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 한번 바로 본 여이현이 차갑게 말했다.“들어오라고 해.”그에 온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술만 말아 물고 있었는데 그사이에 안으로 들어온 노승아가 여이현에게로 다가왔다.온지유는 노승아를 보진 않았지만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리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오빠, 옷 가져왔어요.”집으로 온 노승아는 이미 초록색 원피스로 갈아입고 있었고 그 위로 여전한 웨이브 머리를 하고 있어 사람이 더 날씬해 보였다.“뭐 이런 거로 여기까지 직접 와.”그때 온지유는 무의식적으로 여이현을 바라봤다.표정은 아까와 다름없었지만 말은 노승아를 걱정하는 듯한 내용이었다.“내가 직접 안 가져오면 마음이 불편해서요. 그런데 밥 먹고 있었네요, 이거 온 비서님이 하신 거죠? ”“응.”여이현이 담담히 대답하자 노승아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온지유를 바라보며 물었다.“온 비서님, 나도 먹어봐도 돼요? 나 오늘 마침 시간도 비는데, 요리 좀 가르쳐 주면 안 돼요?”“수저 준비해 줄게요. 요리 배우는 건 제가 좀 바빠서 시간이 없네요.”단호하게 거절한 온지유가 아주머니를 불렀다.“아주머니, 여기 수저 좀 준비해 주세요.”“네, 사모님.”아주머니가 이내 수저를 들고 오자 노승아는 자연스레 여이현의 옆자리로 가 앉았다.온지유는 아무리 여이현과 결혼한 거나 다름없는 사이라 해도 아직까지 외부에 알려진 여이현 부인은 자신이었기에 이렇게 위아래 모르고 달려드는 노승아가 못마땅하여 아주머니에게 말했다.“아주머니, 과일 좀 부탁해요. 노승아 씨 식사 끝나면 드리세요.”물론 노승아도 온지유의 뜻을 알아차렸지만 시치미를 떼고 갈비를 집어 먹고는 말했다.“고마워요, 비서님. 와, 근데 요리 엄청 잘하시네요,나 좀 가르쳐주면 안 돼요?”노승아는 여우답게 먼저 온지유를 추켜세우고 바로 부탁을 해왔다.“오빠, 언니 일 좀 쉬게 해줘요, 네?”노승아가 여이현을 보며 애교를 부리는 모습에 온지유가 입을 열었다.“밥 다 먹으면 가르쳐 줄게요.”노승아의 부탁이라면
구구절절 옳은 말만 하는 온지유에 열이 받은 노승아는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하지만 그녀의 이성이 침착하라고 얘기해주고 있었기에 노승아는 표정을 굳히고 말을 이었다.“그렇게 잘난 척할 건 없지 않나, 오빠가 당신을 외부에 공개한 적도 없잖아요. 그리고 오빠가 더 감싸는 건 저예요.”말을 마친 노승아는 과일칼을 집어 들고 온지유에게 건네며 말했다.“비서님, 이제 야채 써는 것 좀 알려줘요.”온지유는 그 칼을 받아들지 않고 미간을 찌푸리며 아주머니를 불렀다.“아주머니, 나는 인내심이 없어서 아주머니가 노승아 씨한테 야채 손질하는 법 좀 가르쳐줘요.”온지유가 칼을 받지도 않고 가르치려 들지도 않는 걸 본 노승아는 표정이 굳어졌다.제 계획을 실행할 수 없게 되자 흥미가 사라진 노승아는 칼을 도마 위로 던지며 말했다.“됐어요, 내가 일이 있는 걸 깜빡했어요, 나중에 다시 와서 배울게요.”아까는 배우겠다더니 이렇게 갑자기 말을 바꾸는 노승아를 아주머니도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었다....그때 거실로 나온 노승아는 제가 여이현에게 가져다준 옷이 소파에 던져져 있는 걸 보았다.그리고 마침 온지유가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그에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난 노승아는 그 옷을 가지러 가는 척하며 뒤로 넘어지며 테이블 위에 물건들을 떨어트렸다.그리고 이내 붉어진 눈시울을 하고 소리를 질렀다.“온 비서님, 이건 내가 오빠한테 미안해서 가지고 온 거예요. 나 가르치기 싫으면 아까 바로 거절하지 오빠 앞에서는 알겠다고 하다가 왜 이제 와서 나를 밀치는 건데요?”가수가 배우 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물오른 연기를 보여주는 노승아에 온지유는 헛웃음이 나왔다.“노승아 씨, 여이현 씨가 누굴 연기 선생님으로 붙여준 거예요?”온지유는 무릎에 손을 올린 채 몸을 앞으로 숙이며 얼굴에는 웃음을 띠고 물었다.물론 그 웃음 속에 가소로움이 담겨있는 걸 노승아도 보아냈지만 노승아는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나 가르치기 싫어서 아주
