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이청원과 나는 그렇게 왕래가 깊었던 사이도 아닐뿐더러 겨우 이 정도 이유로 나를 이렇게까지 도울 리가 없었다.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이 들었다.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별다른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우리 회사는 그저 이름도 없는 중소기업일 뿐인지라 이용할 가치도 별로 크지 않았다.이청원은 나의 반응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제 말이 좀 많이 의심스럽죠? 너무 깊게 생각은 하지 말아요. 그저 전에 한 대표님께서 도움을 주셨으니 그에 따른 보답이라 여기시면 됩니다. 전 신세 지는 건 딱 질색이거든요. 특히 여성분에게 신세 지는 건 더 예의가 아니지요.”“일 앞에서 성별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를 여자로만 보지는 말아주시죠.” 나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맞받아쳤다.이청원은 또다시 한번 통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여자로만 보지 말라니요. 누가 한 대표님을 완전히 성별을 떠나 바라볼 수 있냔 말입니까.” 그러고는 곧이어 웃음을 멈추고는 말을 이었다. “깊이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이정도야 그때 한 대표님께서 도와주신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게다가 임금은 한 대표님께서 부담하시는 건데 이렇게까지 고마워하시면 제가 다 송구스럽네요. 그리고 이 작은 판에서 다 서로 돕고 사는 거죠.”“알겠습니다. 다시 한번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대표님. 앞으로 우리 회사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나도 더 이상의 추측은 거둬들이기로 했다. 일단 눈앞에 불부터 끄는 게 중요하기에 그 뒤의 일들은 훗날에 다시 생각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이청원에 비하면 난 잃을 것도 없는 신세이기에 더는 두려울 것도 없었다.게다가 이청원 측에서 먼저 손을 내밀었는데 그 손을 잡지는 못할망정 그 손을 그대로 내쳐버린다면 정말 죽음을 자초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프로젝트에 관해 조금 더 얘기를 나눈 뒤 내가 먼저 약속장소를 빠져나왔다. 이청원과는 그동안 깊은 왕래가 없었기에 더 나눌 이야기도 없었다.차에
회의실에 들어서니 이게 웬걸 해외 출장으로 인해 보름 동안 얼굴도 보지 못한 배현우부터 근엄한 얼굴을 하고는 말없이 앉아있는 배유정까지 예상치 못한 인물들의 등장에 나는 순간 그 자리에 멈칫하고 말았다. 게다가 배현우는 대체 언제 서울로 돌아온 것인지 그 어떤 소식도 전혀 들은 적이 없었다.눈앞의 엄숙한 광경을 바라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예감했다. 오늘 절대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을 것 이라는 것을 말이다. 게다가 어찌 되었든 간에 확실히 현재는 우리 회사 측 책임이 있으니 더욱 험난한 여정이 예상되었다.배유정은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쓱 훑어보고는 곧이어 시선을 나의 얼굴에 고정시키고 경멸하는듯한 얼굴을 하고는 말을 꺼냈다.“한 대표님, 이번 시공문제로 여기까지 오셨는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상황설명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나 뜻밖에도 배유정의 말투 속에는 별다른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하지만 나는 이럴수록 뒤늦게 몰려올 후폭풍이 얼마나 어마어마할지 알고 있기에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나는 목을 가다듬고는 침착하게 사건의 경위를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정리하여 서술해 보였다. 그러고는 해월에게 눈짓을 하여 시공도안을 배유정에게 건네주었다.그뿐만 아니라 현장에 있는 모든 이들의 손에 잘못된 시공도가 쥐여주었다. 나는 최선을 다하여 빠짐없이 미리 준비를 끝마쳤고 더 이상의 설명도 필요 없었다.특히나 그 문제의 시공도는 그 어느 곳도 손을 대지 않았으나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수치 하나가 변동된 것이다.배유정은 잘못된 시공도 원본을 손에 쥐고 슬쩍 훑어보더니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사실 배유정뿐만 아니라 날카로운 인상을 지니고는 배유정 옆에 앉은 헤라도 만만치 않았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나의 설명과 내가 준비해온 자료들을 분석해보더니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배유정은 관련 부서 인원들을 지목하며 모두 차례대로 자기 생각을 발표하도록 하였다.그들은 모두 차례대로 돌아가며 자신의 분석내용과 결과, 그리고 자기 부서의 검토 상황
