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아가 눈살을 찌푸렸다.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기 때문에.2,000억의 유동자금이라... 이것은 강능의 내로라하는 금수저들도 쉽게 내놓을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투자를 받아내지 못하면 현명한 청아는 당연히 스스로 회장 자리에서 물러나야겠지? 그룹에 걸림돌이 되면 안 되니까.”오금란이 한쪽 입꼬리를 쓱 올리며 싸늘하게 웃었다.2,000억의 투자는 족장의 요구가 아니라 그녀가 설치한 덫이었다.외부인이 회장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절대 두고 볼 수 없는 그녀였다. 그녀는 기어코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트집을 잡아내 물러나게 할 셈이었다.그때면 족장이 묻는다 해도 합리적인 이유를 댈 수 있을 것이다.“왜 대답을 안 해. 설마 이런 작은 일도 못 하면서 회장 자리를 넘보는 건 아니지?” 오금란이 비꼬며 코웃음 쳤다.“네가 못하겠다면 그 회장 자리엔 내가 앉으면 되겠네.” 이서우가 고개를 쳐들며 비아냥거린다.2,000억의 자금, 그녀의 인맥으로 못 할 일도 아니었다. 그녀가 도움을 청한다면 할머니께서도 발 벗고 나설 것이었기 때문에.“누가 못한다고 했나요? 고작 2,000억인걸, 3일이면 모을 수 있어요.” 이때 유진우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3일? 미쳤어?!”장경화는 하마터면 펄쩍 뛸 뻔했다. “이렇게 큰돈을 3일 내로 어떻게 모아? 30일이면 몰라도. 아니, 30일이어도 간당간당한데!”“진우 씨. 고작 3일 이내에 내가 어딜 가서 그 많은 돈을 얻겠어?”이청아도 눈살을 찌푸렸다.2,000억의 투자자금을 모으는 것은 온 투자시장을 통틀어서도 손에 꼽을만한 어려운 일이었다.그리고 앞으로 3일뿐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괜찮아, 나한테 맡겨. 할 수 있어.” 유진우가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그래. 그렇다고 하니 3일 주지.”오금란의 눈이 반짝였다. “하하. 어리석네. 3일 이내에 모으지 못한다면 모두 제 발로 우리 그룹을 나가야 할 거야.”말을 마치고 그녀는 지팡이를 짚고 붙잡을 틈도 없이 떠나버렸다. 다
이 씨네 별장을 나간 유진우가 폰을 꺼내 막 전화하려 할 때 갑자기 벨 소리가 울렸다.화면에는 ‘손기태’ 가 떠 있었다.“네, 손 회장님. 방금 찾으러 가려고 했는데, 먼저 전화해 주실 줄은 몰랐어요.” 유진우가 전화를 받으며 공손히 말했다.“진우 씨가 저를 찾는다고요. 부탁할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손기태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네. 맞습니다. 제 친구에게 어려움이 생겨서 급히 자금이 필요합니다. 혹시 손 회장님께 빌릴 수 있을까 해서요.”유진우가 물었다.“하하!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돈을 빌리는 거라면 문제없죠. 제가 다른 건 없어도 돈은 넘쳐나거든요. 얼마나 필요합니까?” 손기태가 긴장을 풀고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2,000억입니다.”“어렵지 않죠. 내일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진우 씨, 왜 이렇게 딱딱하게 구는겁니까. 의사 선생님께서 제 고질병을 치료해 주신 후로 제가 얼마나 감사하며 살고 있는데요.”“축하합니다... 아, 방금 전화한 건 무슨 일이었어요?” 유진우가 화제를 전환했다.“선생님께서 전에 귀한 약재들을 주의해 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방금 소식을 들었는데 영천에 최근 몇 가지 약재가 나왔답니다. 그런데 그중에 진우 씨가 원하던 천년 청련이 있다지 뭡니까.” 손기태가 벅찬 듯이 한숨에 말했다.“천년 청련이 확실합니까?” 유진우가 다급히 물었다.수명단을 만드는 데에 세 가지 재료 중 최상품의 영약만 부족했다.이 세 가지 영약은 각각 혈정화, 칠색 영지, 그리고 천년 청련이었다.하나하나가 모두 진귀한 것으로서 극히 희귀한 약재들이었다.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천년 청련의 소식을 듣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큰 행운이고 기쁨이었다.“가짜는 아닐 겁니다. 약신궁의 사람들도 모두 나섰다고 하니. 하지만 경매는 늘 이런 식으로 입소문을 타는 법이니 구체적인 상황은 가봐야 압니다.” 손기태가 자신의 추측을 알려주었다.“알겠습니다. 그럼 손
