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음이 울린 지 한참 만에 동철이 전화를 받았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동철 씨, 어디세요? 현우 씨가 사고를 당했어요... 조사가 필요해요... 교통사고가 나서, 공항 고속도로에서...”“지아 씨, 침착하세요. 저도 소식을 듣고 조사 중입니다.” 다급한 목소리에 동철이 안심시키며 말했다. “지금 어디세요?”“병원이에요.” 심호흡하고 말을 이었다. “조사 끝나는 대로 알려주세요.”“걱정 마세요! 조심하세요. 해월이를 불러 곁에 있으라고 할까요?” 그가 나에게 물었고, 어쩌면 그는 내 정서가 불안정함을 느꼈을 것이다.“전 괜찮아요. 혹시 현우 씨가 얼마나 다쳤는지 알고 있나요?”동철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을 이었다. “목격자의 말에 의하면... 많이 심각하대요.”눈앞이 캄캄해졌다. 목격자들이 심각하다고 할 정도면 작은 사고가 아닐 것이다.“... 얼마나 심각한데요? ...” 혼이 빠진 사람처럼 물었다.“지아 씨, 걱정 마세요. 확인중이니 조사가 끝나는 대로 바로 알려드릴게요. 착한 사람은 하늘이 돕는다고 괜찮을 겁니다, 그럼 먼저 끊겠습니다. 다시 연락 드릴게요!”전화는 바로 끊겼고 심장이 얼어붙듯이 내려앉았다. 심각하다니!머리를 감싸 쥐고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현우 씨, 무사해야 해요. 제발 아무 일도 없어야 해요...”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해월이 있었다.“...왔어요?” 담담하게 얘기했지만, 손은 해월이를 꽉 붙들고 있었다.“한 대표님, 걱정 마세요, 다 괜찮을 거예요!” 해월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했다.시간은 일분일초 흘러갔고 똑딱이는 시곗바늘이 가슴을 후벼 파듯이 상처를 냈다.“해월 씨, 좀 물어봐 줄 수 있어요? 얼마나 지났는지? 현우 씨가 들어간 지 얼마나 지났는데 왜 아직도 안 나오는 걸까요?” 해월이를 잡아끌며 물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가 나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해월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는 필사적으로 그녀를 잡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이제야
저도 모르게 눈가에 힘이 들어가며 가슴이 또다시 조여오기 시작했다. 다급히 앞을 막고 있는 세림을 밀어버렸다. 휘청거리며 밀려 나가는 세림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복도로 튀어 나갔지만 역시나 경호원들이 막아섰다.의사들이 문밖의 배유정에게 무언가 전달했지만,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2분도 채 되지 않아 의사는 다시 응급실로 들어갔고 나는 그의 수술용 장갑에 묻은 섬찟한 혈흔을 보았다.나는 뚫어지게 배유정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우두커니 서 있는 그녀의 표정은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기괴했다. 그녀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더니 헤라에게 무언가 한마디 던졌다. 이세림은 순식간에 내 옆을 지나 막힘없이 안으로 들어가 배유정의 팔을 잡고는 무언가 묻는 듯싶었다. 배유정이 눈을 치켜뜨고 세림을 바라보자 세림은 고개를 숙이고는 그녀의 옆에 섰다.“그 사람 지금 어떻게 됐냐고! 이거 당장 놔!” 나는 흥분해 소리를 질렀다.배유정은 서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또다시 헤라에게 무언가 말하고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나는 자리에 멈춘 채 멍하니 배유정이 한 무리의 사람을 이끌고 나가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내 곁을 지나는 순간 배유정은 잠시 멈추더니 곁눈질로 나를 힐끗 쳐다보며 차갑게 내뱉었다. “네 덕분에 죽진 않았어.”말을 끝내곤 다시 고개를 쳐들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해월이 황급히 달려와 휘청거리는 나를 붙잡았다.“한 대표님...” 어두워진 내 낯빛에 해월이 다급하게 말했다.배유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죽지 않았다니? 설마 죽기라도 바랐단 말인가. 그녀의 한마디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피가 섞인 친조카한테까지 이토록 냉정하고 무정한 사람이 있을까.그녀가 내뱉은 말들은 나를 더욱 초조하게 했다. ‘죽지 않았다’라, 도대체 어떤 상황일까? 나는 무기력하게 문을 바라봤다. 검은 정장의 사나이들이 모두 떠나자 복도가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 마치 모든 것이 끝난 듯, 아니면 애초부터 없었던 일인 듯 고요했다. 왜 다들 떠난 것일
