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는 클렌징폼을 듬뿍 짜서 얼굴을 씻고, 핸드워시, 바디 클렌저까지 총동원했다.공기 속에는 향긋한 꽃향기가 가득했다.온통 온지유가 좋아하는 냄새였다.이렇게까지 하는 목적은 몸에 묻은 여이현의 담배 냄새, 술 냄새, 그리고 피비린내를 없애기 위해서였다.온지유는 그러다 멈칫하고 말았다.“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혼해야만 하는 이유를 알고 있잖아.”시간이 다 된 지금, 여이현이 잡지도 않는데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그렇다고 노승아와 잘되는 모습을 지켜볼 수도 없었다.여이현은 온지유가 석이라고 불리는 나민우의 곁으로 돌아갈 거라는 생각에 피식 웃고 말았다.온지유는 유난히 조용했다.집에 돌아와서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여이현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의 목덜미를 잡으면서 말했다.“온지유, 나 지금 후회하는 중이야. 너랑 이혼하기 싫어.”“이현 씨!”온지유는 그가 약속했던 일을 후회할지 몰랐다.그러다 왜 이혼 숙려기간이 있는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온지유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이혼하든 말든 괜찮아요. 어차피 가는 정 오는 정이라고 했는데 오늘 저녁... 웁!”온지유는 여이현과 이 일을 따지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말을 끝내기도 전에 여이현이 키스를 퍼부었다.여이현은 온지유의 허리를 감싸 쥔 채 서서히 침대 앞으로 끌고 갔다.여이현이 원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그는 온지유를 침대에 눕혀 두 손을 꼭 잡았다.온지유는 그런 그가 두렵기 시작했다.“이현 씨! 정신 차려요! 제발 이러지 마요!”의사 선생님은 엽산과 칼슘을 먹는 처음 3개월 동안은 잠자리를 가지면 안 된다고 했다.‘이러다 아이가 잘못되면 어떡하지?’여이현은 동작을 멈추는 대신 깊숙하게 온지유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이 순간 온지유는 꼼짝하지도 못했다.여이현은 우연히 쓰디쓴 그녀의 눈물을 맛보고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온지유를 놔주었다.온지유는 옆에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여이현은 그러다 어지러운 느낌에 침대에 고꾸라지고 말았다.술을 많이 마셔서
나도현의 명확한 말투에 온지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두 달 뒤면 배가 선명히 나와 있을 수 있었기 때문에 여이현이 절대 놔주지 않을 수 있었다.그러다 온지유가 이상한 점을 확인하고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물었다.“이현 씨 친구라고 불러야 하나요?”나도현은 잠깐 당황하더니 웃으면서 말했다.“형수님 눈치도 빠르시네요.”비록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내심 온지유가 대단하다고 느꼈다.단번에 알아차리다니.“제 이혼소송 건을 맡아주시지 않을 거면 이만 가볼게요.”온지유가 떠나고, 나도현은 바로 여이현에게 전화했다.아직 자고 있던 여이현은 전화 소리에 깨어났다가 삭신이 쑤신 느낌을 받았다.나도현은 여이현의 피곤한 듯한 목소리를 듣고 피식 웃었다.“아직도 자고 있어? 형수님이 아침부터 찾아왔어. 내가 누군지 알고 있더라고. 조심하는 것이 좋겠어.”여이현은 바로 정신을 차리더니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고 다시 온지유에게 전화했다.온지유는 아직 변호사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찾는 변호사마다 손사래를 쳐서 여이현의 연락을 받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 받을 수는 없었다.전화기 너머에서 여이현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온지유. 어디 있어.”“밖에서 물건 사고 있어요.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오늘은 월차 내고 싶은데.”온지유는 핸드폰을 꽉 쥐고 말했다.집에서 나올 때 여이현은 아직 깨어나지도 않았다.변호사 만나러 간 사실을 들켰어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어제 시킨 일은 다 했어?”여이현이 차갑게 묻자 온지유는 입술을 깨물었다.“지금 바로 회사로 갈게요.”“그래.”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일 뿐 바로 출근하지 않았다.아직 집에 있는 여이현이 그렇게 일찍 출근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여이현은 전화를 끊자마자 피팅룸으로 들어갔다.바로 이때, 핸드폰이 또 울렸다.온지유인 줄 알고 차갑게 말했다.“했던 말 또 하게 하지 마.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했으니까.”노승아는 멈칫하고 말았다
