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술에 취한 나를 장영식이 데려다주었다. 차에서 내렸을 때 그는 나를 등에 업었고 나는 깔깔대며 크게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장영식은 무던하게 나를 업고 동네 길을 천천히 걸으며 대학교 1학년 때 있었던 일들과 그가 나에게 얼마나 잘해줬었는지, 또 내가 몸치는 아니었다며 내가 그의 등에서 잠이 들 때까지 계속 얘기해 주었다.어떻게 집으로 돌아와서 방에 온 건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래도 집에 부모님이 계셔서 딸도 돌봐주시니 안심이 된다. 난 조금도 두렵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몇 시나 됐을까, 나는 전화 소리에 잠이 깨었다. 머리는 여전히 아팠고 오늘은 쉬는 날이라는 걸 의식적으로 깨달았다. 난 핸드폰을 더듬더듬 찾아서 끄고 베개에 나를 묻었지만 억지로 잠을 청하지는 않았다.다시 잠들 수 있을까…. 모든 것을 쓸어버리고도 남을 위력의 수많은 슬픔이 머릿속으로 밀려들어 와 떨쳐 내려 해도 떨쳐 낼 수가 없다.갑자기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핸드폰을 보니 배현우로부터 걸려온 전화였고, 잠시 망설이던 나는 전화를 받았다. 필경 이것은 내가 이제까지 받고 싶었던 전화였다.“여보세요.” 나는 잠에서 막 깨어 약간 잠긴 목소리였다.“어째서 전화를 안 받았어요?” 배현우는 내 목소리에서 비슷한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물었다. “왜 울어요?”“아니에요, 막 잠에서 깼어요.”“마음 불편한 게 있으면 말해요,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고요.” 비록 배현우가 말은 이렇게 했지만 알 수 있었다. 그의 말투는 딱딱했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조금 답답하고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배현우도 오랫동안 침묵했다. “내 전화를 받아도 즐겁지 않나요?”“제가 또 말실수할까 봐 겁이 나요! 분명 전 어리석으니까요.” 나는 희미한 목소리로 원망의 의미를 담아 말했다.저쪽에서 냉랭한 불만의 소리가 들렸고 그것은 마치 내 말에 코웃음을 치는 듯했다.“당신은 스스로 반성을 해야죠.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는 비아냥거렸다.“현우 씨, 전 이혼
전화는 배현우가 건 것이었고 나는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아빠는 내 감정을 확인하려는 듯 내 표정을 살폈고 난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 반대편에서 바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저 공항이에요. 데리러 와요!”또 명령이야!말문이 막힌다. 배현우에겐 특별한 비서와 수행원이 있고, 그를 도울 사람이 겹겹이 쌓여 있는데 내가 공항에 그를 마중 나가야 하나? 그는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운전기사인가 아니면 하인인가.“미안해요. 집에 손님이 와서 나갈 수가 없어요.” 나는 담담하게 거절했다.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졌다.하마터면 욕이 나올 뻔했다. 개자식, 또 전화를 끊었다.핸드폰을 티 테이블에 막 올려두려는 순간 `뜨르르`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메시지를 열어보니 장영식이 큰 가방을 들고 문을 두드리는 CCTV 사진 한 장과 함께 글 한 줄이 와 있었다. “이 사람이 언제부터 손님이었죠? 그가 당신이 나갈 수 없을 만한 귀빈인 된 건가요? 콩이는 나와 식사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사진을 보니 이가 갈리게 화가 났다. 배현우도 우리 집 CCTV 영상을 가지고 있다. 왜 우리 집을 감시한 걸까? 그의 횡포가 정말 너무 지나치다.“뭐 하는 거예요?” 나는 불쾌함에 몇 마디 적어 메시지를 보냈다.무력감이 느껴진다. 정말 막무가내인 사람에게는 어쩔 도리가 없다.“받아들일래요, 안 받아들일래요?” 배현우가 이번에 보낸 글은 더욱 강력했다. 나는 확신한다. 이 사람은 담력이 있다. 내가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대답하면 그는 한 시간 내로 우리 집에 나타날 것이다. 난 지금 장영식이 겪을 난감함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나는 화가 나서 얼굴이 싸늘해졌다. 고개를 들자 아빠와 두 눈이 마주쳤고 내가 지은 어색한 웃음은 우는 것보다 더 봐주기 힘들었다.“저……. 저 좀 나가봐야겠어요!” 아빠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고는 위층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고 열쇠를 챙겨 도망치듯 밖으로 나갔다. 혹시라도 아빠가 잡을까 봐 걱정되었다.하
