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지 않는다면 돌아가시죠.”유진우는 더 이상 엮이기 싫다는 듯 딱 잘라 말했다. 자존감이 높아도 너무 높은 여자였다.차연주가 고개를 흔들며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또 아닌 척해? 유치하게. 네가 그러고 싶다면 방해 안 할게. 후회만 하지 마. 가자!”“기회를 줬는데도 내팽개치다니, 우리 선배님 화나셨어, 후회해도 소용없어!”“빨리 사과드려, 그럼 용서해 주실지도 몰라.”인여궁 제자들은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한 마디씩 던졌다. 눈물범벅이 된 유진우의 모습을 벌써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뭔가 걸리는 게 있었다.유진우는 너무도 덤덤했다. 차연주가 회의실을 나가는데도 아무 상관 없는 듯했다.차연주가 문가에서 걸음을 멈추고 다시 외쳤다.“나 진짜 간다! 마지막 기회였는데 놓쳤네, 평생 후회하게 될 거야!”유진우는 아무 표정도 없이 평온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차연주가 다시 말했다.“계속 참는 거야? 그래. 얼마나 참는지 두고 보자!”차연주가 이를 악물고 회의실을 나갔다. 아쉽게도 그녀를 마주쳐 그의 꼼수가 모조리 탄로 나고 말았다.‘내 뒤꽁무니나 졸졸 따라다니면 될 거 아닌가? 왜 허튼짓을 하는 걸까? 정말 웃겨!’유진우는 오늘 차연주에게 돌아오라고 빌 것이다. 차연주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선배님 이미 가셨어, 이제 후회해도 소용 없어!”“꼴 좋다, 그렇게 선배님 화 돋우더니, 이제 국물도 없어.”“이런 방법으로 우리 선배님 눈에 띌 수 있다고 생각해? 너 진짜 웃긴다.”“나중에 와서 빌지나 마!”인여궁 제자들이 한 마디씩 던지며 차연주를 따라 나갔다. 그들은 모두 올 때처럼 기세등등하게 자리를 떠났다.“유진우 씨! 다 당신 때문이에요! 선배님 화를 돋우다니!”떠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홍청하가 급하게 말했다.“저랑은 상관없는 일입니다. 저쪽에서 혼자 상상한 거잖아요.”“그렇긴 하지만, 우리 선배님은 외모가 출중하시잖아요. 흑심 품고 접근하는 남자들이 많아서 저 정도 경계심은 있는 게 당연해요.”“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지
“응?”유진우의 말에 모든 사람이 멍해졌다. 나가서 울며불며 차연주를 붙잡아야 하는 거 아닌가? 이건 무슨 경우지? 상상을 벗어나는 놈이었다.“뭐 하는 거예요? 일부러 우리 선배님 심기 건드리는 거예요?”잡으랬더니 오히려 내쫓기나 하고, 정말 기가 찼다.“정말 너무하네!”차연주는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그동안의 여신 이미지는 다 버린 채 당장이라도 공격할 듯 칼을 뽑아 들었다. 그녀가 언제 이런 무안을 당해봤겠는가?“지금 뭐 하는 거야?”이때 위엄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3, 40대 정도 돼 보이는 기품 있는 여자가 한 할머니와 함께 나타났다. 그녀의 눈빛은 거만하고도 냉정했다. 그 뒤의 할머니는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사부님?”여자를 본 차연주가 화색을 띠고 그녀를 맞이했다. 그녀는 바로 인여궁의 궁주인 백수정이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백수정이 기분 나쁜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인여궁 제자들은 우아해야 해. 툭하면 때리고 죽이고, 그게 뭐니?”“사부님! 이 자식이 저희를 내쫓으려 했어요!”차연주가 유진우를 가리키며 고자질했다.“말 지어내지 마시죠, 제 자릴 뺏으려다 뜻대로 안 된 거잖아요.”유진우의 담담한 한 마디에 차연주가 그에게 소리쳤다.“나한테 흑심 품고 아닌 척 접근하려다 내가 널 안 봐주니까 쫓아낸 거잖아, 이 나쁜 놈아!”“선배, 오해일 거예요, 다시 천천히 얘기해 봐요.”“청하야, 너 어떻게 저놈 편을 들 수 있어?”“이곳이 사부님과 참 잘 어울리는데, 불필요한 싸움은 하지 않는 게 좋잖아요.”“흥! 하지만 저놈은 반드시 내게 사과해야 해!”차연주가 유진우를 가리켰다. 유진우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내가 사과하지 않겠다면요? 그럼, 그쪽은 여기서 나가야 하겠죠? 멀리 안 나갑니다.”“너...!”차연주가 이를 꽉 깨물었다.“됐다!”백수정이 손을 들어 그들의 싸움을 제지하고는 차갑게 말했다.“여기, 마음에 들어. 여기 있는 거로 하자.”“사부님, 여기 남자들은 더럽고