강하임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면서 온지유에게 다가갔다.전보다 태도가 많이 좋아진 것 같았다.온지유도 따라서 웃으면서 인사했다.“괜찮습니다. 송서연 씨, 여기 와서 인사하세요.”아무리 강하임의 태도가 좋아졌다고 해도 여이현이 시킨 대로 이번 건은 송서연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강하임은 내심 불쾌했지만 그래도 애써 괜찮은 척했다.“온 비서님께서는 요즘 후임을 양성하시나 봐요?”이채현도 모자라 송서연까지, 그런데 여이현은 끝내 나타나지 않을 줄 몰랐다.강하임은 이 상황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뭐라고 할 수 없었다.그저 온지유와 시답잖은 대화를 이어갈 뿐이다.“혹시 비즈니스에 영향이 갈까 봐 그러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모든 프로젝트는 대표님께서 직접 관리하고 계십니다.”강하임이 입술을 깨물더니 말했다.“그러면 여진 그룹에 가서 얘기하는 건 어떤가요? 이번 프로젝트에 대해서 온 비서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뒤늦게야 온지유가 여이현을 7년이나 모신 비서인 것을 알게 된 것이다.온지유를 통해 직접 여이현을 만나고 싶었는데 또 온지유가 올 줄 몰랐다.온지유가 웃으면서 말했다.“아직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계약서 체결 15일 이후 매일 20% 기준으로 돌려준다는 건 무슨 뜻이죠?”이채현은 그날 금강 그룹 책임자 데리러만 왔지 계약서를 만져보지도 못했다.그런데 오늘은 미리 계약서를 미리 확인하고 찾아왔다.물어본 김에 자세히 이야기해 보려고 했다.강하임이 웃으면서 말했다.“저희 첫 계약서잖아요. 온 비서님께서는 아직 계약서를 잘 확인하지 않으셨나요? 마지막 세 번째 조항에 한 달 내에 모두 갚는다고 되어있어요.”온지유는 시종 미소를 잃지 않고 부드럽게 말했다.“강하임 씨, 이런 계약서는 본 적도 없습니다. 계약 첫날 일정한 계약금을 내고 나머지 계약금을 갚는 날짜를 정하는 것입니다. 이 계약서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강하임은 표정이 확 변하더니 냉랭하게 말했다.“여 대표님도 문제없다고 하는데 온 비서님이 여기
강하임이 커피잔을 놓친다는 건 온지유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저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하임 씨가 놓칠 줄 몰랐어요.”온지유가 빠르게 차가워지는 강하임의 눈을 올려다보며 말했다.“내가 놓쳐요? 내가 커피잔 하나도 제대로 못 든단 말이에요? 여 대표님, 계약 좀 잘 마무리해보려고 왔는데 비서가 일을 너무 못하네요.”강하임은 연속 되물으며 온지유에게 핀잔을 주었다.그리고 마지막에는 여이현을 향해 언짢은 티를 내자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여이현은 냉소를 흘리고는 말했다.“CCTV 한번 돌려드릴까요?”온지유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여이현이 강하임의 말을 받아쳤다.강하임이 일부러 시비를 거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아직 퇴사 전이니 자신의 일을 잘 마무리하고 싶어 온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했는데 이 상황에서 여이현이 자신의 편을 들어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었다.한편 강하임은 한낱 비서를 대신해 나서는 여이현에 표정을 굳혔다.“여 대표님이 직원 챙기는 건 이해하는데 커피가 내 손에 떨어졌잖아요. 우리 쪽 직원이 이런 실수를 했다면 대표님은 기분이 어떠셨을까요?”이때 온지유가 담담히 말했다.“만약 제 실수라면 저는 바로 인정했을 겁니다. 비서로서 실수까지 했는데 그걸 떠넘길 수 있을 만큼 양심이 없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제가. 강하임 씨가 계속 제 실수라고 생각하시면 사람 불러서 확인해 보셔도 좋아요.”자신의 잘못이 아닌 건 절대 사과하지 않는 게 바로 온지유였다.하지만 이런 사소한 일로 사람까지 불러서 확인하는 건 너무 자존심이 상했기에 강하임은 화를 누르며 이쯤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그럴 필요까진 없고요. 내가 손까지 뎄는데 화가 안 나겠어요? 그리고 이 일 전에도 트러블이 좀 있었잖아요 우리.”강하임은 여전히 삐딱한 태도로 말했지만 온지유는 더는 그녀를 상대하고 싶지 않아 단호하게 말했다.“강하임 씨 마음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지금은 두 회사가 파트너 계약을 맺는 자
그에 강하임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여 대표님, 제가 아까 말씀드렸듯이 온 비서와 저 사이에 트러블이 좀 있었어요. 그러니까 아까는 제가 충분히 온 비서의 고의라고 오해할만한 상황 아닌가요?”“그리고 내가 누군지 정말 잊은 거예요?”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막 나가는 강하임에 여이현은 표정이 굳은 정도가 아니라 서늘하기까지 했다.“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내가 제일 잘 알아요. 그리고 만약 고의라 해도 나는 상관없어요. 안될 건 없잖아요?”여이현의 말에 강하임은 말문이 막혀버렸다.그리고 마지막 질문만 의도적으로 빼놓고 대답을 한 거 보면 여이현은 정말 저를 기억 못 하는 것 같아 강하임은 그게 더 분하고 부끄러웠다.“강하임 씨, 얼음 가져왔어요.”그때 얼음을 들고 온 온지유가 부드럽게 말했다.