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의 곁에서 가장 먼저 그녀를 지키고 싶었다.하지만 온지유는 모든 것을 스스로 헤쳐 나가고 싶었다. 그녀는 홍혜주의 마음이 선의임을 알았지만 홍혜주가 언제까지나 자신 곁에 머무르도록 할 수는 없었다.“혜주 씨도 해야 할 일이 있잖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이 결정을 내린 이상 나도 나를 잘 지킬 거예요.”홍혜주는 온지유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한번 결심한 일은 쉽게 바꾸지 않을 사람이었다.홍혜주는 겉으로는 온지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반드시 그녀 곁을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은 여이현도 그녀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 자신도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터였다.심지어... 인명진도 말이다.온지유는 이곳의 모든 일을 정리한 후 S국으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5년 후.온지유는 이제 능숙한 종군 기자가 되었다. 이날도 평소처럼 S국 북부에서 최신 전황을 보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도를 진행하던 중 전장이 불길에 휩싸이며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전황 보도는 전투의 격화로 중단되었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군대와 함께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총성이 요란하게 울리다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를 때쯤 마침내 전투가 멈췄다.온지유는 먼저 보도를 진행하고 나서 군인들과 함께 구조 활동에 나섰다.그러다 문득 한 아이가 시멘트 덩어리 밑에 깔린 것을 발견했다. 아이 위에 떨어진 시멘트 판 밑에는 책상이 있어 그 틈에 있던 아이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얼굴은 먼지로 가득 덮여 있었다.온지유는 상황을 보자마자 즉시 아이를 구하러 달려갔다. 아이는 온지유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외쳤다.“엄마...”온지유는 S국에서 5년을 보냈다. 여기서 종군 기자로 활동할 수 있게 허가받은 후 처음엔 작은 내란에 불과했던 이곳이 결국 대규모 전쟁으로 번져버렸다.여기에 노석명이 연합 동맹군을 결성하여 대규모 군대로 성장한 것도 포함된다. 지금 노석명의 세력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졌다.그동안 수많은 난민
아이는 작은 고양이처럼 그녀의 가슴에 순하게 기대어 있었다. 작은 손바닥을 그녀 앞에 올려놓은 모습이 꽤 힘이 있어 보였다.온지유는 아이의 손을 살짝 떼어 내려 했지만 그 순간 아이가 나직이 말했다.“심장 소리가 정말 편안해요...”그러면서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종군 기자로 활동한 지난 5년 동안 온지유는 수많은 아이들을 만났지만 이 아이만큼은 묘한 느낌을 주었다.아이는 부드럽고 애틋한 목소리로 그녀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온지유는 아이를 안은 채 밖으로 나왔다. 예상치 못하게 모래바람이 몰아쳤지만 다행히 빠르게 화국 군용 차량에 올랐다.“대사관까지 좀 태워주실 수 있을까요?”“알겠습니다.”운전병은 온지유의 목에 걸린 기자증을 눈여겨보았다. 특히 그녀가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차는 대사관까지 40분을 달려 도착했고 온지유는 아이를 안은 채 대사관으로 들어섰다. 전담 직원을 찾아가 아이를 맡기려 했으나 아이는 필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괜찮아. 이분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야. 우리를 집으로 돌아가게 해줄 거고 네 엄마 아빠를 찾는 것도 도와주실 거야.”온지유는 부드럽게 아이를 달랬다.말하지 않아도 이 아이 역시 부모와 헤어진 것이 분명했다.어쩌면 부모가 이미 희생되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를 대사관에 데려가 직원이 아이의 신상을 등록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뿐이었다.그러나 아이는 온지유의 뒤로 몸을 숨기며 그녀와 직원이 아무리 달래도 앞에 나와 말하려 하지 않았다.직원은 고민 끝에 말했다.“아이가 말도 잘 안 하고 자꾸 당신에게만 의지하는데 혹시 며칠만 아이를 맡아 주실 수 있을까요?”“이쪽 전투가 몇 가지 이유로 며칠간 멈출 예정입니다. 그동안 아이를 잘 돌봐 주세요. 제가 전문 인력을 불러오겠습니다.”온지유는 말없이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아이가 그녀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그녀는 아이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반짝이는 흑요석 같은 눈동자에 촉촉한 눈물이 고여 있
