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머릿속에서 스멀스멀 싹을 틔우려는 생각들을 꾹꾹 눌러버렸다. 그가 내가 보는 앞에서 한소연을 안고 간 일을 용서할 수 없어 얼른 이 생각을 접었다. 나는 자신에게 경고했다, 그동안의 감언이설과 쌓인 감정들은 잊자고... 이 모든 것이 그날 밤 나에 대한 그의 무정함을 이기지 못한다고.우습게도 그는 나를 사랑한다면서 내가 상처받았는지 한마디도 묻지 않고 다른 여자를 안고 태연히 떠났는데 나는 그처럼 냉혈 인간이 못 되었다. “이번 사건이 문제점을 설명해 주지 않나요? 당신의 팬들을 이용해 나에게 상처 주고 진상이 밝혀진 이후에 책임을 당신에게 미뤘어요. 생각해 봐요, 당신이 말한 ‘그 사람’은 손실이 있는지.”나는 이 흐름을 타 예를 들며 그녀를 몰아붙였다. “당신은 갑자기 무너진 배경이 나만을 위해 준비한 것 같아요? 생각해 봐요, 만약 그날 내가 당신을 끌어당기지 않았다면, 다친 건 제가 아니었겠죠? 아마 이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 당신이었을 거예요.”나는 한소연의 얼굴이 어둡게 변하고 날 보는 눈빛도 점점 복잡미묘함이 섞이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신은 나에게 욕설을 퍼부었죠. 그날 당신을 잡은 게 너무 후회돼요. 한소연씨, 만약 내가 한발 물러나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바라보면 뒤의 일들이 발생하지 않았을 거예요. 이 진흙탕 전쟁에도 엮이지 않고 최소한 내 자신이 다치지 않게 보호할 수 있었을 거예요.”“그건 모두 팬들이 한 거예요. 나랑 무슨 상관이에요?”한소연이 당당하게 해명했다.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요. 당신 팬들이 날 공격할 때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을 했는지.”그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 내 눈동자는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나는 그녀의 입가가 미세하게 떨리고 내 눈빛을 피하는 것을 보았다. “반성 좀 해요. 진상조사를 경찰만 할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제 부하들도 할 거예요. 일단 진상이 밝혀지면 당신도 책임을 피하기 어려울 거예요.”이상하게 그 순간 내 마음이 조금 흥
손님을 쫓아내 달라고 말한 후 나는 그를 보고 싶지 않아 눈을 감았다. 나는 그가 낮은 목소리로 한소연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먼저 나가 있어요, 한 대표와 할 말이 있어요.”“네.”한소연이 얌전히 대답하고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나는 그의 눈빛이 나랑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고 심지어 그 숨결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발... 괜찮아요?”나는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지 않고 다친 발을 보며 담담히 대답했다. “어떤 게 괜찮은 건지 잘 모르겠네요.”“아직 아파요?”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하고 손을 내 발을 향해 뻗었다. “날 건드리지 말아요. 당신 더러운 손 치워요.”나는 급히 몸을 일으켜 분노에 찬 눈빛으로 그의 악마 같은 얼굴을 봤다. “그녀를 데리고 날 멀리해줘요. 그리고 더 이상 바보같지 않게 좀 가르쳐요. 날 귀찮게 하지도 말고요. 사실 아픈 게 당신들을 보는 것보다 나아요.”그의 손이 허공에 멈추고 손끝이 움찔하더니 가느다란 눈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쳐지나갔다. 그런데 시선이 줄곧 나에게 멈춰있어 날 불쾌하게 했다. “배 대표님, 아직 할 말 남으셨나요?”나는 그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자료와 경호원을 내준 건 고마워요. 그런데 저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바보 같은 짓은 필요 없고 진상만 알고 싶어요. 만약 제가 그저 당신이 만든 판의 바둑알이라면 이 판의 승패는 이미 결정 났잖아요. 일도 잠잠해졌고 사람도 지켰으니 제발 아량을 베풀어 저를 놓아주세요. 앞으로 그녀 단속 잘해주세요, 다시는 절 해치지 않게. 어때요?”“그녀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배현우의 이 말에 나는 순식간에 굳어버렸고 가슴이 숨 쉴 수 없을만큼 아파 손이 나도 모르게 침대커버를 꽉 잡았다. 우리 모두 ‘그녀’가 누구를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는데 곧이어 내 추측이 증명됐다. 그는 이세림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 누가 중요한 건가?설마 내가 시달려 죽어야 중요한 건가? 호랑이 새끼를 키우는 것의