차연주는 차갑게 웃으며 그 안으로 들어갔다.“그 선생에 그 제자라더니.”유진우는 고개를 저으며 혼잣말했다. 차연주가 왜 이렇게 거만한지 알 것 같았다. 궁주도 안하무인인데 그 제자들이 다를 리가 없었다.“저희 사부님이 차가우시긴 해요, 너무 신경 쓰지 마요.”홍청하가 난감한 듯 말했다. 이에 유진우가 손을 흔들었다.“됐어요, 그런 사소한 거 안 따져요.”홍청하의 체면 때문에 양보한 것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진작에 모두 쫓아버렸을 것이었다. 홍길수에게 목숨을 빚졌으니 열심히 그의 가족들에게 보답할 수밖에 없었다.“그럼 됐어요. 맞다, 하나만 물어볼게요. 인여경이 뭔지 알아요?”“인여경? 그게 뭔데요?”“저희 인여궁에서 잃어버린 보물인데, 그게 없어서 저희 사부님이 지금까지도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지 못하셨어요. 얼마 전 인여경이 남성에 나타났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구체적으로 누가 가지고 있는지는 몰라서요. 혹시 들은 얘기 없어요?”홍청하는 솔직하게 모든 것을 얘기했다.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유진우에게 묘한 신뢰를 느꼈다. 그녀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할 만큼 이상한 감정이었다.“인여경이요? 네,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알아낸 게 있다면 바로 알려드릴게요.”“좋아요! 인여경을 찾기만 한다면 제가 사부님께 당신을 후하게 대접하라고 할게요! 저희 선배님과 결혼한다 해도 좋아요!”“하하,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그건 넣어두기로 하죠.”유진우가 인상을 썼다. 머리나 눈이 잘못된 사람들만이 저런 여자를 마음에 들어할 거였다.인여궁 사람들의 거처를 정해준 뒤 유진우는 방에 들어와 수련하기 시작했다. 7일 탈명단의 독성은 계속 억제할 수 있을 뿐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다. 황보용명의 죽음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있었다. 범인은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않고 홀연히 사라졌다. 실마리를 잡을 수 없었다. 이제 6일도 채 남지 않았는데, 모든 사람들이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범인을 잡지 못한다면 뒷감당을 할 수 없었다.띠리링.그때 벨소리가 울렸다.
저녁 여덟 시, 로즈 카페.이청아는 창가 자리에 앉아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두 손으로 커피잔을 들고 커피를 홀짝대고 있었다. 기분이 조금 안 좋은 듯했다. 안색이 안 좋은 게, 피곤한 듯했다.어젯밤 후로 그녀는 계속 우울하고 초조했다. 머릿속은 온통 유진우의 모습과 그와의 기억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최선을 다했지만, 그녀와 유진우 사이는 계속 삐걱거리고 있었다. 이청아는 유진우의 마음속에서 그녀의 자리가 점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더 이상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특히 어젯밤의 그 냉정한 시선은 무섭기까지 했다. 둘은 원수가 된 것 같았다.이때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이청아는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았다. 문 앞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유진우였다!“왔어?”이청아가 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무슨 말을 하려고 그래?”유진우가 표정 없이 자리에 앉았다.“우리 둘, 이렇게 얘기하는 거 오랜만이지?”이청아의 표정이 복잡해졌다.“어젯밤에 오해가 있었다면, 지금 풀고 싶어.”“내가 말하면 믿을 거야? 안 믿을 거잖아. 그럼, 말할 필요 없는 거 아니야?”유진우가 덤덤하게 말했다. 이청아가 옅게 인상을 썼다.“나랑은 말하기도 싫다는 거야?”“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건데? 어제 다 말했잖아.”“사실이 듣고 싶은 것뿐이야. 나한테 숨기는 일 없었으면 좋겠어.”“사실이 듣고 싶다고? 그럼, 처음부터 끝까지 쭉 말해줄게. 첫째, 강백준과 이씨 가문 사모님 사이에 뭔가 있어. 네가 받은 공격은 그 사람들의 자작극이야. 둘째, 알아봤는데, 이씨 가문 족장이 계속 깨어나지 않는 건 그 가문 사모님 짓이야. 인삼으로 치료한다는 건 아무 근거 없는 말이야. 네 믿음을 얻으려는 거라고. 내가 나올 수 있었던 건 강백준 도움이 아니라 다른 분 도움이 있어서야. 강백준 그 사람은 위선자라고. 심지어 병사들까지 동원해서 날 죽이려고 했어, 실제로 내 형제들이 많이 죽었고. 이게 알겠어? 믿을 거긴 해?”유진우는 모든 일
“거기 서!”이청아는 유진우를 따라가 그의 소매를 잡으며 말했다.“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잘 얘기하면 안 되는 거야?”“필요 없을 것 같은데, 나도 바빠. 서로 시간 낭비하지 말자.”유진우는 더 이상 말하기도 싫은 듯 문을 향해 걸어갔다.“가지 마!”이청아가 유진우의 허리를 껴안았다. 콧대 높은 이청아에게는 엄청난 용기가 있어야 하는 일이었다.“가지 말라고 했어!”이청아는 유진우를 안은 채 얼굴을 그의 등에 대고 작게 중얼거렸다.“이번 일은, 내가 잘못했어. 문제가 있다면 고칠게. 강백준이 위선자라면 위선자인 거야. 이제 그 사람과는 안 볼게. 그럼 돼? 나 당신을 잃을까 봐 너무 무서워... 우리 화해하자. 다시는 억지 안 부리고, 당신 때리지도 않을게. 맹세해. 떠나지만 않으면 당신이 뭘 하든 좋아. 돈, 권력 그딴 거 필요 없어. 회사 팔고 여행 갈까?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날마다 즐기면서 사는 거야. 