나의 눈길은 그대로 헤라에게 고정되었다.헤라는 나의 시선이 불쾌했는지 나를 한번 흘겨보고는 다시 손에 들려진 시공도에 눈길을 돌렸다.“확실히 시공도가 유출되지 않았음은 저희 측에서 확신할 수 없습니다. 시공도를 천우 그룹의 프로젝트팀과만 주고받은 게 아닌 건 맞습니다.” 나는 거리낌 없이 배현우의 질의에 응하며 인정했다. “이건 확실히 저의 불찰이 맞습니다. 죄송합니다.”“그럼 한 대표님께 묻겠습니다. 누가 또 시공도를 본적이 있습니까?” 배현우는 여전히 날카로운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배현우의 질문은 확실히 날카로웠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더욱 부드럽게 다가왔다. 지금 그는 내가 계속하여 말해나갈 수 있도록 격려하고 있음을 나는 알고있기 때문이다.그때 내 휴대폰의 진동 소리가 느껴졌다.“저는 전에 시공도, 검토 보고서, 설명서, 그리고 합격증명서까지 모든 관련 서류들을 직접 천우 그룹 디자인팀에 제출한 적이 있습니다.”나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 서술했다. 그리고 디자인팀의 의의를 유인하기 위해 일부러 디자인팀에 제출했다는 점을 더욱 강조하여 말했다.아니나 다를까,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디자인팀의 양재준의 불만을 자아냈다.“무슨 뜻입니까 한 대표님. 이 모든 게 저희 디자인 팀이 꾸민 일이라도 된다는 겁니까? 저희 디자인 팀이 이 회의에 참석한 건 오로지 시공 도를 체크해주기 위함인데 이렇게 바로 저희에게 덮어씌우신다면 곤란하죠. 애초에 이번 프로젝트 시공도는 저희 디자인팀에서 검토한 적도 없습니다.”천우 그룹의 디자인팀 소속 인원들은 모두 상당히 오만한 태도를 지녔다. 물론 그 오만함에는 뒤따른 자본이 존재한다. 천우 그룹의 디자인팀은 이미 세계적으로 상당히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국제적으로 유명한 많은 랜드마크들과 건축물이 천우 그룹의 디자인팀을 거쳐왔기 때문이다.하여 그들은 이번 사건에 연유되는 것만으로도 질색을 할 것이다. 역시나 나의 예상대로 그들은 그 자리에서 상당히 아니꼬운 어투로 나의 말을 반박해버렸다.하지만 내가 원하던
내 행동은 즉시 모든 사람을 놀라게 했다.김우연이 금방 나에게 보낸 문자를 보고 사건의 실마리가 잡혔음을 알 수 있었고 나를 뽐낼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러니 천우 그룹에는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말을 마친 나는 핸드폰을 넣었다. “택배를 보낸 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제가 반드시 조사해서 여러분께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 순간 내 시선 끝에 배현우의 눈꼬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우선 천우 그룹 프로젝트팀 기술자분이 정확한 도면을 다시 확인해 주면 제가 사람을 보내 사원 기술팀으로 직접 배송하겠습니다. ” 부드럽지만 단호한 내 말투에 배씨 부인도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한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는데 이번 건으로 인한 손실은 귀책 사유가 있는 쪽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저희 신흥의 책임이라면 절대 회피하지 않고 책임지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먼저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이해월을 데리고 떠나려는 나를 보고 배현우가 냉담한 얼굴로 말했다.“앉으세요.”크지 않았지만, 위압감 있는 그의 목소리에 나는 잠시 멈칫한 후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배현우의 가늘고 긴 눈매는 서늘하면서도 위압감이 넘쳤다. “천우 그룹 일은 저희가 직접 조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미팅으로 인해 우리 직원들에게 크게 실망했습니다. 시비 앞에서 이렇게 나약하고 몸을 사리다니. 이건 우리 회사 전통이 아닙니다. ”배현우의 날카로운 지적에 모든 사람, 특히 방금 입을 열었던 사람들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배현우의 단호한 기세와 날카로운 카리스마에 현장의 모든 사람은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여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배현우의 얼굴만 쳐다보며 판결을 기다렸다. “제가 여러분들이 문제가 생겼을 때 앞다투어 책임을 회피하라고 높은 연봉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회사에서도 아는 도리인데 여러분들은 무슨 염치로 여기에서 그렇게 떳떳하게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정 원하신다면 시시비비가 없는