병원 로비를 나가려고 할 때, 마침 아이들 안고 들어오고 있는 신연아를 봤다. 옆에는 진한 메이크업을 한 여자가 있었는데 차림새와 비틀고 있는 굵은 허리를 보고 신연아가 새로 찾은 엄마, 강숙자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내 눈길은 그녀의 몸을 훑으며 마음속으로 강숙자가 성공적으로 신연아 곁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나는 참지 못하고 탄식했다. 그래도 엄마는 친엄마가 좋네, 이제 김향옥이 고생하겠다.원래 그냥 못 본 척하려고 했는데 하필 신연아도 이미 나를 발견했다. “지아 씨.”그녀는 바로 분개하여 부르더니 빠른 걸음으로 나를 향해 걸어왔는데 그것은 마치 오랜 고모 삼촌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첫돌 잔치로부터 이미 한 달쯤 지났는데 오늘 그녀를 처음 만났다. 원래 서강훈에게서 강숙자가 신호연의 구타로 인해 입원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나은 모양이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향해 바라봤다. 이미 그녀에게 예의를 차리기도 귀찮아 태연히 물었다. “용건 있어요?”그녀의 작은 눈이 장영식을 한번 흘깃 바라보더니 괴상야릇한 말투로 말했다. “정말 생활이 다채롭네요. 아주 바람 잘 날이 없어요, 남자를 옷 갈아입듯이 바꾸고 또 새로운 사람이 생긴거 예요?”사실 그녀는 장영식을 알고 있는데 이렇게 괴상야릇한 말을 하는 이유는 단지 나를 불쾌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네.”나는 생트집을 잡는 그녀를 상대하기 귀찮아 전혀 회피하지 않고 한마디 대답했다. 내 태도가 평온한 것을 본 그녀는 순식간에 화가 치밀었다. “허... 낯짝이 참 두껍네요, 이렇게 빨리 인정하다니.”원래 병원은 늘 사람이 많은 곳인데 그녀의 높은 목소리에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렇게 싸움닭처럼 달려들지 말고 정력을 좀 남겨 아이를 돌봐요.”나는 담담히 그녀에게 말한 후 그녀 품 안의 아이를 한번 봤다. 이번에 나는 이 아이를 처음 봤는데 나이는 삼 개월 남짓했다. 피부는 신연아를 닮아 하얗지 않았고 외모도 신연아를 많이 닮았다. 모두
강숙자의 행동에 주위에서 걸음을 멈추고 구경하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어찌 됐든 품에 아이도 안고 있는데 이렇게 물불 안 가리는 행동에 모든 사람이 손에 땀을 쥐었다. 이렇게 귀를 찌르는 외침 속에서도 울지 않고 얌전히 있는 걸 보아하니 이 아이도 나중에 전투력이 장난 아닐 것 같다. 한편 옆에 서 있던 신연아도 전혀 자신의 엄마를 막을 생각 없이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보고 있었다.이를 본 장영식이 얼른 나를 자신의 뒤로 끌어당기며 분노에 찬 눈빛으로 소리쳤다. “감히!”그의 한마디 외침이 확실히 두 모녀를 놀라게 했다. 강숙자는 발을 멈췄고 한 손에는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은 여전히 할퀴려고 하고 있었다.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이 탄식했다. “진짜 제정신 아니네요. 아이를 안고 미친 짓을 하다니.”“지금 첩들은 다들 왜 이렇게 떳떳하죠? 딱 보니 두 사람 다 정상이 아니고 허세가 가득하네요. 아이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지 못할망정.”이 말을 들은 신연아는 바로 미쳐 날뛰었다. “당신들이 뭘 알아요? 이 여자야말로 첩이에요. 애 딸린 이혼녀가 심지어 어느 대표님을 유혹해 재벌가에 시집가려다 온몸에 썩은 계란 맞았어요. 못 봤어요?”보아하니 내가 제일 초라했던 모습에 신연아는 많이 신이 났었던 것 같다. 신연아는 허리를 짚고 한 무리의 사람을 가리켰는데 계속 의논하는 것을 보고 더욱 화가 났다. “다들 그만 궁시렁거려요. 이 여자는 그저 돈에 눈멀어 인터넷에 소문이 전부 퍼졌는데 아무렇지 않은 사람처럼 또 이 남자를 유혹하고 있어요. 그들이 병원에 왜 왔는지 누가 알겠어요?”주위의 사람들은 바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어안이 벙벙하게 나를 보더니 또 장영식에게로 시선이 향했다. 그녀의 말이 너무 도가 지나쳤다. 선비 같은 장영식이 이렇게 막무가내인 여자를 언제 보았겠는가. 모든 사람이 그를 바라보는 것을 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내 마음속의 분노가 들끓었고 그동안 쌓아두었던 우울감이 폭발해 적합한 출구를 찾고 싶었다. 나를 말하는