당신이 고개만 끄덕이면 바로 그렇게 할게!”이청아는 점점 흥분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부귀영화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게 더 중요했다.“청아 씨, 3개월 전에 그렇게 말했으면 승낙했겠지만, 지금은 너무 늦었어.”유진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지나간 건 돌이킬 수 없어. 전처럼 당신 곁만 맴돌면서 초조해하고 싶지 않아. 지난 시간 동안 너무 힘들었거든. 이제 내 방식대로 살고 싶어. 우린 이제 끝났어.”말을 마친 유진우가 이청아의 손을 뿌리쳤다.“왜? 아직도 화난 거라면 나 때리고 욕해. 하지만 이렇게 떠날 수는 없어. 우린 아직 안 끝났어! 당신 의심 안 할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응?”이청아는 붉어진 눈시울로 흐느끼면서 빌었다. 전에는 유진우가 화났어도 조금만 달래면 됐었다. 하지만 오늘 유진우는 너무도 냉정했다. 오늘 이렇게 그를 보낸다면 정말 끝나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될까 봐 너무도 무서워서 그를 잡아야만 했다.“청아 씨, 이 손 놔. 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마. 더
다음 날 아침, 풍우 산장.유진우는 옥상에 앉아 무표정으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어젯밤 이청아에게 이별을 고하고 돌아온 뒤 그는 계속 옥상에 있었다. 밤부터 새벽, 그리고 아침까지. 심란했던 기분도 완전히 가라앉았다. 많은 것들을 깨달은 밤이었다. 언제까지 과거에 묶여있을 수는 없었다.“보스...”이때 장 어르신이 옥상에 올라와 말했다.“방금 들은 소식인데, 인여경을 찾았답니다.”“네? 어디서요?”“타지방 상인들이 가지고 있답니다. 직거래하고 싶다고 합니다.”“직거래? 그래요, 그럼. 홍청하 씨를 불러 함께 가자고 해요.”“네!”한 시간 뒤, 진성 식당 문 앞.검은색 차가 천천히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고 유진우 일행 세 사람이 걸어 나왔다.“거짓말 아니죠? 인여경이 정말 여기 있어요?”홍청하는 식당을 바라보며 믿기 힘든 듯 말했다.“제가 왜 당신을 속여요? 믿지 못하겠으면 그냥 돌아가요.”유진우가 다시 차에 오르려 했다. 홍청하가 그를 붙잡으며 툴툴댔다.“믿을게요, 믿으면 되잖아요. 다 큰 남자가 왜 그렇게 예민해요?”“그래서, 들어갈 거예요?”“가요, 가요.”홍청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유진우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인여경은 인여궁의 보물이었고, 사부가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는 데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무슨 수를 쓰든 꼭 손에 넣어야 했다.세 사람은 직원의 안내에 따라 2층으로 올라가 화려하게 장식된 룸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두드리자 곧바로 문이 열렸다.안으로 들어가자 뚱뚱한 몸매의 중년 남자가 앉아있었다. 그는 대머리에 인자한 눈매를 갖고 있어 마치 부처님 같았다. 그 뒤에는 선글라스를 쓴 경호원 두 명이 서 있었다.“오셨습니까? 여기 앉으세요!”유진우 일행을 본 남자가 몸을 일으켜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다.“누구세요?”홍청하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전 황성태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앞으로 잘 지내봅시다.”남자가 웃으며 말하자 홍청하가 대답했다.“인사치레는 필요
홍청하가 인상을 찌푸렸다.“그게 무슨 뜻이에요? 저희한테 파는 게 아니었나요?”“인여경을 사겠다는 사람이 많아서 참 난처했습니다. 그래서 모두 한자리에 불러서 의논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공평하게요.”“공평?”유진우가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언변이 뛰어나시네요, 경매를 이렇게나 고상하게 말씀하시고.”모두를 불러내 의논한다는 건 경매하겠다는 거나 다름없었다. 인여경의 값은 이제 몇십 배로 불어날 것이다.“과찬입니다. 전 상인이니, 당연히 돈을 많이 버는 게 중요하죠.”황성태는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그도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흥! 당신 같은 사람이 제일 싫어!”홍청하가 흥분해 소리쳤다. 확실하게 값을 정하면 될 거 아닌가? 돈 있으면 사고, 없으면 말고. 간단한 일을 왜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지?시간 낭비에 불과했다.쾅!몇 사람이 얘기하고 있을 때 문이 또다시 열리고 금색 가면을 쓴 남자가 들어왔다.“오셨습니까? 앉으시죠.”“네.”가면을 쓴 남자가 머리를 끄덕이며 앉으려 하다 유진우를 보고는 깜짝 놀라 뒷걸음치며 물었다.“당신... 당신이 여긴 어떻게?”“절 압니까?”유진우가 의아하게 물었다. 남자는 실수한 걸 깨달은 듯 침을 삼키며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죄송합니다, 사람을 잘못 봤어요.”