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유진우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고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내가 당신의 정체를 까발리지 않겠지만 당신도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예요. 제가 계속 지켜볼 거예요”“절 지켜본다고요?” 설연홍은 섹시한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제가 이따가 샤워할 건데 그때도 지켜보는 게 어때요?”“미쳤어요?”설연홍을 상대하기 귀찮은 유진우는 바로 뒤로 돌아서 위층으로 올라가 휴식했다.당분간은 설연홍이 나쁜 마음이 없는 게 확실하지만, 이런 요사스러운 여자는 멀리하는 것이 상책이다.이튿날 아침.유진우가 황은아를 데리고 아침 운동을 하고 있을 때 검은색 승합차가 갑자기 문 앞에 멈춰 섰다.문이 열리자 황보걸은 얼굴에 웃음꽃을 띠며 걸어 들어왔다.“진우 씨, 축하해요.”황보걸은 문에 들어서자마자 주먹을 쥐며 웃었다.“어제 심사 결과가 나왔는데, 진우 씨가 성공적으로 선발되었어요. 오늘 진우 씨는 다른 4대 고수들과 함께 강북 무맹에 출전해요!”“그래요? 듣자 하니 좋은 소식이네요.”유진우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 결과에 대해, 그는 결코 놀라지 않았다.다섯 가지 심사를 모두 만점 받고도 탈락하면 그게 이상하지.“아저씨, 무도대회에 나가신다고요? 저도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황은아는 잔뜩 기대한 얼굴로 유진우를 바라보며 물었다.“되긴 되지만 말썽을 피워서는 안 돼.”유진우가 황은아에게 경고했다.“문제없어요! 반드시 말썽 피우지 않을게요.”황은아는 손가락 세 개를 펴며 맹세했다.“저도요, 저도 갈래요.”설연홍이 달려와 유진우에게 말했다.‘이런 재미난 일에 어떻게 내가 빠질 수 있겠어?’유진우는 힐끗 쳐다보더니 신경도 쓰지 않고 승합차에 올라탔다.황은아도 그 뒤를 따랐고 설연홍도 뒤질세라 유진우 옆에 찰싹 앉았다.시동이 걸리고 일행은 곧바로 무도대회 현장으로 향했다.이번 무도대회가 열리는 곳은 청양호에 위치해 있다.청양호는 청양산 아래에 자리 잡고 있어 경치가 아름답고 인적이 드물어 무술 시합에 더없이 적합하다.유진우 일
“뭐?”갑작스럽게 누명을 쓰자 유진우는 잠시 얼떨떨했다.“왜, 네 선배가 죽기라도 했어?”“맞아, 네가 죽인 거야, 이 살인자야!”뚱뚱한 여자가 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말 똑바로 해, 네 선배의 죽음이 나랑 무슨 상관이야? 함부로 누명 씌우지 마.”유진우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흥, 아직도 변명을 해? 네가 모함을 꾸미지 않았다면, 내 선배가 어떻게 죽었겠어?”뚱뚱한 여자가 소리쳤다.“인마, 우리가 모른다고 생각하지 마. 어제 압력 테스트 후 넌 일부러 풀로드를 놓지 않고 선배를 유인했지. 결과 문이 닫히자 선배는 백배의 무게를 못 이겨 깔려 죽었어!”근육질의 남자는 얼굴이 어두워졌다.말을 들은 유진우는 어이가 없어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그는 테스트를 통과한 후 압력기를 복원하지 않았을 뿐인데 누가 바보같이 뛰어들어가서 아무것도 안 보고 시작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이것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것이 아닌가?멍청한 놈을 봤어도 이렇게 멍청한 놈은 본 적이 없다.무엇보다 사람이 죽고 난 후 엉뚱한 누명을 쓴 게 우스웠다.“먼저 한 가지 말하자면 나는 모함을 꾸미지 않았기에 너희 선배의 죽음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 전부 그 사람의 탓이지.”유진우가 손을 뗐다.“헛소리하지 마! 내가 보기엔 넌 분명 고의적이야!”뚱뚱한 여자는 아예 믿지 않았다.“난 어차피 설명할 건 다 설명했으니 믿거나 말거나 마음대로 해.”유진우는 쓸데없는 말을 하기 귀찮았다.한 무리의 어릿광대들은 전혀 그의 안중에 없었다.“인마, 사람을 죽이고도 감히 이렇게 날뛰다니?”그때 사람들 속에서 검은 옷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남자는 평범한 외모에 카리스마가 돋보이고 손에 큰 칼을 들고 있어 패기가 넘쳐 보였다.이 사람이 바로 소양타의 대선배, 박철이었다.“넌 또 어디서 나타난 거야?”유진우가 눈썹을 치켜세웠다.“건방지다! 이분은 우리 대선배이자 오늘 출전하는 5대 고수 중 한 명이다!”근육질의 남자가 소리쳤다.“오, 그래서 뭐?”유진우
