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를 끊고 조진범은 한참 동안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가 비로소 손끝의 담배가 꺼진 것을 발견했다. 담배의 절단된 부위로부터 담뱃재가 양복바지에 떨어져 내렸고 길쭉한 손끝은 영문도 모른 채 가볍게 떨려 났다.다시 눈을 들어보니 그 임산부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문득 조진범은 가속 페달을 밟은 후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뒤쫓아갔지만 백 미터 정도 달려나가더니 다시 급정거하며 차를 멈춰 세웠다. 온몸이 심하게 떨려 나고 그는 가볍게 숨을 헐떡이며 정신을 차렸다.조진범은 손가락을 떨며 담배 반 토막에 다시 불을 붙였다.뭘 하고 있는 거지?왜 미친 것마냥 처음 보는 임산부를 뒤쫓아 갔던 거지? 임산부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이렇게까지 감정제어가 안 된다고? 아니라면 어깨에 늘어뜨린 푸른 머리카락이 전처와 똑 닮았기 때문일까?만약...만약 진안영이 임신했다면 그녀도 풍만한 몸으로 이런 슈퍼마켓에 와서 어린아이들 물건을 사고 눈 오는 날 혼자 걷지 않았을까?그렇다면 남편은?여자의 남편은 왜 그녀를 데리러 오지 않았을까? 사이가 좋지 않은 걸까?조진범의 눈동자가 점차 흐릿해져 갔다.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왜 낯선 여자의 사생활을 들여다보고 있는 거지? 조진범은 이제 반드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와야 한다.그렇다. 조진범의 삶.조진범은 정지혜라는 여자와 선을 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진안영과 선을 본 지 이제 1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불과 1년 만에 그는 결국 또 실혼을 하고 또 선을 보러 간다... 모든 것은 겨우 1년밖에 되지 않았다.부드러운 가랑눈이 자동차 앞 유리에 푸슬푸슬 내려앉았다.조진범은 와이퍼를 작동시켰다. 끊임없이 좌우로 흔들리는 검은 와이퍼는 마치 이 아득한 세상 사이의 유일한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그는 조용히 그 와이퍼를 지켜보며 남은 담배를 천천히 피웠다.잠시 후, 차에 시동이 걸리고 조진범은 이 자욱한 눈 사이로 자취를 감춰버렸다.자동차의 바퀴 자국은 북쪽으로 향했고...조금 전 진안영의 발자국은 남쪽
조진범은 수조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 재벌로서 B시에서도 셀 수 없이 많은 여자들이 그를 차지하기 위해 몰려든다. 하여 그와 소개팅할 수 있는 기회도 매우 흔치 않은 기회이다. 그리고 정지혜는 부잣집 귀부인이 되기 위한 기본 소양을 잘 알고 있다. 묵묵히듣고 생각하지 않고 철만 들면 된다.김유연을 이야기하고 나서 화제는 또다시 끊어졌다.정지혜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맞은편 남자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카페 밖으로 쏜살같이 뛰어나갔다. 어찌나 빠른지 정지혜도 당황할 지경이다.“조 대표님, 왜 그러세요?”정지혜는 다급하게 그를 불렀지만 조진범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조 대표가 이토록 추태를 부리는건지 정지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회사에 급한 일이라도 생긴건가?...카페 입구.과거를 함께 했던 부부가 다시금 같은 공간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단지 몇 걸음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단지 석 달 동안 헤어졌을 뿐인데, 이미 수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었다...그리고 조진범은 진안영의 배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진안영이 임신했다.진안영이 임신했다니.조진범은 아이를 가져본적이 없지만 기본적인 상식 정도는 잘 알고 있다. 진안영의 불러온 배 크기라면 확실히 임신 3~4개월 차이다, 즉 그들이 이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진안영은 바로 하도경과 함께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날 이혼 합의서에 서명한 후, 바로 사귀게 되었단 말인가?진안영의 말이 사실이었다니.진안영과 하도경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다.그런데 조진범은 그 와중에도 혹여나 진안영이 그를 속인건 아닐까 하는 환상에 빠져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뜻밖에 남겨진 그녀의 옷을 아련하게 바라보고 또 그녀에게 전화를 걸까, 핑계를 대며 그녀를 만나러 갈까 하는 우스꽝스러운 생각이나 했다... 같은 시각, 진안영은 이미 하도경의 아이를 임신했는데 말이다.정말 우습기 그지없군.분노와 실망이 조진범의 모든 감정을 삼켜버렸다. 하여 그는 눈앞의 전처를 바라보며 비아
