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기태가 방에 들어왔을 때 나는 이미 차를 끓여놓고 이 우아하면서도 세월과 경험이 담겨있는 눈빛을 가진 남자를 담담히 바라봤다. 내가 전혀 놀라지 않는 것을 본 그는 담담히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저희 만난 적 있죠?”나도 담담한 척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네, 만난 적 있어요. 이미연의 절친, 한지아라고 합니다.”“들은 적 있어요.”그의 담담함에 나는 조금 긴장되어 손에 힘을 꽉 줬다. 어쨌든 이 사람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고 차가운 호수처럼 알 수 없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저 자기 친구를 보호하고 싶은 소녀로서 레벨 차이가 너무 컸다. 우리 모두 자리에 앉았고 꽤나 평온한 마음가짐이었지만 어딘가 조금 거리감이 느껴져 급히 입을 열지 않았다. 사실 나는 입을 떼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이런 사람을 겪어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말을 떼야 할지 몰랐다. 나는 직접 차를 따라주고 말했다. “문기태 씨, 차 한잔 드세요.”“한지아 씨가 저와 무슨 용건으로 만나자고 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오히려 그가 먼저 입을 열어 용건을 물었다. “이미연이요.”나는 직접적으로 말하고 그를 바라봤다. 마음속으로 ‘내가 당신과 할 얘기가 이미연 말고 뭐가 있겠어? 왜 모른 척이야?’ 라고 생각했다. 이때의 나는 문기태를 신비한 사람이 아닌 그저 내 절친이 평생을 바쳐 함께하고 싶은 남자로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가벼웠다. 어차피 그도 사람인지라 칠정육욕의 고비는 넘기기 어려울 것이다. “경청해서 들을게요.” 그는 더 이상 묻지도 대답하지도 않고 겸손하게 대답했다. “저는 이미연의 절친이에요. 이미 이미연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거라고 믿어요. 몇 년간 이미연이 줄곧 저를 보살펴줘서 그녀의 모든 것이 저와도 긴밀히 연관되어 있고 이미 제 가족이랑 다름없어요.”내가 한 말은 전혀 과장되지 않았다. 사실 이미연은 내 가족 이상으로 일생 중에 없으면 안 되는 존재이다. 문기태도 나를 빤히 바라보며 눈동자 속에 고민하는 눈빛이 보였는데 이
사실 그가 나를 이렇게 바라보는 게 나는 조금 두려웠다. 그의 잘생긴 두 눈은 심연처럼 깊었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검은 눈동자가 더욱 깊어져 나의 표정을 탐색하듯 바라봤다. “한지아 씨, 이미연에 대해서 저는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어요.”그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고 간단히 대답했는데 처음에는 가볍게 느껴졌던 말이 문기태처럼 진중한 사람에게는 또 아주 무겁고 진지한 듯 했다. “포기할 거예요?”나는 여전히 그를 몰아붙였다. “그녀를 품에 안았을 때부터 그녀를 놓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어요.”그는 아주 단호하게 말했고 마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 같았다. 왜인지 그 순간 나는 조금 감동하였다. 이런 말은 원래 여자를 감동하게 하는 유리한 무기인데 더군다나 문기태가 이런 말을 하다니. 나는 말없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동태를 살폈다. 무엇을 더 물어볼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원래 할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는데 이런 남자에게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 나는 차갑게 말했다. “솔직히 대답이 마음에 안들어요. 당신에게는 아주 무거운 말일지 몰라도 저는 가볍게 느껴졌어요.”“모든 일이 다 순식간에 변하고, 또 남미주 쪽에 변수가 너무 많아요. 만약 어느 날 당신에게서 이미연의 목숨을 달라고 하면 당신은 보호할 수 없을 거예요. 저는 이런 모험은 하고 싶지 않아요. 이미연이 당신을 위해 죽을 수 있다고 해도 제가 그걸 어떻게 두고 보겠어요.”나는 내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았던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언뜻 그와 이미연을 쟁탈하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문기태는 깊은 두 눈을 무의식적으로 내리깔더니 정교한 찻잔을 한번 바라보고 길쭉하고 흰 손가락으로 찻잔을 돌리며 말했다.“그럼 한지아 씨가 원하는 건 맹세예요?”“아마 저도 여자여서 맹세를 받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지아 씨의 총명함이라면 어떠한 맹세도 허황한 것이라는 걸 잘알 텐데요? 특히 제 맹세는. 당신이 말했다시피 남미주 쪽
