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이현은 음식을 온지유 앞에 들이밀며 말했다.“내가 먹여줘야 해?”차분하게 내뱉는 그 말에 온지유는 그가 정말 먹여줄 거라 생각 못 하고 냉정하게 거절했다.“먹고 싶지 않은 것도 당신이 주면 나는 억지로 먹어야 해요? 나는 그 정도 자유도 없는 사람이에요?”그 말에 여이현은 말없이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온지유 입가에 가져다 댔다.매일 같이 마주하던 차가운 눈이 아니라 온기가 있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상대에 온지유는 이 상황이 어리둥절해 났다.“밥은 먹어야지.”여이현은 평소와 달리 차분하게, 또 다정하게 말했다.그런 상황이 누구보다 불편했던 온지유는 숟가락을 빼앗듯이 받아들며 말했다.“내가 알아서 먹을게요.”여이현이 또 먹여주겠다고 나설까 봐 온지유는 허겁지겁 음식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그 모습을 본 여이현은 웬일로 물까지 건네주었다.“천천히 먹어, 목 막히겠다.”목이 막힌다기보다 여이현의 행동에 놀란 게 더 문제였던 온지유가 무슨 말이라도 하려 하자 여이현이 그녀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배 비서한테 티켓 끊어놓으라고 했어.”“F 국 가는 티켓이요?”“응.”믿기지 않는다는 듯 묻는 온지유에 여이현이 긍정의 대답을 해왔다.“부모님께 말씀드려놔, 너랑 내가 같이 사라지면 실종됐다고 걱정하실 수도 있잖아.”“네.”온지유는 입술을 말아 물며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아무래도 여이현은 병을 줬으니 약이라도 주려 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이번 여행이 둘의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이 될 것이다. 온지유는 더 이상 여이현을 따라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그때 여이현이 입을 열며 조심스레 말했다.“아까 CCTV 볼 때 네가 말이 없어서 인정하는 건 줄 알았어.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바로바로 얘기해줘.”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여이현은 제 눈으로 본 것만 믿는 사람이었기에 아까 상황에서도 자신이 본 걸 토대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지금 나한테 해명하는 거예요?”온지유는 오늘따라 이상한 행동을 하는 여이현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전에는 아무 말도 없다가 인제 와서 이런 얘기를 꺼내는 여이현에 온지유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전 대표님 비선데, 대표님 차고에 그 많은 차들 놔두고 왜 또 차를 사겠어요?”온지유는 여이현이 저를 곁에 두려고 이러는 줄 알고 거절의 뜻을 비쳤다.“나갈 때마다 내 차 타고 갈 순 없잖아, 계속 택시 잡는 것도 불편할 거고.”뒷좌석에 앉아있는 여이현은 온지유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그녀의 말투로부터 온지유가 이 일에 무관심하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제가 운전을 하는 건 공적인 일이 있을 때뿐입니다. 평소에 그냥 제 능력대로 천만 원 정도 하는 차를 샀다가 다른 사람들이 알기라도 하면 대표님이 창피하지 않으실까요? 그래도 대표 비서인데.”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하는 온지유에 입술을 말아 물던 여이현이 대답하려 하자 온지유가 좀 더 빨리 입을 뗐다.“만약 대표님이 사주신 슈퍼카를 끌고 다니면 그건 제 신분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니 또 그것대로 웃음거리가 되겠죠.”차가 없어도 일할 때는 여이현의 차를 타고 다니니까 온지유는 특별히 불편함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차피 곧 떠날 건데 지금에 와서 차는 더욱 필요 없는 존재였다.그런데 여이현은 오히려 온지유가 진심인 줄 알고 그녀를 위로해주었다.“삶은 네가 사는 거야, 남들 시선 너무 신경 쓰지 마.”온지유는 딱히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여이현이 왠지 예전과는 달라진 것 같았다.그렇게 둘은 평소와 다름없이 회사로 와 각자 할 일을 했다.그때 이채현보다도 일을 더 잘하는 송서연에 급해 난 이윤정이 온지유를 향해 말했다.“온 비서님, 비서님이 대표님을 모신지 7년이 다 돼가는데 정말 그만두실 거에요?”온지유가 그만두면 대표이사실에 이윤정, 고세리, 송서연만 남게 되기에 이윤정은 어떻게든 온지유를 설득해보려 했다.진예림과 최연욱이 온갖 추태를 부리며 감옥에 들어가는 걸 보고 난 뒤로는 고세리도 여이현이 온지유를 챙기는 걸 알고 저도 같은 처지가 될까 두려워 알아서 몸을 사리고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여이현은 강하임과 함께 가는 걸 택했다.“가죠.”혼자 남은 온지유는 강하임의 비서와 마주 보고 있는 건 불편했기에 박민재 아들의 만월 파티가 오늘이라는 걸 떠올리고는 백지희도 올 것 같아 백지희에게 연락하며 밖으로 나갔다.