빠른 속도로 퍼지는 독소를 보며 뚱뚱한 여자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슉!박철은 아무 말 없이 칼을 휘둘러 뚱뚱한 여자의 팔을 단칼에 잘랐다.뚱뚱한 여자는 멍하니 땅바닥에 있는 자신의 팔을 보다가 피를 뿜는 상처를 보고 나서야 반응이 와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무도대회가 끝나면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매섭게 한마디 던지고 박철은 일행을 데리고 발길을 돌렸다.“진우 씨, 박철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니 앞으로 조심해요.”황보걸이 유진우에게 귀띔했다.“조심해야 할 사람은 박철이지 내가 아니에요.”유진우가 담담하게 말을 뱉었다.방금 황보걸이 막지 않았더라면 박철을 그 자리에서 죽였을 것이다.“시간이 거의 다 되었으니 우리 할아버지를 뵈러 가요.”황보걸은 한 손으로 안내하며 유진우 일행을 데리고 호화로운 별장으로 들어갔다.별장은 펜션 스타일로 넓은 면적에 넓은 공간을 자랑하고 출전 선수나 무맹 내부자 모두 이곳에서 휴식을 취한다.그 시각, 별장 홀 안.황보용명은 영무한 얼굴의 중년 남자와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중년 남자는 다름 아닌 강남 무림의 맹주, 송만규였다.스승과 제자 사이였던 두 사람은 서로를 만나자 할 말이 끊이지 않았다. “스승님, 최근에 좋은 인재를 찾으셨다면서요? 도규현을 이겼을 뿐만 아니라 어제 테스트에서도 빛을 발했다고 들었어요.”송만규가 싱긋 웃었다.“이 사람은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야. 잘만 가르친다면 훗날 너의 후계자가 될 것이다.”황보용명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정말요? 스승님께서 이렇게 칭찬하시니 너무 궁금하네요.”송만규는 절로 흥이 났다.황보용명은 원래 눈이 많이 높아서 보통 무도 천재는 눈에 들지 않는다.“할아버지, 진우 씨 왔어요.”그때 황보걸이 불쑥 걸어 들어왔다.“만규야, 봐봐.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도착했어.”황보용명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들어오라고 해.”“네.”황보걸은 대답하고 돌아서서
“뭐라고? 중독?”이 말이 나오자 모두들 안색이 변했다.무도 대회 당일, 세 명의 참가자가 의문의 중독에 빠졌다는 건 분명 심상치 않다.“어떻게 이럴 수 있지? 누가 한 짓이야?”송만규가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아직 조사 중이라 알 수 없습니다.”무맹요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가자! 지금 당장 보러 가야겠어!”송만규는 망설이지 않고 서둘러 문을 나섰다.그 시각, 임시 훈련장 안.무맹요원들이 이미 모든 출입구를 봉쇄해 누구도 마음대로 나갈 수 없었다.송만규 일행이 문을 들어서 훈련장 한가운데 젊은 남자 3명이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세 사람은 의식을 잃은 채 호흡이 약했고 얼굴은 창백했지만 입술은 꺼맸다.“역시 독극물에 중독됐네!”송만규는 한 번 더 살펴더보니 안색이 좋지 않았다.이 세 사람은 모두 스카이 랭킹의 고수이고 강남 무맹이 승리를 거두는 관건인데 지금 모두 중독되어 혼수상태에 빠졌으니 무도대회는 어떡하지?“빨리! 약신궁으로 가서 사람을 불러와!”반응이 돌아오자 송만규는 서둘러 명령을 내렸다.“그렇게 번거롭게 할 필요 없어. 사람을 구하는 일은 진우 씨 한 명으로도 충분해.” 황보용명이 불쑥 입을 열었다.예전에 그가 중상을 입고 사도에 빠졌을 때 약신궁의 동장로도 속수무책이었는데 다행히 유진우가 구해줘서 죽음을 면했다.“유진우 씨, 의술을 아세요?”송만규는 뒤를 돌아보며 약간 의외였다.“조금 할 줄 알아요.”유진우는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자, 그럼 한번 봐주세요.”송만규는 자리를 비켰고 유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와 몸을 웅크리고 앉아 세 사람의 상태를 자세히 살폈다.곧 그의 얼굴빛이 굳어졌다.“이 세 사람은 만성 독극물에 중독됐어요. 평소에는 눈치채기 어려운데 운공이 시작되면 바로 폭발해 가볍게는 혼수상태에 빠지고 심하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기도 해요.”유진우가 설명했다.“어때요? 살릴 수 있나요?”송만규는 조금 걱정했다.이 세 사람은 모두 중임을 맡는 훌륭한 인재들이라 절대
