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릿속은 이런 문제들로 가득 차 있어 주변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갑자기 누군가 내 팔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깜짝 놀라 쳐다봤고 바로 동철이 보였다.동철은 내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하고 자신을 따라오라는 제스처를 취했다.동철도 배에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마침 그를 찾고 있었는데 말이다.조용한 곳에서 나는 그에게 물었다.“언제 배에 올랐어요? 동철 씨도 돌아왔다는 걸 몰랐어요!”“배 대표님이 준비하셨습니다. 장 부장님과 조이스도 함께 있죠. 배 대표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연극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고요. 오늘 밤 배에 J 국 의 조직도 있으니 조심하세요!”나는 흠칫 놀랐고 가슴이 저도 모르게 조여들었다.“콩이를 납치한 사람들 말이에요?”“잊지 마세요! 애초에 대표님이 목적이였다는걸요!”동철이가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조심하면 됩니다. 저희가 계속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저희 시야에서 벗어나지 마세요!”“그들이 저를 노리고 온 건가요?” 나는 동철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렇진 않지만, 조심하는 게 좋을 거에요. 어쨌든 대표님 모녀에게 손을 댄 적이 있으니깐요!”동철이 나를 안심시켰고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어디에나 있는 사람들이었다.“장 부장님이 이미 전희에게 미끼를 전달했습니다. 아마 오늘 밤 그녀도 확실한 소식을 얻을 겁니다.”동철이 덧붙였다.“아마 상당히 흥분할 거에요. 그녀의 성격으로 보아 대표님에게 도발할지도 몰라요.”“알겠어요!”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런데 한소연 사건은 왜 문기태의 사람이 개입한 거죠?”나는 동철이 이 사건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문기태가 남미주를 통해 알게 된 것 같아요. 이세림이 한소연을 이용해 대표님께 누명을 씌우려 한다는 것을요. 그래서 직접 손을 썼고 합리한 이유를 만들었죠. 그래서 한소연 사건은 이제 잠잠해졌어요. 게다가 문기태가 이 일을 이세림에게 넘겨버렸고 이세림은 아직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동철은 역시 자세한 내막을 잘
나는 단번에 미연이를 끌어안으며 말했다.“안 온다고 했잖아, 어떻게 배에 오른 거야?”“그러게, 오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사장님이 계속 귀찮게 하는 바람에 거절하지 못했지.”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준비 다 했어? 그럼 뭘 좀 먹으러 나가자. 진즉에 배고팠는데, 깨우지 않으려고 기다렸어. 어때? 바다 위의... 황홀했지?”그녀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나는 주먹으로 그녀를 콩 치며 말했다.“그런 변태 같은 말 하지 마! 점점 더 심해지네.”그렇게 말하면서도 내 얼굴은 빨갛게 타올랐다.우리는 방을 나와 3층 식당으로 내려갔고 조용한 곳에 자리를 잡고 주문했다.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미연은 어젯밤 남미주가 나를 찾은 일에 대해 계속 캐물었다. 마치 남미주가 나에게 무슨 일을 하려 했는지 계속 걱정하는 듯 보였다.나는 미연이 걱정하지 않도록 그녀에게 남미주가 편을 먹지 않았다는 것을 간단히 설명해줬다. 음식이 나오고 막 한술 뜨려는데 이세림과 전희도 식당에 들어왔다.나는 미연이와 눈짓을 주고받으며 그들을 무시하려 했지만, 그들은 우리를 발견하더니 먼저 다가왔다.“지아 씨, 안녕하세요!”먼저 말을 꺼낸 것은 전희였고, 기분이 상당히 좋아 보였다.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네, 안녕하세요!”그리고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앞에 놓인 음식을 먹으며 미연이와 사소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미연이는 이따가 옥상에 있는 큰 수영장에서 산책해도 좋을 것이라 말했고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좋아, 먹고 나서 가보자.”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전희의 표정을 보니 그녀가 간절히 원하던 것을 이미 손에 넣었다는 것을 알아챘다.“지아 씨, 요즘 참 행복하시죠!”전희가 말을 꺼냈다.“왜 그렇게 생각하세요?”나는 그녀를 쳐다봤고, 그녀 옆에 있는 이세림도 새 옷을 갈아입고 뜻 모를 미소를 띠고 있었다.“이런 자리에서, 지아 씨처럼... 아니, 지아 여사님이라고 불러야겠군요. 여사님이 이렇게 주목받는 걸 보면, 행복하지 않나요?”전희는 웃으
