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정말 부씨 가문 그 녀석과 사귀는 거 아니야?” “아니에요!” 하연은 하성의 손을 떼어내며 대답했는데 아직 가흔이 아직 하성에게 말해주지 않은 것 같았다. 몇 초 간 하연을 빤히 쳐다보던 하성은 그제야 의심을 거두었고 손으로 그녀의 이마를 어루만지더니 말했다. “안색이 칙칙한 걸 보니 잠을 제대로 못 잔 거야?’ 그러나 하연은 자신과 상혁이 밤새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털어놓을 수 없었기에 말머리를 돌렸다. “오빠는 가흔이와의 관계에 대해 아직 제대로 말해주지도 않으면서 제 정보부터 캐내려 해요? 뭔가 순서가 잘못된 것 같지 않아요?” 이 말에 하성은 갑자기 헛기침을 했다. “이미 다 들켜버렸는데 뭘 더 말하라는 거야?” “구체적이지 않잖아요. 당연히 설명을 해야죠!” 이때 태훈이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사장님, 3시에 크리스마스 연회 장소의 세팅 상황을 체크하러 가야 합니다. 약속시간이 거의 다 되었습니다.” 하연은 태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하성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오빠, 같이 가요. 가면서 설명해줘요!” “난 간다고 한 적 없어!” 그러나 하연은 이미 하성을 끌고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마침 연예부에 자신감도 심어주고 좋잖아요. 오빠가 가장 큰 간판이니까요!” 하성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하연, 너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어떻게 네 오빠를 상품 취급을 할 수 있어!” 말은 이렇게 했지만 하성은 결국 하연과 함께 약속 장소로 출발했다. 크리스마스 연회가 열릴 곳은 하나의 커다란 건물이었는데 매 층마다 수많은 작은 방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리고 매 방에는 한 사람씩 라이브 커머스를 진행하고 있었으며 장비까지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JJ그룹 운영팀의 윤정수가 하연과 함께 현장을 돌아보고 있었다. “주 회장님께서는 DS그룹의 호스트들에게 반드시 최고의 자원과 데이터를 제공하라고 특별히 지시하셨습니다.” 그러자 하연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
공사 현장은 현재 하연이 있는 곳과 멀지 않았고 모연도 마침 오늘 공사 현장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하연과 하성이 건물에서 나오는 모습이 그녀의 눈에 띄었다. 이때 양재성이 모연의 뒤에서 굽신거리며 따라다녔는데 조심스럽게 모연의 눈치를 살피더니 물었다. “임 사장님, 뭘 보시는 겁니까?” 그러자 모연은 표정이 일그러진 채 대답했다. “네 목이 언제 날아갈지 생각 중이었어. 왜?” 순간 양재성은 심장이 철렁하여 말했다. “일은 이미 잘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인부들도 전부 제 사람들이니 절대 정보가 새나가거나 그럴 리는 없을 겁니다. 임 사장님, 화내지 마십시오.” 모연은 냉소하며 양재성을 흘겨보았다. “나를 너와 같은 배로 끌어들였으면 마지막을 어떻게 마무리 지을지 생각은 해둔 거야?” 양재성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임 사장님께서 명시해 주십시오.” “네가 무슨 수를 쓰던지 상관없어. 빠른 시일 내로 돈 다시 메꿔! 이 사업은 애들 소꿉 장난이 아니란 말이야.” 모연은 비록 똑똑하진 않았지만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을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만약 누군가 갑자기 이 일에 대해 조사라도 실시한다면 분명 감방에 가게 될 게 뻔했다. 양재성은 몸을 바들바들 떨며 말했다. “전, 저에겐 정말 돈이 없습니다. 만약 그 방법이 아니었다면 지금 공사를 단 하루도 진행할 수 없었을 겁니다!” “돈이 없어?” 모연은 천천히 양재성의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그럼 만들어와. 내가 방금 무슨 수를 쓰던지라고 했잖아?” “하지만 전...” 모연은 갑자기 눈알을 팽글팽글 돌리더니 턱을 치켜들고 멀지 않은 곳의 하연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여자 보이지? 현재 DS그룹의 실세이고 자산이 엄청나. 방법 좀 생각해서 저 여자 손에서 돈 뜯어내면 되겠네.” 순간 양재성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바로 모연의 뜻을 눈치 챘다. “저 분이 DS그룹의 사람이라면 어찌 제가 그런 높으신 분에게 감히 손을 댈 수 있겠습니까?” “못해도 해내야 돼. 이미
