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둘러 회사로 돌아왔더니 장영식이 제니와 함께 설계도를 보고 있었다.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는 제니에게 분부했다.“수정 완료하면 설계원에 보내서 검토하게 해요.”제니는 짧게 대답한 후 얼른 나갔다.나는 장영식을 보며 물었다.“오늘 발표했다고? 그럼 전희도 이제 본인이 가망이 없다는 걸 안다는 거야...?"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을 보니 신호연이었다. 나는 순간 신호연도 소식을 전해 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소식 한번 빠르네.전화를 받았더니 건너편에서 상당히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아야, 역시 내가 널 잘 봤어. 너 정말 능력 있는 사람이구나? 이 일을 정말 해내다니!”당연히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지만 나는 인정하지 않았다.“무슨 말이야? 내가 왜? 말 좀 분명하게 해줄래?”나는 일부러 어수룩한척하며 그에게 물었다.“아, 자꾸 애태우지 말고. 한신로얄에 관한 일 네가 한 거 맞잖아.”그가 여전히 즐거운 어투로 말했다.“전희 지금 노발대발하고 있어. 여기저기 전화해서 도움 요청하는 중이야!”“제대로 말해. 도대체 무슨 일인데?”내가 추궁했다.“너 한신로얄이랑 계약 파기한 거 아니야?”신호연이 잠시 어리둥절하더니 이어 말했다.“전희가 계속 차일피일 서명을 미루다가 결국 아무 소득 없이 끝났어.”“언제 일인데?”나는 여전히 모르쇠를 댔다.“너희가 돈 써서 한 일 아니었어?”“수상쩍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야!”신호연이 추측하더니 나에게 말했다.“그럼 지아야, 혹시 이 프로젝트 싫으면 나 한 번만 도와줘! 다른 사람들이 해코지 못하게.”신호연이 열정적으로 나에게 말했다.나는 속으로 욕 한마디를 내뱉었다.‘저 뻔뻔한 놈, 꿈 깨라.’“도와준다고? 너 기억력이 금붕어구나? 어제 네 아내라는 사람이 내 뺨을 그렇게 세게 때렸는데, 그걸 벌써 잊은 거야? 널 도와 계책을 세우는 것도 대가가 필요한데 너한테 프로젝트를 줘라?”“지아야! 너 손해 보는 장사 아니야! 둘 다
나는 어머니의 말투가 심상치 않은 것 같아 얼른 물었다.“왜요? 무슨 일 있어요?”“할머니가 오늘 좀 이상해.”어머니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네가 돌아오면 좀 얘기할까 했는데. 아니면 병원에 모셔갈까?”나는 깜짝 놀라 얼른 물었다.“어떻게 이상한데요?”“병세가 심해진 것 같아. 너 언제 오느냐고 계속 묻는 데 전화해 보자니까 또 안된대. 저녁도 적게 드셨고.”어머니가 사실대로 나에게 말했다.“현우도 아직 안 왔어!”“알겠어요. 지금 바로 갈게요.”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현우 씨는 지금 저랑 있어요!”배현우가 내 안색이 좋지 않자 계속 쳐다보며 물었다.“무슨 일이에요?”전화를 끊은 나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경원에 못 돌아갈 것 같아요. 엄마가 콩이 할머니가 아픈 것 같대요.”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김향옥은 사실 말해서 배현우와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다. 이혼은 말할 것도 없고 이런 짐까지 안고 있으니, 나조차도 말을 꺼내기에 어려웠다. 그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그럼 얼른 가요!”“그... 그럼 경원에 전화 쳐서 알려줘요.”나는 겸연쩍게 말했다.“괜찮아.”그는 말을 마치고 나를 끌어당겨 함께 밖으로 나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나는 고개를 들어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현우 씨 기분 나쁘진 않겠죠? 저도 별다른 방법이 없어요... 콩이의 할머니기도 하니까...”“절 그렇게 못 믿어요?”배현우가 나를 응시하며 손을 어루만졌다.“앞으론 저한테 이런 말 하지 않아도 돼요. 할머니께서 애초에 지아 씨 돌봐준 적도 있으니까, 전 받아들일 수 있어요.”“현우 씨...”그의 말에 감동받은 나는 살며시 그의 품에 기대었다.“저는 자꾸 제가 현우 씨를 소홀히 대하는 것 같아 죄책감을 느껴요. 현우 씨가 다친 것도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지 못했고. 오늘 남미주 씨가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전 현우 씨가 얼마나 위험했는지도 몰랐을 거예요. 현우 씨가 다 저를 위해서 그런 건 알아요.”나의 말을 들으며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어머님, 지금 현우 씨가 실력이 제일 좋은 의사한테 연락하고 있어요. 이따가 병원 가서 검사하고 괜찮으면 옛집에 같이 가요. 이후엔 안심하고 여기 살아요. 이곳에는 서로 돌봐주는 사람도 있으니 저도 안심할 수 있어요.”