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유정을 치려고요?” 내가 깜짝 놀라 배현우를 쳐다보았다.그가 나를 바라보다 손가락으로 코를 살짝 터치했다. “역시, 누구 것인지 총명하군요.”“그럼 배유정과 이청원이 손을 잡으면 어쩌려고요? 괜찮아요?” 내가 떠보았다.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청원이 그렇게 쉽게 손을 잡을 사람으로 보여요?”배현우의 말이 맞았다. 늙은 여우나 다름없는 이청원은 대외적으로나 대내적으로나 계략이 깊은 똑똑한 사람이었다.그가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당부했다. “만약 연락이 안 되면 메일을 보내요. 메일은 언제든 볼 수 있으니. 지금 대외적으로는 제 일을 위해 가는 거니까 배유정에게 통제당하지 않을 거예요.”나는 정말 그를 보내기 싫었다. 배현우를 보지 못하면 난 앞으로 어떻게 지내야 할까.“이청원이 허튼수작을 부린다면 이것 하나만 기억해요. 최선을 다해 최대의 이익을 취해요. 절대 그를 위해 의리를 지키려 하지 마요. 이청원도 그럴 거니까. 본인의 이익만 생각해요.”나는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사실 그것보다 마음이 너무 허했다. 이번에 가면 얼마 동안이나 떨어져 있을지. 그의 말로 유추했을 때 나는 그가 아주 오래 외국에 머무를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그럼 만일 배유정과 이청원이 정말 손잡는다면 어떡해요?”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왜냐하면 나는 배유정이든 이청원이든 모두 이익은 거절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그럼 혹시 제가 뭘 해야 할 게 있을까요?” 내가 또 물었다.그가 고혹적인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여 나에게 키스했다. “있죠. 얌전히 예쁘게 기다리다가 저랑 함께 지내는거요.”“...뻔뻔하네요. 저 진지하게 물어보는거거든요?...흡...”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자기 입술로 내 입을 막았다. 마치 열망을 다 쏟아내듯이 강한 입맞춤이었다.이 남자는 정직하면서도 사악한 면이 있다. 이 상반되는 모습이 나
구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계약서에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서야 나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앞으로의 일에 조금의 소홀함도 있어서는 안 됐다.두 마리의 늙은 여우가 맞붙었으니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건 당연지사였다. 이미 그들의 싸움에 끌려들어 간 셈이니 어쩔 수 없이 준비해야 했다.회사로 돌아와 금방 홀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이 홀의 대형 스크린을 둘러싸고 실시간 뉴스 보도를 보는 것이 눈에 띄었다.그들은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고 나도 무심코 고개를 들어 힐끗 쳐다보았다. 화면에는 또 어디에서 교통사고가 났는지 구급차와 소방차가 둘러싸고 있었다.나는 눈길을 두지 않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런 떠들썩한 일은 알고 싶지 않았다. 이미 한번 교통사고를 당한 마당에, 더 이상 트라우마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아이고... 피해자 천우 그룹 대표라며?”“교통사고 심각해보이는데...”순간 머리가 망치로 크게 맞은 듯했다. 천우 그룹의... 대표? 나는 갑자기 침착함을 잃고 대형스크린 쪽으로 달려가 고개를 들어 스크린을 보았다.화면이 반복적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폐차 수준으로 찌그러진 마이바흐가 여전히 연기를 내뿜고 있었는데 그 장면은 소름 끼치도록 무서웠다. 영상 속에 휙 스쳐 지나가는 번호판이 배현우 차 번호판을 연상하게 했다.나는 온몸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급히 손을 뻗어 곁을 지나가는 한 사람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언... 언제 일어난... 사고예요?”심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내 목소리 같지 않게 들렸다.“금방 일어났을 거예요. 실시간 보도 기사니까요.” 그 사람이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어디. 어디요. 여기 어디예요?” 나는 스크린을 가리키며 소리쳤다.옆에서 누군가가 나를 보고 대답했다. “공항 고속도로일 겁니다.”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뛰쳐나갔다. 대문을 뛰쳐나가는 순간 무엇을 잊은 듯 그대로 멈춰 섰다. 한참을 멍하니 입구에 서 있고 난 뒤에야 내 차가 지하 차고에 있