나는 회사에 돌아온 뒤 이동철을 불러 업무를 주려고 하였는데 마침 이동철도 나에게 조사 보고서를 주었다. 보고서를 받은 후 나는 이동철의 업무 속도와 효율에 감탄했다. 반면 이동철은 진지하게 내게 말했다. “지아 누님, 아직 기뻐하기는 이릅니다. 전부 표면적인 자료들뿐이라 보기에 문제가 전혀 없지만 제 직감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보고서는 이세림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세림의 출생, 부모님이 돌아가신 날짜, 입양 연도, 학교 등 내용이 자세하게 적혀있었다. 이동철이 한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이곳입니다.”“분명 이세림이 호주에서 제일 유명한 초등학교를 나왔다고 적혀있는데 관련 영상자료를 찾지 못했습니다.”이동철이 포인트를 짚었다. “그리고 중학교 사진도 한 장밖에 없습니다. 취미가 촬영인 여자애인데 영상자료가 없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이동철은 의혹에 가득 찬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지아 누님,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을 주시면 계속 조사해 보겠습니다.”이동철의 말에 나도 심상치 않음을 느꼈고 이것을 발견한 세심함에 감탄하며 말했다. “어쩌면 그때는 촬영을 좋아하지 않았거나, 또 어쩌면...”“무슨뜻인지 압니다. 그러나 배씨 집안은 자료관리가 엄격하게 되어있어 조사가 어려운데 이세림의 자료만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 나를 바라보는 이동철의 눈이 반짝였다. “제가 이 학교 과거 졸업 사진과 수료식 사진을 찾았습니다.”그리곤 나에게 빛바랜 사진 두 장을 건넸다. 사진으로 눈길을 돌린 나는 머릿속에 어딘가 익숙한 광경이 떠올라 이동철에게 물었다. “이게 호주에 있을 때 사진이에요?”“네!”이동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렇게 익숙한 느낌이 들죠?”내가 멋쩍은 웃음을 짓자, 이동철도 웃으며 말했다.“예전에 다른 자료에서 이곳을 보셨을 수도 있습니다.”난 아직 해외에 가본 적이 없어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 조금 우습기도 했다.자료를 다 본 후 고개를
”현우 씨, 언제 돌아왔어요!” 나는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돌아온 지 이틀 됐어요.”배현우는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배현우에게 나는 그의 일정을 알 필요가 없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인 것 같아 서운했다. 바로 기분이 안 좋아져 나는 말을 하지 않았다. 배현우는 바로 말을 이었다. “그 일은 더 이상 신경 쓰지 말아요. 지아 씨 본인의 일만 신경 쓰면 돼요.””“그게 무슨 뜻이에요?”나는 조금 기분이 상했다. “지아씨 기운이 그렇게 넘쳐요?”배현우는 대답 대신 기분이 안 좋은 듯 딱딱한 말투로 내게 물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었다. 마음속으로 너도 전화 끊기는 기분을 느껴보아라고 생각했다. 한참 동안 기다렸지만, 연락이 다시 오지 않아 나는 또다시 실망했다. 사람의 기분이란 어쩌면 말 한마디, 눈빛 하나 혹은 동작 하나에도 큰 영향을 받는다. 마치 지금 좋던 기분이 배현우 때문에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된 것처럼. 핸드폰을 보다가 며칠 동안 이미연과 도혜선을 만나지 못한 것이 생각나 전화를 걸었는데 이미연은 계속 통화 중이어서 도혜선에게 전화했다. 도혜선은 전화를 받자마자 원망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이제야 내가 생각났나 보네!” “너 지금 이미연 같아, 투덜쟁이.” 내가 쏘아붙이자, 도혜선이 깔깔 웃었다. “네가 어머니 모셔 왔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난 아직도 인사드리지 못했어! 그리고 네가 언제 집에 있는지도 모르겠어.” “내가 집에 없어도 혼자 가면 되잖아.”나의 시큰둥한 대답에 도혜선은 밝게 웃으며 음식이 괜찮고 온천도 있는 클럽에 쉬러 갈 건지 물었다. 예전의 나는 매일 아이 혹은 집이었는데 이렇게 좋은 곳이 있다는 말에 바로 이미연도 불러서 같이 가자고 대답했다.그런데 이미연이 계속 통화 중이어서 누구랑 이렇게 오래 통화하는지 궁금했다. 나는 도혜선이 준 주소로 천천히 운전했다. 도혜선과 연락하면 직업 때문에 어디에 새로 오픈한 곳이 있는지, 맛집, 재밌는 곳, 만날 수 있는 사람, 모든 것을 도혜선이