남자아이의 머리카락은 들쭉날쭉하게 자라 있었다. 전쟁만 나지 않았고 부모와 떨어지지만 않았다면 그는 지금쯤 아주 행복한 아이였을 것이다.온지유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넌 이름이 뭐야? 대사관에 남기 싫었던 건 혹시 부모님 때문이야?”남자아이는 고개를 떨군 채 조용히 말했다.“부모님을 본 적이 없어요...”아이의 낮고 잠긴 목소리에는 서글픔이 가득 배어 있었다.온지유는 지난 5년 동안 S국에 머물며 작은 내란에서 대규모 전쟁에 이르기까지 모든 상황을 지켜봐 왔다. 이 아이가 부모를 본 적이 없다는 것은 아마도 그가 아주 어릴 때부터 부모가 곁에 없었다는 의미였다.“그럼... 이름이 없는 거야?”온지유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아이에게 물을 한 잔 따라주고 그의 눈높이에 맞춰 다시 앞에 쪼그리고 앉아 말을 걸었다.아이는 물을 받지도 않고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마치 잘못을 저지르고 속상해하는 아이 같았다.온지유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 아이 역시 상처가 깊은 아이였다.하지만 전쟁 속에서 자란 아이 중에 마음이 건강한 아이가 몇이나 있을까?그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과 노인을 대상으로 한 특집을 만들어 각국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목소리를 내면 휴전의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온지유는 아이의 손을 잡고 말했다.“이름이 없다면 내가 이름을 지어줄까?”처음에는 아이가 입고 있는 흰 셔츠와 귀여운 외모를 보고 화국의 부유한 집 아이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아이의 옷은 어쩌면 쓰레기 더미에서 건진 것처럼 보였다.부모를 본 적이 없다는 걸 보니 아주 어릴 때부터 부모와 헤어졌거나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일지도 몰랐다.“제 이름은 별이예요.”“별이?”아이가 천천히 대답했고 온지유는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너의 부모님도 네가 별처럼 빛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을 거야. 당분간은 내 곁에 머물다가 대사관으로 데려다줄게. 하지만
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구마를 받았다. 별이는 천천히 한입 베어 물었고 온지유가 물을 한 잔 떠오면서 말했다.“부족하면 더 줄 테니까 많이 먹어.”별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온지유는 피식 웃었다. 별이는 말하기 싫어하는 아이였다. 별이를 계속 지켜보면 부담스러워할까 봐 천막 안의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집합을 뜻하는 호각 소리가 울려 퍼졌다.깜짝 놀란 온지유는 군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 틀림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때, 온지유를 더 놀라게 했던 것은 고작 5살 된 아이가 고구마를 내려놓고 바른 자세로 서서 경례 자세를 취한 것이었다. 온지유는 군의 규칙에 익숙해진 어린아이가 군인의 아이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별이가 만약 열사의 유자녀라면 고향이 아닌 이곳에서 지내게 할 수 없었다.“별이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별이는 군인도 아닌데 어떻게 경례하는 것을 배운 거야? 누가 가르쳐주었는지 알려줄 수 있어?”온지유는 별이 앞에 쭈그려 앉아 조심스럽게 물었다. 별이는 온지유를 빤히 쳐다보더니 쭈뼛거리다가 천천히 대답했다.“할아버지예요.”별이의 말에 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고 할아버지를 잃고 나서 먼지투성이가 된 채로 밖에서 떠돌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잠깐 여기서 쉬고 있어. 나갔다가 곧 돌아올 테니까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말고 이곳에서 기다려야 해.”온지유는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고 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온지유는 곧바로 대사관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대사관의 담당자한테 오늘 알게 된 것을 말했다.“저한테 데려가라고 했던 아이한테 물었더니 이름이 별이래요. 부모님을 본 적이 없다고 하는데 방금 집합 호각 소리를 들었을 때 군인처럼 바른 자세로 서서 경례하더라고요. 몸에 밴 것처럼 호각 소리를 듣자마자 경례했고 할아버지가 가르쳐준 거래요. 군인의 아이라면 제대로 조사해서 아이가 좋은 곳에서 지낼 수 있게 해줄 수 있잖아요.”대사관에서 별이가 군인의 아이인지 조사하면 금방 결과