“뭐야, 놀랐잖아요!”홍청하가 불만스레 말했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다니, 이럴 필요 있나?남자는 심호흡하고 자리에 앉았다. 유진우를 보는 눈에 원한이 가득했다.또다시 몇 명의 구매자가 들어왔다. 모두 명품을 몸에 두른 것이, 아무리 봐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다 온 것 같은데, 시작하죠?”홍청하가 짜증스레 말했다.“급해 마시죠, 아직 한 분 남았습니다.”“왜 이렇게 느려요? 그럼, 그 사람 올 때까지 계속 기다려야 하는 거예요?”“재촉하긴 뭘 재촉해? 지금 왔잖아!”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멀끔하게 차려입은 부잣집 도련님이 여자 몇 명을 데리고 들어왔다.그 사람은 이원기였다!“방금 누가 재촉했어? 싫으
“오지 마, 경고했어!”때릴 기세인 유진우를 본 이원기가 놀란 듯 몇 걸음 물러섰다. 오늘은 경호원도 없어 그를 제압하기 힘들었다.“좋은 날인데, 싸우지들 마시고. 앉아서 천천히 얘기하시죠.”“한 번만 봐주는 거다.”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인여경을 사기 위해 왔으니 함부로 사람을 때릴 수 없었다. 이원기 같은 사람은 언제든 처리할 수 있었다.“얼마나 대단한가 했더니 속 빈 강정이었네!”이원기가 차갑게 웃었다. 유진우가 자신의 신분 때문에 때리지 못한 줄 알았다.“그런 몰골을 하고 감히 도련님께 덤벼? 주제를 모르네.”이원기 옆의 여자들이 비웃었다. 그녀들이 유진우를 보는 시선에도 비웃음이 더해졌다.“그만하세요, 모두 도착했으니 이제 시작합시다.”모두 자리에 앉자, 황성태가 손짓했다. 경호원 한 명이 옆의 금고를 열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나무상자를 꺼냈다. 그 안에는 양피지 고서 한 권이 들어있었다. 인여경이라는 세 글자가 크게 쓰여있었다.“인여경?”이를 본 사람들이 눈이 반짝 빛났다. 홍청하는 흥분한 듯 숨을 몰아쉬기까지 했다. 조금 의심했었는데, 진짜일 줄 몰랐다.황성태가 인여경을 가리키며 얘기하기 시작했다.“여러분, 이건 제가 힘들게 구한 겁니다. 인여경은 사라진 지 오랜 책이죠. 이 안에 엄청난 비밀들이 들어있습니다. 인여경을 수련한 사람들은 실력이 몰라보게 늘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외모 또한 가질 수 있답니다.”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특히 한 무리 여자들의 눈에 탐욕이 가득했다. 실력은 관심 없었지만, 외모가 주는 유혹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어떤 여자가 아름다움을 싫어하겠나?영원히 젊음을 누릴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유혹이었다.“도련님! 이거 저희가 꼭 가져가야 해요,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면 절대 안 돼요!”“걱정하지 마, 내가 있는 한 누구도 뺏지 못해!”이원기가 기세등등하게 말했다.“이걸 가져가면 아주 좋아하겠지?”가면 쓴 남자가 중얼거렸다.“값 부르시죠. 제가 가져갈
“제후님께서 도련님이 오실 걸 알고 저더러 미리 나와 기다리라 하셨습니다.”늙은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내가 올 걸 알고 있었다고요?”유천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면서 옆에 있는 유진우를 쳐다봤다. 저도 모르게 불안감이 밀려왔다.은성종이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건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었다.제갈영군이 전화로 알렸거나 유태범의 사자가 먼저 와서 선수를 친 것이다.“도련님, 제후님께서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늙은 집사가 허리를 굽히면서 손짓으로 안내했다.유천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여기까지 온 이상 중간에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아무리 위험한 곳이라고 해도 뚫고 나가야 했다.일행은 늙은 집사를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여러 시설을 지난 후 식당에 도착했다.식당 안에 푸짐한 음식과 술이 준비되어 있었다. 음식 냄새와 술 냄새가 뒤섞여 식욕을 돋우었다.유천우 일행은 하루 종일 이동하느라 식사할 시간도 없었다. 눈앞에 차려진 푸짐한 음식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고 배에서도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도련님, 먼 길을 오느라 배고프실 텐데 식사부터 하시죠.”늙은 집사가 공손하게 말했다.“제후님은요?”유천우가 물었다.“곧 오실 것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늙은 집사가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유천우는 웃으면서 손짓했다.“너희들, 얼른 와서 먹어.”“네.”근위병 몇 명은 대답을 마치자마자 바로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맛보기 시작했다.훈련을 잘 받은 근위병들은 3일 밤낮으로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이렇게 행동하는 건 음식에 독이 든 건 아닌지 유천우 대신 시험해보기 위한 것이었다.항상 방심해서는 안 되었다. 만약 은성종이 음식에 약을 넣었다면 그들이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도련님, 아무 문제 없습니다.”모든 음식을 다 맛본 후에야 근위병들은 유천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유천우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더