잠시 후 태훈은 칵테일바의 건물 앞에서 B시 가장 큰 건설자재 공급자인 문지상을 맞이했다. 문지상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태훈에게 굽신거리며 인사를 했다. “최 사장님께서 갑자기 만남을 요청하셔서 경황없이 달려오느라 아무 것도 준비하지 못했어요. 이거 참 죄송스럽네요!” 태훈은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저희 사장님은 그런 걸 따지는 분이 아니니 괜찮습니다. 만남에 응했으니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문지상은 태훈을 따라 칵테일바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는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이리저리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방금까지 거래처 사람과 술을 마시고 있던 문지상은 갑자기 비서를 통해 높으신 분이 그를 만나려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는데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도대체 무슨 일로 부른 건지 물어보지도 못했다. “정 비서님, 혹시 최 사장님께서 무슨 일로 저를 부른 건지 알 수 있을까요?” 태훈은 길을 안내하며 대답했다. “사장님을 만나면 자연히 알 게 될 겁니다.” 이에 문지상은 마음이 더욱 심란했다. 태훈이 문을 열자 테이블 위에는 여러 가지 술들을 진열되어 있었고 자리에 앉은 하연은 뽀얀 피부가 유독 더 눈에 띄었으며 차분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다. “문 사장님, 어서 오세요.” 하연은 맑은 미소를 지으며 손짓했다. “여기 앉으시죠.” 문지상은 하연의 미모에 잠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새로 부임한 DS그룹의 사장이 패기 있고 능력도 있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미모까지 갖추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태훈은 바로 룸의 문을 닫아 바깥의 잡음을 전부 차단해 버렸다. “최근 DS그룹에 실업 쪽의 사업 계획은 없는 거로 알고 있는데 최 사장님께서 무슨 일로 저를 찾으신 걸까요?” 하연은 문지상에게 술을 한 잔 따르더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단지 최근에만 없는 것뿐입니다. 문 사장님이 B시 건설자재 공급 상인들 중에서 가장 유명하신 분이라 들었는데 앞으로 만약 그쪽으로 사업이 있게 되면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문
태훈은 테라스에서 문지상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고는 다시 룸으로 돌아왔다. 이때 하연은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는데 말투는 방금보다 온화했다. “상혁 오빠, 어때 보였어요? 방금 그 사람 말은 양심에 어긋나는 일은 한 적 없다는 뜻일가요?” 핸드폰 화면에는 통화시간이 30분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상혁은 전화기 너머에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너도 문지상 그 사람이 도대체 나쁜 짓에 가담한 건지 아닌지 확실하게 모르고 있었던 거야?]“당연히 몰랐죠. 전 단지 떠본 것뿐인데 그렇게 찔려 할 줄 몰랐죠.” [양심에 어긋나는 짓을 하지 않았으면 찔릴 것도 없었겠지. 하지만 문지상 그 자가 대답하는 걸 보니 분명 뭔가 걸리는 게 있는 것 같아.]상혁이 말을 이어갔다.[한 번 지켜봐. 만약 문지상이 곧바로 성동 건설과의 합작을 멈춘다면 그가 전에 확실히 부당한 거래에 가담했다는 것일 테니 말이야.]하연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저도 같은 생각이예요.” 만약 정말 부당한 거래가 없었다고 해도 문지상이란 새로운 인맥을 쌓았고 함께 술 한 잔 마셨다 치면 되니 썩 빚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 진짜 부당한 거래가 있었다면 임모연은 왜 그런 일을 벌인 걸까요?” “아마 자금과 연관돼 있을 수 있어.” 하연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전 이 사업에 꽤 많은 돈이 투자되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호현욱 이사가 투자한 것까지 합치면 적어도 몇 천억은 될 거예요. 그런데 횡령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건 본인들 돈 아닌가요?” [만약 횡령이 아니라 빛을 진 것이라면?]상혁이 말했다. [내가 전에 말한 적 있지? 그 사업을 책임진 공사 업체 사장이 도박을 한다고 말이야.]‘참!’ 하연은 순간 깨달았다. “사실 제가 늘 궁금하던 게 하나 있는데 임모연은 전에 디자이너로 활동하다가 돈을 꽤 많이 빛 졌다고 들었는데 그가 이 사업을 할 돈이 어디서 난 걸까요?” 이 문제를 생각하던 하연은 대담한 추측을 했다. “혹시 한서준이 돈을 줬을 가능성은
하연의 팔은 잡은 이 남자는 힘은 엄청 강했는데 젖은 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고 있었고 하연에게도 한 벌 건넨 뒤 신속하게 이곳을 빠져나갔다. 알고 보니 이 칵테일바에는 다른 통로가 더 있었는데 이곳은 불길이 작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가기에 공간도 충분했다. 불에 탄 조형물들이 여기 저기에서 무너지고 있었고 하연은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젖은 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고 있어 조금은 살 것 같았다. “사장님! 어떻게 여기에 계세요?” 이 통로로 탈출하는 또다른 사람들도 보였는데 그들은 하연 눈앞의 이 남자를 보고 매우 놀란 듯했다. 그리고 사장이라고 불리는 이 남자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빨리 나가야 해!” 그렇게 한동안 이곳에는 부랴부랴 탈출하는 발걸음 소리만 들렸다. 