온지유의 차분한 표정은 아까의 일을 전부 잊기라도 한 듯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하지만 그 뒤로 보이는 여이현은 서늘한 표정을 유지한 채 강하임에게 무언의 압박을 주고 있었다. 마치 지금 당장 사과를 하지 않으면 이 계약은 체결하지 않겠다는 듯이.게다가 이 계약 건은 강하임이 아빠와 오빠를 한 달 넘게 졸라 따낸 일이었기에 이렇게 망쳐버릴 수도 없었다.그래서 강하임은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온 비서님, 아까는 죄송했어요, 내가 놓친 건데 집에서 이러던 게 습관이 돼서 괜히 온 비서한테 화풀이했네요. 용서해 주세요.”갑자기 태도가 바뀐 강하임에 처음에는 어리둥절해 하던 온지유가 여이현을 바라보았다.역시나 굳은 표정에 누구 하나 잡아먹어 버릴듯한 눈빛, 여이현이 강하임에게 사과를 시킨 게 틀림없었다.그래서 온지유도 억지로 웃으며 그 사과를 받아주었다.“이 얘기는 아까 다 끝났잖아요, 마음 쓰지 않으셔도 돼요.”이런 어색한 분위기가 빨리 끝나길 바랐던 온지유가 한마디 더 덧붙였다.“얼음팩부터 일단 대고 계세요. 그럼 두 분 말씀 천천히 나누세요, 전 먼저 나가 있을게요. 필요하면 부르세요.”온지유가 나가고 여이현이 강하임을 보며 입을 열었
지금 2할이나 양보하는 건 당연히 큰 손해였고 계약을 따낸다 해도 별로 이득이 없었다. 하지만 강하임이 이 계약을 포기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여이현도 단도직입적으로 물을 수 있었던 것이다.역시나 여이현의 예상대로 강하임은 웃으며 말했다.“협업이라는 게 원래 장기적으로 봐야 하는 거잖아요, 지금이야 조금 손해를 보겠지만 이런 방법을 써서라도 여진그룹 같은 큰 회사랑 계약한다면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표님, 2할이 최대에요. 저도 더는 물러날 곳이 없습니다.”“그래요.”그제야 여이현이 강하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번 일을 계기로 강하임은 여이현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다.“그럼 계약 건도 마무리되었으니 내일 제가 단풍 별장에서 여는 파티엔 와 주실 거죠?”“네, 가야죠.”금방 계약을 체결하고 파티 참석을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었기에 여이현은 마지못해 알겠다고 대답했다.“그럼 전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강하임이 인사를 하며 말하자 여이현은 온지유를 불렀다.“온 비서, 손님 배웅해드려요.”강하임은 그 배웅이 내키진 않았지만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가 여이현이 보이지 않는 곳에 도착해서야 온지유에게 삐딱한 투로 말했다.“내가 오늘 온 비서한테 사과한 건 여 대표님을 봐서예요.”강하임은 오늘의 치욕을 꼭 갚아주겠다는 투로 말했지만 온지유는 오히려 웃으며 그 말을 받아쳤다.“그 얘기는 아까 이미 끝난 걸로 아는데요. 그리고 강하임 씨가 굳이 강조하지 않으셔도 알고 있었어요. 이제 지나간 일은 그만 언급하죠, 전 앞으로도 여 대표님 옆에 계속 있을 건데 서로 얼굴 붉히면 불편하잖아요.”온지유는 저를 난처하게 만들려는 강하임의 속내를 알고 일부러 더 뾰족하게 쏘아붙였다.이 계약에서 더 절실한 쪽은 강하임이었고 계약의 갑이 바로 제 상사인 여이현이니 더 이상 여이현 앞에서 저를 곤란하게 만들지 말라는 경고였다. 어차피 그래봤자 소용이 없을 테니까. 온지유는 여이현이 늘 자신의 편을 들어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그래
“F 국 가는 거 앞당겨도 돼요?”온지유의 질문에 여이현은 대답하지 않고 표정을 굳혔다. 살짝 찌푸려지는 미간이 그의 어이없음을 대변해주고 있었다.나민우와 그렇게 사이가 좋으면서 F 국 일정을 앞당겨달라 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대답이 없는 여이현에 온지유는 포기하고 말을 돌렸다.“취소하시고 싶으시면 취소하셔도 돼요, 뭐 다른 거 시키실 일 있으세요?”여이현은 생각을 멈추고 담담히 말했다.“차 한잔 부탁해.”“네.”몇 분 뒤, 온지유는 따뜻한 차를 들고 들어왔다.녹차를 유독 좋아하는 여이현이기에 일부러 손님용 차와 다른 걸로 내왔다.“강하임 씨는 네가 계속 맡아, 내일 나랑 단풍 별장에 같이 가자.”여이현의 말에 이의가 없었던 온지유는 그렇게 방을 나섰다. 그사이 동기들 단톡방에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내일 반장 개인 사정 때문에 만월 파티 좀 앞당길게, 저녁 9시로 하자.]그 문자를 본 온지유는 따로 도세원에게 연락하여 100만 원을 보내주었다.[나는 일 때문에 파티 참석 못 할 것 같아, 이건 네가 반장한테 잘 전해줘.][그래.]도세원은 빠르게 돈을 받고 이내 답장을 보내왔다.[몸조심해.]온지유는 그 문자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사실 저 문자의 의미는 그녀가 임산부 상태니까 저녁에 진행하는 술자리에 못 오는 건 당연한 일이니 마음 쓰지 말라는 뜻이었다.한 시간 뒤쯤 여이현이 사무실에서 나와 온지유의 책상을 지나쳐갔다.그때는 아무 말도 없다가 다 지나고 나니 여이현이 문자를 보내왔다.“저녁 준비해놔.”“알겠어요.”그 문자에 여이현은 5시 반에 퇴근을 하고 마트에 들러 장을 보고 있었다.그런데 마침 마트에 있는 티비 속에서 여이현이 나오고 있었다. 물론 혼자는 아니었지만.여이현은 검은 정장을 입고 신사답게 노승아를 보호하며 카메라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그리고는 멀찍이 떨어져서 마이크 앞에선 노승아를 지켜보고 있었다.마이크를 잡은 노승아는 화장을 마친 예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입을 뗐다.“기자님들
