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의 계획을 몰랐고 그 계획 중 나의 위치는 더욱 알 수 없었지만, 그의 계략능력에 의하면 내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아마 나도 현실을 직시하고 내 위치를 다시 정해야 할 것 같다. 서로 속이고 속이는 싸움에 휘말려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될 필요가 뭐가 있는가?에너지를 아껴 내가 적당한 지위를 얻고 부모님이 즐겁고 아이가 안전한 소소한 일상을 보내는 것이 진정한 생활이다. 아마 이런 생활에는 장영식이 제일 잘 어울리는 사람일 것 같다. 그는 다정하면서 부드럽고, 진중하면서 기품이 넘쳤으며 사업도 착실하게 하고 조급하지 않고 차분한 성격에 신흥 그룹을 지키면서 천천히 앞으로 나가고 있다. 부귀영화를 쫓지 않고 평범한 생활을 하는 것이 내 목표일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나는 장영식을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게 했고 나에 대한 다른 사람의 호의를 무시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항상 그가 베풀기만 하고 얻는 게 없으면 안 되지 않는가. 만약에 그러면 하느님이 나를 벌할 것이다.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전화가 울렸다. 힘겹게 전화를 가져와 화면을 확인하니 이미연이었다.내가 얼른 전화를 받자, 전화기 너머 이미연의 욕설이 들려왔다. “지아야, 그 미친 여자가 또 너를 건드렸어?”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어떻게 알았어?”“어떻게 알기는, 지금 인터넷에 전부 그 소식이야. 신연아 완전 미친X이네. 지아야, 용서하면 안 됐어, 그 여자 아이를 구해주지 말았어야 했어. 이런 엄마가 키우면 나중에 아이가 커봐야 얼마나 바른 사람이 되겠어. 지금 사회에 부담을 주는 거야. 크더라도 사회의 골칫덩어리야.”나는 히죽 웃었다. “됐어. 말 좀 예쁘게 해. 그래도 어린 아이인데 사고 나는 걸 그냥 보고만 있어? 아직 꼬마인데 어떻게 그래.”“너는 마음이 너무 약해서 문제야. 그 애 엄마도 무서워하지 않는데 네가 왜 걱정해. 임신했을 때부터 그러더니 이제 태어나니 아이를 데리고 꼴불견 짓을 하네. 어떻게 저런 사람이 있지?”이미연은 화를 참
민여진이 무의식중에 전한 소식에 나는 신호연이 줄곧 가격이 높다고 생각하고 원가를 낮춰 자신의 이윤을 높이고 싶어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이게 바로 그를 공략할 최적의 돌파구라는 대담한 생각이 들었다.예전에 내가 그에게 이윤만 추구하다 보면 낭패를 볼 수 있으니, 이익만 보면 안 된다고 귀띔한 적 있었다. 그때 신호연은 콧방귀를 귀며 말했다. “역시 여자는 담이 작아, 머리가 길면 지식이 짧다니깐.”그러고는 생생하게 내 머리를 가리키며 머리를 쓰라고 했다. 보아하니 이것은 그가 여기에서 낭패를 보게 될 거라는 하늘의 뜻인 것 같다. 계획이 정해지자, 내 마음이 유쾌해졌고 얼마나 큰 낭패를 볼지는 신호연이 얼마나 큰 덕을 쌓았는지 봐야겠다.이때 엄마가 콩이를 데리고 들어왔고 내 팔을 보고는 바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겨우 다 나았는데 왜 또 이렇게 됐어? 신씨 가문의 두 짐승은 좋은 심보가 하나도 없어.”콩이는 내 침대 옆으로 와 손을 뻗어 깁스한 내 팔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엄마, 여기 아파요? 아가가 호 불어주면 안 아플 거예요.”“진짜 신씨 가문 짐승 때문에 화나 죽겠어.”엄마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욕했다. “엄마, 별로 안 아파요. 큰일은 아니고 그저 뼈에 금이 조금 간 거예요. 의사 말로는 금방 낫는다고 해요. 다행히 골절은 아니어서 괜찮아요.”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때 아빠도 장영식과 함께 들어왔는데 내 팔을 보고 말했다. “얘야, 다음번에 그 여자들 만나면 피해서 가. 마주치지 말고.”난 그저 웃었다. “어디로 피해요, 이번 일은 사고였어요. 그 아이가 다칠까 봐 구하느라 그런 거지 아니면 다치지 않았을 거예요. 그 아이가 너무 어려서 떨어지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어요.”나를 바라보는 민여진의 눈에는 경외심이 보였다. “지아 씨 너무 착해요. 다른 사람이었으면 다치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을 거예요.”“그러면 안 되죠. 어른들끼리 원한이 있다고 무고한 아이로 화풀이하면 안 되잖아요.”아빠가 얼른 입을