해 질 무렵, 유천우와 유진우 일행은 변경 요새 도시인 태평에 도착했다.태평은 회음 제후 은성종의 영역이었고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낙후한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은성종의 통치 아래 짧은 10여 년 만에 서경에서 5위 안에 드는 도시가 되었다. 군사, 경제, 정치, 문화, 교육, 의료까지 모든 면에서 최고 수준을 자랑했다.태평이 오늘날의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건 은성종의 뛰어난 재능과 지식 덕이었다.만약 제갈영군이 난세의 영웅이라면 은성종은 세상을 다스린 명신이었다.그 시각 회음 제후 저택 밖.검은색 승합차 한 대가 길가에 천천히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자 유진우와 유천우 일행이 잇달아 내렸다.“형, 여기가 마지막 목적지예요.”유천우는 저택 간판을 바라보면서 감탄했다.“회음 제후 은성종은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울 뿐만 아니라 마음이 따뜻하고 의협심도 강해요. 게다가 제갈영군의 편지까지 있으니 이번에는 문제없을 겁니다.”“섣불리 판단해선 안 돼.”유진우는 고개를 내저었다.“마지막 순간이 될수록 더욱 긴장을 늦추면 안 돼. 은성종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서 유만수조차도 은성종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지 못했어. 아무도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혹시 변수가 생길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유천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유태범이 이미 제갈영군과 연락했으니까 분명히 은성종과도 접촉했을 거야. 은성종이 유태범한테 설득당해서 유태범의 진영에 합류할까 봐 걱정돼.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지금 저택에 들어가는 건 죽음을 자초하는 거나 마찬가지야.”유진우가 분석했다.유태범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표기 대장군까지 오른 사람이라면 지혜와 용맹을 모두 갖추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건 유태범도 당연히 생각했을 것이다.유천우 일행이 사방에서 사람들을 모으고 있을 때 절대 가만히 보고만 있을 유태범이 아니었다.전에 제갈영군을 끌어들이려고 도시 두 개를 제시했다는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남쪽 4대 제후 중에서 장범규는
제갈영군의 날카로운 눈빛과 창을 바라보면서도 유천우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제후님, 도시 두 개의 유혹이 매우 큰 건 사실입니다. 저였더라도 거절하지 못했을 거예요. 만약 제후님이 제 목숨으로 도시 두 개를 바꾸고 싶으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표하면서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그래? 죽는 게 두렵지 않아?”제갈영군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말했다.“아니면 내가 감히 널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죽는 건 당연히 두렵습니다. 살 수 있다면 죽음을 택하지 않아요.”유천우가 담담하게 말했다.“게다가 제후님은 여러 해 동안 전쟁을 치르시면서 앞길을 막는 자는 전부 다 죽였죠. 그런 분이 저의 목숨 따위 가져가는 건 순간일 것이고 힘을 들일 필요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죽는 게 두렵다면서 왜 이렇게 태연한 거지?”제갈영군은 조금 의아해했다.“죽는 걸 두려워하는 건 한 가지 일이고 죽음을 맞이할 용기가 있는 건 또 다른 일입니다. 저택에 들어온 순간부터 최악의 상황까지 대비했습니다.”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게다가 제후님이 정말로 저를 죽이려고 한다면 도망갈 수도 없어요. 차라리 깔끔하게 죽는 게 그나마 고통을 덜 수 있다고 생각해요.”“재밌는 녀석이군.”제갈영군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더니 천천히 창을 내려놓았다.“피는 못 속인다더니 오늘 보니까 맞는 말 같군. 유씨 가문에는 쓸모없는 자식이 하나도 없어.”“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후님.”유천우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됐어. 농담 그만할게. 유태범의 부하들이 날 찾아온 건 맞지만 이미 내가 다 죽였어.”제갈영군이 손가락을 튕기자 곧바로 몇 명의 호위병이 시신을 끌고 와 유천우의 발밑에 던졌다.“자, 얘네들이 유태범이 보낸 사람들이야.”제갈영군은 발로 시신을 툭툭 치면서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제후님, 유태범이 주겠다는 도시 두 개를 포기하겠단 겁니까? 전 그렇게 좋은 걸 드릴 수
