 심호흡을 하며 말을 이었다.“이혼하고 그 사람이랑 잘 해보려고요.”어둠이 점점 깊어졌다.맞은 편 차 안에서 조진범이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아내를 바라보았다.그의 아내가 다른 남자를 칭찬하고 있었다.그는 낮게 비웃었다.‘조진범, 결혼 생활은 분명히 깨졌고 그녀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왜 이혼 후 다른 사람과 함께 하려는 걸 막아?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고 있는 게 뭐가 불만인 거지?’그는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조진범은 진안영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하도경은 괜찮은 남자지.”말을 마치고 그는 전화를 끊었다.차량의 창문이 올려지며 둘의 시선은 더 이상 마주치지 못했다.조진범은 더 이상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이 액셀을 밟으며 떠났다.시동이 걸리면서 릴 때 전화를 지금 이 상황이 꿈인지 진짜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차 미러로 진안영의 모습이 점점 작아졌다.조진범은 한 손으로 운전하며 다른 한 손으로 담배를 찾아 입에 물었다.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앞의 도로 상황을 바라보며 머릿속엔 진안영으로 가득했다.돌아갈 사람이 있는 건 좋은 일이다.그가 별장으로 돌아와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침대에 누워 잠에 들지 못했을 때 그는 진정으로 자신이 이혼했음을 실감했다.진안영과 실제로 살을 비부비며 결혼생활을 했었기에 마음이 아픈 건 당연했다.베개에 여전히 목걸이가 놓여 있었였다.마치 진안영의 분신과도 같았다.조진범은 고개를 돌려 목걸이를 바라보다가 마음을 굳게 먹고 서랍 안에 던단져버렸다....고요한 밤.진안영은 베란다에서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얇은 가디건 한 장을 걸쳤고 옆엔 언니 진은영이 함께 했다.진은영은 그녀와 나란히 야경을 바라보다가
하루 뒤, 조은혁의 비서 김 비서가 직접 진안영을 찾아와 말했다. 진안영에게 조진범 부부는 그녀에게 잘 대해주었고 그녀의 어머니 일도 후에 도움을 준 적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식사는 정중히 응할 수밖에 없었다.가을이 깊어가는 10월.진안영은 김 비서를 따라 별장을 나섰다.별장 입구에는 링컨 캠핑카가 서 있었고 김 비서는 직접 진안영에게 뒷좌석 문을 열어주며 미소를 지었다. “조 사모님, 올라타시죠.”진안영은 차에 오르며 김 비서에게 더는 이렇게 부르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이미 조진범과 이혼 서류에 서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 비서는 여전히 미소를 지었다.링컨 캠핑카는 천천히 출발했고 반 시간 후 한 레스토랑 앞에 도착했다.진안영은 잠시 멍해졌다.이 레스토랑은 바로 그녀와 조진범이 처음 만났던 맞선 장소였다. 이제 이혼을 앞두고 다시 이곳에 오니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 깊었던 순간이 떠오르며 복잡한 감정이 몰려왔다.김 비서 역시 그녀의 그리움을 알아차렸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김 비서는 조진범이 자라는 것을 지켜보았고 그가 겪었던 불꽃 같은 연애 또한 목격했다. 그의 성격을 잘 아는 김 비서는 진안영이 이 결혼 생활에서 적지 않은 고생을 했을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김비서는 조진범이 아무리 부족해도 그의 아버지만큼은 아니라 생각했다.조은혁은 레스토랑의 익숙한 자리에 앉아 있었다.오늘 그는 레스토랑 전체를 빌려 진안영과 단둘이 식사하며 대화를 나누고자 했다. 정오 12시가 되자 김 비서가 진안영을 데리고 도착했다.진안영은 예의상 아버님이라고 불렀다.조은혁은 김 비서에게 진안영의 자리를 마련하게 하였고 그녀가 앉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진범 어머니에게 들으니 네가 사직을 했다더군. 마침 잘 됐어, 나랑 진범 어머니가 여행을 가려고 하는데 넌 한가하니 우리와 함께 마음 편히 쉬며 여행 다녀오는 게 어때?”그는 여전히 예전처럼 친근하고 따뜻한 어조로 진안영을 가족처럼 대했다.진안영이 답변을 고민하는 사이 주방장이 직