사실 진안영은 조진범과 재회할 생각이 없었다.조진범은 그녀에게 해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비아냥거리며 그녀를 조롱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여자친구도 데리고 와 그녀에게 보여주었다.그의 새 여자친구는 그와 함께 있으면 아주 잘 어울리는 고급스러운 여자였다. 이에 진안영은 저도 모르게 문득 작년 회사 송년회에 그녀를 데려가길 원하지 않았던 조진범을 떠올렸다. 그렇다. 조진범은 늘 정지혜와 같이 똑똑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뿜어내는 여자를 좋아했다.씁쓸했지만 진안영은 애써 품격을 유지하며 예의를 차렸다.그녀는 조진범과 이미 이혼했고 과거의 일도 다 지나가 이제 과거일 뿐이다. 하여 말을 마치고 진안영은 정지혜를 향해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 떠나려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곧이어 조진범이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이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다.남자의 엄청난 힘에 진안영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손목 통증이 참기 힘들 정도로 순식간에 퍼져서 심지어 약간의 연한 푸른빛이 비쳤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낮게 비명을 지른 후 그를 올려다보았는데 진안영의 눈빛 속에는 조진범을 향한 경고가 가득했다.‘조진범 씨, 우린 이미 이혼했어요.’‘당신의 새 여자친구가 아직 여기에 있는데 이렇게 내 손목을 잡고 있는 게 정말 적합하다고 생각하세요?’하지만 진안영은 끝내 그 말들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그렇지 않으면 결국 난처한 사람은 진안영뿐일 테니까.조진범 역시 당연히 부적합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진안영의 가는 손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단지 입에서 나온 말은 또다시 날카로운 바늘처럼 진안영의 심장을 쿡쿡 찔러댔다.“진안영 씨, 안심하세요. 만약 제가 언제 결혼하면 첫 번째로 가장 먼저 당신에게 청첩장을 보낼 거니까.”조진범과 두 눈을 마주했지만 그의 눈동자 속에 비친 감정은 한없이 싸늘했다.진안영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진안영 씨.한 번의 사랑과 한 번의 결혼을 거쳐 돌아온 대답은 “진안영 씨”였다.그러나
조은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바람을 피우는 남자는 두 개의 핸드폰을 갖고 다니는 건가?유선우가 샤워를 하고 있을 때, 그의 애인이 셀카 한 장을 보냈다.아주 젊은 여자였는데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비싼 옷들을 입고 있으니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보였다.「선우 씨, 생일 선물 고마워요.」조은서는 눈이 아플 때까지 핸드폰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녀는 유선우 곁에 여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다만 이런 여자일 줄은 몰랐다. 마음이 아픈 외에, 남편의 취향을 알게 되어 놀랐다.그녀는 미안하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유선우의 비밀을 알게 되었으니까 말이다.등 뒤에서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선우가 물기에 살짝 젖은 채로 나왔다. 새하얀 샤워 가운은 선이 분명한 복근과 가슴을 가려주고 있었는데 더욱 섹시해 보였다.“언제까지 볼 거야.”그는 조은서 손에서 핸드폰을 뺏고 그녀를 힐긋 보더니 옷을 입기 시작했다.유선우는 아내에게 불륜을 들켜서 미안하다거나, 마음이 찔린다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조은서는 그런 유선우의 태도가 그의 경제 수입에서 온다는 것을 알았다. 조은서는 결혼 전에는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였지만 지금은 그저 유선우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사는 가정주부니까.조은서는 그 사진으로 따지고 들지 않았다. 따지고 들 수 없었다.나가려는 유선우를 본 조은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선우 씨, 나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유선우는 천천히 벨트를 매고 조은서를 보며 작게 웃었다. 아마도 아까 침대에서 가냘픈 목소리로 반응하며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 모양이었다.“또 하려고?”이건 사랑이 아닌 그저 관계일 뿐이다.유선우는 조은서를 아내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실수였을 뿐이고, 어쩔 수 없이 한 결혼이니까.시선을 거둔 유선우는 침대맡에 놓인 파테크 필리프 시계를 손에 차며 담담한 말투로 얘기했다.“오 분 정도밖에 없어. 운전기사가 밑에서 날 기다리고 있고.”조은