방에 있던 두 사람을 보고 나는 살짝 놀랐다. 혹시 두 사람을 방해한 건 아닌지 난감했다.문을 연 사람이 나임을 확인한 이청원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한 대표님, 얼른 들어오세요, 오래 기다렸다고요!”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나를 빤히 쳐다보던 그 여인은 여전히 깁스한 내 팔을 훑더니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던 이청원은 여인에게 나를 소개했다.“소개해 드릴게요. 이쪽은 신흥건재 한 대표님, 한지아라고 해요.”이청원은 손으로 나를 가리키며 먼저 그 여인에게 내 소개를 해주고는 나를 보며 말했다.“한 대표님, 이쪽은 경공관의 주인이신 기태희님이에요.”나는 먼저 왼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기 여사님, 안녕하세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태희는 미소를 지으며 왼손을 뻗어 악수에 응했다. 배려심이 행동에서 묻어나왔다.자리에 앉은 후 이청원은 내 팔을 보며 물었다.“아직도 안 나은 거예요?”“네, 곧 풀 수 있을 거예요, 풀면 많이 낫겠죠!” 나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낡은 상처에 새 상처가 덧나겠네요. 부끄럽습니다. 아, 상처 얘기를 하니 이 대표님께도 감사를 드려야지요, 결정적인 시각에 지원군을 보내주셨으니.”나는 바로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아직 이청원과 기태희 간의 관계를 제대로 알 수가 없어 함부로 말을 꺼내지 못했기에 보호 대신 지원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이청원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를 짓고는 총기로 번뜩이는 두 눈으로 나를 힐끗 바라보더니 말했다.“별말씀을요, 힘든 일도 아닌데요, 뭐, 신경 쓰지 마세요.”기태희는 손을 뻗어 우아한 자태로 뜨거운 물로 다기를 깨끗이 하고는 차 한 잔을 따라줬다. 나는 두 손으로 받아 들고 한 모금 적시고는 감탄했다.“차 맛이 너무 좋네요!”약간의 과장이 섞여 있었지만 차 맛이 좋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눈앞의 여인은 물처럼 맑고, 달빛 아래 연못에 피어나는 연꽃과도 같았다. 고상하고 우아하며 눈에 띄게
나는 다시 앉으며 이청원을 바라보고 물었다.“이 대표님이 무슨 일이실까요?”“중요한 일은 아니고요, 평택의 설계 프로젝트가 계획이 완료되어서요. 전반적인 설계는 이미 심사 통과했고 얼마 안 있으면 시작될 것 같아요.”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요즘 마침 여유가 있으니 이야기라도 하려고 했죠.”나는 머리를 굴린 후 바로 말을 이었다.“사람이 필요하신 거죠? 천우 그룹의 프로젝트가 곧 끝날 예정이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 사람들은 곧 돌려보낼 겁니다. 항상 이 대표님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왠지 말로만 감사 인사를 전하기가 민망하네요!”이청원은 옅게 웃었다. 이 남자를 알고 난 후부터 항상 든 생각이었는데, 이청원이 진심으로 미소를 지을 때면 그 모습이 상당히 매력적이었고 독특한 남성미를 풍기고 있었다.“내가 뭐 사람을 돌려받으러 온 줄 아나 보죠?”이청원이 소파에 기대며 흔치 않게 여유로운 모습으로 오만함과 교활함을 벗은 채 말을 이었다.“어때요, 계속 협력할 마음은 있어요?”나는 바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당연하죠, 제가 아니라 이 대표님께서 저희와의 협력에 만족하셨는지가 중요하죠!”“전 평택시 건축과 내부 인테리어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고 싶어요. 원래는 혼자 하려고 했는데 힘에 부치는지라 외부에 맡기려고 생각 중이죠.”이청원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다만, 저는 좀 프리미엄 라인으로 하고 싶거든요. 전에 15만 평짜리 2차 프로젝트를 제가 직접 검수했었는데, 상당히 마음에 들었어요. 그래서 함께 의논 좀 하려고요.”이청원의 말에서 한가지 정보를 캐치했다. 힘에 부친다라, 이청원이 또 무언가 큰일을 벌려서 힘에 부치는 것이 아닐까?“이 대표님의 요구가 어떤가에 달렸죠. 올해 저와 장영식의 생각도 좀 바뀌었어요, 마침 저희도 고급화 전략을 하기로 해 저희만의 브랜드를 만들기로 했거든요. 해외에 있는 디자인 팀들도 초청하려고요. 이쪽에서는 저와 장 부장님에게 좋은 조건이 있어요, 영식이 해외에서
이청원은 내 말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배유정이 사생결단으로 덤빈다면 그렇겠죠!”왠지 모르지만 이청원의 한마디에 내 심장이 미친 듯 요동쳤다. 배유정이 필사적으로 덤빈다면 피해를 볼 것은 천우 그룹이 분명했다.그럼 이청원은 나한테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 것일까? 전희와 관련된 일이었기에 직접 묻지도 못하는 노릇이었다.사실 지금껏 나와 이청원 사이의 대화는 의도적으로 전희를 피하고 있었다.잠시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에 이청원의 말이 다시 들렸다.“그럼 고급화 전략을 하겠다는 건, 에메랄드 그린을 참고한 건가요?”나는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솔직하게 대답했다.“맞아요!” 나에게 변희준을 소개해 준 건 이청원이었기 때문이다.“혹시나 해서 알려주는 건데, 너무 빨리 이루려고 하지 말아요. 