하지만 백지희가 전화를 받기도 전에 다른 친구들을 마주쳤다.“어머, 이게 누구야, 온지유잖아? 대표 비서 되더니 의리 같은 건 다 개나 줘버렸나?”“그러니까, 도세원한테 100만 원 던져주고 바빠서 오늘 못 나온다고 하지 않았어? 또 왜 온 거래?”“아까 룸에서 나오는 거 못 봤어?”“아, 친구들 볼 시간은 없고 대표 모실 시간은 있나 보지.”...처음에는 그들의 말을 무시하려 했던 온지유도 점점 도가 지나치는 말들에 그들을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그 입 다물어. 모르면 아무 말이나 지껄이지 마.”“뭐야, 고작 비서 주제에 어디서 뭐라도 된 척 명령이야, 네가 뭐 대표 와이프라도 된 줄 아는 거야?”단발머리를 한 여자 하나가 온지유를 째려보며 팔짱을 끼고 비아냥거렸다.“내가 대표님이랑 결혼하든 말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너희 집은 뭐 태평양이니?”“우리 집 태평양 아니지 당연히, 근데 난 너 같이 아무것도 없으면서 잘난 척하는 애들은 눈꼴이 시려서 두고 볼 수가 없어.”“그럼 눈을 감든가.”말은 순하면 사람의 도구로 쓰이고 사람은 착할수록 괴롭힘의 대상이 되기에 온지유는 바로 여자의 말을 받아쳤다.“그 개 같은 눈 감으라고.”“너 지금 나한테 개라 그랬니?”화가 난 여자가 팔을 들어 올려 온지유의 뺨을 때리려고 했지만 그 손목은 바로 온지유에게 잡혀버렸다.온지유를 때리지 못했다는 사실에 더 분해진 여자는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너희보고만 있을 거야? 좀 도와!”여자의 말에 다른 친구들이 하나둘 일어섰다.여자 하나면 온지유 혼자 상대가 가능하겠지만 이 무리가 한꺼번에 달려든다면 온지유도 별수가 없었다.온지유는 괜히 왔다가 집단 폭행만 당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는 데 그 어
이 여자들을 감옥에 넣을 수는 없어도 교육 정도는 가능하다고 생각했기에 전화를 건 것이다.“넌 진짜 정이라곤 하나도 없구나? 이 상황에 너처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야, 독한 년!”“내 눈엔 너희가 더 너무하고 더 독해! 나 아니었으면 너희들 지유 집단 폭행하고도 남았을 거야.”여자들이 이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생각에 치가 떨린 나민우가 그들을 질책했지만 단발머리 여자는 제 잘못은 모르고 계속 우겨댔다.“내가 날 보호한다는데 그게 뭐가 잘못된 거야?”그에 어이가 없어진 나민우가 뭐라 더 말하려고 하자 온지유가 그의 팔을 잡아 오며 말렸다.“그만해도 돼, 저런 애들이랑 말 섞어봤자 좋을 거 하나 없어.”그 순간 나민우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물론 온지유는 별 생각 없이 한 행동이겠지만 온지유만을 오랫동안 짝사랑해온 나민우는 제 팔을 잡아 오는 손길에 아무렇지 않을 수 없었다.너무 좋아하지만 좋아한다는 말조차 못 했던 여자가 제 팔을 잡아 오니 나민우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에 잠겼다.그리고 하필 이 모습을 다시 돌아오던 여이현이 보게 된 것이다.치켜뜬 눈에서 한기를 내뿜고 있는 여이현의 그 모습을 강하임도 눈여겨보고 있었다.이건 틀림없는 남자의 소유욕이었고 분노였다.“온 비서님, 왜 갑자기 이렇게 많은 사람들 틈에 섞여 있어요?”강하임은 차가운 표정으로 일부러 온지유를 크게 불렀다.그에 뒤를 돌아본 온지유도 여이현의 누구 하나 잡아먹을 듯한 그 특유의 냉한 표정을 보아낼 수 있었다.“이 사람들이 저한테 시비를 좀 걸어서요, 이미 경찰 불렀어요.”말을 하면서도 온지유는 강하임을 뚫어지게 쳐다봤다.하지만 이내 제 생각이 부질없음을 느꼈다.이 사람들은 다 제 동창이었고 만월 파티를 앞당긴 것도 모금을 위한 것이기에 강하임이 아무리 저를 싫어한다 해도 이런 판까지 짤 만큼 한가해 보이지는 않았다.그에 강하임도 웃으며 대꾸했다.“그럼 다행이네요. 대표님, 가서 물건부터 챙기시죠, 곧 있으면 불꽃 축제 시작하
온지유가 입을 열었다.“됐어요. 그럴 필요 없어요.”가끔 그녀는 여이현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저 동창들과 모임을 가졌을 뿐인데 여이현은 어딘가 단단히 꼬여 있었다.만약 그녀의 설명을 제대로 들어주기라도 했다면 이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먼저 가지 않았을 것이다.“민우야, 방금은 고마웠어.”뭐가 어찌 되었든 나민우가 나타나 준 덕에 그녀의 문제는 해결되었다.나민우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뭘, 난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나민우가 뭐라 더 말하려던 순간 온지유가 먼저 입을 열었다.“난 그럼 돌아가 볼게. 나중에 다시 연락하자. 그땐 내가 한턱 살게.”“내일 오후에 시간이 있어.”그저 예의상으로 한 말이었지만 나민우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살짝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그럼 내일 내가 주소 문자로 찍어 보내줄게.”“응, 알았어.”나민우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떠나가는 모습을 보았다....여이현은 비록 먼저 걸음을 옮기긴 했지만, 뒤에는 강하임이 따라오고 있었다.그러나 그는 강하임과 함께 불꽃놀이를 구경하러 가지 않았다.걸음을 멈추던 그는 강하임과 거리를 두었다.