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악!”두 무릎이 망가진 도민향은 귀에 거슬리는 비명을 질렀다.그녀는 땅바닥에 누워 아파서 뒹굴었다.이 광경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놀라서 멍해졌다.도민향이 자신의 출신을 말한 후에도 유진우가 사람을 다치게 하고 조금도 체면을 세워주지 않을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눈앞의 이분은 도씨 가문의 아가씨이다. 평소에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그녀를 에워싸고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다.하지만 유진우가 뜻밖에도 사람들 앞에서 도씨 가문 아가씨의 다리를 망가뜨렸으니 그야말로 잔인하기 그지없었다.“유진우, 너 미쳤어?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해?”잠시 충격을 받은 단소홍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펄쩍 뛰었다.“너... 감히 도 아가씨를 다치게 하다니? 넌 죽었어, 너희들 모두 죽었어!”“맞아! 도씨 가문은 절대 너희들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이번에 너희가 아무리 많은 돈을 배상해도 소용없어.”그러자 몇 명의 젊은 남녀가 야단법석을 떨며 하나같이 분노했다.가문의 자제로서 항상 그들이 남을 괴롭혔고, 아무도 감히 그들을 괴롭히는 사람이 없었다.‘이 녀석은 정말 간이 크구나!’“오만스럽고 권세를 믿고 설치며 남을 업신여기니 내가 오늘 너희들에게 따끔하게 교훈을 줬을 뿐이야. 만약 불복한다면 언제든지 나를 찾아와도 돼.”유진우가 담담하게 말했다.어차피 처음으로 도씨 가문의 미움을 산 게 아니었다. 얼마 전에는 도석현도 때려서 지금 도민향을 때렸다 해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인마, 너 두고 보자!”독한 말을 내던지고 몇 사람은 얼른 도민향을 들고 떠났다. 옛 무세가의 도민향도 유진우의 상대가 아니니 자연히 그들은 스스로 매를 맞을 짓을 하지 않았다.“너... 이 미친놈아, 네가 도 아가씨를 때려서, 우리에게까지 해를 끼쳤어!”단소홍은 당황하기 그지없어하며 말했다.도민향이 맞았으니 도씨 가문도 분명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유진우뿐만 아니라 그녀도 함께 휘말리게 된다.이런 가문들은 한번 난폭하게 군다면 완전히 막무가내이다.“진우 씨,
“언니, 방금 우리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누군가가 사도현이 아서원에서 밥을 먹는 것을 봤다고 해요. 엄마와 이모는 이미 서둘러 갔으니 우리도 빨리 가요.”단소홍이 대답했다.“사도현? 이 사기꾼이 감히 나타나다니?”이청아는 눈썹을 찡그렸다. 얼마 전, 부도난 건물의 그 땅이 하마터면 이청아의 가족을 파산시킬 뻔했지만, 결국 호구인 유진우가 다 뒤집어썼다.그래서 사도현에 대해 그녀는 유달리 불쾌했다.“유진우, 멍하니 있지 말고 당장 운전해. 오늘 반드시 사도현이 사기 친 돈, 전부 돌려받을 거야!”단소홍은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말했다.“부도 건물은 이미 내가 인수했고 너희들은 손해를 본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흥분하는 거야?”유진우가 좀 이상해하며 물었다.“허, 무슨 소리하는 거야? 사도현 같은 사기꾼은 처벌받아야 돼. 우린 하늘의 뜻을 받아들여 정의를 행해야 해.”단소홍은 엄숙하게 말했다.“그래?”유진우는 웃기만 할 뿐 단소홍의 의도를 간파하지 않았다.하늘의 뜻을 받아들여 정의를 행하는 것은 당연히 허튼소리이다. 아마도 사기를 당한게 내키지 않아 사도현에게서 돈을 좀 얻으려고 하는 것 같다.차를 갈아타고 세 사람은 재빨리 아서원으로 향했다....아서원은 환경도 좋고 서비스도 좋으며 음식도 맛있지만 가격이 비싼 중식당 집이었다.이때, 아서원의 어느 VIP룸에서 번쩍번쩍한 차림의 사도현이 몇몇 친구들과 식사를 하고 있었다.“도현아, 내가 좋은 소식 하나 알려줄게.”이미 술을 먹은 지 좀 된 동그란 얼굴의 한 남자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최근 들은 내부소식인데, 부도 건물 쪽 땅을 곧 중점적으로 개발한다고 해. 그래서 지금 값어치가 점점 오르고 있대.”“뭐라고? 중점 개발?”그러자 사도현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아민아, 농담이지? 그 땅은 방치된 지 몇 년인데 어떻게 정부가 중점 개발을 할 수 있겠어?”“진짜야.”동그란 얼굴의 남자는 진지하게 말했다.“우리 아버지가 정부 쪽 사람이야. 이 소식은 이미