강숙자의 손을 막자 세게 힘을 주고 있던 그녀의 몸이 관성을 이기지 못한 채 순식간에 휙 돌아가며 휘청거렸고 그 탓에 한 손으로 받치고 있던 아이가 손을 떠나 날아갔다...주위의 사람들이 놀라서 외쳤다. “어머, 아이!”나는 아이가 손에서 떨어진 것을 눈앞에서 보고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달려가며 손을 뻗었다. 순간 나는 마음이 앞섰다. 나 자신이 서 있을 수 있을지 고려하기보다 마음속으로 단지 아이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만 있었다. 내가 아이를 잡은 그 순간, 아이가 내 밑에 깔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나는 억지로 몸을 돌려 아이를 보호했다. 나도 힘을 너무 세게 준 탓에 뒤로 바닥에 넘어졌다.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내 머리가 바닥에 부딪혔고 눈앞이 해롱해롱하면서 팔에 통증이 느껴졌다. 나는 아이를 가슴에 꼭 껴안았고 온몸이 아픈 것 같았는데 그 순간이 너무 빨리 반응할 시간조차 없었다. 나의 귓가에 뒤늦게 반응한 신연아의 비명이 들렸다.“아들, 내 아들!”“지아야!”장영식이 제일 먼저 내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지아야...”품속의 아이가 이제야 울음을 터뜨렸다. 신연아는 바로 달려와 내 품속에서 아이를 가로챘다. 주위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괜찮아요? 너무 위험했어요.”“이렇게 작은 아이가 만약 넘어졌으면 위험했을 거예요, 모두 이분 덕분이에요.”“어서 일어나봐요. 다치지 않았어요?”“아이는 괜찮아요? 너무 놀랐어요.”그들은 너도나도 한마디씩 하면서 여전히 바닥에 누워있는 나를 목을 빼고 바라보았다. 나는 팔에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장영식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날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고 당황스럽게 날 바라봤다. “지아야, 어디 아파? 얼른 말해봐. 괜찮아?”“다쳤어요? 세게 넘어져서 다친 것 같아요.”옆의 사람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일단 그녀를 건드리지 말고 조금 진정해요.”“의사 불러요. 얼른 의사 불러요.”나도 마음속으로 가늠이 안 돼 심호흡하고 장영식을 보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 모두 온정신을 집중해 나만 보느라 박재언이 조수를 데리고 있었고 또 모든 과정을 녹화했다는 것을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박재언이 신연아에게 말했다. “당신 참 공감 능력이 없네요. 잘 들어요, 나 기자예요. 당신들이 방금 한 모든 것이 녹화됐어요. 내가 꼭 당신들 면상을 모든 사람이 보도록 할 거예요.”모든 사람이 맞장구를 쳤다.“맞아요. 저 사람들을 폭로해요. 얼굴이 못생긴 것도 모자라 마음이 더 못생겼어요.”“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려주고 이런 사람이 반박하지 못하도록 현장 인터뷰 진행할게요.”박재언이 현장 구경꾼들을 불러 모았다. 신연아는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강숙자와 함께 재빨리 도망쳤다. 구경꾼들은 모두 같이 호응하며 그녀들을 나무랐다. 장영식이 마음 아파하며 말했다. “의사 만나러 가자. 한번 움직여봐,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나는 확실히 팔 통증이 조금 느껴졌다. 장영식의 부축 아래 발목을 움직여보니 괜찮은 것 같아 팔을 받치고 한 무리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의사에게 갔다.검사 결과가 나오자 나는 우울했다. 재수가 없어 팔뼈가 골절되었는데 아마 아이를 받는 순간,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팔이 바닥에 부딪힐 때 뼈가 부딪쳐 금이 간 것 같았다. 나는 나 자신을 비웃지 않을 수 없었다. 퇴원하기도 전에 또다시 돌아가다니.한편, 모든 과정은 박재언에 의해 기록되었다. 깁스하고 병실로 이송되는 순간, 나 자신이 너무 운이 없어 보였다. 집에 갈 수 있는 순간이 눈앞에 있었는데, 이렇게 실패하다니. 정말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운수였다. 박재언이 나에게 말했다. “왜 그때는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았어요?”나는 웃었다. “저는 엄마예요, 그거는 아이였고. 엄마로서 아이가 떨어지는 것을 어떻게 손 놓고 볼수 있겠어요, 아직 어린아이인데.”“그 아이가 당신과 원한이 있는 사람의 아이라는 생각은 안 했어요? 그때 당신을 그렇게 험한 말로 욕했는데도요.”“그렇게 깊이 생각하지 않았어요. 상대방이 누구든지 중요하지
나는 그를 바라봤다. 점잖고 잘생긴 얼굴에는 이미 예전의 유치함과 풋풋함이 없어졌지만 소년의 수줍음은 아직 남아있었다. 나는 그가 이미 너무 오래 기다렸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대답하기 어려웠지만 그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아 그때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생각했다. 대학교 1학년 때 집에 왔을 때, 그는 나를 많이 챙겨줬고 그의 보살핌에 나도 많이 의지했다. 그 누구보다 세심하게 나를 보살피면서도 늘 선을 넘지 않고 거기를 유지했다. 그래서 그때 그를 그저 옆집 오빠로 생각했다. “아마도. 그때... 내가 환상을 가질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어.”장영식은 주먹을 꼭 쥐었다. 