“허! 안 믿네? 그럼 두고 보시든가.”빵떡모자 소녀는 둘을 아니꼽게 보면서 입을 삐죽거린다.이에 둘은 그저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시간이 일분일초 흘러갔고 경매는 점차 막바지에 이르렀다. 일부 값이 나가는 물건들이 하나하나 나왔다.드디어 많고 많은 사람이 꿈에도 그리던 천년 청련이 모습을 드러냈다.“게스트 여러분, 다음으로 경매에 내놓을 물건은 바로바로, 이 최상품 영약입니다! 희귀하고 진귀하기로 소문난 이 영약! 세계에서도 보기가 드물다고 하는데요! 오늘날까지 천년이나 살아온 영약이죠! 이름하여... 천년 청련!”사회자가 손을 흔들자 직원들이 조심스럽게 박달나무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뚜껑을 여니 안에는 푸른빛을 띠는 연꽃 한 송이가 정중앙에 놓여 있었다.연꽃의 꽃잎도, 잎사귀도 전체가 옥처럼 맑고 투명했다.잎은 청색, 연꽃의 중심은 금색을 띠고 있었는데 마치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고 정교한 예술품처럼 아름다웠다.불빛이 비치자 더더욱 투명한 청 빛을 발하며 찬란히 빛났다.“역시 천년 청련이구만. 이건 꼭 가져가야겠어!”빵떡모자 소녀의 눈이 확 밝아지며 생기를 띠었다. 소녀는 방방 뛰며 흥분을 가라앉지 못했다.다른 경매자들도 모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설레는 마음으로 천년 청련을 보고 있었다.“자. 물품은 모두 확인했고 그 가치는 여러분들이 잘 알 거라 믿습니다. 경매 시작 가격은 200억, 매번의 인상 가격은 10억 이상입니다. 지금부터 천년 청련의 경매를 시작합니다!”사회자의 외침과 함께 현장은 순식간에 값을 부르는 사람들로 가득해졌다.“240억!”“260억!”“모두 비키세요, 300억이요!”여기저기서 사람들이 경매에 나서자, 경매는 점점 경쟁처럼 번져갔고 더 많은 부자가 너도나도 참여하기 시작했다.천년 청련 같은 귀한 약재는 값어치가 나간다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었으므로 많은 사람은 수중에 충분한 자금이 준비되어 있었다.누군가 경매에 성공한다면, 그의 경매가격은 처음 시작 가격보다 몇십 배나 불어있을
“선우희재?”소녀의 말에 순식간에 경매장이 소란스러워졌다.모두가 익숙히 들어본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곳 남성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도 과언이 아니다.그는 용국 신시대의 하늘에서 점 찍은 대장군이다. 어려서부터 여러 차례 공을 세워 호풍장군으로 봉해진, 아무나 감히 넘볼 수 없는 자리에 있는 대장군.남성 전체에서 젊은 세대를 이끄는 가장 강한 선두 주자이기도 하다.심지어 어떤 인사들은 그가 앞으로 더 강해질 것이라 주장했다.본디 3대 가문 중 하나인 선우 가문에 이런 천재가 나왔으니.그 지위는 더 말할 것도 없이 하늘로 우뚝 치솟았다.근 몇 년간 아무도 건드릴 엄두도 내지 못한 걸 보아도.그런 가문의 선우영채가 직접 본인의 이름을 말하는 걸 듣고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특히나 약신궁의 긴 셔츠를 입은 남자가 제일 놀란 모습이었다. 보기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약신궁의 지위가 비록 높긴 했으나 그건 무림인들의 세계에서만 해당하는 말이었다. 아무리 약신궁이라 해도 3대 가문 중 하나인 선우네 가문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게다가 이렇게 선우희재가 떡하니 뒤를 봐주고 있으니.“왜 아무 말도 못 하세요? 아까 약신궁의 거만한 태도는 어디 갔어요? 지금도 그 태도로 말씀해 보시지, 왜.” 선우영채가 한껏 경멸하며 비아냥거렸다.어려서부터 좋은 집안에서 부둥부둥 섬겨지며 자란 그녀가 이 세상에 무서운 것이 있겠는가.긴 셔츠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지 않았다.“흥. 못났네.”선우영채가 흥미를 잃은 얼굴로 입을 삐죽였다.“자. 영채 아가씨가 1,600억을 제시했습니다! 더 높은 것이 있습니까?”사회자가 형식적으로 물었다.그는 선우영채가 신분을 말한 순간부터 이 천년 청련이 그녀의 손에 들어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어느 누가 감히 선우 가문과 겨루려 할까.“2,000억 낼게요.”이때 조금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뒤를 돌아보니 조금 살찐 중년 남자가 카드를 높이 들었다.손기태가 아니면