나는 비밀의 문을 열기라도 한 듯 뛰어 들어갔다. 방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간호사 한 명이 나를 발견하고는 큰 소리로 꾸짖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여긴 무균실이라 들어오시면 안 돼요. 얼른 나가세요!”나는 간호사를 붙잡았다. “... 그럼 아까 수술받던 환자는요? 그분 어떻게 됐는지만 알려주세요!”"나가세요! 수술이라고요? 응급 수술받으신 분은 차고 넘칩니다!”그녀는 몸을 빼내며 나를 문밖으로 밀어냈다. “당장 나가요!”“...현우 씨, 방금까지 응급 수술받던 현우 씨 어떻게 된 거냐고요?” 나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간호사는 굳은 얼굴로 단번에 나를 밀어냈다. “몰라요!”‘쾅’ 문이 닫히고 곧이어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나는 혼이 나간 채 벽에 기대어 속으로 울분을 터뜨렸다. '현우 씨,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내게 말 좀 해줘요.'“한 대표님, 이만 돌아가요.” 해월이 안쓰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더는 손쓸 길이 없던 나는 한참 지난 후에야 해월의 부축을 받아 병원을 나섰다. 미련이 남아 수없이 고개를 돌려 현우의 그림자를 찾았다. 분명히 이곳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지금 떠난다면 그를 그냥 지나쳐버리고 말 것이다.해월은 직접 차를 몰고 회사로 돌아왔다.곧 퇴근 시간이었다. 영식은 내가 오기를 기다린 듯했다. 내 모습이 보이자 모두에게 손짓하더니 말했다. “다들 퇴근합시다!”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쏠리더니 다들 조용히 퇴근할 채비를 했다.나는 사무실로 들어와 멍하니 소파에 앉았다. 피곤이 훅 몰려왔다.“지아야, 아직도 소식 없어?” 영식이 슬쩍 떠보자 해월이 눈치를 줬다.잠시 후 나는 고개를 들고 물었다. “동철이는요?”“바로 전화해 보겠습니다.” 해월은 말을 마치자마자 동철에게 전화를 걸었고 20분도 채 되지 않아 사무실로 들어왔다.나는 몸을 일으켜 그를 향해보며 물었다. “어떻게 됐나요? 무슨 소식 없어요?”“조사 결과 배 대표님은 11시쯤 스타라이트를 떠났다고 합니다. 당시 김우연과 함께 차에 올
휴대폰에 뜬 이세림 세 글자에 순간 흠칫했다.“세림 씨, 쓸데없는 말 할 거면 그만 하세요! 당신이랑 씨름할 기분 아니니까.”전화를 받자마자 쏘아댔다. “현우 씨 소식이라면 당신들이 말하든 하지 않든 알 방법이 있으니깐요!”“하하, 지아 씨 진짜 급했나 보네요.” 세림은 재밌는 구경이라도 하는 듯 괴상한 말투로 대답했다. 상당히 즐거운 모습이었다. “뭘 이렇게 화를 내세요?”“많이 심심한가 보네요!” 말을 마치자마자 전화를 끊었다. 내가 신경 쓸수록 더 기어오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역시 손에 든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나는 전화벨이 세 차례 울릴 때까지 참다 받았다. “제 인내심을 테스트하지 마세요!”“하하, 지아 언니! 그냥 알려주고 싶었어요. 그 사람 괜찮다고요, 정말요!” 그녀의 말투에는 장난기와 비웃음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근데, 당분간은 볼 수 없을 거예요. 아쉽네요! 너무 걱정할까 봐, 말해주고 싶었어요!”전화가 뚝 끊겼다.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공개 도발이었다. 그래! 몰래 숨어서 허튼수작하는 것보단 낫지.“세림이야?” 영식은 신호를 기다리며 물었다. “현우 씨 큰 문제는 없는 것 같네. 이렇게 나오는 걸 보면.”“더이상 연기는 못해서겠죠!” 나는 입꼬리를 달싹였다.“뉴스를 막는 것도 정상이야. 그 정도로 큰 재벌들은 바람에 나뭇잎만 스쳐도 흔들리는데 사람 생사와 관련된 일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지.”영식이 위로하며 말했다. “동철 씨한테 방법이 있을 거야. 좀 진정하고 소식을 기다리자. 급해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난 그냥 진짜로 현우 씨가 무사한 것인지만 알고 싶어.”차창 밖의 줄지어 선 차들과 밀려드는 인파를 바라보며 전에 없던 무기력감을 느꼈다.“마음 편히 먹어. 스스로를 가둬놓지 마. 네가 조급해할수록 그 사람들만 즐거워할 거야. 괜찮을 거야, 그 사람 지위를 생각했을 때 조금이라도 희망이 보이면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니까.”영식의 말투는 사뭇 부드러웠다. 조급하던 마음도 서서히 안정돼갔다.그
전화를 건 사람은 낯선 남자였다. 남자는 자신이 배현우의 소식을 안다고 하며 단둘이 만나기를 요청했다. 나는 누군지 묻고 싶었으나 상대방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고 대신 문자로 주소 하나가 도착했다. 아마 약속 장소인 것 같았다. 나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가방을 들고 뛰어나갔다.내비게이션을 찍고 단숨에 약속 장소로 향한 나는 초조했다. 현우의 소식을 안다고 하는 사람은 며칠 만에 처음이었다. 소식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생각할 틈이 없었다. 가짜일지라도 무엇인가를 듣는다는 것만으로도 지금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보단 나았다.