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아이의 머리카락은 들쭉날쭉하게 자라 있었다. 전쟁만 나지 않았고 부모와 떨어지지만 않았다면 그는 지금쯤 아주 행복한 아이였을 것이다.온지유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넌 이름이 뭐야? 대사관에 남기 싫었던 건 혹시 부모님 때문이야?”남자아이는 고개를 떨군 채 조용히 말했다.“부모님을 본 적이 없어요...”아이의 낮고 잠긴 목소리에는 서글픔이 가득 배어 있었다.온지유는 지난 5년 동안 S국에 머물며 작은 내란에서 대규모 전쟁에 이르기까지 모든 상황을 지켜봐 왔다. 이 아이가 부모를 본 적이 없다는 것은 아마도 그가 아주 어릴 때부터 부모가 곁에 없었다는 의미였다.“그럼... 이름이 없는 거야?”온지유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아이에게 물을 한 잔 따라주고 그의 눈높이에 맞춰 다시 앞에 쪼그리고 앉아 말을 걸었다.아이는 물을 받지도 않고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마치 잘못을 저지르고 속상해하는 아이 같았다.온지유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 아이 역시 상처가 깊은 아이였다.하지만 전쟁 속에서 자란 아이 중에 마음이 건강한 아이가 몇이나 있을까?그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과 노인을 대상으로 한 특집을 만들어 각국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목소리를 내면 휴전의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온지유는 아이의 손을 잡고 말했다.“이름이 없다면 내가 이름을 지어줄까?”처음에는 아이가 입고 있는 흰 셔츠와 귀여운 외모를 보고 화국의 부유한 집 아이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아이의 옷은 어쩌면 쓰레기 더미에서 건진 것처럼 보였다.부모를 본 적이 없다는 걸 보니 아주 어릴 때부터 부모와 헤어졌거나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일지도 몰랐다.“제 이름은 별이예요.”“별이?”아이가 천천히 대답했고 온지유는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너의 부모님도 네가 별처럼 빛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을 거야. 당분간은 내 곁에 머물다가 대사관으로 데려다줄게. 하지만
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구마를 받았다. 별이는 천천히 한입 베어 물었고 온지유가 물을 한 잔 떠오면서 말했다.“부족하면 더 줄 테니까 많이 먹어.”별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온지유는 피식 웃었다. 별이는 말하기 싫어하는 아이였다. 별이를 계속 지켜보면 부담스러워할까 봐 천막 안의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집합을 뜻하는 호각 소리가 울려 퍼졌다.깜짝 놀란 온지유는 군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 틀림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때, 온지유를 더 놀라게 했던 것은 고작 5살 된 아이가 고구마를 내려놓고 바른 자세로 서서 경례 자세를 취한 것이었다. 온지유는 군의 규칙에 익숙해진 어린아이가 군인의 아이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별이가 만약 열사의 유자녀라면 고향이 아닌 이곳에서 지내게 할 수 없었다.“별이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별이는 군인도 아닌데 어떻게 경례하는 것을 배운 거야? 누가 가르쳐주었는지 알려줄 수 있어?”온지유는 별이 앞에 쭈그려 앉아 조심스럽게 물었다. 별이는 온지유를 빤히 쳐다보더니 쭈뼛거리다가 천천히 대답했다.“할아버지예요.”별이의 말에 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고 할아버지를 잃고 나서 먼지투성이가 된 채로 밖에서 떠돌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잠깐 여기서 쉬고 있어. 나갔다가 곧 돌아올 테니까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말고 이곳에서 기다려야 해.”온지유는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고 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온지유는 곧바로 대사관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대사관의 담당자한테 오늘 알게 된 것을 말했다.“저한테 데려가라고 했던 아이한테 물었더니 이름이 별이래요. 부모님을 본 적이 없다고 하는데 방금 집합 호각 소리를 들었을 때 군인처럼 바른 자세로 서서 경례하더라고요. 몸에 밴 것처럼 호각 소리를 듣자마자 경례했고 할아버지가 가르쳐준 거래요. 군인의 아이라면 제대로 조사해서 아이가 좋은 곳에서 지낼 수 있게 해줄 수 있잖아요.”대사관에서 별이가 군인의 아이인지 조사하면 금방 결과
