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는 여이현이 가장 아끼던 사람이었다. 만약 여이현이 살아 있었다면 온지유가 조금이라도 억울한 일을 겪는 걸 절대 두고 보지 않았을 것이다.지금 배진호가 온지유의 곁에 서 있는 이유는 단지 여이현의 뜻을 지키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그는 여이현을 대신해 온지유를 보호해야 했고 동시에 자신의 결백도 지켜야 했다.배진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대표님께서는 생전에 이미 모든 재산을 온지유 씨에게 양도하셨습니다. 여기가 그 양도 날짜입니다. 당시 온지유 씨는 출산 중이었지만 아이를 잃고 말았습니다. 온지유 씨는 대표님 곁에 수년을 함께하며 일해 온 사람입니다. 이 정도는 충분히 받을 만한 권리가 있습니다.”“지유야, 나 찾았니?”배진호가 말을 마친 순간 온지유가 대답할 틈도 없이 약간 놀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멀리서 여희영이 보랏빛 원피스를 입고 짙은 와인색 단발머리를 단정히 한 채 우아하고도 매혹적인 모습으로 다가왔다.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여희영에게 다가가 인사했다.“고모님, 와주셨군요.”그녀는 먼저 인사를 한 뒤 다시 주주들을 향해 말했다.“여진 그룹의 재산을 제가 상속받는 게 여러분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셨죠?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재산 전부를 여씨 가문 사람에게 넘기겠습니다. 여러분이든, 여씨 가문의 다른 분들이든, 서로 분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알아서 해결하세요.”온지유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표정 또한 흔들림이 없었다.“지유야,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니?”여희영은 완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배진호에게서 온지유가 자신을 찾는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만 해도 다소 의아했지만 여진 그룹까지 오게 된 이유가 재산을 전부 자신에게 넘기기 위함이라니 상상조차 못 했다.이 재산은 여이현이 온지유에게 남긴 것인데.누구에게 얼마나 줄지는 여이현의 자유였고 온지유가 여이현 곁에서 보낸 세월을 생각하면 그녀가 당연히 받을 자격이 있었다.여진숙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여희영과는 오래전부터 사이가 나빠져 연락도 하
여진숙은 날카로운 눈빛을 내비치며 얼굴이 잔뜩 어두워졌다.그녀의 태도는 여희영과 한바탕 싸울 기세였다.하지만 여희영은 여진숙의 그런 모습에 전혀 굽히지 않았다.“외부인에게 넘긴다고요? 내가 지금 외부인인가요?”온지유는 재산을 여희영에게 넘겼음에도 여진숙이 이토록 큰 반응을 보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고모님, 제가 고모님을 부른 건 다른 사람들과 다투라고 한 게 아니에요. 그럴 생각도 없으니 화내지 마세요. 이 재산을 고모님께 드릴지 여부는 제 권한이에요.”온지유는 배진호에게 눈짓을 보냈고 배진호는 그녀의 뜻에 따라 준비된 서류 원본을 여희영에게 건넸다.여희영은 살짝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 없이 서류를 건네받았다.온지유가 먼저 입을 열었다.“저는 제 할 일이 있어요. 회사 경영에는 큰 관심도 없고요. 고모님, 이현 씨는 이 회사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여씨 가문을 지키길 바랐어요. 고모님이 가장 적합한 분이세요.”“배 비서님, 휴가 관련해서는 고모님께 상의하세요.”온지유는 몹시 지쳐 보였다.그녀는 이미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결정했다. 이곳을 떠나는 이유는 이 도시가 여이현과의 추억이 가득한 곳이었기 때문이다.특히 이 회사는 더욱 그랬다.온지유는 이 회사를 지키려다 오히려 추억 속에 갇힐까 봐 두려웠다.온지유가 당부를 마치고 뒤돌아섰다.홍혜주가 그녀 곁을 지키고 있었기에 배진호는 마음이 놓였다.이제 모든 서류가 여희영의 손에 있었고 배진호는 여희영이 모든 절차를 완료할 수 있도록 도와야 했다.여희영은 여씨 가문 사람이었기에 다른 주주들도 더 이상 뭐라 할 수 없었다.하지만 여진숙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그녀는 성난 얼굴로 여희영 앞에 서서 말했다.“희영 씨, 왜 굳이 온지유 편을 들겠다는 거죠? 당신 속셈 모를 줄 알아요? 여씨 가문의 모든 권력을 차지하려는 거잖아. 온지유랑 짜고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말해봐요. 대체 그 여자가 무슨 조건을 걸었길래 당신이 이렇게 돕는 거야?”여진숙의 분노에 차 있는 모습에도 여희영