근 며칠 동안 배현우의 교통사고는 없었던 일인 양 잠잠했다. 초기 실시간 뉴스도 그의 존재와 함께 감쪽같이 증발해버렸다.이 일은 나를 미치게 했고, 종적을 찾을 수 없을수록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더 알고 싶어졌다.어쩜 이렇게 묻힐 수 있을까? 이번 교통사고는 소소한 사고가 아니라 6명이 다치고 1명이 사망한 사고가 아닌가? 이렇게 소리 소문도 없는 건 불가능했다.때문에 이 낯선 남자의 전화는 어둠 속 한 줄기 빛과 같았고 나는 그 어떤 기회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그가 정한 장소는 구석진 곳에 있었다. 도시를 벗어나진 않았지만 익숙지 않은 곳이라 찾는 데 꽤 애를 먹었다.그리 크지 않은 카페였고 주변에 유명하지 않은 대학 하나가 있어 이 카페는 학교의 커플들을 위해 마련된 곳인 듯했다.나는 몸을 숨길 수 있는 구석진 창가 자리를 골랐다.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기다리면서 창밖으로 행인들을 관찰했다.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남자를 볼 때마다 그 낯선 남자길 바랬지만 번번이 실망으로 이어졌다.어느새 약속 시각을 훌쩍 넘겼지만, 그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낯선 번호에 전화를 걸었지만 이미 꺼져있다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나는 끊임없이 휴대폰을 쳐다보며 혹시 누군가가 악의적인 장난을 친 것은 아닌지, 그래서 자리에 나타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추측했다.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럴 리가 없었다. 전화 속 상대방은
사무실로 찾아온 사람들은 두 명의 제복을 입은 경찰이었다.의외의 방문에 깜짝 놀랐다. 무엇 때문에 경찰이 찾아온 것인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자리로 안내하자 경찰 중 한 명이 엄숙히 물었다. “유보욱이라는 사람을 아십니까?”“네?” 나는 당황했지만 바로 부인했다. “모릅니다!”경찰은 고개를 들어 날카로운 눈매로 나를 바라봤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어 동료에게 눈짓하며 말했다. “사진!”다른 한 명의 경찰이 손에 든 서류 가방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며 말했다. “사진 속 사람을 자세히 봐주세요.”두 손으로 사진을 건네받아 자세히 보았다. 사진 속 남성은 나름 준수한 얼굴로 이십 대 학생으로 보였다.나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모르는 사람이에요.”하지만 저도 모르게 아까 전 들렀던 카페가 머릿속을 스쳤다.“정말 모르십니까?” 사진을 건넨 경찰이 차갑게 물었다, 아마 범인을 심문하는 것에 습관이 된 모양이다.불쾌함을 느낀 나는 그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다. “정말 모릅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하지만 유보욱의 마지막 통화기록이 당신이라고 나오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죠?” 사뭇 진지한 태도였다. “그럼 이 번호는 알고 계십니까?” 말하며 전화번호가 쓰여진 쪽지를 건넸다.나는 테이블에서 휴대폰을 잡아 그 낯선 번호를 찾아냈다. 쪽지에 쓰인 번호와 대조해보자 역시 완전히 똑같았다.나는 경악한 채 경찰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이... 이 번호로 전화가 온 적이 있어요!”경찰의 눈이 번뜩이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쪽지와 휴대폰을 함께 그의 손에 올려놓았다.“상황을 설명해주세요.” 번호를 대조해보던 경찰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이 낯선 사람에게서 전화가 온 것부터 만남을 약속한 것까지 곧이곧대로 얘기했다. 배현우의 사건까지 포함해 한 점의 거짓이나 숨김도 없었다. 경찰은 속일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배현우의 교통사고와도 연관되어 있어
이유는 모르겠으나 순간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찬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그토록 찬란한 어린 생명이 날 만나러 오는 길에 차에 깔려 죽었다니.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그저 나에게 배현우의 소식을 전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저 소식일 뿐인데 생명을 앗아갈 정도였을까? 앞날이 창창한 청년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나는 이 사건이 절대 단순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동철이 급하게 나가는 모습을 보며 점점 이상함을 느꼈다. 경찰은 왜 나에게 배현우와 관련된 일을 묻지 않았을까? 이처럼 결정적인 문제를 왜 그저 흘려보낸 것일까?더군다나 이미 화물차 기사의 음주운전이 밝혀졌는데도 왜 계속 조사를 진행하는 걸까?