온지유는 가난해서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도와줬고 음식과 생활용품을 전달했다. 온지유가 다른 사람을 돕기 좋아하는 것은 부대에 있는 모두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별이는 온지유의 손을 꼭 잡았고 긴장했는지 작은 손에 땀이 났다.“별이야, 옷이 마음에 들어? 이것도 한 번 봐봐.”온지유는 새로 산 옷을 두 벌 꺼내서 보여주었다. 전쟁 때문에 하얀 옷을 입으면 쉽게 더러워졌기에 여러 색깔이 섞인 옷을 사주었다. 시장이 멀어서 더 많은 것을 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며칠 후에 별이를 대사관에 데려다주고 별이의 신분이 밝혀지면 그때 별이에게 다른 것을 선물하겠다고 다짐했다.별이는 붉어진 두 눈으로 온지유를 바라보았고 옷에는 관심이 없었다. 온지유는 별이를 꼭 안아주면서 다독였다.“별이야, 이곳은 우리 화국 군인들이 지내는 곳이라 안전해. 다른 나라 군인처럼 너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거야. 내가 곁에 있어 줄 테니까 두려워하지 마. 자, 새 옷을 한 번 입어볼까?”온지유의 말에 별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온지유는 별이를 안아 들어서 침대 위에 올려놓고 말했다.“앞으로는 천막 앞에서 날 기다리지 마. 천막을 나오면 위험하니까 무슨 소리가 나면 침대거나 책상 아래에 숨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나오면 안 돼. 알겠지?”화국은 백 년 전처럼 나약하지 않았고 강해진 군사력으로 다른 나라와 겨룰 수 있게 되었지만 다른 나라들이 힘을 모아 화국을 상대한다면 형세가 기울게 될 것이다.욕심으로 가득 찬 다른 나라들은 언제든지 화국을 공격할 수 있었고 습격을 받으면 별이를 지킬 수 없었기에 어디에 숨어야 할지 알려주어야 했다. 별이는 온지유의 손을 꽉 붙잡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별이는 전쟁이 일어나는 것보다 온지유를 못 보게 되는 것이 더 두려웠다. 별이는 말수가 적었고 다른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기 싫어했지만 어쩐지 온지유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해졌다. 온지유의 품에 안겨서 온지유의 심장이 두근대는 소리를 들으면
“온 기자님.”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온지유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군복을 입고 있는 부대의 군인이 천막 앞에 서 있었다. 온지유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무슨 일 있어요?”“Y 국에서 물자를 지원했는데 온 기자님이 직접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알겠어요.”5년 동안 온지유가 어디에 있든 Y 국에서는 물자를 지원했고 신무열과 법로 대신 다른 사람이 물자를 가져왔다. 그리고 매달 계좌에 거액의 돈이 들어왔다. Y 국에서 지원해 준 물자로 가난한 백성을 살릴 수 있었고 군인에게 더 좋은 음식을 대접할 수 있었기에 온지유는 거절하지 않았다. 게다가 신무열과 법로를 만나지 않아도 되기에 큰 부담이 없었다. 온지유는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말했다.“아줌마가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 줘.”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온지유는 말하려고 하지 않는 별이를 보면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만약 대사관에서 이 아이를 온지유에게 맡긴다면 인명진을 불러서 별이와 만나게 할 생각이었다. 어린아이가 말하지 않는 것은 자폐증 증상 중 하나일 수도 있었다. 자폐증이 맞다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게 해주고 싶었다.온지유는 군인과 함께 물자를 받으러 갔고 물자 리스트에 사인하려고 했다.“지유야.”갑자기 들려온 부드러운 목소리에 온지유는 고개를 번뜩 들었다. 눈앞에 서 있는 남자는 하얀 셔츠를 입고 미소를 지은 채 온지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5년 전처럼 여전히 우아하고 다정한 신무열이었다. 신무열이 Y 국을 통치하고 있었기에 내부의 전란을 다스리고 나라를 통일시켰다. 그러면서 화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오면서 물자를 지원했다. 온지유는 다 알고 있었지만 신무열에게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런데 신무열이 직접 물자를 가져온 것을 봐서는 무슨 일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신무열이 입을 열기도 전에 온지유가 먼저 물었다.“무슨 일로 오셨어요?”온지유는 물자 리스트에 사인하고는 같이 온 군인에게 전하면서 말했다.“먼저 가서 체크하세요.