나는 본능적으로 바다 내음이 가득한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혔다.미연이는 뭔가 잘못됐음을 느끼고는 물었다.“왜 그래? 어디 불편해?”나는 고개를 저었지만, 등골까지 서늘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아니, 그냥 가슴이 좀 두근거려서.”“혹시 뱃멀미 하는 거 아니야? 오늘은 어제보다 바람이 좀 세네.”미연이 내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얼굴이 좀 창백해 보여!:“그럴 수도 있겠다! 괜찮아 바람 좀 쐬면 나아질 거야.”나는 미연이 걱정하지 않게 하려고 얼른 손을 저으며 말했다.“아마 배고파서 그럴 거야. 오랫동안 빈속으로 있었으니까.”“그럼 먼저 방에 들어가서 좀 쉬자. 먹고 나서 산책하러 가. 내가 말한 수영장은 중앙쯤에 있어, 정말 커. 밥 먹고 나서 가보자!”“좋아!”우리는 손을 잡고 방으로 돌아왔지만, 배현우는 보이지 않았다. 분명 바쁘게 일 처리를 하고 있을 것이다.점심을 먹고 나서 우리는 수영장으로 향했다. 그곳엔 수많은 미인이 수영을 하고 있었다. 다들 배에 수영장이 있다는 것을 알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온 것 같았다.게다가 그들의 비키니는 하나같이 화려하고 눈에 띄는 것들이었고 섹시한 몸매를 드러낸 채 시선을 끌고 있었다.한 바퀴 돌아보니, 그곳이 그다지 재미있는 곳이 아님을 깨달았다. 진지한 사업가들은 보이지 않았고 그저 명성을 얻으려는 미인들과 금수저들뿐이었다. 그들은 서로 유혹하며 농담을 주고받았다.나는 미연이를 끌고 나가려 했고, 바로 그때 물속에서 한 ‘인어’가 튀어 오르더니 사방으로 물을 튀겼다. 그녀는 물 위로 나오자마자 크게 물을 내리쳤고 그 바람에 물줄기가 내 몸에 잔뜩 뿌려졌다. 순식간에 쉬폰 드레스가 몸에 달라붙어 반투명 상태가 되어 민망할 지경이었다.미연이 나를 끌어당겨 자신 뒤에 숨겼고 나는 가슴에 달라붙은 옷감을 재빨리 잡아당겨 노출을 피했다.“이봐! 일부러 그랬지!”미연이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물속의 여자에게 소리쳤고 나도 난처한 상태로 그녀를 바라봤다.그 여자는 얼굴의 물을 닦으
유진의 말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됐다. 나는 마음속으로 짜릿함을 느꼈다. 오늘 이 고약한 여자가 제대로 큰 실수를 저질렀다. 오늘 파티의 주인공이 유상현이라면, 유진은 이곳의 진정한 상류층이었다.나는 이번이 유진과의 두 번째 만남이었는데, 두 번 모두 곤경에 처한 나를 도와줬었다.유진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이 여자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나 때문에 불쾌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이것은 결국 배현우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배현우의 여자로 불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이 여자는 적개심 가득한 눈빛으로 홱 유진을 바라봤다. 유진의 말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았지만, 사실을 정확히 짚어줬고 그녀 앞의 이 여자를 완전히 무너뜨렸다.이제 이 여자는 모두의 앞에서 거의 헐벗은 상태와 다름없었고, 세 개의 삼각형 천 조각만이 그녀의 중요 부위를 가리고 있었다. 이것이 저급하지 않으면 무엇이겠는가?“당신 누구야? 죽고 싶은 거야?”그 여자는 유진을 보며 날카롭게 말했다.유진은 해외에서 공부하고 최근에 서울로 돌아왔기에 많은 사람이 그녀를 실제로 알지 못했다. 이것들은 도혜선이 천우 그룹 축하 행사에서 유진을 만난 후 나에게 알려준 것들이었다.유진은 여전히 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그 여자를 냉소적으로 훑어보더니 전희와 그녀의 일행이 계속해서 강 건너 불구경하는 모습을 쳐다봤다.“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네가 네 이미지에 신경 좀 써야 한다는 거야. 여긴 정식적인 행사장이지 나이트클럽이 아니야. 몸 파는 아가씨처럼 행동하지 마. 네가 보여주려는 그 매력이 다른 사람들 눈을 더럽힐 수 있으니, 그냥 물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게 어때?”유진은 대단한 여자였다. 욕설 한마디 없이 사람을 비난했다.유진의 말을 듣고 나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뻔했다. 참으로 적절한 묘사였다.주변 사람들 사이에서도 동조하는 비웃음이 들렸다.그 여자도 전투력이 상당해 유진에게 한