아무리 그녀가 선우 가문의 둘째 아가씨라 할지언정 단숨에 4,000억을 내놓는 것은 이미 한계였다.더 가격이 높아진다면 어쩔 수 없이 집에 도와달라 청해야 했다.“4,200억.”손기태는 아무렇지도 않은 침착한 표정이었다.“5,000억!”선우영채가 이를 악물고 가격을 불렀다. 화가 잔뜩 나 사람을 잡아먹을 기세로.오늘은 돈을 빌리는 한이 있더라도 체면을 구길 수 없다.“5,200억.”손기태가 여전히 담담하게 얼굴에 미소를 띤 채 가격을 불렀다.재물 신이라는 칭호는 결코 그냥 얻은 별명이 아니었다. 이 정도의 돈은 그에게 있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6,000억!”선우영채의 눈이 빨개졌다. 마치 곧 이성을 잃을 사람처럼 얼굴이 일그러졌다.“6,2...”망설임 없이 가격을 부르려던 손기태의 손이 유진우에 의해 내려졌다. “됐습니다. 그만 이 아가씨에게 양보합시다.”“네?”손기태가 영문을 몰라 멍하니 유진우를 쳐다보았다. “유진우 씨, 당신이 필요로 하던 귀한 재료가 아닙니까? 돈 문제라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저에게 맡기시면 됩니다.”“돈 문제가 아닙니다.”유진우가 물건을 주시해 보더니 아쉬운 표정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저 물건은 천년 청련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당신의 말은 저것이 가짜란 말입니까?”손기태가 깜짝 놀랐다. 경매에서 감히 가짜를 파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것은 곧 목숨을 내놓는 것과 마찬가지일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다.“가짜는 아닌 듯합니다만, 천년은 되지 않습니다.”유진우가 고개를 저었다. “방금 자세히 보았습니다. 비록 이 청련은 나름 오래되었지만 900년밖에 안 된 듯합니다. 아직 100년의 성숙기가 남아있습니다.”900년 청련과 천년 청련은 고장 100년의 차이였지만 약효는 하늘과 땅의 차이였다.수명단을 정제하는 데는 단 한 번의 기회만 있을뿐더러 한 치의 오차여도 아예 다른 약을 만들어 내게 되기에 청련의 성숙기는 몹시 중요한 것이었다.천년 청련은 말 그대로 값조차
‘귀한 물건이다.'루비를 보았을 때 유진우는 정신이 확 돌아왔다.헛걸음을 한 줄 알았는데 마지막에 이렇게 진귀한 보물을 보게 되다니.“흥. 역시 촌놈은 촌놈이야. 고작 루비 원석 하나 가지고 놀라기는.”유진우가 깜짝 놀라는 것을 본 옆의 선우영채의 얼굴에 한껏 멸시하는 표정이 내비쳤다.“이런 물건이야 우리 집에는 셀 수도 없이 많지요. 당신들처럼 세상 모르는 촌놈들이야 신기하겠지만요.”유진우는 소녀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단상 위의 루비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보석은 피 같은 투명한 암홍색 빛을 띠었고 모양은 흡사 조롱박 같았다.겉으로 보기에는 그다지 놀랍지 않은 모양새이지만 보석의 크기가 크기에 절단하고 연마하고 가공을 거친다면 그 가치가 결코 넘볼 수 없을 것이었다.보석상에게 이 루비는 절대적으로 가장 탐나는 물건일 것이다.“유진우 씨, 이 물건이 마음에 드십니까?” 손기태는 조금 의문스러웠다.그가 알기로 유진우의 재력으로 값비싼 진주와 보석은 부족하지 않기 때문이다.그저 루비 원석일 뿐, 귀중하다고는 하나 이 정도로 흥분할 정도는 아니었다.“이 루비는 제가 가져야겠습니다.”유진우의 대답은 간단하면서도 확고했다.“그래요! 유진우 씨가 좋아한다면 제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가져야지요!” 손기태는 손이 크고 담대했다.모처럼 한번 환심을 살 기회가 생겼으니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루비를 얻어내야만 했다.“이 보석은 깊은 바다에서 건져낸 것으로 몹시 희귀한 것입니다. 경매 시작 가격은 100억이며 매번 인상 가격은 2억이상입니다.”“자. 이제 경매를 시작합니다!”사회자가 간단한 소개를 끝으로 경매 시작을 선포했다.순식간에 장내의 분위기가 다시금 끓어올랐다.“110억 낼게요.”“120억이요.”“136억 낼게요.”내로라하는 금수저들이 잇달아 카드를 들고 경쟁하기 시작했다.이렇게 큰 루비는 어림잡아 추정해도 적어도 400, 600억의 가치가 있어야 한다.당연히 상인으로서의 손기태도 그 가치를 알고 있었다.그는 다른 말