“사기꾼, 돈 갚아!”장경화는 들어서자마자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안색이 매우 흥분하였다.그녀는 더욱 기세를 올리기 위해 덩치가 크고 허리가 둥근 무지막지한 여자 몇 명을 청했다.“당신들이 왜 여기에 있어요?”사도현의 안색이 변하더니 왠지 제 발이 저렸다.‘밥 한 끼 먹는데 누가 문을 막다니.’“흥, 우리가 오지 않으면 어떻게 너 같은 사기꾼을 잡을 수 있겠어?”장홍매는 눈을 부릅떴다.“맞아, 우리 돈을 사기치고 여기서 먹고 마실 낯짝이 있다니, 정말 뻔뻔하기 짝이 없네.”장경화는 두 손으로 허리를 짚었다.“도현아, 이 아줌마들은 누구야? 내가 대신 쫓아낼까?”몇몇 친구들은 좋지 않은 얼굴을 했다. 지금 사도현은 그들의 돈줄이니 당연히 잘 보여야 했다.“괜찮아, 아는 사람이야.”사도현은 눈동자를 굴리다가 무슨 생각이 난 듯 급히 말했다.“너희들 먼저 돌아가, 난 사적인 일을 처리할 게 있으니 다음에 너희들에게 밥 사줄게.”말을 하고 사람들을 돌려보냈다.“사도현, 무슨 수작을 부리든 돈부터 빨리 갚아!”장홍매가 기세등등하게 말했다.“아줌마, 할 말 있으면 앉아서 천천히 얘기해요. 왜 이렇게 화를 내세요?”사도현은 미소를 지으며 내친김에 그녀들에게 차를 한 잔씩 따랐다.“수작 부리지 마, 이 사기꾼아!”장홍매는 가차 없이 찻잔을 뒤집었다.“아줌마, 이해가 안 되네요. 제가 뭘 속였다는 거죠?”사도현이 짐짓 의혹을 제기했다.“왜, 이제 와서 변명할 셈이냐?”장홍매가 눈을 부릅떴다.“사도현, 시치미 떼지 마. 그럼 다시 기억나게 해 줄게. 일주일 전에 네가 우리더러 부도 건물 땅을 사게 하여 총 2백억이 넘는 돈을 사기 쳤잖아. 자, 이제 기억났지?”장경화가 예의 주시했다. 부도 건물 쪽 땅은 하마터면 본전을 잃을 뻔했고, 지금까지도 장경화는 밤에 악몽을 꿨다.“아줌마, 두 분 다 오해했네요.”사도현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일부러 애원했다.“그건 모두 제 친구가 한 짓이에요. 부도 건물로 말할 것 같으면 사실 저도 피
그녀들이 기세등등하게 나타난 것은 빚을 독촉하기 위해서였고, 심지어 폭력적인 방법으로 빚을 강요할 각오까지 되어 있었다.사도현이 감히 수작을 부리기만 한다면 그녀들은 방망이로 때릴 생각이었다.하지만 상대방이 잘못을 인정했을 뿐 아니라 말끝마다 손해를 메꾸어주겠다는 말을 할 줄은 몰랐다.두 사람은 잠시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설마 사도현이 정말 결백하다는 말인가?’“사도현, 네가 피해자라면 어디서 그렇게 많은 돈이 생겨나 빚을 갚을 수 있겠어?”장경화가 의혹을 제기했다.“돈이 없는 건 사실이지만 빌려줄 사람이 있어요.”사도현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나갔다.“제가 서울에서 인맥이 좀 있는 편이라 친구들을 많이 알고 있어요. 아까 그 사람들 다 봤죠? 제가 그 사람들에게 밥을 사준 것도, 돈을 빌려 당신들이 받은 손해를 갚아주기 위해서예요.”이 말을 듣고 두 사람은 마침내 감동의 표정이 역력했다.돈을 빌려서라도 빚을 갚는다니, 이 인품은 정말 말할 것도 없다.보아하니, 확실히 그녀들이 오해한 것 같았다.“도현아, 그럼 돈은 빌렸니?”장홍매는 말투가 누그러져 떠보며 물었다.“빌렸어요. 때마침 당신들이 사기당한 돈을 갚을 수 있어요.”사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우리도 급하지 않아. 돈이야, 너만 괜찮으면 천천히 갚아도 돼.”장홍매는 멋쩍게 웃었다.“맞아 맞아, 방금 우리가 충동적으로 너를 오해했네, 마음에 두지 않았으면 좋겠어.”장경화도 덩달아 좋게 말했다.“아니에요, 다 제 탓이죠. 당신들까지 힘들게 했으니. 남자라면 책임져야죠, 지금 바로 계좌이체 해줄게요.”사도현은 말하며 곧바로 휴대전화를 꺼냈다.“에헤이, 가족끼리 뭘 그렇게 서둘러?”장경화는 싱글벙글 웃었다.“내 은행 계좌 번호는 622700030...”“잠깐만요!”비밀번호를 절반 입력하다가 사도현이 갑자기 멈추고 언뜻 깨달은 듯이 말했다.“아줌마들, 돈은 돌려드릴 수 있지만, 부도 건물 땅의 소유권은 저에게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그걸 왜 원하
“어,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그 바보가 벌써 왔네.”장경화의 말이 막 끝나기 무섭게 아서원 입구에서 세 사람이 마침 걸어 들어왔다.바로 유진우, 이청아, 단소홍 세 사람이다.“사도현!”단소홍은 문을 들어서자마자 사방을 둘러보더니 곧 룸 안의 사도현을 보고 분노한 표정으로 앞으로 달려나갔다.“소홍아, 내 말 좀 들어봐...”사도현이 웃으며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단소홍이 뺨을 후려갈겼다.사도현은 멍하니 얼굴을 가리고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딸, 왜 사람을 때리고 그래?”장홍매는 소리를 내어 꾸짖었다.“엄마, 왜 아직도 저 녀석을 감싸요? 이 사기꾼은 맞아도 싸지 않아요?”단소홍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자신을 꼬시면 그만이지, 감히 돈까지 사기 치다니, 그야말로 매를 버는 격이다.“오해야, 도현이는 사기꾼이 아니야.”장홍매는 얼른 사람을 옆으로 끌어당겼다.“사도현이 사기꾼이 아니라고요? 그럼 내가 거짓말쟁이라는 거예요? 엄마, 정신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어떻게 저 녀석을 감쌀 수가 있어요?”단소홍은 화가 풀리지 않았다.“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내 말 좀 들어봐...”장홍매는 머뭇거리지 않고, 급히 방금 사도현이 한 말을 자세히 반복했다.그 과정은 이치를 따지는 방식으로 말했고, 감정이 충만한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감동시킨다고 할 수 있었다. 