한바탕 공격이 지나간 후 연무장에는 제갈영군 혼자만 남았다.“실력이 점점 더 형편없어지는구나. 앞으로 더 열심히 훈련하도록 해. 알았어?”제갈영군이 호위병들에게 호통쳤다.“네.”호위병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됐어. 모두 나가 봐.”제갈영군은 손을 휘둘러 호위병을 전부 내보낸 다음 돌아서서 유천우 일행을 쳐다보았다.“제후님의 창술은 정말 신이 내린 창술입니다. 서경 전체를 통틀어 적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정말 존경합니다.”유천우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아무 일 없이 여기까지 올 리는 없을 테고. 무슨 일로 이 먼 곳까지 왔지?”제갈영군은 수건을 들고 땀을 닦기 시작했다.“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실례도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유천우가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표했다.“네 아버지 때문에 왔지?”제갈영군은 마치 예상한 듯 전혀 놀라지 않았다.“제후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유천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서경왕이 암살당한 게 얼마나 큰일인데 내가 모를 수가 있겠어?”제갈영군은 차를 마시면서 혼자 자리에 앉았다.“그럼 북쪽 4대 제후가 반란을 일으킨 것도 알고 계십니까?”유천우가 다시 물었다.“소문은 들었어.”제갈영군이 고개를 끄덕였다.“제후님은 충의로운 분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부디 위기에 처한 서경왕부를 도와주십시오.”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허리 굽혀 인사했다.“만약 네 아버지가 왔다면 난 당연히 도왔을 거야. 왜냐하면 난 그분을 존경하거든. 근데 넌... 아직 자격이 부족해.”제갈영군은 찻잔을 들어 한 번에 다 마셔버렸다. 내뱉는 말도 매정하기 그지없었다.유천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곧바로 평정을 되찾았다.그는 제갈영군이 오만하고 변덕이 심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저택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난처함을 겪을 준비를 마쳤다.“제후님, 아버지와 비교하면 전 정말 보잘것없고 제후님께 뭔가를 요구할 자격도 없다는 걸 알고 있어요.”유천우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하지만 전 유씨 가문 사람이
다음 날 오전, 남운.유진우와 유천우는 밤을 새워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목적지인 남운에 도착했다.남운은 무릉 제후 제갈영군이 지키고 있었고 남쪽 4대 제후 중에서도 병력이 가장 많으며 경제력이 가장 강한 도시였다.하지만 제갈영군은 성격이 괴팍하고 변덕이 심해서 화를 내면 유만수의 체면조차 봐주지 않았다. 하여 유천우는 제갈영군을 설득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형, 무릉 제후 저택에 도착했어요.”차가 멈춘 후 유천우와 유진우 일행이 잇달아 차에서 내렸다.“벌써 둘째 날이야. 네가 제후 저택을 다니고 있다는 소식이 곧 알려질 테니 서둘러야 해.”유진우가 당부했다.“알고 있어요.”유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제갈영군은 다루기 힘든 사람이지만 또 함부로 배신하는 소인배는 아니에요. 충분한 대가를 제시하고 감정으로 호소하면 설득할 수 있을 거예요.”“그럼 좋고.”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들어가자.”유천우는 옷을 정돈하고 얼굴을 매만져 정신을 차린 후 발걸음을 옮겨 저택 호위병에게 신분을 밝혔다.전과 마찬가지로 일행은 순조롭게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하지만 이번에 만난 장소는 저택의 거실이 아니라 제갈영군의 개인 연무장이었다.모두가 알다시피 제갈영군은 무술광이었다. 평소 직접 군대를 이끌고 훈련을 했기 때문에 그가 이끄는 장병들 모두 용맹하고 뛰어났다.“도련님, 제후님 지금 안에서 훈련 중이십니다. 들어가 보십시오.”호위병은 그들 일행을 연무장 문 앞까지 안내한 후 가버렸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연무장 가운데서 건장한 체격에 온몸이 근육질인 중년 남자가 수십 명의 정예 호위병과 함께 훈련하고 있었다.중년 남자는 창을 들고 위풍당당하게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양손으로 창을 휘두르자 창이 용이나 뱀처럼 움직였는데 민첩할 뿐만 아니라 파워도 넘쳤다.주변에 칼과 방패를 든 수십 명의 정예 호위병들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났고 공격을 전혀 막아내지 못했다.이들은 제후 저택의 정예병으로서 혼자서 백 명을 거뜬히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을 지녔다