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도 말하지 않았다. 마치 속마음을 억누르는 것 같았다.“어머님께서 집에 가시면 제가 어떻게 마음을 놓겠어요. 신호연이 그렇게 믿음직스러운 사람도 아닌데 혼자서 어떻게 하시려고요.”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머님께서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감하신 것일까 하는.“일단 병원에 가서 검사해 보고 결정해요. 네?”나는 그녀를 좋게 타일렀다. 어머님께서 난처하고 조급해지지 않게.“안 간다. 나는 괜찮아. 나는 그저 집에 가보고 싶을 뿐이야. 그럼 아가, 시어머니를 도와 도우미를 좀 구해줘. 내게 돈이 있으니 돈은 내가 낼게.”김향옥이 내 손을 잡으며 감정을 참으며 울먹였다.“지아야. 전생에 내가 무슨 덕을 쌓았길래 너같이 참한 며늘아기를 얻었을까. 그런데... 미안하게...”“됐어요. 쓸데없는 생각 마세요. 저는 그저 콩이 대신 효도하는 것뿐이에요.”이때 콩이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엄마. 삼촌이 준비 다 끝났대요!”나는 콩이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알겠어. 우리 착한 콩이, 엄마가 할머니 데리고 병원 갈 테니까 외할머니랑 언니랑 집에서 기다려야 해.”“엄마, 나도 엄마랑 할머니 모시고 병원 갈래요. 제가 할머니 돌봐야 해요.”콩이가 말하며 침대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김향옥의 다리를 주물러주며 말했다.“할머니가 아프니까 콩이가 돌봐줘야 해.”웃는 김향옥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역시 내 손녀, 착하다!”바로 이때 배현우도 현관으로 들어와 침대 위의 김향옥을 바라보며 말했다.“어머님, 얼른 함께 병원 갑시다. 이미 진료해 줄 의사 선생님도 찾았어요.”“아... 아니야. 난 그냥 지아랑 얘기 좀 하고 싶어.”그녀가 말하며 배현우를 바라보았다.“배
내가 옛집에 도착했을 때 뜻밖에 신연아도 도착했다.내가 보온병을 들고 사람까지 데리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신연아가 비꼬며 말했다.“뭐야? 지가 아직도 신씨 집안 며느리인 줄 아나. 데려가 놓고 왜 또 보낸 거예요? 아니면 병원에 버리고 간 건가? 사람이 곧 죽을 것 같으니까 다시 보낸 거예요? 왜, 본인 집에서 죽을까 봐 두려워요?”신연아의 입에서 사람다운 말은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나는 그녀를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님께서 큰 침실의 침대에 누워계셨는데 신호연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어머님!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세요. 그래도 며칠 동안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 과정의 약을 다 써야지 몸에 좋죠. 그래야 더 이상 아프지도 않죠!”나는 침대 앞으로 걸어가 그녀를 나무랐다.“신호연은요?”“걔 탓하지 마라. 내가 오겠다고 한 거야. 집에 있어야 마음이 편안하니까. 그리고 걔 회사에 일이 있어서 나갔어.”그녀가 나를 보고 일어나 앉았다. 어젯밤 약을 먹은 탓인지 오늘은 다행히도 정신이 맑아 보이셨다.나는 얼른 보온병을 가져왔다.“아침 만들었으나 얼른 드셔보세요. 그리고 간호사 한 분 청했으니 병원에 정 가기가 싫으시면 신호연과 상의해서 집에서 약 써보세요. 간호사님이 경험이 풍부해서 다 아시니까. 그렇지만 간호사님 말 잘 들어야 해요!”김향옥이 일어나 침실을 나와 부엌으로 향했다.나도 얼른 뒤따라 부엌으로 향했다. 그릇과 수저를 가져다주려는 찰나 신연아가 글쎄 식탁을 엎어버렸다.“어머님? 뻔뻔해 죽겠네, 정말. 누가 어머님이라고 부르래?”정성껏 준비한 아침밥이 그대로 바닥에 마구 나뒹굴었다.이 광경에 나는 정말로 화가 났다.“신연아,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야? 밥 안 해줄 거면 안 하면 그만이지.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오늘 너랑 나랑 끝장 봐?”나는 걸어가 대문을 활짝 열고 이웃 사람들을 모두 불러들였다.“여러분 저를 도와 증인 해주세요. 이게 다 신연아가 한 짓입니다!”이후 나는 신호연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말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 나는 무력하게 그를 바라보았다.“신호연, 너 정말 대단하구나. 신연아가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네 엄마한테 손찌검했는데도 걜 보호하는 거야?”나의 말이 신호연의 체면을 깎아내린 건지, 아니면 보고 있는 이웃이 많아 대응할 수 없었던 건지, 나의 태도가 너무 강했던 건지, 혹은 내가 신씨 집안의 일에 참견하는 것이 싫었던 건지 알 수 없지만.그는 뜻밖에도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전혀 묻지 않았다. 