“강하임 씨, 난 불꽃놀이에 관심 없어요. 혹시 혼자 구경하고 싶지 않은 거라면 내 비서한테 같이 구경하라고 말해두죠.”강하임은 순간 당황했다.“대표님, 방금 분명 저랑 함께 보러 가자고 약속하셨잖아요...”“미안해요.”차가운 얼굴로 이 말을 내뱉은 뒤 얼어붙은 강하임을 신경 쓰지도 않은 채 방금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갔다.강하임은 점점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얼굴이 새빨갛게 되어 버렸다.그녀는 여이현과 온지유 사이에 뭔가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여이현이 먼저 자신과 불꽃놀이를 구경하러 가자고 했기에 드디어 그와 둘만 있을 기회가 생긴 것으로 생각하며 기대했다.그런데 아니었다.정말이지 괜한 기대를 한 것이다.여이현은 배진호에게 연락했다.연결된 후 그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
운전기사라는 직업을 선택할 때부터 배진호는 그에게 온지유와 여이현의 관계에 대해서 말해주었다.여이현은 차에 타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담배만 피워댔다.그 말인즉슨 두 사람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었다.게다가 방금 여이현이 온지유의 행방을 쫓으라고 했고 당장이라도 달려나갈 기세를 전부 보지 않았는가.여이현은 눈을 가늘게 접었다.새로 채용한 운전기사를 힐끗 보았다.운전기사는 키도 크고 말랐을 뿐만 아니라 피부가 조금 까무잡잡했다.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배 비서가 주의할 것을 말해주지 않았나 보죠?”운전기사는 부정했다.“배 비서님께서 설명하셨습니다. 대표님, 저도 이런 말을 하는 게 주제넘다는 것을 잘 알지만... 저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그만 말씀드린 겁니다. 저와 제 아내가 그랬거든요. 제가 제 아내를 오해하고 절대 먼저 사과하거나 상황을 물어본 적이 없었지요. 제 아내도 저한테 설명해 주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나중에 제가 돈을 벌기 위해 다른 도시로 갔을 때 제 아내에게 다른 남자의 아이가 생겼더군요. 결국 저는 영원히 제 아내를 잃게 되었어요.”여이현은 입술을 짓이겼다. 몇 초의 침묵 끝에 그는 낮게 갈린 목소리로 말했다.“시동 걸어요.”나민우와 거리를 유지하는 건 이성 친구 사이에서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게다가 얼마 전 나민우는 온지유를 도와주었을 뿐 아니라 지금은 그녀를 태워 데려다주려 했으니 온지유는 나민우가 고마우면서 미안했다.나민우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바로 그녀의 마음을 눈치채고 웃으며 말했다.“온지유, 우린 동창이고 친구잖아. 내가 아니라 다른 애들이었어도 네가 이 야밤에 혼자 집에 돌아가려고 한다면 태워줬을 거야.”온지유는 미소만 지었다.방금 나민우가 그녀의 앞에 차를 세웠을 때 사실은 타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는 늦은 밤이라 위험하다고 했다.게다가 콜택시 앱에서도 근처에 소환 가능한 차량이 없다는 문구가 떠 있었다.나민우는 말을 기분 좋게 잘하
온지유는 평온한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전 사실만 말씀드렸을 뿐인걸요.”“너...!”여진숙은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 이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여이현이 돌아온 것이다.“현아, 마침 잘 왔구나. 네 아내가 나한테 어떻게 대들었는지 아니? 정말이지 교양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구나!”그녀는 얼른 걸음을 옮겨 여이현에게 다가가 고자질을 했다.여이현은 성큼성큼 집 안으로 들어왔다. 깊은 두 눈으로 온지유를 보다가 여진숙에게 시선을 돌렸다.“가만히 계셨으면 지유가 대들었겠어요? 지유는 제 곁에 있을 때 한 번도 그런 적 없다고요. 제 앞에서는 늘 온화한 사람이에요.”다리가 긴 탓에 몇 걸음 만에 그녀의 앞으로 왔다.그녀보다 큰 체구에 온지유는 압박감을 느꼈다. 게다가 그의 몸에선 짙은 담배 냄새가 났다.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여진숙은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며 하마터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릴 뻔했다.“너, 너 정말 이젠 날 신경 쓰지 않겠다는 거니?!”“방에 올라가서 기다려.”여이현은 온지유에게 말했다.정신을 차린 온지유의 그의 말대로 방으로 올라갔다.여진숙은 직설적이었다.“여이현, 너 대체 언제까지 날 피할 거니?”그러자 그가 픽 웃었다.“대체 누구한테서 그런 말을 배우신 거죠?”그가 누구를 만나든 말든 그의 자유였다.누구도 그의 선택에 좌지우지할 수 없다. 그가 두려움을 느낄만한 사람도 없었기에 더욱 누군가를 피할 필요가 없었다.“네가 날 피하지 않은 거면, 그럼 그동안 왜 난 널 만날 수 없었던 거지?”여진숙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여이현은 처음부터 그녀를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다음부터 사람 거슬리게 하는 일은 하지 마세요. 그렇지 않으면 짐 싸서 내쫓을 테니까요.”말을 마친 그는 바로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여이현!”여진숙은 화가 치밀어 그의 이름을 불렀다.“난 네 엄마라고! 날 엄마라고 생각하긴 하니?!”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돌려 여