배유정은 굳은 얼굴을 하고 허리를 곧게 편 채 멀리 앉아 있었다.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섬뜩함이 서려 있는 눈동자는 나도 모르게 공격을 준비하는 뱀을 떠올리게 했다.음침하고 악랄하며 먹잇감을 물어뜯는 눈빛을 가진 뱀.나는 애써 감정을 억눌렀다. 배유정을 본 순간 응급실 안에 있는 사람이 배현우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밀려오는 공포에 다시 굳게 닫힌 응급실 게이트를 바라보며 그가 제발 무사하기를 기도했다.“왜? 오겠다며 난리 피울 땐 언제고?” 쌀쌀한 말투로 얘기하는 배유정의 날카로운 눈은 내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굳은 결심을 한 듯 앞으로 걸어갔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 기에 눌려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손에 쥔 가방끈을 꽉 쥐어 잡고 배유정의 앞에 섰다.“언제부터 네가 저 애의 안위로 호들갑을 떨었다고, 네가 여기 있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네가 뭔데?” 듣기 거북해지는 말이었다.“죄송합니다, 사모님. 저는 그저 현우 씨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에 얼마나 다쳤는지 알고 싶어서...” 감정을 억누르며 최대한 담담하게 얘기하려 애썼다.“걔가 어떻게 되든 네가 무슨 자격으로 알아야 하는 거지?” 날카로운 눈빛으로 가소롭다는 듯이 물어왔다. “이건 배씨 집안 내부의 일이야, 너 같은 외부인은 알 자격이 없어.”순간 참았던 감정이 폭발하며 배유정을 향해 날카롭게 받아쳤다. “당신 배씨 가문은 친구도 있으면 안 되나 보죠? 외부인이면 현우 씨의 상태를 걱정할 수도 없나요?”“건방진 것! 어디서 배운 말버릇이야?” 배유정은 나의 도발에 크게 분노했다. 역시 내로남불이라고 자신은 공격적인 말로 남한테 아무렇지 않게 상처를 줄 수 있어도 남은 자신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배유정이였다.“죄송합니다! 배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 어떻게 말하든 제 자유라서요. 아무도 저에게 뭐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네요. 무슨 자격이냐고 하신다면 일개 보통 사람의 자격입니다.” 물론 나의 말은 매우 무례했고 그것이 정상
신호음이 울린 지 한참 만에 동철이 전화를 받았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동철 씨, 어디세요? 현우 씨가 사고를 당했어요... 조사가 필요해요... 교통사고가 나서, 공항 고속도로에서...”“지아 씨, 침착하세요. 저도 소식을 듣고 조사 중입니다.” 다급한 목소리에 동철이 안심시키며 말했다. “지금 어디세요?”“병원이에요.” 심호흡하고 말을 이었다. “조사 끝나는 대로 알려주세요.”“걱정 마세요! 조심하세요. 해월이를 불러 곁에 있으라고 할까요?” 그가 나에게 물었고, 어쩌면 그는 내 정서가 불안정함을 느꼈을 것이다.“전 괜찮아요. 혹시 현우 씨가 얼마나 다쳤는지 알고 있나요?”동철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을 이었다. “목격자의 말에 의하면... 많이 심각하대요.”눈앞이 캄캄해졌다. 목격자들이 심각하다고 할 정도면 작은 사고가 아닐 것이다.“... 얼마나 심각한데요? ...” 혼이 빠진 사람처럼 물었다.“지아 씨, 걱정 마세요. 확인중이니 조사가 끝나는 대로 바로 알려드릴게요. 착한 사람은 하늘이 돕는다고 괜찮을 겁니다, 그럼 먼저 끊겠습니다. 다시 연락 드릴게요!”전화는 바로 끊겼고 심장이 얼어붙듯이 내려앉았다. 심각하다니!머리를 감싸 쥐고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현우 씨, 무사해야 해요. 제발 아무 일도 없어야 해요...”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해월이 있었다.“...왔어요?” 담담하게 얘기했지만, 손은 해월이를 꽉 붙들고 있었다.“한 대표님, 걱정 마세요, 다 괜찮을 거예요!” 해월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했다.시간은 일분일초 흘러갔고 똑딱이는 시곗바늘이 가슴을 후벼 파듯이 상처를 냈다.“해월 씨, 좀 물어봐 줄 수 있어요? 얼마나 지났는지? 현우 씨가 들어간 지 얼마나 지났는데 왜 아직도 안 나오는 걸까요?” 해월이를 잡아끌며 물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가 나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해월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는 필사적으로 그녀를 잡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이제야