“너도 종군 기자를 해서 알고 있겠지만 노석명은 죽지 않았어. 그 욕심 가득한 놈이 아직 살아있단 말이야. 그래서 너의 도움이 필요해.”신무열은 심호흡하고는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온지유는 멈칫하더니 물었다.“내가 뭘 도와주면 되나요?”신무열이 직접 물자를 가지고 찾아왔으니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주어야 했다.“노승아가 신분을 위장해서 나를 찾아왔잖아. 그것 때문에 노석명이 하마터면 Y 국의 통치권을 손에 넣을 뻔했어. 네가 Y 국에 오면 노석명도 소식을 듣고 다시 찾아올 거야.”신무열은 말하면서 온지유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온지유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듣고 있다가 생각에 잠겼다. 신무열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온지유를 보면서 거절당할 것이라고 여겼지만 온지유는 흔쾌히 동의했다.“그래요. 무열 씨랑 같이 갈게요.”온지유와 여이현이 Y 국에 있을 때, 온지유가 노승아한테 잡혀갔을 때 신무열이 나서서 온지유를 보호해 주었다. 그래서 신무열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마음먹은 것이다.“오늘 같이 가자.”신무열이 다급히 말했다.“며칠 기다려주면 안 돼요?”온지유는 곧바로 같이 떠날 수 있었지만 별이를 곁에 두고 갑자기 떠날 수 없었다. 신무열은 육감적으로 온지유한테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신무열이 입술을 깨물더니 한참 후에야 물었다.“무슨 일 있어?”신무열은 온지유의 발목을 잡는 사람은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이때 온지유가 입을 열었다.“대사관에서 맡긴 아이가 있는데, 세 날 정도 돌봐줘야 해요.”온지유가 솔직하게 말하자 신무열은 깜짝 놀랐다. 온지유는 5년 동안 종군 기자로 활약했을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와 노인을 도와주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래서 사람들이 온지유를 보살이라고 불렀다.“그럼 세 날 뒤에 데리러 올게.”“알겠어요.”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 날 동안 온지유는 기사를 쓰면서 시간을 보냈다. 별이는 곁에서 울지도 않고 징징대지도 않았다. 별이가 너무 조용해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군의관은 별이의 몸을 검사하고 응급조치를 취했다. 그러고는 온지유한테 알려주었다.“천식이라 항상 약을 가지고 다녀야 합니다.”천식이라는 말을 들은 온지유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 병은 유전으로 생길 수도 있지만 후천적으로도 걸릴 수 있는 병이었다. 항상 약을 가지고 다니지 않으면 발작을 일으킨 뒤에 즉사할 수도 있었다.만약 별이가 온지유를 만나지 못해서 부대에서 함께 지내지 않았다면 발작을 일으켜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조용히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었다. 별이는 의식을 잃으면서도 온지유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온지유는 별이가 힘겹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별이는 분명 대사관에 가지 않고 온지유와 함께 있고 싶다고 말했었다. 온지유가 유일하게 별이에게 따뜻한 품을 내어준 사람이라서 그랬을 것이다. 혹은...“켁!”기침 소리에 정신이 든 온지유는 별이가 깨어난 것을 보고 침대맡으로 다가갔다. 별이는 슬픈 두 눈으로 온지유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온지유와 떨어지기 싫고 대사관에 가기 싫다는 뜻이었다.이 아이에게는 온지유가 필요했다. 방심했다가는 아이가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온지유는 신무열과 함께 Y 국으로 가기로 했기에 다녀온 후에 별이와 함께 지내면서 인명진에게 치료를 부탁하려고 했다. 온지유는 별이의 작은 손을 꼭 잡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네가 아줌마 곁에 있고 싶다면 그렇게 해. 네가 건강해질 때까지 함께 있어 줄 테니까 다 나으면 네 가족을 찾으러 가자.”별이가 고개를 또 흔들자 온지유는 어린아이가 가족을 잃은 줄 알고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별이는 그저 온지유와 함께 있고 싶어서 고개를 흔들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신무열이 미간을 찌푸렸다. 온지유가 천막을 빠져나오자 신무열이 다가가 말했다.“오늘 밤에 나랑 같이 가자. 만약 이 아이가 걱정된다면 데리고 가면 돼.”신무열은 입술을 깨물더니 큰 결심을 내렸다. 온지유는 신무열이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신무열은 온지유를 위해