얼굴에 고통, 후회 등 복잡한 표정이 섞여 있었는데 눈빛에는 갈망도 들어있었다. “그럼, 지금은?”이번에는 장영식이 용기를 냈다. “내가 최선을 다해 너와 콩이를 보호할게. 나 잘할 수 있어.”장영식의 말에 나는 진지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 비록 그가 엄청나게 긴장하고 정중한 걸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래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영식 오빠, 웃겨 죽겠어. 오빠...”내 두 눈이 그의 초조하고 정중한 눈과 마주쳤을 때 나는 얼른 태도를 고쳤다. 갑자기 내 태도가 너무 진지하지 않고 존중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얼른 표정 관리를 하고 말했다. “영식 오빠, 진지한 거 알아. 그리고 너무 잘할 것도 알고 있어. 오늘 일은 오빠 탓이 전혀 아니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 오빠가 잘해주고 날 마음 아파하는 것도 아는데 사실... 나도 노력하고 있어. 그러니 조금만 시간 줄래?”“진짜?”장영식의 두 눈이 갑자기 투지로 가득 차고 반짝반짝 빛났으며 잘생긴 얼굴에 봄이 온 듯 따스함이 묻어났다. “지아야, 내가 노력할게. 기회 줘서 고마워.”그는 흥분해서 조금 말에 두서가 없었다. 나는 갑자기 할 말이 없었다. 사실 내가 전하려던 의미는 나도 다가가려고 노력하겠다는 뜻이지 관계를 시작하겠다는 뜻이 아니었는데 제대로 전달이 안 된 것 같았다. 어차피 방금 한 불명확한 대답을
나는 그의 계획을 몰랐고 그 계획 중 나의 위치는 더욱 알 수 없었지만, 그의 계략능력에 의하면 내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아마 나도 현실을 직시하고 내 위치를 다시 정해야 할 것 같다. 서로 속이고 속이는 싸움에 휘말려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될 필요가 뭐가 있는가?에너지를 아껴 내가 적당한 지위를 얻고 부모님이 즐겁고 아이가 안전한 소소한 일상을 보내는 것이 진정한 생활이다. 아마 이런 생활에는 장영식이 제일 잘 어울리는 사람일 것 같다. 그는 다정하면서 부드럽고, 진중하면서 기품이 넘쳤으며 사업도 착실하게 하고 조급하지 않고 차분한 성격에 신흥 그룹을 지키면서 천천히 앞으로 나가고 있다. 부귀영화를 쫓지 않고 평범한 생활을 하는 것이 내 목표일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나는 장영식을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게 했고 나에 대한 다른 사람의 호의를 무시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항상 그가 베풀기만 하고 얻는 게 없으면 안 되지 않는가. 만약에 그러면 하느님이 나를 벌할 것이다.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전화가 울렸다. 힘겹게 전화를 가져와 화면을 확인하니 이미연이었다.내가 얼른 전화를 받자, 전화기 너머 이미연의 욕설이 들려왔다. “지아야, 그 미친 여자가 또 너를 건드렸어?”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어떻게 알았어?”“어떻게 알기는, 지금 인터넷에 전부 그 소식이야. 신연아 완전 미친X이네. 지아야, 용서하면 안 됐어, 그 여자 아이를 구해주지 말았어야 했어. 이런 엄마가 키우면 나중에 아이가 커봐야 얼마나 바른 사람이 되겠어. 지금 사회에 부담을 주는 거야. 크더라도 사회의 골칫덩어리야.”나는 히죽 웃었다. “됐어. 말 좀 예쁘게 해. 그래도 어린 아이인데 사고 나는 걸 그냥 보고만 있어? 아직 꼬마인데 어떻게 그래.”“너는 마음이 너무 약해서 문제야. 그 애 엄마도 무서워하지 않는데 네가 왜 걱정해. 임신했을 때부터 그러더니 이제 태어나니 아이를 데리고 꼴불견 짓을 하네. 어떻게 저런 사람이 있지?”이미연은 화를 참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서강민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서강민 씨, 먼저 들어가시죠. 언니가 깨서 서강민 씨를 보면 또 흥분할 것 같은데... 지금 같은 상황에 언니가 회복하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마디 더 보탰다.“어떤 일들은 천천히 해야 해요. 언니한테 시간을 좀 주세요. 서로 생각을 정리해 봐요.”서강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도혜선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발길을 돌리기 전에도 아쉬움에 한 번 더 뒤돌아보며 나한테 말했다.“고생해 줘요.”나도 담담히 답했다.“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언니에게 시간을 좀 줘요. 언니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수 있잖아요.”내가 말하는 회복이 뭔지는 서강민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건 도혜선이 마음에 입은 상처였다. 