산들바람이 서서히 불어오니 흙냄새가 풍겼다.이때 청양호 주위는 거의 사람들로 가득 찼다.남북 두 무맹이 호수를 사이에 두고 일촉즉발의 형세로 대립하고 있었다.무도대회의 결전 장소는 청양호이다.며칠 전부터 무맹은 청양호 중앙에 무술 경기를 위해 백 미터의 거대한 무대를 만들었다.무대는 사방이 물에 둘러싸여 있어서 일반인이 올라가려면 배를 타야 한다.남쪽의 한 정자 안.강남 무맹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송만규는 마침내 신중하게 세 명의 본투비 레벨 고수들을 모았다.다만 실력 면에서 저마다 다 차이가 있어 진설, 배유, 곽양 세 사람과는 분명히 비교가 안 된다.하지만 지금은 가망이 없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 할 수밖에 없다.“오늘의 무도대회는 매우 중요해.”송만규는 심각한 얼굴을 하고 5명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너희들이 짊어진 것은 강남 무맹의 영예이다. 나는 너희들이 협력하고 최선을 다하길 바란다. 너희들이 승리하고 돌아오기를 미리 축하할게!”“맹주님, 걱정 마세요. 강북의 오랑캐를 반드시 짓밟고 승리하겠어요.”새로 합류한 세 명의 고수들은 자신감이 넘치고 의기양양했다.경기에서 이기면 두툼한 보상이 있을 뿐만 아니라 명성을 떨칠 수 있으니 자연히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무도대회는 무대 챌린지야. 너희 넷은 이따가 절대 제멋대로 결정하지 말고 내 지휘에 따라.”박철이 갑자기 차갑게 말했다.그 거만한 꼴을 보니 몇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렸다.“네가 뭔데? 네가 무슨 자격으로 우리를 지휘하겠다는 거야?”얼굴이 둥근 사내가 좀 불만이었다.“자격?”박철은 차갑게 웃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난 현무문 소양타 제자이고 스카이 랭킹 12위야. 이럼 자격이 되지?”“스카이 랭킹 12위?”그 말에 둥근 얼굴의 사내는 목이 움츠러들더니 이내 공손한 얼굴로 변했다.다른 두 사람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들도 역시 스카이 랭킹 고수이지만 순위는 모두 30위 밖이어서 자연히 12위인 박철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스
“어....”갑자기 호수 밑으로 곤두박질쳐 떨어진 둥근 얼굴의 사내를 보고 강남무맹 쪽 사람들은 바로 멍해졌다.대중 앞에서 잘난 체하면 그만이지 중도에 물에 빠지는 건 무슨 말인가?이건 무도 대회지 서커스단이 아닌데 갑자기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강남무맹의 체면을 깎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젠장, 정말 쓸모없군!”박철은 그 광경을 보자마자 안색이 안 좋아졌다.그는 방금까지 경공이라고 칭찬했는데 상대방은 얼마 못 가 바로 물에 빠졌다.정말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하하하... 이 정도 실력으로 감히 나서다니?”“능력 없으면 물러나라, 여기서 망신 당하지 말고.”“너희 강남의 무사들은 다 이렇게 약골들이냐? 싸울 필요도 없겠네. 하나도 어렵지 않군!”잠시 침묵이 흐른 후 호수 건너편 강북무맹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렸다.하나같이 비웃으며 마치 어릿광대를 보는 것 같았다.“저 녀석, 정말 거만하군.”지금 이 순간 송만규도 더 이상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역시, 임시로 고른 무사는 믿을 수 없군.’“첫 경기가 어려울 것 같아.”황보용명은 고개를 절레절레했다.자기를 내세우기 위해 진기를 소모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다니.그 결과 폼도 잡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진기도 절반이나 소모했는데 이따가 어떻게 싸울 수 있겠는가?어푸! 어푸!그때 수면 위로 방금 물에 빠진 둥근 얼굴의 사내가 마침내 머리를 내밀었다.주위의 웃음소리를 들은 둥근 얼굴의 사내는 머쓱해져서 염치를 불구하고 호수 한가운데로 헤엄쳐 낭패스러운 모습으로 무대 위로 올라갔다.흠뻑 젖은 그 모습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젠장, 그냥 배를 탈걸.”둥근 얼굴의 사내가 중얼거렸다.예전에 그는 경공으로 강을 몇 번이나 건넜기 때문에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나 청양호는 너무 커서 반쯤 뛰었을 때 진기가 더 이상 올라오지 않았다.“흥흥... 재주가 없으면 잘난 체하지 마. 정말 치욕을 자초하는군!”그때 창을 든 붉은 옷을 입은 남자가 배를 타고 반대편에서 무대로 다가왔다.