차창 밖, 검은 마이바흐 한 대가 천천히 건물 입구에 멈추었고 훤칠한 뒷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다부진 몸매에 매력적인 눈, 검은 양복바지가 길고 곧은 다리를 감싸고 단추 두 개를 풀어헤친 검은 셔츠 사이로 구릿빛 피부가 드러났다.단정하게 빗어 넘긴 흑발과 선글라스에 가려진 각진 얼굴, 선글라스를 벗자, 조각 같은 얼굴과 완벽한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그는 만인의 주목을 받으며 그곳에 서 있었다. 그가 직접 차 문을 열고 손을 뻗어 화려한 옷차림을 한 여자를 에스코트했다. 그녀는 선글라스, 스카프에 마스크를 한 조금 지나친 옷차림이었다. 하지만 몸매를 보아하니 이세림은 절대 아니었다. 그녀는 요염하게 차에서 내린 뒤 자연스럽게 남자의 팔짱을 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그 남자가 배현우였고 여자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눈앞의 모습이 내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어쩐지 방금 전화할 때 말투가 퉁명스럽더라니, 어쩐지 내가 열정이 넘치는 걸 원하지 않더라니, 어쩐지 나에겐 언제 떠나고 돌아오는지 말하지 않더라니...알고 보니 연인이랑 즐겁게 지내느라 그런 거였구나, 조금 전까지 말투가 좋지 않았는데, 지금은 따뜻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이 온천에 들어가 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목구멍이 화끈거리고 손발은 차가워져 무기력하게 얼마나 앉아있었을까, 다시 울린 전화벨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나 지금 입구에 도착했어, 바로 들어갈게.”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보아하니 이곳이 배현우 별장이랑 가까워 돌아가기 편해 일부러 선택한 것 같다.나는 애써 웃음을 지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눈앞은 자욱해졌다. 차에서 내리려는데 누군가 창문을 두드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벌써 이미연이 도착했다. 나는 얼른 차에서 내렸다.“빨리 왔네. 날아왔어?”“빠르다고? 나 30분이나 운전했어!”이미연은 소리치며 날 바라보았다.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아?”나는 얼른 표정을 감추며 얼굴을 쓰다듬었다.“그래? 나
나는 물을 한 움큼 들어 세수하고, 점점 충혈된 나의 두 눈을 감추고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도혜선이 술잔을 들어 나에게 한잔 건네주었다. 술을 받아 단숨에 들이키고 나니 많이 진정되었다.나는 수건을 얼굴에 덮은 채 두 사람에게 말했다.“너희들 먼저 이야기 나누고 있어, 난 잠깐 눈 좀 붙일게.”“너는 잠꾸러기처럼 종일 잠만 자네, 방금 밖에서 잤는데 지금 또 자는 거야?”이미연이 나에게 쏘아붙였다.“너 무슨 일 있어?”“나 요즘 일이 많아서 과로사로 죽을 것 같으니 네가 이해 좀 해줘.”나는 수건을 덮고 말했다, 눈에서는 눈물이 차올라 얼굴의 물방울이랑 섞여 흘러내렸다.이미연은 나를 난처하게 하지 않고 도혜선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서야 얼굴에 있던 수건을 걷어냈다.“안 잘 거야?”이미연이 술을 마시며 나를 보며 웃었다.“에이, 진짜 말도 마, 내가 말한 그 인기 여배우, 너랑 좀 닮았어! 한지아, 언젠가 데뷔하고 싶으면 내가 직접 네 매니저를 해줄게, 하지만, 네가 그녀보다 훨씬 예뻐.”“내가 데뷔를? 내가 출마한다면 모를까,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 진리나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어!”나는 시큰둥하게 손을 뻗어 도혜선이 건넨 술잔을 받아 한 모금 홀짝이고는 탁한 숨을 내쉬었다.그 두 사람은 나의 말을 듣고는 히죽 웃었다.“네 포부 잘 들었고, 알고 보니 너 선녀였구나!”우리끼리 이야기를 나누며 술만 마셔서인지 허탈해졌다, 나는 항의하며 말했다.“그만 마시자! 배고파 죽을 지경이야, 언제 밥 먹을래?”도혜선과 이미연이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우리 셋은 일어나 가운을 두르고 식당으로 갔다.이곳의 음식은 소문처럼 진짜 맛있었다. 나는 허겁지겁 음식들을 집어 먹으며 에너지도 보충하고 마음의 공허함을 채우고 있었다.배불리 한 끼를 먹은 후 일어나서 우리 방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계단 입구로 통하는 곳에서 나는 보고 싶지 않은 그 두 사람을 보았다, 두 사람은 옷차림이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서강민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서강민 씨, 먼저 들어가시죠. 언니가 깨서 서강민 씨를 보면 또 흥분할 것 같은데... 지금 같은 상황에 언니가 회복하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마디 더 보탰다.“어떤 일들은 천천히 해야 해요. 언니한테 시간을 좀 주세요. 서로 생각을 정리해 봐요.”서강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도혜선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발길을 돌리기 전에도 아쉬움에 한 번 더 뒤돌아보며 나한테 말했다.“고생해 줘요.”나도 담담히 답했다.“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언니에게 시간을 좀 줘요. 언니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수 있잖아요.”