그리고 오히려 나에게 호통쳤다.“신연아가 손찌검을 한 건지 안 한 건지 나는 못 봤으니 모르지. 내가 확실하게 본건 네가 신연아를 때리는 모습이야. 넌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괴롭힐 수가 있니?”신호연이 신연아를 품에 껴안았다. 마치 듬직한 남자가 여인을 보호하는 모양새였다.“한지아, 이건 우리 집안의 일이야. 그러니까 상관 말고 썩 꺼져. 성모 행세 하지 말고.”모여들었던 이웃들이 모두 입을 딱 벌리며 신호연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너도나도 웅성웅성 떠들어대며 그를 나무라기 시작했다.“신호연, 참 어리석구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도 않는 거야?”“불효자군. 어머니를 괴롭히는데도 참아준다라.”“아들이 맞긴 해? 병 때문에 이렇게 아프기까지 한데, 그런데도 부인이랍시고 짐승을 감싸기만 하네.”“퉤. 악독한 여자 같으니. 배은망덕해.”“이건 적게 때린 거야. 네가 잘 교육했다는 그 아내.”“...”신호연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모든 화를 나에게 돌렸다.“한지아, 이게 바로 네가 바라던 결과지? 네가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날 욕보인 거잖아. 이제 좀 화가 풀려?”이후 신호연은 문 안팎으로 서있는 이웃들에게 고함을 지르며 화를 냈다.“꺼져... 다 꺼지라고!”이웃들이 모두 화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심지어 화를 못 이겨 발을 구르기까지 했다.“언젠가 벌 받게 될 거야. 불효한 자식.”“인간성이라곤 없는 가족이네.”“...개 같은 자식.”어떤 사람들은 진작부터 화나 바로 가버렸다. 그들
나는 비명을 질렀다.“...어머님!”이때 신연아는 곁에서 욕설까지 퍼부었다.“죽은 척하는 거야! 이 목숨 질긴 할망구 같으니라고. 쌤통이다!”나는 할머니에게로 다급히 기어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마구 흔들며 울부짖었다.“어머님... 어머님 일어나봐요. 저 놀라게 하지 말고요! 어머님...”그러나 내가 아무리 어떻게 할머니를 불러도 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다. 나는 집에 모인 사람들에게 소리쳤다.“앰뷸런스 불러주세요! 빨리요!...”“어머님... 일어나 봐요! 병원, 병원 모셔갈게요...”나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나는 그녀가 이대로 가는 건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나는 다급하게 손가락을 내밀어 그녀의 숨결을 확인했다. 그러나 숨결이 너무 미약했다.눈앞의 광경은 신호연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그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땅에 누워있는 어머니를 멀뚱히 바라보았다.그리고 이때 이마에서는 여전히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할머니를 품에 안고 있었는데 내 상처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나는 땅을 헤집으며 내 가방을 찾았고 대경실색했던 간호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나를 도와 할머니를 안았다.나는 간신히 전화를 찾아 배현우에게 연락했다.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현우 씨, 의사 찾아주세요. 어머님 이제 안 될 것 같아요... 제일 실력이 좋은 의사로...”나는 횡설수설하며 소리쳤다.그는 한편으로는 나를 위로하고 한편으로는 간단하게 몇 마디 물어본 후에 나에게 몇 마디 당부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할머니를 안았다.“어머님, 일어나봐요! 함께 집 돌아가기로 했잖아요. 제가 직접 한 아침 아직 먹지도 못했잖아요!”나는 슬픔에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쨌든 내가 콩이를 낳고 산후 조리할 때 그녀는 나를 위해 정성스레 매 끼니를 챙겨주던 좋은 시어머니였다.“꼭 깨어나야 해요. 저 아직 하고 싶은 말도 많은데, 이대로 가면 절대 안 돼요!”나는 할머니에게
내 말이 너무 음산했던 탓인지 모든 사람의 관심을 이끌었다. 그들은 모두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신고요?”모두가 내가 뱉은 두 글자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고 있을 때, 나에게 부탁받은 그 이웃은 이미 내 말에 반응한 듯 즉시 전화를 돌리며 몇 마디 나누고 있었다.나는 무뚝뚝하고 짜증 섞인 얼굴로 신호연의 옆에 서 있는 신연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 후 전화를 들고 경찰에 신고했다.경찰이 오기 전, 배현우는 병원 측과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게 설득했다.