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그녀도 어디 한번 갈 데까지 가보자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세 번째 차를 따르고 건네려던 그때 누군가 갑자기 손을 내밀어 그녀를 말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낯빛이 얼음장같이 차가운 유진우였다.“이번에는 내가 할게.”“당신이?”이청아가 화들짝 놀랐다.‘진우 씨 성격에 절대 누구한테 고개를 숙일 사람이 아닌데. 설마 나 때문에?’“네까짓 게 뭔데? 무슨 자격으로 우리 할머니께 차를 올리는 건데?”이서우는 대놓고 그를 무시했다. 그녀가 모욕을 주려는 사람은 이청아였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유진우가 아니었다.“시골 사람들은 정말 예의도 없어. 개나 소나 다 나랑 말 섞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오금란은 고개를 쳐들고 불만을 드러냈다.“차 한잔일 뿐인데 누가 올리든 다 마찬가지 아닌가요? 오늘 제가 기분이 좋아서 직접 올릴게요.”유진우는 찻잔을 건네받고 오금란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차를 오금란의 머리에 그대로 부어버렸다.차에 찻잎이 섞여 있어 떨어진 찻잎이 그녀의 얼굴에 찰싹 달라붙었다.그 순간 현장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유진우의 간덩이가 이 정도로 부었을 줄은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눈앞의 이분은 이씨 가문에서 덕망이 높은 셋째 사모님이다. 평소 어딜 가든 사람들이 그녀를 추어올리기에 바빴고 아부는 늘 있는 일이었다. 그런 그녀가 언제 이런 수모를 당한 적이 있었겠는가?“유진우, 지금 뭐 하는 짓이야!”가장 먼저 사태를 파악한 이서우가 욕설을 퍼부었다.“감히 우리 할머니를 모욕해?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너, 너... 이 빌어먹을 놈 같으니라고! 천추에 용납 못 할 큰 죄를 지었구나!”오금란이 두 눈을 부릅뜨고 노발대발했다.재벌 출신인 그녀는 지위가 아주 높았다. 지금까지 남에게 모욕을 주는 건 늘 그녀였고 그녀를 모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아직도 화가 덜 풀렸네요? 한잔으로 모자라면 한잔 더 드릴게요.”유진우는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뜨거운 물을 한잔 따라 오금란의 얼굴에 냅다 뿌렸다
오목조목 틀린 부분을 짚어내며 지적하는 유진우를 보면서 장경화는 할 말을 잃어 입을 떡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주변 모든 사람이 말문이 막힌 채로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둘을 바라보았다.이 많은 대중 앞에서 덕망 높은 3대 가문의 사모님을 훈계하다니, 어찌 감히...?“이...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어디서 나한테 이래라저래라야? 내 말 한마디면 네 집안은 바로 풍비박산이야. 알아?”오금란이 창피함에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리며 소리쳤다.노여움에 전의 점잖음을 모두 잃은 것 같았다.“해보시든가요.”유진우가 조금의 두려움도 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대답했다.“그, 그래!” 오금란이 노발대발하더니 대뜸 깔깔 웃었다.“장경화, 이 배은망덕한 것! 내가 이리 고생하며 강능에 온 목적이 바로 너희 가족을 일으키기 위해서인데. 은혜를 모르는 건 둘째 치고, 감사함도 모르고 이리 날뛰는구나! 이 위임장을 보니 주인을 바꾸려는 것 같은데. 너희가 자산이 2조 되는 조경 그룹 회장의 자리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으니 당장 족장에게 알려야겠구나.”그녀가 폰을 꺼내어 전화하려 했다.이를 본 장경화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무릎을 꿇고 빌었다.“사모님! 제발 멈춰주세요. 이 아이가 한 말은 저희와 아무 관계도 없어요. 저 애 때문에 우리를 탓해서는 안 돼요!”“할머니, 믿지 마세요. 유진우는 장경화의 사위예요!”이서우가 단호하게 말했다.“전 사위! 전 사위라고! 이미 내 딸과 이혼했어!”장경화가 다급히 정정하며 말했다.“흥! 당신네가 어떤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든 상관없어! 한번 결혼했으면 당신네 사람이지!”오금란이 음습한 얼굴로 말했다.“이제 당신들은 내가 만족하도록 제대로 된 설명을 해야 할 거야. 난 기회 준 거니까, 내 탓 하지 마.”“예예예... 바로 사과시키도록 하겠습니다.”장경화가 연거푸 고개를 끄덕이며 유진우를 향해 소리쳤다.“야, 너! 거기 서서 뭐 하는 거야? 빨리 머리 박고 사죄해!”“하겠으면 당신이나 하