하연도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고 눈 앞의 검은 옷을 입은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는데 키가 크고 꽤 건장한 체격을 가진 것으로 보아 나이가 많지 않은 것 같았다. ‘방금 이 남지의 목소리 뭔가 익숙했는데, 어디서 들어본 것 같아.’ 하지만 하연은 많은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급선무였다. 이 칵테일바는 3층에 위치해 있었는데 마지막 남은 한 계단을 디딜 때에야 하연은 한 시름 놓을 수 있었고 젖은 수건을 던지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아마 뒷문으로 빠져나온 상황 같았는데 방금 통로로 탈출한 사람들은 전부 내부 직원이었고 모두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까워서 어떻게 해? 개업한 지 오래 되지도 않았는데 전부 불에 타버렸으니 말이야.” 그런데 누군가 방금 말을 꺼낸 직원을 툭툭 치면서 그 검은 옷을 입은 남자의 방향을 가리켰는데 순간 그 직원은 입을 바로 다물었다. 잠시 후 하연도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혹시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남자는 호수처럼 깊은 두 눈을 가지고 있었는데 매우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이 남자는 젖은 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고 있을 뿐 하연의 관심을 피하려 했다. “괜찮습니다.
하연이 답장을 보냈다. [이제 안전해요. 걱정 마세요.] 하연은 볼 수 없었지만 핸드폰을 손에 꽉 잡고 있던 상혁은 그녀의 문자를 보고 나서야 긴장되었던 마음이 진정되었다. 이때 연지가 급히 사무실로 들어오며 말했다. “대표님, 방금 비서실의 연락을 받았는데 귀국하는 비행기 티켓을 끊으라고 하셨다고요?” 상혁은 핸드폰을 놓으며 대답했다. “아니야, 취소시켜.” 연지는 잠시 어리둥절했는데 예리한 눈썰미로 상혁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과 불끈 솟아올랐던 핏줄들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이때 연지의 머릿속에는 순간 하연의 모습이 스쳤는데 바로 고개를 끄덕이고 새로운 화제로 말문을 열었다. “부 사장님 쪽에 사고가 났다고 합니다.” 상혁은 바로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무슨 일인데?” “밤에 임주시 공사 현장을 탐사하던 중에 폭발 사고가 발생했는데 부 사장님께서 그 여파로 부상을 당했고 긴급으로 병원에 실려갔다고 합니다.” 순간 상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로 가더니 말했다. “폭발 원인은?” “인부가 건축자재 보존을 잘못하여 발생한 사고라도 합니다. 다행히 폭발 범위는 크지 않고 후속적인 공사 진행에도 문제는 없을 듯합니다.” 연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병원에서 전해온 소식에 의하면 부 사장님은 부상이 엄중하여 아마 우리 쪽으로 호송하여 치료를 해야 할 것 같다고 합니다.” “생명이 위험한 거야?” “아직까지 그런 것 같진 않습니다.” 이 말에 상혁은 콧방귀를 꼈다. “야심 덩어리 같은 자식.” “부 사장님께서 참 독하신 것 같습니다. DL그룹 본사로 돌아오기 위해 이렇게까지 하시는 걸 보면 말입니다.” “남준이 독하지 않았다면 내가 떠난 2년 동안 모든 실권을 손에 쥐고 독재하지도 못했겠지.” 연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부 회장님의 일정을 알아보니 오늘 사모님의 전시회 현장에 도우러 갔다고 하던데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보자.” 상혁이 의미심장하게
“그럼 부상은?” “제가 병원 최고의 외과 의사들을 그쪽으로 지원 보내 반드시 별 탈 없도록 하겠습니다.” 상혁이 계속 말했다. “남준이 일단 돌아오게 되면 공사 현장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는 소식은 외부에 소문 날 게 뻔한데 저희 DL그룹에 그런 오점을 남길 수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아버지?” 이 말을 들은 부동건은 상혁을 훑어보더니 말했다.“그래, 네 계획이 아주 꼼꼼한 것 같구나.” 상혁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단지 송혜선 아주머니가 이 사실을 알고 걱정할까 봐 근심됩니다.” “만약 그 여자가 걱정된다고 하면 남준을 옆에서 돌볼 수 있도록 함께 임주시로 보내 주거라. 네가 알아서 처리하거라.” 상혁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네.” 연지는 이미 사건의 내막을 다 알고 있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내심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상혁은 또 몇 가지 공적인 이야기를 보고했고 돌아가기 전 부동건이 그를 다시 불러 세웠다. “DL그룹을 떠나 있는 2년 동안 많이 성장했구나. 잘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쭉 유지하거라.” 이에 상혁은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다 아버지께서 잘 인도해주신 덕분이죠.” 차에 오른 뒤 연지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왜 회장님께 국내 시장에도 진입하고 있다는 말씀은 드리지 않은 겁니까?” 차는 빠르게 달리고 있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상혁은 자신의 옷소매를 매만지며 말했다. “아직 때가 아니야.” DL그룹으로 돌아온 후 비서실의 직원이 자료 한 부를 가져왔다. “최하연 씨가 사고를 당한 곳을 찾았습니다. 바로 B시 중심구역에 새로 개업한 칵테일바인데 현재 화재는 전부 진압되었고 피해자도 없다고 합니다.” 자료를 건네어 받은 상혁은 두 페이지 넘겨보았고 저도 모르게 칵테일바의 이름을 읽었다. “소울 칵테일?” 옆에 있던 연지가 한 마디 했다. “꽤 세련되었네요.” B시.태훈도 똑같이 하연에게 보고했고 이미 그 화재는 B시의 핫뉴스로 떠올랐다. “꽤 아깝게 됐어요. 알아보니 그 사장은 반