내가 말하는 회복이 뭔지는 서강민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건 도혜선이 마음에 입은 상처였다. 오늘 도혜선의 행동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녀의 상처는 아물 수 없을 것이다. 언급만 해도 피가 흘러내릴 만한 상처였다.잠시 후, 서강민은 한발 물러섰지만, 눈길은 여전히 도혜선에게 머물러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모습 아래에서 어떠한 파도가 휘몰아치는지 나는 몰랐다.한참 전 도혜선이 했던 말들은 마디마디가 주옥이었다. 모두 그녀가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었던 것들이었고 또한 서강민의 약점이었다. 얼마나 아플지는 서강민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쓰디쓴 독주도 그는 혼자 삼켜내야만 했다.도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와 깨어나려는 낌새가 보이고 나서야 서강민은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나는 마음이 아파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도혜선의 손을 맞잡았다.인제야 하루 종일 배현우에게서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쪽에는 어떤 상황인지, 김우연에게서는 소식이 없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도혜선을 보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아 살며시 그녀의 손을 놓고 일어서려 했을때, 그녀는 다시 나를 잡으며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지 마...”나는 너무 놀라 얼른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서강민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하는 걸까?’“당시의 사고는 내가 저지른 거야. 그녀도 나 때문에 다쳐서 지금처럼 된 거고… 나는 좋은 남편이 아니야. 아내가 식물인간이 되었는데 나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말이야...”서강민은 여기까지 말하며 후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너무 죄책감이 들고 고민스러워. 나 또한 발버둥 쳐봤지.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의 일탈을 받아들일 수 있어 해. 그녀한테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강민 씨!”도혜선은 꾸짖는 듯한 말투로 그의 말을 잘랐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당신 아내가 듣고 있을 거예요. 저를 끌어들여서 같이 속죄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구세주가 아니에요. 저는 그냥 사람답게 살고 싶은 평범한 여자라고요. 저 좀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요?”도혜선은 말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녀는 한 손으로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 앞으로 갔다.“혜선 언니, 움직이지 마! 위험해...”늑골 골절과 뇌진탕이 있는 환자다 보니 이러한 행동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위험했다.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녀를 안으려고 하는 한지아를 제지했다.“제가 오늘 한 말이 아직도 이해가 안 되나요? 서강민 씨, 저의 인생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신한테 묶여 당신의 부속품이 되었었는데 저도 자존심이 있어요. 더 이상 당신처럼 지난날의 죄책감을 짊어지며 답답하게 살아가지 않을 거예요.”도혜선은 여전히 분노에 차 외치고 있었다.“매일 제 앞으로 와 지난날의 행동에 대해 속죄하라고 일깨워 주실 필요 없어요! 당신을 보면 저는 지난날 모든 서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치욕적인 과거가 떠올라요. 당신은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당신은 아내와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해요.”말을 마친 도혜선은 숨이 차올랐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도혜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당신은 아무런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저 같은 여자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아도 돼요.”그녀는 자기비하적인 말을 내뱉었다.”선아...”