오늘 도혜선의 행동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녀의 상처는 아물 수 없을 것이다. 언급만 해도 피가 흘러내릴 만한 상처였다.잠시 후, 서강민은 한발 물러섰지만, 눈길은 여전히 도혜선에게 머물러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모습 아래에서 어떠한 파도가 휘몰아치는지 나는 몰랐다.한참 전 도혜선이 했던 말들은 마디마디가 주옥이었다. 모두 그녀가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었던 것들이었고 또한 서강민의 약점이었다. 얼마나 아플지는 서강민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쓰디쓴 독주도 그는 혼자 삼켜내야만 했다.도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와 깨어나려는 낌새가 보이고 나서야 서강민은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나는 마음이 아파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도혜선의 손을 맞잡았다.인제야 하루 종일 배현우에게서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쪽에는 어떤 상황인지, 김우연에게서는 소식이 없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도혜선을 보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아 살며시 그녀의 손을 놓고 일어서려 했을때, 그녀는 다시 나를 잡으며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지 마...”나는 너무 놀라 얼른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서강민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하는 걸까?’“당시의 사고는 내가 저지른 거야. 그녀도 나 때문에 다쳐서 지금처럼 된 거고… 나는 좋은 남편이 아니야. 아내가 식물인간이 되었는데 나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말이야...”서강민은 여기까지 말하며 후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너무 죄책감이 들고 고민스러워. 나 또한 발버둥 쳐봤지.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의 일탈을 받아들일 수 있어 해. 그녀한테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강민 씨!”도혜선은 꾸짖는 듯한 말투로 그의 말을 잘랐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당신 아내가 듣고 있을 거예요. 저를 끌어들여서 같이 속죄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구세주가 아니에요. 저는 그냥 사람답게 살고 싶은 평범한 여자라고요. 저 좀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요?”도혜선은 말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녀는 한 손으로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 앞으로 갔다.“혜선 언니, 움직이지 마! 위험해...”늑골 골절과 뇌진탕이 있는 환자다 보니 이러한 행동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위험했다.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녀를 안으려고 하는 한지아를 제지했다.“제가 오늘 한 말이 아직도 이해가 안 되나요? 서강민 씨, 저의 인생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신한테 묶여 당신의 부속품이 되었었는데 저도 자존심이 있어요. 더 이상 당신처럼 지난날의 죄책감을 짊어지며 답답하게 살아가지 않을 거예요.”도혜선은 여전히 분노에 차 외치고 있었다.“매일 제 앞으로 와 지난날의 행동에 대해 속죄하라고 일깨워 주실 필요 없어요! 당신을 보면 저는 지난날 모든 서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치욕적인 과거가 떠올라요. 당신은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당신은 아내와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해요.”말을 마친 도혜선은 숨이 차올랐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도혜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당신은 아무런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저 같은 여자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아도 돼요.”그녀는 자기비하적인 말을 내뱉었다.”선아...”“설사 강민 씨가 와이프와의 약속을 안 지킨다 해도 당신의 신분과 지위로 당신에게 더 어울릴만한 사람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물며 당신네 부부 눈에는 저는 그냥 염치없고 미천한 사람일 뿐이죠. 