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 강하임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여 대표님, 제가 아까 말씀드렸듯이 온 비서와 저 사이에 트러블이 좀 있었어요. 그러니까 아까는 제가 충분히 온 비서의 고의라고 오해할만한 상황 아닌가요?”“그리고 내가 누군지 정말 잊은 거예요?”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막 나가는 강하임에 여이현은 표정이 굳은 정도가 아니라 서늘하기까지 했다.“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내가 제일 잘 알아요. 그리고 만약 고의라 해도 나는 상관없어요. 안될 건 없잖아요?”여이현의 말에 강하임은 말문이 막혀버렸다.그리고 마지막 질문만 의도적으로 빼놓고 대답을 한 거 보면 여이현은 정말 저를 기억 못 하는 것 같아 강하임은 그게 더 분하고 부끄러웠다.“강하임 씨, 얼음 가져왔어요.”그때 얼음을 들고 온 온지유가 부드럽게 말했다.온지유의 차분한 표정은 아까의 일을 전부 잊기라도 한 듯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하지만 그 뒤로 보이는 여이현은 서늘한 표정을 유지한 채 강하임에게 무언의 압박을 주고 있었다. 마치 지금 당장 사과를 하지 않으면 이 계약은 체결하지 않겠다는 듯이.게다가 이 계약 건은 강하임이 아빠와 오빠를 한 달 넘게 졸라 따낸 일이었기에 이렇게 망쳐버릴 수도 없었다.그래서 강하임은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온 비서님, 아까는 죄송했어요, 내가 놓친 건데 집에서 이러던 게 습관이 돼서 괜히 온 비서한테 화풀이했네요. 용서해 주세요.”갑자기 태도가 바뀐 강하임에 처음에는 어리둥절해 하던 온지유가 여이현을 바라보았다.역시나 굳은 표정에 누구 하나 잡아먹어 버릴듯한 눈빛, 여이현이 강하임에게 사과를 시킨 게 틀림없었다.그래서 온지유도 억지로 웃으며 그 사과를 받아주었다.“이 얘기는 아까 다 끝났잖아요, 마음 쓰지 않으셔도 돼요.”이런 어색한 분위기가 빨리 끝나길 바랐던 온지유가 한마디 더 덧붙였다.“얼음팩부터 일단 대고 계세요. 그럼 두 분 말씀 천천히 나누세요, 전 먼저 나가 있을게요. 필요하면 부르세요.”온지유가 나가고 여이현이 강하임을 보며 입을 열었
지금 2할이나 양보하는 건 당연히 큰 손해였고 계약을 따낸다 해도 별로 이득이 없었다. 하지만 강하임이 이 계약을 포기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여이현도 단도직입적으로 물을 수 있었던 것이다.역시나 여이현의 예상대로 강하임은 웃으며 말했다.“협업이라는 게 원래 장기적으로 봐야 하는 거잖아요, 지금이야 조금 손해를 보겠지만 이런 방법을 써서라도 여진그룹 같은 큰 회사랑 계약한다면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표님, 2할이 최대에요. 저도 더는 물러날 곳이 없습니다.”“그래요.”그제야 여이현이 강하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번 일을 계기로 강하임은 여이현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다.“그럼 계약 건도 마무리되었으니 내일 제가 단풍 별장에서 여는 파티엔 와 주실 거죠?”“네, 가야죠.”금방 계약을 체결하고 파티 참석을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었기에 여이현은 마지못해 알겠다고 대답했다.“그럼 전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강하임이 인사를 하며 말하자 여이현은 온지유를 불렀다.“온 비서, 손님 배웅해드려요.”강하임은 그 배웅이 내키진 않았지만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가 여이현이 보이지 않는 곳에 도착해서야 온지유에게 삐딱한 투로 말했다.“내가 오늘 온 비서한테 사과한 건 여 대표님을 봐서예요.”강하임은 오늘의 치욕을 꼭 갚아주겠다는 투로 말했지만 온지유는 오히려 웃으며 그 말을 받아쳤다.“그 얘기는 아까 이미 끝난 걸로 아는데요. 그리고 강하임 씨가 굳이 강조하지 않으셔도 알고 있었어요. 이제 지나간 일은 그만 언급하죠, 전 앞으로도 여 대표님 옆에 계속 있을 건데 서로 얼굴 붉히면 불편하잖아요.”온지유는 저를 난처하게 만들려는 강하임의 속내를 알고 일부러 더 뾰족하게 쏘아붙였다.이 계약에서 더 절실한 쪽은 강하임이었고 계약의 갑이 바로 제 상사인 여이현이니 더 이상 여이현 앞에서 저를 곤란하게 만들지 말라는 경고였다. 어차피 그래봤자 소용이 없을 테니까. 온지유는 여이현이 늘 자신의 편을 들어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그래