모든 것이 모순적이었다.정말 상상한 것이 사실이라면 간단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었다. 그의 죽음은 배유정이 사주한 것일까? 아니면 배현우, 혹은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일까?배현우가 이처럼 커다란 음모에 말려 들어 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배씨 가문에 어떤 비밀이 있길래 생과 사를 다퉈야 하는지. 심지어 무고한 사람까지 끌어들여야만 했는지. 오후 내내 나는 수많은 질문에 시달려야만 했다.드디어 퇴근 시간이 되자 나는 차를 끌고 진후빌딩으로 향했다. 도로 위는 꽉 막혀있었다. 길이 막히는 걸 가장 싫어하는 나는 조용히 샛길로 빠져 한적한 골목길 옆 가계 앞에 차를 대고 조용히 피크 타임이 지나기를 기다렸다.아무 생각 없이 조용히 앉아 있는 그때 갑자기 벨 소리가 울려 깜짝 놀랐다.요즘은 전화 한 통에도 쉽게 긴장했다. 화면을 보니 엄마에게서 온 것이었다. “엄마!”전화를 받은 순간 골목길에 차 한 대가 들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안 그래도 특이한 빨간색 스포츠카가 고요한 골목길로 들어서자 유난히 눈에 띄었다.나는 시선을 차에 집중한 채 엄마의 말에 대답했다. 몇 시에 들어오는지 묻는 평범한 말이었지만 사실은 나를 걱정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요즘 집에서 혼이 빠진 채 행동한지라 부모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괜히 간섭으로 보일까 싶
나는 잠시 진정한 후 시동을 걸어 골목길을 빠져나가 다시 고속도로에 올라탔다. 마침 도로상황도 많이 나아져 바로 집으로 향했다.엄마는 내가 돌아온 것을 보자 그제야 마음을 놓은 듯 저녁을 준비했다. 이처럼 집에서 함께 저녁을 먹는 일은 정말 흔치 않았다.부모님은 내가 집에 돌아와 식사한다는 소리에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엄마 말씀으로는 갓 만든 요리가 맛있다는 것이다.밥을 먹고 미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방금 집에 들어왔다는 것을 확인한 후 콩이를 데리고 산책할 겸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벌써 며칠 째 만나지 못했던지라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현우에 관해 물었다. 나는 그저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미연이는 요즘 한소연도 잠잠해졌다고 말해줬다. 매일 혼이 빠진 듯 행동하는 것이 역시 현우에 대해 아무런 소식도 받지 못했음을 짐작하게 했다.“걱정하지 마. 한소연 매니저한테도 얘기해뒀어.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바로 알려주기로.” 미연이 위로했다. 나는 힘들 때 자기 일처럼 생각해주는 친구가 있음에 감사했다.“미연아, 뭔가 큰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아.”나는 말하면서도 눈으로는 텔레비전으로 게임을 하는 딸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최근 있었던 수상한 일들을 빠짐없이 얘기했다.“천우 그룹처럼 글로벌한 그룹이라면 내부 상황은 미스터리 그 자체지. 누가 제대로 설명할 수 있겠어. 하고 싶은 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인데 뭐. 내부 암투가 진짜 참혹하대, 가문 안에서 벌어지는 암투는 일반 사람들이 감당하기 어렵다더라. 너도 조심해!” 미연은 소파에 기대 콩이를 바라봤다. “너한텐 콩이도 있으니까.”나는 게임에 열중한 작은 꼬맹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봤다.“한소연 일만 놓고 봐도 배현우가 한소연을 스타로 만들려면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되는 일이야. 우리 같은 규모의 회사도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할 일인데 말이지. 전에도 말했듯이 신중하게 선택해. 배현우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너 혼자 지옥 불에 뛰어들 가봐 그래.”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서강민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서강민 씨, 먼저 들어가시죠. 언니가 깨서 서강민 씨를 보면 또 흥분할 것 같은데... 지금 같은 상황에 언니가 회복하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마디 더 보탰다.“어떤 일들은 천천히 해야 해요. 언니한테 시간을 좀 주세요. 서로 생각을 정리해 봐요.”서강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도혜선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발길을 돌리기 전에도 아쉬움에 한 번 더 뒤돌아보며 나한테 말했다.“고생해 줘요.”나도 담담히 답했다.“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언니에게 시간을 좀 줘요. 