그동안의 나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과분하게만 느껴졌던 단어에 나도 모르게 가슴 한편이 아려왔다.나는 망부석이 된 것마냥 그 자리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의 시선은 어느새 창밖의 풍경에 못 박힌 듯 고정되었고 입에서는 그저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게 바로 배현우가 말하던 아직 완공되지 못한 집이구나.’ 눈 앞에 펼쳐진 웅장한 광경에 나는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배현우는 차에서 내려 얼마 안 되는 자신의 짐을 챙기고는 차 문을 열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멍하니 창밖만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나는 급히 정신을 차리고는 그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린 뒤 배현우는 성큼성큼 집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나는 그 뒤에서 부지런히 그의 뒤를 쫓았다.집안의 광경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이 호화로웠다. 지금 내가 천국에 온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집안을 들어서자 하인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오셨습니까, 회장님.”몇몇 하인들이 다급히 달려와 배현우의 손에 들려있던 짐을 넘겨받았다. 분위기가 이토록 화기애애한 것을 보아하니 이 집의 하인들은 모두 배현우에게 충성심이 상당히 강한 모양이었다.배현우의 방으로 돌아오자 그는 갑자기 문을 닫아 버리고는 나를 그의 품속에 가둬 조금 잠긴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건넸다. “나 별로 안 보고 싶었나 봐요?”배현우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애써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켜 보았지만 차마 그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할 수가 없어 애꿎은 바닥만 바라보며 어색하게 살짝 웃어 보였다. 사실 나는 조금 고지식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저번에 배현우가 나에게 불같이 화를 냈던 일이 여전히 마음속에서 풀리지 않은 채 묵혀버린 탓인지 무어라 입을 열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내가 계속하여 입을 꾹 다물고 있자 배현우는 그대로 내 몸에 기댄 채 뚫어져라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마치도 나를 꿰뚫어 보고 있듯이 날카
그날 밤, 나는 영식 씨와 가족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러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닌 배현우의 별장에 남기로 하였다. 오늘과도 같은 날은 절대 배현우 혼자 외로이 이 크나큰 별장에서 새해를 맞이하게 둘 수 없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배현우는 주절주절 열 살 전 부모님과 함께 보낸 행복한 시절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늘어놓았다. 하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의 얘기는 조금도 털어놓지 않았다. 나도 그 시절에 대해 더는 묻지 않았다. 분명 그 시절은 배현우에게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이제야 배현우가 왜 그리도 가족이라는 단어에 집착하는지, 콩이에게 왜 그리도 잘해주었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가 보여주었던 모습들을 따라 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배현우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으면서 나는 점점 이상한 낌새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동안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오늘에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바로 내가 많은 기억을 잃은 것 같다는 점이었다. 나의 첫 기억은 고등학교 3학년 시절에 머물러 있다. 그 후의 일들은 대부분 또렷이 기억이 나지만 이상하게도 그 전의 일들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시간이 흘렀다 하더라도 조금은 기억이 날 법도 한데 이상하리만치 내 머릿속에서 전부 사라졌다는 것이다. 나의 어린 시절, 옛날 부모님의 모습 등등 그 어떤 기억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한 이유에선지 나에게는 친구도 없었다.행복한 얼굴로 자신의 동년을 말하는 배현우의 모습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그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나에게만 모두가 가진 어린 시절의 기억이 없지? 혹시 사람들이 말하는 선택성 기억상실증 뭐 이런 건가? 풀리지 않는 의문들에 조금 답답해지기 시작했다.배현우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문득 임윤아에 관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턱 끝까지 차올랐던 의문을 끝내 도로 삼켜버렸다.우리는 서로에게 의지한 채 함께 새해의 첫날을 맞이했다.하지만 그때의 나는 미처 몰랐다. 그날, 호주의 본가에서 열렸어야 할