저도 모르게 눈가에 힘이 들어가며 가슴이 또다시 조여오기 시작했다. 다급히 앞을 막고 있는 세림을 밀어버렸다. 휘청거리며 밀려 나가는 세림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복도로 튀어 나갔지만 역시나 경호원들이 막아섰다.의사들이 문밖의 배유정에게 무언가 전달했지만,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2분도 채 되지 않아 의사는 다시 응급실로 들어갔고 나는 그의 수술용 장갑에 묻은 섬찟한 혈흔을 보았다.나는 뚫어지게 배유정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우두커니 서 있는 그녀의 표정은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기괴했다. 그녀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더니 헤라에게 무언가 한마디 던졌다. 이세림은 순식간에 내 옆을 지나 막힘없이 안으로 들어가 배유정의 팔을 잡고는 무언가 묻는 듯싶었다. 배유정이 눈을 치켜뜨고 세림을 바라보자 세림은 고개를 숙이고는 그녀의 옆에 섰다.“그 사람 지금 어떻게 됐냐고! 이거 당장 놔!” 나는 흥분해 소리를 질렀다.배유정은 서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또다시 헤라에게 무언가 말하고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나는 자리에 멈춘 채 멍하니 배유정이 한 무리의 사람을 이끌고 나가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내 곁을 지나는 순간 배유정은 잠시 멈추더니 곁눈질로 나를 힐끗 쳐다보며 차갑게 내뱉었다. “네 덕분에 죽진 않았어.”말을 끝내곤 다시 고개를 쳐들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해월이 황급히 달려와 휘청거리는 나를 붙잡았다.“한 대표님...” 어두워진 내 낯빛에 해월이 다급하게 말했다.배유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죽지 않았다니? 설마 죽기라도 바랐단 말인가. 그녀의 한마디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피가 섞인 친조카한테까지 이토록 냉정하고 무정한 사람이 있을까.그녀가 내뱉은 말들은 나를 더욱 초조하게 했다. ‘죽지 않았다’라, 도대체 어떤 상황일까? 나는 무기력하게 문을 바라봤다. 검은 정장의 사나이들이 모두 떠나자 복도가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 마치 모든 것이 끝난 듯, 아니면 애초부터 없었던 일인 듯 고요했다. 왜 다들 떠난 것일
나는 비밀의 문을 열기라도 한 듯 뛰어 들어갔다. 방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간호사 한 명이 나를 발견하고는 큰 소리로 꾸짖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여긴 무균실이라 들어오시면 안 돼요. 얼른 나가세요!”나는 간호사를 붙잡았다. “... 그럼 아까 수술받던 환자는요? 그분 어떻게 됐는지만 알려주세요!”"나가세요! 수술이라고요? 응급 수술받으신 분은 차고 넘칩니다!”그녀는 몸을 빼내며 나를 문밖으로 밀어냈다. “당장 나가요!”“...현우 씨, 방금까지 응급 수술받던 현우 씨 어떻게 된 거냐고요?” 나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간호사는 굳은 얼굴로 단번에 나를 밀어냈다. “몰라요!”‘쾅’ 문이 닫히고 곧이어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나는 혼이 나간 채 벽에 기대어 속으로 울분을 터뜨렸다. '현우 씨,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내게 말 좀 해줘요.'“한 대표님, 이만 돌아가요.” 해월이 안쓰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더는 손쓸 길이 없던 나는 한참 지난 후에야 해월의 부축을 받아 병원을 나섰다. 미련이 남아 수없이 고개를 돌려 현우의 그림자를 찾았다. 분명히 이곳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지금 떠난다면 그를 그냥 지나쳐버리고 말 것이다.해월은 직접 차를 몰고 회사로 돌아왔다.곧 퇴근 시간이었다. 영식은 내가 오기를 기다린 듯했다. 내 모습이 보이자 모두에게 손짓하더니 말했다. “다들 퇴근합시다!”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쏠리더니 다들 조용히 퇴근할 채비를 했다.나는 사무실로 들어와 멍하니 소파에 앉았다. 피곤이 훅 몰려왔다.“지아야, 아직도 소식 없어?” 영식이 슬쩍 떠보자 해월이 눈치를 줬다.잠시 후 나는 고개를 들고 물었다. “동철이는요?”“바로 전화해 보겠습니다.” 해월은 말을 마치자마자 동철에게 전화를 걸었고 20분도 채 되지 않아 사무실로 들어왔다.나는 몸을 일으켜 그를 향해보며 물었다. “어떻게 됐나요? 무슨 소식 없어요?”“조사 결과 배 대표님은 11시쯤 스타라이트를 떠났다고 합니다. 당시 김우연과 함께 차에 올