에메랄드 그린에 실력이 상당한 기획팀이 있는데 전 세계적인 엘리트들만 모아놨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직 아무도 따라 하지 못하고 있다는데, 한 대표님도 조심해요!”나는 옅게 웃었다.“지금 절 공격하시는 건가요?”“아니죠, 그저 충고하는 거예요. 어떤 일은 천지인 삼박자가 다 맞아야 성공하는 법이잖아요?”“네, 고마워요! 항상 신중하게 행동할게요!”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청원에 대한 호감이 조금 깊어짐을 느꼈다. 이럴 때 객관적인 충고를 해줄 수 있다는 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우리는 반나절 동안 오랜 대화를 나눴다.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이청원은 갑자기 등 뒤로 한마디 남겼다.“사실 경호원을 더 많이 보낸 건 배현우였어요!”나는 자리에 우뚝 멈춘 채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그저 왼손을 들어 손 인사만 남긴 채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이청원이 말하지 않아도 그날 경호원 사이에 배현우의 사람도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이미 그날 병원에서 확신을 하게 됐다. ‘일이 다 끝났네요.’라는 말에 배현우도 반박하지 않았다는 건 단순히 정보만 내놓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이청원도 흥미로운 사람이었다. 내가 어떻게 떠보든 원칙대로 걸려들지
내 제안이 떨어지자마자 한소연의 매니저가 극구 반대했다.“갔다 왔다 무슨 소동이에요. 우리 소연 씨 시간이 남아도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한가해 보여요?”나는 눈에 힘을 주고 쳐다봤다. 한소연의 매니저인 임가연은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한소연만 믿고 막 나가는 듯 오만한 얼굴을 한 채 내 제안을 반박했다.진즉에 이미연으로부터 임가연에 대한 소문을 들었었다. 한소연의 세력을 이용해 이미연을 자리에서 내쫓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이번에는 그 시한폭탄이 내 손에 들어와 버렸다. 임가연의 속셈은 뻔히 보였다. 한소연이 이미 유명한 톱스타가 된 데다 배현우라는 동아줄까지 잡았으니 그녀도 자신이 뭐라도 된 듯 약자를 괴롭힐 셈이었다.한소연의 어시스트는 이미연이 한소연 옆에 심어둔 사람으로 그녀의 말에 의하면 임가연이 이세림과 사적으로 모종의 관계가 있다고 한다.역시 그 팬들의 화력 또한 그녀와 연관이 있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나는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번뜩였다. 이 일을 계기로 나 또한 흥미진진한 연극을 계획하고 싶었다. 임가연을 이용해 이세림에게 우리와 한소연이 공개적으로 맞서고 있다는 소식을 전달하게 해 이세림을 다시 끌어내 올 생각이었다.이런 아이디어가 떠오르자 나는 물러설 수 없었다.“문제를 찾아내 소연 씨를 만족시키려면 모델 하우스에 가야만 해요. 그래야 가장 직관적으로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내고 직접 문제를 해결할 수 있죠.”나는 강경한 태도로 말을 이었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왜냐하면, 저도 그렇게 한가하진 않거든요!”내 말이 끝나자 이미연이 의미심장하게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눈동자를 번뜩였다.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됐고 특히 책임자가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 모두 티를 내지 않았지만, 이 회의가 필요하지 않은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소연 씨가 다음 일정이 있어서요. 여기서 당신들 잘못을 하나하나 짚어줄 시간은 없네요.” 임가연이 내 도발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불만의 소리를 내
천우 그룹 책임자는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 “그... 그게, 저도 결재를 받아야 하는 부분이라서요.”“좋습니다, 기다릴 수 있어요!”말을 마친 나는 아예 미팅룸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이미연이 감탄의 눈빛을 보내며 애써 웃음을 참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바빠진 쪽은 임가연이었다.“한 대표님, 무슨 뜻이에요? 저희도 함께 기다리라는 뜻인가요?”“그럼요?”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도발의 뜻으로 물었다.임가연이 목소리를 낮추며 반문했다. “무슨 뜻이죠?”프로젝트 책임자는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 “한 대표님, 아니면 저희... 