조진범은 오기 전에 이 식사의 목적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결국 오고 말았다. 사실 그 자신도 왜 이 자리에 왔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이미 진안영과 이혼 서류에 서명했으며 그의 아버지가 아무리 끌어당기려 해도 이 결말을 바꿀 수는 없었다. 게다가 진안영은 이미 자신이 하도경과 함께할 거라고 인정했다. 그들은 둘 다 교육계에 있어 서로 이야기할 주제가 많고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놓아주는 것이 옳은 선택이고 서로에게 좋은 일이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그는 잠시 전 부인을 바라보며 자리에 앉아 매니저에게 몇 가지 요리를 부탁했다. 놀랍게도 습관적으로 진안영이 자주 먹던 요리도 함께 주문했다.식사가 시작되자 조은혁이 웃으며 말했다. “너 참 거침없구나.”조진범은 미소 지었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아버지 조은혁은 참지 못하고 손에 든 잔을 가볍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조진범, 한 가지만 묻겠다. 이 결혼에 더 이상 되돌릴 여지는 없는 거냐?”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조진범 역시 손에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고고 식기가 고급스러운 도자기 접시에 떨어지며 맑은 소리를 냈다. 그는 다시 진안영을 바라보았다.그래, 이혼은 그가 먼저 제안한 것이었다. 하지만 한 손뼉으로는 소리가 나지 않으니 그는 이 결정이 그들 둘의 공통된 바람이라고 생각했다. 이 결혼을 더 이상 끌어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고 게다가 이미 서류에 서명했으니 조진범은 자신의 결정을 쉽게 번복하는 성격이 아니었다.그때 진안영이 입을 열었다.“아버님, 이건 저와 조진범의 공동 결정이에요.”“우리는 평화롭게 헤어졌습니다.”조은혁은 더 설득하고 싶어 했고 자신과 박연희의 사랑 이야기를 다시 한번 나누고 싶었지만 두 사람이 이미 결단을 내린 게 분명해 보여 그는 슬픔 외에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조은혁은 흰 식탁보를 펼치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잘 먹어라. 이걸 부부의 마지막 식사라고 생각하자.” 그렇게 말하면서도
조진범은 여자가 아니기에 출산 경험이 없었고 진안영이 그렇게 말하자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심지어 주방장에게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요리로 바꿔 달라고도 했으나 진안영은 정중히 거절했다.자리로 돌아오니 진안영은 더 이상 그와 함께 식사할 기력조차 없었다. 그녀는 조용히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자 조진범은 무심코 내뱉었다. “그가 화낼까 봐 그러는 거야? 엄밀히 말하면 너는 아직 내 아내야.”진안영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떠날 때, 조은혁은 직접 그녀를 배웅했다. 그는 더 이상 그녀를 붙잡으려 하지 않고 마치 어른이 어린 후배에게 당부하듯 진안영에게 여러 가지 당부의 말을 전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자신에게 연락하라고 하면서 조진범의 이상한 말들에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하도경과 관련된 이야기를 조은혁이 엿들은 것이다.차 안은 어둑했고 진안영의 눈가가 촉촉해졌다.진안영은 착한 사람이다. 그녀는 조진범과의 결혼이 파탄 난 것이 조은혁 부부에게 미안했다. 그들은 항상 그녀에게 잘해줬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럴수록 조은혁은 더더욱 마음이 아팠다.“천 리 길도 함께할 수 없으니 이제 이별할 때가 됐구나.”검은 캠핑카는 진안영이 사는 작은 별장 앞에 멈췄고 조은혁은 그 자리에 멈췄다.진안영은 차에서 내려 조은혁을 바라보며 그에게 고개를 숙였고 마지막으로 떨리는 목소리로 아버지라고 불렀다. 이제 그녀와 조씨 가문은 더 이상 관계가 없었다. 그녀는 더 이상 그들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조은혁이 도움을 주겠다고 했지만 조진범에게 새 아내가 생길 것이고 그녀는 남의 부담이 되고 싶지 않았다.조은혁 역시 마음이 아팠다. “어서 들어가라.”진안영의 입술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똑바로 대문을 향해 걸어갔고 조은혁은 그녀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문득 그는 진안영이 어떤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조진범에게 가진 감정은 마치 옛날에 박연희가 자신에게 가졌던 것과 같이 조심스럽게 마음속