“F 국 가는 거 앞당겨도 돼요?”온지유의 질문에 여이현은 대답하지 않고 표정을 굳혔다. 살짝 찌푸려지는 미간이 그의 어이없음을 대변해주고 있었다.나민우와 그렇게 사이가 좋으면서 F 국 일정을 앞당겨달라 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대답이 없는 여이현에 온지유는 포기하고 말을 돌렸다.“취소하시고 싶으시면 취소하셔도 돼요, 뭐 다른 거 시키실 일 있으세요?”여이현은 생각을 멈추고 담담히 말했다.“차 한잔 부탁해.”“네.”몇 분 뒤, 온지유는 따뜻한 차를 들고 들어왔다.녹차를 유독 좋아하는 여이현이기에 일부러 손님용 차와 다른 걸로 내왔다.“강하임 씨는 네가 계속 맡아, 내일 나랑 단풍 별장에 같이 가자.”여이현의 말에 이의가 없었던 온지유는 그렇게 방을 나섰다. 그사이 동기들 단톡방에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내일 반장 개인 사정 때문에 만월 파티 좀 앞당길게, 저녁 9시로 하자.]그 문자를 본 온지유는 따로 도세원에게 연락하여 100만 원을 보내주었다.[나는 일 때문에 파티 참석 못 할 것 같아, 이건 네가 반장한테 잘 전해줘.][그래.]도세원은 빠르게 돈을 받고 이내 답장을 보내왔다.[몸조심해.]온지유는 그 문자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사실 저 문자의 의미는 그녀가 임산부 상태니까 저녁에 진행하는 술자리에 못 오는 건 당연한 일이니 마음 쓰지 말라는 뜻이었다.한 시간 뒤쯤 여이현이 사무실에서 나와 온지유의 책상을 지나쳐갔다.그때는 아무 말도 없다가 다 지나고 나니 여이현이 문자를 보내왔다.“저녁 준비해놔.”“알겠어요.”그 문자에 여이현은 5시 반에 퇴근을 하고 마트에 들러 장을 보고 있었다.그런데 마침 마트에 있는 티비 속에서 여이현이 나오고 있었다. 물론 혼자는 아니었지만.여이현은 검은 정장을 입고 신사답게 노승아를 보호하며 카메라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그리고는 멀찍이 떨어져서 마이크 앞에선 노승아를 지켜보고 있었다.마이크를 잡은 노승아는 화장을 마친 예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입을 뗐다.“기자님들
노승아가 진심으로 사죄한다는 듯 고개를 숙이자 여이현이 나서며 카메라에 대고 말했다.“오늘 기자회견은 독 같은 건 애초에 없었고 누가 누구를 시해하려는 행동도 없었음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제목 어그로는 자제 부탁드립니다.”표정을 굳힌 채 검은 아우라를 뿜어내며 180㎝가 넘는 큰 키로 기자들을 압도하는 그 포스에 온지유는 어딘가 씁쓸했다.이렇게 노승아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서 그녀의 편을 들어주는 남자가 저한테만 매정한 것이 서운했다.아마도 여이현을 저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노승아뿐인 것 같았다.온지유가 그만 돌아서려 할 때 화면에 또 다른 자막이 달렷다.이번에는 카메라가 노승아가 아닌 여이현의 얼굴을 잡으며 물었다.“여 대표님이 오늘 노승아 씨를 대변하는 건 공적인 마음입니까 아니면 사적인 마음입니까?”“둘 다라고 해두죠.”여이현의 말이 흘러나옴에 따라 자막도 바뀌는 것을 본 온지유는 갑자기 무언가가 심장을 짓누르는 것만 같이 답답해졌다.“그럼 노승아 씨와 앞으로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시단 말씀인가요?”그 질문에 노승아는 여이현이 입을 열기도 전에 말을 가로챘다.“이건 저희 둘만의 사적인 얘기인 것 같네요, 만약 좋은 소식이 있다면 꼭 여러분께 전해드리겠습니다.”말을 마친 노승아가 여이현의 팔짱을 끼며 다정하게 올려다보는 모습에 온지유는 더 보고 있을 수가 없어 몸을 돌렸다.하필 오늘따라 검은색과 흰색으로 맞춰 입어 더욱 선남선녀같이 잘 어울렸다.“저기요, 계산 안 해요? 안 살 거면 빨리 비켜요! 다들 여기서 줄 서고 있잖아요!”그때 뒤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호통에 온지유는 생각을 접고 말했다.“봉투 주세요, 큰 걸로요.”노승아와 여이현 사이는 어차피 뻔한 결말이었다. 여이현이 해외에서 돌아온 노승아를 위해 매니지먼트를 차려주고 그녀만을 케어해 줄 때부터 둘이 잘 될 거란 걸 예견해왔었기에 온지유는 점점 이런 상황에 익숙해지고 있었다.기자회견이 아니라 결혼 발표를 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사이였다.그래서 온지유는