노승아가 진심으로 사죄한다는 듯 고개를 숙이자 여이현이 나서며 카메라에 대고 말했다.“오늘 기자회견은 독 같은 건 애초에 없었고 누가 누구를 시해하려는 행동도 없었음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제목 어그로는 자제 부탁드립니다.”표정을 굳힌 채 검은 아우라를 뿜어내며 180㎝가 넘는 큰 키로 기자들을 압도하는 그 포스에 온지유는 어딘가 씁쓸했다.이렇게 노승아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서 그녀의 편을 들어주는 남자가 저한테만 매정한 것이 서운했다.아마도 여이현을 저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노승아뿐인 것 같았다.온지유가 그만 돌아서려 할 때 화면에 또 다른 자막이 달렷다.이번에는 카메라가 노승아가 아닌 여이현의 얼굴을 잡으며 물었다.“여 대표님이 오늘 노승아 씨를 대변하는 건 공적인 마음입니까 아니면 사적인 마음입니까?”“둘 다라고 해두죠.”여이현의 말이 흘러나옴에 따라 자막도 바뀌는 것을 본 온지유는 갑자기 무언가가 심장을 짓누르는 것만 같이 답답해졌다.“그럼 노승아 씨와 앞으로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시단 말씀인가요?”그 질문에 노승아는 여이현이 입을 열기도 전에 말을 가로챘다.“이건 저희 둘만의 사적인 얘기인 것 같네요, 만약 좋은 소식이 있다면 꼭 여러분께 전해드리겠습니다.”말을 마친 노승아가 여이현의 팔짱을 끼며 다정하게 올려다보는 모습에 온지유는 더 보고 있을 수가 없어 몸을 돌렸다.하필 오늘따라 검은색과 흰색으로 맞춰 입어 더욱 선남선녀같이 잘 어울렸다.“저기요, 계산 안 해요? 안 살 거면 빨리 비켜요! 다들 여기서 줄 서고 있잖아요!”그때 뒤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호통에 온지유는 생각을 접고 말했다.“봉투 주세요, 큰 걸로요.”노승아와 여이현 사이는 어차피 뻔한 결말이었다. 여이현이 해외에서 돌아온 노승아를 위해 매니지먼트를 차려주고 그녀만을 케어해 줄 때부터 둘이 잘 될 거란 걸 예견해왔었기에 온지유는 점점 이런 상황에 익숙해지고 있었다.기자회견이 아니라 결혼 발표를 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사이였다.그래서 온지유는
그저 분위기를 몰 뿐 아무도 진담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하간에 데리고 온 파트너가 있다고 해서 그 상대가 정말로 결혼할 상대인 것은 아니었고 어쩌면 놀다가 질릴 놀이 상대일 수도 있었다. 남자는 다 그러했으니까.양시은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이 하는 농담에 토가 쏠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이때 나도현이 차가운 목소리로 그들의 웃음소리를 멈추게 했다.“최근에 확실히 있죠.”그 순간 그들은 목에 무언가라도 턱 막힌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큼, 큼큼... 제가 눈치가 없었네요. 이분이 대표님께 그런 사람일 줄은 몰랐네요.”웃음거리로 만들던 사람이 헛기침해대며 말했다. 양시은은 당연히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가소롭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제때 나서준 나도현 덕에 가슴 한구석이 따스해진 기분이었다.비록 술자리라곤 했지만 사실상 사업을 논의하는 자리였고 나도현의 위치와 성격 탓에 아무도 그에게 술을 잔뜩 따라줄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몇 잔 마시게 되었다.술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때 양시은은 나도현에게서 은은하게 나는 술 냄새를 맡게 되었다. 술에 박하잎이라도 들어간 것인지 어딘가 시원하게 느껴지기도 했다.“나도현, 내 목소리 들려?”양시은은 그가 취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손을 들어 그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그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정말로 취한 건가...”“안 취했어.”이때 갑자기 그가 입을 열었고 양시은은 깜짝 놀라게 되었다. 그다음 순간 그녀는 시원한 그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양시은은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얼른 차창을 닫으려고 그를 밀어냈다.“이거 놔. 창문 안 올렸단 말이야.”“싫어.”나도현의 담담한 말에 그녀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고 하고 싶지 않았다.그의 손이 그녀의 등을 스쳐 지나가더니 버튼을 눌렀고 창문이 스르륵 닫혔다. 양시은은 그제야 안도했고 입술 위로 차갑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았다. 박하 잎을 입에 머금은 것처럼 시원했다.나도현은 그녀의 머리를 잡고는 다정한 키스를 쏟아부었고 차 안의 분위기