여이현의 말에 노승아와 온지유 모두 의아했다.여이현의 옆에서 오랜 시간 같이 지내오며 비서일까지 하며 봐온 여이현은 이런 상황에서 온지유에게 노승아를 일으킬 것을 명령하는 게 정상인데 오늘은 아주머니에게 명령하는 게 이상했다.하지만 온지유는 별생각을 하지 않고 핸드폰만 들여다봤다.온지유는 나서서 자신의 결백을 밝히지도 않고 가만히 CCTV 영상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어차피 CCTV 만 보면 노승아의 만행이 다 드러날 테니까.그리고 노승아도 마찬가지로 여이현의 달라진 태도를 느낄 수 있었다.지금의 여이현은 노승아를 믿지 않고 있었다. 여이현의 차가워진 말투에서 그걸 느낄 수 있었다.그래서 노승아도 도박을 하고 있었다.2분 뒤, 경호원이 CCTV를 들고 나타났다.CCTV에는 노승아가 온지유를 지날 때 뒤로 넘어지는 게 찍혀있었다. 누군가에게 밀린 듯이 찍힌 영상이었다.그에 여이현은 차가운 표정으로 온지유를 보며 말했다.“사과해.”이건 명령이었다.CCTV가 있다고는 하나 가족들의 사생활을 위해서 360도 다 찍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사각지대에 노승아와 온지유가 찍혀 버린 것이다.하지만 여이현은 제가 직접 본 걸 토대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또 노승아는 여전히 자신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기에 그녀의 편을 들 수밖에 없었다.“싫다면요?”온지유는 여이현을 올려다보며 말했다.온지유가 아무리 괜찮은 척해도 그녀도 사람이었다.여이현이 불륜녀를 집에까지 끌어들이고 저더러 그에게 요리까지 가르치게 하고 이번에는 사과까지, 이미 온지유가 참을 수 있는 한계는 벗어난 지 오래였다.“오빠, 난 온 비서님 이해해요. 내 잘못이에요. 오빠랑 내가 너무 가까워서 그러는 걸 거에요.”그때 노승아가 또 끼어들며 불난 집에 부채질해댔다.그 말에 여이현의 눈빛이 점점 더 차가워지자 온지유가 헛웃음 터뜨리고는 말했다.“이건 애초에 노승아 씨 잘못이잖아요.”다른 사람의 가정을 깨뜨리는 불륜녀 주제에 당당한 게 화가 났던 온지유가
온지유는 아까도 이걸 발견했지만 노승아가 여이현이 저한테 화를 낼 거라는 착각을 하고 돌아가게 내버려 두었다.“그럼 아까는 왜 얘기 안 했어?”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여이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그에 온지유는 비아냥 대듯 말하고는 여이현을 지나쳐갔다.“여이현 씨가 이미 나를 안 믿는데 내가 뭐라고 한들 그 마음이 바뀌겠어요?”여이현은 말을 마치고 멀어져가는 온지유를 잡지도 못했고 그녀를 불러세우지도 못한 채 시선을 온지유의 등에 고정하고만 있었다....여이현이 담배에 불을 붙이자마자 노승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스피커 핸드폰으로 전화를 받자 노승아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나왔다.“오빠, 온 비서님한테 너무 뭐라 하지 마요. 내 잘못이에요. 이젠 내가 오빠 찾는 횟수도 좀 줄여볼게요.”“그러는 게 좋을 거야.”방금 까지만 해도 온지유에게 사과를 하라 지시하던 남자의 태도가 불과 몇 분 만에 바뀌자 어리둥절한 노승아였다.설마 자신을 믿지 않는 건가.아닌데, 그렇다기엔 CCTV에 다 찍혀있었기에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그래서 노승아는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입을 열려 했다.그런데 그때, 여이현이 먼저 차가운 말을 내뱉었다.“노승아, 더는 내 한계를 시험하지마.”말을 마친 여이현이 전화를 끊었고 핸드폰 너머에서 들리는 신호음 소리에 노승아는 잠시 벙쪄있었다.무슨 일이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노승아는 여기서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다시 여이현 옆자리로 돌아가기 위해서 노승아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온지유를 치워 낼 생각이었다.한편 담배를 다 핀 여이현은 아주머니를 불렀다.“위에 좋은 걸로 뭐 좀 만들어줘요. 지유 줄 거로요.”원래도 위가 좋지 않았는데 노승아가 온 뒤로는 통 밥을 먹지 않았던 온지유가 걱정되어 한 부탁이었다.“네,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1인분 정도는 빠르게 만들어 낸 아주머니가 온지유의 방으로 들고 들어가려 하자 여이현이 그를 불러세웠다.“잠깐만요.”여이현은 바로 음식을 받아들고 자신이 직접 2층으로
여이현은 음식을 온지유 앞에 들이밀며 말했다.“내가 먹여줘야 해?”차분하게 내뱉는 그 말에 온지유는 그가 정말 먹여줄 거라 생각 못 하고 냉정하게 거절했다.“먹고 싶지 않은 것도 당신이 주면 나는 억지로 먹어야 해요? 나는 그 정도 자유도 없는 사람이에요?”그 말에 여이현은 말없이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온지유 입가에 가져다 댔다.매일 같이 마주하던 차가운 눈이 아니라 온기가 있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상대에 온지유는 이 상황이 어리둥절해 났다.“밥은 먹어야지.”여이현은 평소와 달리 차분하게, 또 다정하게 말했다.그런 상황이 누구보다 불편했던 온지유는 숟가락을 빼앗듯이 받아들며 말했다.“내가 알아서 먹을게요.”여이현이 또 먹여주겠다고 나설까 봐 온지유는 허겁지겁 음식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그 모습을 본 여이현은 웬일로 물까지 건네주었다.“천천히 먹어, 목 막히겠다.”목이 막힌다기보다 여이현의 행동에 놀란 게 더 문제였던 온지유가 무슨 말이라도 하려 하자 여이현이 그녀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배 비서한테 티켓 끊어놓으라고 했어.”