저 같은 사람은 본처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사모님이라는 호칭도 어울리지 않죠.”“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오해하지 마.”서강민은 조급함에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아섰다.“강민 씨... 해명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행동이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어요! 장담하건대 아직 당신들이 어떤 의도로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보가 된 건 아니에요. 그녀는 정말 대단하네요. 죽을 때까지도 제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녀는 아무리 병상에 누워있어도 고상한 사람이고 저는 그냥 미천한 사람일 뿐이니 말이에요.”도혜선은 말을 내뱉으며 입가에 처량한 미소를 비췄다. 누가 봐도 가슴 아픈 미소였다.“이전의 저는 확실히 허례허식에 차 있는 사람이었지만 저도 성장했어요. 정신 차렸어요. 당신 앞에 있는 저의 진정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어요. 저는 하나의 도구, 들러리뿐이었지만 원망하지 않았어요.”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숨 돌렸다. 얼굴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하지만 이제 저는 자존감을 챙기며 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고 쓰레기같은 취급을 받더라도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고 싶어졌어요.”점점 더 차가워지는 도혜선을 바라보며 서강민은 답했다.“혜선아, 나는 널 한 번도 무시한 적 없어. 나는 그냥 내가 뭘 하든지 네가 다 이해해 줄 줄 알았어.”도혜선의 서강민의 말을 듣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안색은 더 창백해져 있었다.“이해? 당신이 어떤 말을
방금 허투루 한 말이 어머니의 진실인가 싶다. 보아하니 어머니가 나를 속이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의 의문점이 점점 많아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마치고 차씨 가문의 할머니께 말씀을 드린 후, 위층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도혜선을 보러 가려고 준비했다.그리고 팔도 겸사겸사 검사하려고 했다. 차에 앉고 나서 배현우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이 이른 아침에 뭐 하러 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김우연 쪽에 무슨 소식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생각해 보니 이렇게 빠르진 않겠지? 몇 시간밖에 안 됐는데.'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도혜선이 노발대발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병실에는 도혜선과 서강민 두 사람만 보이고 이미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내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좀 이상하고 심상치 않는 것을 느꼈다.침대 옆 머릿장에는 보온병이 놓여있다. 서강민은 오늘도 도혜선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러 온 것 같다.서강민은 침대 앞에 떡 하니 서있었고 침대에 있던 도혜선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혜선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상황을 정리하려고 다가가서 서강민에게 인사를 하고 도혜선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좀 어때?""별로야."도혜선은 차갑게 대답하더니 또 말을 건넸다. "지아야, 손님 좀 배웅해 줄래?"난감했다, 도혜선은 서강민을 내쫓으라고 하는 거였다. 난 당연히 그 뜻을 알고 있다. 조심스럽게 서강민을 쳐다보았다. "혜선아, 꼭 이래야 하니?"서강민은 씁쓸한 표정으로 도혜선을 바라보며 물었다."네! 서강민씨, 저는 이미 분명히 말했고 두 번 다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도혜선은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서강민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언니, 화 그만 내고 진정 좀 해. 초조해하는 거 알아, 점차 좋아질 거야. 강민씨랑 얘기 좀 하고 있어. 나는 팔 검사해야 돼서, 금방 돌아올 거야!"나는 핑계를 대고 떠나서 그들에게 자리를 비워주었다.