모든 것이 별이와의 만남은 의도된 것이 아니라 우연임을 증명하고 있었다.“알겠어요. 오늘 밤에 떠나는 걸로 하죠.”온지유는 가져갈 물건이 별로 없었고 별이의 옷 두 벌을 챙기면 작은 가방 하나로 충분했다. 온지유는 떠나기 전에 신무열한테 말했다.“이곳에서 해결하지 못한 일이 있으니 Y 국에 오래 머무르진 못할 거예요. 제일 길어서 3일 있다가 다시 돌아와야 하거든요.”3일은 가는 시간을 제외한 시간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무열은 아쉬워했다. 하지만 온지유가 신무열과 함께 Y 국으로 가겠다고 했으니 그걸로 만족했다.신무열은 온지유한테 찰싹 붙어서 조용히 앉아 있는 별이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별이의 옆모습이 온지유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니야. 지유와 여이현의 아이가 죽은 지 5년이나 지났어. 살아있다고 해도 지유가 종군 기자를 5년 동안 하면서 몰랐을 리 없을 거고 옆모습이 비슷한 건 그저 우연일 뿐이야.’펑!갑작스러운 굉음과 함께 요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도련님, 습격을 받았어요!”그러자 신무열이 차분하게 지시했다.“각자 제자리로 가라고 전해.”온지유는 신무열 눈빛에 살기가 맴돌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신무열은 총을 들고 차에서 내렸고 다른 사람과 함께 사격했다. 온지유와 별이는 차에 남아서 싸움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온지유는 별이가 두려워할까 봐 품에 꼭 끌어안았다.예상과 달리 별이는 무서워하지 않았고 가만히 품에 안겨 있었다. 밖은 여전히 소란스러웠고 오늘 이 자리에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차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신무열을 돕는 일이었다. 얼마 후, 주위가 잠잠해졌다.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자 신무열과 요한이 걱정된 온지유는 별이한테 말했다.“의자 아래에 숨어있어. 절대 차 밖으로 나오면 안 돼. 금방 갔다 올 테니까 잘 숨어 있어.”혹시 두 사람이 총에 맞았을까 봐 걱정된 온지유는 재빨리 차에서 내렸다. 비록 법로를 싫어했지만 신무열은 늘 온지유에게 잘해주었고 5년 동안 지원해 주었
온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차에 올랐지만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인해 신무열과 요한은 여전히 주위를 경계했다. 온지유도 별이를 안고 창밖을 유심히 내다보았지만 조용히 차량을 따라오는 사람들이 온지유가 Y 국에 도착할 때까지 보호해 주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법로는 온지유가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는 가장 크고 예쁜 집을 마련해 주었다. 온지유는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과한 장식이 눈에 거슬려서 다시 나왔다.“다른 집으로 안내해 주세요.”온지유는 법로와 마주치지 않았지만 법로가 준비한 집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법로가 어떻게든 온지유와 다시 가까워지고 싶어 했지만, 이런 의미 없는 선심은 오히려 온지유의 반감을 샀다. 온지유가 Y 국에서 하마터면 살해당할 뻔한 기억이 계속 떠올랐고 인체 실험의 강렬한 트라우마는 여전히 온지유의 머릿속에 남아있었다.Y 국 사람들은 아주 잔인했고 중독 때문에 목숨을 잃은 여이현을 생각하면 절대 법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온지유의 친아빠인 법로와 여이현은 늘 대립 면에 서서 싸웠다. 그래서 온지유는 5년 동안 여이현의 죽음이 법로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조사했다.“그럼 저쪽 집에서 지내.”온지유가 고집을 피우자 신무열도 어쩔 수 없었다. 온지유는 다른 집 안으로 들어갔고 신무열은 업무를 보러 자리를 비웠다. 요한이 생활용품을 온지유에게 전해준 뒤, 볼 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웠고 집에는 온지유와 별이만 남아있었다.환경이 바뀌어서 무서울 법도 한데 별이는 그저 조용하게 온지유 곁에 앉아 있었다. 별이는 낯선 곳에 와서도 잘 적응했다.“당장 꺼져!”온지유가 별이와 얘기를 나누려는데 갑자기 한 여자가 소리를 지르면서 집으로 들어왔다. 그 여자는 한눈에 보아도 Y 국 사람이었고 20살 정도 되어 보였다. 온지유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에요?”온지유는 싸우기 싫었지만 그 여자는 제대로 설명하지도 않고 냅다 소리부터 질렀다.“지금 당장 꺼지지 않으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온지유
“부사장님, 왜 안 들어가세요?”권다솔은 깜짝 놀랐다. 언제 갑자기 나타났는지 모를 직원을 바라보며 그녀는 억지 미소를 지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참, 이거 대신 전해줘요. 저는 급한 일이 생겨서 가봐야겠어요.”직원에게 서류를 건넨 권다솔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성큼성큼 멀어져 갔다. 그녀는 슬픈 표정으로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다.목적 없이 거리를 거닐며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다. 수많은 차와 정장 차림의 사람이 오가는 거리에서 그녀가 갈 수 있는 곳 하나 없는 것 같았다. 막연한 감각도 따라서 피어올랐다.이때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수락 버튼을 눌렀다. 전화를 건 사람은 배진호의 어머니 정미진이었다.“다솔 씨, 지금 시간 있어?”정미진의 목소리는 아주 무덤덤했다.