언니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수 있잖아요.”내가 말하는 회복이 뭔지는 서강민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건 도혜선이 마음에 입은 상처였다. 오늘 도혜선의 행동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녀의 상처는 아물 수 없을 것이다. 언급만 해도 피가 흘러내릴 만한 상처였다.잠시 후, 서강민은 한발 물러섰지만, 눈길은 여전히 도혜선에게 머물러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모습 아래에서 어떠한 파도가 휘몰아치는지 나는 몰랐다.한참 전 도혜선이 했던 말들은 마디마디가 주옥이었다. 모두 그녀가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었던 것들이었고 또한 서강민의 약점이었다. 얼마나 아플지는 서강민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쓰디쓴 독주도 그는 혼자 삼켜내야만 했다.도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와 깨어나려는 낌새가 보이고 나서야 서강민은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나는 마음이 아파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도혜선의 손을 맞잡았다.인제야 하루 종일 배현우에게서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쪽에는 어떤 상황인지, 김우연에게서는 소식이 없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도혜선을 보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아 살며시 그녀의 손을 놓고 일어서려 했을때, 그녀는 다시 나를 잡으며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지 마...”나는 너무 놀라 얼른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서강민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하는 걸까?’“당시의 사고는 내가 저지른 거야. 그녀도 나 때문에 다쳐서 지금처럼 된 거고… 나는 좋은 남편이 아니야. 아내가 식물인간이 되었는데 나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말이야...”서강민은 여기까지 말하며 후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너무 죄책감이 들고 고민스러워. 나 또한 발버둥 쳐봤지.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의 일탈을 받아들일 수 있어 해. 그녀한테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강민 씨!”도혜선은 꾸짖는 듯한 말투로 그의 말을 잘랐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당신 아내가 듣고 있을 거예요. 저를 끌어들여서 같이 속죄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구세주가 아니에요. 저는 그냥 사람답게 살고 싶은 평범한 여자라고요. 저 좀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요?”도혜선은 말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녀는 한 손으로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 앞으로 갔다.“혜선 언니, 움직이지 마! 위험해...”늑골 골절과 뇌진탕이 있는 환자다 보니 이러한 행동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위험했다.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녀를 안으려고 하는 한지아를 제지했다.“제가 오늘 한 말이 아직도 이해가 안 되나요? 서강민 씨, 저의 인생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신한테 묶여 당신의 부속품이 되었었는데 저도 자존심이 있어요. 더 이상 당신처럼 지난날의 죄책감을 짊어지며 답답하게 살아가지 않을 거예요.”도혜선은 여전히 분노에 차 외치고 있었다.“매일 제 앞으로 와 지난날의 행동에 대해 속죄하라고 일깨워 주실 필요 없어요! 당신을 보면 저는 지난날 모든 서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치욕적인 과거가 떠올라요. 당신은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당신은 아내와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해요.”말을 마친 도혜선은 숨이 차올랐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도혜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당신은 아무런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저 같은 여자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아도 돼요.”그녀는 자기비하적인 말을 내뱉었다.”선아...”