신호연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한편에서 무릎을 꿇고 울부짖었다.“신호연, 이제 어머니 보러 가.”나는 공허하고 냉담하게 그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어머님 마지막 모습이야.”바닥을 짚은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할머니... 나 할머니 보고 싶어!”콩이의 울음소리가 가슴을 쥐어뜯는 듯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이미연과 도혜선이 내 곁에 와서 섰다.“우리가 함께 있을게.”“나 할머니 볼래요!”콩이가 울부짖었다.“엄마, 나도 할머니 볼래!”나는 서글픈 미소를 지어 보이고 아이에게 대답했다.“우리 콩이, 착하지? 엄마가 콩이 대신해서 할머니 잘 보내드리고 올게. 콩이 울지 마. 할머니는 콩이가 우는 것을 원하지 않아.”나는 결심한 듯 결연히 응급실로 걸어들어갔다. 이제 응급실에는 의사와 간호사가 없었고 하얀 불빛 아래 흰 천 시트가 눈이 부셨다. 본디 생의 땅이었던 이곳은 지금 이순간이순간 더없이 음산했다.내 심장은 격렬하게 뛰었다. 이날은 내가 숨 쉬지 않는 사람을 처음 본 날이었다. 두려웠지만 두렵지 않았다. 그녀는 나와 십수 년 동안 가깝게 지냈던 가족이자 내 아이의 할머니니까.이미연이 작게 내 귓가에 한마디 했다.“아니면... 아냐, 됐어.”오랫동안 묵묵히 서 있던 나는 등을 곧게 펴고 앞으로 걸어갔다.나는 시트를 살짝 열어 그녀의 얼굴
모두 성난 눈으로 노려보는 신호연을 보며 의아해했다. 그중 담이 비교적 큰 나이 지긋한 분이 신호연의 모습을 보고 꾸짖었다.“이게 무슨 소란이야? 대역무도한 것... 짐승만도 못한 놈.”“닥쳐...”신호연은 어르신을 향해 한바탕 고함을 지르더니 분노한 모습으로 나를 향해 걸어왔다. 그러고는 나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한지아, 너. 너 대체 또 뭘 하려고 그래? 우리 엄마가 죽었는데... 죽었는데...”그는 히스테릭하게 울부짖었다. 그리고 분개하여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내 곁에 서 있는 배현우를 보더니 더 다가오지 못하고 멈춰 섰다. 그리곤 나를 노려보며 계속 말했다.“신연아까지 데려간다면 이건 신씨 가문을 풍비박산 내는 거야. 난 아직 장례식도 치러야 해. 신연아는 남아서 장례를 치러야 한다고!”나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어머님은 신연아를 보고 싶어 하지 않으셔!”말을 마친 나는 경찰에게 전화번호를 남기고 가족들과 함께 병원을 떠났다.집에 돌아오자 엄마가 나에게 물었다.“그럼 할머니의 장례는... 어떡하려고?”나는 어머니를 한 번 힐끗 쳐다보고는 힘없이 그녀의 품에 안기며 말했다.“엄마! 우린 이미 배웅했어! 어머님은 아들도 있으시고. 난 내가 해야 할 일, 그리고 안 해도 될 일까지 다 했어. 그러니 이제 남은 건 신호연한테 넘겨줘야지. 우린 이제 그만할 때야.”모두가 내 말을 듣고 분분히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을 표했다.이미연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그럼 이제 더 이상 관심 주지 마. 신호연 이 짐승은 사람 될 자격이 없고, 신연아는 마땅한 벌을 받아야 해.”“관심 안 줄 거야. 난 아직 격전도 남았는걸.”나는 묵묵히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할머니의 방을 향해 걸어갔다.“잠시 조용히 있고 싶어.”방문을 열고 천천히 들어갔다. 방 안에는 아직도 그녀의 숨결이 남아있는것처럼 익숙했다.침대에 앉으니 눈에 보이는 건 김향옥의 목소리와 웃는 얼굴들뿐이다. 그녀는 웃었고 울었고 나에게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서강민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서강민 씨, 먼저 들어가시죠. 언니가 깨서 서강민 씨를 보면 또 흥분할 것 같은데... 지금 같은 상황에 언니가 회복하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마디 더 보탰다.“어떤 일들은 천천히 해야 해요. 언니한테 시간을 좀 주세요. 서로 생각을 정리해 봐요.”서강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도혜선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발길을 돌리기 전에도 아쉬움에 한 번 더 뒤돌아보며 나한테 말했다.“고생해 줘요.”나도 담담히 답했다.“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언니에게 시간을 좀 줘요. 언니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수 있잖아요.”내가 말하는 회복이 뭔지는 서강민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건 도혜선이 마음에 입은 상처였다. 오늘 도혜선의 행동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녀의 상처는 아물 수 없을 것이다. 언급만 해도 피가 흘러내릴 만한 상처였다.