회의실에서는 열렬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이때 누군가 문을 쾅 닫았는데 바로 호현욱이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이다. “잘난 체하긴!” 뒤따라 나온 부하가 입을 열었다. “어디 저들 말처럼 쉽게 성공하겠습니까? 요즘 전자상 거래는 전부 몇몇 쇼핑 플랫폼에만 먹히는 추세인데 JJ그룹이 어찌 그리 쉽게 치고 올라올 수 있겠습니까!” 호현욱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하연의 너무도 자신만만한 모습에 저도 모르게 걱정되었던 것이다. “혹시라도 저 여자의 뜻대로 된다면?” “호 이사님, 저번 식사자리에서 TB 쇼핑몰 대표는 절대 JJ그룹에 특혜 같은 건 주지 않을 거라고 했잖습니까?” “두 회사는 경쟁 관계이고 소비자들도 멍청하지 않으니 어디가 더 혜택이 많으면 어디로 몰리겠죠!” 이 말을 꺼낸 사람은 바로 호현욱 곁에서 십 몇 년 간을 함께 한 비서였는데 두 사람은 비슷한 연령대였기에 모두 젊은 세대가 추진하는 사업에 대해 썩 내키지 않아 하고 있었다. 비서의 말을 듣고 난 호현욱은 그제야 조금 안심되었고 고개를 들어보니 마침 하성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있었다. 호현욱은 실눈을 뜨며 말했다. “저 자식 요즘 회사를 자주 드나드네?” “자기 여동생이 여기 있으니 당연히 기웃거리고 싶나 보죠.” 호현욱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저번 모임 때도 저 자식을 봤잖아.” “그 날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날 저녁 레스토랑에서 하성의 뒤에는 한 여인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가고 있었는데 한 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관계임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더욱 놀랄 만한 일은 호현욱이 화장실을 가는 길에 마침 구석진 곳에서 두 사람이 입을 맞추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것이었다.호현욱은 눈동자를 한바퀴 돌리더니 말했다. “연회 때 하성도 참석하나?” “물론이죠. 이제 하성도 DS그룹의 일원이고 하연의 프로젝트이니 참석하는 건 당연한 거고 아마 마지막에 등장한다는 것 같던데요.” “흥, 만약 하성이 무대에 오르지 못한다면 연회의 효과는 크게 줄어들
다른 곳에서 있던 조봉규가 소란이 일자마자 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송혜선에게 다가가며 다급히 말했다. “설날인데, 뭐하러 이렇게 화를 내...” 조봉규가 입을 여는 순간, 남준의 온몸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남준의 시선이 날카롭게 쏘아붙었고, 조봉규는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애써 태연한 척하며 한 발 다가섰다. 송혜선의 팔을 조심스레 부축하며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건강이 우선입니다.” ‘건강?’남준은 손에 쥔 염주를 힘껏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간 손등에는 핏대가 서고, 눈빛은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시선은 서로 닿아 있는 두 사람의 손목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입가에 엷은 조소가 떠올랐다. “조 선생님, 참으로 열정적인 분이시군요. 설날에도 근무 태세를 유지하시다니.” 조봉규는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의 말 속에 담긴 조롱을 알아챘다. 그러나 겉으로는 한껏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머리를 숙였다. “별말씀을요. 환자의 곁을 지키는 게 제 본분입니다.” 남준은 가만히 조봉규를 노려보다가, 짧고 날 선 경고를 던졌다. “그렇다면 본분에만 충실하시죠. 여긴 부씨 가문의 본가이니까.”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남준아!” 송혜선이 다급히 나섰다. 남준을 나무라는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조봉규를 감싸려는 의도가 분명히 깔려 있었다. 남준의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송혜선은 오히려 기세를 올려 쏟아내듯 말했다. “네가 좀 더 나서서 잘했더라면, 부상혁한테 밀릴 일도 없었어! 내가 왜 조진숙한테 설날마다 굽신거려야 하냐고?” “지금, 어머니는 나를 원망하시는 겁니까?”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남준의 손에서 염주의 한 알이 ‘탁' 하고 부서졌다. “남준아!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송혜선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염주는 영적인 기운이 깃든 물건이야. 함부로 부수면 불길한 일이 생길