이청아가 눈살을 찌푸렸다.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기 때문에.2,000억의 유동자금이라... 이것은 강능의 내로라하는 금수저들도 쉽게 내놓을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투자를 받아내지 못하면 현명한 청아는 당연히 스스로 회장 자리에서 물러나야겠지? 그룹에 걸림돌이 되면 안 되니까.”오금란이 한쪽 입꼬리를 쓱 올리며 싸늘하게 웃었다.2,000억의 투자는 족장의 요구가 아니라 그녀가 설치한 덫이었다.외부인이 회장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절대 두고 볼 수 없는 그녀였다. 그녀는 기어코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트집을 잡아내 물러나게 할 셈이었다.그때면 족장이 묻는다 해도 합리적인 이유를 댈 수 있을 것이다.“왜 대답을 안 해. 설마 이런 작은 일도 못 하면서 회장 자리를 넘보는 건 아니지?” 오금란이 비꼬며 코웃음 쳤다.“네가 못하겠다면 그 회장 자리엔 내가 앉으면 되겠네.” 이서우가 고개를 쳐들며 비아냥거린다.2,000억의 자금, 그녀의 인맥으로 못 할 일도 아니었다. 그녀가 도움을 청한다면 할머니께서도 발 벗고 나설 것이었기 때문에.“누가 못한다고 했나요? 고작 2,000억인걸, 3일이면 모을 수 있어요.” 이때 유진우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3일? 미쳤어?!”장경화는 하마터면 펄쩍 뛸 뻔했다. “이렇게 큰돈을 3일 내로 어떻게 모아? 30일이면 몰라도. 아니, 30일이어도 간당간당한데!”“진우 씨. 고작 3일 이내에 내가 어딜 가서 그 많은 돈을 얻겠어?”이청아도 눈살을 찌푸렸다.2,000억의 투자자금을 모으는 것은 온 투자시장을 통틀어서도 손에 꼽을만한 어려운 일이었다.그리고 앞으로 3일뿐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괜찮아, 나한테 맡겨. 할 수 있어.” 유진우가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그래. 그렇다고 하니 3일 주지.”오금란의 눈이 반짝였다. “하하. 어리석네. 3일 이내에 모으지 못한다면 모두 제 발로 우리 그룹을 나가야 할 거야.”말을 마치고 그녀는 지팡이를 짚고 붙잡을 틈도 없이 떠나버렸다. 다
이 씨네 별장을 나간 유진우가 폰을 꺼내 막 전화하려 할 때 갑자기 벨 소리가 울렸다.화면에는 ‘손기태’ 가 떠 있었다.“네, 손 회장님. 방금 찾으러 가려고 했는데, 먼저 전화해 주실 줄은 몰랐어요.” 유진우가 전화를 받으며 공손히 말했다.“진우 씨가 저를 찾는다고요. 부탁할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손기태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네. 맞습니다. 제 친구에게 어려움이 생겨서 급히 자금이 필요합니다. 혹시 손 회장님께 빌릴 수 있을까 해서요.”유진우가 물었다.“하하!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돈을 빌리는 거라면 문제없죠. 제가 다른 건 없어도 돈은 넘쳐나거든요. 얼마나 필요합니까?” 손기태가 긴장을 풀고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2,000억입니다.”“어렵지 않죠. 내일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진우 씨, 왜 이렇게 딱딱하게 구는겁니까. 의사 선생님께서 제 고질병을 치료해 주신 후로 제가 얼마나 감사하며 살고 있는데요.”“축하합니다... 아, 방금 전화한 건 무슨 일이었어요?” 유진우가 화제를 전환했다.“선생님께서 전에 귀한 약재들을 주의해 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방금 소식을 들었는데 영천에 최근 몇 가지 약재가 나왔답니다. 그런데 그중에 진우 씨가 원하던 천년 청련이 있다지 뭡니까.” 손기태가 벅찬 듯이 한숨에 말했다.“천년 청련이 확실합니까?” 유진우가 다급히 물었다.수명단을 만드는 데에 세 가지 재료 중 최상품의 영약만 부족했다.이 세 가지 영약은 각각 혈정화, 칠색 영지, 그리고 천년 청련이었다.하나하나가 모두 진귀한 것으로서 극히 희귀한 약재들이었다.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천년 청련의 소식을 듣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큰 행운이고 기쁨이었다.“가짜는 아닐 겁니다. 약신궁의 사람들도 모두 나섰다고 하니. 하지만 경매는 늘 이런 식으로 입소문을 타는 법이니 구체적인 상황은 가봐야 압니다.” 손기태가 자신의 추측을 알려주었다.“알겠습니다. 그럼 손