온지유는 가난해서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도와줬고 음식과 생활용품을 전달했다. 온지유가 다른 사람을 돕기 좋아하는 것은 부대에 있는 모두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별이는 온지유의 손을 꼭 잡았고 긴장했는지 작은 손에 땀이 났다.“별이야, 옷이 마음에 들어? 이것도 한 번 봐봐.”온지유는 새로 산 옷을 두 벌 꺼내서 보여주었다. 전쟁 때문에 하얀 옷을 입으면 쉽게 더러워졌기에 여러 색깔이 섞인 옷을 사주었다. 시장이 멀어서 더 많은 것을 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며칠 후에 별이를 대사관에 데려다주고 별이의 신분이 밝혀지면 그때 별이에게 다른 것을 선물하겠다고 다짐했다.별이는 붉어진 두 눈으로 온지유를 바라보았고 옷에는 관심이 없었다. 온지유는 별이를 꼭 안아주면서 다독였다.“별이야, 이곳은 우리 화국 군인들이 지내는 곳이라 안전해. 다른 나라 군인처럼 너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거야. 내가 곁에 있어 줄 테니까 두려워하지 마. 자, 새 옷을 한 번 입어볼까?”온지유의 말에 별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온지유는 별이를 안아 들어서 침대 위에 올려놓고 말했다.“앞으로는 천막 앞에서 날 기다리지 마. 천막을 나오면 위험하니까 무슨 소리가 나면 침대거나 책상 아래에 숨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나오면 안 돼. 알겠지?”화국은 백 년 전처럼 나약하지 않았고 강해진 군사력으로 다른 나라와 겨룰 수 있게 되었지만 다른 나라들이 힘을 모아 화국을 상대한다면 형세가 기울게 될 것이다.욕심으로 가득 찬 다른 나라들은 언제든지 화국을 공격할 수 있었고 습격을 받으면 별이를 지킬 수 없었기에 어디에 숨어야 할지 알려주어야 했다. 별이는 온지유의 손을 꽉 붙잡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별이는 전쟁이 일어나는 것보다 온지유를 못 보게 되는 것이 더 두려웠다. 별이는 말수가 적었고 다른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기 싫어했지만 어쩐지 온지유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해졌다. 온지유의 품에 안겨서 온지유의 심장이 두근대는 소리를 들으면
“온 기자님.”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온지유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군복을 입고 있는 부대의 군인이 천막 앞에 서 있었다. 온지유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무슨 일 있어요?”“Y 국에서 물자를 지원했는데 온 기자님이 직접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알겠어요.”5년 동안 온지유가 어디에 있든 Y 국에서는 물자를 지원했고 신무열과 법로 대신 다른 사람이 물자를 가져왔다. 그리고 매달 계좌에 거액의 돈이 들어왔다. Y 국에서 지원해 준 물자로 가난한 백성을 살릴 수 있었고 군인에게 더 좋은 음식을 대접할 수 있었기에 온지유는 거절하지 않았다. 게다가 신무열과 법로를 만나지 않아도 되기에 큰 부담이 없었다. 온지유는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말했다.“아줌마가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 줘.”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온지유는 말하려고 하지 않는 별이를 보면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만약 대사관에서 이 아이를 온지유에게 맡긴다면 인명진을 불러서 별이와 만나게 할 생각이었다. 어린아이가 말하지 않는 것은 자폐증 증상 중 하나일 수도 있었다. 자폐증이 맞다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게 해주고 싶었다.온지유는 군인과 함께 물자를 받으러 갔고 물자 리스트에 사인하려고 했다.“지유야.”갑자기 들려온 부드러운 목소리에 온지유는 고개를 번뜩 들었다. 눈앞에 서 있는 남자는 하얀 셔츠를 입고 미소를 지은 채 온지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5년 전처럼 여전히 우아하고 다정한 신무열이었다. 신무열이 Y 국을 통치하고 있었기에 내부의 전란을 다스리고 나라를 통일시켰다. 그러면서 화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오면서 물자를 지원했다. 온지유는 다 알고 있었지만 신무열에게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런데 신무열이 직접 물자를 가져온 것을 봐서는 무슨 일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신무열이 입을 열기도 전에 온지유가 먼저 물었다.“무슨 일로 오셨어요?”온지유는 물자 리스트에 사인하고는 같이 온 군인에게 전하면서 말했다.“먼저 가서 체크하세요.