부동건의 말은 송혜선을 전적인 신뢰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면, 과연 부동건은 스스로를 어떻게 납득할까?’ ‘결국 속아서 살아온 날이 우스운 바보일 뿐...’ 조진숙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애틋한 사랑인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서류들, 가져가.” “나 다른 뜻은 없어.” 부동건은 조진숙의 단호한 태도에 살짝 주춤했지만, 곧장 다시 설득을 시도했다. “네가 아직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동안... 혹시 네가...” “착각하지 마.” 조진숙은 부동건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부동건은 한 발 더 다가섰다. “하지만 네가 이걸 받지 않는다면, 결국 날 아직도 원망하고 있다는 뜻 아니야?” 조진숙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슴 깊숙이 가라앉은 감정이 불쑥 떠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정리한 뒤,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부동건은 말없이 서류를 정리하더니, 숙련된 손놀림으로 만년필을 열어 조진숙 앞에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대답이었다. “후회할 거였으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어.” 이번엔 조진숙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펜을 들어, 서류 맨 아래에 단호한 필체로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부디 이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 부동건은 서류를 덮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마음속에 짓눌려 있던 무언가가 비로소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문득 나직이 말했다. “이제야... 후회한들, 이제 돌아갈 길도 없어.” 조진숙은 그 말에 가슴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끝내 시선을 돌렸다. 담담한 표정 속에 모든 감정을 삼키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 “이건... 다 정해진 운명이야.” ‘운명의 장난...’ ‘어쩔 수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제 뜻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부동건의 태도가 단호했다. 이를 지켜보던 부해철이 더 이상의 말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네가 마음을 정했다면, 내가 더 이상 뭐라 할 수도 없지. 다만, 앞으로 그 여자를 내 앞에 데려오지는 마라. 네가 어떻게 살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그리고...” 부동건이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지만, 부해철은 손을 휘저으며 등을 돌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뒷모습만이 남았다. ‘그렇게까지 반대할 줄은 몰랐네...’ 부동건은 묘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설날 온 나라가 한 해의 끝을 보내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 예전에는 늘 조진숙과 상혁 모자가 함께 보내던 명절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본가가 가까운 데다, 명절이 지나면 하연과 상혁의 약혼식이 있을 예정이었다.그래서 조진숙이 제안했고, 양가 가족들이 함께 부씨 가문에서 설날 저녁을 보내기로 했다. 그 덕분에 조진숙은 하루 종일 분주하게 준비에 매진했다. 그러나 제사가 끝나자마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진숙아, 새해 복 많이 받아.” 부동건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낮은 자세로 인사를 건넸다. 평소 같았으면 송혜선과 함께 명절을 보낼 사람이, 오늘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조진숙에게는 뜻밖이었다.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여긴 웬일이죠?” “잠깐 들렀어, 당신한테 할 말도 있고 해서.” 조진숙은 그의 시선을 따라 문득 집안 분위기를 둘러보았다. 송혜선이 이곳에 들어온 이후, 부씨 가문 본가는 한 지붕 아래에서도 철저하게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있었다.그 경계는 뚜렷했고, 불필요한 마주침은 없었다. 부동건이 송혜선과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후, 둘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만약 이번 일이 없었다면, 조진숙 역시 이미 오래전에 이 집을 떠났을 터였다. “들어와.