“허! 안 믿네? 그럼 두고 보시든가.”빵떡모자 소녀는 둘을 아니꼽게 보면서 입을 삐죽거린다.이에 둘은 그저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시간이 일분일초 흘러갔고 경매는 점차 막바지에 이르렀다. 일부 값이 나가는 물건들이 하나하나 나왔다.드디어 많고 많은 사람이 꿈에도 그리던 천년 청련이 모습을 드러냈다.“게스트 여러분, 다음으로 경매에 내놓을 물건은 바로바로, 이 최상품 영약입니다! 희귀하고 진귀하기로 소문난 이 영약! 세계에서도 보기가 드물다고 하는데요! 오늘날까지 천년이나 살아온 영약이죠! 이름하여... 천년 청련!”사회자가 손을 흔들자 직원들이 조심스럽게 박달나무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뚜껑을 여니 안에는 푸른빛을 띠는 연꽃 한 송이가 정중앙에 놓여 있었다.연꽃의 꽃잎도, 잎사귀도 전체가 옥처럼 맑고 투명했다.잎은 청색, 연꽃의 중심은 금색을 띠고 있었는데 마치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고 정교한 예술품처럼 아름다웠다.불빛이 비치자 더더욱 투명한 청 빛을 발하며 찬란히 빛났다.“역시 천년 청련이구만. 이건 꼭 가져가야겠어!”빵떡모자 소녀의 눈이 확 밝아지며 생기를 띠었다. 소녀는 방방 뛰며 흥분을 가라앉지 못했다.다른 경매자들도 모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설레는 마음으로 천년 청련을 보고 있었다.“자. 물품은 모두 확인했고 그 가치는 여러분들이 잘 알 거라 믿습니다. 경매 시작 가격은 200억, 매번의 인상 가격은 10억 이상입니다. 지금부터 천년 청련의 경매를 시작합니다!”사회자의 외침과 함께 현장은 순식간에 값을 부르는 사람들로 가득해졌다.“240억!”“260억!”“모두 비키세요, 300억이요!”여기저기서 사람들이 경매에 나서자, 경매는 점점 경쟁처럼 번져갔고 더 많은 부자가 너도나도 참여하기 시작했다.천년 청련 같은 귀한 약재는 값어치가 나간다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었으므로 많은 사람은 수중에 충분한 자금이 준비되어 있었다.누군가 경매에 성공한다면, 그의 경매가격은 처음 시작 가격보다 몇십 배나 불어있을
“선우희재?”소녀의 말에 순식간에 경매장이 소란스러워졌다.모두가 익숙히 들어본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곳 남성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도 과언이 아니다.그는 용국 신시대의 하늘에서 점 찍은 대장군이다. 어려서부터 여러 차례 공을 세워 호풍장군으로 봉해진, 아무나 감히 넘볼 수 없는 자리에 있는 대장군.남성 전체에서 젊은 세대를 이끄는 가장 강한 선두 주자이기도 하다.심지어 어떤 인사들은 그가 앞으로 더 강해질 것이라 주장했다.본디 3대 가문 중 하나인 선우 가문에 이런 천재가 나왔으니.그 지위는 더 말할 것도 없이 하늘로 우뚝 치솟았다.근 몇 년간 아무도 건드릴 엄두도 내지 못한 걸 보아도.그런 가문의 선우영채가 직접 본인의 이름을 말하는 걸 듣고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특히나 약신궁의 긴 셔츠를 입은 남자가 제일 놀란 모습이었다. 보기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약신궁의 지위가 비록 높긴 했으나 그건 무림인들의 세계에서만 해당하는 말이었다. 아무리 약신궁이라 해도 3대 가문 중 하나인 선우네 가문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게다가 이렇게 선우희재가 떡하니 뒤를 봐주고 있으니.“왜 아무 말도 못 하세요? 아까 약신궁의 거만한 태도는 어디 갔어요? 지금도 그 태도로 말씀해 보시지, 왜.” 선우영채가 한껏 경멸하며 비아냥거렸다.어려서부터 좋은 집안에서 부둥부둥 섬겨지며 자란 그녀가 이 세상에 무서운 것이 있겠는가.긴 셔츠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지 않았다.“흥. 못났네.”선우영채가 흥미를 잃은 얼굴로 입을 삐죽였다.“자. 영채 아가씨가 1,600억을 제시했습니다! 더 높은 것이 있습니까?”사회자가 형식적으로 물었다.그는 선우영채가 신분을 말한 순간부터 이 천년 청련이 그녀의 손에 들어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어느 누가 감히 선우 가문과 겨루려 할까.“2,000억 낼게요.”이때 조금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뒤를 돌아보니 조금 살찐 중년 남자가 카드를 높이 들었다.손기태가 아니면
아무리 그녀가 선우 가문의 둘째 아가씨라 할지언정 단숨에 4,000억을 내놓는 것은 이미 한계였다.더 가격이 높아진다면 어쩔 수 없이 집에 도와달라 청해야 했다.“4,200억.”손기태는 아무렇지도 않은 침착한 표정이었다.“5,000억!”선우영채가 이를 악물고 가격을 불렀다. 화가 잔뜩 나 사람을 잡아먹을 기세로.오늘은 돈을 빌리는 한이 있더라도 체면을 구길 수 없다.“5,200억.”손기태가 여전히 담담하게 얼굴에 미소를 띤 채 가격을 불렀다.재물 신이라는 칭호는 결코 그냥 얻은 별명이 아니었다. 이 정도의 돈은 그에게 있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6,000억!”선우영채의 눈이 빨개졌다. 마치 곧 이성을 잃을 사람처럼 얼굴이 일그러졌다.“6,2...”망설임 없이 가격을 부르려던 손기태의 손이 유진우에 의해 내려졌다. “됐습니다. 그만 이 아가씨에게 양보합시다.”“네?”손기태가 영문을 몰라 멍하니 유진우를 쳐다보았다. “유진우 씨, 당신이 필요로 하던 귀한 재료가 아닙니까? 돈 문제라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저에게 맡기시면 됩니다.”“돈 문제가 아닙니다.”