“너도 종군 기자를 해서 알고 있겠지만 노석명은 죽지 않았어. 그 욕심 가득한 놈이 아직 살아있단 말이야. 그래서 너의 도움이 필요해.”신무열은 심호흡하고는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온지유는 멈칫하더니 물었다.“내가 뭘 도와주면 되나요?”신무열이 직접 물자를 가지고 찾아왔으니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주어야 했다.“노승아가 신분을 위장해서 나를 찾아왔잖아. 그것 때문에 노석명이 하마터면 Y 국의 통치권을 손에 넣을 뻔했어. 네가 Y 국에 오면 노석명도 소식을 듣고 다시 찾아올 거야.”신무열은 말하면서 온지유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온지유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듣고 있다가 생각에 잠겼다. 신무열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온지유를 보면서 거절당할 것이라고 여겼지만 온지유는 흔쾌히 동의했다.“그래요. 무열 씨랑 같이 갈게요.”온지유와 여이현이 Y 국에 있을 때, 온지유가 노승아한테 잡혀갔을 때 신무열이 나서서 온지유를 보호해 주었다. 그래서 신무열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마음먹은 것이다.“오늘 같이 가자.”신무열이 다급히 말했다.“며칠 기다려주면 안 돼요?”온지유는 곧바로 같이 떠날 수 있었지만 별이를 곁에 두고 갑자기 떠날 수 없었다. 신무열은 육감적으로 온지유한테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신무열이 입술을 깨물더니 한참 후에야 물었다.“무슨 일 있어?”신무열은 온지유의 발목을 잡는 사람은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이때 온지유가 입을 열었다.“대사관에서 맡긴 아이가 있는데, 세 날 정도 돌봐줘야 해요.”온지유가 솔직하게 말하자 신무열은 깜짝 놀랐다. 온지유는 5년 동안 종군 기자로 활약했을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와 노인을 도와주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래서 사람들이 온지유를 보살이라고 불렀다.“그럼 세 날 뒤에 데리러 올게.”“알겠어요.”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 날 동안 온지유는 기사를 쓰면서 시간을 보냈다. 별이는 곁에서 울지도 않고 징징대지도 않았다. 별이가 너무 조용해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군의관은 별이의 몸을 검사하고 응급조치를 취했다. 그러고는 온지유한테 알려주었다.“천식이라 항상 약을 가지고 다녀야 합니다.”천식이라는 말을 들은 온지유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 병은 유전으로 생길 수도 있지만 후천적으로도 걸릴 수 있는 병이었다. 항상 약을 가지고 다니지 않으면 발작을 일으킨 뒤에 즉사할 수도 있었다.만약 별이가 온지유를 만나지 못해서 부대에서 함께 지내지 않았다면 발작을 일으켜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조용히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었다. 별이는 의식을 잃으면서도 온지유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온지유는 별이가 힘겹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별이는 분명 대사관에 가지 않고 온지유와 함께 있고 싶다고 말했었다. 온지유가 유일하게 별이에게 따뜻한 품을 내어준 사람이라서 그랬을 것이다. 혹은...“켁!”기침 소리에 정신이 든 온지유는 별이가 깨어난 것을 보고 침대맡으로 다가갔다. 별이는 슬픈 두 눈으로 온지유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온지유와 떨어지기 싫고 대사관에 가기 싫다는 뜻이었다.이 아이에게는 온지유가 필요했다. 방심했다가는 아이가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온지유는 신무열과 함께 Y 국으로 가기로 했기에 다녀온 후에 별이와 함께 지내면서 인명진에게 치료를 부탁하려고 했다. 온지유는 별이의 작은 손을 꼭 잡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네가 아줌마 곁에 있고 싶다면 그렇게 해. 네가 건강해질 때까지 함께 있어 줄 테니까 다 나으면 네 가족을 찾으러 가자.”별이가 고개를 또 흔들자 온지유는 어린아이가 가족을 잃은 줄 알고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별이는 그저 온지유와 함께 있고 싶어서 고개를 흔들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신무열이 미간을 찌푸렸다. 온지유가 천막을 빠져나오자 신무열이 다가가 말했다.“오늘 밤에 나랑 같이 가자. 만약 이 아이가 걱정된다면 데리고 가면 돼.”신무열은 입술을 깨물더니 큰 결심을 내렸다. 온지유는 신무열이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신무열은 온지유를 위해