“시간 되면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어.”...15분 후, 권다솔은 넋을 잃은 채 산부인과 앞에 서 있었다.평일이다 보니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산부인과는 더욱 적을 수밖에 없다.간호사는 금방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권다솔 씨.”권다솔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정미진은 그녀의 가방을 대신 들어주며 미소를 지었다. 태도도 보기 드물게 부드러웠다.“가서 검사받아. 짐은 내가 대신 보관할게.”권다솔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정미진이 왜 그녀를 데리고 산부인과에 왔는지, 그리고 왜 갑자기 태도가 변했는지 전부 알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결국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금방 나왔다. 의사는 보고서를 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축하드려요. 임신하셨네요.”정미진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기쁜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시 한번 물었다.“선생님, 확실한가요?”의사는 아예 보고서를 건네주며 말했다.“직접 확인하세요. 초음파 사진에서 태아의 형태를 볼 수 있습니다. 아주 잘 크고 있어요.”사진까지 나오자 정미진은 할 말이 없었다.병원에서 나온 다음 그녀는 직접 권다솔을 데려다줬다. 가는
배상준이 와인을 보고 지나치게 들뜬 모습을 보이자 정미진은 못마땅하다는 듯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그만 좀 해! 평생 와인 처음 본 사람처럼 굴지 마. 작년에 친구가 준 와인도 있잖아?”정미진은 와인이 그렇게 대단한 물건도 아니니 배상준에게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지 말라는 뜻이었다.하지만 배상준은 잠시 생각하더니 진지하게 말했다.“이건 최고급이야. 그거랑은 달라.”정미진의 얼굴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그제야 배상준은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분위기가 그렇게 된 후라 정미진은 권다솔에게 선물을 다시 가져가라고 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헛기침을 두 번 하고 말했다.“뭐, 그럼 이건 받아 둘게. 진호 아빠는 다른 취미는 없고 술만 좋아하니까.”말을 하며 그녀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권다솔을 바라보며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사전 준비는 꽤 철저했네.”권다솔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정성을 들여 준비한 선물이 이런 식으로 왜곡되면 누구나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그녀는 손바닥을 꼭 쥐며 침착하게 대답했다.“어른들 댁에 올 때는 좋아하시는 걸 알아보고 준비하는 게 예의니까요.”정미진은 차갑게 웃으며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하지만 선물이 마음에 들었는지 배상준은 더 이상 정미진이 권다솔에게 계속 차갑게 굴지 않도록 나섰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됐어, 이제 그만 좀 해. 둘이 결혼한 건 이미 기정사실이고, 이렇게 힘들게 찾아왔는데, 좀 따뜻하게 맞아 주는 게 어때?”정미진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당신은 도대체 누구 편이야?”배상준은 주눅 든 듯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확실히 아내를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그래도 그의 말이 전혀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적어도 정미진은 권다솔을 내쫓지는 않았고 함께 식사를 했다.그러나 그것뿐이었다.식사가 끝난 후 정미진은 권다솔을 문까지 배웅하며 말했다.“앞으로 별일 없으면 다솔 씨는 오지 않는 게 좋겠어. 우리 집은 당신처럼 귀한 아가씨를 모실 수 없으니
전화기 너머에서 정미진은 계속 장황하게 말을 이어갔다.순간, 배진호의 품에 안겨 있던 권다솔은 힘이 풀리더니 그대로 바닥으로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배진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이만 끊을게요, 어머니.”그는 전화를 빠르게 끊고 권다솔을 부축해 일으켰다.“다솔 씨, 우리 어머니가 한 말 신경 쓰지 마세요. 엄마는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어요. 다솔 씨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해요.”“하지만 당신 어머니잖아요. 당신이 어머니 뜻을 거스를 수 있겠어요?”권다솔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배진호는 잠시 멈춰 섰다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거스를 수 있어요.”그 대답에 권다솔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답변이었다.