노승아가 차에서 내리려 할 때 그녀에게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노승아 씨, 택배 왔는데 좀 많아요. 내려와서 받아가세요.”노승아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택배기사를 볼 수 있었다.작은 끌차에 택배를 빼곡히 채운 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었다.노승아는 이때다 싶어 여이현에게 부탁을 해왔다.“오빠, 나 좀 도와줄 수 있어요? 집에 조명이 고장 나서 전구 좀 샀거든요.”여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에서 따라 내려서는 노승아의 집으로 향했다.5분 뒤, 노승아의 집에 들어온 여이현은 배진호에게 눈짓했다.그리고 그 의미를 알아차린 배진호는 팔을 걷고 나서서 전구를 갈기 시작했다.온지유에게 전화를 하려고 여이현이 금방 뒤를 돌았을 때 노승아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블루베리 주스를 여이현의 셔츠 위로 쏟아버렸다.언짢아진 여이현의 미간을 찌푸리자 노승아는 바로 자책하며 사과를 해왔다.“미안해요, 오빠. 이 블루베리 주스는 내 친구 회사에서 직접 만든 거라 나한테 보내준 건데 맛있는 것 같아서 오빠도 주려고 했는데... 나는 진짜 왜 이렇게 제대로 하는 일이 없을까요?”“괜찮아.”여이현은 천천히 말하고는 블루베리 주스에 흠뻑 젖은 옷보다 바닥에 놀린 유리 조각에 먼저 시선을 돌렸다.그때 노승아가 허리를 굽혀 유리 조각을 쓸어 담으며 말했다.“근데 오빠 옷... 우리 집에 일회용 가운 있으니까 일단 가서 씻어요, 오빠 집 가려면 아직 한참 있어야 하잖아요. 배 비서님한테 깨끗한 옷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면 되잖아요, 나는 이거 먼저 치울게요.”그런데 바닥을 치우던 노승아가 갑자기 손가락을 잡으며 신음을 내뱉었다.그 칠칠찮은 모습에 여이현은 낮게 잠긴 목소리로 한소리 했다.“그냥 입주 가정부를 구하는 게 어때? 집에 밴드 있어?”“혼자 지내는 거 좋아해요, 밴드는 아마 있을 텐데, 내가 찾아볼게요.”“어딨는데, 내가 가져올게.”짤막하게 말하던 여이현은 피가 멈추지 않는 노승아의 손가락을 보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너 지금 못 찾잖아, 그러
여이현은 몇 초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3일 뒤 F 국 가는 티켓 끊어놔, 온지유 이름으로.”“네.”배진호의 대답이 들리자 차에서 내린 여이현은 수려원 안으로 들어갔다.그 사이 주방에서 바쁘게 돌아다니던 온지유는 여이현이 현관을 지날 때 마침 다 된 음식들을 들고나오며 말했다.“왔어요? 마침 준비 다 했는데, 얼른 밥 먹어요.”여이현을 한번 쳐다본 온지유는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그런데 여이현은 또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눈썹을 치켜세우고 온지유에게로 다가갔다.온지유도 그제야 여이현 셔츠에 번진 자국을 볼 수 있었다.“아주머니, 가서 남은 음식들 좀 들고나와 주세요.”“당신은 일단 가서 씻어요, 옷은 내가 찾아놓을게요.”온지유는 말을 하며 앞치마를 벗었다.여이현 옷에 가득한 자국에 대해서는 일절 묻지 않고 표정도 평온하기 그지없는 모습에 참다못한 여이현이 입을 열었다.“온지유, 너는 네가 정말 좋은 아내라고 생각해?”여이현과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았던 온지유가 차분함을 유지한 채 답했다.“말하고 싶으면 당신이 알아서 말하겠죠.”온지유의 말은 여이현이 말하지 않는 일이면 굳이 물을 필요도 없다는 뜻이었다.그리고 여이현이 노승아와 같이 있다 온 걸 알기에 온지유는 그 자국의 출처가 알고 싶지도 않았다.“석훈 씨한테 연락할까요?”“됐어.”말을 마친 여이현은 온지유를 지나쳐갔지만 온지유는 이내 그 뒤를 따라가 갈아입을 옷을 찾아주었다.그렇게 검은색 홈웨어를 든 온지유는 화장실 문을 두드리고 말했다.“옷 여기 찾아놨어요.”“들고 들어와.”여이현의 말에 온지유는 한숨을 쉬며 화장실 문을 열었지만 입구에만 서 있었다.그런 온지유를 본 여이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가 팔이 그렇게 길진 않아.”그 말에 온지유가 할 수 없이 몇 발자국 더 가자 여이현은 온지유를 끌어당겨 벽에 붙이고는 도망가지 못하게 가두어버렸다.열기로 가득한 욕실에서 고개를 숙인 채 드러낸 온지유의 목선은 오늘도 여이현을 흔들어놓았다.