진안영은 휴대폰을 꺼내 보니 그녀가 가르쳤던 학생인 임연서로부터 온 카카오톡 메시지였다. [진 선생님, 메리 크리스마스. 선생님의 남편인 조진범 씨를 학교에서 봤어요.]...진안영은 잠시 멍해졌다.자신이 조진범과 결혼했을 때는 B시 전체가 다 알았지만 이혼 소식은 크게 알려지지 않았으니 임연서가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진안영은 임연서에게 답장을 보냈다.[연서야, 너도 메리 크리스마스.]조진범이 왜 학교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고 그들은 이미 이혼했으니 그 이유도 이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새해가 지나면 그녀는 B시를 떠날 예정이었다.메시지를 보낸 후 진안영은 바로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 자리에 서서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다 신혼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 그녀와 조진범은 이런 눈 속에서 키스하며 함께 대관람차를 보았고 그날 그는 그녀에게 금풍옥로를 선물해 주었다. 그때 그녀는 품어서는 안 될 마음을 품고 말았다.원래 서로 필요에 의해 맺어진 관계였는데 그녀는 진심을 품고 말았다.진안영이 그렇게 많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그녀의 배 속에서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배 속 아이의 첫 태동이었다... ...조진범은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JH그룹에서는 매년 40억 원을 기부하는데 그는 평소에 서류에 서명만 했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올해 서명할 때 그 기부처가 진안영이 근무했던 학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서명을 마치고 서류를 이지안에게 넘기면서 그는 무심코 물었다.이지안이 말하길 오늘이 기부식이라고 했다.그래서 조진범은 학교에 오게 되었다.학교에서 그는 청소하는 임지유와 그녀의 딸 임연서를 만났다. 임지유는 진안영의 소식을 물으며 그가 혹시 그녀가 임신해서 그만둔 것인지 궁금해했다.조진범은 당황했다. 진안영이 사직한 것이다.눈발이 흩날리는 가운데 검은색 코트를 입은 조진범은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학교 선생님들은 그가 진안영의 남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가 진안영 때문에 기
조진범이 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그냥 잠깐 걷다 왔어요.”원래 조진범은 회사로 가 회의를 열어야 했지만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 조진범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는 이지안에게 몇 마디 지시를 내린 후 곧장 혼자 차를 몰고는 집으로 돌아갔다.이혼 후, 그는 부모님이 계신 저택으로 들어가지 않고 여전히 신혼 때 아내와 살던 별장에서 지내고 있었다.차를 몰고 가던 중, 조진범은 갑자기 조미료 하나를 구할 수 없다며 불평하던 김 씨 아주머니를 떠올렸다. 조진범은 한 국제 마트에서 김 씨 아주머니가 원하던 그 조미료를 팔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생각난 김에 기분 전환이라도 할 겸 조진범은 그 마트로 차를 돌렸다.부드럽고 얇은 눈송이가 세상에 내려앉았다.얇은 모직 코트에 키도 185cm가 넘는 준수한 남자가 마트 안에 들어서자 많은 여자의 시선이 집중됐다. 조진범은 이미 그런 시선들이 익숙하다는 듯 받아들이며 곧장 양념 코너로 가 토마토소스 두 병을 집어 들었다.계산을 마치고 마트를 나서려던 조진범의 두 눈이 미세하게 좁혀졌다.그와 3~4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임신한 여성이 서 있었는데 마침 등을 돌리고 있어 얼굴은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어깨를 살짝 숙인 채 수입 식자재를 고르고 있었다. 정면은 보지 못했지만 조진범은 그녀의 자태가 임신 4~5개월 정도라고 유추해낼 수 있었다.그는 임산부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몇 달 뒤면 새 생명이 태어나겠네.’그리고 그는 세상의 빛을 보지도 못하고 뱃속에서 유산된 진안영의 아이를 떠올렸다. 만약 그 아이만 있었더라면 두 사람이 이혼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조진범은 곧 자신의 헛된 망상에 헛웃음이 나왔다. 진안영과 이혼하지 3개월이 다 지난 이제 와서 무슨 만약을 말한단 말인가?조진범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계산대로 가 계산을 마쳤다.불과 1분 만에 그는 김 씨 아주머니가 원했던 토마토소스를 들고 마트를 나섰다. 하지