배진호는 그녀를 품에 안고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부드럽게 말했다.“그런 건 이제 신경 쓰지 마요. 내가 우리 사이에 어떤 방해도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지금 제게 가장 중요한 건 다솔 씨와 우리 아이니까요.”배진호의 시선이 그녀의 아직 평평한 배로 향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담긴 따뜻함과 온화함은 다솔 씨의 마음을 서서히 녹였다.그녀는 그의 따뜻한 태도 속에서 안정을 찾았다.하지만 정미진과의 문제를 그냥 넘어가기로 하지는 않았다. 모든 걸 배진호에게만 맡길 수는 없었다.그녀는 임신 중이었지만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그래서 배진호가 회사 일로 바쁜 틈을 타 권다솔은 집에 남겠다고 핑계를 대고 몰래 배진호의 본가에 찾아갔다.초인종을 여러 번 급하게 누르자 정미진이 문을 열며 말했다.“누구세요? 왜 이렇게 급하게 눌러요?”문이 열리고 권다솔을 본 순간 정미진의 얼굴은 냉랭하게 굳었다. 그녀는 말을 던지며 문을 닫으려 했다.“권다솔 씨였네. 우리 같은 작은 집안은 당신같이 고귀한 사람은 모실 수 없으니 어서 돌아가.”“잠깐만요, 아주머니! 문 닫지 마세요!”권다솔은 급한 마음에 손을 뻗어 문을 막으려 했다.정미진이 문을 세게 닫으려다 보니 권다솔은 손이 문틈에
약 15분이 지나고 나서야 남태건이 사무실에서 나왔다.그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침착하고 냉정했다. 협상이 성사되었는지 아닌지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직원들은 서로 의견을 나누며 추측하기 시작했다.“내 생각엔 협상이 결렬됐을 거야. 대표님 성격 알잖아. 한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 성격이잖아.”“글쎄, 어떻게 알아? 어쩌면 됐을지도 모르지.”“흥! 그럼 내기라도 해 볼래?”배진호가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전까지 직원들은 이런저런 추측만 할 수 있었다.하지만 권다솔은 다르다. 그녀는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사무실에 들어가자 그녀의 눈에 배진호의 책상이 보였다. 책상 위에는 펼쳐보지도 않은 서류 한 장이 놓여 있었고 옆에는 방금 사용된 것 같은 펜이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불안감을 느꼈다.혹시... 직원들 말대로 협상이 성사된 것일까?복잡한 추측을 멈추고 권다솔은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혼자 고민만 하다가는 걱정만 커질 뿐이었다.“진호 씨, 태건 씨와 협력하기로 한 거예요?”권다솔은 숨을 고르고 직접 물었다. 사실을 마주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설령 협력이 성사되었다 해도 그것은 단지 가끔 마주치기 싫은 사람을 회사에서 보게 될 가능성이 생겼을 뿐이었다.배진호는 그녀가 갑자기 들어오자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책상 위 서류로 향했다.그는 아무 말 없이 서류를 집어 들고 찢어버렸다.권다솔은 그 모습을 보고 멍해졌다.“그걸... 찢은 거예요?”“그런 셈이죠.”배진호는 담담히 말했다.“이건 하남 지역의 토지 양도권 계약서였어요. 하지만 협력하지 않기로 했어요.”그의 태도는 마치 그것이 중요한 서류가 아니라 어디에나 흔한 종잇조각인 것처럼 보였다.권다솔은 더욱 놀랐다.하남 지역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그녀도 알고 있었다. 얼마 전 회사 회의에서 다음 목표는 하남 지역으로 설정하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한 곳을 반드시 확보하겠다고 결정했었다.하남 지역 땅은 단순히 지역 시장을 빠르게 여는 것 이상
권다솔은 웃으며 직원들에게 인사를 건네던 중 시선이 한 곳에 닿은 순간 얼굴이 굳었다.남태건이 몇 명의 사람들과 함께 로비를 걸어오다가 갑자기 멈춰 섰다. 그의 깊고 날카로운 시선이 바로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권다솔은 본능적으로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옆에 있던 한 직원이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전무님, 괜찮으세요?”권다솔은 고개를 저으며 간단히 말했다.“괜찮아요. 가죠.”돌아가는 길 내내 그녀는 방금의 장면을 떨쳐내려 했지만 남태건의 모습은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았다.그는 알게 모르게 그녀의 악몽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왜 또 온 거지?’‘나를 이렇게 만든 것도 모자라 도대체 뭘 더 하려는 걸까?’수많은 의문들이 마음속에 쌓이며 그녀는 점점 짜증이 솟구쳤다. 그 짜증을 이기지 못한 듯 권다솔은 점점 걸음이 빨라졌다.옆에 있던 사람들이 그녀를 따라가려 했지만 이미 그녀는 훨씬 앞서 있었다.“전무님, 너무 빨리 걸으시면 안 돼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권다솔은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다.바닥에 부딪히기 직전 그녀는 마음속으로 후회의 물결이 밀려왔다.다행히 익숙한 손이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배진호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으며 균형을 잡아 주었다.권다솔은 그의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방금의 일은 그녀뿐만 아니라 배진호에게도 큰 충격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다솔 씨, 괜찮아요?”“네, 괜찮아요.”권다솔이 대답을 마치자 뒤에서 또 다른 발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고 예상대로 그곳에는 남태건이 서 있었다.그는 완벽히 맞춘 고급 정장을 입고 있었고 단정한 짧은 머리는 그의 날카롭고 예리한 얼굴선을 더욱 강조했다. 겉보기에는 완벽한 신사처럼 보였다.하지만 권다솔은 알고 있었다. 이 남자는 외면과는 달리 안에 짐승 같은 본성을 숨기고 있다.그는 그녀를 속이고 과거의 따뜻한 기억을 무기로 그녀를 자신에게 끌어들이려 했다