“잠시만요. 저도 할 말이 있어요. 해남 구역의 경쟁입찰은 이미 제가 손에 넣었거든요.”이때 나태욱이 갑자기 손을 들며 끼어들었고 사람들은 놀란 표정을 짓게 되었다. 양시은도 놀란 눈빛을 하며 그를 보았다.해남 구역의 경쟁입찰을 나태욱이 이미 손에 넣었다니...다들 수군거리고 있던 때에 나태욱은 턱을 괴며 건방진 미소를 지었다.“다들 모르셨어요? 아, 제가 말해준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네요. 그래도 큰일이라 다들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말을 하면서 그는 나도현을 보았다. 그 순간 회의실 안 분위기는 차갑게 얼어붙었고 양시은은 걱정 어린 눈길로 나도현을 보았다.“그럼 다른 프로젝트를 논의하죠. 회사에서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이것 하나뿐인 건 아니니까요.”나도현은 그녀의 생각보다 더 차분하고 이성적이었고 심지어 흐름이 끊기지 않게 했다. 하지만 나태욱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회의는 계속 진행되었지만 이번에 민망해진 사람은 그들이 아니었다. 여하간에 방금 자랑을 했지만 무시를 당하지 않았던가. 민망한 사람은 나태욱이었다.회의가 끝나고 양시은은 서류 정리 때문에 늦게 나오게 되었다. 나도현은 아직 멀리 가지 않았고 일부러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그녀를 기다려주고 있었다.양시은이 그를 따라잡으려 할 때 나태욱이 갑자기 그녀를 불러세웠다.“양 비서, 나한테 아직 일 잘하는 개인 비서가 없는데 이번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만 형한테 말해서 나한테 오는 건 어때요?”또 그녀를 자신의 편으로 들이려는 속셈이었다. 나태욱은 자신이 말을 꺼내기만 하면 안 넘어갈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 듯했지만 그녀는 정말로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었다.“괜찮아요. 전 이미 지난번에 분명하게 말했다고 생각하는데요. 전 대표님 곁이 아니라면 다른 곳에 갈 생각은 없네요.”그러자 나태욱이 픽 웃었다.“양 비서, 정말로 그렇게 붙어 있으면 형이 양 비서랑 결혼해줄 줄 알았어요? 그만 포기해요. 우리 고집 센 아버지는 절대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해 줄 리가 없으니까.”양시은은 걸음을
잘됐다며 칭찬을 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부정적인 목소리도 들려왔다. 하지만 손실을 최소화한 것이고 더는 변호사도 아니었던지라 변호사가 회사를 운영한다는 불만 가득한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오성 구역은 재개발에 들어가기 시작했고 유진혁이 했던 짓에 관해서도 뭔가를 알아내게 되었다.“유진혁이 요즘 자주 도박장에 나타난다고 하더라고요.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현금을 들고 자주 나타난다고 했으니까 제 생각엔 아마 그 배후가 계좌이체 하는 수단이 아닌 현금으로 거래하는 수단으로 유진혁과 연락하고 있는 것 같네요.”양시은의 추측에 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고개를 돌리자 나도현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비서는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짚으며 멍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또 제가 가요?”나도현의 확고한 눈빛에 비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였고 신세 한탄했다. 이때 양시은이 끼어들었다.“저도 갈 수 있어요. 소식은 제가 알아낸 거니까 제가 가서 알아보는 게 더 나을 것 같네요.”나도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양시은이 나도현을 설득하려고 머리를 굴리던 때 의외의 대답이 들려왔다. 나도현이 그녀의 말에 동의한 것이다.“너무 깊게 파지는 마. 알아볼 수 있는 것만 알아보고 안 되면 그냥 사람만 데리고 오면 돼.”아주 강압적인 어투에 양시은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볼 수밖에 없었다. 변호사를 그만둔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위압감이 넘치는 한 회사의 대표님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이내 그녀는 비서와 함께 알아보러 떠났고 뜻밖에도 너무도 순조로웠다. 돈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에서 그들은 유진혁을 잡게 되었다.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은 어느 한 수영센터에 있는 사물함이었다. 그들이 찾아갔을 때 마침 유진혁이 수상한 모습으로 돈을 세고 있었고 굳이 그들이 사물함을 열어볼 것도 없이 돈과 유진혁을 손에 넣게 된 것이다. 그들에게 붙잡힌 유진혁은 빠르게 입을 열었다.“난 두 사람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요. 애