동시에 발걸음을 옮기자 순식간에 사람이 튕겨나가 주먹을 휘둘렀다.암살 무기는 명중하면 가장 좋고 기습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뒤따른 주먹 한 방이면 승산이 있다.“보잘것없긴.”빨간 옷을 입은 남자가 차갑게 웃고 갑자기 기다란 창을 휘두르기 시작하더니 창은 마치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바람개비처럼 보였고 날아오는 표창들을 다 막아냈다.표창을 막은 후 붉은 옷의 남자가 창을 앞으로 세게 찔렀고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둥근 얼굴의 사내는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어깨에 창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수 미터나 날아갔다.“너...”둥근 얼굴의 사내가 막 몸을 일으키려 할 때 날카로운 창끝이 이미 목구멍에 닿았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그 자리에서 죽는다.“네가 졌어.”붉은 옷을 입은 남자가 개미를 보는 것처럼 아래로 내려다봤다.“너, 너 도대체 누구야?”둥근 얼굴의 사내는 놀라고 두려워했다.그는 자신이 이렇게 빨리 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고 전혀 반격할 힘이 없었다.“잘 들어, 내 이름은 진현이고 스카이 랭킹 11위야.”붉은 옷을 입은 남자가 거만하게 말했다.“스카이 랭킹 11위?”둥근 얼굴의 사내가 깜짝 놀랐다.어쩐지 상대방이 대단하더라니 알고 보니 순위가 그보다 한참 높았다.‘이크, 사람을 잘못 건드렸네!’“뭘 멍하니 있어? 내려가!”진현은 쓸데없는 말을 귀찮아 창을 들이대고 둥근 얼굴의 사내를 높이 던져 호수에 세게 내리쳤다.둥근 얼굴의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얌전히 기슭으로 헤엄쳐 갔다.첫 판은 강남무맹이 완패했다.“송맹주, 당신의 선수들은 실력이 안 되는 것 같은데요? 좀 더 센 사람을 올려 보내는 게 어때요?”강북 무맹의 정자 안에서 수염 있는 남자가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이 사람이 바로 강북 무림의 맹주, 소홍도이다. 그 옆에는 음양종 종주 김금강이 서 있었다.“소맹주, 너무 일찍 기뻐하지 마세요. 마지막 순간까지 누구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어요.”송만규가 입을 열었다.둘 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호수 건너편
맞붙은 지 세 번 만에 무대에서 떨어진 검은 옷을 입은 남자를 보고 강남무맹의 얼굴빛이 다 어두워졌다.처음부터 끝까지 진현의 세 번의 공격도 막지 못했다. 소모는커녕 상대는 아직 몸도 풀지 못한 것 같다.“젠장, 무맹이 왜 이런 약골들만 내보내지? 정말 창피해.” “강북무사들의 상대가 전혀 안 된다니. 정말 답답해.”“무맹이 이렇게 약할 줄 알았으면 보러 오지 않았을 텐데. 정말 기분 나쁘군.”이때 많은 사람들이 욕을 하기 시작했다.한 번 실패한다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연거푸 두 번을 실패하고 게다가 전부 압도적으로 패배했으니 누가 견딜 수 있겠는가?이곳은 강남의 홈그라운드라 보러 온 사람은 대부분 강남의 무사들이다. 그런데 지금 자기 땅에서 강북무사들에게 호되게 맞으니 당연히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쓸모없는 자식!”박철은 나지막이 욕설을 퍼부으며 미워하는 표정을 지었다.송만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얼굴빛이 좋지 않았다.최상급 팀에 비하면 임시로 모집한 세 명은 확실히 실력이 부족했다.“네 차례야.”박철은 눈을 돌려 세 번째 회색 옷을 입은 남자를 바라보았다.“너도 쟤와 같이 가능한 한 진현의 진기를 소모해. 억지로 싸우지 말고 알겠어?”“최, 최선을 다 할게요.”회색 옷을 입은 남자는 침을 삼켰지만 압력이 컸다.이길 수 없는 건 당연한 거고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약간의 긴장과 불안감을 안고 회색 옷을 입은 남자는 결국 배를 타고 무대에 올랐다.3분 뒤 또 으악하는 비명과 함께 회색 옷을 입은 남자는 10번의 공격도 받아내지 못한 채 진현의 창에 맞아 청양호로 떨어져 커다란 물보라가 튀었다.“하하하... 강남의 무인들은 정말 쓰레기군. 3연패라니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어!”“재미난 경기가 벌어질 줄 알았는데 이렇게 형편없다니.”“진현 한 사람만으로도 저 사람들 다섯을 상대하기엔 충분해!”강북무맹 사람들은 방자하게 웃으며 위세를 부렸고 반면 강남 쪽은 참담하고 답답했다.어떤 무사들은 화가 나서 옷소매를
“제후님께서 도련님이 오실 걸 알고 저더러 미리 나와 기다리라 하셨습니다.”늙은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내가 올 걸 알고 있었다고요?”유천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면서 옆에 있는 유진우를 쳐다봤다. 저도 모르게 불안감이 밀려왔다.은성종이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건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었다.제갈영군이 전화로 알렸거나 유태범의 사자가 먼저 와서 선수를 친 것이다.“도련님, 제후님께서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늙은 집사가 허리를 굽히면서 손짓으로 안내했다.