그러자 수영장 주위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예사롭지 않은 상황에 빠르게 모여들었다. 멀리 서 있던 전희마저 침착하지 못했는데 그녀의 침착하지 못한 모습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거 너무하잖아요. 그냥 몸이 젖은 것뿐인데 이렇게 야단법석을 떨 필요는 없잖아요.”그러고 나서 전희는 다가와 멀리서 나를 바라봤다.“ 한지아 씨, 적당히 날뛰어요! 이 애들을 너무 안중에 두지 않는 거 아니에요? 이들 중 누구의 집안도 당신이 감당 못 할 거예요. 내가 말리지 않았다고 탓하지 마요. ”전희는 분명히 나에게 시비를 거는 것이었고 또한 군중을 선동하여 싸움을 일으키려는 것이다. 과연, 그 붉은 머리와 함께 있던 몇몇 재벌 2세들이 으스대며 우리 쪽으로 몰려왔다.나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을 힐끗 쳐다보았고 유진도 나를 향해 웃었다. “전 여사님, 제가 날뛰는 걸 보셨어요?” 나는 담담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게 아니면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전희는 수영장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며 추궁했다.“사람이 너무 제멋대로 굴면 안 돼요. 만약 그녀들에게 문제라도 생긴다면 한지아 씨, 당신 목숨으로 보상할 기회도 없을 거예요.”나는 히죽 웃었다. “어머! 당신도 사람이 너무 제멋대로 굴면 안 되는 걸 알아요? 설마 저한테 말하는 거예요? 듣자 하니 당신이 자주 그러는 것 같던데.” “한지아 씨, 경고하는데 여기는 그쪽이 위세를 떨치는 곳이 아니에요. 당신 신분을 잊지 말아요. 자기 주제를 모르는 건 아니죠? 세상 물정을 모르는 척하다가 큰코다치니 조심해요.”말을 마친 전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물속에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녀가 방금 이미 소식을 알리려 사람을 보냈다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나는 유진과 눈이 마주치자 약속이나 한 듯 코웃음을 쳤다.이미연이 전희를 힐끗 쳐다보았다.“전희 씨, 당신한테 충고 하나 할게요. 이렇게 오르락내리락 난리 치지 말아요, 그러다
하지만 뒤돌아보고 모두 놀랐다. 온 사람은 다름 아닌 유상현과 배현우 일행이었다. 보아하니 이 사람들은 사업 때문에 줄곧 함께 있었던 것 같다.나와 유진은 눈빛을 주고받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키가 크고 마른 중년 남자는 곧바로 화를 거두고 유상현에게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멀리서부터 아첨하며 손을 내밀었다.“유 대표님 오셨습니까! 어찌하여 대표님이 여기까지 행차하셨어요!”그러고는 다시 허리를 굽신거리며 배현우를 바라보았다.“배 대표님!”배현우는 어두운 얼굴을 하고 시선은 계속 내 몸에 머물렀다. 이때 내 치마가 아직 마르지 않아 초라함은 여전했다. 나는 배현우의 눈에서 분노가 솟구치는 것을 보았다.유상현은 유진과 그 옆에 있는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공적인 말투로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키가 크고 마른 남자가 우리를 음산하게 쳐다보며 시큰둥하게 말했다.“어떤 경로로 섞여 들어왔는지 모르는 건방진 여자 둘이 여기서 소란을 피우고 있어요! 꼴을 보아하니 양반집 규수는 아닌 것 같습니다. 아주 건방져요!”유산현은 키가 크고 마른 남자의 말에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그 남자를 올려다보며 반문했다.“섞여 들어왔다고요?”그는 분명히 이 언행에 대해 매우 기분이 좋지 않았다.하지만 그 남자는 유상현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굽실굽실 맞장구를 쳤다. “네, 출신이 불분명합니다!”“유 대표님 오셨어요! 정말 영광입니다, 저는 서울 대우 무역회사의 정진웅입니다. 이번 친목회에 참석할 수 있어서 매우 기쁩니다!”뚱보는 배를 내밀고 걸어가면서 멀리서부터 유상현에게 손을 내밀었다.유상현은 어두운 표정으로 그를 완전히 무시했다. 정진웅은 자기 추태를 감추려고 어색한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으며 몸에 손을 닦았다. 그러고는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네. 이 두 년은 딱 봐도 몸 파는 년들인데 오늘 같은 날에 감히 유 대표님 앞에서 소란을 피우다니. 말도 안 되죠. 게다가 제 딸까지 때린 걸 보면 정말 간땡이가 부었어요!”유
유상현은 총각이 건네준 태블릿을 손을 뻗어 받아 든 뒤 한동안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봤다. 그러고는 태블릿을 마른 키 큰 남자에게 건넸다.“이게 바로 당신이 말한 섞여 들어온 사람이 소란을 일으켰다는 건가요?”키가 크고 마른 남자는 재빨리 태블릿을 받아 들고 전전긍긍하며 확인했다. 입가가 떨리더니 붉은 머리의 뺨을 한 대 때렸다.“내가 분명히 경고했지! 이 당돌한 정연을 멀리하라고!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못난 자식!”정진웅은 마른 남자의 말에 순식간에 폭발했다.“설경구! 그게 무슨 말이야!”“말 그대로야! 네가 교육한 잘난 딸 좀 봐, 여기저기서 말썽만 부리고 있어. 뭐 하는 물건이야?”