온지유 한번 바로 본 여이현이 차갑게 말했다.“들어오라고 해.”그에 온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술만 말아 물고 있었는데 그사이에 안으로 들어온 노승아가 여이현에게로 다가왔다.온지유는 노승아를 보진 않았지만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리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오빠, 옷 가져왔어요.”집으로 온 노승아는 이미 초록색 원피스로 갈아입고 있었고 그 위로 여전한 웨이브 머리를 하고 있어 사람이 더 날씬해 보였다.“뭐 이런 거로 여기까지 직접 와.”그때 온지유는 무의식적으로 여이현을 바라봤다.표정은 아까와 다름없었지만 말은 노승아를 걱정하는 듯한 내용이었다.“내가 직접 안 가져오면 마음이 불편해서요. 그런데 밥 먹고 있었네요, 이거 온 비서님이 하신 거죠? ”“응.”여이현이 담담히 대답하자 노승아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온지유를 바라보며 물었다.“온 비서님, 나도 먹어봐도 돼요? 나 오늘 마침 시간도 비는데, 요리 좀 가르쳐 주면 안 돼요?”“수저 준비해 줄게요. 요리 배우는 건 제가 좀 바빠서 시간이 없네요.”단호하게 거절한 온지유가 아주머니를 불렀다.“아주머니, 여기 수저 좀 준비해 주세요.”“네, 사모님.”아주머니가 이내 수저를 들고 오자 노승아는 자연스레 여이현의 옆자리로 가 앉았다.온지유는 아무리 여이현과 결혼한 거나 다름없는 사이라 해도 아직까지 외부에 알려진 여이현 부인은 자신이었기에 이렇게 위아래 모르고 달려드는 노승아가 못마땅하여 아주머니에게 말했다.“아주머니, 과일 좀 부탁해요. 노승아 씨 식사 끝나면 드리세요.”물론 노승아도 온지유의 뜻을 알아차렸지만 시치미를 떼고 갈비를 집어 먹고는 말했다.“고마워요, 비서님. 와, 근데 요리 엄청 잘하시네요,나 좀 가르쳐주면 안 돼요?”노승아는 여우답게 먼저 온지유를 추켜세우고 바로 부탁을 해왔다.“오빠, 언니 일 좀 쉬게 해줘요, 네?”노승아가 여이현을 보며 애교를 부리는 모습에 온지유가 입을 열었다.“밥 다 먹으면 가르쳐 줄게요.”노승아의 부탁이라면
구구절절 옳은 말만 하는 온지유에 열이 받은 노승아는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하지만 그녀의 이성이 침착하라고 얘기해주고 있었기에 노승아는 표정을 굳히고 말을 이었다.“그렇게 잘난 척할 건 없지 않나, 오빠가 당신을 외부에 공개한 적도 없잖아요. 그리고 오빠가 더 감싸는 건 저예요.”말을 마친 노승아는 과일칼을 집어 들고 온지유에게 건네며 말했다.“비서님, 이제 야채 써는 것 좀 알려줘요.”온지유는 그 칼을 받아들지 않고 미간을 찌푸리며 아주머니를 불렀다.“아주머니, 나는 인내심이 없어서 아주머니가 노승아 씨한테 야채 손질하는 법 좀 가르쳐줘요.”온지유가 칼을 받지도 않고 가르치려 들지도 않는 걸 본 노승아는 표정이 굳어졌다.제 계획을 실행할 수 없게 되자 흥미가 사라진 노승아는 칼을 도마 위로 던지며 말했다.“됐어요, 내가 일이 있는 걸 깜빡했어요, 나중에 다시 와서 배울게요.”아까는 배우겠다더니 이렇게 갑자기 말을 바꾸는 노승아를 아주머니도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었다....그때 거실로 나온 노승아는 제가 여이현에게 가져다준 옷이 소파에 던져져 있는 걸 보았다.그리고 마침 온지유가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그에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난 노승아는 그 옷을 가지러 가는 척하며 뒤로 넘어지며 테이블 위에 물건들을 떨어트렸다.그리고 이내 붉어진 눈시울을 하고 소리를 질렀다.“온 비서님, 이건 내가 오빠한테 미안해서 가지고 온 거예요. 나 가르치기 싫으면 아까 바로 거절하지 오빠 앞에서는 알겠다고 하다가 왜 이제 와서 나를 밀치는 건데요?”가수가 배우 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물오른 연기를 보여주는 노승아에 온지유는 헛웃음이 나왔다.“노승아 씨, 여이현 씨가 누굴 연기 선생님으로 붙여준 거예요?”온지유는 무릎에 손을 올린 채 몸을 앞으로 숙이며 얼굴에는 웃음을 띠고 물었다.물론 그 웃음 속에 가소로움이 담겨있는 걸 노승아도 보아냈지만 노승아는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나 가르치기 싫어서 아주
문지원은 어른을 마주하는 것 같았다.“아무것도 아니에요.”지석훈은 그녀가 반쯤 울리는 것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나한테도 속일 생각하고 있어?”문지원은 뭐라고 대답할 생각이 없었다.지석훈은 그녀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은 듯 다른 말로 그녀를 앉혀 식사 하게 하였다.마침, 문지원은 급하게 회사에서 나와서 아직 먹지 않았다.오늘뿐만 아니라, 요 며칠 동안 주주들과 상의 하느라 바빠서 그녀는 종종 하루에 두 번, 심지어 하루에 한 번 밥을 먹었다.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초췌하여 지 씨 아버지께서 한눈에 알아차리지 않았을 것이다.지석훈은 병원 식당에서 준비한 도시락을 가져왔다.병원의 식당은 바깥 식당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영양 균형이 잘 잡혀 있다. 그는 마치 진작에 그녀와 함께 식사하기로 계획한 것처럼 미리 두 개를 준비하였다.