여이현은 그녀에게 이런 요구를 하면서 왜 본인이 한 짓에 대해서는 이런 요구를 하지 않은 걸까?여이현은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뭐?”온지유는 그를 빤히 보았다.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어쩌면 말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주먹을 꽉 움켜쥔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해버렸다.“아무것도 아녜요.”여이현은 이상함을 느꼈다. 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가 물어보려고 할 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사장님, 사모님!”도우미가 두 사람을 불렀다.여이현은 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도우미는 초대장을 여이현에게 건넸다.“사장님, 이건 강태규 회장님댁에서 온 초대장입니다.”카드 위쪽엔 ‘축하드립니다'라는 문구가 커다랗게 있었다.“네, 내려가 보세요.”여이현은 초대장을 열어보았다. 강태규의 칠순 잔치 초대장이었다.그는 강태규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였지만 강태규의 생신 잔치에 별로 참석하지 않았었다.강태규도 굳이 그가 말하지 않아도 그의 마음을 알고 있었고 무조건 참석하라고 강요하지도 않았다.하지만 이번은 강태규에게 아주 중요한 날이기도 했다.그러니 이번에는 꼭 참석해야 한다.게다가 강태규는 예전에 군인 생활을 오래 했었기에 검소하고 낭비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이번에도 집안에서 잔치할 것이 분명했으니 그들도 올 것이다.그의 미간이 구겨졌다. 조금 고민되었으나 강태규의 나이도 나이인지라 그가 많이 이해해줘야 했다.여이현은 고개를 돌렸다. 온지유는 이미 침대에 누워있었다.“온지유, 내일 저녁 나랑 같이 생신 잔치에 가줘.”“누구 생신 잔치인데요?”온지유는 딱히 관심이 없는 목소리였다.“강태규 어르신.”온지유는 일어나 앉았다.“어르신의 생신 잔치라고요?”“그래, 칠순 잔치.”온지유는 순간 나민우와 한 약속이 떠올랐다.“내일은 안 돼요. 다른 일정이 있어요. 그리고 어차피 전에도 혼자 참석했었잖아요.”두 사람은 비밀리 혼인신고를 했기에 그
신무열은 김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걱정 끼쳐서 미안해.”“무열 씨, 제발 꼭 좋아져야 해요. 이렇게 날 떠나면 안 돼요. 우리... 우리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다 아쉬움으로 남았잖아요.”김혜연은 신무열을 꼭 끌어안으며 목소리가 갈라질 정도로 간절히 말했다.그녀는 정말로 두려웠다.만약 신무열의 마음속에 모든 분야에 출중한 완벽한 존재가 있었다면 그녀는 이렇게까지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아린의 경우는 달랐다. 모든 조건을 떼어 놓고 보면 말이다.김혜연에게는 선택지가 주어졌지만 선택을 하지 않은 건 그녀 자신이었다.김혜연은 신무열의 남은 생이 죄책감 속에서 허비되지 않기를 바랐다.신무열은 김헤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네가 하려는 말 다 알아. 걱정하지 마. 나도 최선을 다해 이전의 일들에서 벗어나려고 할게.”김혜연은 그런 문제들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신무열은 그녀의 진심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다.이때, 인명진이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신무열의 약물 의존은 법로가 책임지고 있었고, 인명진은 그의 심리 치료를 맡게 되었다.신무열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아린이 자신의 품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그는 마음의 상처를 도저히 치유할 수 없었다.인명진은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그는 최면을 통해 신무열의 내면을 하나씩 풀어가며 그의 마음을 안정시키려 노력했다.신무열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누구도 죽이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저 때문에 죽어가요. 죽음이 이렇게도 불공평하고 아무 소리도 없이 다가온다는 걸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신무열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씩 흘러나왔다.인명진은 낮은 목소리로 그를 위로했다.“모든 일에는 아쉬움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무열 씨는 최선을 다했고 아린을 방치한 것도 아니었잖아요. 현실은 잔혹해요. 무열 씨에게는 방법이 없었고, 아린에게는 죽음이 오히려 해방이었을지도 모르죠.”“노예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은 수천, 수만 명이었어요