전화를 끊고 조진범은 한참 동안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가 비로소 손끝의 담배가 꺼진 것을 발견했다. 담배의 절단된 부위로부터 담뱃재가 양복바지에 떨어져 내렸고 길쭉한 손끝은 영문도 모른 채 가볍게 떨려 났다.다시 눈을 들어보니 그 임산부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문득 조진범은 가속 페달을 밟은 후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뒤쫓아갔지만 백 미터 정도 달려나가더니 다시 급정거하며 차를 멈춰 세웠다. 온몸이 심하게 떨려 나고 그는 가볍게 숨을 헐떡이며 정신을 차렸다.조진범은 손가락을 떨며 담배 반 토막에 다시 불을 붙였다.뭘 하고 있는 거지?왜 미친 것마냥 처음 보는 임산부를 뒤쫓아 갔던 거지? 임산부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이렇게까지 감정제어가 안 된다고? 아니라면 어깨에 늘어뜨린 푸른 머리카락이 전처와 똑 닮았기 때문일까?만약...만약 진안영이 임신했다면 그녀도 풍만한 몸으로 이런 슈퍼마켓에 와서 어린아이들 물건을 사고 눈 오는 날 혼자 걷지 않았을까?그렇다면 남편은?여자의 남편은 왜 그녀를 데리러 오지 않았을까? 사이가 좋지 않은 걸까?조진범의 눈동자가 점차 흐릿해져 갔다.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왜 낯선 여자의 사생활을 들여다보고 있는 거지? 조진범은 이제 반드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와야 한다.그렇다. 조진범의 삶.조진범은 정지혜라는 여자와 선을 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진안영과 선을 본 지 이제 1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불과 1년 만에 그는 결국 또 실혼을 하고 또 선을 보러 간다... 모든 것은 겨우 1년밖에 되지 않았다.부드러운 가랑눈이 자동차 앞 유리에 푸슬푸슬 내려앉았다.조진범은 와이퍼를 작동시켰다. 끊임없이 좌우로 흔들리는 검은 와이퍼는 마치 이 아득한 세상 사이의 유일한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그는 조용히 그 와이퍼를 지켜보며 남은 담배를 천천히 피웠다.잠시 후, 차에 시동이 걸리고 조진범은 이 자욱한 눈 사이로 자취를 감춰버렸다.자동차의 바퀴 자국은 북쪽으로 향했고...조금 전 진안영의 발자국은 남쪽
하지만 조은희는 그 답변에 만족하지 않았고 눈물이 맺힌 채 애처롭게 다시 물었다.“결혼했어요? 다른 사람이 있어요? 아직도 저를 좋아해요?”그녀가 물었을 때 처음보다 조금 더 고집스러워졌고 그 모습에 진석은 마음이 아팠다.진석은 그들이 헤어졌을 때 조은희가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소녀였다는 것을 기억했다.하지만 지금 조은희는 이렇게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질문을 던지며 진석에게 묻고 있었다. 그녀가 점점 용감해질수록 그의 마음은 더 아팠다.진석은 더 이상 조은희를 놀리지 않았다.그는 조은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지하게 답했다.“결혼 안 했고 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없어. 약혼녀는 다리 치료를 마친 후 올 상반기에 결혼할 거야. 아직도 좋아해. 많이 좋아해.”...조은희의 눈가는 더욱 붉어졌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래도 그게 제가 진석 씨와 사귀겠다는 뜻은 아니에요. 아직도 화가 안 풀렸어요.”진석은 한 걸음 다가가 그녀 눈가의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5년이 지난 지금 조은희는 눈물이 많은 여린 여자가 되었다. 그는 예전 조은희가 항상 웃고 뒤에서 그를 끌어안으며 ‘진 선생님’이라고 달콤하게 불렀던 기억을 떠올렸다.그녀를 좋아하는 것 그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그때 그는 자신이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았지만, 여전히 그 감정을 시작했다. 그 후 조은희는 해외로 떠났고 진석은 B시에 남았다. 그 뒤 1년 동안 진석은 조은희가 아무 말 없이 떠난 것에 대해 그녀를 미워하기도 했었다. 자신을 먼저 유혹한 것도 조은희였기에 더 화가 났다.하지만 그가 나중에 생각하니 조은희는 겨우 20살이었다.진석은 조은희의 첫사랑이었고 그녀의 청춘 그 전부였다. 게다가 그녀는 진심으로 진석을 사랑했기에 그녀를 비난할 수 없었다.진석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울지 마. 알겠지? 우리의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먼저 학교 관계자들과 저녁을 먹어야지. 도서관도 지어야 하잖아. 그곳도 우리가 갔던 곳이었지.”그는 조은희가 대답하기 전에