“F 국 가는 티켓이요?”“응.”믿기지 않는다는 듯 묻는 온지유에 여이현이 긍정의 대답을 해왔다.“부모님께 말씀드려놔, 너랑 내가 같이 사라지면 실종됐다고 걱정하실 수도 있잖아.”“네.”온지유는 입술을 말아 물며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아무래도 여이현은 병을 줬으니 약이라도 주려 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이번 여행이 둘의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이 될 것이다. 온지유는 더 이상 여이현을 따라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그때 여이현이 입을 열며 조심스레 말했다.“아까 CCTV 볼 때 네가 말이 없어서 인정하는 건 줄 알았어.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바로바로 얘기해줘.”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여이현은 제 눈으로 본 것만 믿는 사람이었기에 아까 상황에서도 자신이 본 걸 토대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지금 나한테 해명하는 거예요?”온지유는 오늘따라 이상한 행동을 하는 여이현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전에는 아무 말도 없다가 인제 와서 이런 얘기를 꺼내는 여이현에 온지유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전 대표님 비선데, 대표님 차고에 그 많은 차들 놔두고 왜 또 차를 사겠어요?”온지유는 여이현이 저를 곁에 두려고 이러는 줄 알고 거절의 뜻을 비쳤다.“나갈 때마다 내 차 타고 갈 순 없잖아, 계속 택시 잡는 것도 불편할 거고.”뒷좌석에 앉아있는 여이현은 온지유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그녀의 말투로부터 온지유가 이 일에 무관심하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제가 운전을 하는 건 공적인 일이 있을 때뿐입니다. 평소에 그냥 제 능력대로 천만 원 정도 하는 차를 샀다가 다른 사람들이 알기라도 하면 대표님이 창피하지 않으실까요? 그래도 대표 비서인데.”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하는 온지유에 입술을 말아 물던 여이현이 대답하려 하자 온지유가 좀 더 빨리 입을 뗐다.“만약 대표님이 사주신 슈퍼카를 끌고 다니면 그건 제 신분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니 또 그것대로 웃음거리가 되겠죠.”차가 없어도 일할 때는 여이현의 차를 타고 다니니까 온지유는 특별히 불편함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차피 곧 떠날 건데 지금에 와서 차는 더욱 필요 없는 존재였다.그런데 여이현은 오히려 온지유가 진심인 줄 알고 그녀를 위로해주었다.“삶은 네가 사는 거야, 남들 시선 너무 신경 쓰지 마.”온지유는 딱히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여이현이 왠지 예전과는 달라진 것 같았다.그렇게 둘은 평소와 다름없이 회사로 와 각자 할 일을 했다.그때 이채현보다도 일을 더 잘하는 송서연에 급해 난 이윤정이 온지유를 향해 말했다.“온 비서님, 비서님이 대표님을 모신지 7년이 다 돼가는데 정말 그만두실 거에요?”온지유가 그만두면 대표이사실에 이윤정, 고세리, 송서연만 남게 되기에 이윤정은 어떻게든 온지유를 설득해보려 했다.진예림과 최연욱이 온갖 추태를 부리며 감옥에 들어가는 걸 보고 난 뒤로는 고세리도 여이현이 온지유를 챙기는 걸 알고 저도 같은 처지가 될까 두려워 알아서 몸을 사리고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여이현은 강하임과 함께 가는 걸 택했다.“가죠.”혼자 남은 온지유는 강하임의 비서와 마주 보고 있는 건 불편했기에 박민재 아들의 만월 파티가 오늘이라는 걸 떠올리고는 백지희도 올 것 같아 백지희에게 연락하며 밖으로 나갔다.하지만 백지희가 전화를 받기도 전에 다른 친구들을 마주쳤다.“어머, 이게 누구야, 온지유잖아? 대표 비서 되더니 의리 같은 건 다 개나 줘버렸나?”“그러니까, 도세원한테 100만 원 던져주고 바빠서 오늘 못 나온다고 하지 않았어? 또 왜 온 거래?”“아까 룸에서 나오는 거 못 봤어?”“아, 친구들 볼 시간은 없고 대표 모실 시간은 있나 보지.”...처음에는 그들의 말을 무시하려 했던 온지유도 점점 도가 지나치는 말들에 그들을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그 입 다물어. 모르면 아무 말이나 지껄이지 마.”“뭐야, 고작 비서 주제에 어디서 뭐라도 된 척 명령이야, 네가 뭐 대표 와이프라도 된 줄 아는 거야?”단발머리를 한 여자 하나가 온지유를 째려보며 팔짱을 끼고 비아냥거렸다.“내가 대표님이랑 결혼하든 말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너희 집은 뭐 태평양이니?”“우리 집 태평양 아니지 당연히, 근데 난 너 같이 아무것도 없으면서 잘난 척하는 애들은 눈꼴이 시려서 두고 볼 수가 없어.”