먼저 방안부터 확정하고 다시 결재를 부탁해보는 게 어떨까요?”“그럴 필요 없어요!”차가운 목소리가 순식간에 책임자의 말을 가로챘다.목소리와 함께 배현우가 성큼성큼 미팅룸으로 들어왔고 그 옆에는 한소연이 껌딱지처럼 찰싹 붙어 들어오고 있었다.배현우는 들어오고 나서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쓱 훑더니 아직 깁스를 풀지 못한 내 팔에 시선을 뒀다.“한 대표님의 말대로 해요, 타이틀에 추가하죠!”나는 배현우가 바로 내 요구에 동의할 줄 몰랐던지라 심장이 쿵 하고 요동쳤다.임가연은 배현우의 등장에 바로 아주 가득한 미소를 띠고는 배현우를 향해 말했다.“배 대표님, 그...계약에 어긋나는 일이 아닐까요? 저희는 천우 그룹 모델인데 또 다른 타이틀까지 추가되면... 저희도 돌아가서 뭐라 전달하기 힘드네요. 신흥까지...”“그래서요? 이젠 천우 그룹 위에 있단 말인가요?”배현우가 차가운 눈동자로 임가연을 응시하며 말했다.“아니요, 절대 그런 게 아니라!”임가연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전에는... 그러지 않았으니까요... 신흥이 타이틀에 추가되면 우리 소연 씨 이미지를 홍보에 사용한 것인데, 그럼 따로 계약 비용을 받아야죠.”“신흥은 천우 그룹 파트너사에요. 천우 그룹에 전속 협력하고 있죠. 가연 씨 뜻대로라면 그럼 소연 씨를 기용하려면 저희 천우 그룹에서 돈을 두 배로 내야 한단 말인가요?”배현우가 오만하게 물
“그럼요, 한 대표님. 문제없어요!” 디자이너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이 디자이너는 장영식이 해외에서 스카우트해 온 친구로 그의 후배 조이스의 친구였고 이름은 제니라고 했다.그녀는 국제적인 실내 인테리어 디자인 대회에서 신인상을 받은 이력이 있었다. 실내 인테리어 업계는 발전 공간이 무궁무진했고 이런 큰 영예를 얻었다는 건 출중한 그녀의 실력을 증명해 줬다. 이번에는 조이스를 따라 국내로 돌아오게 된 것이었다.나와 영식이 경영 방향을 새로 조정한 뒤로 영식은 이미 좋은 인재들을 스카우트 해오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녔고 나도 내 나름대로 예상안을 세웠다. 지금 손에 있는 몇 가지 프로젝트를 통해 튼실한 기반을 마련한 데다 도혜선의 지지로 자신감이 충전된 상태였다.팔에 깁스를 푼 후 서울로 올라가 이랑과의 물밑 작업을 다시 진행해 적당한 시기에 바로 합병을 추진할 계획이었다.모델 하우스에 도착했고 나는 이곳의 인테리어에 꽤 만족하고 있었다. 소프트 인테리어의 추가는 금상첨화였고 완벽해서 손댈 곳이 없었다.이런 걸 한소연이 만족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헛소리하고 있음이 분명했다.안으로 들어서자 배현우도 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가 직접 함께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한소연은 모델 하우스에 들어서자마자 이곳의 모든 것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탐욕이 서려 있는 눈을 통해서도 그녀가 이 아름다운 디자인에 매료돼 100% 만족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나는 이 의도적인 괴롭힘이 그녀의 뜻이 아니라 배후에서 조종하는 누군가가 있을 것임을 확신했다.하지만 나는 바로 진실을 들춰낼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나로서도 이득인 셈이니 얕은수를 더 쓸 필요는 없었다. 이번 의외의 소동에서 십 분도 채 안 돼 승부는 정해졌으니 이젠 그녀의 뜻대로 고분고분 응해주는 편이 나았다.앞으로의 판은 한소연이 어떻게 끌고 갈지에 달려있었다. 그녀가 더 난리를 부려줄수록 진짜처럼 보일 테니까.이세림이 우리의 충돌을 알게 된 데다 내가 이득까지 취했으니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서강민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서강민 씨, 먼저 들어가시죠. 언니가 깨서 서강민 씨를 보면 또 흥분할 것 같은데... 지금 같은 상황에 언니가 회복하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마디 더 보탰다.“어떤 일들은 천천히 해야 해요. 언니한테 시간을 좀 주세요. 서로 생각을 정리해 봐요.”서강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도혜선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발길을 돌리기 전에도 아쉬움에 한 번 더 뒤돌아보며 나한테 말했다.“고생해 줘요.”나도 담담히 답했다.“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언니에게 시간을 좀 줘요. 언니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수 있잖아요.”내가 말하는 회복이 뭔지는 서강민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건 도혜선이 마음에 입은 상처였다. 오늘 도혜선의 행동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녀의 상처는 아물 수 없을 것이다. 