순간 조은희의 생각이 멈추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조은희는 진석의 의도를 알 수 없었고 그가 굳이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이유도 이해할 수 없었다.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미 진석은 그녀를 차에서 이끌어 내리고 있었다.학교에서 준비한 식당은 학교 근처에 있었고 과거에 조은희가 진석과 함께 와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별도로 방을 예약하지 않았었다.익숙한 장소를 다시 찾으니 묘한 감회가 밀려왔다.진석과 조은희는 나란히 안으로 들어섰다. 키가 185cm인 남자와 170cm인 여자는 잘생긴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의 조합으로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들 사이의 과거를 아는 학교 관계자들은 자연스럽게 몇 마디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띄웠다.조은희는 약간 불편한 기색을 띠며 가볍게 입을 열었다.“어린 시절엔 철이 없었죠.”반면 최근 몇 년간 사업을 통해 단련된 진석은 여유로운 미소로 담담하게 응대했다.“과거의 인연을 다시 이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것으로 보여요.”그 말이 나오자 학교 관계자들은 그 의미를 바로 알아챘다. 진석이 조은희 때문에 온 것임이 분명했다. 그 1억이 전부 조은희 덕분이었기에 학교 관계자들은 일부러 조은희를 진석의 옆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조은희에게 음료만 권하면서 농담을 건넸다. “잠시 후 진석이 취하시면 조은희가 집에 데려다줘야겠어. 그렇지 않으면 큰일 날 수도 있잖아.”조은희는 그들의 관계를 설명하려 했지만, 탁자 아래로 내려간 그녀의 손이 진석의 손에 잡혔다.진석의 손길은 매우 부드러웠고 남녀 간의 감정이 담긴 것 같지 않은 마치 어른이 아이를 다정하게 어루만지듯 따스한 느낌이었다.조은희의 붉은 입술이 약간 떨렸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후 손을 빼냈고 진석은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그는 학교 관계자들에게 술을 따라주며 먼저 한 잔을 마셨다.교장은 여전히 예전의 그 교장이었고 진석의 이런 모습을 보고 깊은 감회에 잠긴 듯 말했다.“많이 변했구나.”감상적인 분위
그날 밤 조은희는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 후 며칠 동안 그녀는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 조은혁은 그 시간 동안 새로 들인 취미인 거북이들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박연희는 그 모습을 보며 농담을 던졌다. “늙으니까 이런 거나 만지고 있지.” 그날 밤 조은혁은 거북이들을 모두 방생하며 자신이 아직 늙지 않았음을 증명하려 들었다. 심지어 한 마리 거북이 등에 ‘진석’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으며 괜히 화풀이도 했다. 박연희는 그 모습을 보며 유치하다며 혀를 찼다. 조은희는 이 모든 일을 몰랐다. 그녀는 그저 아버지가 며칠째 자신에게 집에만 있지 말고 좀 나가보라며 걱정하고 있는 것만 알았다. 일주일이 지나며 휴가가 끝났고 조은희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그녀는 대학에서 미술학과 학생들을 가르치며 그림 수업을 맡고 있었다. 가끔 그녀는 자신이 진석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싶었지만 딱히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그래도 일하는 게 나쁘지는 않았다. 저녁 해 질 녘이었다. 조은희는 차 열쇠를 챙겼다. 차를 몰고 가 간단한 간식을 사서 집에 돌아와 드라마를 보며 먹을 계획이었다. 그녀의 일상은 단순했고 굳이 그것을 깰 생각도 없었다. 며칠 전에 그 일은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저 진석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저녁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조은희의 얼굴은 노을빛에 물들어 더욱 맑고 투명해 보였다. 그녀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차 문을 열려던 순간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은희야.” 그 목소리는 진석이였다. 조은희는 천천히 돌아섰고 그곳에 서 있는 진석을 보았다. 그는 몇몇 교직원들과 함께 기부에 관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조은희는 학교의 오래된 도서관 건물을 새로 짓기 위한 기부를 논의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재회에 조은희는 순간적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진석의 눈빛은 깊고도 복잡했다. 이 학교는 그들이 과거에 함께 있었던 곳이었