유천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여기까지 온 이상 중간에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아무리 위험한 곳이라고 해도 뚫고 나가야 했다.일행은 늙은 집사를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여러 시설을 지난 후 식당에 도착했다.식당 안에 푸짐한 음식과 술이 준비되어 있었다. 음식 냄새와 술 냄새가 뒤섞여 식욕을 돋우었다.유천우 일행은 하루 종일 이동하느라 식사할 시간도 없었다. 눈앞에 차려진 푸짐한 음식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고 배에서도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도련님, 먼 길을 오느라 배고프실 텐데 식사부터 하시죠.”늙은 집사가 공손하게 말했다.“제후님은요?”유천우가 물었다.“곧 오실 것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늙은 집사가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유천우는 웃으면서 손짓했다.“너희들, 얼른 와서 먹어.”“네.”근위병 몇 명은 대답을 마치자마자 바로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맛보기 시작했다.훈련을 잘 받은 근위병들은 3일 밤낮으로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이렇게 행동하는 건 음식에 독이 든 건 아닌지 유천우 대신 시험해보기 위한 것이었다.항상 방심해서는 안 되었다. 만약 은성종이 음식에 약을 넣었다면 그들이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도련님, 아무 문제 없습니다.”모든 음식을 다 맛본 후에야 근위병들은 유천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유천우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더
해 질 무렵, 유천우와 유진우 일행은 변경 요새 도시인 태평에 도착했다.태평은 회음 제후 은성종의 영역이었고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낙후한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은성종의 통치 아래 짧은 10여 년 만에 서경에서 5위 안에 드는 도시가 되었다. 군사, 경제, 정치, 문화, 교육, 의료까지 모든 면에서 최고 수준을 자랑했다.태평이 오늘날의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건 은성종의 뛰어난 재능과 지식 덕이었다.만약 제갈영군이 난세의 영웅이라면 은성종은 세상을 다스린 명신이었다.그 시각 회음 제후 저택 밖.검은색 승합차 한 대가 길가에 천천히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자 유진우와 유천우 일행이 잇달아 내렸다.“형, 여기가 마지막 목적지예요.”유천우는 저택 간판을 바라보면서 감탄했다.“회음 제후 은성종은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울 뿐만 아니라 마음이 따뜻하고 의협심도 강해요. 게다가 제갈영군의 편지까지 있으니 이번에는 문제없을 겁니다.”“섣불리 판단해선 안 돼.”유진우는 고개를 내저었다.“마지막 순간이 될수록 더욱 긴장을 늦추면 안 돼. 은성종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서 유만수조차도 은성종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지 못했어. 아무도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혹시 변수가 생길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유천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유태범이 이미 제갈영군과 연락했으니까 분명히 은성종과도 접촉했을 거야. 은성종이 유태범한테 설득당해서 유태범의 진영에 합류할까 봐 걱정돼.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지금 저택에 들어가는 건 죽음을 자초하는 거나 마찬가지야.”유진우가 분석했다.유태범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표기 대장군까지 오른 사람이라면 지혜와 용맹을 모두 갖추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건 유태범도 당연히 생각했을 것이다.유천우 일행이 사방에서 사람들을 모으고 있을 때 절대 가만히 보고만 있을 유태범이 아니었다.전에 제갈영군을 끌어들이려고 도시 두 개를 제시했다는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남쪽 4대 제후 중에서 장범규는