잠시 후, 서강민은 한발 물러섰지만, 눈길은 여전히 도혜선에게 머물러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모습 아래에서 어떠한 파도가 휘몰아치는지 나는 몰랐다.한참 전 도혜선이 했던 말들은 마디마디가 주옥이었다. 모두 그녀가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었던 것들이었고 또한 서강민의 약점이었다. 얼마나 아플지는 서강민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쓰디쓴 독주도 그는 혼자 삼켜내야만 했다.도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와 깨어나려는 낌새가 보이고 나서야 서강민은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나는 마음이 아파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도혜선의 손을 맞잡았다.인제야 하루 종일 배현우에게서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쪽에는 어떤 상황인지, 김우연에게서는 소식이 없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도혜선을 보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아 살며시 그녀의 손을 놓고 일어서려 했을때, 그녀는 다시 나를 잡으며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지 마...”나는 너무 놀라 얼른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서강민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하는 걸까?’“당시의 사고는 내가 저지른 거야. 그녀도 나 때문에 다쳐서 지금처럼 된 거고… 나는 좋은 남편이 아니야. 아내가 식물인간이 되었는데 나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말이야...”서강민은 여기까지 말하며 후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너무 죄책감이 들고 고민스러워. 나 또한 발버둥 쳐봤지.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의 일탈을 받아들일 수 있어 해. 그녀한테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강민 씨!”도혜선은 꾸짖는 듯한 말투로 그의 말을 잘랐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당신 아내가 듣고 있을 거예요. 저를 끌어들여서 같이 속죄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구세주가 아니에요. 저는 그냥 사람답게 살고 싶은 평범한 여자라고요. 저 좀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요?”도혜선은 말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녀는 한 손으로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 앞으로 갔다.“혜선 언니, 움직이지 마! 위험해...”늑골 골절과 뇌진탕이 있는 환자다 보니 이러한 행동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위험했다.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녀를 안으려고 하는 한지아를 제지했다.“제가 오늘 한 말이 아직도 이해가 안 되나요? 서강민 씨, 저의 인생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신한테 묶여 당신의 부속품이 되었었는데 저도 자존심이 있어요. 더 이상 당신처럼 지난날의 죄책감을 짊어지며 답답하게 살아가지 않을 거예요.”도혜선은 여전히 분노에 차 외치고 있었다.“매일 제 앞으로 와 지난날의 행동에 대해 속죄하라고 일깨워 주실 필요 없어요! 당신을 보면 저는 지난날 모든 서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치욕적인 과거가 떠올라요. 당신은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당신은 아내와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해요.”말을 마친 도혜선은 숨이 차올랐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도혜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당신은 아무런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저 같은 여자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아도 돼요.”그녀는 자기비하적인 말을 내뱉었다.”선아...”“설사 강민 씨가 와이프와의 약속을 안 지킨다 해도 당신의 신분과 지위로 당신에게 더 어울릴만한 사람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물며 당신네 부부 눈에는 저는 그냥 염치없고 미천한 사람일 뿐이죠. 