언급만 해도 피가 흘러내릴 만한 상처였다.잠시 후, 서강민은 한발 물러섰지만, 눈길은 여전히 도혜선에게 머물러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모습 아래에서 어떠한 파도가 휘몰아치는지 나는 몰랐다.한참 전 도혜선이 했던 말들은 마디마디가 주옥이었다. 모두 그녀가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었던 것들이었고 또한 서강민의 약점이었다. 얼마나 아플지는 서강민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쓰디쓴 독주도 그는 혼자 삼켜내야만 했다.도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와 깨어나려는 낌새가 보이고 나서야 서강민은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나는 마음이 아파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도혜선의 손을 맞잡았다.인제야 하루 종일 배현우에게서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쪽에는 어떤 상황인지, 김우연에게서는 소식이 없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도혜선을 보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아 살며시 그녀의 손을 놓고 일어서려 했을때, 그녀는 다시 나를 잡으며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지 마...”나는 너무 놀라 얼른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서강민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하는 걸까?’“당시의 사고는 내가 저지른 거야. 그녀도 나 때문에 다쳐서 지금처럼 된 거고… 나는 좋은 남편이 아니야. 아내가 식물인간이 되었는데 나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말이야...”서강민은 여기까지 말하며 후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너무 죄책감이 들고 고민스러워. 나 또한 발버둥 쳐봤지.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의 일탈을 받아들일 수 있어 해. 그녀한테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강민 씨!”도혜선은 꾸짖는 듯한 말투로 그의 말을 잘랐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당신 아내가 듣고 있을 거예요. 저를 끌어들여서 같이 속죄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구세주가 아니에요. 저는 그냥 사람답게 살고 싶은 평범한 여자라고요. 저 좀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요?”도혜선은 말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녀는 한 손으로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 앞으로 갔다.“혜선 언니, 움직이지 마! 위험해...”늑골 골절과 뇌진탕이 있는 환자다 보니 이러한 행동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위험했다.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녀를 안으려고 하는 한지아를 제지했다.“제가 오늘 한 말이 아직도 이해가 안 되나요? 서강민 씨, 저의 인생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신한테 묶여 당신의 부속품이 되었었는데 저도 자존심이 있어요. 더 이상 당신처럼 지난날의 죄책감을 짊어지며 답답하게 살아가지 않을 거예요.”도혜선은 여전히 분노에 차 외치고 있었다.“매일 제 앞으로 와 지난날의 행동에 대해 속죄하라고 일깨워 주실 필요 없어요! 당신을 보면 저는 지난날 모든 서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치욕적인 과거가 떠올라요. 당신은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당신은 아내와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해요.”말을 마친 도혜선은 숨이 차올랐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도혜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당신은 아무런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저 같은 여자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아도 돼요.”그녀는 자기비하적인 말을 내뱉었다.”선아...”“설사 강민 씨가 와이프와의 약속을 안 지킨다 해도 당신의 신분과 지위로 당신에게 더 어울릴만한 사람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물며 당신네 부부 눈에는 저는 그냥 염치없고 미천한 사람일 뿐이죠. 