송혜선은 급히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했다. “아무래도 남준이가 좀 늦나 봐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는 게 어떨까요?” 부동건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얼굴을 굳혔다. “말 같지도 안은 소리를 하고 있어! 오늘 같은 날에, 시간 개념도 없이 늑장을 부려.” 송혜선은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남준이 오면 꼭 제가 주의를 줄게요.” “교육 똑바로 시켜. 좀 상혁이 하는 것에 반만큼이라도 신중했으면, 나도 그 녀석한테 좀더 잘해 줬을 거야.” ‘또 시작이군.’ 송혜선은 속이 쓰렸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오면 오는 거고, 못 오면 어쩔 수 없지.” 부동건은 한 치의 여지도 주지 않고 단호하게 내뱉곤,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어서 남준이를 찾아와! 오늘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를 어머니라고 부를 생각은 하지도 마.” 송혜선의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렸다. 이 모든 노력들이 사소한 실수 하나로 무너질 순 없었다. ...부씨 가문은 제사에 있어서 철저한 예법을 중시했다. 다행히도 상혁은 부동건과 수년간 제사를 지내며 익숙해져 있었고, 모든 절차를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했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 역시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건아, 상혁이가 있어서 네 대가 끊길 걱정은 없겠구나.” “앞으로 부씨 가문의 대업을 상혁이가 이어간다면, 우리 늙은이들도 한시름 덜겠어.” 부동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야 물론이죠. 상혁이는 부씨 가문의 기둥이 될 인재입니다.” 상혁은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앞으로도 많이 지도해 주십시오.” “어디 우리가 너희 젊은이들에게 배우는 게 더 많지!” “...”제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부남준이 느지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동건은 남준을 보자마자 눈빛이 차갑게 식었지만, 일단 감정을 누르고 말했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어서 와서 절부터 올려라.” 남준은 살짝 눈썹을
최씨 가문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부씨 가문의 본가는 싸늘하고 조용했다.예년과 다름없이, 설날이 되면 부동건은 집안의 남자들과 함께 조상들에게 제사를 올려야 했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송혜선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부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연결음만 울릴 뿐, 남준은 끝내 받지 않았다. ‘이 녀석은 정말이지, 사람 속을 태우는 재주가 있다니까.’ 송혜선의 얼굴에 점점 초조한 기색이 드러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조봉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 아직도 전화를 안 받아?” 송혜선은 짙어진 눈매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녀석, 정말 사람을 신경 쓰게 만드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조봉규는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를 달랬다. “혹시 무슨 사정이 있어서 늦는 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너무 걱정 마십시오. 남준이가 철없는 아이도 아니고.” ‘철없는 아이가 아닌데 이러겠어?’ 송혜선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최대한 감정을 눌렀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이 원래부터 남준이를 못마땅해했는데. 이런 중요한 제사까지 빠지면, 분명 뒷말이 나올 거야.” 그녀의 말투에는 이미 불안과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그러는 사이, 두 사람이 작은 응접실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그때, 정면에서 다가오던 부동건과 마주쳤다. 부동건은 갓 외투를 정리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송혜선과 조봉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손동작이 살짝 느려지며 묘한 시선을 던졌다. “조 선생, 올해도 그렇게 혜선이 옆에 딱 붙어서 열심히 잘 보살펴 주세요.” 그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조봉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회장님,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부동건은 묘한 눈빛을 유지한 채, 덤덤히 말했다. “혜선이가 아이를 무사히 낳으면, 그에 대한 보상도 충분히 해줄 테니