젊은 남자가 먼저 달려들었다.인명진이 넋을 놓고 있을 때 예상치 못한 기습을 한 것이다.몽둥이가 그대로 등에 내리꽂혔다.무겁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은서우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당황한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인명진을 부축했다.“원장님, 괜찮으세요? 왜 저 대신 맞으신 거예요!”몸을 곧게 세운 인명진은 그 와중에도 덤덤히 답했다.“은 선생님 대신 맞은 게 아니라 원래부터 저를 향해 오던 거였어요.”고개를 돌려 자신의 등을 확인한 인명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충격이 상당했지만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과거 법로의 약인 이었던 그는 이런 고통에 익숙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그는 천천히 자신을 공격한 남자를 바라보며 차갑고 서늘한 시선으로 상대를 짓눌렀다.젊은 남자는 그 눈빛에 움찔했지만 순간뿐이었다.“다 너 같은 돌팔이 의사 때문에 내 동생이 죽었어! 겨우 열아홉 살이었어! 네가 아니었으면, 너만 아니었다면 내 동생은 지금도 멀쩡했을 거라고! 돌팔이 의사! 더러운 병원도 다 망해버려야 해!”은서우는 그 말에 화가 치밀어 올라 나섰다.“당신은 어떻게 우리 병원의 잘못이라고 확신해요? 사람을 살리려고 한 게 잘못인가요?”남자는 주먹을 꽉 쥐고 은서우를 노려보았고 그의 어머니가 눈물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당신들이 아니면 또 누가 있지? 간이식이 필요하다고 해서 보름 후로 수술을 잡았어. 하지만 병세가 악화해서 수술을 앞당겼지.”인명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여자의 말을 들었다.은서우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인명진을 바라봤다.그녀는 인명진이 그런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분명 뭔가 오해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우린 친척들에게 돈을 빌리고 또 빌려서 수술비를 마련해서 딸을 수술실로 보냈어.”은서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수술실에 들어갔다면 잘 된 거 아닌가요? 병세가 악화했다면 이식을 빨리 진행하는 게 맞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환자는 죽었을 거예요.”눈이 붉
“모르겠어요. 본인 말로는 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다면서 급히 떠났어요.”은서우는 무거운 마음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자신이 함정에 빠진 것만 같았다.‘세상에 이렇게 우연이 반복될 수 있나?’오히려 그 인턴은 들통날 걸 알고 단서를 끊어 그들이 더는 추궁할 수 없도록 미리 도망친 것처럼 보였다.은서우의 무거운 분위기와 달리 인명진은 담담했다. 그는 애초에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고마워요. 수고했어요.”그는 곧 은서우를 잠시 바라보고는 뒤돌았고 은서우도 그를 따라 몸을 돌렸다.그때 간호사가 참지 못하고 은서우를 불러 세웠다.“은 선생님, 언제부터 원장님이랑 그렇게 친했어요? 그리고 요즘 다들 원장님이 선생님을 차기 부원장으로 키우려고 한다던데 진짜예요?”은서우는 순간 당황했다.인명진이 그런 말을 한 적은 있지만 아직 확정된 것도 없는 일을 떠벌일 순 없었다.“저도 잘 모르겠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간호사가 다른 질문을 이을까 봐 급히 자리를 떠났다.복도로 나왔을 때 인명진은 하얀 가운을 입고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주위엔 많은 사람들이 오갔지만 아무도 감히 그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인명진은 마치 그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었다.은서우의 심장이 천천히 뛰었다.조용히 그에게 다가갔지만 차마 방해할 수 없어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인명진이 먼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며 차분하게 말했다.“나중에 다시 확인해 보면 돼요. 이름이랑 신분이 가짜일 리는 없잖아요.”그가 인턴을 두고 한 말이라는 걸 깨달은 은서우는 잠시 멍하니 있다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갑자기 뒤에서 거친 외침이 들려왔다.“엉터리 의사, 거기 서!”깜짝 놀란 은서우가 뒤를 돌아보니 며칠 전 병원에서 소란을 피운 환자의 가족들이었다.한 쌍의 부부와 젊은 남성이 함께였는데 그들의 손에는 벽돌이나 나무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은서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
가녀린 팔다리를 지녀 살짝 밀기만 해도 쓰러질 것처럼 보이는 은서우였지만 그녀가 얼마나 강인한 사람인지 인명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는 더 노력했다.인명진도 수술이 늦게 끝나 자정을 넘길 때가 많았는데 병원을 나설 때 늘 남아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바로 은서우였다.그녀는 늦은 시간까지 홀로 남아 의료 관련 논문을 읽으며 밤을 새웠다.그렇기에 그녀에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기회를 주고 싶었다.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그는 은서우가 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소씨 가문이 끝없이 돈을 요구할 때도 그녀는 울지 않았고 소태훈이 협박할 때도 울지 않았다.하지만 자신을 도와줬던 인명진 앞에서는 감정을 쉽게 다스리지 못했다.“제가 원장님을 실망하게 한 거 알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내일 바로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 사직서 낼게요. 직접 신고하지 않으셔도 자수하겠습니다.”그 말을 듣자 인명진은 미간을 깊이 찌푸렸다.“누가 나가라고 했나요?”그 말에 두 사람 모두 순간 얼어붙었다.은서우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멍해졌고 인명진 역시 자신이 그렇게 말했다는 사실에 놀랐다.