여희영은 여진숙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분명 여희영은 키가 크지 않았지만 여진숙 앞에 서자 마치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여진숙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노승아와의 관계를 여씨 가문 모두가 알고 있었다니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는 웃음거리에 불과했던 셈이다.그러니 여호산이 그녀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온지유를 여이현의 배우자로 선택한 것도 당연했고 여재호가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도 이해가 갔다.여희영이 그녀를 항상 경멸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이유도 온지유가 그런 태도를 보이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하하하.”여진숙은 미친 듯이 웃어댔다. 그 모습은 이제 더는 어느 귀부인다운 모습이라고 할 수 없었다.여희영은 더는 그녀를 볼 가치도 없다는 듯 돌아서서 회의실을 나섰다.그녀는 온지유를 찾았지만 이미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온지유는 이미 여진 그룹을 떠나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홍혜주가 그녀의 곁에서 혹여 마음의 상처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하며 따라가고 있었다.차에 앉아 있는 온지유에게 여희영의 전화가 걸려왔다.“고모님.”온지유는 전화를 받았다.여희영은 그녀를 다독이며 말했다.“네가 힘들어하는 거 알아.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아무리 슬프고 괴로워도 하루하루 살아가야 해. 네가 내게 넘겨준 재산 난 서명하지 않을 거야. 여전히 네 이름으로 남겨둘 테니 마음을 추스른 후에 네가 여진 그룹을 다시 맡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이현이가 내 꿈에라도 찾아오면 내가 뭐라 하겠어?”온지유의 마음이 순간 무거워졌다.꿈에 찾아오다니...여이현은 이제 세상을 떠났고, 주변 사람들은 점차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녀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그렇다면 시간이 흐르고 기억이 흐릿해질 때 그녀도 여이현을 잊게 되는 걸까?안 돼.절대 잊을 수 없다.여이현을 잊어서는 안 된다.온지유는 목이 꽉 메어와 겨우 말을 내뱉었다.“회사는 고모님이 맡아 주세요. 저에겐 중요한 일이 있어요. 이현 씨가 생전에 위화부대에 있
온지유의 말에 온경준과 정미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한 번 나갔다 오더니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지? 설마?’두 사람의 마음속에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그러나 목에 뭔가 걸린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검은 눈동자에는 이미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문제의 본질을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지 막막했다.결국 온지유가 먼저 입을 열었다.“아버지, 어머니, 저는 두 분의 친딸이 아니지만 두 분께서는 저를 친딸처럼 키워주셨어요.”말을 마치자마자 온지유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온경준과 정미리는 당장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하지만 온지유는 이미 다시 바닥에 머리를 숙였다.온지유는 그들에게 여섯 번 절을 올렸다.온지유의 눈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두 분께서 저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는 제가 평생 갚을 수 없을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온지유로서 살아갈 거고 두 분께서 저에게 주신 사랑은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두 분은 영원히 저의 부모님이에요. 이건 제 모든 저축입니다.”온지유는 그동안 두 분의 계좌에 생활비를 꾸준히 송금해 왔지만 부모님은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두었다.그녀가 집에 올 때마다 필요한 걸 사주고 용돈까지 챙겨주며 그녀가 잘 지내고 있는지 항상 걱정했다.그러나 이번에 온지유는 모든 돈을 한 번에 드리기로 결심했다.혹시 전쟁터에서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앞으로 부모님께 돈을 드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지유야! 나도 너희 아빠도 돈이 있어. 이걸 왜 다 우리한테 주는 거야?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니? 제발 어리석은 일은 하지 마!”정미리는 당황한 나머지 온지유의 어깨를 꼭 잡고 눈물을 흘리며 목이 메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온지유가 마치 유언을 남기듯 말하는 것이 그녀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여이현의 죽음이 큰 충격을 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인생을 멈출 순 없다고 생각했다.살아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정미리는 애써 그녀를