“설사 강민 씨가 와이프와의 약속을 안 지킨다 해도 당신의 신분과 지위로 당신에게 더 어울릴만한 사람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물며 당신네 부부 눈에는 저는 그냥 염치없고 미천한 사람일 뿐이죠. 저 같은 사람은 본처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사모님이라는 호칭도 어울리지 않죠.”“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오해하지 마.”서강민은 조급함에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아섰다.“강민 씨... 해명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행동이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어요! 장담하건대 아직 당신들이 어떤 의도로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보가 된 건 아니에요. 그녀는 정말 대단하네요. 죽을 때까지도 제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녀는 아무리 병상에 누워있어도 고상한 사람이고 저는 그냥 미천한 사람일 뿐이니 말이에요.”도혜선은 말을 내뱉으며 입가에 처량한 미소를 비췄다. 누가 봐도 가슴 아픈 미소였다.“이전의 저는 확실히 허례허식에 차 있는 사람이었지만 저도 성장했어요. 정신 차렸어요. 당신 앞에 있는 저의 진정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어요. 저는 하나의 도구, 들러리뿐이었지만 원망하지 않았어요.”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숨 돌렸다. 얼굴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하지만 이제 저는 자존감을 챙기며 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고 쓰레기같은 취급을 받더라도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고 싶어졌어요.”점점 더 차가워지는 도혜선을 바라보며 서강민은 답했다.“혜선아, 나는 널 한 번도 무시한 적 없어. 나는 그냥 내가 뭘 하든지 네가 다 이해해 줄 줄 알았어.”도혜선의 서강민의 말을 듣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안색은 더 창백해져 있었다.“이해? 당신이 어떤 말을
방금 허투루 한 말이 어머니의 진실인가 싶다. 보아하니 어머니가 나를 속이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의 의문점이 점점 많아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마치고 차씨 가문의 할머니께 말씀을 드린 후, 위층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도혜선을 보러 가려고 준비했다.그리고 팔도 겸사겸사 검사하려고 했다. 차에 앉고 나서 배현우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이 이른 아침에 뭐 하러 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김우연 쪽에 무슨 소식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생각해 보니 이렇게 빠르진 않겠지? 몇 시간밖에 안 됐는데.'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도혜선이 노발대발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병실에는 도혜선과 서강민 두 사람만 보이고 이미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내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좀 이상하고 심상치 않는 것을 느꼈다.침대 옆 머릿장에는 보온병이 놓여있다. 서강민은 오늘도 도혜선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러 온 것 같다.서강민은 침대 앞에 떡 하니 서있었고 침대에 있던 도혜선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혜선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상황을 정리하려고 다가가서 서강민에게 인사를 하고 도혜선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좀 어때?""별로야."도혜선은 차갑게 대답하더니 또 말을 건넸다. "지아야, 손님 좀 배웅해 줄래?"난감했다, 도혜선은 서강민을 내쫓으라고 하는 거였다. 난 당연히 그 뜻을 알고 있다. 조심스럽게 서강민을 쳐다보았다. "혜선아, 꼭 이래야 하니?"서강민은 씁쓸한 표정으로 도혜선을 바라보며 물었다."네! 서강민씨, 저는 이미 분명히 말했고 두 번 다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도혜선은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서강민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언니, 화 그만 내고 진정 좀 해. 초조해하는 거 알아, 점차 좋아질 거야. 강민씨랑 얘기 좀 하고 있어. 나는 팔 검사해야 돼서, 금방 돌아올 거야!"나는 핑계를 대고 떠나서 그들에게 자리를 비워주었다.