신무열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고통스럽게 절규했다.그의 이런 모습을 본 온지유는 가슴이 찢어졌다. 매일 곁에서 지켜보는 김혜연에게는 더 큰 고통이었다.온지유는 신무열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부드럽게 말했다.“오빠, 그건 오빠 잘못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너무 자신을 몰아붙이지 말아요...”하지만 신무열은 그녀의 말을 끊으며 힘겹게 말했다.“아니, 내 잘못이야. 만약 내가 더 잘했다면 아린은 희생하지 않았을 거야. 죽음을 많이 봐왔지만 이번처럼 고통스러운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지유야, 너도 알잖아? 난 아린이 눈앞에서 죽는 걸 직접 봤어...”그의 목소리는 쉰 듯한 낮은 톤으로 하나하나 쏟아져 나왔고, 온지유는 처음으로 신무열이 이렇게 절망하는 모습을 보게됐다.도와주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그녀는 무력감을 느꼈다.신무열이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스스로를 해칠까 두려웠던 온지유는 급히 법로에게 전화를 걸었다.곧 법로는 실험실 사람들과 함께 그들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신무열의 상태를 본 법로는 마음이 아팠다.신무열은 그의 하나뿐인 아들이다!상태를 점검한 법로는 신무열이 몰래 페노바르비탈을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더욱 심각한 것은, 이 약물은 한때 법로거 개량했던 중독성을 유발하는 형태였다는 점이었다.신무열의 방금 전 감정 폭발은 약을 제때 복용하지 못해 나타난 금단 증상이었다.법로는 즉시 실험실의 약물 사용 규정을 엄격히 강화했다.앞으로는 모든 약물 사용이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명령했다.또한, 신무열이 약물을 복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을 철저히 관리했다.신무열은 Y국의 수령으로, 많은 이들이 그를 끌어내리고 새 인물을 세우고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만약 그의 약물 복용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 반드시 정치적으로 이용될 것이 분명했다.김혜연은 신무열의 곁을 지키고 싶었지만 법로가 이를 막아섰다.“신무열이 자리를 비우는 건 공적인 이유로는 가능하다. 하지만 네가 자리를 비우
케빈은 단 한 가지 뜻만을 품고 있었다.반드시 Y국을, 그리고 신무열을 지키겠다는 결심이었다.신무열과 이 나라는 그의 누나 아린이 목숨을 바쳐 지키고자 했던 것들이었기 때문이다.케빈이 떠나는 날 온지유가 그를 배웅하러 나왔다.케빈은 돈도, 지위도, 그 외의 물질적인 것들은 모두 원하지 않았다.온지유가 케빈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직접 구해 온 평안을 비는 부적뿐이었다.“케빈, 국경은 힘든 곳이야. 건강히 지내야 해. 네 누나는 떠났지만 우리는 언제까지나 네 가족이야. 언제든 돌아와도 돼.”온지유의 말에 케빈은 미소를 지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다.누나가 죽은 이상 이곳에는 더 이상 자신의 집은 없었다.온지유가 그렇게 말해줬지만 그들에게도 자신들만의 삶이 있었다.케빈은 이제 네다섯 살의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 이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케빈이 떠난 뒤 아린에 관한 일은 잘 마무리되었다.하지만 온지유는 신무열의 정신 상태를 걱정해 한동안 Y국에 머물렀다.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상태는 눈에 띄게 나빠졌다.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고 표정은 지쳐 보였으며 전혀 활기가 없었다.온지유는 더 이상 그를 방치할 수 없었다.“이렇게 지내는 건 정말 위험해 보여요. 밤마다 잠을 잘 자지 못하는 거죠? 도저히 안 되겠으면 내가 명진 씨에게 연락해서 좀 봐달라 할게요.”신무열의 성격상 그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문제를 말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인명진이라면 다를 것이다. 같은 또래라 거리낌이 없기 때문이었다.“아무것도...”신무열은 온지유에게 솔직히 털어놓을 생각이 없었다.하지만 그의 말을 김혜연이 끊어버렸다.“어떻게 아무 일도 없겠어요! 밤마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계속 아린을 되뇌고 있잖아요! 무열 씨, 지금 당신은 아직도 아린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고요. 당신은 최선을 다했잖아요!”신무열은 전쟁 속에서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다.