양시은은 당연히 고분고분 자리를 비워줄 사람이 아니었다.“안 가. 그러니까 쫓아내려고 하지 마.”창가에 서 있던 나도현이 고개를 돌렸고 그의 얼굴엔 그림자가 져서 어떤 표정을 짓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유난히도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하민이 곧 하원 할 시간이잖아. 네가 안 보인다면 하민이가 불안해할 거야.”그의 말에 양시은은 말문이 막혀버렸고 결국 먼저 자리를 뜨는 수밖에 없었다. 떠나기 전까지 걱정되었던 그녀는 비서에게 나도현을 잘 지켜봐달라는 말을 남겼고 비서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회사를 나섰다.하민이를 집으로 데리고 온 뒤 하민이는 집안을 한번 둘러보다가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왔다.“엄마, 아저씨는 오늘 오지 않으신 거예요?”“아저씨는 바빠서 못 올 것 같대. 아마 밤늦게까지 일하다가 오실 것 같은데 우리 조금 더 기다려볼까?”나도현이 자주 집으로 찾아와 양시은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하민이 하원도 도와주면서 같이 식사도 했기에 하민이는 이미 그의 존재가 익숙해 져버렸다. 하민이는 떼를 쓰지도 않고 양시은의 말을 듣고는 실망한 기색이 가득했지만 얌전히 기다리려고 했다.다행히 나도현은 밤에 돌아왔다. 어쩌면 하민이가 실망하는 것이 싫었는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도현은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들어왔다.“늦었네. 하민아, 아저씨가 뭘 사 왔는지 알아?”하민이는 기쁜 얼굴로 그가 들고 온 것을 받았고 집안의 분위기도 화목하게 바뀌었다.양시은은 그런 나도현을 위아래 살펴보았고 정말로 괜찮아졌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했다. 저녁을 먹은 후 두 사람은 보기 드물게 서로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나도현도 자기 생각을 말해주었다.“생각해 봤는데 변호사가 될 수 없다면 나진 그룹에 계속 남아 있으려고. 마침 너도 거기서 일하잖아.”양시은은 그의 말에 가슴이 벅차올랐고 믿어지지 않는 듯 말했다.“나 때문에 그러는 거야?”그녀는 나도현이 변호사를 포기하는 것에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이유가 자신일
나용민이 정말로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잘살기를 바랐다면 두 사람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붙여놓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건 두 사람을 괴롭히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나태욱은 아주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거만하게 앉아있는 그를 내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난 예전부터 형이 고귀한 척하는 게 싫었어. 어차피 형도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누릴 수 있는 거 누릴 뿐이잖아.”“할 말 끝났으면 나가.”나도현은 더는 나태욱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나태욱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형은 예전부터 가진 것에 만족하지도 않고 아끼지도 않더라.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내가 왔으니 나진 그룹은 더는 형 혼자만의 것이 아니니까 두고 봐.”나도현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가 나가는 것을 보았다. 사무실 문이 열리자 양시은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냉담한 표정을 보아 그를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것 같았지만 나태욱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양 비서, 우리 또 만났네요. 지난번에 내가 말했죠?”“나태욱 대표님.”너무도 대놓고 자신과 거리를 두는 모습에 나태욱은 눈썹을 꿈틀거렸고 뒤를 슬쩍 보더니 이내 씩 웃었다.“우리 형 따라다니느라 많이 힘들죠? 매일 저렇게 차갑고 무뚝뚝한 표정만 짓고 있으니까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나죠? 차라리 내 비서 하는 건 어때요? 마침 내 비서 자리가 비어있거든요.”나도현은 마치 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나태욱, 넌 내가 안 보이나 보다?”나태욱이 입을 열려던 순간 양시은의 공손한 거절이 들려왔다.“죄송해요. 딱히 관심은 없네요.”그의 체면이라곤 전혀 챙겨주지 않는 모습에 나태욱은 스쳐 지나가는 그녀를 보며 표정을 굳혔다.양시은은 서류를 나도현의 앞에 내려놓았다.“대표님, 이건 결재가 필요한 서류에요.”말을 마친 그녀는 바로 자리를 뜨지 않았고 오히려 나도현을 빤히 보았다. 나도현은 당연히 그 시선을 모를 리가 없었고 사인을 하면서 말했다.“할 말이 있으면 해