내가 동문서답하자 도혜선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조금 어안이 벙벙했다. “그게 무슨 뜻이야?”그녀는 내 옆에 앉아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아마 내가 갑자기 한 말에 그녀가 일시적으로 반응하지 못한 것 같다. “만약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한 사람을 만난다면 이렇게 고난을 겪지 않아도 되잖아. 너, 나, 그리고 이번에는 이미연! 왜 우리 모두 알맞은 타이밍에 운명적인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까?”나는 도혜선을 바라보며 내 말을 해석했다. 도혜선은 바로 내 말뜻을 이해했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만약 그때 내가 옆에 있는 장영식을 알아보고 순풍에 돛단 듯이 연애하고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았다면 우리를 평범하고 따뜻한 날들을 보냈을 거야. 얼마나 행복한 일이야.”내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너는 알맞은 타이밍에 서강민을 만났다면 서로 더 아끼고 사랑했을 것 같아. 얼마나 행복했겠어. 이미연도 만약 알맞은 타이밍에 문기태를 만났더라면 지금처럼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됐잖아.”나는 마음이 심란해서 다리를 뻗고 벽에 기대 앉았다. “너는 어떻게 이게 알맞은 타이밍이 아니라고 확신해?”도혜선이 내 말들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한 사람의 감정을 일반적으로 첫눈에 반하는 것과 시간이 지나서 애정이 생기는 것, 두 가지로 나뉘잖아. 우리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어서 두 가지 감정 모두 피할 수 없었던 거야.”그녀도 나와 같이 기대왔다. “우리 중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이었어. 어떤 감정이든지 요약하면 다 이 두 가지에 속하는 것 같아.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애정이 생긴 경우고, 이미연은 첫눈에 반한 경우야. 넌... 아마 너도 첫눈에 반한 경우인 것 같아. 첫눈에 반한 건 능동적인 거고, 시간이 지나면서 감정이 생긴 건 피동적인 거야. 그런데 능동적이든지 피동적이든지 마지막에 남는 건 정밖에 없어.”그녀는 해탈한 듯한 말투로 말했다.“그가 ‘나와 이미연은 서로 부속된 것이 아니라 생명이에요. 남
콩이의 문제가 나를 말문이 막히게 하여 나는 대충 얼버무리고 얼른 일어섰다. “아가야, 엄마가 오늘은 바빠서 못 데려다주겠어. 외할머니랑 천천히 산책하면서 유치원에 가.”“엄마, 그러면 언제 돌아와요? 우리 언제 섬에 가요?”의자에서 내려온 후 엉덩이를 씰룩거리면서 뛰어 오는 콩이의 눈빛에 기대가 가득 차 있었다. 함부로 대답하면 끊임없는 질문 세례를 받을 것이 뻔해서 나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하마터면 자신의 입을 때릴뻔했다, 이놈의 입!아무 이유 없이 그걸 왜 말했는지. 가더라도 서프라이즈로 갑자기 가는 게 좋았을 텐데. 이미 말을 꺼냈는데 지키지 못하면 어떡하지?지키지 못하면 콩이에게 너무 미안해서 꼭 지켜야 한다. 흥분된 콩이의 작은 얼굴을 보고 나는 몸을 숙여 진지하게 말했다. “엄마가 울산에서 돌아오면 가자.”저번에는 신호연때문에 난리가 나서 못 갔는데 마침 엄마, 아빠를 모시고 쉬어야 할때가 된 것 같다. 나는 울산에 가기 위해 준비한 작은 캐리어를 트렁크에 넣고 콩이에게 인사를 한 뒤, 차를 타고 출근했다. 그런데 내 차가 금방 골드 빌리지 앞을 지날 때 대문 앞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을 봤는데 머리는 희끗희끗하고 얼굴은 초췌했으며 몸집도 많이 야위었다. 그녀는 수시로 대문 안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초조하고 긴장한 것 같았다. 너무 익숙하지만 이미 남이 된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넋을 잃었다.그 사람은 바로 신호연의 엄마이자 콩이의 할머니인 김향옥이었다. 아침부터 여기에 찾아와 수시로 안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보아 우리 집의 사람을 기다리는 게 확실했다. 정확히 말하면 콩이를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눈빛에 드러난 갈망으로 보아 그녀는 아주 급박해 보였다. 내 차가 바로 그녀의 옆으로 지나갔는데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여전히 목을 길게 뻗고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원래 그냥 그녀의 존재를 무시하고 그냥 차를 타고 지나가려고 했는데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내가 차를 바꾼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 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 차