설경구는 옷차림이 흐트러진 채 땅바닥에 주저앉아있는 정연을 가리켰다. “이 꼴 좀 봐, 이게 말이 돼? 말세야 말세.”참다못한 배현우는 코트를 벗고 다가와 나를 옷에 싸안고 품에 안았다.“이들이 어떤 경로로 들어왔는지 알아봐!”정진웅은 이내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고 배현우를 바라보았다.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배... 배 대표님, 실례했습니다. 제가 눈치가 없어 배 대표님께 실례를 범했습니다.사과드릴게요.”말하고는 나와 배현우 곁으로 뒤뚱뒤뚱 다가왔다.“어린 딸이 철이 없어요.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 저는 형원 그룹 이 대표랑 친분이 매우 깊은 절친한 사이에요. 그래서 섞여서 들어온 게 아니에요! 이 대표 요청으로...”“그래요? 저는 왜 초대했던 기억이 안 나죠? 당신이 말한 형원 그룹의 이 대표가 제가 맞는지 똑바로 보실래요?”인파 속에서 이청원은 담담한 표정으로 걸어 나와 정진웅을 바라보며 흥미로운 듯 말했다. “친분이 두터우세요? 저랑?”정진웅은 삽시간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기름진 땀방울이 흘러내렸고 동태 눈깔 같은 눈으로 이청원을 바라보며 거친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눈은 군중 속을 뒤지고 있었다. 나는 전희가 조용히 군중들 속으로 숨는 것을 보았다.나는 이 사람들이 전희를 통해 섞여 들어
유진은 이 말을 마치고 돌아서서 새침하게 떠나려다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한지아 씨, 저희 얘기 좀 할까요?”나는 빙그레 웃었다.“좋아요.”나는 배현우를 올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 아가씨랑 잠깐 얘기 좀 할게요! 당신은 일 봐요.”배현우는 다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뭐 먹는 거 잊지 마!”나는 웃으며 손을 뻗어 이미연을 데리고 유진을 따라 VIP 코너로 갔다. 나는 곁눈질로 전희가 여전히 사람들 뒤에 숨어서 우리가 그녀의 곁을 지나가는 것을멍하니 지켜보는 것을 보았다. 아마 유진의 말이 충분히 전희를 마음 졸이게 했을것이다.일부 구경꾼들이 아직도 의논하고 있었다.“정말 죽고 싶어 환장했네. 이 두 여인에게 미움을 사다니, 하나는 유 대표의 딸이고 하나는 배 대표의 연인인데. 정말 운도 없지!”떠들썩한 인파를 떠나며 이미연은 시큰둥하게 말했다.“이번에 전희는 많이 당황했을 거야.”“이 여자 정말 싫어요! 이청원은 능력 있는 남자인데 아쉽게 됐어요.”유진이 담담하게 한마디 하는 걸 보니 이청원에 대한 인상이 아주 좋은 것 같다.“고마워요, 유진 씨.” 나는 유진을 봤다. “우리가 두 번 만났는데 두 번 모두 도와준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났어요.”“하! 그걸 알고 있네요?”유진은 냉담하게 나를 쳐다보았다.“전 전희가 득의양양한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에요. 그리고 당신 정말 배짱이 대단해요. 당신을 고상하다고 칭찬해야 할까요? 아니면 나약하다고 욕해야 할까요?”그녀의 질문에 나는 잠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유진은 내가 멍해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내가 당신이라면 진작에 그녀들 싸대기를 떄렸을 거예요!”내가 ‘피식' 웃자 유진이 불쾌감을 자아내며 되물었다.“왜 웃어요? 제가 틀린 말 했나요?”“당신이 틀린 게 아니에요. 제게 격려가 된 건 분명해요!”나는 진심으로 말했다.이번에는 그녀가 나를 보고 할 말이 없었다.이미연이 나 대신 설명했다. “지아는 사리 분별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서강민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서강민 씨, 먼저 들어가시죠. 언니가 깨서 서강민 씨를 보면 또 흥분할 것 같은데... 지금 같은 상황에 언니가 회복하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마디 더 보탰다.“어떤 일들은 천천히 해야 해요. 언니한테 시간을 좀 주세요. 서로 생각을 정리해 봐요.”서강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도혜선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발길을 돌리기 전에도 아쉬움에 한 번 더 뒤돌아보며 나한테 말했다.“고생해 줘요.”나도 담담히 답했다.“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언니에게 시간을 좀 줘요. 언니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수 있잖아요.”내가 말하는 회복이 뭔지는 서강민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건 도혜선이 마음에 입은 상처였다. 오늘 도혜선의 행동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녀의 상처는 아물 수 없을 것이다. 