양시은은 나도현의 낯빛이 한순간에 차가워지는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고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전 개인 비서예요.”그녀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상대에게 설명했다. 그 말인즉 억측하지 말라는 의미였고 나태욱은 의외라는 눈빛을 하며 보았다.“우리 형과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어요? 정말로 그런 거라면 미안해요. 난 두 사람이 이미...”“네 알 바가 아니잖아.”나도현이 차갑게 말을 잘랐다.나태욱은 멈칫하더니 시선을 돌려 나도현을 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더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지만 무거운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그는 웃음기 머금은 눈을 하면서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었다.“난 형처럼 고집이 있는 사람이 아니야. 아버지는 무슨 수를 써서 라든 회사를 형에게 넘겨주려고 하지만 형은 계속 변호사로 살고 싶어 하잖아. 이런 부분에서는 난 형에게 한참 미치지 못하지.”말은 이렇게 하고 있었지만 도발하는 의미가 가득했고 나도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아버렸다.“내가 뭘 하든 네 알 바 아니야.”말을 마친 나도현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고 양시은도 얼른 따라갔다. 그러자 뒤에서 나태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시은 씨, 나중에 또 봐요.”차에 올라타고도 나도현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고 누가 봐도 잔뜩 화난 모습이었다. 나태욱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챈 양시은은 그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했다.“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시은아, 앞으로 나태욱만 보면 피해 다녀.”그는 고개를 돌리더니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하고 있었고 양시은은 멍해지게 되었다.“들었어?”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나도현의 안색이 조금 풀어졌다. 양시은은 방금 본 남자의 신분을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나태욱이 바로 나도현이 말한 나씨 가문의 혼외자식인 것이다...양시은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나태욱은 나진 그룹에서 일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앞으로 다시 만날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다음 날 바로 나태욱이 나진 그룹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게 될 줄은
그랬기에 나용민이 쉽게 나도현을 포기할 리가 없었다. 나도현이 한 집안사람도 아닌 양시은을 데리고 온 것부터 불만이었기에 화를 내는 것이다.“나이가 들면서 머리도 녹이 슬어가나 봐요? 지난번에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시은이는 더는 남이 아니라고요.”비꼬는 나도현의 어투에 나용민은 화가 치밀었고 당장이라도 침대에서 뛰어내릴 듯한 모습으로 말했다.“지금 뭐라고 했냐?”나도현은 코웃음을 치면서 머리뿐만이 아니라 귀도 안 좋다고 생각했다. 너무도 모욕적인 표정에 나용민의 얼굴은 빨갛게 되어버렸고 씩씩대며 거친 숨을 내몰아 쉬고 있었다.“내가 왜 너처럼 말도 안 듣는 아들을 낳아서는...”나도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고 양시은은 나용민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얼른 벨을 눌러 의사를 불렀다. 급하게 달려온 간호사는 어떻게든 나용민의 분노를 가라앉히려고 했고 그들에게 말했다.“환자는 안정이 필요한 상태에요. 그렇게 자극하시면 안 돼요.”나도현은 눈을 내리깐 채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몰랐다. 양시은은 간호사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네, 주의할게요. 감사해요.”간호사가 나간 뒤 나용민은 침대에 누워 두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보더니 차갑게 픽 웃었다.“하마터면 화병으로 죽을 뻔했구나. 이 불효자식아.”“변호사 사무소에서 연락 왔었어요. “나도현이 갑자기 입을 열자 나용민은 어딘가 켕기는 구석이 있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나용민이 한 짓이라는 것을 눈치챈 나도현은 더욱 자신이 가소롭게 느껴졌다. 정말로 나용민이 사주한 일일 거라곤 예상하지 못한 양시은은 믿어지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대체 왜 그러신 거예요? 도현은 그동안 매일 회사에만 다니면서 단 하루도 편히 쉬어본 적 없었어요. 매일 쌓인 업무를 처리하느라 쉬지도 못하고, 지난번에는 열이 39도까지 올라갔는데도 이튿날 바로 출근했다고요. 대체 도현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러시는 건데요.”나용민의 눈빛이 어두워졌고 나도현이 아팠다는 얘기를 듣자 눈에 띄게 흔들