특히 사도현의 억울하다는 표정까지 더하면 더 그럴듯했다.“뭐라고요? 오빠는 죄가 없다고요? 그럼 내가 방금 사람을 잘못 때린 거 아니에요?”말을 들은 단소홍은 순간 설득당했고, 이내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그러니까, 네가 너무 충동적이었어. 얼른 도현이에게 사과해.”장홍매가 꾸짖었다.“오빠, 미안해. 내가 방금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얼굴 아직도 아파? 내가 주물러줄까?”단소홍은 방금의 무지막지한 모습을 벗어던지고 몹시 애틋한 표정을 지었다.“난 괜찮아, 내가 전에 제대로 말하지 않아서 오해하게 했네.”사도현은 억지로 웃음을 쥐어짰다.“사실 이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남자, 진정한 영웅이다!“유진우, 오늘 운이 좋네. 오빠가 너의 부도 건물을 사려고 하는데, 빨리 오빠에게 고맙다고 해.”단소홍은 자랑스러운 얼굴로 말했다.“고마운 건 됐어. 다 친구잖아. 나도 유진우가 상처받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재산권을 가져와, 우리 현장에서 거래하자.”사도현은 미소를 지으며 반말하기 시작했다.“내가 당신과 거래한다고 말했었나?”유진우가 불쑥 말을 내뱉었다.“응?”사도현은 어리둥절해졌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단소홍과 몇몇 사람들도 놀라고 이유를 몰랐다.‘이 녀석 정말 미친 건가? 돈을 가지지 않고 그딴 쓰레기를 가져서 뭐 하는 거지?’“유진우, 방금 내 말을 잘 듣지 못했어? 부도 건물, 값어치도 없는데, 네가 가지고 있어도 소용없으니, 차라리 나한테 파는 게 어때?”사도현이 설득했다.“그럼 값어치도 없는 걸 가져서 뭘 하려고?”유진우가 되물었다.“나야 당연히 유진우 너를 위해서지.”사도현은 진지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결국 이 일은 모두 다 내가 사람을 대하는 것에 서투른 내 잘못이에요. 하지만 당신들을 휘말리게 할 수는 없으니 무슨 대가가 있으면 모두 내가 책임질게요.”“넌 정말 좋은 사람이네.”유진우가 살짝 웃음을 지었다.“호의를 베풀어줘서 고맙지만 난 팔지 않겠어.”“왜?”사도현이 잠시 멍해졌다.“친구 사이인데 나도 네가 손해를 보는 건 원치 않아.”“괜찮아, 손해 보는 거 두렵지 않아.”“하지만 내가 두려워서 그래. 그러니 그만둬.”“안 돼! 만약 내 성의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돈을 더 줄 수도 있어.”“돈 문제가 아니라 원칙의 문제야. 아까 네가 말했다시피 사람으로서 도덕과 원칙을 지켜야 해.”“너.”사도현은 하마터면 화가 나 피를 토할 뻔했다.‘시발, 왜 이렇게 들어 처먹지 않는 거야? 온갖 좋은 말을 다해줬는데 완전 고집불통이네. 진짜 미치겠네!’“됐어요, 시간이 늦었네요. 아직 회사에 일이 있어서 나랑 청아 씨는 먼저 갈게요. 천천히 얘
돌아가는 길에 이청아는 몇 번이나 말하려다 멈추었다.눈에 밟히자 유진우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 숨기지 말고.”“아까 사도현이 부도 건물을 사려고 하는데 왜 동의하지 않은 거야?”이청아는 끝내 참지 못하고 물어봤다.“그 땅은 손에 쥐고 있어 봤자 아무 가치도 없는 걸 모두 알고 있어. 그러니 차라리 팔아서 손실을 만회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비록 전에 맹세코 유진우의 일을 상관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상대방이 기회를 놓치는 것을 보면 여전히 안타까웠다.“다들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왜 사도현은 사려고 하는 걸까?”유진우가 한마디 되물었다.“당신이 방금 말하지 않았어? 다들 친구니까 속이고 싶지 않다고.”이청아가 대답했다.“허허... 사도현이 진짜 호의를 베풀 거라고 생각해?”유진우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만약 사도현이 정말 책임감이 있었다면 그전에 갑자기 사라지지 않았을 거야.”“그건...”이청아는 눈썹을 살짝 비틀며 생각에 잠겼다.사도현의 인품에 대해 처음에 그녀는 확실히 의심을 했다. 하지만 상대방의 진실된 모습과 심지어 부도 건물까지 다시 인수한다고 해서 조금 더 믿었다.“솔직히 말할게, 사도현이 부도 건물을 인수하려는 이유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가 아니라 그 땅의 가치가 오를 걸 알고 있기 때문이야.”유진우가 싱긋 웃었다.“가치가 오른다고? 10년 가까이 아무도 건드린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갑자기 가치가 오를 수 있는 거야?”이청아는 좀 이상했다.“불가능은 없어. 내가 전에 말했듯이, 정부에서 그 땅을 중점적으로 개발하려고 해. 사도현이 갑자기 마음을 돌린 것은 분명 내부소식을 알아낸 것이 틀림없어. 그렇지 않으면 사도현이 어떻게 호의적일 수 있겠어?”유진우는 웃는 듯 마는 듯했다.“그럼 부도 건물 그 땅은 지금 가치가 얼마나 되는데?”이청아가 떠보며 물었다.“아마도 4천억 이상은 될 거야.”“4천억?”이청아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한 푼의 가치도 없던 땅이,