배현우는 나의 우울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에 회사 일도, 한심로얄의 마지막 한방도 둘 다 포기할 수 없잖아요. 신예 쪽 일도 있고, 전희가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요. 지금 모든 게 중요한 시기이니까요.""지금 그 누구도 아버지보다 중요하지 않아요! 수십년간 도망치면서만 살았는데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분명 아주 괴로워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데, 내가... 내가 딸로서, 난..."배현우는 내 말을 듣고 나서 침대에 누워 나를 꼭 껴안고 말했다. "일단 내일 소식을 기다려 봅시다. 김우연 쪽에서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 보고 결정합시다."배현우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제 말 듣고 일단 자세요, 내일 일어나서 먼저 할 일들을 처리하고 준비하고 있으세요, 만약에 상황이 좋으면 내일 같이 데리고 갈게요, 당신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배현우가 지금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보지를 못한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배현우의 따뜻한 품에 안기며 눈을 감고 내일 먼저 무엇을 처리해야 할지 생각했다.근데... 눈을 떠서 배현우를 쳐다보는데 배현우도 잠에 들지 않았다. "현우씨... 할머니가 보존하고 있는 CCTV를 보여주시겠어요?"'그 영상을 꼭 보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어머니가 어떻게...'"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세요,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 팔짱을 끼더니 분명히 나를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배현우가 그 장면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이 깊었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배현우의품에 안겨 점점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았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배현우는 이미 곁에 없었고, 손을 뻗어 그가 누워 있던 곳을 만졌다. 이미 차가운 걸 보니 배현우는 일찍 침대에서 일어났나 보다.'무슨 소식이라도 왔나?'이
"할머니가 이번 사건을 피할 수 있었던 건 당시 큰 병을 앓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했어요. 제 생각에는 반은 꽤병인것 같아요. 직접 사표를 쓰고 나서도 서둘러 호주를 떠나지 않았다는 게 참 슬기로운 선택이었어요.""네?"너무 놀라서 몸 둘바를 몰랐다.배현우는 인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호주를 떠나지 않으셨어요. 그곳에 머물면서 배씨 저택의 인기척을 살피다가 배씨 저택의 요상한 소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에야 조용히 호주를 떠나셨어요."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메커니즘에 감탄했다."저도 그때 상황을 잘 몰라서, 할머니도 몸이 허약했고 내 행방을 알아 볼 길이 없어 그 비밀을 계속 지켜왔었나봐요. 부하들이 할머니를 찾고 나서도 여전히 어리석은 척을 하고 있었지 뭐에요."배현우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할머니께서 저를 두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그걸 꺼냈어요."배현우의 말을 듣고 나니 할머니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배현우가 나를 쳐다보더니 나의 지친 모습을 보고서야 손을 들어 대문을 열어 장벽들이 천천히 열리는 걸 볼 수 있었다.차는 왔던 길을 따라 경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벌써 자정이 되어 우리 둘은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에 돌아왔다.'우리를 배신한 소인이 두 집안을 풍비박산 시켰다니. 오늘 밤 일어난 모든 일들은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간단히 씻고 걱정 가득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태어나서 얼굴도 한번 못 본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를 걱정해 발 뻗고 자지 못했다. '한강인이랑 한걸은 이미 잡혔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의 처지는 어떤지.''한씨 부자가 그저 아버지를 인질로 삼아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면 왜 배현우는 그곳의 환경이 복잡하다고 했을가.''이유는 간단하다. 누군가 아버지를 미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고 싶으려는 걸가?''배현우? 아니면 배유정?'생각할수록 더욱 걱정이 됬다.아버지의 이번생은 이미 충분히 힘들다.어머니랑 서로
나는 걱정스레 배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배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계속 말했다.“후에 목격자 어르신을 찾고서 한강인을 자세히 조사하니 한강인은 이 모든 것이 일어난 뒤에야 천우 그룹을 떠난 거였어요. 지아 씨도 알잖아요. 그때 당시 천우 그룹은 아직 배유정 손에 있었어요.”“현우 씨의 말은 한강인은 배유정 과도 사이가 틀어졌단 말인가요?”나는 추측하며 물었다.“우리가 조사할 때 이상한 단서 하나가 나왔어요. 한동안 배유정도 한강인을 찾았고 심지어 한강인에 대한 추살령도 내렸어요! 참 이상해요. 배유정은 왜 한강인을 죽이라고 지령을 내린 걸까요?”“이유는 하나뿐이죠. 즉 한강인이 분명 무엇을 알아냈거나? 아니면 어떤 일에 참여하였거나?”나는 대답했다.배현우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진백이 죽임을 당했듯이 이 안에는 분명 남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 있는 거겠죠. 우리는 이 단서를 따라 계속 추적해 보니 한강인의 혐의가 점점 더 드러나더군요. 