휴대폰에 뜬 이세림 세 글자에 순간 흠칫했다.“세림 씨, 쓸데없는 말 할 거면 그만 하세요! 당신이랑 씨름할 기분 아니니까.”전화를 받자마자 쏘아댔다. “현우 씨 소식이라면 당신들이 말하든 하지 않든 알 방법이 있으니깐요!”“하하, 지아 씨 진짜 급했나 보네요.” 세림은 재밌는 구경이라도 하는 듯 괴상한 말투로 대답했다. 상당히 즐거운 모습이었다. “뭘 이렇게 화를 내세요?”“많이 심심한가 보네요!” 말을 마치자마자 전화를 끊었다. 내가 신경 쓸수록 더 기어오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역시 손에 든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나는 전화벨이 세 차례 울릴 때까지 참다 받았다. “제 인내심을 테스트하지 마세요!”“하하, 지아 언니! 그냥 알려주고 싶었어요. 그 사람 괜찮다고요, 정말요!” 그녀의 말투에는 장난기와 비웃음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근데, 당분간은 볼 수 없을 거예요. 아쉽네요! 너무 걱정할까 봐, 말해주고 싶었어요!”전화가 뚝 끊겼다.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공개 도발이었다. 그래! 몰래 숨어서 허튼수작하는 것보단 낫지.“세림이야?” 영식은 신호를 기다리며 물었다. “현우 씨 큰 문제는 없는 것 같네. 이렇게 나오는 걸 보면.”“더이상 연기는 못해서겠죠!” 나는 입꼬리를 달싹였다.“뉴스를 막는 것도 정상이야. 그 정도로 큰 재벌들은 바람에 나뭇잎만 스쳐도 흔들리는데 사람 생사와 관련된 일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지.”영식이 위로하며 말했다. “동철 씨한테 방법이 있을 거야. 좀 진정하고 소식을 기다리자. 급해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난 그냥 진짜로 현우 씨가 무사한 것인지만 알고 싶어.”차창 밖의 줄지어 선 차들과 밀려드는 인파를 바라보며 전에 없던 무기력감을 느꼈다.“마음 편히 먹어. 스스로를 가둬놓지 마. 네가 조급해할수록 그 사람들만 즐거워할 거야. 괜찮을 거야, 그 사람 지위를 생각했을 때 조금이라도 희망이 보이면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니까.”영식의 말투는 사뭇 부드러웠다. 조급하던 마음도 서서히 안정돼갔다.그
전화를 건 사람은 낯선 남자였다. 남자는 자신이 배현우의 소식을 안다고 하며 단둘이 만나기를 요청했다. 나는 누군지 묻고 싶었으나 상대방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고 대신 문자로 주소 하나가 도착했다. 아마 약속 장소인 것 같았다. 나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가방을 들고 뛰어나갔다.내비게이션을 찍고 단숨에 약속 장소로 향한 나는 초조했다. 현우의 소식을 안다고 하는 사람은 며칠 만에 처음이었다. 소식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생각할 틈이 없었다. 가짜일지라도 무엇인가를 듣는다는 것만으로도 지금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보단 나았다.근 며칠 동안 배현우의 교통사고는 없었던 일인 양 잠잠했다. 초기 실시간 뉴스도 그의 존재와 함께 감쪽같이 증발해버렸다.이 일은 나를 미치게 했고, 종적을 찾을 수 없을수록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더 알고 싶어졌다.어쩜 이렇게 묻힐 수 있을까? 이번 교통사고는 소소한 사고가 아니라 6명이 다치고 1명이 사망한 사고가 아닌가? 이렇게 소리 소문도 없는 건 불가능했다.때문에 이 낯선 남자의 전화는 어둠 속 한 줄기 빛과 같았고 나는 그 어떤 기회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그가 정한 장소는 구석진 곳에 있었다. 도시를 벗어나진 않았지만 익숙지 않은 곳이라 찾는 데 꽤 애를 먹었다.그리 크지 않은 카페였고 주변에 유명하지 않은 대학 하나가 있어 이 카페는 학교의 커플들을 위해 마련된 곳인 듯했다.나는 몸을 숨길 수 있는 구석진 창가 자리를 골랐다.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기다리면서 창밖으로 행인들을 관찰했다.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남자를 볼 때마다 그 낯선 남자길 바랬지만 번번이 실망으로 이어졌다.어느새 약속 시각을 훌쩍 넘겼지만, 그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낯선 번호에 전화를 걸었지만 이미 꺼져있다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나는 끊임없이 휴대폰을 쳐다보며 혹시 누군가가 악의적인 장난을 친 것은 아닌지, 그래서 자리에 나타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추측했다.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럴 리가 없었다. 전화 속 상대방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