“괜찮아, 아줌마는 작은 집에서 살 수 있어. 너희 같은 젊은이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니, 어른인 우리가 당연히 부담을 덜어줘야지.”“전 부담 같은 거 없이 잘 지내고 있어요.”“...”두 사람은 전화로 주고받으며 밀당을 하면서 진실만을 말하지 않았다.장경화는 유진우를 호구로 여겼고, 유진우는 일부러 멍청한 척했다. 오히려 조수석에 앉은 이청아가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그녀는 그제야 철석같이 유진우의 말을 믿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머니가 이렇게 열정적이지 않았을 것이다.속죄라느니, 스트레스를 덜어준다느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전에 사람을 속일 때는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더니 이제는 손해를 본 것을 알고 진실을 말하기는커녕 오히려 정의를 내세워 제값에 받으려고 한다. 정말 욕심이 끝이 없다.“이봐, 너 왜 말을 안 들어? 아줌마는 다 널 위해서야. 얼른 부도 건물을 나에게 팔아!”말을 하다가 장경화는 자기도 모르게 약간 조바심을 냈다.돈 때문이 아니라면, 그녀가 쓸데없는 말을 할 리가 있겠는가? 바로 욕부터 퍼부었을 것이다.“아줌마, 부도 건물을 인수하려고 그렇게 서두르는 이유가 뭐예요?”유진우가 다시 물었다. 이건 그가 장경화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이다.만약 상대방이 진실을 말한다면, 그는 이익의 일부를 양보할 생각이다.“아줌마가 분명히 말했잖니. 네가 손해를 보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고, 무슨 스트레스가 있으면 아줌마가 혼자 짊어질게!”장경화의 말투가 계속 강경했다.“엄마! 그만해!”이때 이청아는 끝내 참지 못하고 한소리 했다.“일이 이렇게 됐는데 아직도 남을 속이고 싶어?”“얘는,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사람을 속였다고.”장경화는 소리 높여 말했다.“흥, 사실대로 말할게. 진우 씨는 이미 진실을 알고 있어. 현재 부도 건물이 4천억의 가치가 있다는 걸. 엄마가 원가로 되찾고 싶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야!”이청아가 소리쳤다.“뭐?”장경화는 잠시 주춤하더니 제 발이 저렸다.“너희들 다 알고 있었어? 왜 진
“네 말은 누군가 4대 제후가 동시에 반란을 일으키게 조종하고 있단 말이야?”이의진이 얼굴을 찌푸렸다.“맞아요.”유천우가 수심에 찬 얼굴로 말했다.“지금 서경에서 4대 제후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이죠.”“유태범!”이의진은 깊게 고민하지도 않고 말했다.“작은아버지는 야심이 크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에요. 4대 제후의 손을 빌려서 우리가 병부를 내놓게 압박하고 있는 거예요.”유천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분석했다.“만약 우리가 따르지 않는다면 4대 제후는 반란을 일으켜 우리가 군대를 동원하게 압박한 다음 유태범이 중간에서 방해하면서 우리한테 불리하게 할 겁니다. 우리가 반란을 진압하는 데 실패하면 서경왕부의 위엄이 크게 손상될 거예요. 그러다가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해질 때 구세주처럼 나타나서 백성들을 구하고 4대 제후를 제압할 계획인 거죠. 그때가 되면 유태범은 만인의 지지를 받아 새로운 왕이 될 겁니다. 민심을 얻으면 천하를 얻는 것과 같다는 말도 있듯이 유태범이 아버지와 같은 자리에 서게 되면 새로운 서경왕이 되겠죠. 아주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웠네요.”유천우의 표정이 눈에 띄게 심각해졌다. 유태범이 꾸민 건 음모가 아니라 공공연한 모의였다. 하지만 상대가 나쁜 짓을 꾸미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는데도 해결하기 어려웠다. 이게 바로 공공연한 모의의 무서운 점이다.“그렇다면 유태범이 진작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거네.”이의진이 얼굴을 찌푸렸다.“지금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는 거야. 군대를 동원할 수도 없고 설득도 불가능하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해?”“나머지 4대 제후와 아버지의 옛 부하들과 손을 잡아야만 유태범과 겨룰 수 있을 겁니다.”유천우가 대답했다.“일리 있어.”이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서 나머지 4대 제후를 모셔오도록 할게. 같이 모여서 상의하는 게 좋겠어.”“어머니, 제가 직접 갈게요. 그래야 성의도 충분히 보여줄 수 있죠.”유천우가 직접 나섰다. 나머지 4대 제후