유진우가 물건을 주시해 보더니 아쉬운 표정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저 물건은 천년 청련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당신의 말은 저것이 가짜란 말입니까?”손기태가 깜짝 놀랐다. 경매에서 감히 가짜를 파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것은 곧 목숨을 내놓는 것과 마찬가지일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다.“가짜는 아닌 듯합니다만, 천년은 되지 않습니다.”유진우가 고개를 저었다. “방금 자세히 보았습니다. 비록 이 청련은 나름 오래되었지만 900년밖에 안 된 듯합니다. 아직 100년의 성숙기가 남아있습니다.”900년 청련과 천년 청련은 고장 100년의 차이였지만 약효는 하늘과 땅의 차이였다.수명단을 정제하는 데는 단 한 번의 기회만 있을뿐더러 한 치의 오차여도 아예 다른 약을 만들어 내게 되기에 청련의 성숙기는 몹시 중요한 것이었다.천년 청련은 말 그대로 값조차
‘귀한 물건이다.'루비를 보았을 때 유진우는 정신이 확 돌아왔다.헛걸음을 한 줄 알았는데 마지막에 이렇게 진귀한 보물을 보게 되다니.“흥. 역시 촌놈은 촌놈이야. 고작 루비 원석 하나 가지고 놀라기는.”유진우가 깜짝 놀라는 것을 본 옆의 선우영채의 얼굴에 한껏 멸시하는 표정이 내비쳤다.“이런 물건이야 우리 집에는 셀 수도 없이 많지요. 당신들처럼 세상 모르는 촌놈들이야 신기하겠지만요.”유진우는 소녀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단상 위의 루비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보석은 피 같은 투명한 암홍색 빛을 띠었고 모양은 흡사 조롱박 같았다.겉으로 보기에는 그다지 놀랍지 않은 모양새이지만 보석의 크기가 크기에 절단하고 연마하고 가공을 거친다면 그 가치가 결코 넘볼 수 없을 것이었다.보석상에게 이 루비는 절대적으로 가장 탐나는 물건일 것이다.“유진우 씨, 이 물건이 마음에 드십니까?” 손기태는 조금 의문스러웠다.그가 알기로 유진우의 재력으로 값비싼 진주와 보석은 부족하지 않기 때문이다.그저 루비 원석일 뿐, 귀중하다고는 하나 이 정도로 흥분할 정도는 아니었다.“이 루비는 제가 가져야겠습니다.”유진우의 대답은 간단하면서도 확고했다.“그래요! 유진우 씨가 좋아한다면 제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가져야지요!” 손기태는 손이 크고 담대했다.모처럼 한번 환심을 살 기회가 생겼으니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루비를 얻어내야만 했다.“이 보석은 깊은 바다에서 건져낸 것으로 몹시 희귀한 것입니다. 경매 시작 가격은 100억이며 매번 인상 가격은 2억이상입니다.”“자. 이제 경매를 시작합니다!”사회자가 간단한 소개를 끝으로 경매 시작을 선포했다.순식간에 장내의 분위기가 다시금 끓어올랐다.“110억 낼게요.”“120억이요.”“136억 낼게요.”내로라하는 금수저들이 잇달아 카드를 들고 경쟁하기 시작했다.이렇게 큰 루비는 어림잡아 추정해도 적어도 400, 600억의 가치가 있어야 한다.당연히 상인으로서의 손기태도 그 가치를 알고 있었다.그는 다른 말
“사철수 씨, 아직도 멍하니 서서 뭐 하는 거예요? 사진이라도 찍어줘요? 빨리 보물 지도를 찾아내세요.”불만으로 꼴 독 찼던 유태범은 못마땅한 얼굴로 사철수에게 화풀이했다.“알겠어요. 서두를게요.”유태범의 말에 사철수는 즉시 합금으로 되어 있는 대문 앞으로 다가가 채원진의 부러진 손을 들어 중간 부분에 있는 감응 위치를 살짝 눌렀다.띵 하는 소리와 함께 두터운 대문이 천천히 안쪽으로 열리자, 금속으로 만든 금고가 드러났다.금고는 약 33제곱미터 정도의 크기였고 한가운데에는 골드바가 사람의 키보다 더 높게 쌓여 있었다.골드바 외에도 그 주변에는 다양하면서도 진기한 보물들이 빽빽하게 배치되어 있었는데 하나같이 비싸고 귀중한 물건들이었다.“이곳은 채원진의 개인 금고예요. 채원진은 마음에 드는 모든 물건을 전부 이곳에 수집했어요.”사철수가 설명했다.“보물들이 어마어마하네요.”유천우는 사방을 둘러보며 감탄했다.“이것들을 전부 가지고 나가면 성을 하나 사고도 남겠네요.”“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호룡각의 다른 세 보물 창고에 비하면 눈앞에 있는 것들은 새 발의 피죠.”사철수가 설명했다.“정말이에요?”유천우는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당신 말대로라면 호룡각의 보물을 전부 모으면 산더미가 되겠는데요?”“제가 직접 본건 아니지만 수십 년 동안 쌓아왔으니, 산더미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거예요.”사철수는 진지하게 말했다.“좋아요. 아주 좋아요! 빨리 모든 보물을 긁어모으고 싶네요.”유천우는 정신이 번쩍 들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보물 지도는 도대체 어디 있는 거예요?”유태범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여기 있어요.”사철수는 맨 안쪽 선반으로 가서 위에 놓여있는 정교한 박달나무 상자를 꺼내 조심스럽게 유진우에게 건넸다.유진우가 열어보니 안에는 양피지 3장이 들어있었다. 모든 양피지에는 상세한 지도가 그려져 있었고 지도 중앙에는 보물 창고의 위치가 금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보물 지도가 진짜라면, 지도에 그려져 있는