조용히 도시락을 먹으며 문지원은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하여 지석훈이 입을 열었을 때도 반응하지 못하였다.“요즘 뜻대로 안 돼?”“조금.”문지원은 무의식으로 대답하고 살짝 굳었는데 지석훈은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지 의사 선생님, 계세요?”밖에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곧 수술이 있기에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네, 알겠어요.”지석훈이 대꾸하자 곧 밖에 있던 사람들이 급히 떠났다.문지원은 이제야 그녀가 바빠서 몸을 뺄 수 없다는 것은 사실 선츠도 비슷하고, 심지어 지나쳐도 모자랄 정도였다는것을 깨달았다. 의사는 워낙 바쁜 직업이라.그런데 그는 이렇게 바쁜데도 시간을 내서 문지원을 위로하려고 하다니... 문지원은 갑자기 양심이 은근히 아파 났다.지석훈은 한쪽에 걸려 있는 흰 가운 외투를 입고 문지원을 쳐다보았다.“난 먼저 일하러 갈게 넌 여기 있을래 아니면 먼저 돌아갈래? 먼저 돌아가면 저녁에 널 찾으러 갈게.”문지원은 도시락을 다 먹고 내려놓았다. “먼저 돌아가 있을게요.”지석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떠났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돌아간 후 지석훈이 그녀를
그 남자는 분명히 강윤슬한테 평범한 사람이 아닐 것이니 문지원은 돌아가서 주의하기로 결정했다.“화닝 빌딩의 프로젝트에 대해 귀 그룹의 요구 사항을 문정 그룹에서 보았어요. 우리 그룹에서는 두 가지 사항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첫째, 우리는 보수와 지불이 불균형하다고 생각해요. 귀사는 모든 재료를 최고 수준으로 배분할 것을 요구하지만, 이익은 10% 미만만 이에요.”“둘째, 우리는 자체 인력이 있으며, 채용 측면에서 귀 그룹에서는 간섭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해요.”이것이 바로 문지원이 오늘에 온 목적이었다.문지원은 성격이 매우 좋은 사람이기에 일반적으로 갑방이 제시한 조건이 너무 지나치지 않으면 그녀는 그 조건들을 진지하게 경청하지만 이번에 강윤슬은 너무 심했다.심지어 강윤슬 자신조차도, 한 짓이 좀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갑방이 협력 파트너에게 이래라저래라 심지어 무슨 사람을 쓰는지까지 상관 한다니 한 일이 너무 심했다. 그리고 10%도 안 되는 이윤을 양보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계약서에서 말하는 ‘두 그룹이 함께 이기자'는 말장난을 하는 것은 문자께임으로 사람을 놀리는 거짓말인 것같앗다.강윤슬은 그녀가 왜 왔는지 진작 알고 있기 하나도 놀라지 않았다. “너무하다고?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고객이 신이라는 말은 누구나 다 알아.”“고객이 이렇다 하지만 갑방이 프로젝트를 당신들에게 맡기고 당신들도 받아들였는데 지금 할 수 없다고 하면 계약을 위반한 것이야. 계약을 위반하면 두 배의 계약금을 물어내야 하는데, 이 돈을 문정 그룹에서 감당할 수 있어?”그 전에 문지원은 강윤슬에 대해 악감정이 없었다.비록 그녀와 지석훈은 알려지지 않은 과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문지원은 정말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그녀는 상대방의 악의를 느낄 수 있지만, 왜 사람들은 모두 근거 없는 악의를 가지고있는지 몰랐다.문지원은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강윤슬 씨, 저에게 불만이 있으면 저에게 말해주세요. 그러나 협력에서 무리한 요구를 하지 말았
문지원은 강윤슬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반드시 가야 했다.한바탕 망설인 후, 그녀는 빠르게 결정 하였다. 가야 할 바엔 가자, 무슨 칼산 불바다도 아니고...강윤슬이 근무하는 회사는 규모가 상당했고, 국내에서 100위 안에 드는 대기업이다. 큰 회사답게 프런트 데스크 직원도 교육이 잘 되어 있다.“문 대표님, 강윤슬 대표님이 위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프런트 데스크에서 엘리베이터로 안내하였다. “이쪽으로 오세요.”문지원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 있는 강윤슬의 사무실에 도착했다.문지원은 강윤슬이 기다릴 줄 알았는데 그녀의 비서가 말했다.“대표님이 회의하느라 바쁘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문지원은 이 말투가 아주 익숙하였다. 그녀는 강윤슬이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것 같았다.그녀가 소심인 배 한 것이 아니라 전화는 부재중이고,직접 왔는데 바쁘다고 하니, 일부러 그녀를 피하는 것 같았다.문지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협력을 위해 특별히 진심으로 여러분을 찾아왔는데 만약 여러분이 문 씨와 협력할 마음이 없다면, 직접 말하면 될 테니 저를 원숭이로 놀릴 필요는 없어요.”“그럴 리가요.”비서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 하였다.