언급만 해도 피가 흘러내릴 만한 상처였다.잠시 후, 서강민은 한발 물러섰지만, 눈길은 여전히 도혜선에게 머물러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모습 아래에서 어떠한 파도가 휘몰아치는지 나는 몰랐다.한참 전 도혜선이 했던 말들은 마디마디가 주옥이었다. 모두 그녀가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었던 것들이었고 또한 서강민의 약점이었다. 얼마나 아플지는 서강민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쓰디쓴 독주도 그는 혼자 삼켜내야만 했다.도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와 깨어나려는 낌새가 보이고 나서야 서강민은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나는 마음이 아파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도혜선의 손을 맞잡았다.인제야 하루 종일 배현우에게서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쪽에는 어떤 상황인지, 김우연에게서는 소식이 없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도혜선을 보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아 살며시 그녀의 손을 놓고 일어서려 했을때, 그녀는 다시 나를 잡으며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지 마...”나는 너무 놀라 얼른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서강민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하는 걸까?’“당시의 사고는 내가 저지른 거야. 그녀도 나 때문에 다쳐서 지금처럼 된 거고… 나는 좋은 남편이 아니야. 아내가 식물인간이 되었는데 나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말이야...”서강민은 여기까지 말하며 후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너무 죄책감이 들고 고민스러워. 나 또한 발버둥 쳐봤지.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의 일탈을 받아들일 수 있어 해. 그녀한테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강민 씨!”도혜선은 꾸짖는 듯한 말투로 그의 말을 잘랐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당신 아내가 듣고 있을 거예요. 저를 끌어들여서 같이 속죄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구세주가 아니에요. 저는 그냥 사람답게 살고 싶은 평범한 여자라고요. 저 좀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요?”도혜선은 말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녀는 한 손으로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 앞으로 갔다.“혜선 언니, 움직이지 마! 위험해...”늑골 골절과 뇌진탕이 있는 환자다 보니 이러한 행동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위험했다.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녀를 안으려고 하는 한지아를 제지했다.“제가 오늘 한 말이 아직도 이해가 안 되나요? 서강민 씨, 저의 인생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신한테 묶여 당신의 부속품이 되었었는데 저도 자존심이 있어요. 더 이상 당신처럼 지난날의 죄책감을 짊어지며 답답하게 살아가지 않을 거예요.”도혜선은 여전히 분노에 차 외치고 있었다.“매일 제 앞으로 와 지난날의 행동에 대해 속죄하라고 일깨워 주실 필요 없어요! 당신을 보면 저는 지난날 모든 서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치욕적인 과거가 떠올라요. 당신은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당신은 아내와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해요.”말을 마친 도혜선은 숨이 차올랐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도혜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당신은 아무런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저 같은 여자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아도 돼요.”그녀는 자기비하적인 말을 내뱉었다.”선아...”“설사 강민 씨가 와이프와의 약속을 안 지킨다 해도 당신의 신분과 지위로 당신에게 더 어울릴만한 사람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물며 당신네 부부 눈에는 저는 그냥 염치없고 미천한 사람일 뿐이죠. 