“보물 지도는 어디 있나요?”유진우가 추궁했다.“채원진의 지하 밀실에 있어요. 내가 직접 세자 전하를 모시지요.”사철수가 말했다.“지하 밀실?”유천우는 실눈을 뜨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혹시 속으로 다른 꿍꿍이를 꾸미는 건 아니죠? 나중에 나를 악랄하다고 탓하기 싫으면 그런 생각은 빨리 접는 게 좋을 거예요.”밀실 같은 건물에는 함정과 암기가 많이 설치되어 있는데 유천우는 사철수가 다른 속셈이 있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웠다.“저는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아닙니까.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사철수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앞서서 안내하세요.”유진우가 두 근위병에게 눈치를 주자 근위병 두 명이 와서 사철수를 일으켜 세웠다.“잠깐만요. 밀실에 있는 보물 상자를 열려면 채원진의 손이 필요해요.”사철수가 갑자기 말했다.“그건 쉽죠.”유천우는 즉시 칼을 빼 들어 채원진의 오른손을 잘라 사철수에게 건네며 말했다.“자. 선물이에요.”사철수는 징그러웠지만 아무 말도 못 하고 채원진의 손을 받아 들고 앞장섰다.유진우와 몇몇 사람은 사철수를 따라 기지로 들어갔고 마침내 지휘실 입구까지 도착했다.사철수는 문을 열고 벽 쪽으로 다가간 다음 벽에 걸려 있는 그림 하나를 떼어냈다.그림 뒤에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전혀 알아차리기 어려운 하나의 버튼이 있었다.사철수가 손을 내밀어 버튼을 누르자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벽 전체가 갑자기 양쪽으로 열리더니 안에 있던 엘리베이터가 드러났다.사철수가 유진우를 포함한 몇 명을 데리고 엘리베이터로 올라탄 뒤 스위치를 누르자 문이 닫히더니 천천히 지하로 내려갔다.반 시간 남짓 지나자 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췄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유진우와 몇 명 사람들의 눈에는 넓고 호화로운 지하 밀실이 들어왔다.말이 밀실이지 사실 호화 저택에 가까웠다. 안에는 없는 것 없이 다양한 생활 시설이 모두 갖춰져 있었고, 많은 물과 식량도 수집되어 있었는데 수십 년 동안 혼자 생활하기에는 충분한 수량이었다.“핵 방지
“유진우?”무릎을 꿇은 채 냉정한 표정을 한 유진우를 바라보는 사철수의 얼굴은 매우 복잡해 보였다. 놀라움과 기쁨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미안함과 죄책감이 더욱 컸다.흑용군이 매복되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사철수는 이미 호룡각의 대세가 기울었음을 알아차렸다.아니나 다를까 호룡각의 기지는 파괴되었고 채원진은 목숨을 잃었으며 사철수는 유진우한테 체포되었다. 하지만 사철수는 어쩌면 이게 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비록 사철수가 호룡각의 사람이긴 했지만, 서경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서경은 이미 사철수한테는 고향 같은 곳이었고 주변에 가족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아주 많았다.사철수가 저질렀던 많은 일들은 어쩔 수 없이 억지로 했던 거라 마음이 늘 불편했었다.오늘,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도 모두 사철수의 업보였고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이였다.“아저씨,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죠? 채원진이 패했으니, 당신도 패한 것과 마찬가지예요. 이제 와서 더 할말이 남았나요?”유진우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이기면 영웅이고 지면 도적이 되는 법이지요. 세자 전하께서 죽이시든 벌을 주든 저는 다 괜찮습니다. 다만 무고한 사람에게 해를 가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사철수는 간절한 마음으로 간청했다.“당신이 지금 나한테 그런 조건을 내세울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세요?”유진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세자 전하, 죄인인 저는 죽어도 마땅합니다. 하지만 제 아내와 딸은 죄가 없지 않습니까? 그들은 용서해 주십시오.”사철수는 허리를 굽혀 땅바닥에 머리를 세게 박으며 유진우에게 절을 올렸다.“당신 말대로 그들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죠. 