온지유가 결혼을 원치 않는다면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다. 하지만 정미리는 무엇보다 온지유가 자신을 잘 돌보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다.나중에 혼자 지내게 되더라도 자식이 필요하면 입양을 하면 되고 원치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온지유는 그런 부모님의 마음에 깊이 감동했다. 비록 혈연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부모님이었고 온지유에게 진정한 가족을 만들어 주었다.그녀가 인생의 가장 어두운 시기를 겪을 때 부모님은 그녀의 손을 잡고 어둠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빛으로 이끌어 주었다.온지유는 눈가가 시큰해졌지만 부모님께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버지, 어머니, 저 결심했어요. 이현 씨는 자신의 직업을 위해 생을 마감했어요. 이현 씨가 마치지 못한 일들을 제가 다른 방식으로 이어가고 싶어요. 만약 제가 그곳에서 죽게 된다면 그것 또한 나라를 위해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여하는 것이니 후회는 없을 거예요.”온지유는 이미 결심을 굳혔다. 그녀는 돌아온 날 밤 컴퓨터로 필요한 서류를 제출했고 기자로 일했던 경험 덕분에 답신도 곧바로 받았다.온지유에게는 떠나기 전까지 남은 3일 동안 주변 사람들을 정리하고 인사를 나눌 시간이 있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정리한 후 S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려 했다.온경준은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들었고 정미리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마지막에 온경준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새는 언젠가 둥지를 떠나 날아가겠지. 지유야, 네가 결정을 내렸으니 너의 일을 잘 해내. 다만 시간이 되면 꼭 아빠랑 엄마에게 전화해 줘. 그렇지 않으면 네 엄마는 네 걱정에 밤잠을 설치게 될 거야.”온지유가 떠나 있던 동안 정미리는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그녀가 아이를 낳을 때도 곁에 있어 주지 못했기에 평생의 한으로 남았다.그들의 소중한 온지유는 정말 가여웠다. 아이도 지키지 못했고 남편도 떠나보냈으며 이제 자신의 출생 비밀까지 알게 되었다. 심지어 그녀는 전쟁 지역으로 떠나려 하고 있었다.온경준은 생각할수록 감정을 억
온지유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싫어요. 그곳에 가면 돈 쓸 시간도 없을 거예요.”온경준은 다소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지유야, 너 아까 우리를 영원히 부모로 여긴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다면 우린 가족이야. 부모가 자식에게 돈을 주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 게다가 그곳에 가면 어쩔 수 없이 돈 쓸 일이 생길 거야. 가난하고 다친 아이들이나 노인들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는 없잖니?”온경준의 낮고 잠긴 목소리에는 방금까지의 비통한 감정이 사라지고 대신 차분하면서도 깊은 이해가 담겨 있었다.온지유는 그들이 이런 부분까지 생각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정미리도 옆에서 거들었다.“그래, 받아. 이건 네 아빠와 내 작은 마음이야. 네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면 하늘도 너를 지켜줄 거야. 우리는 네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라.”“... 알겠어요.”결국 온지유는 부모님이 주신 카드를 받아들었다.사실 처음에는 부모님께 숨기려고도 했었지만 혹시라도 그들이 걱정하다가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결국 마지막까지 온지유를 이해해 준 건 부모님이었다. 이 돈을 받지 않으면 부모님도 마음이 편치 않으리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그날 식사는 온화하고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온경준과 정미리는 계속해서 온지유의 접시에 반찬을 올려주며 말했다.“그곳에 가면 엄마 아빠한테 사진 많이 찍어서 보내고 시간 되면 영상 통화도 자주 해. 돌아오고 싶을 땐 언제든지 돌아와. 속상한 일이 있으면 바로 말하고, 알았지?”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들은 비록 법로처럼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지만 온지유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부모였다.온지유는 전쟁 지역에 종군 기자로 가게 되었으니 챙겨갈 물건이 많지 않았다. 부모님은 필요한 것들을 충분히 당부하고 나서야 그녀를 배웅했다.온경준과 정미리는 그녀가 집을 떠나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차에 오른 온지유는 곁에 있던 홍혜주에게