휴게실에서 조은희는 진안영의 품에 안겨 억눌린 채로 울고 있었다. 진안영은 그녀의 부드러운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좋아한다면 내가 대신 가서 말해줄게요.” 조은희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빠가 언니를 대역죄인이라고 할 거예요.” 진안영은 잠시 멈칫한 뒤 부드럽게 말했다. “진범 씨가 도와줄 거예요.” 조은희는 진안영의 품에 더욱 몸을 기댄 채 계속 울었지만 오늘이 조우찬의 첫돌 날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래서 조금만 울고 말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누구나 젊은 시절에는 눈물을 흘리기 마련이니까. 그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만 들어도 그 사람이 온화하고 점잖은 사람이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진안영은 그가 누군지는 몰라도 자기 남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문 열어볼게요.” 진안영이 문을 열었을 때 예상대로 문밖에는 진석이 서 있었다. 진안영은 그와 눈을 마주쳤지만 아무 감정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가 조용히 말했다. “두 분이 얘기하세요.” 진석은 고개를 끄덕였고 진안영은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휴게실 안은 여전히 조은희의 울음소리만 가득했다. 그녀는 왜 이렇게 슬픈 걸까. 다시 그 사람을 만나는 게 이렇게 슬픈 일일까? 아니면 이 몇 년 동안 계속 슬픔에 잠겨 있었던 걸까? 진석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5년 동안 떨어져 지낸 그녀에게 다가갔다. 사실 그들이 처음 함께했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첫 만남 이후 바로 헤어졌으니까. 조은희는 그때 겨우 18살의 어린 소녀였고 5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많이 성숙해졌지만 여전히 그때의 소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언니...” 조은희는 그를 품에 안으며 애교를 부렸다. 처음엔 진안영인 줄 알았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진안영의 허리는 이렇게 강건하지 않았다. 분명히 남자의 허리였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름답고 온화한 듯하면서도 차가운 기운을 풍기
다음 해 8월. 조우현과 방유설의 아기가 첫돌을 맞았다. 방유설은 조우현에게 아들을 낳아주었고 그 아이의 이름은 조우찬으로 지어졌다. 이 이름은 큰아버지인 조진범이 지어준 것이었고 방유설은 이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한편 조진범과 진안영의 막내아들의 이름은 조우진이었다. 조우찬과 조우진, 이 두 아이는 조씨 가문의 차세대 남자아이들이었다. 하지만 가문에서 첫 아이는 여전히 진아현이었다. 현재로서는 유일무이한 작은 공주님으로서 이 작은 소녀는 조은희 고모를 따라다니는 걸 좋아했다. 올해로 세 살 반이 된 진아현은 곧 유치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다. 조우찬의 돌잔치 날 조은희는 여전히 진아현을 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예상치 못한 옛사람을 마주쳤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해 그녀가 타국으로 떠난 이후로 가끔 스쳐 지나갈 뿐 이렇게 제대로 얼굴을 마주한 적은 없었다. 몇 년이 지났을까. 조은희는 차마 생각하기조차 두려웠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시간이 흐른 듯했다. 흐릿한 기억 속에서 벌써 4, 5년이 된 것 같았다. 진석은 옆에 아무도 없이 홀로 서 있었다. 그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행사장의 중앙에서 다른 이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조씨 가문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예전의 일은 잊은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조은희 진아현의 손을 잡고 있었고 저절로 눈물이 고였다. 진아현은 고개를 들어 고모를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모, 저 사람 좋아해요?” “아니야.” 조은희는 순간 당황하며 빠르게 대답했다. 하지만 진아현은 그 말을 믿지 않는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럼 왜 자꾸 그 사람만 보고 있어요? 물론 잘생겼긴 하지만 여자애들은 좀 더 절제해야 해요.” 조은희는 잠시 놀라며 물었다. “어디서 그런 걸 배웠어?” 진아현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아빠가 그랬어요! 아빠가 항상 엄마한테 말했어요. 잘생겼어도 자기만 보면 안 된다고. 여