저 같은 사람은 본처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사모님이라는 호칭도 어울리지 않죠.”“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오해하지 마.”서강민은 조급함에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아섰다.“강민 씨... 해명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행동이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어요! 장담하건대 아직 당신들이 어떤 의도로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보가 된 건 아니에요. 그녀는 정말 대단하네요. 죽을 때까지도 제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녀는 아무리 병상에 누워있어도 고상한 사람이고 저는 그냥 미천한 사람일 뿐이니 말이에요.”도혜선은 말을 내뱉으며 입가에 처량한 미소를 비췄다. 누가 봐도 가슴 아픈 미소였다.“이전의 저는 확실히 허례허식에 차 있는 사람이었지만 저도 성장했어요. 정신 차렸어요. 당신 앞에 있는 저의 진정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어요. 저는 하나의 도구, 들러리뿐이었지만 원망하지 않았어요.”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숨 돌렸다. 얼굴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하지만 이제 저는 자존감을 챙기며 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고 쓰레기같은 취급을 받더라도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고 싶어졌어요.”점점 더 차가워지는 도혜선을 바라보며 서강민은 답했다.“혜선아, 나는 널 한 번도 무시한 적 없어. 나는 그냥 내가 뭘 하든지 네가 다 이해해 줄 줄 알았어.”도혜선의 서강민의 말을 듣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안색은 더 창백해져 있었다.“이해? 당신이 어떤 말을
방금 허투루 한 말이 어머니의 진실인가 싶다. 보아하니 어머니가 나를 속이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의 의문점이 점점 많아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마치고 차씨 가문의 할머니께 말씀을 드린 후, 위층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도혜선을 보러 가려고 준비했다.그리고 팔도 겸사겸사 검사하려고 했다. 차에 앉고 나서 배현우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이 이른 아침에 뭐 하러 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김우연 쪽에 무슨 소식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생각해 보니 이렇게 빠르진 않겠지? 몇 시간밖에 안 됐는데.'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도혜선이 노발대발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병실에는 도혜선과 서강민 두 사람만 보이고 이미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내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좀 이상하고 심상치 않는 것을 느꼈다.침대 옆 머릿장에는 보온병이 놓여있다. 서강민은 오늘도 도혜선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러 온 것 같다.서강민은 침대 앞에 떡 하니 서있었고 침대에 있던 도혜선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혜선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상황을 정리하려고 다가가서 서강민에게 인사를 하고 도혜선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좀 어때?""별로야."도혜선은 차갑게 대답하더니 또 말을 건넸다. "지아야, 손님 좀 배웅해 줄래?"난감했다, 도혜선은 서강민을 내쫓으라고 하는 거였다. 난 당연히 그 뜻을 알고 있다. 조심스럽게 서강민을 쳐다보았다. "혜선아, 꼭 이래야 하니?"서강민은 씁쓸한 표정으로 도혜선을 바라보며 물었다."네! 서강민씨, 저는 이미 분명히 말했고 두 번 다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도혜선은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서강민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언니, 화 그만 내고 진정 좀 해. 초조해하는 거 알아, 점차 좋아질 거야. 강민씨랑 얘기 좀 하고 있어. 나는 팔 검사해야 돼서, 금방 돌아올 거야!"나는 핑계를 대고 떠나서 그들에게 자리를 비워주었다.