두 집안이 한데 모여 북적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런 귀한 순간을 마음껏 즐기며 보내다 보니, 어느덧 설날 전날이 되었다. 모두 함께 전용기를 타고 F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설날이 밝았다. 올해는 오랜만에 최씨 가문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인 데다, 기쁜 소식까지 겹친 한 해였다. 그 덕분인지 최동신은 평소보다 더욱 설 준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최씨 가문의 본가는 분주했다. 집사와 고용인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저택 곳곳을 장식했다. 새빨간 복주머니와 길상 문양이 새겨진 장식들이 하나둘 자리 잡았고, 정원에는 화려한 등불이 걸리며 설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하연이 계단을 내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최하성이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하연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그러면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연은 두 눈을 반짝이며 얼른 봉투를 받았다. “와! 이렇게 두꺼워요? 하성 오빠 최고!” 그때, 계단 위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있다.” 최하경이었다. 그 역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들고 내려왔다. “작년, 재작년 다 해외에 있어서 못 챙겨줬잖아. 그래서 올해 한꺼번에 더 두둑이 넣었다.” “와! 이건 더 두껍잖아요! 이러다 손목 나가겠어요!” 하연은 연달아 두 개의 두툼한 봉투를 받아 들고, 각각 한쪽 팔을 오빠들에게 걸었다. “오빠들 있어서 진짜 좋아요!” 최하성, 최하경 둘 다 서로를 바라보며 우애가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그리고 최하민과 예아름이 나란히 들어왔다. 추운 바깥 공기를 뚫고 들어오자마자, 하민은 아름의 목에서 목도리를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그는 안쪽에서 떠들썩하게 웃고 있는 세 남매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집이 이렇게 활기찬 게 얼마 만이에요!” 아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앞으로 더 행복한 일만 가득할 거예요.” 하민은 아내의 허리를 가볍
그리곤 진심을 담은 남자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하지만 하연의 눈가에는 이미 촉촉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글귀,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상혁이 진심을 담아 전한 마음이 느껴졌다. 이건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상혁이 하연에게 건네는 가장 솔직하고 깊은 속마음이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온 부드러운 목소리. “하연아.” 하연은 본능적으로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숨이 멎었다. 아까까지의 편안한 차림은 온데간데없이, 눈앞의 상혁은 새하얀 수트를 차려입고 있었다. 반듯하게 맨 보타이,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 그리고 손에 들린 한 다발의 꽃. ‘동화 속에서 막 나온 왕자님 같아.’ 하연은 멍하니 서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상혁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하연의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다. 남자의 시선, 남자의 걸음, 그가 다가오는 순간의 모든 것이 하연의 가슴속 깊이 새겨졌다. 마침내, 상혁은 하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은 마주 섰고, 서로의 눈동자에 상대방의 모습이 담겼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떨림이 전해지는 듯했다. 조용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상혁이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꽃을 건넸다. 남자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하연아...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말이 끝나자, 그는 왼발을 살짝 앞으로 내디디더니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작은 벨벳 상자를 꺼냈다. 이어서 뚜껑을 열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혁의 눈빛에는 단 하나의 감정만이 가득 차 있었다. 바로 사랑이었다. “한때 나는 사랑이란 영화 속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널 만나고, 그게 아니란 걸 알았어.” “사랑은 영화 속 한 장면이 아니라,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서로를 아껴주고, 이해하고, 감싸주는 거라는 걸.” “그래서 나는... 너와 함께, 그런 사랑을 하