저 같은 사람은 본처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사모님이라는 호칭도 어울리지 않죠.”“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오해하지 마.”서강민은 조급함에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아섰다.“강민 씨... 해명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행동이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어요! 장담하건대 아직 당신들이 어떤 의도로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보가 된 건 아니에요. 그녀는 정말 대단하네요. 죽을 때까지도 제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녀는 아무리 병상에 누워있어도 고상한 사람이고 저는 그냥 미천한 사람일 뿐이니 말이에요.”도혜선은 말을 내뱉으며 입가에 처량한 미소를 비췄다. 누가 봐도 가슴 아픈 미소였다.“이전의 저는 확실히 허례허식에 차 있는 사람이었지만 저도 성장했어요. 정신 차렸어요. 당신 앞에 있는 저의 진정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어요. 저는 하나의 도구, 들러리뿐이었지만 원망하지 않았어요.”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숨 돌렸다. 얼굴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하지만 이제 저는 자존감을 챙기며 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고 쓰레기같은 취급을 받더라도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고 싶어졌어요.”점점 더 차가워지는 도혜선을 바라보며 서강민은 답했다.“혜선아, 나는 널 한 번도 무시한 적 없어. 나는 그냥 내가 뭘 하든지 네가 다 이해해 줄 줄 알았어.”도혜선의 서강민의 말을 듣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안색은 더 창백해져 있었다.“이해? 당신이 어떤 말을
방금 허투루 한 말이 어머니의 진실인가 싶다. 보아하니 어머니가 나를 속이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의 의문점이 점점 많아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마치고 차씨 가문의 할머니께 말씀을 드린 후, 위층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도혜선을 보러 가려고 준비했다.그리고 팔도 겸사겸사 검사하려고 했다. 차에 앉고 나서 배현우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이 이른 아침에 뭐 하러 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김우연 쪽에 무슨 소식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생각해 보니 이렇게 빠르진 않겠지? 몇 시간밖에 안 됐는데.'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도혜선이 노발대발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병실에는 도혜선과 서강민 두 사람만 보이고 이미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내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좀 이상하고 심상치 않는 것을 느꼈다.침대 옆 머릿장에는 보온병이 놓여있다. 서강민은 오늘도 도혜선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러 온 것 같다.서강민은 침대 앞에 떡 하니 서있었고 침대에 있던 도혜선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혜선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상황을 정리하려고 다가가서 서강민에게 인사를 하고 도혜선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좀 어때?""별로야."도혜선은 차갑게 대답하더니 또 말을 건넸다. "지아야, 손님 좀 배웅해 줄래?"난감했다, 도혜선은 서강민을 내쫓으라고 하는 거였다. 난 당연히 그 뜻을 알고 있다. 조심스럽게 서강민을 쳐다보았다. "혜선아, 꼭 이래야 하니?"서강민은 씁쓸한 표정으로 도혜선을 바라보며 물었다."네! 서강민씨, 저는 이미 분명히 말했고 두 번 다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도혜선은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서강민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언니, 화 그만 내고 진정 좀 해. 초조해하는 거 알아, 점차 좋아질 거야. 강민씨랑 얘기 좀 하고 있어. 나는 팔 검사해야 돼서, 금방 돌아올 거야!"나는 핑계를 대고 떠나서 그들에게 자리를 비워주었다.