“형, 난 진짜 안 돼요. 왕위를 물려받을 사람은 형밖에 없어요.”유천우의 얼굴에 조급한 기색이 드러났다.“됐어. 왕위 얘기는 나중에 하자. 지금 안팎으로 불안이 끊이지 않아. 일단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급선무야.”유진우가 화제를 돌렸다.“형이 나서서 이끌어준다면 내가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요.”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난 지금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어.”그러자 유진우가 고개를 내저었다.“유태범 일당이 아직 내가 서경으로 돌아온 걸 모르고 있어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어. 내가 돌아온 걸 몰라야 유태범이 무슨 꿍꿍이라도 꾸민다면 제때 해결할 수 있지. 그리고 호룡각의 잔당들도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어. 기회를 봐서 싹 다 일망타진할 거야.”“그런 거였군요.”유천우는 그제야 모든 걸 깨달았다.“알겠어요. 그럼 서경왕부에서 공개적으로 하는 일은 나한테 맡기고 형은 보이지 않는 음모들을 해결해주세요.”“그래. 그렇게 하자.”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아 참. 그리고 이거.”유천우는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금색 영패 하나를 꺼내 유진우에게 건넸다.“이건 내 군령이에요. 이것만 있으면 내 결사대원 800명을 동원할 수 있고 필요한 순간에 꽤 도움이 될 겁니다.”그의 결사대원 800명은 모두 엄선해서 뽑은 고수들이었다.유천우가 태어난 순간부터 이의진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몰래 그들을 훈련시키면서 힘을 비축했다.20년이 지난 지금 결사대원 800명은 무서울 정도로 성장했다.“알았어. 영패는 일단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돌려줄게.”유진우도 거절하진 않았다.지금 이청성의 도움을 받고 있긴 했지만 호룡각의 잔당들에 비하면 아직 역부족이었다. 이젠 유천우의 결사대원 800명이 더해졌으니 싸울 힘이 생겼다.“천우야!”그때 문밖에서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조금 전 나갔던 이의진이 다시 다급하게 빈소로 들어왔다. 유진우는 재빨리 가면을 쓰고 근위병인 척 옆에 섰다.유천우와 마음을 털어놓고 얘기할 수 있었던 건 형제끼리의 믿음 때문이
“형?”유천우는 인피 가면을 벗은 남자를 보자마자 흠칫 놀라더니 이내 기쁨에 겨워했다.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서경왕부에 위장 잠입한 유장혁이었다.“많이 컸구나, 천우야. 이젠 혼자서도 일을 척척 해내고.”유진우는 배다른 동생 유천우를 흐뭇하게 쳐다보았다.사실 조금 전 유천우와 이의진의 얘기를 전부 다 들었다. 유천우가 자신을 믿어준 것에 대해 무척이나 고마웠다. 물론 이의진이 걱정하는 마음도 충분히 이해는 되었다.지금까지 권력을 손에 넣으려고 형제끼리 물고 뜯고 부자끼리 서로 죽이는 걸 수두룩하게 봐왔다. 자기 아들을 걱정하는 건 당연했다.“형, 서경에는 언제 왔어요?”유천우가 물었다.“이틀 정도 됐어.”유진우가 대답했다.“아버지 돌아가신 거 알았어요?”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유진우는 빈소의 영정사진을 보고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부자는 1년 전 강능에서 만났다. 그런데 그 만남이 마지막이 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 다시 만났을 때 유진우는 빈소에 서 있었고 유만수는 관 속에 누워있었다.‘이건 뭐 운명의 장난도 아니고...’유진우는 관 앞으로 걸어가 반쯤 열린 관뚜껑 사이로 그 안에 누워있는 유만수를 보았다. 얼굴이 평온한 걸 보니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았다.하지만 어찌 된 건지 그렇게 미워했던 유만수의 얼굴을 본 순간 슬픔이 밀려오기 시작했다.‘내가 만약 서경에 빨리 돌아왔더라면, 빨리 만났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왜?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유진우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고 눈시울이 저도 모르게 붉어졌다.“형, 사실 최근 2년 사이 아버지 건강이 점점 나빠져서 특효약으로 연명하셨어요. 의사는 아버지가 천인오쇠라고 하면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어요. 천천히 쇠약해져서 죽는 것보다 이 결과가 아버지한테는 오히려 해방 같은 거라고 볼 수 있어요.”유천우가 울먹거리며 말했다.“범인은 잡았어?”유진우가 돌아서서 물었다.“홍복홍이 지금 조사하고 있어요.”유천우가 대답했다.“서경왕부에 숨은 스파