“그럼 눈을 감든가.”말은 순하면 사람의 도구로 쓰이고 사람은 착할수록 괴롭힘의 대상이 되기에 온지유는 바로 여자의 말을 받아쳤다.“그 개 같은 눈 감으라고.”“너 지금 나한테 개라 그랬니?”화가 난 여자가 팔을 들어 올려 온지유의 뺨을 때리려고 했지만 그 손목은 바로 온지유에게 잡혀버렸다.온지유를 때리지 못했다는 사실에 더 분해진 여자는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너희보고만 있을 거야? 좀 도와!”여자의 말에 다른 친구들이 하나둘 일어섰다.여자 하나면 온지유 혼자 상대가 가능하겠지만 이 무리가 한꺼번에 달려든다면 온지유도 별수가 없었다.온지유는 괜히 왔다가 집단 폭행만 당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는 데 그 어
이 여자들을 감옥에 넣을 수는 없어도 교육 정도는 가능하다고 생각했기에 전화를 건 것이다.“넌 진짜 정이라곤 하나도 없구나? 이 상황에 너처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야, 독한 년!”“내 눈엔 너희가 더 너무하고 더 독해! 나 아니었으면 너희들 지유 집단 폭행하고도 남았을 거야.”여자들이 이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생각에 치가 떨린 나민우가 그들을 질책했지만 단발머리 여자는 제 잘못은 모르고 계속 우겨댔다.“내가 날 보호한다는데 그게 뭐가 잘못된 거야?”그에 어이가 없어진 나민우가 뭐라 더 말하려고 하자 온지유가 그의 팔을 잡아 오며 말렸다.“그만해도 돼, 저런 애들이랑 말 섞어봤자 좋을 거 하나 없어.”그 순간 나민우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물론 온지유는 별 생각 없이 한 행동이겠지만 온지유만을 오랫동안 짝사랑해온 나민우는 제 팔을 잡아 오는 손길에 아무렇지 않을 수 없었다.너무 좋아하지만 좋아한다는 말조차 못 했던 여자가 제 팔을 잡아 오니 나민우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에 잠겼다.그리고 하필 이 모습을 다시 돌아오던 여이현이 보게 된 것이다.치켜뜬 눈에서 한기를 내뿜고 있는 여이현의 그 모습을 강하임도 눈여겨보고 있었다.이건 틀림없는 남자의 소유욕이었고 분노였다.“온 비서님, 왜 갑자기 이렇게 많은 사람들 틈에 섞여 있어요?”강하임은 차가운 표정으로 일부러 온지유를 크게 불렀다.그에 뒤를 돌아본 온지유도 여이현의 누구 하나 잡아먹을 듯한 그 특유의 냉한 표정을 보아낼 수 있었다.“이 사람들이 저한테 시비를 좀 걸어서요, 이미 경찰 불렀어요.”말을 하면서도 온지유는 강하임을 뚫어지게 쳐다봤다.하지만 이내 제 생각이 부질없음을 느꼈다.이 사람들은 다 제 동창이었고 만월 파티를 앞당긴 것도 모금을 위한 것이기에 강하임이 아무리 저를 싫어한다 해도 이런 판까지 짤 만큼 한가해 보이지는 않았다.그에 강하임도 웃으며 대꾸했다.“그럼 다행이네요. 대표님, 가서 물건부터 챙기시죠, 곧 있으면 불꽃 축제 시작하
문지원은 어른을 마주하는 것 같았다.“아무것도 아니에요.”지석훈은 그녀가 반쯤 울리는 것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나한테도 속일 생각하고 있어?”문지원은 뭐라고 대답할 생각이 없었다.지석훈은 그녀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은 듯 다른 말로 그녀를 앉혀 식사 하게 하였다.마침, 문지원은 급하게 회사에서 나와서 아직 먹지 않았다.오늘뿐만 아니라, 요 며칠 동안 주주들과 상의 하느라 바빠서 그녀는 종종 하루에 두 번, 심지어 하루에 한 번 밥을 먹었다.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초췌하여 지 씨 아버지께서 한눈에 알아차리지 않았을 것이다.지석훈은 병원 식당에서 준비한 도시락을 가져왔다.병원의 식당은 바깥 식당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영양 균형이 잘 잡혀 있다. 그는 마치 진작에 그녀와 함께 식사하기로 계획한 것처럼 미리 두 개를 준비하였다.조용히 도시락을 먹으며 문지원은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하여 지석훈이 입을 열었을 때도 반응하지 못하였다.“요즘 뜻대로 안 돼?”“조금.”문지원은 무의식으로 대답하고 살짝 굳었는데 지석훈은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지 의사 선생님, 계세요?”밖에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곧 수술이 있기에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네, 알겠어요.”지석훈이 대꾸하자 곧 밖에 있던 사람들이 급히 떠났다.문지원은 이제야 그녀가 바빠서 몸을 뺄 수 없다는 것은 사실 선츠도 비슷하고, 심지어 지나쳐도 모자랄 정도였다는것을 깨달았다. 의사는 워낙 바쁜 직업이라.그런데 그는 이렇게 바쁜데도 시간을 내서 문지원을 위로하려고 하다니... 문지원은 갑자기 양심이 은근히 아파 났다.지석훈은 한쪽에 걸려 있는 흰 가운 외투를 입고 문지원을 쳐다보았다.“난 먼저 일하러 갈게 넌 여기 있을래 아니면 먼저 돌아갈래? 먼저 돌아가면 저녁에 널 찾으러 갈게.”문지원은 도시락을 다 먹고 내려놓았다. “먼저 돌아가 있을게요.”지석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떠났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돌아간 후 지석훈이 그녀를