아마도 그들은 생김새가 온화하고 사람들에게도 대부분 선의를 가진 문지원이 이렇게 기세등등한 면이 있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뭐라고 하든 간에 문지원은 이미 결정하였다. “5분, 5분만 더 기다릴게요.”“5분후에 오지 안으면 합작이 무산된 걸로 칠 것이에요.”협력은 물론 중요하지만, 자신의 체면을 땅에 떨어뜨리는것은 안 되였다. 적어도 문지원은 그런 천덕꾸러기가 아니었다.그녀는 강윤슬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몰랐지만 언젠간 알게 될 것이니 급하지 않았다.5분이 지나자, 문지원은 떠날 준비를 했다.강윤슬은 하이힐에 리듬을 타며 느릿느릿 걸어왔다.“일이 좀 있어서 늦었어. 죄송하네.”그녀는 손을 내밀고 입가에 선의의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빛으로 문지원을 응시하
“조금만 더 늣더라도 아이를 볼 수 있을거야!” 강윤슬은 여기 오기전에 문지원의 상황을 알아보았기에 그녀의 금황을 알고 있었다. 강윤슬은 지금 기분이 좀 상해 있었다.그녀는 산에서 구출된 여자들을 경멸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아이를 낳았다고 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날을 누가 알가? 누군가 문지원을 건드린 적이 있는지.문지원의 머리는 세게 부딪힌 것만 같았다. 한바탕 격동이 지나간 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려고 손가락을 움직였지만, 자신이 지금 자는 척하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섣불리 눈을 뜨면 오해받을 수 있기에 문지원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기다리는 과정이 특히 길고 견디기 어려웠는데 마침내 그녀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나는 지원 씨를 관심하니 그런 것과는 무관해.”지석훈은 담담하게 말했다.이 몇 글자는 문지원의 마음속에서 순간 잔잔한 물결을 일으켰다.이 말을 들은 강윤슬의 얼굴은 창백해지기 시작 하였다.“지석훈, 너 진심이야?”“응, 난 이전 너한테 예전같은 마음이 없어.”말하면서 지석훈은 돌아섰다.“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를 바래.”강윤슬은 남자의 무자비한 모습을 보며 자신이 남긴 쓴맛을 맛보았다. 이 쓴맛은 옛날 지석훈만 느낄 수 있었던 감정이었다.그녀는 모욕을 참지 못하고 성을 내며 병실을 떠났다.문지원은 계속 자는 척하고 하려 하였는데 머리 위에서 지석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계속 자는 것처럼 있을 거야?”문지원은 천천히 눈을 뜨면서 그를 향해 어색하면서도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배고파? 먹을 것 좀 갖다 줄까?”문지원은 난처해하고 있기에 간절히 바랐다.지석훈은 잠시 나갔다가 돌아올 때 그녀에게 따뜻한 죽 2인분을 가져왔다.문지원이 자신을 보자 그는 천천히 포장을 풀면서 말했다.“나도 마침 배가 고파서 너랑 같이 먹을 거야”문지원은 아주 행복하다고 느꼈다.그녀는 병원에서 이삼일 휴양하고 퇴원했다. 안 그래도 큰 문제는 없는데 그냥 좀 피곤한데 갑자기 저혈당까지 돌발하였기에 쓰러진
깜짝 놀란 지석훈은 급히 문지원을 데리고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그녀가 수면부족으로 쓰러진 것을 알자 지석훈은 무력하고 마음이 약해졌다.“넌 왜 자신을 이렇게 돌보고 있어?”지석훈은 병석 앞에서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문지원은 아직 혼수상태기에 아쉽게도 듣지 못했다. 병원에서 문지원에게 포도당 점액을 처방하여 지금 그 수액을 맞고 있다. 아마도 그녀는 충분히 자야 깨어날 것 같았기에 지석훈은 급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미 사람을 찾았고 자신이 직접 그녀를 지켜볼 수 있으니까.“지석훈!”강윤슬이 급히 병실로 뛰여 들어오자 지석훈이 밤을 새워도 잠깐 눈붙일 생각을 하지않고 가만히 병석 앞에서 지켜보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강윤슬이 들어온 것을 보자 지석훈은 무표정하게 말했다.“당신 여긴 왜 왔어?”그의 말투는 아주 평범했지만, 그의 눈빛에는 조그마한 눈물이 고였다. 그는 진작에 마음을 내려놓았기에 그녀에 대해 예전의 느낌은 없었으나 강윤슬은 아직 내려놓지 못하였다.그녀는 원래 지석훈한테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손에 있는 일도 돌볼 겨를 없이 서둘러 왔는데 그는 다른 여자 곁을 지키고 있었다.강윤슬은 손바닥의 부드러운 살을 꼬집으며 입가에 보기 싫은 미소를 지었다.“석훈 씨가 괜찮다니 정말 다행이네, 일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 다친 줄 알았어.”말한 후 강윤슬은 병석에 누워있는 문지원을 보며 말했다.“문지원 씨는 괜찮아?”문지원은 눈꺼풀을 움직였지만 뜨지 않았다. 사실 강윤슬이 왔을 때 그녀는 이미 깨어 있었지만 자는 척하였다.강윤슬은 눈을 반짝이며 방금 문지원이 약간 흔들린 눈꺼풀을 보고 자신이 잘못 본 것인가 의심하였다.지석훈은 병석에 있는 문지원을 바라보았지만, 전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일이 좀 생겼는데 사람은 괜찮아.”강윤슬은 마음이 더욱 쓰라렸다. “사람이 괜찮은데 왜 여전히 여기에서 지키고 있어?”“병원에 그렇게 많은 환자가 있는데 당신이 이렇게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네.”지석훈은 얼굴을