“여봐라. 가서 펜과 종이를 가져와.”주한휘는 바로 부하에게 펜과 종이를 가져오라고 하고는 혼약을 맺을 준비를 했다.이런 기회는 좀처럼 얻기 힘든 좋은 기회였다. 딸이 서경왕부에 시집간다면 미래의 왕비가 될 것이다. 그러면 그의 외손자가 차기 서경왕이 될 가능성이 있다.이 내기는 어떻게 계산해도 이익밖에 없었다.“도련님, 잠깐만요. 인생의 중대사인데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야죠.”유진우가 귀띔했다.“뭐?”주한휘가 얼굴을 찌푸리면서 불만을 드러냈다.‘호위병 주제에 어디서 지적질이야? 버르장머리 없이. 만약 내 부하였더라면 진작 매를 들었어.’“설득할 필요 없어. 난 이미 결정했어.”아직 유진우의 정체를 들켜선 안 되기에 유천우도 호위병을 대하듯 했다. 유천우는 유진우를 돌아보면서 웃었다.“제후님의 따님은 얼굴도 예쁘고 현명해서 그런 여자와 결혼하는 건 내 복이야. 복이 스스로 굴러들어왔는데 거절할 이유가 있겠어?”“역시 넌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까.”주한휘는 기회를 놓칠세라 바로 추켜세웠다.“도련님...”유진우가 뭐라 얘기하려던 그때 주한휘가 호통쳤다.“건방진 놈! 감히 주인의 결정에 끼어들어? 버르장머리 없이.”유진우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분노를 터트리려 하자 유천우가 말렸다.“됐어. 난 이미 결정했으니까 더는 뭐라 하지 마.”그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혼약서에 사인하고 지장을 찍었다.유진우는 마음 아픈 나머지 한숨을 내쉬었다.‘내 동생 많이 컸구나. 이젠 무슨 일을 하든 항상 대국을 생각하고.’이 점은 유진우마저도 따라갈 수 없었다.“제후님, 혼약도 정해졌으니 부디 약속을 지키시길 바랍니다.”유천우가 두 손을 맞잡고 인사했다.“걱정하지 마. 앞으로 우린 한 가족이야. 서경왕부에 무슨 어려움이 있든 발 벗고 도와줄게.”주한휘가 가슴을 툭툭 치면서 장담했다.“감사합니다, 제후님. 전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유천우는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인사했다.“내가 문 앞까지 배웅해줄게.”
유천우의 말은 강력한 힘과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만약 서경이 무너진다면 8대 제후, 각 지역의 고위급 관료, 수천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 모두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다들 서경에 뿌리 박고 사는 사람들이라 애국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천우야, 맞는 말이긴 하지만 난 소심하고 겁도 많아서 항상 앞뒤를 생각하거든. 만약 반란을 진압하다가 군대를 다 잃으면 어떡해?”주한휘는 여전히 망설였다.“제후님, 혹시 손해를 보게 된다면 서경왕부에서 두 배로 갚아드리겠습니다.”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 주한휘가 이런 얘기를 했다는 건 실질적인 이득을 원한다는 뜻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어쨌거나 전 재산을 걸어야 하는 작전이기에 혹시라도 실패하면 큰 손실은 면할 수 없으니까.그의 행동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천우야, 내가 널 믿지 못해서 이러는 게 아니라 이런 일은 말로만 해선 안 돼.”주한휘가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원하는 게 있으시면 무엇이든지 얘기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면 최대한 다 들어드리겠습니다.”유천우가 큰소리치며 장담했다. 이 정도면 성의를 충분하게 보여줬다고 생각했다.“알았어. 천우 네가 이렇게 얘기하니까 마음이 놓이네.”주한휘가 웃으면서 말했다.“사실 내가 원하는 건 돈이나 보물이 아니야. 지금 가장 걱정되는 게 내 딸인데 올해 25살이 됐는데도 어울리는 남자를 만나지 못했어. 만약 천우 너 같은 남자한테 시집간다면 참 좋을 텐데.”“저요?”유천우는 놀란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그래.”주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딸 해린이 절세미녀까진 아니더라도 그래도 얼굴도 나름 예쁘고 재능도 뛰어나. 만약 해린이를 아내로 들인다면 내조도 엄청 잘하는 현모양처가 될 거야.”현재 그에게는 돈과 인맥 모두 충분했다. 유일하게 부족한 게 바로 하늘보다 높은 권력이었다.서경왕이 죽은 지금 유천우가 왕위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만약 딸이 유천우와 결혼한다면 나중에 서경의 왕비가 될 것이고 주한휘의 신