그 남자는 분명히 강윤슬한테 평범한 사람이 아닐 것이니 문지원은 돌아가서 주의하기로 결정했다.“화닝 빌딩의 프로젝트에 대해 귀 그룹의 요구 사항을 문정 그룹에서 보았어요. 우리 그룹에서는 두 가지 사항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첫째, 우리는 보수와 지불이 불균형하다고 생각해요. 귀사는 모든 재료를 최고 수준으로 배분할 것을 요구하지만, 이익은 10% 미만만 이에요.”“둘째, 우리는 자체 인력이 있으며, 채용 측면에서 귀 그룹에서는 간섭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해요.”이것이 바로 문지원이 오늘에 온 목적이었다.문지원은 성격이 매우 좋은 사람이기에 일반적으로 갑방이 제시한 조건이 너무 지나치지 않으면 그녀는 그 조건들을 진지하게 경청하지만 이번에 강윤슬은 너무 심했다.심지어 강윤슬 자신조차도, 한 짓이 좀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갑방이 협력 파트너에게 이래라저래라 심지어 무슨 사람을 쓰는지까지 상관 한다니 한 일이 너무 심했다. 그리고 10%도 안 되는 이윤을 양보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계약서에서 말하는 ‘두 그룹이 함께 이기자'는 말장난을 하는 것은 문자께임으로 사람을 놀리는 거짓말인 것같앗다.강윤슬은 그녀가 왜 왔는지 진작 알고 있기 하나도 놀라지 않았다. “너무하다고?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고객이 신이라는 말은 누구나 다 알아.”“고객이 이렇다 하지만 갑방이 프로젝트를 당신들에게 맡기고 당신들도 받아들였는데 지금 할 수 없다고 하면 계약을 위반한 것이야. 계약을 위반하면 두 배의 계약금을 물어내야 하는데, 이 돈을 문정 그룹에서 감당할 수 있어?”그 전에 문지원은 강윤슬에 대해 악감정이 없었다.비록 그녀와 지석훈은 알려지지 않은 과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문지원은 정말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그녀는 상대방의 악의를 느낄 수 있지만, 왜 사람들은 모두 근거 없는 악의를 가지고있는지 몰랐다.문지원은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강윤슬 씨, 저에게 불만이 있으면 저에게 말해주세요. 그러나 협력에서 무리한 요구를 하지 말았
문지원은 강윤슬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반드시 가야 했다.한바탕 망설인 후, 그녀는 빠르게 결정 하였다. 가야 할 바엔 가자, 무슨 칼산 불바다도 아니고...강윤슬이 근무하는 회사는 규모가 상당했고, 국내에서 100위 안에 드는 대기업이다. 큰 회사답게 프런트 데스크 직원도 교육이 잘 되어 있다.“문 대표님, 강윤슬 대표님이 위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프런트 데스크에서 엘리베이터로 안내하였다. “이쪽으로 오세요.”문지원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 있는 강윤슬의 사무실에 도착했다.문지원은 강윤슬이 기다릴 줄 알았는데 그녀의 비서가 말했다.“대표님이 회의하느라 바쁘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문지원은 이 말투가 아주 익숙하였다. 그녀는 강윤슬이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것 같았다.그녀가 소심인 배 한 것이 아니라 전화는 부재중이고,직접 왔는데 바쁘다고 하니, 일부러 그녀를 피하는 것 같았다.문지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협력을 위해 특별히 진심으로 여러분을 찾아왔는데 만약 여러분이 문 씨와 협력할 마음이 없다면, 직접 말하면 될 테니 저를 원숭이로 놀릴 필요는 없어요.”“그럴 리가요.”비서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 하였다.아마도 그들은 생김새가 온화하고 사람들에게도 대부분 선의를 가진 문지원이 이렇게 기세등등한 면이 있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뭐라고 하든 간에 문지원은 이미 결정하였다. “5분, 5분만 더 기다릴게요.”“5분후에 오지 안으면 합작이 무산된 걸로 칠 것이에요.”협력은 물론 중요하지만, 자신의 체면을 땅에 떨어뜨리는것은 안 되였다. 적어도 문지원은 그런 천덕꾸러기가 아니었다.그녀는 강윤슬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몰랐지만 언젠간 알게 될 것이니 급하지 않았다.5분이 지나자, 문지원은 떠날 준비를 했다.강윤슬은 하이힐에 리듬을 타며 느릿느릿 걸어왔다.“일이 좀 있어서 늦었어. 죄송하네.”그녀는 손을 내밀고 입가에 선의의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빛으로 문지원을 응시하