하지만 곧 깨달았다.그녀는 공범이 아니라 단순히 속아 넘어간 어찌 보면 불쌍한 희생양이었다.인명진은 손가락으로 미간을 누르며 피곤한 듯 한숨을 쉬었다.“내쫓을 생각은 없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전문 지식 배경이 탄탄하다는 건 알겠어요. 지금 저한테는 조수가 필요합니다. 병원에서 은 선생님을 대신할 사람은 없어요.”은서우는 눈을 깜빡였다.갑자기 하늘에서 커다란 떡이 떨어진 것만 같았다.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하니 있었고 인명진은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그러니까 더 이상 자책하지 마세요. 은 선생님 잘못이 아니에요. 지금 중요한 건 그 인턴을 찾는 거예요.”그 말에 은서우는 즉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상처 부위가 당겨져 갑작스러운 통증에 숨을 들이마셨다.그녀는 머리를 부딪친 것 외에도 팔꿈치와 무릎에 멍이 들었다.내상은 심하지
그때 은서우가 큰 소리로 외쳤다.“말할게요!”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고 손가락을 꼬아 쥔 채 눈을 자주 깜빡였다. 모든 몸짓과 표정이 지금 극도로 망설이고 긴장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인명진은 그녀를 재촉하지 않고 묵묵히 그녀가 말을 이어가길 기다렸다.은서우는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 자신이 몰래 사진 촬영을 했다는 사실까지 포함하여지난 며칠 동안 있었던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털어놓았다.모든 걸 말하고 나니 마치 무거운 돌덩이를 내려놓은 듯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반면 인명진은 그녀가 말하는 내내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그의 반응을 알아차린 은서우는 너무 일찍 안도한 자신을 한탄했다.“죄송합니다. 고소하고 싶으시다고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솔직하게 모든 걸 털어놓은 건 자신의 앞날을 지키고 싶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더 이상 인명진을 속이고 싶지 않다는 이유가 더 컸다.한 번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기란 불가능하겠지만 최소한 계속해서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싶진 않았다.이제 그녀의 운명은 인명진의 손에 달려 있다.인명진은 처음엔 정말 화가 났다.누구라도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몰래 사진을 찍혔다면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평범한 용도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다른 용도로 사용된다면 문제가 심각했다.하지만 죄책감에 가득 찬 은서우를 보고 있자니 더 이상 따질 수가 없었다.결국 수없이 맴돌던 말들은 삼켜지고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그 인턴은 어디 있죠?”“네?”은서우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인명진은 다시 한번 천천히 물었다.“은 선생님한테 명령한 그 인턴 누구냐고요. 은 선생님이 주범이 아니라면 주범을 찾아서 직접 물어봐야겠죠.”그냥 묻힐 문제가 아니었다.어떤 의도로 몰래 촬영된 건지도 모르는데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은서우가 카카오톡을 추가한 인턴이 당사자임을 설명했다.“민지아라는 인턴이었어요. 얼마 전에 온 인턴인데 원장님은 기억 못 하실 수도 있어요.”그런데 예상과 달리 인명진은
환자의 가족이 갑자기 달려들어 은서우를 밀쳐 넘어뜨렸다.그녀는 바닥에 넘어지며 이마가 복도에 있는 의자에 부딪혔고 순간적으로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흐릿해졌다.인명진은 은서우를 부축하고 이마에 남은 선명한 붉은 자국을 보고 가족들을 노려보았다.“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가족들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뭐 하는 거냐고? 너 같은 엉터리 의사가 물을 자격이나 있어? 너만 아니었으면 내 딸은 적어도 몇 년은 더 살았을 거야! 내 딸이 죽은 건 다 네 탓이야!”인명진도 놀랐지만 품에 안긴 은서우의 고통스러워하는 신음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사람들이 다가오기 전에 은서우를 들어 올렸다.간호사들의 비명 속에서 그는 가족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을 차갑게 쳐다보며 지나갔다.“시위하는 것도 정도가 있습니다. 사람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비키세요.”싸늘한 인명진의 시선에 그들은 움찔하며 결국 길을 열어주었다.인명진은 빠르게 은서우를 진료실로 옮겼다.그때 은서우가 깨어나면서 속눈썹을 파르르 떨더니 힘겹게 눈을 떴다. 목소리는 여전히 약하고 가냘팠다.“원장님, 정말 아니에요. 저 믿어 주세요.”그녀의 창백하면서도 고집스러운 얼굴을 보자 인명진은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 이 상황에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있어요?”“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미간을 찌푸린 인명진은 복잡한 감정이 일었다.처음에는 은서우가 강인한 사람이라 좋은 후배로 키울 만한 인재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그녀가 자신에게 약을 탄 걸 알고 실망했다. 그 후 한동안 그녀를 믿을 수 없겠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런 실망도 사라지고 그저 착잡한 마음과 걱정스러운 마음만이 남아 있었다.특히 은서우가 아까 자신을 지키려 앞서갔을 때 그는 더욱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분노가 가득한 가족들을 마주하면서도 자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건가?’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안명진은 찡그린 얼굴을 풀고 부드러우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말투로 말했다