내말을 듣고 그녀는 제자리에 입을 벌리고 굳어버렸다. 마치 내가 진심으로 한 말인지 내 표정을 관찰했고 내 상냥한 얼굴이 믿기지 않는듯 했다. 나는 속으로 불쌍한 사람에게 꼭 증오심도 있다고 남몰래 투덜거렸다.한참동안 대치하다 그녀는 내 눈빛을 피하고 작은소리로 웅얼거렸다. “난, 난 그냥 보려고.”김향옥의 모습을 보고 나는 또 마음이 약해졌다. 생각해 보면 이미 반년이나 콩이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내가 이혼하기 전 그들이 별장에서 살았을 때 보고 그 후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러니 지금 그녀가 얼마나 큰 용기를 내 지금 여기에 서 있는지 상상할 수 있었다. “제 전화번호 있잖아요. 보고 싶으면 전화주시면 돼요.”나는 최대한 평온한 말투를 유지하며 말했다. 그녀는 의혹에 가득 찬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그... 내가 콩이를 만나도 돼? 막지 않을 거야?”“저는 한 번도 만나지 말라고 한적이 없어요. 그저 콩이의 일상생활을 방해하지 않고 흐트러지게 하지 않고 다치게 하지 않는다면 막지 않을 거예요.”만나는 것을 막지는 않겠지만 요구가 있었다. 김향옥의 눈가가 순식간에 빨갛게 되었고 방금까지 경계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눈빛이 부드러워지며 불쌍한 표정으로 울먹거리며 말했다. “내가 왜 다치게 하겠어. 그 애는 내...”그녀는 나를 몰래 한번 바라보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 내 손녀잖아.”나는 그녀를 데리고 그늘로 가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 전달하고 또 차에서 물을 한 병 꺼내줬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보아하니 이미 한참 밖에서 기다린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나를 두려워하고 또 조금 원망했다. 내가 사는 집에 대해 아마 계속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을 텐데 고생하고 있는 그녀에게 이 집이 얼마나 큰 유혹인지, 그리고 눈뜨고 나에게 점령당한 기분이 어떤지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전화를 꺼내 엄마에게 집에서 나왔는지 전화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콩이의 할머니가 콩이를 보러 문 앞에 와있다고 전했다. 전화기 너
문 앞의 김향옥은 순식간에 멘탈이 붕괴되어 안으로 팔을 뻗어 손을 흔들며 다급하게 외쳤다. “콩이야, 이리 와. 콩이야...”그순간, 아무리 큰 원한이 있었더라도 모두 눈 녹듯 사라지고 그녀는 단지 황혼의 노인일 뿐이었다. 특히 김향옥은 한평생 진정으로 마음 편히 지낸 적이 없었다. 진짜 나이를 먹긴 먹었나 보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 직면하다니. 그런데 이런 상황이 생긴 것은 또 누구의 책임인가. 나는 코끝이 찡해서 고개를 돌리고 숨죽여 울음을 삼켰다. 나는 두 눈으로 직접 콩이라 뒤로 피하고 무너져 내린 김향옥이 흐느껴 우는 것을 봤다. “콩이야, 이리 와. 할머니 안보고싶었어? 할머니야...”그녀는 조급함에 두리번거리며 도움을 청하려는 듯 했고 더 안에 들어가고 싶었다. 나는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서 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를 본 콩이는 소리쳤다. “엄마!”그러고는 외할머니의 손을 놓았다. 그런데 조급해하는 할머니를 보고 달려오지 않았다. 나는 콩이가 무서워하는 건지 아니면 배척하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할머니의 변화가 너무 커 낯설어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김향옥이 곁으로 가서 그녀를 위로했다. “급해하지 마세요. 제가 타일러볼게요.”김향옥은 눈물로 범벅된 얼굴로 나를 바라봤는데 눈에는 간절함으로 가득 찼다. 사실 내 마음속에는 측은함과 조금의 원망이 있었다. 이럴 거면 애초에 그러지 말지, 조금이라고 덜 매정하게, 아이에게 잘 해줬더라면 오늘 콩이가 이런 표정일 리 없다. 엄마는 또 콩이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뭐라고 말했다. 아마 다가오도록 타이르는 것 같았는데 역시 우리 집에는 독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김향옥이 나를 간절히 바라보며 말했다. “지아야, 딱 한 번만 안아볼게. 콩이야, 이리 와. 할머니가 한번 안아보자. 할머니 안보고 싶었어?”나는 들어가 콩이 앞에 무릎 꿇고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콩이야, 가서 할머니 만나봐. 할머니가 콩이가 너무 보고 싶었대. 할머니는 지금 나이가