그래야만 지금 앉아 있는 이 자리라도 지킬 수 있다.지금 왕위를 이어받을 자격과 능력을 갖춘 사람은 표기 대장군 유태범밖에 없었다.첫째로 유태범은 유씨 가문 사람이라 왕족에 속했기에 명분이 정당했다. 둘째로 표기 대장군으로서 서경의 절반에 달하는 군대를 거느리고 있어 권력이 하늘을 찔렀다. 셋째로 유태범은 오랜 시간 동안 힘을 키워왔다. 인맥, 위신, 공로 모두 왕위에 오르기에 충분했다.현재 유태범이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적지 않은 관원들은 애도를 표한 후 바로 대장군 저택으로 가서 유태범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었다.이러한 움직임은 당연히 서경왕부의 감시망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의진은 그들을 제압할 힘이 없었다.“어머니, 벌써 종일 여기 계셨어요. 들어가서 쉬세요. 이러다가 몸이 상하실까 걱정됩니다.”수심과 피곤이 가득한 어머니의 얼굴을 본 유천우가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내가 어찌 편히 쉴 수 있겠어.”이의진이 고개를 내저었다.“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더 조심해야죠. 서경왕부가 흔들리고 있는 지금 왕비인 어머니가 버티셔야 합니다. 절대 쓰러져선 안 돼요.”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하지만...”이의진은 뭐라 더 얘기하고 싶었지만 유천우가 가로챘다.“어머니, 이번에는 제 말을 들어주세요. 먼저 들어가서 쉬고 내일 아침에 다시 아버지 곁을 지켜도 괜찮아요.”이의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유천우는 도우미 두 명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너희 둘, 어머니를 방으로 모시고 잘 보살펴드려.”“알겠습니다.”두 도우미는 대답한 후 이의진을 부축했다. 무릎을 하도 오랜 시간 꿇고 있어 다리가 저린 나머지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천우야, 너도 몸 잘 챙겨. 절대 방심해선 안 돼.”이의진이 당부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유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나가는 걸 본 후에야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렸다.“다들 돌아가. 여긴 나 혼자 지키면
그 시각 서경왕부 문 앞.유태범 등 3인은 한 무리의 근위병들을 이끌고 서둘러 걸어 나왔다.서경왕부를 떠난 후 조군영이 참다못해 물었다.“대장군님, 이의진 모자가 주제도 모르고 저렇게 날뛰는데 계속 가만히 내버려 둬야 합니까?”“당연히 내버려 둘 순 없지. 하지만 너무 대놓고 움직여서도 안 돼. 흑용군의 대부분 고급 장교들이 서경왕부에 충성해서 정말 싸우기라도 한다면 우리한테 좋을 게 없어.”유태범이 실눈을 뜨고 말했다.“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조군영이 또 물었다.“대놓고 움직일 수 없다면 몰래 압력을 가해야지.”유태범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서경에 내란이 일어서 서경왕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진정한 리더가 누구인지 알게 될 거야.”“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서 이간질시킬게요. 백성들의 원한이 커져서 서경왕부도 감당이 안 될 때 대장군님이 구세주처럼 등장하는 겁니다. 그때가 되면 서경의 백성들은 대장군님께 고마워할 것이고 새로운 서경왕으로 모시겠죠.”눈치가 참 빠른 조군영이었다.“맞아. 아주 영특하구나, 너. 나중에 내가 서경왕 자리에 앉으면 표기 대장군 자리는 네 것이 될 거야.”유태범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 대장군님.”조군영은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얼른 움직여. 빠를수록 좋아. 절대 그 어떤 흔적도 남겨선 안 된다는 거 명심해.”유태범이 신신당부했다.“알겠습니다. 제가 깔끔하게 처리하겠습니다.”조군영은 인사를 올린 후 자리를 떠났다.“대장군님, 일반적인 내란이라면 서경왕부의 뿌리를 흔드는 건 불가능할 거예요. 반드시 강력한 무언가가 있어야 해요.”고원이 귀띔했다.“그건 나도 알고 있어.”유태범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동안 난 내 사람을 몰래 키워왔어. 8대 제후 중에 절반이 내 사람이야. 내 명령 한마디면 주저하지 않고 날 도와줄 거야.”“진작 준비하고 계셨군요. 제가 괜한 걱정을 했네요.”고원이 웃으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서경왕이 되면 절대 섭섭지 않게 해줄게.”