손기태는 계속하여 가격을 올렸다.“2,000억.”선우영채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그녀의 의도대로 루비의 가격은 끝끝내 2,000억을 돌파했다. 이미 보석 본연의 가치를 훨씬 초과하여 이대로 산다면 큰 손해였다.“보아하니 둘의 경쟁이 시작됐나 보네요.”“선우 가문의 아가씨께 미움을 샀으니... 손기태가 오늘은 아마 피를 보게 될 것 같습니다.”“그저 토박이 부자 아닙니까? 무슨 배짱으로 문벌과 돈 겨루기를 하겠습니까.”군중들이 손기태의 신분에 대해 지적하며 의견이 분분했다. 모두 이 보기 드문 광경을 즐기는 모습이다.“3,000억.”손기태가 다시 한번 카드를 들고 단숨에 천억을 추가했다.“3,200억.”선우영채가 질세라 맞받아쳤다.“4,000억이요!”손기태가 담담하게 말했다. “선우 아가씨, 더 부른다면 이제 양보하겠습니다.”이 말이 나오자 방금까지 카드를 들려던 선우영채가 멈칫했다.당연히 그녀는 이 루비에 대해 아무런 흥미가 없었다.너무 높이 불렀다가 실수로 손에 들어오게 된다면 그건 돌을 들어 제 발등을 깨는 격이었다.즐길 것은 다 즐겼으니, 이제는 손 놓는 것이 올바른 선택일 것이다.“됐어요, 그럼. 당신들이 이토록 보석을 좋아한다는데 너그럽게 양보해 줄게요.” 선우영채가 희롱하며 웃었다.고작 400, 600억 원어치의 보석을 그녀는 억지로 4,000억으로 올려 상대에게 10배의 대가를 치르게 한 것이었다.이제 그녀는 자신의 불만을 모두 푼 셈이다.“손 선생이 4,000억을 제시했습니다. 더 높은 것이 있습니까?”“4,000억. 3, 2, 1... 낙찰!”사회자가 나무망치로 세 번 두드렸다. 루비는 손기태에 의해 4,000억의 가격으로 낙찰되었다.물건을 가진 후, 선우영채가 비꼬았다. “하하... 당신들이 벼락부자라더니 정말 식견은 하나도 없는 모양이네요. 400, 600억밖에 하지 않는 물건을 굳이 4,000억을 내가면서 사다니. 이게 멍청이 아니면 뭡니까?”말하면서 그녀는 천년 청련이 담긴 상자를 일부
지금에서야 선우영채는 자신이 당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러나 고이 앞에 놓여 있는 물건을 제대로 보지 않고 산 것은 본인이었으므로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물론 선우 가문의 권력을 이용해 반품하고 환불할 수도 있었으나 선우영채는 자신의 체면을 중히 여겼으므로 그럴 수도 없었다.그녀는 자신의 체면을 위해 결국 이를 악물고 넘어가려 했다.“선우 아가씨, 보아하니 당신이 거액을 들여 산 물건도 그다지 진귀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이때 손기태가 옆에서 한술 더 떠 불 난 집에 부채질하였다.“그 말은 맞지 않습니다. 비록 연도가 좀 부족하다지만 이 청련은 이미 진귀하고 일품이라 할 수 있어요.” 긴 셔츠 남자가 분위기를 풀어나가려 했다.“들었죠? 조금 모자라도 일품이라잖아요!” 그제야 선우영채의 안색이 조금 누그러졌다.“그럼 900년의 청련은 도대체 가치가 얼마나 됩니까?” 유진우가 웃으며 물었다.“그게...”남자가 난처한 표정으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다가 말했다. “약효와 연도로 따졌을 때 아마 600, 800억의 가치는 되겠죠?”“뭐요? 고작 가치가 600억?”말을 들은 선우영채가 하마터면 펄쩍 뛸 뻔했다.그녀가 청련을 산 가격은 6,000억이었는데.산 가격에 비해 10배나 눅은 셈이다. 밑져도 아주 크게 밑졌다.“허허... 선우 아가씨는 돈도 많고 기백이 넘치시는데. 이까짓 푼돈이 무엇이 그리 손해겠습니까.” 손기태가 농담하며 웃었다.“...”선우영채의 몸이 화를 못 이겨 부들부들 떨렸다. 안색은 흐려져 보기 흉했다.한참을 다른 사람을 엿 먹이느라 애썼는데 오히려 엿 먹은 쪽은 본인이었다.“손 회장님. 결국 오십보백보 아닙니까. 선우 아가씨도 밑진 것은 맞지만, 회장님도 이득을 보진 못하지 않았습니까.” 긴 셔츠 남자가 선우영채를 도와 말했다.“맞아요!!”선우영채의 눈빛이 확 밝아졌다. 그녀가 유진우의 품에 있는 보석을 가리키며 말했다.“비록 제 보물이 연도가 안 찼다 해도 적어도 당신들 그 루비보