김혜연도 아린이 신무열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케빈은 여전히 고집스러운 태도로 소리쳤다.“제 생각은 달라요! 당신들은 신분 문제 때문에 제 누나를 구하려 하지 않은 거예요!”법로는 조용히 말했다.“미안하다. 과거에 내가 너무 집착했었지. 죽은 사람을 되살리고자 하는 욕망, 어떤 목적을 이루고자 했던 욕심... 하지만 결국 그것들은 내가 만든 환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네 누나의 죽음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안다. 하지만 Y국의 발전은 멈출 수 없다. 네가 원한다면 그들을 너에게 넘겨주게 할 것이다. 또 너에게 필요한 보상도 줄 거고 내가 방금 한 약속들도 모두 지킬 테다.”법로는 한숨을 쉬며 케빈 쪽으로 걸어갔다.그는 이미 결심했다. 만약 케빈이 자신에게 손을 올리거나 목숨을 원한다면 그는 이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그는 저항하지 않을 것이고 온지유와 신무열에게도 케빈을 막지 말라고 당부할 생각이었다.비록 법로는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온지유와 신무열은 이미 그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케빈! 네 누나를 죽게 한 건 우리가 아니야! 너희는 Y국의 국민이잖아. 네 누나가 무열 씨에게 사랑이 없었다 해도 애국심은 분명히 있었을 거야. 안그래?”온지유의 말은 케빈의 마음을 찔렀다. 그는 과거 자신과 아린이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아린은 신무열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애정을 품고 있었고, 신무열과 관련된 모든 소식을 모았다.신문에서 오려낸 사진들, 비디오에서 캡처한 화면, 심지어 직접 인쇄한 이미지까지.케빈은 그녀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누나와 선생님의 신분 차이가 이렇게 큰데 집착하는 이유가 뭐야? 설마 나중에는 선생님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하는 건 아니지?”그는 자신의 말이 현실이 될 줄은 몰랐다.아린이 그때 했던 대답이 선명하게 기억났다.“내가 선생님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선생님은 이 나라를 이끄는 사람이셔. 만약 내가 선생님을 위해 죽는다면 그건 모두를 위한 죽음이고 정말 영광스러운 일일 거야.”온지유가 같은 이야기를 꺼내고 나서야 케빈은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케빈은 고통 속에서 절규했다.노예 수용소에는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결국 그들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Y국에는 그렇게 많은 약초가 있는데 그의 누나 하나 살리지 못했다는 말인가?결국 케빈은 그의 누나가 신무열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녀가 신무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두려워해서가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케빈은 가슴을 움켜쥐며 외쳤다.“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고, 그렇게 많은 실험을 해왔잖아요. 그런데 왜 제 누나만큼은 구하지 않으려 한 거죠?”이성을 잃은 케빈이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를 상황에 신무열은 법로 앞에 서서 그를 막아섰다.그의 목소리는 처연했다.“여러 방법을 시도해 봤지만 네 누나를 살리지 못한 건 내 무능함의 결과다. 복수를 원한다면 내 목숨을 가져가.”신무열의 눈빛은 확고했다.“안 돼요! 당신은 지금 Y국의 수령이에요. 꼭 누군가 죽어야 분이 풀리겠다면 차라리 제 목숨을 가져가세요!”김혜연은 신무열을 사랑했다. 그녀는 신무열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눈 뜨고 볼 수 없었다.그녀는 즉시 두 팔을 벌려 신무열을 막아섰다.그들은 이제 막 신혼이었다. 결혼식에는 다른 목적이 있었고, 신혼 첫날밤도 여러 사정으로 아쉬웠다.이제 둘 중 하나라도 죽는다면 그들의 이야기는 처참한 비극으로 끝날 것이다.이때 법로가 앞으로 나섰다.“내가 네 누나를 구하지 못한 게 문제다. 나를 죽여라.”그는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신무열은 법로가 가장 신뢰하는 후계자였고 Y국의 미래는 모두가 인정할 만큼 밝았다.신무열이 죽는다면 이는 나라의 큰 손실이 될 것이다.법로는 자신이 죽더라도 신무열을 희생시킬 수는 없었다.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삶을 이어가야 한다.신무열과 김혜연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잘못한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며 법로는 그 모든 책임을 자신이 감당하겠다고 했다.케빈은 자신의 누나가 죽은 것에 대한 슬픔과 분노로 마음의 균형을 잃었다.그가 정말로 법로나 신무열을 죽이기라도 한다면 나라 전체의