그리고 그의 아들 한결도 같이 도망쳤어요.”“그러고 보니 이 안에는 분명히 또 다른 요소가 있겠네요!”나는 사색에 잠겼다.“그래서 우리는 추측했죠. 한강인은 확실히 이 사건이랑 연관이 있고 둘이 도주하는 과정에 서로 연락하는 빈도를 보아서 부자 둘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어요.”“그리고 한강인이 도망 다니는 그 시기에 그의 모친이랑 누나 모두 영문도 모른 채 실종되었어요. 지금 보니 그분들은 아마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것 같네요. 이 때문에 한강인은 고두리에 놀란 새가 돼서 끊임없이 도망치며, 이 또한 한강인이 지금의 상태로 되게 한 원인인 것 같아요. 사실 한강인은 원래 지금의 모양이 아니거든요.”배현우의 말을 듣자 나는 저도 모르게 아까 보았던 한강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강인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엄청 정신적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다른 기타 방식으로 정신을 잃지 않게 버티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저렇게 말라죽을 정도일 리가 없다.“그리고 한 가
배현우는 나를 한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었다.“맞아요. 제 씨 어머니가 얼마나 총명한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어요. 제 씨 어머니는 책 속에 카메라를 숨겨두고 만약 사고가 난다면 여기에 있는 이 물건을 숨겨두었다가 훗날 믿음직스러운 사람에게 주라고 할머니한테만 똑똑히 당부해 두셨어요!”나는 코가 찡긋거리더니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보아하니 제 씨 어머니는 분명 위험이 닥칠 거라는 것을 미리 예감했던 거네요!”배현우는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제 씨 어머니는 만약 자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할머니더러 애들을 데리고 허씨 가문으로 가라고 할머니한테 당부하셨어요.”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코를 훌쩍이었다.배현우는 자기 손을 꽉 움켜쥐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참 생각지도 못한 게 모든 것이 제 씨 어머니의 예상대로 일어났고 감춰둔 카메라에 모든 것이 담겼어요! 근데 할머니는 제 씨 어머니의 뜻대로 우리 둘을 순리롭게 허씨 가문으로 데려가지 못했어요.”“급한 나머지 할머니는 고씨 가문에만 소식을 전했고 그마저도 나쁜 놈들보다 동작이 빠르지 못해 그들이 지아 씨를 데려간 후였어요. 그래서 저만 고씨 가문에서 데려갔어요.”나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그때 당시의 내가 얼마나 힘없고 무력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데다가 배현우와 억지로 갈라지게 되었다.배현우는 내 손을 꽉 잡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나도 배현우 지금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날 배현우는 눈앞에서 억지로 끌려 나가는 나를 보기만 하고 반항할 수도 없는 그런 무능력함은 아마 배현우한테 평생 잊지 못할 아픔이 되었을 것이다.차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자동차가 앞으로 가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한참 뒤에야, 배현우의 잠긴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이런 것들을 찾은 후에야 비행기 추락 사고가 떠올랐고 이로써 모든 것들이 비로소 한강인을 추측하게 했으며 그 이후에 우리는 한강인
이 소식은 그야말로 나를 입이 떡 벌어지게 했다. ‘나를 데려간 게 어떻게 그 사람이지?’“맞아요. 우리는 유일한 목격자를 찾았어요. 그 당시 그쪽 산에서 약재를 캐는 어르신이신데 그때는 중년인이셨어요. 하늘의 뜻인지, 우리가 수년을 찾아 헤맨 끝에야 비로소 이 참극의 전부를 직접 목격한 증인을 찾아냈어요.”“그 어르신 정말로 전체 과정을 모두 목격하셨나요?”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배현우 얘네가 얼마나 큰 공을 들여야 바다에서 바늘 건지는 것 같은 일을, 그것도 몇 년이 지났는데도 당시의 목격자를 찾아낸 걸까.“어르신의 말로는, 당시 자기는 산 위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잠시 계단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래 도로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해요. 알다시피 외국에서는 약재를 캐는 일은 엄청 드물어요.”배현우는 엄청 뿌듯한 말투로 말했다.“우리 형제들이 엄청나게 고생 많았어요. 십수 년을 하루같이 귀찮음을 마다하고 사건 지역을 탐방하러 다니면서 일말의 흔적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나도 믿어지지 않아 입을 열었다.“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참 노고가 많았어요.”“어르신이 말씀하기를 당시의 장면은 엄청 아슬아슬했대요. 부딪힌 차는 거의 굴러떨어지기에 일보 직전이었는데 후에 폭발했대요. 어르신은 우리의 차가 폭발한 뒤 키 크고 마른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리는 걸 똑똑히 봤다고 해요. 그리고 그 남자는 길 왼쪽의 언덕 아래로 달려가 무언가를 찾았대요.”배현우는 그때 당시의 장면을 묘사하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때 당시의 상황을 필사적으로 상상해 내려고 하니 머리가 또 아파 났지만, 배현우가 말을 멈출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시에 일어난 이 모든 것, 전부 나한테는 엄청난 매력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찾아낸 산산조각 난 퍼즐들을 하루빨리 제 위치에 맞춰서 하나의 완전한 그림을 만들어 내고 싶었으며 그때 당시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그 뒤로 난 어떻게 Z 국의 만덕동에서 떠돌게 되었고 또 어떻게 지금의 한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