제갈영군의 날카로운 눈빛과 창을 바라보면서도 유천우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제후님, 도시 두 개의 유혹이 매우 큰 건 사실입니다. 저였더라도 거절하지 못했을 거예요. 만약 제후님이 제 목숨으로 도시 두 개를 바꾸고 싶으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표하면서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그래? 죽는 게 두렵지 않아?”제갈영군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말했다.“아니면 내가 감히 널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죽는 건 당연히 두렵습니다. 살 수 있다면 죽음을 택하지 않아요.”유천우가 담담하게 말했다.“게다가 제후님은 여러 해 동안 전쟁을 치르시면서 앞길을 막는 자는 전부 다 죽였죠. 그런 분이 저의 목숨 따위 가져가는 건 순간일 것이고 힘을 들일 필요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죽는 게 두렵다면서 왜 이렇게 태연한 거지?”제갈영군은 조금 의아해했다.“죽는 걸 두려워하는 건 한 가지 일이고 죽음을 맞이할 용기가 있는 건 또 다른 일입니다. 저택에 들어온 순간부터 최악의 상황까지 대비했습니다.”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게다가 제후님이 정말로 저를 죽이려고 한다면 도망갈 수도 없어요. 차라리 깔끔하게 죽는 게 그나마 고통을 덜 수 있다고 생각해요.”“재밌는 녀석이군.”제갈영군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더니 천천히 창을 내려놓았다.“피는 못 속인다더니 오늘 보니까 맞는 말 같군. 유씨 가문에는 쓸모없는 자식이 하나도 없어.”“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후님.”유천우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됐어. 농담 그만할게. 유태범의 부하들이 날 찾아온 건 맞지만 이미 내가 다 죽였어.”제갈영군이 손가락을 튕기자 곧바로 몇 명의 호위병이 시신을 끌고 와 유천우의 발밑에 던졌다.“자, 얘네들이 유태범이 보낸 사람들이야.”제갈영군은 발로 시신을 툭툭 치면서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제후님, 유태범이 주겠다는 도시 두 개를 포기하겠단 겁니까? 전 그렇게 좋은 걸 드릴 수
한바탕 공격이 지나간 후 연무장에는 제갈영군 혼자만 남았다.“실력이 점점 더 형편없어지는구나. 앞으로 더 열심히 훈련하도록 해. 알았어?”제갈영군이 호위병들에게 호통쳤다.“네.”호위병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됐어. 모두 나가 봐.”제갈영군은 손을 휘둘러 호위병을 전부 내보낸 다음 돌아서서 유천우 일행을 쳐다보았다.“제후님의 창술은 정말 신이 내린 창술입니다. 서경 전체를 통틀어 적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정말 존경합니다.”유천우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아무 일 없이 여기까지 올 리는 없을 테고. 무슨 일로 이 먼 곳까지 왔지?”제갈영군은 수건을 들고 땀을 닦기 시작했다.“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실례도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유천우가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표했다.“네 아버지 때문에 왔지?”제갈영군은 마치 예상한 듯 전혀 놀라지 않았다.“제후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유천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서경왕이 암살당한 게 얼마나 큰일인데 내가 모를 수가 있겠어?”제갈영군은 차를 마시면서 혼자 자리에 앉았다.“그럼 북쪽 4대 제후가 반란을 일으킨 것도 알고 계십니까?”유천우가 다시 물었다.“소문은 들었어.”제갈영군이 고개를 끄덕였다.“제후님은 충의로운 분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부디 위기에 처한 서경왕부를 도와주십시오.”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허리 굽혀 인사했다.“만약 네 아버지가 왔다면 난 당연히 도왔을 거야. 왜냐하면 난 그분을 존경하거든. 근데 넌... 아직 자격이 부족해.”제갈영군은 찻잔을 들어 한 번에 다 마셔버렸다. 내뱉는 말도 매정하기 그지없었다.유천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곧바로 평정을 되찾았다.그는 제갈영군이 오만하고 변덕이 심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저택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난처함을 겪을 준비를 마쳤다.“제후님, 아버지와 비교하면 전 정말 보잘것없고 제후님께 뭔가를 요구할 자격도 없다는 걸 알고 있어요.”유천우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하지만 전 유씨 가문 사람이
다음 날 오전, 남운.유진우와 유천우는 밤을 새워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목적지인 남운에 도착했다.남운은 무릉 제후 제갈영군이 지키고 있었고 남쪽 4대 제후 중에서도 병력이 가장 많으며 경제력이 가장 강한 도시였다.하지만 제갈영군은 성격이 괴팍하고 변덕이 심해서 화를 내면 유만수의 체면조차 봐주지 않았다. 하여 유천우는 제갈영군을 설득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형, 무릉 제후 저택에 도착했어요.”차가 멈춘 후 유천우와 유진우 일행이 잇달아 차에서 내렸다.“벌써 둘째 날이야. 네가 제후 저택을 다니고 있다는 소식이 곧 알려질 테니 서둘러야 해.”유진우가 당부했다.“알고 있어요.”유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제갈영군은 다루기 힘든 사람이지만 또 함부로 배신하는 소인배는 아니에요. 충분한 대가를 제시하고 감정으로 호소하면 설득할 수 있을 거예요.”“그럼 좋고.”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들어가자.”유천우는 옷을 정돈하고 얼굴을 매만져 정신을 차린 후 발걸음을 옮겨 저택 호위병에게 신분을 밝혔다.