배현우는 나의 우울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에 회사 일도, 한심로얄의 마지막 한방도 둘 다 포기할 수 없잖아요. 신예 쪽 일도 있고, 전희가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요. 지금 모든 게 중요한 시기이니까요.""지금 그 누구도 아버지보다 중요하지 않아요! 수십년간 도망치면서만 살았는데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분명 아주 괴로워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데, 내가... 내가 딸로서, 난..."배현우는 내 말을 듣고 나서 침대에 누워 나를 꼭 껴안고 말했다. "일단 내일 소식을 기다려 봅시다. 김우연 쪽에서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 보고 결정합시다."배현우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제 말 듣고 일단 자세요, 내일 일어나서 먼저 할 일들을 처리하고 준비하고 있으세요, 만약에 상황이 좋으면 내일 같이 데리고 갈게요, 당신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배현우가 지금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보지를 못한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배현우의 따뜻한 품에 안기며 눈을 감고 내일 먼저 무엇을 처리해야 할지 생각했다.근데... 눈을 떠서 배현우를 쳐다보는데 배현우도 잠에 들지 않았다. "현우씨... 할머니가 보존하고 있는 CCTV를 보여주시겠어요?"'그 영상을 꼭 보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어머니가 어떻게...'"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세요,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 팔짱을 끼더니 분명히 나를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배현우가 그 장면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이 깊었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배현우의품에 안겨 점점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았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배현우는 이미 곁에 없었고, 손을 뻗어 그가 누워 있던 곳을 만졌다. 이미 차가운 걸 보니 배현우는 일찍 침대에서 일어났나 보다.'무슨 소식이라도 왔나?'이
"할머니가 이번 사건을 피할 수 있었던 건 당시 큰 병을 앓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했어요. 제 생각에는 반은 꽤병인것 같아요. 직접 사표를 쓰고 나서도 서둘러 호주를 떠나지 않았다는 게 참 슬기로운 선택이었어요.""네?"너무 놀라서 몸 둘바를 몰랐다.배현우는 인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호주를 떠나지 않으셨어요. 그곳에 머물면서 배씨 저택의 인기척을 살피다가 배씨 저택의 요상한 소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에야 조용히 호주를 떠나셨어요."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메커니즘에 감탄했다."저도 그때 상황을 잘 몰라서, 할머니도 몸이 허약했고 내 행방을 알아 볼 길이 없어 그 비밀을 계속 지켜왔었나봐요. 부하들이 할머니를 찾고 나서도 여전히 어리석은 척을 하고 있었지 뭐에요."배현우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할머니께서 저를 두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그걸 꺼냈어요."배현우의 말을 듣고 나니 할머니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배현우가 나를 쳐다보더니 나의 지친 모습을 보고서야 손을 들어 대문을 열어 장벽들이 천천히 열리는 걸 볼 수 있었다.차는 왔던 길을 따라 경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벌써 자정이 되어 우리 둘은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에 돌아왔다.'우리를 배신한 소인이 두 집안을 풍비박산 시켰다니. 오늘 밤 일어난 모든 일들은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간단히 씻고 걱정 가득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태어나서 얼굴도 한번 못 본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를 걱정해 발 뻗고 자지 못했다. '한강인이랑 한걸은 이미 잡혔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의 처지는 어떤지.''한씨 부자가 그저 아버지를 인질로 삼아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면 왜 배현우는 그곳의 환경이 복잡하다고 했을가.''이유는 간단하다. 누군가 아버지를 미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고 싶으려는 걸가?''배현우? 아니면 배유정?'생각할수록 더욱 걱정이 됬다.아버지의 이번생은 이미 충분히 힘들다.어머니랑 서로
나는 걱정스레 배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배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계속 말했다.“후에 목격자 어르신을 찾고서 한강인을 자세히 조사하니 한강인은 이 모든 것이 일어난 뒤에야 천우 그룹을 떠난 거였어요. 지아 씨도 알잖아요. 그때 당시 천우 그룹은 아직 배유정 손에 있었어요.”“현우 씨의 말은 한강인은 배유정 과도 사이가 틀어졌단 말인가요?”나는 추측하며 물었다.“우리가 조사할 때 이상한 단서 하나가 나왔어요. 한동안 배유정도 한강인을 찾았고 심지어 한강인에 대한 추살령도 내렸어요! 참 이상해요. 배유정은 왜 한강인을 죽이라고 지령을 내린 걸까요?”“이유는 하나뿐이죠. 즉 한강인이 분명 무엇을 알아냈거나? 아니면 어떤 일에 참여하였거나?”나는 대답했다.배현우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진백이 죽임을 당했듯이 이 안에는 분명 남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 있는 거겠죠. 우리는 이 단서를 따라 계속 추적해 보니 한강인의 혐의가 점점 더 드러나더군요. 