“조금만 더 늣더라도 아이를 볼 수 있을거야!” 강윤슬은 여기 오기전에 문지원의 상황을 알아보았기에 그녀의 금황을 알고 있었다. 강윤슬은 지금 기분이 좀 상해 있었다.그녀는 산에서 구출된 여자들을 경멸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아이를 낳았다고 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날을 누가 알가? 누군가 문지원을 건드린 적이 있는지.문지원의 머리는 세게 부딪힌 것만 같았다. 한바탕 격동이 지나간 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려고 손가락을 움직였지만, 자신이 지금 자는 척하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섣불리 눈을 뜨면 오해받을 수 있기에 문지원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기다리는 과정이 특히 길고 견디기 어려웠는데 마침내 그녀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나는 지원 씨를 관심하니 그런 것과는 무관해.”지석훈은 담담하게 말했다.이 몇 글자는 문지원의 마음속에서 순간 잔잔한 물결을 일으켰다.이 말을 들은 강윤슬의 얼굴은 창백해지기 시작 하였다.“지석훈, 너 진심이야?”“응, 난 이전 너한테 예전같은 마음이 없어.”말하면서 지석훈은 돌아섰다.“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를 바래.”강윤슬은 남자의 무자비한 모습을 보며 자신이 남긴 쓴맛을 맛보았다. 이 쓴맛은 옛날 지석훈만 느낄 수 있었던 감정이었다.그녀는 모욕을 참지 못하고 성을 내며 병실을 떠났다.문지원은 계속 자는 척하고 하려 하였는데 머리 위에서 지석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계속 자는 것처럼 있을 거야?”문지원은 천천히 눈을 뜨면서 그를 향해 어색하면서도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배고파? 먹을 것 좀 갖다 줄까?”문지원은 난처해하고 있기에 간절히 바랐다.지석훈은 잠시 나갔다가 돌아올 때 그녀에게 따뜻한 죽 2인분을 가져왔다.문지원이 자신을 보자 그는 천천히 포장을 풀면서 말했다.“나도 마침 배가 고파서 너랑 같이 먹을 거야”문지원은 아주 행복하다고 느꼈다.그녀는 병원에서 이삼일 휴양하고 퇴원했다. 안 그래도 큰 문제는 없는데 그냥 좀 피곤한데 갑자기 저혈당까지 돌발하였기에 쓰러진
깜짝 놀란 지석훈은 급히 문지원을 데리고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그녀가 수면부족으로 쓰러진 것을 알자 지석훈은 무력하고 마음이 약해졌다.“넌 왜 자신을 이렇게 돌보고 있어?”지석훈은 병석 앞에서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문지원은 아직 혼수상태기에 아쉽게도 듣지 못했다. 병원에서 문지원에게 포도당 점액을 처방하여 지금 그 수액을 맞고 있다. 아마도 그녀는 충분히 자야 깨어날 것 같았기에 지석훈은 급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미 사람을 찾았고 자신이 직접 그녀를 지켜볼 수 있으니까.“지석훈!”강윤슬이 급히 병실로 뛰여 들어오자 지석훈이 밤을 새워도 잠깐 눈붙일 생각을 하지않고 가만히 병석 앞에서 지켜보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강윤슬이 들어온 것을 보자 지석훈은 무표정하게 말했다.“당신 여긴 왜 왔어?”그의 말투는 아주 평범했지만, 그의 눈빛에는 조그마한 눈물이 고였다. 그는 진작에 마음을 내려놓았기에 그녀에 대해 예전의 느낌은 없었으나 강윤슬은 아직 내려놓지 못하였다.그녀는 원래 지석훈한테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손에 있는 일도 돌볼 겨를 없이 서둘러 왔는데 그는 다른 여자 곁을 지키고 있었다.강윤슬은 손바닥의 부드러운 살을 꼬집으며 입가에 보기 싫은 미소를 지었다.“석훈 씨가 괜찮다니 정말 다행이네, 일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 다친 줄 알았어.”말한 후 강윤슬은 병석에 누워있는 문지원을 보며 말했다.“문지원 씨는 괜찮아?”문지원은 눈꺼풀을 움직였지만 뜨지 않았다. 사실 강윤슬이 왔을 때 그녀는 이미 깨어 있었지만 자는 척하였다.강윤슬은 눈을 반짝이며 방금 문지원이 약간 흔들린 눈꺼풀을 보고 자신이 잘못 본 것인가 의심하였다.지석훈은 병석에 있는 문지원을 바라보았지만, 전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일이 좀 생겼는데 사람은 괜찮아.”강윤슬은 마음이 더욱 쓰라렸다. “사람이 괜찮은데 왜 여전히 여기에서 지키고 있어?”“병원에 그렇게 많은 환자가 있는데 당신이 이렇게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네.”지석훈은 얼굴을