“설사 강민 씨가 와이프와의 약속을 안 지킨다 해도 당신의 신분과 지위로 당신에게 더 어울릴만한 사람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물며 당신네 부부 눈에는 저는 그냥 염치없고 미천한 사람일 뿐이죠. 저 같은 사람은 본처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사모님이라는 호칭도 어울리지 않죠.”“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오해하지 마.”서강민은 조급함에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아섰다.“강민 씨... 해명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행동이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어요! 장담하건대 아직 당신들이 어떤 의도로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보가 된 건 아니에요. 그녀는 정말 대단하네요. 죽을 때까지도 제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녀는 아무리 병상에 누워있어도 고상한 사람이고 저는 그냥 미천한 사람일 뿐이니 말이에요.”도혜선은 말을 내뱉으며 입가에 처량한 미소를 비췄다. 누가 봐도 가슴 아픈 미소였다.“이전의 저는 확실히 허례허식에 차 있는 사람이었지만 저도 성장했어요. 정신 차렸어요. 당신 앞에 있는 저의 진정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어요. 저는 하나의 도구, 들러리뿐이었지만 원망하지 않았어요.”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숨 돌렸다. 얼굴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하지만 이제 저는 자존감을 챙기며 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고 쓰레기같은 취급을 받더라도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고 싶어졌어요.”점점 더 차가워지는 도혜선을 바라보며 서강민은 답했다.“혜선아, 나는 널 한 번도 무시한 적 없어. 나는 그냥 내가 뭘 하든지 네가 다 이해해 줄 줄 알았어.”도혜선의 서강민의 말을 듣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안색은 더 창백해져 있었다.“이해? 당신이 어떤 말을
방금 허투루 한 말이 어머니의 진실인가 싶다. 보아하니 어머니가 나를 속이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의 의문점이 점점 많아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마치고 차씨 가문의 할머니께 말씀을 드린 후, 위층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도혜선을 보러 가려고 준비했다.그리고 팔도 겸사겸사 검사하려고 했다. 차에 앉고 나서 배현우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이 이른 아침에 뭐 하러 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김우연 쪽에 무슨 소식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생각해 보니 이렇게 빠르진 않겠지? 몇 시간밖에 안 됐는데.'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도혜선이 노발대발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병실에는 도혜선과 서강민 두 사람만 보이고 이미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내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좀 이상하고 심상치 않는 것을 느꼈다.침대 옆 머릿장에는 보온병이 놓여있다. 서강민은 오늘도 도혜선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러 온 것 같다.서강민은 침대 앞에 떡 하니 서있었고 침대에 있던 도혜선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혜선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상황을 정리하려고 다가가서 서강민에게 인사를 하고 도혜선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좀 어때?""별로야."도혜선은 차갑게 대답하더니 또 말을 건넸다. "지아야, 손님 좀 배웅해 줄래?"난감했다, 도혜선은 서강민을 내쫓으라고 하는 거였다. 난 당연히 그 뜻을 알고 있다. 조심스럽게 서강민을 쳐다보았다. "혜선아, 꼭 이래야 하니?"서강민은 씁쓸한 표정으로 도혜선을 바라보며 물었다."네! 서강민씨, 저는 이미 분명히 말했고 두 번 다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도혜선은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서강민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언니, 화 그만 내고 진정 좀 해. 초조해하는 거 알아, 점차 좋아질 거야. 강민씨랑 얘기 좀 하고 있어. 나는 팔 검사해야 돼서, 금방 돌아올 거야!"나는 핑계를 대고 떠나서 그들에게 자리를 비워주었다.