호텔 바닥은 아수라장이었다.잠에서 깬 지유는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지유는 미간을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커다란 몸집을 가진 남자가 옆에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지나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은 조각과도 같았고 눈매도 깊고 진했다.아직 깊은 잠이 들어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지유가 몸을 일으키자 이불이 그녀의 몸에서 미끄러져 내렸고 뽀얗고 매혹적인 두 어깨에 어젯밤 남긴 흔적이 보였다.지유가 앉았던 자리에 선명한 핏자국이 보였다.시간을 보니 어느새 출근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유는 바닥에 널브러진 출근룩을 다시 집어 들어 얼른 갈아입었다.스타킹은 이미 남자에 의해 찢겨 있었다.지유는 스타킹을 돌돌 말아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하이힐을 신었다.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깔끔하게 차려입은 지유는 어느새 워커홀릭 비서로 완전히 돌아왔고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들어온 사람은 청순한 미녀였다.지유가 부른 사람이었다.이현의 취향이 이런 여자였다.지유가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침대에 누워서 대표님 깨나길 기다리면 돼요. 다른 건 한마디도 하지 마요.”지유는 고개를 돌려 아직 단잠에 빠진 남자를 힐끔 쳐다봤다. 억울한 마음에 코끝이 찡해졌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방에서 나왔다.지유는 두 사람이 어젯밤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이현이 아는 게 싫었다.그들 사이에 계약에 의하면 아무도 모르게 3년간 결혼을 유지하면 바로 이혼할 수 있었다.이 기간에 선을 넘는 행동은 그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지유는 7년째 이현의 비서로, 3년째 이현의 와이프로 있었다.졸업한 그날부터 이현의 곁을 한시도 떠난 적이 없었다.같은 날, 이현은 지유에게 두 사람은 그저 상사와 부하의 관계일 뿐 이 관계를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지유는 복도 창가에 서서 어제 일을 떠올렸다. 이현은 그녀를 안고 침대에 누워 ‘승아’라는 이름을 연신 불러댔다.지유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승아는 이현의 첫사랑이었다.이현은 지유를 승
이에 지유가 화들짝 놀라며 하마터면 발을 삐끗할 뻔했다.중심을 잘 잡지 못한 지유는 그렇게 이현의 몸에 기댔다.이현은 지유의 몸이 앞으로 쏠리자 손으로 지유의 허리를 잡아줬다.뜨거운 체온이 전해지자 지유는 어젯밤 그가 저돌적으로 그녀를 덮치던 화면이 떠올랐다.지유는 가까스로 진정하고 고개를 들어 이현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 봤다.이현의 눈동자는 매우 진지했고 그 속엔 질문과 의혹도 담겨 있었다. 눈빛은 지유를 뚫어버릴 것만 같았다.지유는 심장이 벌렁거렸다.이현과 더는 눈을 마주칠 엄두가 나지 않아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아까 나간 그 여자라고 생각했을 때도 이현은 불같이 화를 냈는데 여기서 만약 지유가 자신이었음을 인정한다면 후과가 그리 좋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아니라고 하기엔 억울했다.만약 어젯밤 잠자리를 가진 사람이 지유라는 걸 이현이 알게 된다면 결혼 생활을 조금이라도 더 이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그래도 지유는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게 겁나 고개를 숙인 채로 물어봤다.“그건 왜 묻는 거예요?”지유는 사실 남몰래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이현이 코웃음을 치더니 이렇게 말했다.“너는 그런 용기가 없을 것 같아서.”지유는 멈칫하더니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어쩌면 이현은 어젯밤 잠자리를 가진 사람이 지유가 아니길 더 바랄지도 모른다. 계약 결혼일뿐이니 말이다.게다가 며칠만 더 지나면 계약도 끝나간다순간 이현이 지유의 손을 힘껏 낚아챘다.지유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이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심사하듯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지유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발버둥 치며 손을 빼려 했지만 이현이 지유를 전신 거울 앞으로 바짝 몰아갔다.“뭐 하는 거예요?”지유는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긴장과 두려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너 정말 사무실에서 잠들었어?”지유는 칠흑같이 어두운 이현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혹시나 들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3년 전, 결혼한 첫날 밤, 지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