나는 김향옥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며 마음이 좋지 않았다. 예전의 우리는 비밀 없이 모든 걸 얘기하는 사이였는데 지금은 이렇게 되다니, 정말 사람 일은 모르는 것 같다. 난 아직도 돌잔치에서 신연아를 도와 날 욕하던 장면을 기억하는데 지금 그녀의 모습을 보니 그녀의 지금 생활도 순탄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니면 이렇게까지 초라할 리 없었다. 차에 오른 후 곧장 회사로 향했지만 이상하게 마음 한 켠이 우울했다. 긴급한 일을 처리하고 장영식에게 울산에 다녀오겠다고 말하자 그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하루 미루는 게 어때? 내일 같이 가자.”“오빠도 가려고?”“저번에 말했잖아. 나도 마침 울산에 친구 몇 명 만나러 가야 한다고.”장영식이 부드럽게 날 보며 웃었다. “오늘 부산에서 손님이 오기로 해서 못가.”생각해 보니 하루쯤은 미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니면 아침에 생긴 일 때문에 기분이 하루 종일 안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콩이도 오늘 기분이 안 좋을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해월에게 비행기 티켓 변경해달라고 할게. “마침 민여진도 회사에 와 있었다. 그녀의 사무실이 비록 여기에 있지만 그녀는 일 때문에 항상 건설자재 시장에 있었고 아침저녁에만 회사에 왔다. 가끔 바쁠 때는 며칠씩 회사에 오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나는 그녀를 상당히 신임했다. 그녀가 회사에 온 이후로 이동철과의 인수인계도 잘 됐고 이동철은 비록 시장 쪽 업무를 민여진에게 인수인계했지만 여전히 시장 개척에 힘썼는데 이것이 나를 제일 안심시켰다.우리 직원들은 다들 사이가 좋았고 누구도 모난 사람이 없었다. 민여진이 직접 나를 찾아온 것을 보니 용건이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내 사무실에 들어왔고 민여진이 내게 말했다. “신연아가 자꾸 협력업체와 접촉해서 요즘 바빴어요.”민여진은 그녀가 몰래 연락한 업체 몇 곳을 알아냈는데 그녀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민여진이 나에게 준 리스트를 보고 그녀가 손을 쓰기 시작한 것을 본 나는 기
안산은 인천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지만 경제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 인천과 비교하면 천지차이였다. 비록 인천과 가깝지만 한가지 지리적 특징이 부족한데 그것은 바로 해안선이었다. 그래서 개발이 인천에 비해 많이 늦었다. 몇 년간 신호연은 안산에 공정이 없었는데 주요한 원인이 개발이 늦어 공정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나도 예전에는 안산을 고려한적이 없는데 오늘 안산의 고객이 찾아오니 지금 그곳의 상황이 어떤지 궁금해졌다. “맞아요. 다들 개발업을 하고 있어서 친구가 아니더라도 다들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에요. 모두 신흥의 인테리어가 서울에서 최고라고 해서 예전부터 한 대표님과 한번 협업하고 싶었는데 계속 타이밍이 맞지 않았어요.”그는 내 얼굴을 보며 아주 가식적으로 웃었는데 하는 말도 어색하고 말이 앞뒤가 맞지 않았다. 나는 담담히 웃었다. “권 대표님, 과찬입니다. 신흥은 그저 평범한 회사예요. 올해도 힘들게 버티고 있어요. 그래서 권 대표님이 최고라고 하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다만 신흥은 일할 때 성실과 신용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품질로 승부를 보고 있어요. 권 대표님께서 지금 건설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나요?”나는 그와 말을 에둘러 하고 싶지 않아 직설적으로 물어봤다. “한 대표님 너무 겸손하시네요.”그의 두 눈이 줄곧 나를 뚫어지게 쳐다봐서 사람을 불편하게 했다. “프로젝트 있는데 올해 안산의 중요한 공정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윗선에서 안산의 랜드마크로 만들어야 한다고 해서 공정 레벨을 높여야 해요. 높은 수준의 공정이 필요해서 저희도 신중해야 하고 또 이렇게 기회가 되어 한 대표님을 만나게 되었어요.”“권 대표님, 감사합니다.”나는 마음이 움찔했다. 안산에 중요 공정이 있다고?나는 ‘중요’라는 단어를 좋아했다. 그런데 눈앞의 사람은 아무리 봐도 중요랑은 거리가 멀어 보였다. 내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외모가 사람 됨됨이를 따라간다고 이 느끼한 아저씨는 두터운 인품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동태눈깔로 여자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서강민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서강민 씨, 먼저 들어가시죠. 언니가 깨서 서강민 씨를 보면 또 흥분할 것 같은데... 지금 같은 상황에 언니가 회복하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마디 더 보탰다.“어떤 일들은 천천히 해야 해요. 언니한테 시간을 좀 주세요. 서로 생각을 정리해 봐요.”서강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도혜선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발길을 돌리기 전에도 아쉬움에 한 번 더 뒤돌아보며 나한테 말했다.“고생해 줘요.”나도 담담히 답했다.“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언니에게 시간을 좀 줘요. 