유이안의 말이 끝나자 조씨 가문 사람들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박연희였다. 그녀는 서둘러 유이안에 물었다. “유설이 상태는 괜찮아?” 유이안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외숙모, 걱정하지 마세요! 유설 씨 상태는 좋아요. 그냥 조금 놀란 것 같아요. 우현이가 안에서 곁에 있어 주고 있어요.” 박연희가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서 조은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뜻밖에 아이라니. 그게 좋은 거지! 좋은 거야.” 두 사람의 부부 사이는 원래도 좋았지만 부모라면 누구나 손주를 보고 싶어 하는 법이다. 게다가 조우현과 방유설의 외모가 워낙 출중하니 그 아이 역시 틀림없이 예쁠 거라는 생각에 조은혁은 그저 상상만으로도 격동되었다. 방유설을 닮은 귀여운 딸일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한참 지난 후 조우현이 방유설을 부축하며 나왔다. 방유설은 설탕물을 조금 마신 덕분에 정신을 차렸지만 집에 돌아가 며칠은 충분히 쉬어야 했다. 특히 임신 초기 3개월 동안은 모든 일을 미루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뜻밖에 찾아온 아이였지만 방유설은 그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아직 평평한 아랫배를 감싸고 다른 손으로는 조우현의 목을 끌어안으며 마음속 깊이 행복이 가득 차올랐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 방유설도 한 번쯤은 행복을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행복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꿈에서조차 감히 바랄 수 없을 정도의 행복이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조우현이 깊은 애정을 담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목소리가 약간 잠긴 채 말했다. “유설아, 우리에게 아이가 생겼어.” 결혼한 지 오래됐지만 조우현은 가끔은 철없고 유치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성숙했고 갈수록 더욱 성숙해졌다. 가끔 방유설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우현은 젊은 나이에 결혼한 편이었고 자신의 가장 빛나는 시기를 모두 그녀에게 쏟아부은 것 같다고. 밤에 문득 잠에서 깨어날 때면 그는
몇 달 후 가을 10월쯤.방유설이 주연한 《청홍》이 대히트를 치며 영화 글러브 최우수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시상식 당일 날 조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모여 방유설을 응원하고 있었다. 진안영은 그녀가 부담을 느낄까 봐 다음에 받으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의 말을 계속 전했다. 방유설은 매우 감동했다. 진안영이 갓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를 마친 후 이렇게 와서 자신을 응원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방유설은 진안영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난 이미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상을 받았어요.” 진안영은 원래 차분한 성격인데 방유설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너는 우현이랑 있으면 사람이 이렇게 활발해져! 우현이가 사람을 잘 챙긴다고 네 아주버님이 자주 칭찬하셔.” 방유설은 조금 부끄러워하며 작은 목소리로 진안영과 얘기했다. 조은희는 사탕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평소에 연기하면서 다이어트해도 이럴 때는 사탕 하나 드세요. 나중에 여우주연상 받고 저혈당으로 쓰러지면 안 되잖아요.” 방유설은 사탕을 받아서 입에 넣었다. 우유사탕이 입안에서 달콤하게 녹았다. 조은희는 살짝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딱 봐도 언니예요! 다른 여배우들보다 언니가 훨씬 이뻐요.” 조우현은 여동생을 흘깃 보며 말했다. “이건 외모로 결정되는 게 아니야. 외모만 보고 결정되면 긴장감이 없잖아.” 조은희는 달콤한 사랑을 떠먹은 기분에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이때 최우수 남자주연상이 발표되었고 다른 영화의 남자 주연이 받게 되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박도원이었다. 그는 국내에 없어서 촬영 감독이 대신 상을 받으며 발언 중 여러 번 방유설을 언급했다. 갑자기 설원 커플 팬들이 들썩이며 이 장면을 모든 플랫폼에 퍼뜨렸다. 