배현우는 나의 우울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에 회사 일도, 한심로얄의 마지막 한방도 둘 다 포기할 수 없잖아요. 신예 쪽 일도 있고, 전희가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요. 지금 모든 게 중요한 시기이니까요.""지금 그 누구도 아버지보다 중요하지 않아요! 수십년간 도망치면서만 살았는데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분명 아주 괴로워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데, 내가... 내가 딸로서, 난..."배현우는 내 말을 듣고 나서 침대에 누워 나를 꼭 껴안고 말했다. "일단 내일 소식을 기다려 봅시다. 김우연 쪽에서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 보고 결정합시다."배현우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제 말 듣고 일단 자세요, 내일 일어나서 먼저 할 일들을 처리하고 준비하고 있으세요, 만약에 상황이 좋으면 내일 같이 데리고 갈게요, 당신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배현우가 지금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보지를 못한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배현우의 따뜻한 품에 안기며 눈을 감고 내일 먼저 무엇을 처리해야 할지 생각했다.근데... 눈을 떠서 배현우를 쳐다보는데 배현우도 잠에 들지 않았다. "현우씨... 할머니가 보존하고 있는 CCTV를 보여주시겠어요?"'그 영상을 꼭 보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어머니가 어떻게...'"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세요,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 팔짱을 끼더니 분명히 나를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배현우가 그 장면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이 깊었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배현우의품에 안겨 점점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았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배현우는 이미 곁에 없었고, 손을 뻗어 그가 누워 있던 곳을 만졌다. 이미 차가운 걸 보니 배현우는 일찍 침대에서 일어났나 보다.'무슨 소식이라도 왔나?'이
"할머니가 이번 사건을 피할 수 있었던 건 당시 큰 병을 앓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했어요. 제 생각에는 반은 꽤병인것 같아요. 직접 사표를 쓰고 나서도 서둘러 호주를 떠나지 않았다는 게 참 슬기로운 선택이었어요.""네?"너무 놀라서 몸 둘바를 몰랐다.배현우는 인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호주를 떠나지 않으셨어요. 그곳에 머물면서 배씨 저택의 인기척을 살피다가 배씨 저택의 요상한 소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에야 조용히 호주를 떠나셨어요."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메커니즘에 감탄했다."저도 그때 상황을 잘 몰라서, 할머니도 몸이 허약했고 내 행방을 알아 볼 길이 없어 그 비밀을 계속 지켜왔었나봐요. 부하들이 할머니를 찾고 나서도 여전히 어리석은 척을 하고 있었지 뭐에요."배현우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할머니께서 저를 두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그걸 꺼냈어요."배현우의 말을 듣고 나니 할머니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배현우가 나를 쳐다보더니 나의 지친 모습을 보고서야 손을 들어 대문을 열어 장벽들이 천천히 열리는 걸 볼 수 있었다.차는 왔던 길을 따라 경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벌써 자정이 되어 우리 둘은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에 돌아왔다.'우리를 배신한 소인이 두 집안을 풍비박산 시켰다니. 오늘 밤 일어난 모든 일들은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간단히 씻고 걱정 가득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태어나서 얼굴도 한번 못 본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를 걱정해 발 뻗고 자지 못했다. '한강인이랑 한걸은 이미 잡혔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의 처지는 어떤지.''한씨 부자가 그저 아버지를 인질로 삼아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면 왜 배현우는 그곳의 환경이 복잡하다고 했을가.''이유는 간단하다. 누군가 아버지를 미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고 싶으려는 걸가?''배현우? 아니면 배유정?'생각할수록 더욱 걱정이 됬다.아버지의 이번생은 이미 충분히 힘들다.어머니랑 서로
나는 걱정스레 배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배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계속 말했다.“후에 목격자 어르신을 찾고서 한강인을 자세히 조사하니 한강인은 이 모든 것이 일어난 뒤에야 천우 그룹을 떠난 거였어요. 지아 씨도 알잖아요. 그때 당시 천우 그룹은 아직 배유정 손에 있었어요.”“현우 씨의 말은 한강인은 배유정 과도 사이가 틀어졌단 말인가요?”나는 추측하며 물었다.“우리가 조사할 때 이상한 단서 하나가 나왔어요. 한동안 배유정도 한강인을 찾았고 심지어 한강인에 대한 추살령도 내렸어요! 참 이상해요. 배유정은 왜 한강인을 죽이라고 지령을 내린 걸까요?”“이유는 하나뿐이죠. 즉 한강인이 분명 무엇을 알아냈거나? 아니면 어떤 일에 참여하였거나?”나는 대답했다.배현우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진백이 죽임을 당했듯이 이 안에는 분명 남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 있는 거겠죠. 우리는 이 단서를 따라 계속 추적해 보니 한강인의 혐의가 점점 더 드러나더군요. 