“유태범은 오랫동안 야심을 숨겨왔어요.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으니 이 기회에 무조건 권력을 빼앗으려고 할 겁니다. 이 일 아직 끝나려면 멀었어요.”유천우가 수심에 찬 얼굴로 말했다.“맞아. 대놓고 움직이진 못해도 뒤에서 온갖 수단을 동원할 거야. 앞으로 적지 않은 문제가 생길 게 분명해.”이의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위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절대 함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형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유천우가 한탄하듯 말했다.“천우야, 네 능력도 네 형 못지않아. 네 형이 할 수 있는 일은 너도 할 수 있을 거라 믿어.”이의진이 그를 격려했다.“어머니, 제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어요. 형님에 비하면 한참 부족합니다.”유천우가 고개를 내저었다.“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지 마.”이의진이 엄격한 얼굴로 말했다.“네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어. 장례식이 끝난 후에 폐하께 말씀드려서 너한테 왕위를 물려주게 할 거야. 앞으로 서경왕은 너고 그 중책을 맡아야 해.”“어머니, 왕위는 형 거예요. 전 그 자리를 물려받을 생각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서경왕은 형만이 물려받을 자격이 있다고요.”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천우야, 다른 일은 남한테 양보해도 이건 절대 안 돼!”이의진이 어두운 목소리로 호통쳤다.“그 자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꿈에 그리는 자리인지 알아? 놓치면 평생을 후회할 거라고!”“전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요. 저한테 있어서 권력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아버지처럼 매일 애쓰고 힘들게 사는 것보다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유천우가 고개를 내저었다.‘왕이 되면 좋을 게 뭐가 있다고. 걱정거리만 태산일 텐데. 그럴 바엔 맨날 먹고 놀면서 편히 살겠어. 그게 더 좋은 거 아닌가?’“이 녀석아, 일이 네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전에 자유롭게 살 수 있었던 건 다 네 아버지가 있어서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금 아무 권력도 손에 쥐지 않는다면 나중에 아주 처참한 결말을 맞이할 거란
“유장혁?”그 소리에 주변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한때 유씨 가문의 천재는 이름을 널리 떨쳤었다. 그런데 10년 전 자금성의 난이 터진 후 완전히 종적을 감추었고 현재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런 그의 이름을 갑자기 들으니 놀랄 만도 했다.“도련님,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세자 전하의 생사도 불투명한 데다가 어디 있는지도 아무도 몰라요. 그런 분한테 서경왕의 자리를 맡긴다는 건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 아닌가요?”조군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두 손까지 펼쳐 보였다.“그러게요, 도련님. 제발 현실을 잘 알고 말씀하세요. 세자 전하께 기댈 바엔 차라리 대장군님께 기대는 게 더 낫죠.”고원도 나서서 맞장구를 쳤다.유천우가 자기 자신을 얘기할 줄 알았는데 실종된 지 10년이나 된 사람을 얘기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정말 이보다 더 터무니없는 얘기는 없었다.“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형도 꼭 돌아올 겁니다. 그때 가서 형이 왕위를 이어받아도 문제없죠.”유천우가 싸늘하게 말했다.“도련님, 제가 하는 말이 거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만약 세자 전하께서 이미 돌아가셨으면 어떡해요? 서경왕의 자리를 계속 비워둘 작정인가요?”조군영이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형님 죽지 않았고 멀쩡하게 살아있어요. 그러니까 조 장군님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유천우가 말했다.“살아있다면 지금 어디 계시는 거죠? 왜 나타나지 않는 겁니까?”조군영은 일부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형님한테 소식을 전했으니 꼭 올 겁니다.”유천우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도련님, 설마 지금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는 건 아니죠?”조군영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위왕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퍼지면 서경 전체가 크게 흔들릴 거예요. 기다릴 시간이 많지 않다고요. 지금 당장 그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맞아요, 도련님. 대국을 생각하셔야죠!”고원도 나서서 유천우를 설득했다.“형한테 자리를 물려주는 건 아버지의 유언이에요. 지금 명령을 거역하겠단 겁니까?”