지금 이세림이 작정하고 나에게 시비를 걸려고 온 것이라면 나라고 하여 그녀의 함정을 역이용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이세림이 먼저 제 발로 찾아왔으니 내 쪽에서 또 다른 단서들을 꿰어내기 좋은 기회였다.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세림의 말을 맞춰주었다. “역시 세림 씨가 세심하네요.”“별말씀을요, 어쨌든 이건 현우 오빠 트라우마잖아요. 아무도 해결해줄 수 없는 일이예요, 그 누구도.”이세림은 힘을 실어 마지막 한 마디에 강조를 더하는 듯 했다. 그러고는 고소하다는 듯이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물론 이세림이 강조한 “그 누구도”에는 내가 포함되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필경 그날 밤 배현우는 실제로 나에게 불같이 화를 냈으니 말이다. 장담하건대 이는 분명 이세림이 원했던 결과일 것이다.“사실 현우 오빠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잖아요. 천우 그룹은 현우 오빠 아버지, 배천석 씨가 창립했으니 그럴 만도 하죠.” 이세림의 말속에는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이세림이 배씨 가문에서 발언권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배씨 가문은 조상님 때부터 전해져오던 사업이 있었나 봐요?” 이 화제는 확실히 나의 관심을 끌 만했다. 이토록 규모가 큰 천우 그룹이 기반이 다져져 있지 않을 리가 없었다.“원래 배씨 가문의 사업은 항상 어르신께서 맡아오셨어요. 어르신께서 환갑이 되시는 해가 되어서야 그 사업의 결정권이 아버님 손에 들어오셨죠. 아버님은 정말로 대단하신 분이예요. 사업을 손에 쥐시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사업의 규모가 엄청나게 무시무시하게 달라졌다고 들었으니 말이예요.”이세림은 잠깐 멈칫하는가 싶더니 곧이어 말을 이어갔다. “그 뒤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버님께서 그 사업을 어머님께 맡기시고는 혼자 또 천우 그룹들 창립하셨어요. 지아 씨, 천우 그룹이 왜 천우 그룹 인지 알아요?” 말을 마치고 이세림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나는 그저 머쓱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배천석, 고석우, 배현우잖아요!” 이세림은 말을
나의 갑작스러운 반응에 이세림은 깜짝 놀라더니 곧이어 이성을 되찾은 듯 다시금 차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이세림의 반응을 보아하니 임윤아의 죽음에 기필코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이세림은 곧바로 눈치를 채고는 말을 바꾸기 시작했다. “제 말은 현우 오빠는 자주권을 가지면 안 된다는 거죠. 아무리 현우 오빠 마음속에서 임윤아가 중요한 존재라고 해도 아무것도 바꿀 수는 없어요. 임윤아가 죽지 않았다고 해도 사업을 물려받을 수는 없었을 거고요.”“윤아 씨가 현우 씨 마음속에서 그토록 중요하니 세림 씨가 많이 서운하겠네요.”나는 일부러 한마디 더 거들었다. “어쨌든 세림 씨한테도 영향이 크잖아요.”이세림은 순간 표정이 살짝 굳는 듯 했지만 다시금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저야 딱히 신경 쓸 이유가 없죠. 임윤아 같은 존재가 백만 명 있다 해도 현우 오빠는 제 의지와도 상관없이 오직 저만 차지할 수 있거든요.”이세림은 말을 하며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나는 이세림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확실히 방대한 배씨 가문이 그녀의 뒤를 받쳐주고 있으니 이세림이 저렇게 설치고 다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그런데 임윤아는 어떻게 죽은 거예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슬쩍 질문을 던졌다. 그동안 이세림이 나에게 임윤아와 관련된 화제를 꺼내면 무작정 피하기만 했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저렇게도 계속하여 임윤아 얘기를 고집하는 걸 보면 나에게 무언가를 얘기하고 싶어 하는 것이 분명했다.그러자 나는 문득 이세림이 알고 있는 임윤아 얘기가 들어보고 싶어졌다. 아까 이세림이 실수로 흘려버린 정보를 들어보니 확실히 알려지지 못한 진실이 숨겨져 있는듯하다. 임윤아의 죽음은 분명 배씨 가문,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배유정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벼랑 끝에서 떨어져서 죽었어요.” 임윤아의 죽음을 말하는 이세림의 말속에서는 연민의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느껴볼 수가 없었다. “후에 어머니께서 현우 오빠를 데리고 가서 시체를 확인시키기