배현우는 나의 우울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에 회사 일도, 한심로얄의 마지막 한방도 둘 다 포기할 수 없잖아요. 신예 쪽 일도 있고, 전희가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요. 지금 모든 게 중요한 시기이니까요.""지금 그 누구도 아버지보다 중요하지 않아요! 수십년간 도망치면서만 살았는데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분명 아주 괴로워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데, 내가... 내가 딸로서, 난..."배현우는 내 말을 듣고 나서 침대에 누워 나를 꼭 껴안고 말했다. "일단 내일 소식을 기다려 봅시다. 김우연 쪽에서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 보고 결정합시다."배현우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제 말 듣고 일단 자세요, 내일 일어나서 먼저 할 일들을 처리하고 준비하고 있으세요, 만약에 상황이 좋으면 내일 같이 데리고 갈게요, 당신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배현우가 지금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보지를 못한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배현우의 따뜻한 품에 안기며 눈을 감고 내일 먼저 무엇을 처리해야 할지 생각했다.근데... 눈을 떠서 배현우를 쳐다보는데 배현우도 잠에 들지 않았다. "현우씨... 할머니가 보존하고 있는 CCTV를 보여주시겠어요?"'그 영상을 꼭 보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어머니가 어떻게...'"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세요,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 팔짱을 끼더니 분명히 나를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배현우가 그 장면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이 깊었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배현우의품에 안겨 점점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았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배현우는 이미 곁에 없었고, 손을 뻗어 그가 누워 있던 곳을 만졌다. 이미 차가운 걸 보니 배현우는 일찍 침대에서 일어났나 보다.'무슨 소식이라도 왔나?'이
"할머니가 이번 사건을 피할 수 있었던 건 당시 큰 병을 앓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했어요. 제 생각에는 반은 꽤병인것 같아요. 직접 사표를 쓰고 나서도 서둘러 호주를 떠나지 않았다는 게 참 슬기로운 선택이었어요.""네?"너무 놀라서 몸 둘바를 몰랐다.배현우는 인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호주를 떠나지 않으셨어요. 그곳에 머물면서 배씨 저택의 인기척을 살피다가 배씨 저택의 요상한 소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에야 조용히 호주를 떠나셨어요."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메커니즘에 감탄했다."저도 그때 상황을 잘 몰라서, 할머니도 몸이 허약했고 내 행방을 알아 볼 길이 없어 그 비밀을 계속 지켜왔었나봐요. 부하들이 할머니를 찾고 나서도 여전히 어리석은 척을 하고 있었지 뭐에요."배현우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할머니께서 저를 두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그걸 꺼냈어요."배현우의 말을 듣고 나니 할머니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배현우가 나를 쳐다보더니 나의 지친 모습을 보고서야 손을 들어 대문을 열어 장벽들이 천천히 열리는 걸 볼 수 있었다.차는 왔던 길을 따라 경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벌써 자정이 되어 우리 둘은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에 돌아왔다.'우리를 배신한 소인이 두 집안을 풍비박산 시켰다니. 오늘 밤 일어난 모든 일들은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간단히 씻고 걱정 가득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태어나서 얼굴도 한번 못 본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를 걱정해 발 뻗고 자지 못했다. '한강인이랑 한걸은 이미 잡혔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의 처지는 어떤지.''한씨 부자가 그저 아버지를 인질로 삼아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면 왜 배현우는 그곳의 환경이 복잡하다고 했을가.''이유는 간단하다. 누군가 아버지를 미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고 싶으려는 걸가?''배현우? 아니면 배유정?'생각할수록 더욱 걱정이 됬다.아버지의 이번생은 이미 충분히 힘들다.어머니랑 서로
나는 걱정스레 배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배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계속 말했다.“후에 목격자 어르신을 찾고서 한강인을 자세히 조사하니 한강인은 이 모든 것이 일어난 뒤에야 천우 그룹을 떠난 거였어요. 지아 씨도 알잖아요. 그때 당시 천우 그룹은 아직 배유정 손에 있었어요.”“현우 씨의 말은 한강인은 배유정 과도 사이가 틀어졌단 말인가요?”나는 추측하며 물었다.“우리가 조사할 때 이상한 단서 하나가 나왔어요. 한동안 배유정도 한강인을 찾았고 심지어 한강인에 대한 추살령도 내렸어요! 참 이상해요. 배유정은 왜 한강인을 죽이라고 지령을 내린 걸까요?”“이유는 하나뿐이죠. 즉 한강인이 분명 무엇을 알아냈거나? 아니면 어떤 일에 참여하였거나?”나는 대답했다.배현우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진백이 죽임을 당했듯이 이 안에는 분명 남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 있는 거겠죠. 우리는 이 단서를 따라 계속 추적해 보니 한강인의 혐의가 점점 더 드러나더군요. 