언니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수 있잖아요.”내가 말하는 회복이 뭔지는 서강민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건 도혜선이 마음에 입은 상처였다. 오늘 도혜선의 행동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녀의 상처는 아물 수 없을 것이다. 언급만 해도 피가 흘러내릴 만한 상처였다.잠시 후, 서강민은 한발 물러섰지만, 눈길은 여전히 도혜선에게 머물러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모습 아래에서 어떠한 파도가 휘몰아치는지 나는 몰랐다.한참 전 도혜선이 했던 말들은 마디마디가 주옥이었다. 모두 그녀가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었던 것들이었고 또한 서강민의 약점이었다. 얼마나 아플지는 서강민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쓰디쓴 독주도 그는 혼자 삼켜내야만 했다.도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와 깨어나려는 낌새가 보이고 나서야 서강민은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나는 마음이 아파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도혜선의 손을 맞잡았다.인제야 하루 종일 배현우에게서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쪽에는 어떤 상황인지, 김우연에게서는 소식이 없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도혜선을 보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아 살며시 그녀의 손을 놓고 일어서려 했을때, 그녀는 다시 나를 잡으며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지 마...”나는 너무 놀라 얼른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서강민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하는 걸까?’“당시의 사고는 내가 저지른 거야. 그녀도 나 때문에 다쳐서 지금처럼 된 거고… 나는 좋은 남편이 아니야. 아내가 식물인간이 되었는데 나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말이야...”서강민은 여기까지 말하며 후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너무 죄책감이 들고 고민스러워. 나 또한 발버둥 쳐봤지.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의 일탈을 받아들일 수 있어 해. 그녀한테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강민 씨!”도혜선은 꾸짖는 듯한 말투로 그의 말을 잘랐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당신 아내가 듣고 있을 거예요. 저를 끌어들여서 같이 속죄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구세주가 아니에요. 저는 그냥 사람답게 살고 싶은 평범한 여자라고요. 저 좀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요?”도혜선은 말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녀는 한 손으로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 앞으로 갔다.“혜선 언니, 움직이지 마! 위험해...”늑골 골절과 뇌진탕이 있는 환자다 보니 이러한 행동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위험했다.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녀를 안으려고 하는 한지아를 제지했다.“제가 오늘 한 말이 아직도 이해가 안 되나요? 서강민 씨, 저의 인생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신한테 묶여 당신의 부속품이 되었었는데 저도 자존심이 있어요. 더 이상 당신처럼 지난날의 죄책감을 짊어지며 답답하게 살아가지 않을 거예요.”도혜선은 여전히 분노에 차 외치고 있었다.“매일 제 앞으로 와 지난날의 행동에 대해 속죄하라고 일깨워 주실 필요 없어요! 당신을 보면 저는 지난날 모든 서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치욕적인 과거가 떠올라요. 당신은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당신은 아내와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해요.”말을 마친 도혜선은 숨이 차올랐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도혜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당신은 아무런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저 같은 여자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아도 돼요.”그녀는 자기비하적인 말을 내뱉었다.”선아...”