문지원은 지석훈만 홀로 남겨서 이 모든 상황을 마주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안에는 그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마지막으로 문지원은 그 지석훈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후시경을 통해 보이는 그의 날씬한 실루엣은 차가 나아갈수록 서서히 멀어졌지만 여전히 당당한 모습이 역력했다.문지원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참으며 힘껏 가속 페달을 밟았다.차는 마치 활시위에서 쏘아 올린 화살처럼 순식간에 도로를 벗어나 달려 나갔다.곧바로 마을 사람들은 손에 곡괭이를 들고 몰려와 지석훈을 완전히 포위했다....한편 마을의 경찰서에는 한 통의 신고 전화가 접수되었다.신고자는 네 명의 갇힌 여성을 데리고 경찰서에 도착해 신고했으며 그 모습을 본 경찰 내부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신원 확인 후 이들 여성의 몸에는 장기간 감금과 학대의 흔적이 분명하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마을에 아직 한 사람이 남아 있어요. 그 사람을 꼭 구출해 주세요.”문지원은 지친 목소리로 경찰을 바라보며 애원했다.그녀는 중간에 한 번도 쉬지 않고 밤새도록 차를 몰았다. 식사 대신 몇 모금의 물만 마셨다.이제는 배고픔과 피로에 시달려 눈꺼풀이 무겁지만 문지원은 결코 쓰러질 수 없었다.그 이유는 지석훈이 아직 남아있었기 때문이다.경찰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아직도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고요?”“네. 이름은 지석훈. 마을에 의료 봉사하러 간 의사예요.”문지원은 지석훈에 관한 기본 정보를 말했다.“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지만 마을 사람들이 빼앗을 가능성도 있어요. 이번에 우리가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던 건 다 그 사람 덕분이에요.”그런 사람이 그토록 황량한 산골짜기 같은 곳에 남아 있다는 사실에 경찰서 사람들은 바로 회의를 열어 구조대를 꾸려 밤새도록 그 마을을 수색하기 시작했다.문지원도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경찰들은 그녀의 상태를 보고 처음엔 단호히 반대했다.하지만 문지원은 고집스럽게 말했다.“안 돼요. 꼭 가야 해요. 그 사람이 무사한지 제가 직접 확인해야
지석훈은 그녀들을 방 안으로 들인 후 여성들이 마을에서 겪은 처참한 상황을 듣고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문지원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이들을 데리고 나가고 싶어요. 그들은 원해서 여기에 남아 있는 게 아니에요. 이 산 너머에는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이곳에 남아 그들의 아이 낳는 도구가 되어 살아갈 이유는 없어요.”그 말에 문지원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잠시 침묵에 빠졌다.조수현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들 중 일부는 이미 아이를 낳은 상태였고 이곳을 떠난다는 건 곧 자신의 아이를 두고 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어머니로서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없는 일이었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이곳에 남아 계속 학대받으며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문지원은 지석훈이 망설일까 봐 서둘러 덧붙였다.“서둘러야 해요. 마을 사람들이 곧 우리가 사라진 걸 눈치챌 거예요. 그들이 우리를 찾으러 오는 건 시간문제라고요. 우린 석훈 씨한테 폐 끼칠 생각 없어요. 그저 차 한 대만 빌려주면 돼요.”마을 밖으로 나가는 길은 분명히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석훈이 여기까지 들어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차만 있다면 충분히 탈출할 수 있었다. 문지원은 운전을 할 줄 알았기에 본인이 직접 운전해서 모두를 데리고 탈출할 생각이었다.“걱정할 필요 없어요. 차는 빌려줄 테니까.”지석훈의 말에 문지원은 예상했던 대답이었음에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른 사람들은 더욱 기뻐하며 얼굴에 희망을 띄웠다.눈앞에 놓인 탈출의 기회에 모두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지석훈은 곧장 차를 가지러 갔다. 차 한 대에 모든 인원을 태울 수는 없었지만 최대한 몸을 붙이면 간신히 탈출할 수 있는 인원이었다.문지원은 재빠르게 조수현과 다른 여성들을 차에 태운 후 지석훈이 계속 말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근데 아까부터 왜 말이 없어요? 같이 안 갈 거예요?”지석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눈치 못 챘어? 이들은 남자한테 극도로 두려움을 느끼고 있어. 몇몇은 나랑 눈도 못 마