그리고 그의 아들 한결도 같이 도망쳤어요.”“그러고 보니 이 안에는 분명히 또 다른 요소가 있겠네요!”나는 사색에 잠겼다.“그래서 우리는 추측했죠. 한강인은 확실히 이 사건이랑 연관이 있고 둘이 도주하는 과정에 서로 연락하는 빈도를 보아서 부자 둘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어요.”“그리고 한강인이 도망 다니는 그 시기에 그의 모친이랑 누나 모두 영문도 모른 채 실종되었어요. 지금 보니 그분들은 아마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것 같네요. 이 때문에 한강인은 고두리에 놀란 새가 돼서 끊임없이 도망치며, 이 또한 한강인이 지금의 상태로 되게 한 원인인 것 같아요. 사실 한강인은 원래 지금의 모양이 아니거든요.”배현우의 말을 듣자 나는 저도 모르게 아까 보았던 한강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강인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엄청 정신적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다른 기타 방식으로 정신을 잃지 않게 버티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저렇게 말라죽을 정도일 리가 없다.“그리고 한 가
배현우는 나를 한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었다.“맞아요. 제 씨 어머니가 얼마나 총명한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어요. 제 씨 어머니는 책 속에 카메라를 숨겨두고 만약 사고가 난다면 여기에 있는 이 물건을 숨겨두었다가 훗날 믿음직스러운 사람에게 주라고 할머니한테만 똑똑히 당부해 두셨어요!”나는 코가 찡긋거리더니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보아하니 제 씨 어머니는 분명 위험이 닥칠 거라는 것을 미리 예감했던 거네요!”배현우는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제 씨 어머니는 만약 자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할머니더러 애들을 데리고 허씨 가문으로 가라고 할머니한테 당부하셨어요.”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코를 훌쩍이었다.배현우는 자기 손을 꽉 움켜쥐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참 생각지도 못한 게 모든 것이 제 씨 어머니의 예상대로 일어났고 감춰둔 카메라에 모든 것이 담겼어요! 근데 할머니는 제 씨 어머니의 뜻대로 우리 둘을 순리롭게 허씨 가문으로 데려가지 못했어요.”“급한 나머지 할머니는 고씨 가문에만 소식을 전했고 그마저도 나쁜 놈들보다 동작이 빠르지 못해 그들이 지아 씨를 데려간 후였어요. 그래서 저만 고씨 가문에서 데려갔어요.”나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그때 당시의 내가 얼마나 힘없고 무력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데다가 배현우와 억지로 갈라지게 되었다.배현우는 내 손을 꽉 잡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나도 배현우 지금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날 배현우는 눈앞에서 억지로 끌려 나가는 나를 보기만 하고 반항할 수도 없는 그런 무능력함은 아마 배현우한테 평생 잊지 못할 아픔이 되었을 것이다.차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자동차가 앞으로 가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한참 뒤에야, 배현우의 잠긴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이런 것들을 찾은 후에야 비행기 추락 사고가 떠올랐고 이로써 모든 것들이 비로소 한강인을 추측하게 했으며 그 이후에 우리는 한강인
이 소식은 그야말로 나를 입이 떡 벌어지게 했다. ‘나를 데려간 게 어떻게 그 사람이지?’“맞아요. 우리는 유일한 목격자를 찾았어요. 그 당시 그쪽 산에서 약재를 캐는 어르신이신데 그때는 중년인이셨어요. 하늘의 뜻인지, 우리가 수년을 찾아 헤맨 끝에야 비로소 이 참극의 전부를 직접 목격한 증인을 찾아냈어요.”“그 어르신 정말로 전체 과정을 모두 목격하셨나요?”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배현우 얘네가 얼마나 큰 공을 들여야 바다에서 바늘 건지는 것 같은 일을, 그것도 몇 년이 지났는데도 당시의 목격자를 찾아낸 걸까.“어르신의 말로는, 당시 자기는 산 위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잠시 계단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래 도로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해요. 알다시피 외국에서는 약재를 캐는 일은 엄청 드물어요.”배현우는 엄청 뿌듯한 말투로 말했다.“우리 형제들이 엄청나게 고생 많았어요. 십수 년을 하루같이 귀찮음을 마다하고 사건 지역을 탐방하러 다니면서 일말의 흔적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나도 믿어지지 않아 입을 열었다.“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참 노고가 많았어요.”“어르신이 말씀하기를 당시의 장면은 엄청 아슬아슬했대요. 부딪힌 차는 거의 굴러떨어지기에 일보 직전이었는데 후에 폭발했대요. 어르신은 우리의 차가 폭발한 뒤 키 크고 마른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리는 걸 똑똑히 봤다고 해요. 그리고 그 남자는 길 왼쪽의 언덕 아래로 달려가 무언가를 찾았대요.”배현우는 그때 당시의 장면을 묘사하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때 당시의 상황을 필사적으로 상상해 내려고 하니 머리가 또 아파 났지만, 배현우가 말을 멈출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시에 일어난 이 모든 것, 전부 나한테는 엄청난 매력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찾아낸 산산조각 난 퍼즐들을 하루빨리 제 위치에 맞춰서 하나의 완전한 그림을 만들어 내고 싶었으며 그때 당시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그 뒤로 난 어떻게 Z 국의 만덕동에서 떠돌게 되었고 또 어떻게 지금의 한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