저 같은 사람은 본처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사모님이라는 호칭도 어울리지 않죠.”“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오해하지 마.”서강민은 조급함에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아섰다.“강민 씨... 해명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행동이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어요! 장담하건대 아직 당신들이 어떤 의도로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보가 된 건 아니에요. 그녀는 정말 대단하네요. 죽을 때까지도 제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녀는 아무리 병상에 누워있어도 고상한 사람이고 저는 그냥 미천한 사람일 뿐이니 말이에요.”도혜선은 말을 내뱉으며 입가에 처량한 미소를 비췄다. 누가 봐도 가슴 아픈 미소였다.“이전의 저는 확실히 허례허식에 차 있는 사람이었지만 저도 성장했어요. 정신 차렸어요. 당신 앞에 있는 저의 진정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어요. 저는 하나의 도구, 들러리뿐이었지만 원망하지 않았어요.”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숨 돌렸다. 얼굴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하지만 이제 저는 자존감을 챙기며 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고 쓰레기같은 취급을 받더라도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고 싶어졌어요.”점점 더 차가워지는 도혜선을 바라보며 서강민은 답했다.“혜선아, 나는 널 한 번도 무시한 적 없어. 나는 그냥 내가 뭘 하든지 네가 다 이해해 줄 줄 알았어.”도혜선의 서강민의 말을 듣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안색은 더 창백해져 있었다.“이해? 당신이 어떤 말을
방금 허투루 한 말이 어머니의 진실인가 싶다. 보아하니 어머니가 나를 속이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의 의문점이 점점 많아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마치고 차씨 가문의 할머니께 말씀을 드린 후, 위층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도혜선을 보러 가려고 준비했다.그리고 팔도 겸사겸사 검사하려고 했다. 차에 앉고 나서 배현우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이 이른 아침에 뭐 하러 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김우연 쪽에 무슨 소식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생각해 보니 이렇게 빠르진 않겠지? 몇 시간밖에 안 됐는데.'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도혜선이 노발대발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병실에는 도혜선과 서강민 두 사람만 보이고 이미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내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좀 이상하고 심상치 않는 것을 느꼈다.침대 옆 머릿장에는 보온병이 놓여있다. 서강민은 오늘도 도혜선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러 온 것 같다.서강민은 침대 앞에 떡 하니 서있었고 침대에 있던 도혜선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혜선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상황을 정리하려고 다가가서 서강민에게 인사를 하고 도혜선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좀 어때?""별로야."도혜선은 차갑게 대답하더니 또 말을 건넸다. "지아야, 손님 좀 배웅해 줄래?"난감했다, 도혜선은 서강민을 내쫓으라고 하는 거였다. 난 당연히 그 뜻을 알고 있다. 조심스럽게 서강민을 쳐다보았다. "혜선아, 꼭 이래야 하니?"서강민은 씁쓸한 표정으로 도혜선을 바라보며 물었다."네! 서강민씨, 저는 이미 분명히 말했고 두 번 다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도혜선은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서강민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언니, 화 그만 내고 진정 좀 해. 초조해하는 거 알아, 점차 좋아질 거야. 강민씨랑 얘기 좀 하고 있어. 나는 팔 검사해야 돼서, 금방 돌아올 거야!"나는 핑계를 대고 떠나서 그들에게 자리를 비워주었다.