사람들이 뒤돌아보니 거친 삼베옷을 입고 상복 모자를 쓴 젊은 남자가 차가운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남자는 위엄이 넘쳤고 온몸에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오랜 시간 전장을 누빈 조군영과 고원마저도 그를 보자마자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표정이 진지해졌다.그 남자는 다름 아닌 유만수의 작은 아들 유천우였다.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유천우는 온 집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하여 예전에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도 많이 저질렀었고 서경의 사고뭉치라 불리기도 했다.그런데 최근 2년 동안 유천우는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변한 듯 더는 빈둥빈둥 놀지 않고 군에 들어가 열심히 살기 시작했다.처음에 사람들은 유천우가 군대에서 3일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어릴 적부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산 도련님이 군대의 혹독한 훈련을 버틴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그런데 뜻밖에도 유천우는 군대에서 자리를 잡았고 공까지 세웠다.짧은 2년 사이에 병사에서 흑용군의 부장으로 성장했다. 든든한 배경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무척이나 놀라운 성과였다.사람들은 그제야 유천우가 응석받이로 자란 도련님이 아니라 군사 천재라는 걸 알게 되었다.“천우야, 드디어 온 거야?”아들을 보자마자 이의진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겨우 가라앉았던 슬픔이 다시 저도 모르게 밀려왔다.“어머니, 소식 다 들었어요. 제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유천우는 어머니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군영과 고원에게 시선을 옮겼다.“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이렇게 몰아붙이는 겁니까?”“그게...”조군영은 고원의 눈치를 슬쩍 봤다가 어쩔 수 없이 말했다.“도련님, 오해하지 마세요. 저희도 대국을 위해서 이러는 겁니다. 현재 서경왕부에 리더가 없어서 누군가 나서서 이끌어가야 합니다. 안 그러면 많은 문제가 생길 거예요.”“맞아요, 도련님. 대국을 생각하셔야죠.”고원은 충성을 다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대국?”유천우는 코웃음을 치고는 더는 두 사람을 거들떠보지 않
“서경 대원수의 직위는 매우 중요합니다. 내부 투표를 거칠 뿐만 아니라 폐하께 보고하여 최종적으로는 폐하의 결정을 받아야 해요. 우리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어요.” 이의진의 눈빛이 경계로 가득했다.유태범이 왔을 때 그녀는 처음에는 형제 간의 정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조군영과 고원의 몇 마디 말에 그녀는 갑자기 깨달았다. 일이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유태범은 흑용군에서 유만수 다음가는 위망을 가지고 있었다.표기대장군으로서 그는 많은 심복 장수들을 거느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절반의 병권도 장악하고 있었다.왕이 세상을 떠난 후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사람은 유태범이 분명했다.가장 중요한 것은 유태범이 지금 이미 자신의 야심을 드러냈다는 점이다.왕이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권력을 탈취하려 하다니, 그녀는 그의 불순한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심지어 유만수의 죽음이 이 자들과 호룡각 잔당들이 암묵적으로 결탁한 결과일지도 모른다!만약 유태범이 병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무시무시할 것이다.“마마, 급할 때는 권력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이런 상황에서 어찌 폐하의 결정을 기다릴 시간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반드시 빨리 국면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조군영이 계속해서 말했다.“맞습니다!”고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장수가 밖에 있으면 군령도 받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폐하는 상황을 전혀 모르니 결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반드시 우리가 스스로 결정해야 하며 그래야만 소인배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폐하에게 보고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내부 투표를 거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모두가 승복할 수 있어요.” 이의진이 다시 말했다.“투표라니요? 이게 투표할 일입니까? 전 서경을 둘러봐도 대장군님보다 원수 자리에 더 적합한 분이 누가 있습니까?” 조군영이 말했다.“그렇습니다, 왕비마마! 공적으로 보나, 위망으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무공으로 보나 어르신을 제외하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