문지원은 지석훈만 홀로 남겨서 이 모든 상황을 마주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안에는 그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마지막으로 문지원은 그 지석훈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후시경을 통해 보이는 그의 날씬한 실루엣은 차가 나아갈수록 서서히 멀어졌지만 여전히 당당한 모습이 역력했다.문지원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참으며 힘껏 가속 페달을 밟았다.차는 마치 활시위에서 쏘아 올린 화살처럼 순식간에 도로를 벗어나 달려 나갔다.곧바로 마을 사람들은 손에 곡괭이를 들고 몰려와 지석훈을 완전히 포위했다....한편 마을의 경찰서에는 한 통의 신고 전화가 접수되었다.신고자는 네 명의 갇힌 여성을 데리고 경찰서에 도착해 신고했으며 그 모습을 본 경찰 내부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신원 확인 후 이들 여성의 몸에는 장기간 감금과 학대의 흔적이 분명하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마을에 아직 한 사람이 남아 있어요. 그 사람을 꼭 구출해 주세요.”문지원은 지친 목소리로 경찰을 바라보며 애원했다.그녀는 중간에 한 번도 쉬지 않고 밤새도록 차를 몰았다. 식사 대신 몇 모금의 물만 마셨다.이제는 배고픔과 피로에 시달려 눈꺼풀이 무겁지만 문지원은 결코 쓰러질 수 없었다.그 이유는 지석훈이 아직 남아있었기 때문이다.경찰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아직도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고요?”“네. 이름은 지석훈. 마을에 의료 봉사하러 간 의사예요.”문지원은 지석훈에 관한 기본 정보를 말했다.“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지만 마을 사람들이 빼앗을 가능성도 있어요. 이번에 우리가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던 건 다 그 사람 덕분이에요.”그런 사람이 그토록 황량한 산골짜기 같은 곳에 남아 있다는 사실에 경찰서 사람들은 바로 회의를 열어 구조대를 꾸려 밤새도록 그 마을을 수색하기 시작했다.문지원도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경찰들은 그녀의 상태를 보고 처음엔 단호히 반대했다.하지만 문지원은 고집스럽게 말했다.“안 돼요. 꼭 가야 해요. 그 사람이 무사한지 제가 직접 확인해야
지석훈은 그녀들을 방 안으로 들인 후 여성들이 마을에서 겪은 처참한 상황을 듣고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문지원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이들을 데리고 나가고 싶어요. 그들은 원해서 여기에 남아 있는 게 아니에요. 이 산 너머에는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이곳에 남아 그들의 아이 낳는 도구가 되어 살아갈 이유는 없어요.”그 말에 문지원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잠시 침묵에 빠졌다.조수현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들 중 일부는 이미 아이를 낳은 상태였고 이곳을 떠난다는 건 곧 자신의 아이를 두고 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어머니로서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없는 일이었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이곳에 남아 계속 학대받으며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문지원은 지석훈이 망설일까 봐 서둘러 덧붙였다.“서둘러야 해요. 마을 사람들이 곧 우리가 사라진 걸 눈치챌 거예요. 그들이 우리를 찾으러 오는 건 시간문제라고요. 우린 석훈 씨한테 폐 끼칠 생각 없어요. 그저 차 한 대만 빌려주면 돼요.”마을 밖으로 나가는 길은 분명히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석훈이 여기까지 들어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차만 있다면 충분히 탈출할 수 있었다. 문지원은 운전을 할 줄 알았기에 본인이 직접 운전해서 모두를 데리고 탈출할 생각이었다.“걱정할 필요 없어요. 차는 빌려줄 테니까.”지석훈의 말에 문지원은 예상했던 대답이었음에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른 사람들은 더욱 기뻐하며 얼굴에 희망을 띄웠다.눈앞에 놓인 탈출의 기회에 모두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지석훈은 곧장 차를 가지러 갔다. 차 한 대에 모든 인원을 태울 수는 없었지만 최대한 몸을 붙이면 간신히 탈출할 수 있는 인원이었다.문지원은 재빠르게 조수현과 다른 여성들을 차에 태운 후 지석훈이 계속 말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근데 아까부터 왜 말이 없어요? 같이 안 갈 거예요?”지석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눈치 못 챘어? 이들은 남자한테 극도로 두려움을 느끼고 있어. 몇몇은 나랑 눈도 못 마