배현우는 나의 우울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에 회사 일도, 한심로얄의 마지막 한방도 둘 다 포기할 수 없잖아요. 신예 쪽 일도 있고, 전희가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요. 지금 모든 게 중요한 시기이니까요.""지금 그 누구도 아버지보다 중요하지 않아요! 수십년간 도망치면서만 살았는데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분명 아주 괴로워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데, 내가... 내가 딸로서, 난..."배현우는 내 말을 듣고 나서 침대에 누워 나를 꼭 껴안고 말했다. "일단 내일 소식을 기다려 봅시다. 김우연 쪽에서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 보고 결정합시다."배현우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제 말 듣고 일단 자세요, 내일 일어나서 먼저 할 일들을 처리하고 준비하고 있으세요, 만약에 상황이 좋으면 내일 같이 데리고 갈게요, 당신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배현우가 지금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보지를 못한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배현우의 따뜻한 품에 안기며 눈을 감고 내일 먼저 무엇을 처리해야 할지 생각했다.근데... 눈을 떠서 배현우를 쳐다보는데 배현우도 잠에 들지 않았다. "현우씨... 할머니가 보존하고 있는 CCTV를 보여주시겠어요?"'그 영상을 꼭 보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어머니가 어떻게...'"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세요,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 팔짱을 끼더니 분명히 나를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배현우가 그 장면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이 깊었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배현우의품에 안겨 점점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았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배현우는 이미 곁에 없었고, 손을 뻗어 그가 누워 있던 곳을 만졌다. 이미 차가운 걸 보니 배현우는 일찍 침대에서 일어났나 보다.'무슨 소식이라도 왔나?'이
"할머니가 이번 사건을 피할 수 있었던 건 당시 큰 병을 앓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했어요. 제 생각에는 반은 꽤병인것 같아요. 직접 사표를 쓰고 나서도 서둘러 호주를 떠나지 않았다는 게 참 슬기로운 선택이었어요.""네?"너무 놀라서 몸 둘바를 몰랐다.배현우는 인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호주를 떠나지 않으셨어요. 그곳에 머물면서 배씨 저택의 인기척을 살피다가 배씨 저택의 요상한 소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에야 조용히 호주를 떠나셨어요."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메커니즘에 감탄했다."저도 그때 상황을 잘 몰라서, 할머니도 몸이 허약했고 내 행방을 알아 볼 길이 없어 그 비밀을 계속 지켜왔었나봐요. 부하들이 할머니를 찾고 나서도 여전히 어리석은 척을 하고 있었지 뭐에요."배현우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할머니께서 저를 두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그걸 꺼냈어요."배현우의 말을 듣고 나니 할머니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배현우가 나를 쳐다보더니 나의 지친 모습을 보고서야 손을 들어 대문을 열어 장벽들이 천천히 열리는 걸 볼 수 있었다.차는 왔던 길을 따라 경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벌써 자정이 되어 우리 둘은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에 돌아왔다.'우리를 배신한 소인이 두 집안을 풍비박산 시켰다니. 오늘 밤 일어난 모든 일들은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간단히 씻고 걱정 가득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태어나서 얼굴도 한번 못 본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를 걱정해 발 뻗고 자지 못했다. '한강인이랑 한걸은 이미 잡혔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의 처지는 어떤지.''한씨 부자가 그저 아버지를 인질로 삼아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면 왜 배현우는 그곳의 환경이 복잡하다고 했을가.''이유는 간단하다. 누군가 아버지를 미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고 싶으려는 걸가?''배현우? 아니면 배유정?'생각할수록 더욱 걱정이 됬다.아버지의 이번생은 이미 충분히 힘들다.어머니랑 서로
나는 걱정스레 배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배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계속 말했다.“후에 목격자 어르신을 찾고서 한강인을 자세히 조사하니 한강인은 이 모든 것이 일어난 뒤에야 천우 그룹을 떠난 거였어요. 지아 씨도 알잖아요. 그때 당시 천우 그룹은 아직 배유정 손에 있었어요.”“현우 씨의 말은 한강인은 배유정 과도 사이가 틀어졌단 말인가요?”나는 추측하며 물었다.“우리가 조사할 때 이상한 단서 하나가 나왔어요. 한동안 배유정도 한강인을 찾았고 심지어 한강인에 대한 추살령도 내렸어요! 참 이상해요. 배유정은 왜 한강인을 죽이라고 지령을 내린 걸까요?”“이유는 하나뿐이죠. 즉 한강인이 분명 무엇을 알아냈거나? 아니면 어떤 일에 참여하였거나?”나는 대답했다.배현우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진백이 죽임을 당했듯이 이 안에는 분명 남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 있는 거겠죠. 우리는 이 단서를 따라 계속 추적해 보니 한강인의 혐의가 점점 더 드러나더군요. 