하지만 못난 남편과 아비 때문에 그들도 죄인이 된 겁니다. 설마 당신은 어리석게도 그렇게 큰 죄를 지어 놓고 가족은 아무 일 없이 무사할 거로 생각한 겁니까?”유진우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세자 전하, 공을 세우는 거로 저의 죄를 보상하면 안 될까요? 세자 전하께서 소가 되라면 소가 될 것이고 말이 되라면 말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때 조무진이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조무진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눈길을 돌리자 완전 무장을 한 군부가 보였는데 족히 수만 명은 되는 것 같았다.검은 갑옷을 입고 긴 칼을 허리에 찬 병사들은 기세가 매우 위풍당당했다.얼핏 보면 마치 강철로 되어 있는 호수 같았는데 멀리서부터 강한 압박감을 주는 이 부대는 바로 서경의 최강 정예 부대 흑용군이었다.“보아하니 사철수는 이미 체포된 것 같네요.”이청성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이 흥용군의 리더는 바로 유천우였다.당시 유천우는 명령에 따라 천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포위망을 뚫고 들어가 호룡각의 정예 부대를 미리 파놓은 함정에 빠지게 만든 뒤 절대적인 병력 우세로 오천여 명의 적을 죽이고 나머지는 모두 포로로 체포했다.쿵 쿵 쿵!수만 명의 흑용군이 가까워질수록 그 압박감은 점점 더 강해졌다. 성벽 위에 있던 백호군들도 겁에 질려 얼굴이 창백해졌다.소문에 의하면 흑용군은 용국의 최강 군부로서 창시 이래 백전백승을 이뤘고 여러 차례 뛰어난 공을 세웠으며 어떠한 군부도 흑용군과 정면으로 맞서 싸울 수 없다고 했다.이렇게 직접 눈으로 보니 그 소문은 거짓이 아닌듯했다. 흑용군의 강렬함과 살벌함은 충분히 다른 군부를 경시할 만했다.“형! 임무를 완성했어요. 호룡각의 남은 사람은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잡아들였어요.”유천우가 먼저 앞으로 다가와 보고했다.“잘했어.”유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이쪽은 어떻게 됐어요? 채원진은 죽었어요?”유천우는 여기저기 둘러보며 말했다.“머리가 잘렸는데 살아있을 리가 없잖아?”조무진은 발로 채원진의 머리를 슬쩍 건드리며 말했다.채원진의 머리는 축구공처럼 땅바닥에서 굴러 유천우의 발밑에 멈추었다.“뭐야! 이렇게 못생겼다고? 어쩐지 맨날 가면을 쓰고 다니더라니.”유천우는 바닥에 침을 뱉었다. 자신의 아버지를 암살하고 서경을 해친 놈을 미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채원진은 이미 죽었고 밑에 있던 정예들은 모두 체포되었으니, 호룡각은 이제 완전히 멸망한 셈이에요.
채원진은 죽고 호룡각 기지는 함락되었다. 이로써 호룡각은 조직 전체가 완전히 멸망했고 남은 사람이라고는 흩어져 있는 병사들뿐이라 크게 위험이 되지는 않았다.하지만 유진우는 방심하지 않고 호룡각이 관련된 모든 사람은 전부 체포하라고 명을 내렸다. 만약 그들이 자진해서 항복한다면 죽음을 면할 수 있지만 끝까지 저항한다면 남은길은 죽음뿐이었다.“형, 드디어 이 재앙 같았던 놈을 처리했네. 축하해!”조무진은 앞으로 걸어가 채원진의 시신을 발로 차 완전히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미소를 지었다.“다 네 덕분이야. 네가 20만 명의 백호군을 데리고 채원진의 퇴로를 끊어놓지 않았다면 채원진은 또 다른 기회를 찾아 연명했을지도 몰라.”유진우가 말했다. 그는 채원진을 죽이기 위해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 걸었다. 결국 채원진은 죽었고 그는 승리했다.“난 별로 한 게 없어. 고마워할 거면 공주마마께 고마워해야지.”조무진은 고개를 돌려 뒤에 서있는 이청성을 보며 미소를 짓고 말했다.“공주마마께서 형을 돕는다고 엄청 바쁘셨어. 한순간도 긴장을 놓지 않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독촉하느라 발등에 불이 붙을 뻔했다니까.”“조무진 씨!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예요?”이청성은 앞으로 걸어 나오며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별거 아니에요. 공주마마께서 학식과 도리가 깊고 외모와 지혜가 뛰어나다고 칭찬하고 있었어요.”조무진은 아첨하며 웃음을 지었다.“흥!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하네요.”이청성은 조무진을 흘겨보며 말했다.“공주마마, 감사합니다.”유진우는 공수하며 말했다.“뭘 그렇게 예의를 갖춰요? 도와주기로 했으니까, 끝까지 도와줬을 뿐이에요.”이청성은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게다가 채원진은 우리 공공의 적이잖아요. 유진우 씨뿐만 아니라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해요. 전체적으로 보면 백성을 위해 나쁜 놈을 제거 한 거죠.”“공주마마의 대의가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유진우가 웃으며 말했다.“이 얘기는 그만하죠. 비록 채원진이 죽었다고 하