그리고 그의 아들 한결도 같이 도망쳤어요.”“그러고 보니 이 안에는 분명히 또 다른 요소가 있겠네요!”나는 사색에 잠겼다.“그래서 우리는 추측했죠. 한강인은 확실히 이 사건이랑 연관이 있고 둘이 도주하는 과정에 서로 연락하는 빈도를 보아서 부자 둘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어요.”“그리고 한강인이 도망 다니는 그 시기에 그의 모친이랑 누나 모두 영문도 모른 채 실종되었어요. 지금 보니 그분들은 아마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것 같네요. 이 때문에 한강인은 고두리에 놀란 새가 돼서 끊임없이 도망치며, 이 또한 한강인이 지금의 상태로 되게 한 원인인 것 같아요. 사실 한강인은 원래 지금의 모양이 아니거든요.”배현우의 말을 듣자 나는 저도 모르게 아까 보았던 한강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강인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엄청 정신적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다른 기타 방식으로 정신을 잃지 않게 버티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저렇게 말라죽을 정도일 리가 없다.“그리고 한 가
배현우는 나를 한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었다.“맞아요. 제 씨 어머니가 얼마나 총명한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어요. 제 씨 어머니는 책 속에 카메라를 숨겨두고 만약 사고가 난다면 여기에 있는 이 물건을 숨겨두었다가 훗날 믿음직스러운 사람에게 주라고 할머니한테만 똑똑히 당부해 두셨어요!”나는 코가 찡긋거리더니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보아하니 제 씨 어머니는 분명 위험이 닥칠 거라는 것을 미리 예감했던 거네요!”배현우는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제 씨 어머니는 만약 자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할머니더러 애들을 데리고 허씨 가문으로 가라고 할머니한테 당부하셨어요.”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코를 훌쩍이었다.배현우는 자기 손을 꽉 움켜쥐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참 생각지도 못한 게 모든 것이 제 씨 어머니의 예상대로 일어났고 감춰둔 카메라에 모든 것이 담겼어요! 근데 할머니는 제 씨 어머니의 뜻대로 우리 둘을 순리롭게 허씨 가문으로 데려가지 못했어요.”“급한 나머지 할머니는 고씨 가문에만 소식을 전했고 그마저도 나쁜 놈들보다 동작이 빠르지 못해 그들이 지아 씨를 데려간 후였어요. 그래서 저만 고씨 가문에서 데려갔어요.”나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그때 당시의 내가 얼마나 힘없고 무력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데다가 배현우와 억지로 갈라지게 되었다.배현우는 내 손을 꽉 잡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나도 배현우 지금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날 배현우는 눈앞에서 억지로 끌려 나가는 나를 보기만 하고 반항할 수도 없는 그런 무능력함은 아마 배현우한테 평생 잊지 못할 아픔이 되었을 것이다.차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자동차가 앞으로 가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한참 뒤에야, 배현우의 잠긴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이런 것들을 찾은 후에야 비행기 추락 사고가 떠올랐고 이로써 모든 것들이 비로소 한강인을 추측하게 했으며 그 이후에 우리는 한강인
이 소식은 그야말로 나를 입이 떡 벌어지게 했다. ‘나를 데려간 게 어떻게 그 사람이지?’“맞아요. 우리는 유일한 목격자를 찾았어요. 그 당시 그쪽 산에서 약재를 캐는 어르신이신데 그때는 중년인이셨어요. 하늘의 뜻인지, 우리가 수년을 찾아 헤맨 끝에야 비로소 이 참극의 전부를 직접 목격한 증인을 찾아냈어요.”“그 어르신 정말로 전체 과정을 모두 목격하셨나요?”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배현우 얘네가 얼마나 큰 공을 들여야 바다에서 바늘 건지는 것 같은 일을, 그것도 몇 년이 지났는데도 당시의 목격자를 찾아낸 걸까.“어르신의 말로는, 당시 자기는 산 위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잠시 계단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래 도로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해요. 알다시피 외국에서는 약재를 캐는 일은 엄청 드물어요.”배현우는 엄청 뿌듯한 말투로 말했다.“우리 형제들이 엄청나게 고생 많았어요. 십수 년을 하루같이 귀찮음을 마다하고 사건 지역을 탐방하러 다니면서 일말의 흔적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나도 믿어지지 않아 입을 열었다.“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참 노고가 많았어요.”“어르신이 말씀하기를 당시의 장면은 엄청 아슬아슬했대요. 부딪힌 차는 거의 굴러떨어지기에 일보 직전이었는데 후에 폭발했대요. 어르신은 우리의 차가 폭발한 뒤 키 크고 마른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리는 걸 똑똑히 봤다고 해요. 그리고 그 남자는 길 왼쪽의 언덕 아래로 달려가 무언가를 찾았대요.”배현우는 그때 당시의 장면을 묘사하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때 당시의 상황을 필사적으로 상상해 내려고 하니 머리가 또 아파 났지만, 배현우가 말을 멈출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시에 일어난 이 모든 것, 전부 나한테는 엄청난 매력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찾아낸 산산조각 난 퍼즐들을 하루빨리 제 위치에 맞춰서 하나의 완전한 그림을 만들어 내고 싶었으며 그때 당시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그 뒤로 난 어떻게 Z 국의 만덕동에서 떠돌게 되었고 또 어떻게 지금의 한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