배진호가 회사에서 문제가 생겼다고 말하자 권다솔은 당연히 이것저것 물어보았다.하지만 그는 무언가를 숨기고 싶어 하는 듯 아무것도 말하려 하지 않았다.결국 권다솔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알았어요. 하지만 너무 늦지 않게 돌아와야 해요.”전화를 끊고 난 뒤 방문에서 갑작스럽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문밖에서 도우미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사모님, 닭고기 국을 끓였는데 드셔보시겠어요?”권다솔은 문을 열어 그녀가 닭고기 국을 테이블 위에 놓도록 했다.원래라면 국을 놓고 곧바로 떠났겠지만 도우미는 머뭇거리며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했다.“경미 씨, 무슨 일이에요?”권다솔이 물었다.박경미는 잠시 망설이며 대답했다.“조금 전 누군가가 전화를 했는데 제가 누구냐고 묻자 바로 전화를 끊더라고요.”“그냥 잘못 걸린 전화 아니었을까요?”“그렇다면 별일 아닐 텐데... 전화를 여러 번 했거든요.”박경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권다솔을 바라보며 말했다.“혹시 누군가를 찾으려고 한 게 아닐까 싶어요.”권다솔은 순간적으로 긴장하며 눈빛이 흔들렸다.배진호가 없는 지금 이 별장에는 박경미와 그녀밖에 없었다. 혹시 전화를 건 사람이 그녀를 찾는 것일까?그러나 누가 이 집 전화번호를 알고 있을까?그녀는 문득 남태건을 떠올리며 본능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지금 그녀에게 남태건은 더 이상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그녀는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그 사람이 다시 전화하면 받지 말아요... 아니, 아예 전화선을 뽑아버리세요.”별장의 집 전화는 구식이라 전화선을 연결해야만 작동했다. 선을 뽑으면 더 이상 울리지 않을 것이었다.박경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마도 전화선을 뽑으러 간 듯했다.권다솔은 샤워를 마친 후 침대에 누웠고 곧 깊은 잠에 빠졌다.그러나 한참 자던 도중 갑작스러운 간지러운 느낌에 그녀는 눈을 떴다. 밝았던 하늘이 완전히 어두운 밤으로 변해 있었다. 그 어둠은 마치 먹물보다도 더 짙고 무거웠다.권다솔
식구들은 배진호의 말을 듣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남자의 무릎이 얼마나 귀중한지 모두가 알고 있었다.세상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이 정도까지 자신을 낮출 수 있는 남자가 얼마나 될까?배진호는 자신의 행동으로 권다솔에 대한 마음이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음을 증명했다.권다솔은 이미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결국 권용민과 김영은은 딸이 계속 우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마음을 풀어 그녀를 데려가라고 허락했다.집으로 돌아가는 길 배진호는 계속 권다솔을 세심하게 배려하며 그녀를 살폈다.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이전과 다른 어색함이 흘렀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 그들 사이에 생긴 듯했다.그때 권다솔이 갑자기 배진호의 말을 떠올렸다.“아까 부모님 앞에서... 누군가 틈을 타 끼어들었다고 했잖아요.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는 거예요?”둘 다 이번 사건이 누군가의 의도적인 조작으로 일어난 것임을 알고 있었다.다만 그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배진호는 외투를 벗다 말고 잠시 멈추며 말했다.“그날 남태건 씨가 다솔 씨를 데려갔잖아요.”권다솔은 그가 말하는 것이 그날 밤 부모님과 다툰 일을 가리키는 줄 알았다.그러나 곧 깨달았다. 그가 말하는 것은 그날 밤이 아니라 유람선에서의 일을 언급한 것이었다.그 순간 권다솔은 누군가에게 강하게 얻어맞은 듯 정신이 멍해졌다.휘청거리며 넘어질 뻔했지만 배진호가 그녀를 붙잡아 주었다.“그러니까, 이 모든 게 남태건이 한 짓이라는 거예요?”권다솔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배진호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말한 것을 후회했지만 끝내 고개를 끄덕이며 사실을 인정했다.그 대답을 듣고 권다솔의 마음은 높이 날아오른 풍선이 터져버린 것처럼 산산조각 났다.“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권다솔은 허탈하게 중얼거리며 점점 무너져 결국 웅크리고 주저앉았다.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며, 배진호는 더욱 고통스러웠다. 남태건을 향한 분노와 증오가 마음속에서 더욱 강렬하게 피어