이것은 신무열이 해줄 수 있는 가장 진심 어린 동시에 가장 무력한 축복이었다.처음엔 아린의 독을 법로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법로에게는 아무런 방법도 없었고 결국 그는 아린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신무열은 아린의 곁에서 밤을 지새우고 마지막엔 직접 그녀를 안치했다.김혜연은 그를 찾지 않았다.그녀는 신무열이 지금 힘들어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충분히 이해하며 기다릴 수 있었다.삶은 원래 아쉬움이 남는 법이었다.돌아온 신무열을 김혜연은 꼭 끌어안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의 침묵은 가벼운 몇 마디 말보다 더 큰 위로가 되었다.“샤워하고 푹 자요. 살아 있는 우리는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해요. Y국의 사람들은 아직 우릴 필요로 하니까요.”김혜연은 신무열의 내조자로서 Y국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그를 도울 각오를 하고 있었다.신무열은 입을 열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목이 막혀오고 가슴은 무거운 돌을 얹은 것처럼 답답했다.심혜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린은 정말 좋은 사람이었어요. 자신의 목숨을 바쳐 당신에게 해를 끼치려던 사람들을 막아줬잖아요.”만약 아린이 자신의 목숨을 아끼는 사람이었다면, 그녀는 그들과 협력해 신무열을 해쳤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아린은 그러지 않았다.그녀 덕분에 신무열은 위협의 존재를 미리 알아차리고 그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무열 씨, 우리 앞으로 매년 아린 산소에 찾아가고 가족도 잘 보살펴줘요.”“그래.”“신혼 첫날 밤인데... 미안해.”천천히 입을 연 신무열의 목소리는 몹시 가라앉아 있었다.아린은 진심으로 그를 위해 생명을 바쳤지만 김혜연 역시 진심으로 그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심지어 결혼식과 신혼 첫날밤에도 그는 다른 이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김혜연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이해해요. 모든 걸 알고 있는 제가 어떻게 무열 씨를 원망할 수 있겠어요? 이번 결혼식은 원래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한 것이잖아요. 난 전혀 신경
“다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너무 큰 부담을 가지지 마요.”온지유는 김혜연을 다독이며 말했다.김혜연은 곧 마음속 불안했던 감정을 털어내고 안정을 되찾았다.그들의 결혼식은 화려하게 열렸고 신무열은 이 기회를 이용해 아린에게 독을 투입한 범인들을 찾아냈다.그는 그들에게 조건을 내걸었다.“목숨은 살려줄 테니 해독제를 내놔.”결혼식은 일부러 범인들에게 자신이 행복에 취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 위한 연출이었다.그들은 허상에 속아 방심해 결국 덫에 걸려들었다.“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곁에 있는 법로조차도 해독제를 못 개발했나봐? 그런데 우리에게 있을 리가 없잖아.”만약 해독제가 있었다면 법로는 이미 아린을 살렸을 것이다.지금 아린은 며칠밖에 못 살아갈 상태였다.그들은 아린을 이용해 정보를 얻은 후 그녀를 제거하려고 했지만 아린은 신무열에게 끝까지 충성을 다했다.심지어 그녀는 죽음을 선택하더라도 신무열을 해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더군다나 신무열이 자신의 결혼식을 덫으로 사용해 이들을 잡아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신무열의 얼굴은 차갑게 굳었다.“해독제가 없다면 너희도 죽어야지.”그는 총알을 장전하고 무기를 아린에게 건넸다. 직접 복수하는 것만큼 후련한 건 없다.하지만 아린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이들을 처치한다고 해도 자신의 삶은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신무열이 직접 건네준 무기였기에 아린은 그의 뜻을 따랐다.‘탕! 탕! 탕!’눈앞의 사람들은 총소리와 함께 차례로 쓰러졌다.그러나 아린은 자신의 힘으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뒤로 쓰러졌다.신무열 재빨리 그녀를 부축했다.그 순간 아린의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오고, 눈에서도 피가 흘러나왔다. 신무열은 그 모습을 보고 크게 외쳤다.“누구 없어! 빨리 이쪽으로 와!”아린은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요, 신무열 선생님.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버티려고 했는데 자신을 과대평가했나 봐요... 기대 같은 건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아린은 애초에