6년이다. 조은서는 유선우를 6년 동안 좋아했다.힘이 빠진 조은서는 그냥 그대로 눈을 감았다....유선우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금요일 저녁, 조은서의 친정에는 큰일이 생겼다.조씨 가문의 장남인 조은혁이 JH 그룹의 경제 범죄 사건 때문에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10년은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기 충분한 시간이다.그날 밤, 조은서의 아버지는 급성 뇌출혈로 병원에 실려 갔고 상황이 긴급해 수술이 필요했다.조은서는 병원 복도에 서서 계속 유선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유선우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조은서가 포기하려고 할 때, 유선우가 문자를 보냈다.여전히 짧은 문자였다.「H시에 있어. 일이 있으면 진 비서에게 연락해.」조은서가 또 전화를 걸자 유선우는 전화를 받았다. 조은서는 급하게 입을 열었다.“선우 씨, 지금 우리 아빠가...”유선우는 그런 조은서의 말을 끊었다. 귀찮아하는 기색을 드러내며 얘기했다.“돈이 필요한 거잖아? 몇 번을 말해. 돈이 급한 거면 진 비서를 찾아가라고. 조은서, 듣고 있어?”...조은서는 고개를 들어 무표정으로 스크린을 쳐다보았다. 스크린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YS의약 그룹 대표 타워랜드 대절, 이성 친구를 위한 불꽃 축제」화면 속에는 불꽃이 예쁘게 터지고 있었다.젊은 여자가 휠체어에 앉아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조은서의 남편인 유선우는 바로 그 휠체어 뒤에서 핸드폰을 쥔 채 그녀와 통화하고 있었다.조은서는 눈을 깜빡였다.그러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선우 씨, 지금 어디예요?”유선우는 잠시 멈칫했다. 조사받는 기분이 좋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저 대충 대답했다.“바빠. 별일 없으면 이만 끊을게. 진 비서한테 연락해.”유선우는 울먹이는 조은서의 말투를 눈치채지 못했다. 다만 고개를 숙여 옆의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이 꽤 다정했다.조은서는 눈앞이 까매지는 기분이었다.아, 유선우에게도 부드러운 면이 있구나.등 뒤에서는 새엄마인 심
3일 후, 유선우는 B시로 돌아왔다.저녁, 어둠이 드리워진 별장에 검은색 차량이 들어와 시동을 껐다.운전기사가 내려서 차 문을 열었다.차에서 내린 유선우는 문을 닫았다. 물건을 들려고 하는 운전기사를 보며 담담하게 얘기했다.“내가 직접 올려갑니다.”거실에 들어서자 고용인들이 몰려왔다.“며칠 전, 장인어른께서 쓰러져서 사모님의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지금은 위층에 계십니다.”조씨 가문의 일은 유선우도 이미 알고 있었다.조금 무거운 심정으로 짐을 들고 올라와 침실 문을 여니 조은서는 화장대 앞에 앉아서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다.짐을 내려놓은 유선우는 넥타이를 풀면서 침대 옆에 앉아 조은서를 쳐다보았다.결혼 후, 조은서는 항상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물건 정리라거나, 디저트 만들기라거나. 만약 그녀의 예쁜 외모와 몸매가 아니었다면 유선우에게는 진짜 가정부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한참이 지나도 조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출장을 다녀온 유선우는 피곤했다. 조은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그도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저 옷장에서 가운을 가진 후 샤워실로 들어갔다.샤워를 하면서 그는 생각했다. 조은서처럼 나약한 성격의 사람이라면 유선우가 샤워를 마치고 나올 때쯤이면 이미 그의 짐을 정리하고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원래의 부드러운 아내로 돌아올 것이라고.유선우는 자신만만하게 생각했다.하지만 샤워실에서 나온 그가 원래 자리에 있는 캐리어를 봤을 때, 유선우는 조은서와 얘기를 나눠봐야겠다고 생각했다.유선우는 소파에 앉아서 아무 잡지나 들었다.한참 지나서야 시선을 들어 조은서에게 물었다.“아버님은 좀 어떠셔? 그날 밤은... 이미 진 비서를 혼냈어.”성의 한 톨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말투였다.조은서는 하던 일을 멈추고 시선을 들어 거울 속의 유선우와 시선을 맞추었다.거울 속의 유선우는 선명한 이목구비에 우아한 자태를 가진 남자였다.한참을 보던 조은서는 눈이 뻐근해질 때야 입을 열었다.“선우 씨, 우리 이혼해요.”유선우는 놀라서 굳어버렸