배현우는 나의 우울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에 회사 일도, 한심로얄의 마지막 한방도 둘 다 포기할 수 없잖아요. 신예 쪽 일도 있고, 전희가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요. 지금 모든 게 중요한 시기이니까요.""지금 그 누구도 아버지보다 중요하지 않아요! 수십년간 도망치면서만 살았는데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분명 아주 괴로워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데, 내가... 내가 딸로서, 난..."배현우는 내 말을 듣고 나서 침대에 누워 나를 꼭 껴안고 말했다. "일단 내일 소식을 기다려 봅시다. 김우연 쪽에서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 보고 결정합시다."배현우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제 말 듣고 일단 자세요, 내일 일어나서 먼저 할 일들을 처리하고 준비하고 있으세요, 만약에 상황이 좋으면 내일 같이 데리고 갈게요, 당신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배현우가 지금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보지를 못한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배현우의 따뜻한 품에 안기며 눈을 감고 내일 먼저 무엇을 처리해야 할지 생각했다.근데... 눈을 떠서 배현우를 쳐다보는데 배현우도 잠에 들지 않았다. "현우씨... 할머니가 보존하고 있는 CCTV를 보여주시겠어요?"'그 영상을 꼭 보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어머니가 어떻게...'"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세요,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 팔짱을 끼더니 분명히 나를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배현우가 그 장면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이 깊었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배현우의품에 안겨 점점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았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배현우는 이미 곁에 없었고, 손을 뻗어 그가 누워 있던 곳을 만졌다. 이미 차가운 걸 보니 배현우는 일찍 침대에서 일어났나 보다.'무슨 소식이라도 왔나?'이
"할머니가 이번 사건을 피할 수 있었던 건 당시 큰 병을 앓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했어요. 제 생각에는 반은 꽤병인것 같아요. 직접 사표를 쓰고 나서도 서둘러 호주를 떠나지 않았다는 게 참 슬기로운 선택이었어요.""네?"너무 놀라서 몸 둘바를 몰랐다.배현우는 인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호주를 떠나지 않으셨어요. 그곳에 머물면서 배씨 저택의 인기척을 살피다가 배씨 저택의 요상한 소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에야 조용히 호주를 떠나셨어요."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메커니즘에 감탄했다."저도 그때 상황을 잘 몰라서, 할머니도 몸이 허약했고 내 행방을 알아 볼 길이 없어 그 비밀을 계속 지켜왔었나봐요. 부하들이 할머니를 찾고 나서도 여전히 어리석은 척을 하고 있었지 뭐에요."배현우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할머니께서 저를 두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그걸 꺼냈어요."배현우의 말을 듣고 나니 할머니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배현우가 나를 쳐다보더니 나의 지친 모습을 보고서야 손을 들어 대문을 열어 장벽들이 천천히 열리는 걸 볼 수 있었다.차는 왔던 길을 따라 경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벌써 자정이 되어 우리 둘은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에 돌아왔다.'우리를 배신한 소인이 두 집안을 풍비박산 시켰다니. 오늘 밤 일어난 모든 일들은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간단히 씻고 걱정 가득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태어나서 얼굴도 한번 못 본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를 걱정해 발 뻗고 자지 못했다. '한강인이랑 한걸은 이미 잡혔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의 처지는 어떤지.''한씨 부자가 그저 아버지를 인질로 삼아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면 왜 배현우는 그곳의 환경이 복잡하다고 했을가.''이유는 간단하다. 누군가 아버지를 미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고 싶으려는 걸가?''배현우? 아니면 배유정?'생각할수록 더욱 걱정이 됬다.아버지의 이번생은 이미 충분히 힘들다.어머니랑 서로
나는 걱정스레 배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배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계속 말했다.“후에 목격자 어르신을 찾고서 한강인을 자세히 조사하니 한강인은 이 모든 것이 일어난 뒤에야 천우 그룹을 떠난 거였어요. 지아 씨도 알잖아요. 그때 당시 천우 그룹은 아직 배유정 손에 있었어요.”“현우 씨의 말은 한강인은 배유정 과도 사이가 틀어졌단 말인가요?”나는 추측하며 물었다.“우리가 조사할 때 이상한 단서 하나가 나왔어요. 한동안 배유정도 한강인을 찾았고 심지어 한강인에 대한 추살령도 내렸어요! 참 이상해요. 배유정은 왜 한강인을 죽이라고 지령을 내린 걸까요?”“이유는 하나뿐이죠. 즉 한강인이 분명 무엇을 알아냈거나? 아니면 어떤 일에 참여하였거나?”나는 대답했다.배현우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진백이 죽임을 당했듯이 이 안에는 분명 남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 있는 거겠죠. 우리는 이 단서를 따라 계속 추적해 보니 한강인의 혐의가 점점 더 드러나더군요. 