지금 돌아보면 모든 게 교묘하게 짜인 계획이었던 셈이다.유태범은 이들의 동선과 의도를 이미 꿰뚫고 있었고, 애초부터 이들을 함정에 빠뜨리려 했다.그들이 하는 모든 행동은 유태범의 예상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그래서 미리 판을 짜 두고 기다리다가 마지막에 병부를 빼앗는 데 성공한 것이다.결국 이들이 스스로 늑대를 집 안에 들인 셈이 되어 병부를 잃고 말았다.서경의 표기대장군 자리에서 유태범이 한 사람 아래 수많은 사람 위를 차지했던 이유가 새삼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속내를 꿰뚫는 교활함에서 이들은 아직 조금 모자랐다.밤이 지나 아침이 밝았다.밤새 치른 전투의 흔적을 정리하면서 왕부 대문 앞에 쌓였던 시신들은 이미 수습됐지만 땅속으로 스며든 핏자국은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남은 세 제후가 이끌고 온 병력은 근처 성방영에 배치되어, 만약 사태가 급변하면 언제든 왕부를 도울 수 있도록 대기 중이었다.병부를 도난당한 탓에 왕부 안 사람들은 대부분 밤새 한숨도 못 잤다.석태혁이 이끌고 나간 유만군 역시 밤새 밖을 뒤졌지만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다.아침 식사를 간단히 마친 뒤, 이의진은 다시 한번 주한휘, 은성종, 그리고 장범규를 불러들여 대책을 논의하고 정보를 모았다.하지만 병부가 어디로 갔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 뾰족한 방도가 떠오를 리 없었다.그때, 간밤에 사라졌던 석태혁이 마침내 돌아왔다.떠날 땐 부하들과 함께였는데 돌아올 땐 그 혼자뿐이었고 게다가 심각한 부상을 입은 모습이었다.의논 중이던 이들이 모여 있던 의회장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는 쓰러지듯 무릎을 꿇더니 피를 토했다.“장군님! 어쩌다 이렇게 크게 다쳤습니까?”이의진이 크게 놀라 급히 사람들을 시켜 석태혁을 의자에 앉혔다.“장군님, 병부는 찾으셨나요?”주한휘는 석태혁의 상처보다도 병부의 행방이 더 급한 듯 보였다.“왕비님, 소장은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제갈영군을 따라잡기는커녕 도중에 매복을 당해 함께 간 유만군 병력도 전멸됐습니다. 병부 역시 되찾지 못했으니 부
“뭐라고요? 서경을 떠나 도망치자고요? 그럼 왕위는 그대로 유태범한테 넘어가는 거잖아요.”유천우는 표정이 어두워졌다.“산만 남아 있으면 땔감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지. 살기만 하면 우리는 아직 기회가 있어.”은성종이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왕위를 뺏기고 병부도 잃고 50만 흑용군까지 모조리 유태범이 호령하게 되면, 저희가 무슨 수로 다시 기회를 잡겠어요.”주한휘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그도 이 지경이 될 줄 알았다면 애초에 욕심내어 유씨 가문과 연을 맺진 않았을 것이다. 결국 아무 이득도 못 보고 오히려 그만 곤란한 처지에 빠졌으니 진퇴양난이었다.“은 제후님 말씀대로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대비책을 세워야 할 것 같아요.”이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솔직히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들에게 너무나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병부가 정말 유태범 손에 들어가면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터. 결국 서경을 떠날 수밖에 없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그녀는 용국의 장공주이니, 서경을 떠나 연경으로 가더라도 어떻게든 자리 하나 마련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들에게 큰 고생을 시키고 싶지 않았으므로 마음 한구석으로는 그 길도 고려하고 있었다.“그래도 너무 낙담하진 마요. 석 장군의 실력도 제갈영군과 막상막하니까요, 혹시라도 병부를 되찾아 온다면 저희에게도 길이 열릴 거예요.”은성종이 나직이 덧붙여 말했다.“맞습니다. 아직 결판이 난 건 아니니 모두 기운 내세요.”장범규가 힘주어 말했다.“여러분,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유천우는 가볍게 몸을 숙여 예를 표한 뒤 뒤돌아서 편전을 나섰다. 머릿속이 복잡해지자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은 형 육진우였다.유천우는 도령 차림으로 변장한 육진우를 따로 불러 자신이 묵는 방으로 안내했고 시종들에게 단단히 지키라고 지시했다.“천우야, 아까 지붕 위에서 인기척이 스쳐 갔던데 무슨 일이 생긴 거야?”안전하다고 느낀 육진우가 먼저 물었다.“네, 제후님들께서 함께 계시던 편