양시은은 돈을 내고 택시에서 내렸다.“기사님, 저 여기서 내릴게요. 감사합니다.”택시에서 내린 그녀는 얼른 검은색 차로 달려갔다.나도현은 창밖에서 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는 양시은이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창문을 열자 양시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도현, 문 열어줘.”나도현의 눈빛이 흔들리고 손을 뻗더니 문이 열렸다. 양시은은 얼른 차에 올라탔다.“왜 말 한마디도 없이 혼자 여기 온 건데? 하민이 하원 시간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잖아.”“그냥 오고 싶었어.”“비서님한테 이미 들었어.”나도현은 입술을 달싹이더니 아주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누가 사주한 것인지.”그가 변호사 되기를 반대하고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용민 뿐이었고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몰랐다.나용민은 나도현에게 아주 큰 기대를 하고 있었기에 나도현이 그저 평범한 변호사가 되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 아들이 자신처럼 나진 그룹을 이끄는 사람이 되길 바랐다.“병문안 갈까 고려하고 있었으니 가기도 전에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시네.”“미안해. 다 내 탓이야...”양시은은 그런 그가 안쓰러우면서도 죄책감이 들었다.“만약 내가 설득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이런 기분을 느낄 일은 없었을 거야.”“네 잘못은 아니야. 내 잘못이지.”나도현은 담담하게 말했다. 애초에 조금이나마 기대한 그의 잘못이었다.양시은은 나도현의 냉담한 어투로 기쁨을 느낄 리가 없었고 그가 냉담하면 할수록 더 안쓰러웠다. 그동안 그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만약 그녀가 나도현이었어도 자신의 아버지가 꿈을 방해한다면 숨이 턱턱 막힐 것이었다.“괜찮아. 내가 있잖아.”양시은은 그를 조심스럽게 안아주었다. 그날 밤처럼 자신의 따듯한 체온으로 차가워진 그의 마음을 녹여주려 했다.나도현은 그런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기사님, 병원으로 가주세요.”나도현의 입에선 뜻밖의 말이 나와 양시은은 멍한 눈빛으로 그
대체 누가 나도현의 심기를 건드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싸늘해진 분위기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고 양시은도 협조적이었다.점차 그들의 분위기도 바뀌면서 룸 안은 열기로 가득해졌다. 이때 누군가 무심코 물었다.“양 비서님, 나중에 결혼 계획 있으세요?”나도현은 차가운 눈길로 입을 연 사람을 보았고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비서는 더 긴장하게 되었다.다행히 양시은은 대충 둘러 말했다.“마음이 맞는 사람이 있으면 아마 할 것 같네요. 하지만 아직은 결혼 계획은 없네요.”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그들은 배불리 먹고 즐긴 후 돌아갔다.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셨던지라 해롱해롱한 상태였고 비서는 그들을 집으로 전부 돌려보랬다. 물론 양시은도 술을 마셨지만 두 잔만 마셨던지라 그저 얼굴만 불그스레한 상태였다.“양 비서님은 혼자 돌아갈 수 있죠? 혼자 갈 수 있으면 전 이만 먼저 가볼게요.”비서는 술에 취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직원을 등에 업고 있었고 그 직원은 비서의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그런 그의 모습을 보니 양시은은 괜스레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었다.“네. 전 혼자 갈 수 있어요.”“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비서는 얼른 자리를 떠나버렸다. 양시은이 위험할지 안 할지는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나도현이 곁에 있는 한 양시은이 절대 위험할 리가 없었으니까.직원들이 떠나고 나니 두 사람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나도현은 자연스럽게 양시은의 가방을 들어주며 말했다.“데려다줄게. 가자.”양시은은 자신의 가방을 돌려받고 싶었지만 그의 모습을 보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차피 돌려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으니까.뒷좌석에 앉은 양시은은 뒤늦은 취기에 머리가 어질거렸다. 나도현은 한참 지나도 들리지 않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양시은은 손을 들어 턱을 괸 채 눈을 감고 있었고 잠든 것 같았다.“대표님, 차가 좀 막힐 것 같습니다.”운전기사가 눈치 없이 말하자 나도현은 바로 눈치를 주었다.“목소리를 낮추세요. 길 막히면 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