유천우의 계획은 간단했다. 먼저 예의를 갖춰서 설득하다가 안 되면 무력을 사용하여 제압하는 것이었다.만약 반란을 일으킨 4대 제후가 서경왕부에 굴복한다면 서경왕부는 과거의 잘못을 따지지 않고 권력도 그대로 유지하게 할 것이다. 하지만 굴복하지 않는다면 무력으로 진압하는 수밖에 없었다.그때가 되면 서경왕부는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나머지 4대 제후와 서경의 많은 세력과 손을 잡고 반역자들을 몰살할 것이다.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속전속결로 끝내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유천우의 말을 들은 장범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지하게 말했다.“내가 오늘날의 권력을 가질 수 있었던 건 다 네 아버지 덕이야. 반란을 진압하는 건 물론이고 목숨까지 바치라고 해도 기꺼이 바칠 수 있어.”“감사합니다. 제후님의 도움이 있다면 이번 어려움을 꼭 극복할 수 있을 거예요.”유천우가 말했다.“이건 내 제후령이야. 제후령만 있으면 가진의 병사를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어.”장범규는 갑자기 병부를 꺼내 유천우에게 건넸다. 백 마디 말보다 행동 하나로 보여주는 게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이건...”되레 유천우가 망설였다. 장범규가 이토록 통쾌하게 병부를 내놓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 행동은 그의 충성심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사양하지 마. 비상시국이잖아. 이 제후령이 있으면 움직이기 훨씬 편할 거야.”장범규는 병부를 유천우의 손에 쥐여주었다.“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제후님!”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인사를 올리면서 진지하게 말했다.“이번 어려움을 극복한 후에 꼭 찾아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됐어. 그런 얘기는 그만하고 시간도 없는데 얼른 가봐.”장범규가 손을 흔들었다.“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유천우는 허리 숙여 인사를 올린 다음 일행과 함께 저택을 나섰다.오늘 밤 첫 번째 목적지는 예상외로 순조로웠다. 30분도 채 안 되어 평양 제후 장범규의 지지를 얻었고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제후령마저 받았다.만약 이 속도대로 진행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
가진은 서경의 변방 도시이자 평양 제후 장범규의 영역이었다.무장 출신인 장범규는 서경왕 유만수와 함께 수년간 전장을 누볐고 세운 공만 해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나중에 평양 제후가 된 후 서경의 변방을 지켰다.수년 동안 장범규는 성실하게 직무에 임해왔다.그때 검은색 승합차 한 대가 갑자기 평양 제후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자 유진우와 유천우 등 몇 명이 나란히 내렸다.“형, 여기가 바로 평양 제후 장범규네 저택이에요.”유천우가 간단하게 소개했다.“장범규는 그래도 충성스럽고 용맹한 사람이에요. 가진을 수년 동안 관리하면서 직무와 책임을 다했거든요.”“밖에 누구야?”저택 입구를 지키던 호위병 두 명이 수상한 움직임을 알아채고 큰소리로 호통쳤다.유천우는 그들에게 다가가 신분패를 보여주면서 덤덤하게 말했다.“서경왕의 둘째 아들 유천우다.”“도련님?”두 호위병은 유천우의 신분패를 보자마자 겁에 질린 나머지 바로 무릎을 꿇었다.“예의 차릴 필요 없으니까 일어나.”유천우가 신분패를 거두어들였다.“지금 아주 급한 일이 있어서 평양 제후님을 뵈러 왔어. 들어가서 보고 좀 올려줄래?”“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지금 당장 가서 제후님께 말씀드릴게요.”그중 한 호위병이 대답하고는 서둘러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잠시 후 화려한 옷차림에 배가 불룩하게 나온 중년 남자가 부하들과 함께 부랴부랴 나왔다. 그 사람이 바로 평양 제후 장범규였다.“안녕하세요, 제후님.”유천우가 먼저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서경왕의 둘째 아들이긴 해도 눈앞의 장범규는 제후이기에 신분이 그보다 훨씬 높았다.장범규가 직접 마중을 나온 것만 해도 충분히 체면을 세워준 일이었다.“천우야, 이 늦은 밤에 무슨 일로 왔어?”장범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제후님, 서경왕부에 변고가 생겨서 제후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변고가 생겼다고? 무슨 일인데?”장범규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유천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