문지원은 상의도 걸치지 않고 바지만 입은 채 허겁지겁 뛰쳐나오는 서 씨를 보고 역겨움을 느꼈지만 동시에 조수현의 안전이 걱정되었다.밤은 깊었고 어둠이 표정을 가려주어 다행히 아무도 그녀의 속내를 눈치채지 못했다.마을 사람들은 여자들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이 마을에서 여자는 그저 아이를 낳는 도구에 불과했다.특히 지금처럼 큰불이 난 상황에서는 더더욱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게다가 문지원은 마을 사람들에게 순종적인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에 그들이 보기엔 그녀가 도망칠 가능성이 없었다.마을 이장은 불이 난 원인을 물었지만 문지원은 적당한 핑계를 대며 얼렁뚱땅 넘어갔다.남자들이 불 끄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문지원은 몰래 서 씨의 집으로 향했다.서 씨의 집 안에서 조수현은 밖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처음에는 잔뜩 겁을 먹었지만 문지원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상황을 직감했다.“불... 지원 씨가 낸 거예요?” 조수현은 놀라서 물었다.“너무 대담한 거 아니에요?”문지원은 그녀를 힘껏 일으키며 말했다.“지금 그런 얘기할 때가 아니에요. 지금이 기회예요. 얼른 따라와요. 그리고 마을에 갇혀 있는 다른 여자들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죠? 그들도 함께 데리고 나가요. 오늘 밤 무조건 도망쳐야 해요.”“하지만… 우리 어떻게 도망쳐요?”조수현은 주저했다.이 마을은 외부와 단절된 깊은 산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사방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차를 타고 오가는 것도 며칠이 걸릴 정도였다.더군다나 이들은 힘없는 여자들뿐이어서 교통수단도 없이 걸어서 나가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하지만 문지원은 이미 계획을 세운 상태였다.“마을에 온 그 의사를 찾아갈 거예요. 그들이 이곳까지 들어왔다는 건 나가는 길도 알고 있다는 뜻이에요.”“낮에 그들이 타고 온 차도 봤어요. 게다가 마을 사람들은 의사들에게는 함부로 못 하니까 그가 도와주기만 한다면 우린 반드시 나갈 수 있어요.”문지원의 결연한 눈빛을 보며 조수현도 점차 용기를 얻었다.“좋아요. 나도 따
문지원은 순진한 척하며 말했다.“알겠어요. 그냥 한번 물어본 거예요. 전 당연히 그 사람과 거리를 둘 거예요.”김숙희는 그제야 안심했다.그리고 문득 예전에 아들에게 이 여자를 데려오게 한 자신의 결정이 얼마나 선견지명이었는지 새삼 실감했다.김숙희는 문지원에게 쌀을 씻으라고 시켰고 그녀가 일을 끝마쳤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 있었다.문지원은 조수현의 처지를 떠올리며 점점 마음이 무거워졌다.오늘 밤 그녀는 실행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갇혀 있는 여자들이 언제쯤 다시 자유를 찾을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었다.밤이 되자 문지원은 지하 저장고에서 술을 꺼냈다.김숙희는 아까운 듯 술을 바라보며 소리쳤다.“그걸 왜 꺼내는 거야. 어서 다시 넣어둬. 그건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나 마시는 거란 말이야. 잔칫날도 아닌데 그걸 마시는 건 너무 낭비야.”문지원은 일부러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듣기로는 마을에 있는 그 의사가 수호 오빠의 다리를 고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오빠 다리가 곧 나을지도 모르니 축하하는 의미로 한잔하면 어떨까 싶어서요.”김숙희의 눈빛이 흔들렸다.문지원 혼자 즐기려는 거였다면 단호하게 반대했을 거지만 아들을 위해 축하한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진수호도 유혹에 넘어가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엄마 어차피 조금만 마시는 건데 괜찮잖아요. 이 술 지하에서 먼지만 쌓이고 있는데... 내 다리가 낫는다는데 엄마는 기쁘지도 않으세요?”“그럴 리가. 당연히 기쁘지.”김숙희는 단번에 부정했지만 결국 아들과 문지원의 부추김에 못 이겨 이를 악물고 술을 개봉했다.그 술은 사실 그저 평범한 황주였다.조금만 마시면 별문제가 없을 터였지만 좋은 일이 겹친 데다 진수호는 쾌락을 즐기는 성향이 강한 사람이어서 한순간 자제력을 잃고 지나치게 마셔버린 것이다.김숙희도 덩달아 함께 취했다.오직 문지원만이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한 잔 더.”진수호는 술에 취해 술버릇이 나왔다. “빨리 한 잔만 더 줘.”문지원은 시험 삼아 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