“그래요, 우리 집이 어려우니까 매달 2천만 원씩 주고 있죠. 하지만 그 수표를 받을 때마다 나는 내가 싸구려 여자로 느껴져요. 당신 욕구나 받아주고 받는 돈 같다고요!”...유선우는 차갑게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정말 그렇게 생각해?”유선우는 조은서의 턱을 잡고 물었다.“당신처럼 남자한테 못 맞춰주는 여자가, 신음도 낼 줄 몰라서 고양이처럼 소리 내는 여자가 본인을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혼하고 싶다고? 당신이 날 떠나서 어떤 삶을 살 것 같아?”조은서는 그런 유선우의 손길이 아파서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하지만 유선우는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차갑게 조은서의 약지를 봤다. 아무것도 없이 깨끗한 약지를 본 그가 물었다.“결혼반지는?”“팔았어요.”조은서는 슬픈 말투로 얘기했다.“그러니까 선우 씨, 우리 이혼해요.”그말을 마친 조은서는 온몸에 힘이 빠졌다. 유선우는 그녀가 6년 동안 사랑한 남자다. 만약 그날 밤이 없었다면, 그날 화려한 불꽃을 보지 못했다면, 이곳에 남아서 사랑도 없는 혼인 생활을 이어 나갔을 것이다.하지만 이미 모든 것을 봐버린 이상, 조은서는 더는 유선우와 함께 지낼 수 없었다.이혼하면 이것보다 더욱 힘들지도 몰랐다. 유선우의 말처럼 상사의 눈치를 보며 몇백만 원의 월급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후회되지는 않았다.말을 마친 조은서는 천천히 자기 손을 빼냈다.그리고 캐리어를 꺼내 자기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유선우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조은서의 여린 몸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는 조은서가 이렇게 행동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전혀 없었다. 갑자기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아무 예고도 없이 이혼하겠다니.유선우의 마음속에는 화가 피어올랐다.그리고 그는 바로 조은서를 안아 들어 침대로 던져버렸다.조은서 위에 유선우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유선우는 조은서와 얼굴을 맞댔다. 눈과 눈, 코끝과 코끝이 닿았다. 뜨거운 기운이 둘 사이를 감쌌다.그러더니 유선우가 입술을 조은서의 귓가로 가져가더니 얘기했다.“
유선우의 이성의 끈은 끊어지기 직전이었다.게다가 유선우 밑에 깔린 조은서의 온기가 전해져 왔다. 유선우는 조은서를 사랑하지는 않지만 이 몸은 사랑한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는 매우 당연하게 이 몸을 소유하고 싶었다.조은서는 유선우의 어깨를 밀며 흐트러진 호흡으로 얘기했다.“선우 씨, 저 요즘 약을 안 먹어서 임신할지도 몰라요.”그 말을 들은 유선우는 그대로 굳었다.아무리 생각해도 충동적으로 행동해서 두 사람의 아이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한참 지나서 그는 웃더니 얘기했다.“요근래 생각할 게 많았나 봐?”조은서의 반항은 유선우의 눈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유선우는 한 손으로 침대를 짚고, 다른 한 손으로 침대맡의 서랍에서 아직 포장지를 뜯지 않은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 작은 상자에는 영어 자모 세 개가 적혀있었다.포장을 뜯으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유선우는 신경 쓰지 않고 한 손으로 포장을 뜯고 몸을 숙여 조은서에게 입을 맞췄다. 조은서는 여전히 반항하며 도망치려고 했다. 그리고 핸드폰은 계속 울렸다.결국 유선우는 짜증을 내며 핸드폰을 받았다.전화를 건 사람은 유선우의 어머니인 함은숙이었다.함은숙은 담담한 말투로 얘기했다.“선우야, 할머니께서 편찮으시다. 돌아와 봐야 할 것 같아. 맞아, 그 애도 데려와. 할머님이 그 애가 만든 영양 찰떡이 먹고 싶으시대.”함은숙도 조은서를 썩 좋아하지 않았기에 말투는 차가웠다.유선우는 진유진의 몸을 한 손으로 누르며 그녀를 내리깔아 보았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곧 데리고 갈게요.”조은서는 힘이 풀려 침대에 퍼질러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일어나서 옷을 입었다.유선우는 바지 지퍼를 올리고 조은서의 가녀린 뒷모습을 힐끔 보고 또 침대맡의 박스를 보더니 입술을 달싹이고는 먼저 나갔다.조은서가 내려갈 때, 유선우는 차에서 담배를 피고 있었다.이제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져서 불빛이 없이는 앞을 볼 수가 없었다.조은서는 흰 셔츠를 입고 긴 검은 치마까지 입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