“설사 강민 씨가 와이프와의 약속을 안 지킨다 해도 당신의 신분과 지위로 당신에게 더 어울릴만한 사람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물며 당신네 부부 눈에는 저는 그냥 염치없고 미천한 사람일 뿐이죠. 저 같은 사람은 본처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사모님이라는 호칭도 어울리지 않죠.”“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오해하지 마.”서강민은 조급함에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아섰다.“강민 씨... 해명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행동이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어요! 장담하건대 아직 당신들이 어떤 의도로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보가 된 건 아니에요. 그녀는 정말 대단하네요. 죽을 때까지도 제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녀는 아무리 병상에 누워있어도 고상한 사람이고 저는 그냥 미천한 사람일 뿐이니 말이에요.”도혜선은 말을 내뱉으며 입가에 처량한 미소를 비췄다. 누가 봐도 가슴 아픈 미소였다.“이전의 저는 확실히 허례허식에 차 있는 사람이었지만 저도 성장했어요. 정신 차렸어요. 당신 앞에 있는 저의 진정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어요. 저는 하나의 도구, 들러리뿐이었지만 원망하지 않았어요.”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숨 돌렸다. 얼굴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하지만 이제 저는 자존감을 챙기며 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고 쓰레기같은 취급을 받더라도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고 싶어졌어요.”점점 더 차가워지는 도혜선을 바라보며 서강민은 답했다.“혜선아, 나는 널 한 번도 무시한 적 없어. 나는 그냥 내가 뭘 하든지 네가 다 이해해 줄 줄 알았어.”도혜선의 서강민의 말을 듣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안색은 더 창백해져 있었다.“이해? 당신이 어떤 말을
방금 허투루 한 말이 어머니의 진실인가 싶다. 보아하니 어머니가 나를 속이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의 의문점이 점점 많아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마치고 차씨 가문의 할머니께 말씀을 드린 후, 위층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도혜선을 보러 가려고 준비했다.그리고 팔도 겸사겸사 검사하려고 했다. 차에 앉고 나서 배현우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이 이른 아침에 뭐 하러 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김우연 쪽에 무슨 소식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생각해 보니 이렇게 빠르진 않겠지? 몇 시간밖에 안 됐는데.'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도혜선이 노발대발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병실에는 도혜선과 서강민 두 사람만 보이고 이미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내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좀 이상하고 심상치 않는 것을 느꼈다.침대 옆 머릿장에는 보온병이 놓여있다. 서강민은 오늘도 도혜선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러 온 것 같다.서강민은 침대 앞에 떡 하니 서있었고 침대에 있던 도혜선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혜선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상황을 정리하려고 다가가서 서강민에게 인사를 하고 도혜선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좀 어때?""별로야."도혜선은 차갑게 대답하더니 또 말을 건넸다. "지아야, 손님 좀 배웅해 줄래?"난감했다, 도혜선은 서강민을 내쫓으라고 하는 거였다. 난 당연히 그 뜻을 알고 있다. 조심스럽게 서강민을 쳐다보았다. "혜선아, 꼭 이래야 하니?"서강민은 씁쓸한 표정으로 도혜선을 바라보며 물었다."네! 서강민씨, 저는 이미 분명히 말했고 두 번 다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도혜선은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서강민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언니, 화 그만 내고 진정 좀 해. 초조해하는 거 알아, 점차 좋아질 거야. 강민씨랑 얘기 좀 하고 있어. 나는 팔 검사해야 돼서, 금방 돌아올 거야!"나는 핑계를 대고 떠나서 그들에게 자리를 비워주었다.