문지원은 상의도 걸치지 않고 바지만 입은 채 허겁지겁 뛰쳐나오는 서 씨를 보고 역겨움을 느꼈지만 동시에 조수현의 안전이 걱정되었다.밤은 깊었고 어둠이 표정을 가려주어 다행히 아무도 그녀의 속내를 눈치채지 못했다.마을 사람들은 여자들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이 마을에서 여자는 그저 아이를 낳는 도구에 불과했다.특히 지금처럼 큰불이 난 상황에서는 더더욱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게다가 문지원은 마을 사람들에게 순종적인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에 그들이 보기엔 그녀가 도망칠 가능성이 없었다.마을 이장은 불이 난 원인을 물었지만 문지원은 적당한 핑계를 대며 얼렁뚱땅 넘어갔다.남자들이 불 끄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문지원은 몰래 서 씨의 집으로 향했다.서 씨의 집 안에서 조수현은 밖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처음에는 잔뜩 겁을 먹었지만 문지원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상황을 직감했다.“불... 지원 씨가 낸 거예요?” 조수현은 놀라서 물었다.“너무 대담한 거 아니에요?”문지원은 그녀를 힘껏 일으키며 말했다.“지금 그런 얘기할 때가 아니에요. 지금이 기회예요. 얼른 따라와요. 그리고 마을에 갇혀 있는 다른 여자들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죠? 그들도 함께 데리고 나가요. 오늘 밤 무조건 도망쳐야 해요.”“하지만… 우리 어떻게 도망쳐요?”조수현은 주저했다.이 마을은 외부와 단절된 깊은 산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사방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차를 타고 오가는 것도 며칠이 걸릴 정도였다.더군다나 이들은 힘없는 여자들뿐이어서 교통수단도 없이 걸어서 나가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하지만 문지원은 이미 계획을 세운 상태였다.“마을에 온 그 의사를 찾아갈 거예요. 그들이 이곳까지 들어왔다는 건 나가는 길도 알고 있다는 뜻이에요.”“낮에 그들이 타고 온 차도 봤어요. 게다가 마을 사람들은 의사들에게는 함부로 못 하니까 그가 도와주기만 한다면 우린 반드시 나갈 수 있어요.”문지원의 결연한 눈빛을 보며 조수현도 점차 용기를 얻었다.“좋아요. 나도 따
문지원은 순진한 척하며 말했다.“알겠어요. 그냥 한번 물어본 거예요. 전 당연히 그 사람과 거리를 둘 거예요.”김숙희는 그제야 안심했다.그리고 문득 예전에 아들에게 이 여자를 데려오게 한 자신의 결정이 얼마나 선견지명이었는지 새삼 실감했다.김숙희는 문지원에게 쌀을 씻으라고 시켰고 그녀가 일을 끝마쳤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 있었다.문지원은 조수현의 처지를 떠올리며 점점 마음이 무거워졌다.오늘 밤 그녀는 실행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갇혀 있는 여자들이 언제쯤 다시 자유를 찾을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었다.밤이 되자 문지원은 지하 저장고에서 술을 꺼냈다.김숙희는 아까운 듯 술을 바라보며 소리쳤다.“그걸 왜 꺼내는 거야. 어서 다시 넣어둬. 그건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나 마시는 거란 말이야. 잔칫날도 아닌데 그걸 마시는 건 너무 낭비야.”문지원은 일부러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듣기로는 마을에 있는 그 의사가 수호 오빠의 다리를 고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오빠 다리가 곧 나을지도 모르니 축하하는 의미로 한잔하면 어떨까 싶어서요.”김숙희의 눈빛이 흔들렸다.문지원 혼자 즐기려는 거였다면 단호하게 반대했을 거지만 아들을 위해 축하한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진수호도 유혹에 넘어가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엄마 어차피 조금만 마시는 건데 괜찮잖아요. 이 술 지하에서 먼지만 쌓이고 있는데... 내 다리가 낫는다는데 엄마는 기쁘지도 않으세요?”“그럴 리가. 당연히 기쁘지.”김숙희는 단번에 부정했지만 결국 아들과 문지원의 부추김에 못 이겨 이를 악물고 술을 개봉했다.그 술은 사실 그저 평범한 황주였다.조금만 마시면 별문제가 없을 터였지만 좋은 일이 겹친 데다 진수호는 쾌락을 즐기는 성향이 강한 사람이어서 한순간 자제력을 잃고 지나치게 마셔버린 것이다.김숙희도 덩달아 함께 취했다.오직 문지원만이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한 잔 더.”진수호는 술에 취해 술버릇이 나왔다. “빨리 한 잔만 더 줘.”문지원은 시험 삼아 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