인명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은서우를 안아 들어 방으로 조심스럽게 옮겨 침대에 눕혔다.그는 빠르게 수건을 찾아 차가운 물에 적셔 은서우의 이마에 살며시 얹으며 그녀의 체온을 내리려 했다.아픈 은서우의 모습에 인명진의 마음은 복잡하게 얽혔다.침대 옆에 앉아 은서우를 지켜보는 그의 마음에는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그는 평소 은서우가 병원에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가끔 신비로운 느낌을 주긴 했지만 환자에게 보이는 그 집중력과 책임감은 가짜일 리 없었다.그는 또 두 사람이 함께 수술실에서 협력했던 장면을 회상했다. 그때 은서우는 침착하고 전문적이었는데 지금의 그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그는 은서우가 정말 나쁜 사람일지 아니면 숨겨진 사정이 있어 그런 행동을 하게 된 것인지 의문스러웠다.은서우는 고열에 혼미한 상태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돌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며 중얼거렸다.“원장님, 죄송해요. 저도... 저도 원하지 않았어요.”인명진은 그녀의 중얼거림을 듣고 조용히 물었다.“그럼 왜 그런 거죠? 도대체 무슨 사정이 있는 건가요?”하지만 은서우는 반쯤 잠든 상태로 계속 사과하는 말만 반복할 뿐 구체적인 대답은 하지 않았다.시간이 흐르고 인명진의 세심한 보살핌 덕분에 은서우의 체온도 조금 내려갔다.좁혀졌던 미간이 펴지고 호흡도 고르게 되자 인명진은 조바심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다.그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은서우의 상태가 점차 안정되는 걸 보며 결국 몸과 마음의 피로에 못 이겨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 햇살이 창문 틈으로 비쳐 들어왔다.자연스럽게 깨어난 인명진은 먼저 은서우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고 얼굴이 아직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어젯밤처럼 아프고 걱정스러운 모습은 아니었다.그는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혼자 교류회에 참석한다는 메모를 남기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문이 닫히고 나서 은서우는 천천히 눈을 떴다.머리가 아직 어지러웠던 탓에 그녀
인명진은 손을 들어 은서우의 이마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겼다.그의 손끝이 그녀의 뺨을 스치자 미묘한 분위기가 흘렀다.은서우의 얼굴은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놀라움과 쑥스러움이 교차하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은 선생님, 오늘 좀 이상하신 것 같아요.”낮고 부드러운 인명진의 목소리는 사람을 홀리는 주문처럼 그녀의 귓가를 간질였다.은서우는 떨리는 입술로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말에 두서가 없었다.“저... 원장님, 저는...”그러나 그녀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인명진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그는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예상치 못한 강한 힘에 은서우는 가늘게 비명을 질렀다.“이제야 당신이 품고 있는 속셈을 알겠네요. 제 물컵에 약 탄 걸 제가 모를 줄 아셨습니까?”그의 음성에는 분노와 실망이 섞여 있었다.은서우는 그가 알아챘다는 사실에 숨이 턱 막혔다.“원장님, 아니에요. 저도 사정이 있어서 그랬어요. 제발 제 얘기를 들어주세요.”은서우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애원했지만 인명진은 콧방귀를 뀌었다.“사정? 무슨 사정이 있어서 약까지 타려고 했죠? 은서우 씨, 제가 당신을 잘못 봤나 보네요.”“원장님, 정말 그게 아니에요. 제 말 좀 들어주세요.”참을 수 없는 역겨움이 몰려온 인명진은 그녀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그는 약인으로서 각종 약에 대한 감지 능력과 면역력이 뛰어났다.처음 물이 입술에 닿았을 때 그는 바로 이질감을 느꼈다.눈치채지 못한 척 조용히 뱉어냈지만 그는 은서우의 행동에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제가 그렇게 믿었는데 저한테 약을 탔네요. 정말 양심이라는 게 있긴 한 건가요?”인명진은 은서우를 싸늘하게 노려보며 거침없이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은서우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인명진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원장님, 제발 제 말 좀 들어주세요.”인명진은 그녀의 말을 듣지도 않고 문을 열어 그대로 은서우를 방에서 쫓아냈다.그는 차가운 바닥에 쓰러진 그녀를 뒤로한 채 단호하