그리고 그의 아들 한결도 같이 도망쳤어요.”“그러고 보니 이 안에는 분명히 또 다른 요소가 있겠네요!”나는 사색에 잠겼다.“그래서 우리는 추측했죠. 한강인은 확실히 이 사건이랑 연관이 있고 둘이 도주하는 과정에 서로 연락하는 빈도를 보아서 부자 둘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어요.”“그리고 한강인이 도망 다니는 그 시기에 그의 모친이랑 누나 모두 영문도 모른 채 실종되었어요. 지금 보니 그분들은 아마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것 같네요. 이 때문에 한강인은 고두리에 놀란 새가 돼서 끊임없이 도망치며, 이 또한 한강인이 지금의 상태로 되게 한 원인인 것 같아요. 사실 한강인은 원래 지금의 모양이 아니거든요.”배현우의 말을 듣자 나는 저도 모르게 아까 보았던 한강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강인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엄청 정신적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다른 기타 방식으로 정신을 잃지 않게 버티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저렇게 말라죽을 정도일 리가 없다.“그리고 한 가
배현우는 나를 한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었다.“맞아요. 제 씨 어머니가 얼마나 총명한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어요. 제 씨 어머니는 책 속에 카메라를 숨겨두고 만약 사고가 난다면 여기에 있는 이 물건을 숨겨두었다가 훗날 믿음직스러운 사람에게 주라고 할머니한테만 똑똑히 당부해 두셨어요!”나는 코가 찡긋거리더니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보아하니 제 씨 어머니는 분명 위험이 닥칠 거라는 것을 미리 예감했던 거네요!”배현우는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제 씨 어머니는 만약 자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할머니더러 애들을 데리고 허씨 가문으로 가라고 할머니한테 당부하셨어요.”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코를 훌쩍이었다.배현우는 자기 손을 꽉 움켜쥐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참 생각지도 못한 게 모든 것이 제 씨 어머니의 예상대로 일어났고 감춰둔 카메라에 모든 것이 담겼어요! 근데 할머니는 제 씨 어머니의 뜻대로 우리 둘을 순리롭게 허씨 가문으로 데려가지 못했어요.”“급한 나머지 할머니는 고씨 가문에만 소식을 전했고 그마저도 나쁜 놈들보다 동작이 빠르지 못해 그들이 지아 씨를 데려간 후였어요. 그래서 저만 고씨 가문에서 데려갔어요.”나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그때 당시의 내가 얼마나 힘없고 무력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데다가 배현우와 억지로 갈라지게 되었다.배현우는 내 손을 꽉 잡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나도 배현우 지금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날 배현우는 눈앞에서 억지로 끌려 나가는 나를 보기만 하고 반항할 수도 없는 그런 무능력함은 아마 배현우한테 평생 잊지 못할 아픔이 되었을 것이다.차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자동차가 앞으로 가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한참 뒤에야, 배현우의 잠긴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이런 것들을 찾은 후에야 비행기 추락 사고가 떠올랐고 이로써 모든 것들이 비로소 한강인을 추측하게 했으며 그 이후에 우리는 한강인
이 소식은 그야말로 나를 입이 떡 벌어지게 했다. ‘나를 데려간 게 어떻게 그 사람이지?’“맞아요. 우리는 유일한 목격자를 찾았어요. 그 당시 그쪽 산에서 약재를 캐는 어르신이신데 그때는 중년인이셨어요. 하늘의 뜻인지, 우리가 수년을 찾아 헤맨 끝에야 비로소 이 참극의 전부를 직접 목격한 증인을 찾아냈어요.”“그 어르신 정말로 전체 과정을 모두 목격하셨나요?”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배현우 얘네가 얼마나 큰 공을 들여야 바다에서 바늘 건지는 것 같은 일을, 그것도 몇 년이 지났는데도 당시의 목격자를 찾아낸 걸까.“어르신의 말로는, 당시 자기는 산 위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잠시 계단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래 도로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해요. 알다시피 외국에서는 약재를 캐는 일은 엄청 드물어요.”배현우는 엄청 뿌듯한 말투로 말했다.“우리 형제들이 엄청나게 고생 많았어요. 십수 년을 하루같이 귀찮음을 마다하고 사건 지역을 탐방하러 다니면서 일말의 흔적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나도 믿어지지 않아 입을 열었다.“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참 노고가 많았어요.”“어르신이 말씀하기를 당시의 장면은 엄청 아슬아슬했대요. 부딪힌 차는 거의 굴러떨어지기에 일보 직전이었는데 후에 폭발했대요. 어르신은 우리의 차가 폭발한 뒤 키 크고 마른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리는 걸 똑똑히 봤다고 해요. 그리고 그 남자는 길 왼쪽의 언덕 아래로 달려가 무언가를 찾았대요.”배현우는 그때 당시의 장면을 묘사하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때 당시의 상황을 필사적으로 상상해 내려고 하니 머리가 또 아파 났지만, 배현우가 말을 멈출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시에 일어난 이 모든 것, 전부 나한테는 엄청난 매력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찾아낸 산산조각 난 퍼즐들을 하루빨리 제 위치에 맞춰서 하나의 완전한 그림을 만들어 내고 싶었으며 그때 당시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그 뒤로 난 어떻게 Z 국의 만덕동에서 떠돌게 되었고 또 어떻게 지금의 한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