전과 마찬가지로 일행은 순조롭게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하지만 이번에 만난 장소는 저택의 거실이 아니라 제갈영군의 개인 연무장이었다.모두가 알다시피 제갈영군은 무술광이었다. 평소 직접 군대를 이끌고 훈련을 했기 때문에 그가 이끄는 장병들 모두 용맹하고 뛰어났다.“도련님, 제후님 지금 안에서 훈련 중이십니다. 들어가 보십시오.”호위병은 그들 일행을 연무장 문 앞까지 안내한 후 가버렸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연무장 가운데서 건장한 체격에 온몸이 근육질인 중년 남자가 수십 명의 정예 호위병과 함께 훈련하고 있었다.중년 남자는 창을 들고 위풍당당하게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양손으로 창을 휘두르자 창이 용이나 뱀처럼 움직였는데 민첩할 뿐만 아니라 파워도 넘쳤다.주변에 칼과 방패를 든 수십 명의 정예 호위병들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났고 공격을 전혀 막아내지 못했다.이들은 제후 저택의 정예병으로서 혼자서 백 명을 거뜬히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을 지녔다
“여봐라. 가서 펜과 종이를 가져와.”주한휘는 바로 부하에게 펜과 종이를 가져오라고 하고는 혼약을 맺을 준비를 했다.이런 기회는 좀처럼 얻기 힘든 좋은 기회였다. 딸이 서경왕부에 시집간다면 미래의 왕비가 될 것이다. 그러면 그의 외손자가 차기 서경왕이 될 가능성이 있다.이 내기는 어떻게 계산해도 이익밖에 없었다.“도련님, 잠깐만요. 인생의 중대사인데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야죠.”유진우가 귀띔했다.“뭐?”주한휘가 얼굴을 찌푸리면서 불만을 드러냈다.‘호위병 주제에 어디서 지적질이야? 버르장머리 없이. 만약 내 부하였더라면 진작 매를 들었어.’“설득할 필요 없어. 난 이미 결정했어.”아직 유진우의 정체를 들켜선 안 되기에 유천우도 호위병을 대하듯 했다. 유천우는 유진우를 돌아보면서 웃었다.“제후님의 따님은 얼굴도 예쁘고 현명해서 그런 여자와 결혼하는 건 내 복이야. 복이 스스로 굴러들어왔는데 거절할 이유가 있겠어?”“역시 넌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까.”주한휘는 기회를 놓칠세라 바로 추켜세웠다.“도련님...”유진우가 뭐라 얘기하려던 그때 주한휘가 호통쳤다.“건방진 놈! 감히 주인의 결정에 끼어들어? 버르장머리 없이.”유진우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분노를 터트리려 하자 유천우가 말렸다.“됐어. 난 이미 결정했으니까 더는 뭐라 하지 마.”그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혼약서에 사인하고 지장을 찍었다.유진우는 마음 아픈 나머지 한숨을 내쉬었다.‘내 동생 많이 컸구나. 이젠 무슨 일을 하든 항상 대국을 생각하고.’이 점은 유진우마저도 따라갈 수 없었다.“제후님, 혼약도 정해졌으니 부디 약속을 지키시길 바랍니다.”유천우가 두 손을 맞잡고 인사했다.“걱정하지 마. 앞으로 우린 한 가족이야. 서경왕부에 무슨 어려움이 있든 발 벗고 도와줄게.”주한휘가 가슴을 툭툭 치면서 장담했다.“감사합니다, 제후님. 전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유천우는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인사했다.“내가 문 앞까지 배웅해줄게.”
유천우의 말은 강력한 힘과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만약 서경이 무너진다면 8대 제후, 각 지역의 고위급 관료, 수천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 모두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다들 서경에 뿌리 박고 사는 사람들이라 애국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천우야, 맞는 말이긴 하지만 난 소심하고 겁도 많아서 항상 앞뒤를 생각하거든. 만약 반란을 진압하다가 군대를 다 잃으면 어떡해?”주한휘는 여전히 망설였다.“제후님, 혹시 손해를 보게 된다면 서경왕부에서 두 배로 갚아드리겠습니다.”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 주한휘가 이런 얘기를 했다는 건 실질적인 이득을 원한다는 뜻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어쨌거나 전 재산을 걸어야 하는 작전이기에 혹시라도 실패하면 큰 손실은 면할 수 없으니까.그의 행동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천우야, 내가 널 믿지 못해서 이러는 게 아니라 이런 일은 말로만 해선 안 돼.”주한휘가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원하는 게 있으시면 무엇이든지 얘기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면 최대한 다 들어드리겠습니다.”유천우가 큰소리치며 장담했다. 이 정도면 성의를 충분하게 보여줬다고 생각했다.“알았어. 천우 네가 이렇게 얘기하니까 마음이 놓이네.”주한휘가 웃으면서 말했다.“사실 내가 원하는 건 돈이나 보물이 아니야. 지금 가장 걱정되는 게 내 딸인데 올해 25살이 됐는데도 어울리는 남자를 만나지 못했어. 만약 천우 너 같은 남자한테 시집간다면 참 좋을 텐데.”“저요?”유천우는 놀란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그래.”주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딸 해린이 절세미녀까진 아니더라도 그래도 얼굴도 나름 예쁘고 재능도 뛰어나. 만약 해린이를 아내로 들인다면 내조도 엄청 잘하는 현모양처가 될 거야.”현재 그에게는 돈과 인맥 모두 충분했다. 유일하게 부족한 게 바로 하늘보다 높은 권력이었다.서경왕이 죽은 지금 유천우가 왕위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만약 딸이 유천우와 결혼한다면 나중에 서경의 왕비가 될 것이고 주한휘의 신