그리고 그의 아들 한결도 같이 도망쳤어요.”“그러고 보니 이 안에는 분명히 또 다른 요소가 있겠네요!”나는 사색에 잠겼다.“그래서 우리는 추측했죠. 한강인은 확실히 이 사건이랑 연관이 있고 둘이 도주하는 과정에 서로 연락하는 빈도를 보아서 부자 둘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어요.”“그리고 한강인이 도망 다니는 그 시기에 그의 모친이랑 누나 모두 영문도 모른 채 실종되었어요. 지금 보니 그분들은 아마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것 같네요. 이 때문에 한강인은 고두리에 놀란 새가 돼서 끊임없이 도망치며, 이 또한 한강인이 지금의 상태로 되게 한 원인인 것 같아요. 사실 한강인은 원래 지금의 모양이 아니거든요.”배현우의 말을 듣자 나는 저도 모르게 아까 보았던 한강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강인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엄청 정신적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다른 기타 방식으로 정신을 잃지 않게 버티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저렇게 말라죽을 정도일 리가 없다.“그리고 한 가
배현우는 나를 한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었다.“맞아요. 제 씨 어머니가 얼마나 총명한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어요. 제 씨 어머니는 책 속에 카메라를 숨겨두고 만약 사고가 난다면 여기에 있는 이 물건을 숨겨두었다가 훗날 믿음직스러운 사람에게 주라고 할머니한테만 똑똑히 당부해 두셨어요!”나는 코가 찡긋거리더니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보아하니 제 씨 어머니는 분명 위험이 닥칠 거라는 것을 미리 예감했던 거네요!”배현우는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제 씨 어머니는 만약 자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할머니더러 애들을 데리고 허씨 가문으로 가라고 할머니한테 당부하셨어요.”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코를 훌쩍이었다.배현우는 자기 손을 꽉 움켜쥐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참 생각지도 못한 게 모든 것이 제 씨 어머니의 예상대로 일어났고 감춰둔 카메라에 모든 것이 담겼어요! 근데 할머니는 제 씨 어머니의 뜻대로 우리 둘을 순리롭게 허씨 가문으로 데려가지 못했어요.”“급한 나머지 할머니는 고씨 가문에만 소식을 전했고 그마저도 나쁜 놈들보다 동작이 빠르지 못해 그들이 지아 씨를 데려간 후였어요. 그래서 저만 고씨 가문에서 데려갔어요.”나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그때 당시의 내가 얼마나 힘없고 무력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데다가 배현우와 억지로 갈라지게 되었다.배현우는 내 손을 꽉 잡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나도 배현우 지금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날 배현우는 눈앞에서 억지로 끌려 나가는 나를 보기만 하고 반항할 수도 없는 그런 무능력함은 아마 배현우한테 평생 잊지 못할 아픔이 되었을 것이다.차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자동차가 앞으로 가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한참 뒤에야, 배현우의 잠긴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이런 것들을 찾은 후에야 비행기 추락 사고가 떠올랐고 이로써 모든 것들이 비로소 한강인을 추측하게 했으며 그 이후에 우리는 한강인
이 소식은 그야말로 나를 입이 떡 벌어지게 했다. ‘나를 데려간 게 어떻게 그 사람이지?’“맞아요. 우리는 유일한 목격자를 찾았어요. 그 당시 그쪽 산에서 약재를 캐는 어르신이신데 그때는 중년인이셨어요. 하늘의 뜻인지, 우리가 수년을 찾아 헤맨 끝에야 비로소 이 참극의 전부를 직접 목격한 증인을 찾아냈어요.”“그 어르신 정말로 전체 과정을 모두 목격하셨나요?”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배현우 얘네가 얼마나 큰 공을 들여야 바다에서 바늘 건지는 것 같은 일을, 그것도 몇 년이 지났는데도 당시의 목격자를 찾아낸 걸까.“어르신의 말로는, 당시 자기는 산 위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잠시 계단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래 도로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해요. 알다시피 외국에서는 약재를 캐는 일은 엄청 드물어요.”배현우는 엄청 뿌듯한 말투로 말했다.“우리 형제들이 엄청나게 고생 많았어요. 십수 년을 하루같이 귀찮음을 마다하고 사건 지역을 탐방하러 다니면서 일말의 흔적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나도 믿어지지 않아 입을 열었다.“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참 노고가 많았어요.”“어르신이 말씀하기를 당시의 장면은 엄청 아슬아슬했대요. 부딪힌 차는 거의 굴러떨어지기에 일보 직전이었는데 후에 폭발했대요. 어르신은 우리의 차가 폭발한 뒤 키 크고 마른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리는 걸 똑똑히 봤다고 해요. 그리고 그 남자는 길 왼쪽의 언덕 아래로 달려가 무언가를 찾았대요.”배현우는 그때 당시의 장면을 묘사하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때 당시의 상황을 필사적으로 상상해 내려고 하니 머리가 또 아파 났지만, 배현우가 말을 멈출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시에 일어난 이 모든 것, 전부 나한테는 엄청난 매력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찾아낸 산산조각 난 퍼즐들을 하루빨리 제 위치에 맞춰서 하나의 완전한 그림을 만들어 내고 싶었으며 그때 당시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그 뒤로 난 어떻게 Z 국의 만덕동에서 떠돌게 되었고 또 어떻게 지금의 한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