은서우는 깜짝 놀라며 급히 말했다.“원장님, 제가 알아볼 테니 먼저 가서 쉬세요.”그러나 인명진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은 선생님 먼저 쉬세요. 오늘 하루 종일 이동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제가 알아서 할 게요.”은서우는 두 개의 침대가 놓인 객실을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인명진의 배려가 고맙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한 죄책감과 두려움이 그녀를 짓눌렀다.그녀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두 손으로 옷자락을 꽉 쥐었다.머릿속은 온통 뒤엉킨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잠시 후 돌아온 인명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근처 호텔에도 빈방이 없어서 방법이 없네요. 오늘 밤은 그냥 이렇게 지내야 할 것 같아요.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그냥 특수한 상황이라고 생각해요.”은서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원장님.”인명진이 씻으러 들어가자 은서우의 시선은 탁자 위의 주전자에 멈췄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주머니로 가져가 약봉지를 만졌다.심장이 요동치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그녀는 약봉지를 손안에 단단히 움켜쥐었다.너무 세게 힘을 주어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갈등 속에서 은서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렇지 않은 척 주전자 쪽으로 다가갔다.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약을 컵에 넣고 재빨리 물을 부었다.그 후 약이 빠르게 녹도록 조심스럽게 저었다.모든 것을 완성하고 물컵을 원래 자리에 돌려놓는 순간 인명진이 욕실에서 나왔다.그는 느슨한 가운 하나만 걸친 채였다.젖은 머리칼 몇 가닥이 이마에 흩어져 있었고 물방울이 그의 단단한 턱선을 따라 흘러내려 쇄골을 타고 가운 속으로 사라졌다.은서우는 무심코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순간적으로 심장이 멎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른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하지만 그녀는 다시 한번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인명진은 그녀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듯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은서우에게 다가왔다.목소리는 방금 샤워를 마친 사
이렇게 드문 해외 교류 기회를 얻는 것은 그녀의 전문 능력을 크게 인정받은 것이며 또한 시야를 넓히고 자신을 성장시킬 절호의 기회였다.하지만 그 인턴은 이 소식을 듣고 다른 속셈을 품게 되었다.그녀는 은서우를 찾아가 몰래 약봉지를 건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은 선생님, 이번에 원장님과 함께 가시죠? 기회를 봐서 이 약을 물에 타세요. 일이 끝나면 2천만 원 드릴게요.”은서우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란 채로 연신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이건 불법이에요. 절대 할 수 없어요.”인턴 민지아는 어두워진 얼굴로 싸늘하게 협박했다.“전에 제 돈을 받고 제 부탁 들어주신 거 잊지 마세요. 안 하면 당신이 돈을 받고 원장님의 사진을 몰래 찍은 사실을 폭로해 버릴 거예요. 그러면 당신은 완전히 끝장나는 거죠. 그리고 소씨 가문 사람들이 가만있을 것 같아요? 이렇게 좋은 기회를 망쳐버리면 더 난리 칠걸요?”은서우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는 흰 종이처럼 순식간에 창백해졌다.그녀는 자신이 이 자리까지 오기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떠올렸다.‘이 선택 때문에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지만 민지아의 요구대로 하면 내 양심은 어떡하지? 원장님의 신뢰는 어떻게 보답하지?’민지아는 그녀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 다시 유혹하듯 말했다.“그냥 약을 타기만 하면 돼요. 원장님은 전혀 눈치채지 못할 거예요. 잠들면 사진 몇 장만 찍으세요. 어렵지 않잖아요? 이것만 끝내면 우리 둘은 완전히 정리되는 거예요.”은서우는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고뇌 속에서 결국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민지아는 목적을 달성하자 만족스러운 냉소를 지으며 장난치지 말라는 경고를 남긴 뒤 급히 자리를 떠났다.은서우는 손에 약봉지를 꽉 쥔 채 혼자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출발일이 다가왔다.은서우는 무거운 짐을 끌고 인명진과 함께 공항으로 향했다.가는 길 내내 인명진은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이번 교류와 관련된 의학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