법로의 표정은 여전히 엄숙했다.온지유는 이런 소식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지금 이 상황에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무엇을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지금은 침묵이 가장 좋은 답변일지도 모른다.신무열 또한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아린에게 꼭 살리겠다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신무열은 깊은 죄책감에 사로잡힌 채 아린이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미안해. 한 몸 바쳐 중요한 정보를 전해준 네 목숨을 결국 지킬 수 없었어.”아린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몸속의 독으로 인해 얼굴은 이미 다 망가졌지만, 신무열이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렇게 대단한 정보도 아니에요. 제가 말하지 않아도 결국 무열 씨는 모든 걸 알게 됐을 거예요.”그녀는 자처해서 한 것이었고 이 일로 인해 신무열이 어떤 마음의 짐도 가지지 않길 바랐다.신무열은 보이지 않는 손에 심장이 쥐어 짜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자신을 위해 한 몸 바쳐 싸운 아린을 위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에 목이 막혔다. 따로 방법이 없다면 이대로 그녀가 죽어 가는 걸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신무열은 그녀가 어떤 후회도 남기지 않도록 해주겠다고 결심했다.신무열은 아린에게 약속했다.“내 무능함 때문에 네 독을 풀어주지 못했지만 걱정하지 마. 나는 절대 널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놈들한테 건 현상금도 아직 유효해. 정 안 된다면... 내가 반드시 복수해 줄게. 마지막으로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다면 나에게 말해줘.”신무열의 눈빛은 확고했다.아린이 어떤 소원이든 말하든 그는 반드시 그것을 이뤄줄 생각이었다.아린은 신무열이 김혜연과 결혼할 것을 알고 있었다.그랬기에 두 사람을 곤란하게 하거나 결혼 전에 그의 마음을 흔들고 싶지 않았다.아린은 끝까지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신무열 선생님, 제가 당신에게 이 정보를 전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당신이 저를 살리려 노력해 주고 제 곁에 있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해요.”“혜연
온지유는 참지 못하고 농담을 던졌다.“결혼 후엔 아이도 빨리 낳아야겠네요. 나중에 아기가 태어나면 나도 좀 같이 놀아줘야죠.”“넌 이제 Y국에 있지도 않고 아버지도 같이 경성에 갔잖아. 차라리 Y국으로 와. 내가 널 고용할게.”신무열은 단숨에 말을 이어갔다.사실 거리가 그들 사이의 큰 걸림돌이었다. 온지유가 경성에 남기로 한 건 그녀의 선택이지만 신무열은 그녀가 Y국에 머물러 주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Y국은 그들의 뿌리와 영혼이 있는 곳이며 오빠로서 여동생에게 여러모로 보답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온지유도 신무열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이현이 경성에 있고 양부모도 그곳에 있는 온지유에게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게다가 온지유는 Y국을 관리하는 일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온지유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형수가 아이를 낳게 되면 내가 와서 돌봐줄게요.”두 사람에겐 어머니가 없었고 신무열의 능력으로 아이가 태어날 때 산후조리사는 고용할 수 있다 해도 가족의 보살핌을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김혜연은 온지유가 ‘형수’라 부르는 말에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신무열이 자신을 인정해 주고 신무열 곁의 모든 사람이 그녀를 받아들여 주고 있다는 것이 참 다행스러웠다.신무열은 아린의 문제에 대해 법로에게 말할 필요가 있었다.“아버지, 제 친구가 노석명이 개발한 독약의 개량품에 감염되었습니다. 직접 한 번 살펴봐 주실 수 있을까요?”법로는 노석명의 이름을 듣고는 눈빛이 어두워졌다.“노석명의 독약이라니? 그놈은 이미 처형되어 사람의 형체조차 잃고 혀마저 잘려 매일 돼지처럼 살고 있다. 노석명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이냐?”혹은, 눈치도 없는 누군가가 아직도 노석명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다는 것일지도 몰랐다.한편, 온지유는 ‘아린’이라는 이름을 듣자 과거 Y국 북부에서 처음 신무열을 만났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내가 아는 그 아린 맞아요?”“그래.”신무열은 숨기지 않았다.당시 전쟁 중에 아린은 온지유에게 식사를 해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