그리고 그의 아들 한결도 같이 도망쳤어요.”“그러고 보니 이 안에는 분명히 또 다른 요소가 있겠네요!”나는 사색에 잠겼다.“그래서 우리는 추측했죠. 한강인은 확실히 이 사건이랑 연관이 있고 둘이 도주하는 과정에 서로 연락하는 빈도를 보아서 부자 둘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어요.”“그리고 한강인이 도망 다니는 그 시기에 그의 모친이랑 누나 모두 영문도 모른 채 실종되었어요. 지금 보니 그분들은 아마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것 같네요. 이 때문에 한강인은 고두리에 놀란 새가 돼서 끊임없이 도망치며, 이 또한 한강인이 지금의 상태로 되게 한 원인인 것 같아요. 사실 한강인은 원래 지금의 모양이 아니거든요.”배현우의 말을 듣자 나는 저도 모르게 아까 보았던 한강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강인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엄청 정신적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다른 기타 방식으로 정신을 잃지 않게 버티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저렇게 말라죽을 정도일 리가 없다.“그리고 한 가
배현우는 나를 한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었다.“맞아요. 제 씨 어머니가 얼마나 총명한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어요. 제 씨 어머니는 책 속에 카메라를 숨겨두고 만약 사고가 난다면 여기에 있는 이 물건을 숨겨두었다가 훗날 믿음직스러운 사람에게 주라고 할머니한테만 똑똑히 당부해 두셨어요!”나는 코가 찡긋거리더니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보아하니 제 씨 어머니는 분명 위험이 닥칠 거라는 것을 미리 예감했던 거네요!”배현우는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제 씨 어머니는 만약 자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할머니더러 애들을 데리고 허씨 가문으로 가라고 할머니한테 당부하셨어요.”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코를 훌쩍이었다.배현우는 자기 손을 꽉 움켜쥐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참 생각지도 못한 게 모든 것이 제 씨 어머니의 예상대로 일어났고 감춰둔 카메라에 모든 것이 담겼어요! 근데 할머니는 제 씨 어머니의 뜻대로 우리 둘을 순리롭게 허씨 가문으로 데려가지 못했어요.”“급한 나머지 할머니는 고씨 가문에만 소식을 전했고 그마저도 나쁜 놈들보다 동작이 빠르지 못해 그들이 지아 씨를 데려간 후였어요. 그래서 저만 고씨 가문에서 데려갔어요.”나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그때 당시의 내가 얼마나 힘없고 무력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데다가 배현우와 억지로 갈라지게 되었다.배현우는 내 손을 꽉 잡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나도 배현우 지금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날 배현우는 눈앞에서 억지로 끌려 나가는 나를 보기만 하고 반항할 수도 없는 그런 무능력함은 아마 배현우한테 평생 잊지 못할 아픔이 되었을 것이다.차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자동차가 앞으로 가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한참 뒤에야, 배현우의 잠긴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이런 것들을 찾은 후에야 비행기 추락 사고가 떠올랐고 이로써 모든 것들이 비로소 한강인을 추측하게 했으며 그 이후에 우리는 한강인
이 소식은 그야말로 나를 입이 떡 벌어지게 했다. ‘나를 데려간 게 어떻게 그 사람이지?’“맞아요. 우리는 유일한 목격자를 찾았어요. 그 당시 그쪽 산에서 약재를 캐는 어르신이신데 그때는 중년인이셨어요. 하늘의 뜻인지, 우리가 수년을 찾아 헤맨 끝에야 비로소 이 참극의 전부를 직접 목격한 증인을 찾아냈어요.”“그 어르신 정말로 전체 과정을 모두 목격하셨나요?”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배현우 얘네가 얼마나 큰 공을 들여야 바다에서 바늘 건지는 것 같은 일을, 그것도 몇 년이 지났는데도 당시의 목격자를 찾아낸 걸까.“어르신의 말로는, 당시 자기는 산 위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잠시 계단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래 도로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해요. 알다시피 외국에서는 약재를 캐는 일은 엄청 드물어요.”배현우는 엄청 뿌듯한 말투로 말했다.“우리 형제들이 엄청나게 고생 많았어요. 십수 년을 하루같이 귀찮음을 마다하고 사건 지역을 탐방하러 다니면서 일말의 흔적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나도 믿어지지 않아 입을 열었다.“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참 노고가 많았어요.”“어르신이 말씀하기를 당시의 장면은 엄청 아슬아슬했대요. 부딪힌 차는 거의 굴러떨어지기에 일보 직전이었는데 후에 폭발했대요. 어르신은 우리의 차가 폭발한 뒤 키 크고 마른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리는 걸 똑똑히 봤다고 해요. 그리고 그 남자는 길 왼쪽의 언덕 아래로 달려가 무언가를 찾았대요.”배현우는 그때 당시의 장면을 묘사하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때 당시의 상황을 필사적으로 상상해 내려고 하니 머리가 또 아파 났지만, 배현우가 말을 멈출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시에 일어난 이 모든 것, 전부 나한테는 엄청난 매력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찾아낸 산산조각 난 퍼즐들을 하루빨리 제 위치에 맞춰서 하나의 완전한 그림을 만들어 내고 싶었으며 그때 당시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그 뒤로 난 어떻게 Z 국의 만덕동에서 떠돌게 되었고 또 어떻게 지금의 한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