둥근 형태의 테라스는 새하얀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위로 푸릇푸릇한 덩굴식물이 감싸고 있었다. 연둣빛 야자수 잎 사이로 작고 앙증맞은 꽃들이 군데군데 피어 있었고, 은은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왔다. 테라스 중앙에는 우아한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이미 차와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하연아, 우리 저기에 앉자.”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테이블로 이끌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직접 꽃차를 따라주었다. 하연은 손으로 찻잔을 감싸고 조심스레 한 모금 머금었다. 부드러운 향이 입안 가득 퍼지며 깊은 여운을 남겼다. “이거 무슨 차예요? 향이 너무 좋아요.” “목련차야. 테라스 뒤쪽에 한가득 피어 있는데, 한번 가볼래?” ‘목련꽃이 이렇게 가까이에서 피어 있다니.’ 순백의 꽃잎이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나는 모습이라니,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연은 찻잔을 내려놓고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 “가보자!” 둘은 테라스를 나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하얀 원형 아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눈부신 꽃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우와...’ 하연은 숨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백의 목련이 바람에 살랑이고, 보랏빛 라벤더가 넘실댔으며, 튤립이 형형색색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각종 귀한 품종의 꽃들이 경쟁하듯 피어나고 있었고, 이 모든 아름다움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꿈 속을 걷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상혁은 걸음을 멈추고 어디선가 꽃으로 엮은 화관을 꺼내더니, 조심스레 하연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하연아, 여기는 너만을 위한 꽃밭이야.” 놀란 듯 하연이 눈을 깜빡이며 상혁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여자의 가슴이 터질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꽃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길을 따라 걷자 길이 점점 넓어졌고, 상혁과 함께 그 길을 따라 가자 점점 하연의 시야가 트였다.
고개를 돌려 반짝이는 눈빛으로 하연이 상혁을 바라보았다. “여긴 어디예요?” 상혁은 여자의 시선을 따라 앞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때 버려졌던 작은 섬인데. 나중에 내가 사들였어.” 그는 자연스럽게 하연의 손을 잡으며 손가락을 맞물렸다. “어때? 마음에 들어?”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네, 좋아요!” ‘좋다니 다행이야.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한 보람이 있었네.’이 순간을 상혁이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그는 하연의 손을 살짝 당기며 말했다. “일단 우리 아침부터 먹자. 그리고 이따가 바닷가에 데려가 줄게.” “좋아요.” 이 섬은 남태평양 깊숙한 곳에 자리한 작은 외딴섬이었다. 한때는 몇 년 동안 방치되어 잡초가 무성하고 황폐했지만, 우연한 기회에 상혁이 이곳을 매입해 전문가에게 맡겼다. 불과 2년 만에 섬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집도 짓고, 길도 만들고, 섬 전체가 아름답게 정돈되었다. 한낮이 되자 햇살이 섬을 따스하게 감쌌다. 하연과 상혁은 손을 잡고 깔끔하게 정돈된 자갈길을 따라 걸었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했다. 바람이 불어오자 하연의 원피스 자락이 살짝 날렸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멀리 두었다. 눈앞에는 하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고, 곱디고운 모래가 햇빛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 “저기 봐요! 야자수가 있어요!” 하연은 설레는 듯 조심스레 뛰어나갔다. 상혁은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그녀가 가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푸른 하늘 아래, 키가 큰 야자수들이 가지런히 줄지어 서 있었다. 커다란 잎사귀들이 바닷바람을 타고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마치 오랜 세월을 품고 바다의 이야기를 속삭이는 것 같았다. 하연은 신발을 벗고 모래 위에 발을 내디뎠다. 발끝을 감싸는 모래가 부드럽고도 간질거려, 묘한 전율이 발끝에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