반면 채원진은 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서 십여 미터나 날아가 끊임없이 피를 토했다. 팔 전체가 파열되었고 용담적염창도 튕겨 나갔으며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채 바닥에 누워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도련님, 괜찮으십니까?”홍복홍은 재빨리 달려가 떨고 있는 유진우를 부축했다.“괜찮아요.”유진우는 몸에 기혈이 들끓고 팔이 저리고 검도 제대로 잡지 못할 것 같았다.비록 채원진이 중상을 입기는 했지만 방금 전력으로 내뿜은 일격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힘이었고 결국 유진우도 피를 토하고 말았다.채원진의 몸에 있는 멸신독이 퍼지지 않았다면 오늘 그를 제압하지 못했을 것이다.“왜? 이럴 수 없어. 절대 이럴 수는 없어...”땅에 엎드려 맥 빠진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는 채원진의 두 손은 긴 손가락 자국을 남긴 채 땅바닥에 푹 꺼져 있었다.안 그래도 흉측하던 얼굴이 더욱 흉측해 보였다.“남길 유언이라도 있나?”유진우는 창궁검을 손에 들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 채원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한 세대의 효웅이었던 채원진은 마치 죽음을 앞둔 늙은 개처럼 낭패와 처참함 그리고 빨리 죽기 위해 발악하는 듯한 모습도 보이는 것 같았다.“유진우! 이 비열한 새끼야! 네가 이런 모함을 꾸미지 않았다면 내가 패할 가능성은 절대 없었고 이 지경까지 되지도 않았을 거야. 인정 못 해. 죽어도 인정 못 해!”채원진은 미친 사람처럼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그의 상대는 용국의 지존인 서경 왕 유만수처럼 천하를 뒤흔든 거물이었는데, 젖비린내 나는 아이들 몇 명에게 패했다는 사실을 채원진은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비열?”유진우는 콧방귀를 뀌고 말을 이었다.“이런 단어가 네 입에서 나오니까 정말 어이없구나. 사람을 시켜서 내 아버지를 암살하고 이간질로 삼촌을 유혹하여 반역을 도모해 서경을 혼란에 빠뜨리고. 네가 했던 일 중에 어느 하나 비열하지 않은 일이 없어. 죽을 때가 되니 이제 와서 도리를 따지는 거야? 쪽팔리지도 않아? 그리고 네가 인정하든 못하든 난
“채원진, 나라와 백성을 해친 네 죄가 극악무도하니 인제 그만 포기하고 꼼짝 말거라. 반항한다면 사살할 것이다.”이청성은 손에 황권을 상징하는 금색 영패를 쥔 채 차가우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이청성이 이번에 유진우를 따라 서경에 온 이유는 바로 호룡각에 남아있는 잔당을 대처하기 위해서였고 여러 가지 경우를 대비해 많은 준비를 해두었다.병력을 이동하라는 칙령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이성민이 직접 내린 거였고 그 덕분에 20만 명의 백호군을 움직여 이번 작전에 성공할 수 있었다.“왜? 왜 이런 일이 생긴 거지?”이청성을 본 채원진은 절망하는 얼굴로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고 그의 입과 코에서는 검붉은 피가 더욱 많이 흘러내렸다.“채원진, 넌 이제 끝났어. 판을 뒤집을 가능성은 절대 없으니 그만 포기해. 오늘이 지나면 호룡각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어둠 속에 숨어 살던 추악한 놈들은 자기가 했던 행동에 책임지고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유진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야! 난 아직 패한 거 아니야! 절대 그럴 수 없어!”채원진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내가 이 자리까지 어떻게 올라왔는데? 이제 겨우 천하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너희 같은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들 때문에 무너질 거 같아?”오랜 세월을 참고 견뎌 호룡각의 각주가 된 채원진은 이제 곧 막강한 권세를 누릴 줄 알았는데, 겨우 며칠도 안 돼 큰 타격을 입고 궁지까지 내몰리고 말았다.채원진은 단념할 수 없었다. 이렇게 어린 녀석들을 감당하지 못해 실패하고 죽는다는 게 달통 되지 않았다.“채원진, 아직도 모르겠어?”조무진은 담담하게 말했다.“용맥이 잘려서 사라질 때부터 호룡각 말살은 시작된 거야. 그때 너희들은 이미 대세와 기운을 잃었어. 만약 너희들이 어둠 속에 숨어서 연명한다면 몇 년 더 살 수는 있겠지만 그런 탐욕은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러니까 서경왕부를 건드릴 생각은 하지 말았어야지. 그 결정을 내리는 순간부터 넌 이미