권다솔은 이미 자신을 때릴 준비가 된 아버지의 손바닥을 감당할 각오를 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예상했던 통증은 오지 않았다.눈을 뜬 그녀는 권용민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으면서 참아내는 모습을 보았다.김영은이 옆에서 권용민을 달래며 말했다.“혼자 화낸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요. 지금 중요한 건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느냐죠. 이건 분명히 진호 씨 쪽 문제예요.”“당장 진호 씨를 불러서 해결해야 해요.”권용민은 그 말을 듣고 딸을 곁눈질로 보며 속으로 화를 다스렸다.참고 또 참고 나서야 그는 여전히 차갑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들었지.”“만약 아직도 자존심이 있다면 더는 진호 씨를 감싸선 안 돼. 그는 다 큰 남자다.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권다솔은 잠시 침묵한 후 배진호에게 문자를 보내 집으로 오라고 했다.문자를 받은 배진호는 급히 회사에서 달려왔다.거실에서 앉아 있는 권다솔을 보자마자 다가가려 했지만 권용민의 날카로운 시선에 얼어붙었다.“길게 말하고 싶지 않네요.”권용민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손으로 권다솔을 가리키며 말했다.“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당신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두 들었습니다.”배진호는 고개를 들고 권용민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제 어머니가 그날 한 말은 잘못됐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 생각도 그렇다는 뜻이 아닙니다.”권용민은 그의 단호한 눈빛을 보며 속으로 약간 안도하면서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그는 배진호를 나쁘게 보지 않았다.그를 존중한 이유는 단순히 과거에 자신을 구한 은혜 때문이 아니라 그의 능력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었다.처음에는 배진호를 단순한 비서로만 보았다. 하지만 이후 그는 자신의 실력으로 한 기업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며 능력을 증명했다.그의 경영 방식은 보통 사람이 쉽게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권용민은 배진호를 인정했다.그 기억을 떠올리며 권용민은 자신의 날카로웠던 시선을 조금 누그러뜨리며 말했다.“진호 씨, 저는
김영은은 깜짝 놀라 잠시 말을 잃었다.“너 그 집안과 엮이고 싶지 않다고 했었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왜 또?”권다솔은 고개를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김영은은 딸의 반응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걸 알았기에 굳이 캐묻지 않았다.하지만 권용민은 달랐다.“그때는 결혼하면 잘해 주겠다느니 너희가 행복하게 살 거라느니 말만 번지르르하게 했네.”권용민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런 일이 생긴 거냐?”“이건 전적으로 진호 씨의 잘못은 아니에요...”“아직도 진호 씨를 두둔하는 거야? 그럼 말해 봐. 진호 씨 잘못이 아니라면 왜 너는 이틀 동안 아무 소식도 없었던 거냐?”권다솔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테이블 아래에서 손가락을 꼬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릿속이 뒤엉켰다.그녀는 부모님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두 분 모두 불의를 참지 못하고 화를 잘 내는 성격이었다. 만약 자신이 배진호의 어머니에게서 받은 모욕을 털어놓으면 김영은은 분명 즉시 그 집으로 찾아가 난리를 칠 것이다.그리고 겨우 허락했던 권용민 역시 배진호와의 이혼을 요구할 게 뻔했다.부모님에게 있어 딸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은 용납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결국 권다솔은 침묵을 선택했다.그녀의 태도에 권용민은 더욱 답답함과 분노를 느꼈다. 딸이 집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좋아, 네가 말하지 않으면 내가 진호 씨에게 직접 물어봐야겠다!”권용민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결혼한 지 일주일도 안 돼서 내 딸이 이런 대접을 받는 이유가 뭔지 물어보지 않으면 안 되겠어!”그러면서 휴대폰을 들어 배진호에게 전화를 걸려 했다.권다솔은 급히 그의 손을 붙잡으며 전화를 막아섰다. 그녀는 김영은과 함께 애타게 설득하며 아버지를 저지했다.휴대폰을 간신히 빼앗았지만 권용민의 화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분명히 말한다, 다솔아. 오늘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