설원 커플 팬클럽에서 활동 중인 팬들은 102만 명에 달한다. 그렇게 인기 있는 커플이었다. 조우현은 아내의 직업을 존중하는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주며 그저 코를 머쓱할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방유설은 가장 떠들썩한 설날을 보냈다. 3월쯤 그녀는 조우현과 결혼했다. 그녀의 웨딩드레스와 베일은 무려 3미터 길이였고 어르신들은 베일이 길수록 결혼이 오래 지속된다고 했기에 조우현은 3미터 길이의 베일을 디자인하게 했다. 그는 그녀에게 평생을 함께할 거라고 약속했다. 교회 종소리가 울리자 방유설은 조진범의 손에 이끌려 천천히 조우현에게 다가갔다. 이제부터 그들은 하나가 되었고 그의 가족도 그녀의 가족이 되어 함께 기쁨과 고난을 나누게 되었다. 10여 미터의 거리. 그 길은 마치 그들이 걸어온 4년과 닮아 있었다. 순백의 제단 앞에서 조진범은 방유설을 동생에게 넘기며 가볍게 동생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 대해라.” 조우현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베일 너머로 방유설을 바라보았다. 오늘에 그녀는 순백의 모란꽃 같았다. 조우현은 부드럽게 방유설의 베일을 올리며 그녀에게 그의 눈을 바라보게 하며 결혼식을 마치려 했다. 그들은 이 감동적인 순간을 함께 목격할 것이고 잠시 후 서약을 마치면 그들은 진정한 부부가 될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백발이 될 때까지 그것이 그가 그녀에게 약속한 평생의 로맨스였다. 서로의 눈을 마주하며 그들의 감정은 깊었고 후회는 없었다! 방유설은 연예인이었기 때문에 생중계가 이루어졌고 그녀는 생중계 수익은 모두 산간 지역의 아이들에게 기부했다. 네티즌들은 광고비를 통해 많은 수익을 올렸고 한 번의 생중계에서만 160억 정도의 이익을 얻었다. 네티즌들은 생중계를 보며 신나서 토론했다. [와! 조우현의 큰형도 잘생겼네.] [너무 아쉬워. 결혼을 너무 일찍 했어.] [여동생도 엄청 이쁘네! 이 가족은 다들 왜 이렇게 훈훈하지?] [저런 부모님이라니. 부러워!] 조씨 가문에 대한 댓글이 잠잠해지고 이번에는 유씨 가문으로 넘어갔다. [YS 그룹 대표도 너무 잘생겼잖아!] [영국에 모델 같아. 혼혈인가?] [100% 순수 본토! 얼굴이 완벽할 뿐!]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저택 앞 계단에서 조우현과 방유설은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박도원이 차에서 내렸다. 오늘 밤 그는 유난히 단정하고 멋져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조우현은 곧바로 얼굴을 찌푸렸다. 박도원이 공작새처럼 너무 화려하게 꾸미고 왔기 때문이다. 조우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나중에 유설이에게 물어봐야겠다. 나랑 박도원중에 누가 더 잘생겼는지. 박도원은 저물어가는 노을 속을 걸어왔다. 방유설은 앞으로 나가 그를 꼭 안아주었다. 그동안 많은 일을 겪으면서 이제 그들은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였다. 조우현은 그 모습을 보고 참지 못하고 말했다. “꼭 그렇게까지 친밀해야 해?” 방유설과 박도원의 포옹이 끝나자 조우현은 자신도 박도원과 포옹하겠다고 나섰다. 박도원은 당황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리고 순간 조우현의 힘에 거의 날아갈 뻔했다! 조우현은 다가가 박도원을 단단히 끌어안고 그의 등을 세차게 두드리며 말했다. “네가 떠난다니 정말 많이 보고 싶을 거 같아.” 박도원은 말문이 막혔다. 방유설은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한숨을 쉬었다. 도저히 조우현이 자기 집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났는데 어쩜 아직도 저렇게 유치할까? 밥은 다 먹은 후에도 조우현은 여전히 소심하고 질투가 많았다. 그러나 박도원은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조우현 같은 사람만이 방유설의 차가운 삶을 따뜻하게 채워줄 수 있었다. 박도원은 자신이 방유설을 온전히 채워줄 수 없음을 느꼈다. 박도원은 방유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너무나도 부족했고 방유설에 대한 감정도 너무 단순했다. 하지만 조우현은 달랐다. 그에게는 든든한 형제자매와 부모님이 있었다. 박도원은 씁쓸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그래도 이번엔 질투 좀 해도 되겠지. 그날 밤은 박도원이 B시에 머무는 마지막 밤이었다. 다음 날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P국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식사 중 몇 잔의 술이 오갔고 모두 조금씩 취기가 올라왔다. 두 남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