배현우는 나의 우울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에 회사 일도, 한심로얄의 마지막 한방도 둘 다 포기할 수 없잖아요. 신예 쪽 일도 있고, 전희가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요. 지금 모든 게 중요한 시기이니까요.""지금 그 누구도 아버지보다 중요하지 않아요! 수십년간 도망치면서만 살았는데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분명 아주 괴로워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데, 내가... 내가 딸로서, 난..."배현우는 내 말을 듣고 나서 침대에 누워 나를 꼭 껴안고 말했다. "일단 내일 소식을 기다려 봅시다. 김우연 쪽에서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 보고 결정합시다."배현우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제 말 듣고 일단 자세요, 내일 일어나서 먼저 할 일들을 처리하고 준비하고 있으세요, 만약에 상황이 좋으면 내일 같이 데리고 갈게요, 당신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배현우가 지금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보지를 못한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배현우의 따뜻한 품에 안기며 눈을 감고 내일 먼저 무엇을 처리해야 할지 생각했다.근데... 눈을 떠서 배현우를 쳐다보는데 배현우도 잠에 들지 않았다. "현우씨... 할머니가 보존하고 있는 CCTV를 보여주시겠어요?"'그 영상을 꼭 보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어머니가 어떻게...'"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세요,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 팔짱을 끼더니 분명히 나를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배현우가 그 장면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이 깊었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배현우의품에 안겨 점점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았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배현우는 이미 곁에 없었고, 손을 뻗어 그가 누워 있던 곳을 만졌다. 이미 차가운 걸 보니 배현우는 일찍 침대에서 일어났나 보다.'무슨 소식이라도 왔나?'이
"할머니가 이번 사건을 피할 수 있었던 건 당시 큰 병을 앓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했어요. 제 생각에는 반은 꽤병인것 같아요. 직접 사표를 쓰고 나서도 서둘러 호주를 떠나지 않았다는 게 참 슬기로운 선택이었어요.""네?"너무 놀라서 몸 둘바를 몰랐다.배현우는 인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호주를 떠나지 않으셨어요. 그곳에 머물면서 배씨 저택의 인기척을 살피다가 배씨 저택의 요상한 소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에야 조용히 호주를 떠나셨어요."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메커니즘에 감탄했다."저도 그때 상황을 잘 몰라서, 할머니도 몸이 허약했고 내 행방을 알아 볼 길이 없어 그 비밀을 계속 지켜왔었나봐요. 부하들이 할머니를 찾고 나서도 여전히 어리석은 척을 하고 있었지 뭐에요."배현우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할머니께서 저를 두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그걸 꺼냈어요."배현우의 말을 듣고 나니 할머니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배현우가 나를 쳐다보더니 나의 지친 모습을 보고서야 손을 들어 대문을 열어 장벽들이 천천히 열리는 걸 볼 수 있었다.차는 왔던 길을 따라 경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벌써 자정이 되어 우리 둘은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에 돌아왔다.'우리를 배신한 소인이 두 집안을 풍비박산 시켰다니. 오늘 밤 일어난 모든 일들은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간단히 씻고 걱정 가득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태어나서 얼굴도 한번 못 본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를 걱정해 발 뻗고 자지 못했다. '한강인이랑 한걸은 이미 잡혔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의 처지는 어떤지.''한씨 부자가 그저 아버지를 인질로 삼아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면 왜 배현우는 그곳의 환경이 복잡하다고 했을가.''이유는 간단하다. 누군가 아버지를 미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고 싶으려는 걸가?''배현우? 아니면 배유정?'생각할수록 더욱 걱정이 됬다.아버지의 이번생은 이미 충분히 힘들다.어머니랑 서로
나는 걱정스레 배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배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계속 말했다.“후에 목격자 어르신을 찾고서 한강인을 자세히 조사하니 한강인은 이 모든 것이 일어난 뒤에야 천우 그룹을 떠난 거였어요. 지아 씨도 알잖아요. 그때 당시 천우 그룹은 아직 배유정 손에 있었어요.”“현우 씨의 말은 한강인은 배유정 과도 사이가 틀어졌단 말인가요?”나는 추측하며 물었다.“우리가 조사할 때 이상한 단서 하나가 나왔어요. 한동안 배유정도 한강인을 찾았고 심지어 한강인에 대한 추살령도 내렸어요! 참 이상해요. 배유정은 왜 한강인을 죽이라고 지령을 내린 걸까요?”“이유는 하나뿐이죠. 즉 한강인이 분명 무엇을 알아냈거나? 아니면 어떤 일에 참여하였거나?”나는 대답했다.배현우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진백이 죽임을 당했듯이 이 안에는 분명 남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 있는 거겠죠. 우리는 이 단서를 따라 계속 추적해 보니 한강인의 혐의가 점점 더 드러나더군요. 