“무슨 헛소리야! 호룡각의 사람이 아니면, 서경왕부의 사람이라도 된다는 거야?”채원진은 눈이 시뻘게져 소리쳤다.“맞아. 내 사람들이야.”유진우는 솔직하게 대답했다.“네가 부대를 이끌고 우리를 매복시키려 할 때 내 병마들은 그 허점을 틈타 이미 너의 기지를 점령했어. 그러니까 이제 이곳은 내 소유야.”“유장혁! 그런 헛소리를 내가 믿을 거 같아?”채원진은 험악한 얼굴로 소리쳤다.“아무리 내가 많은 정예병들을 데리고 나갔다고 하지만, 기지 내에 적어도 3만 명의 병마가 있었고 각종 방어 조치까지 더해져 10만 명 이상의 병력이 없다면 감히 공격도 못해. 서경의 흑용군은 모두 내 감시하에 있었는데 만약 10만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했다면 내가 몰랐을 리가 없잖아.”“누가 그래? 내가 흑용군을 호출했다고?”유진우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네가 생각하는 걸 나라고 생각 못 할 것 같아? 너의 잔당들을 토벌하기 위해 이번에 특별히 지원군들을 불렀지.”어젯밤, 유천우한테 최대한 빠른 속도로 서신을 전하게 한 이유가 바로 구원병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구원병이 제때 도착해 유진우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될 수 있었다.“지원병? 무슨 지원병?”채원진은 왠지 불안한 마음에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서경과 가장 가까운 부대는 서남 지역에 있는 백호군이고, 백호군의 사령관은 전쟁의 신 조무진이야. 그런데 공교롭게도 조무진은 나와 아주 친한 사이라 도움을 좀 받았지.”유진우의 담담한 대답에 채원진은 못 믿겠다는 듯 미친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백호군? 조무진? 그럴 리가 없어. 헛소리 하지 마!”“못 믿겠으면 뒤돌아봐.”유진우는 설명 대신 채원진의 뒤를 보며 턱을 치켜들었다.뭔가를 느낀 듯한 채원진이 뒤를 돌아보니 성벽의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은색 갑옷을 입은 준수한 외모의 한 젊은 남자가 정예 장병들과 함께 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젊은 남자는 다름 아닌 전쟁의 신 조무진이었다.“채원진, 어때? 이제 현실이 좀 받아들여져
“거의 거의 다 왔어. 곧 도착이야.”채원진은 정혈을 끌어 연소시키며 겨우 도망쳤다. 도중에 끊임없이 피를 토했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었다.한바탕 전력 질주 끝에 드디어 채원진의 눈에는 기지 앞의 높은 성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 성벽만 넘으면 그는 안전할 수 있었다.채원진은 기지 안에 많은 영단 묘약이 있으니, 그의 독을 치료할 약이 기필코 있을 거로 생각하며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성문을 열어라! 어서 빨리 성문을 열어!”성벽 지하까지 돌진한 채원진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고 비틀거리며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 얼굴은 짙은 보라색으로 변해있었고 입과 코에서는 여전히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슝 슝 슝.채원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벽 위에서 갑자기 팔뚝 굵기의 쇠뇌가 몇 대 발사되었는데 10만여 근의 힘을 숨기고 있는 쇠뇌의 위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놀란 채원진은 재빨리 몸을 피했다.팡 팡 팡.몇 대의 쇠뇌는 채원진의 눈앞에 떨어지며 엄청난 위력과 함께 뒤쪽 끝을 조금 남긴 채 반이 넘게 땅바닥 깊이 박혀 들어가며 굉음을 냈다.“야! 너희들 미쳤어? 나 호룡각의 객주야! 눈 똑바로 뜨고 잘 봐!”채원진이 성벽을 향해 소리를 질렀지만, 성벽 위에 있던 병사들은 오히려 듣는 척도 하지 않고 무기를 들어 채원진에게 겨누었다.각종 중화력 무기도 가동되었고 수많은 포구와 총구가 동시에 성벽 아래에 있는 채원진을 겨누었다.누군가의 명령이 내려지기만 하면 채원진은 그 자리에서 산산조각이 날 수도 있었다.“눈은 멋으로 붙이고 다니는 거야? 나도 못 알아봐? 당장 성문을 열어! 안 그러면 전부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화가 치밀어 오른 채원진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되려 집 문 앞에서 막힐 줄이야.‘이 녀석들, 도대체 무슨 수작인 거야?’채원진이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채원진, 너한테 남은 건 죽음뿐이야.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면 고통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