이동철에 관한 자료를 봤을 때부터 난 그의 능력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그는 분명특훈을 거쳐온 인재이다. 하지만 당시 배현우가 나에게 절대 그 어디에도 이동철에 관한 정보를 누설해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현재 외부인들에게 비춰진 이동철은 그저 서울 일반가정 출신의 명문대생 그뿐이었다.하지만 이동철은 결국 배현우가 나에게 파견해 준 사람이기에 이동철에게 배씨 가문을 조사하는 일을 맡긴다는 게 조금 찝찝하게 느껴졌기에 더욱 망설여 졌던 것이다.새해 첫날부터 설날이 오기까지 이 한 달 동안, 대부분의 회사는 일반적으로 새로운 한 해의 회사의 업무계획이나 프로젝트에 대한 기획을 세울 것이다. 그러나 천우 그룹이 우리 회사에게 남긴 서프라이즈로 인해 이 모든 계획이 물거품으로 날아가 버렸다.원래 계획대로는 설 연휴가 끝나고 시작될 프로젝트를 갑작스럽게 앞당겨 당장 시작해 달라는 것도 모자라 작업 기간마저 줄이도록 요구해왔기 때문이다.게다가 중간에는 설 연휴가 끼어 있는지라 최소 20일은 작업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우 그룹은 기꺼이 우리들의 숨을 조여왔다.변경이유는 천우 그룹 측에서 이미 품절된 상황에 업주가 빠른 시일내로 물품을 요구해왔다는 것이다.그러나 지금 형원 그룹 쪽 공사도 아직 마무리되지 못한 상황에 이번 일로 인해 형원 그룹 프로젝트를 급히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급한 마음에 배현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지금 외국으로 출장을 간 상태인지라 그에게 부탁하기에는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아 결국 배현우와의 통화는 별 소득 없이 끊겼다.그 자리로 조 대표님을 찾아뵈었지만 그 역시 난감한 기색을 보이고는 더 이상의 말들은 삼갈 뿐이었다. 조 대표님한테서 별다른 말은 듣지 못했지만 난 더 이상의 여지는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장영식이 머리를 쥐어짜내며 어떻게든 다른 방안을 연구하고 이동철이 발이 빠져라 외부의 지원을 구하러 돌아다녔지만 모두 별다른 소득이 없었고 우리는 그야말로 궁지에 빠져버렸다. 애석하게도 시간은 계속하여
그동안 이청원과 나는 그렇게 왕래가 깊었던 사이도 아닐뿐더러 겨우 이 정도 이유로 나를 이렇게까지 도울 리가 없었다.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이 들었다.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별다른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우리 회사는 그저 이름도 없는 중소기업일 뿐인지라 이용할 가치도 별로 크지 않았다.이청원은 나의 반응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제 말이 좀 많이 의심스럽죠? 너무 깊게 생각은 하지 말아요. 그저 전에 한 대표님께서 도움을 주셨으니 그에 따른 보답이라 여기시면 됩니다. 전 신세 지는 건 딱 질색이거든요. 특히 여성분에게 신세 지는 건 더 예의가 아니지요.”“일 앞에서 성별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를 여자로만 보지는 말아주시죠.” 나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맞받아쳤다.이청원은 또다시 한번 통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여자로만 보지 말라니요. 누가 한 대표님을 완전히 성별을 떠나 바라볼 수 있냔 말입니까.” 그러고는 곧이어 웃음을 멈추고는 말을 이었다. “깊이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이정도야 그때 한 대표님께서 도와주신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게다가 임금은 한 대표님께서 부담하시는 건데 이렇게까지 고마워하시면 제가 다 송구스럽네요. 그리고 이 작은 판에서 다 서로 돕고 사는 거죠.”“알겠습니다. 다시 한번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대표님. 앞으로 우리 회사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나도 더 이상의 추측은 거둬들이기로 했다. 일단 눈앞에 불부터 끄는 게 중요하기에 그 뒤의 일들은 훗날에 다시 생각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이청원에 비하면 난 잃을 것도 없는 신세이기에 더는 두려울 것도 없었다.게다가 이청원 측에서 먼저 손을 내밀었는데 그 손을 잡지는 못할망정 그 손을 그대로 내쳐버린다면 정말 죽음을 자초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프로젝트에 관해 조금 더 얘기를 나눈 뒤 내가 먼저 약속장소를 빠져나왔다. 이청원과는 그동안 깊은 왕래가 없었기에 더 나눌 이야기도 없었다.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