그리고 그의 아들 한결도 같이 도망쳤어요.”“그러고 보니 이 안에는 분명히 또 다른 요소가 있겠네요!”나는 사색에 잠겼다.“그래서 우리는 추측했죠. 한강인은 확실히 이 사건이랑 연관이 있고 둘이 도주하는 과정에 서로 연락하는 빈도를 보아서 부자 둘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어요.”“그리고 한강인이 도망 다니는 그 시기에 그의 모친이랑 누나 모두 영문도 모른 채 실종되었어요. 지금 보니 그분들은 아마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것 같네요. 이 때문에 한강인은 고두리에 놀란 새가 돼서 끊임없이 도망치며, 이 또한 한강인이 지금의 상태로 되게 한 원인인 것 같아요. 사실 한강인은 원래 지금의 모양이 아니거든요.”배현우의 말을 듣자 나는 저도 모르게 아까 보았던 한강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강인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엄청 정신적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다른 기타 방식으로 정신을 잃지 않게 버티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저렇게 말라죽을 정도일 리가 없다.“그리고 한 가
배현우는 나를 한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었다.“맞아요. 제 씨 어머니가 얼마나 총명한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어요. 제 씨 어머니는 책 속에 카메라를 숨겨두고 만약 사고가 난다면 여기에 있는 이 물건을 숨겨두었다가 훗날 믿음직스러운 사람에게 주라고 할머니한테만 똑똑히 당부해 두셨어요!”나는 코가 찡긋거리더니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보아하니 제 씨 어머니는 분명 위험이 닥칠 거라는 것을 미리 예감했던 거네요!”배현우는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제 씨 어머니는 만약 자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할머니더러 애들을 데리고 허씨 가문으로 가라고 할머니한테 당부하셨어요.”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코를 훌쩍이었다.배현우는 자기 손을 꽉 움켜쥐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참 생각지도 못한 게 모든 것이 제 씨 어머니의 예상대로 일어났고 감춰둔 카메라에 모든 것이 담겼어요! 근데 할머니는 제 씨 어머니의 뜻대로 우리 둘을 순리롭게 허씨 가문으로 데려가지 못했어요.”“급한 나머지 할머니는 고씨 가문에만 소식을 전했고 그마저도 나쁜 놈들보다 동작이 빠르지 못해 그들이 지아 씨를 데려간 후였어요. 그래서 저만 고씨 가문에서 데려갔어요.”나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그때 당시의 내가 얼마나 힘없고 무력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데다가 배현우와 억지로 갈라지게 되었다.배현우는 내 손을 꽉 잡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나도 배현우 지금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날 배현우는 눈앞에서 억지로 끌려 나가는 나를 보기만 하고 반항할 수도 없는 그런 무능력함은 아마 배현우한테 평생 잊지 못할 아픔이 되었을 것이다.차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자동차가 앞으로 가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한참 뒤에야, 배현우의 잠긴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이런 것들을 찾은 후에야 비행기 추락 사고가 떠올랐고 이로써 모든 것들이 비로소 한강인을 추측하게 했으며 그 이후에 우리는 한강인
이 소식은 그야말로 나를 입이 떡 벌어지게 했다. ‘나를 데려간 게 어떻게 그 사람이지?’“맞아요. 우리는 유일한 목격자를 찾았어요. 그 당시 그쪽 산에서 약재를 캐는 어르신이신데 그때는 중년인이셨어요. 하늘의 뜻인지, 우리가 수년을 찾아 헤맨 끝에야 비로소 이 참극의 전부를 직접 목격한 증인을 찾아냈어요.”“그 어르신 정말로 전체 과정을 모두 목격하셨나요?”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배현우 얘네가 얼마나 큰 공을 들여야 바다에서 바늘 건지는 것 같은 일을, 그것도 몇 년이 지났는데도 당시의 목격자를 찾아낸 걸까.“어르신의 말로는, 당시 자기는 산 위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잠시 계단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래 도로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해요. 알다시피 외국에서는 약재를 캐는 일은 엄청 드물어요.”배현우는 엄청 뿌듯한 말투로 말했다.“우리 형제들이 엄청나게 고생 많았어요. 십수 년을 하루같이 귀찮음을 마다하고 사건 지역을 탐방하러 다니면서 일말의 흔적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나도 믿어지지 않아 입을 열었다.“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참 노고가 많았어요.”“어르신이 말씀하기를 당시의 장면은 엄청 아슬아슬했대요. 부딪힌 차는 거의 굴러떨어지기에 일보 직전이었는데 후에 폭발했대요. 어르신은 우리의 차가 폭발한 뒤 키 크고 마른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리는 걸 똑똑히 봤다고 해요. 그리고 그 남자는 길 왼쪽의 언덕 아래로 달려가 무언가를 찾았대요.”배현우는 그때 당시의 장면을 묘사하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때 당시의 상황을 필사적으로 상상해 내려고 하니 머리가 또 아파 났지만, 배현우가 말을 멈출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시에 일어난 이 모든 것, 전부 나한테는 엄청난 매력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찾아낸 산산조각 난 퍼즐들을 하루빨리 제 위치에 맞춰서 하나의 완전한 그림을 만들어 내고 싶었으며 그때 당시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그 뒤로 난 어떻게 Z 국의 만덕동에서 떠돌게 되었고 또 어떻게 지금의 한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