유천우의 계획은 간단했다. 먼저 예의를 갖춰서 설득하다가 안 되면 무력을 사용하여 제압하는 것이었다.만약 반란을 일으킨 4대 제후가 서경왕부에 굴복한다면 서경왕부는 과거의 잘못을 따지지 않고 권력도 그대로 유지하게 할 것이다. 하지만 굴복하지 않는다면 무력으로 진압하는 수밖에 없었다.그때가 되면 서경왕부는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나머지 4대 제후와 서경의 많은 세력과 손을 잡고 반역자들을 몰살할 것이다.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속전속결로 끝내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유천우의 말을 들은 장범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지하게 말했다.“내가 오늘날의 권력을 가질 수 있었던 건 다 네 아버지 덕이야. 반란을 진압하는 건 물론이고 목숨까지 바치라고 해도 기꺼이 바칠 수 있어.”“감사합니다. 제후님의 도움이 있다면 이번 어려움을 꼭 극복할 수 있을 거예요.”유천우가 말했다.“이건 내 제후령이야. 제후령만 있으면 가진의 병사를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어.”장범규는 갑자기 병부를 꺼내 유천우에게 건넸다. 백 마디 말보다 행동 하나로 보여주는 게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이건...”되레 유천우가 망설였다. 장범규가 이토록 통쾌하게 병부를 내놓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 행동은 그의 충성심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사양하지 마. 비상시국이잖아. 이 제후령이 있으면 움직이기 훨씬 편할 거야.”장범규는 병부를 유천우의 손에 쥐여주었다.“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제후님!”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인사를 올리면서 진지하게 말했다.“이번 어려움을 극복한 후에 꼭 찾아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됐어. 그런 얘기는 그만하고 시간도 없는데 얼른 가봐.”장범규가 손을 흔들었다.“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유천우는 허리 숙여 인사를 올린 다음 일행과 함께 저택을 나섰다.오늘 밤 첫 번째 목적지는 예상외로 순조로웠다. 30분도 채 안 되어 평양 제후 장범규의 지지를 얻었고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제후령마저 받았다.만약 이 속도대로 진행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
가진은 서경의 변방 도시이자 평양 제후 장범규의 영역이었다.무장 출신인 장범규는 서경왕 유만수와 함께 수년간 전장을 누볐고 세운 공만 해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나중에 평양 제후가 된 후 서경의 변방을 지켰다.수년 동안 장범규는 성실하게 직무에 임해왔다.그때 검은색 승합차 한 대가 갑자기 평양 제후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자 유진우와 유천우 등 몇 명이 나란히 내렸다.“형, 여기가 바로 평양 제후 장범규네 저택이에요.”유천우가 간단하게 소개했다.“장범규는 그래도 충성스럽고 용맹한 사람이에요. 가진을 수년 동안 관리하면서 직무와 책임을 다했거든요.”“밖에 누구야?”저택 입구를 지키던 호위병 두 명이 수상한 움직임을 알아채고 큰소리로 호통쳤다.유천우는 그들에게 다가가 신분패를 보여주면서 덤덤하게 말했다.“서경왕의 둘째 아들 유천우다.”“도련님?”두 호위병은 유천우의 신분패를 보자마자 겁에 질린 나머지 바로 무릎을 꿇었다.“예의 차릴 필요 없으니까 일어나.”유천우가 신분패를 거두어들였다.“지금 아주 급한 일이 있어서 평양 제후님을 뵈러 왔어. 들어가서 보고 좀 올려줄래?”“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지금 당장 가서 제후님께 말씀드릴게요.”그중 한 호위병이 대답하고는 서둘러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잠시 후 화려한 옷차림에 배가 불룩하게 나온 중년 남자가 부하들과 함께 부랴부랴 나왔다. 그 사람이 바로 평양 제후 장범규였다.“안녕하세요, 제후님.”유천우가 먼저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서경왕의 둘째 아들이긴 해도 눈앞의 장범규는 제후이기에 신분이 그보다 훨씬 높았다.장범규가 직접 마중을 나온 것만 해도 충분히 체면을 세워준 일이었다.“천우야, 이 늦은 밤에 무슨 일로 왔어?”장범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제후님, 서경왕부에 변고가 생겨서 제후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변고가 생겼다고? 무슨 일인데?”장범규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유천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