은성종이 가장 먼저 상황을 파악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빨리! 병부를 쫓아!”이의진도 곧바로 지시했다.“쫓아가요!”석태혁은 번개처럼 칼을 뽑아 들고 유만군 부대 일부를 이끌고 제갈영군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갔다.“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유천우는 멍하니 서 있다가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설마 제갈영군이 병부를 빼앗아 도망칠 줄은 상상조차 못 했기에 전혀 대비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갈영군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다.“천우야, 제갈영군은 원래부터 유태범 쪽이었나 봐. 전력을 다해 너를 지지하고 왕부를 돕는 척한 건, 우리 경계를 완전히 풀어놓기 위해서였던 거지. 때가 되면 병부를 빼앗아 우릴 궁지에 몰아넣을 속셈이었어.”은성종이 무겁게 말을 이었다.“제길... 제갈영군이 배신자였다니, 너무 괘씸하잖아요!”장범규가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그러게 말이에요. 흑용군 얘기를 그렇게나 강조하더니, 결국 병부를 훔쳐 달아날 빌미를 만든 거였네요. 정말 교활해요!”주한휘가 억울하다는 듯 씩씩거렸다.“만약 병부를 되찾지 못하고 유태범 손에 넘어가면... 저희는 완전히 끝나고 말 거예요.”이의진은 눈살을 찌푸린 채 심각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원수 병부가 흑용군의 지휘권을 결정한다는 건 다들 아는 사실이었다. 병부를 쥔 자가 흑용군을 움직일 수 있으니, 유태범이 지금껏 이런저런 명분을 내세워 부대를 끌어온 수고를 할 필요가 없어지는 셈이었다.병부만 있으면 그 즉시 전군을 호령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없을 것이다. 50만 흑용군이 들이닥치면 서경은 물론 천하 어디라도 막아낼 재간이 없을 터였다.“어머니, 죄송합니다. 전부 제 탓이에요. 제가 좀 더 주의 깊었더라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예요.”유천우는 깊이 고개를 떨구었다. 병부가 자기 손에서 떨어져 나간 이상 변명의 여지조차 없다고 생각했다.“천우야,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제
왕부의 편전.네 명의 제후는 차례대로 자리에 앉아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각기 다른 표정으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보였다.제갈영군은 한가롭게 차를 음미했고, 은성종은 눈을 감은 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주한휘는 이리저리 둘러보며 왕부 편전의 장식을 구경했고, 장범규는 다소 초조한 기색으로 일어나 앉았다가 몇 걸음 왔다 갔다 하며 마음을 졸이는 모습이었다.한 차례 시간이 흘러, 이의진이 유천우와 석태혁을 데리고 마침내 편전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정교한 상자가 들려 있었다.“여러분, 병부를 가져왔어요.”이의진이 상자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열자, 그 안에는 금빛의 호부가 놓여 있었다. 호랑이 형상을 정교하게 조각해 위엄이 깃들어 보였다. 호부 한가운데에는 ‘병갑지부, 좌재왕, 우재경’이라는 금색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역시 병부군요!”호부를 본 장범규가 눈을 반짝였다.“이 병부만 손에 넣으면 흑용군을 동원할 수 있어요. 그러면 유태범의 음모도 허무하게 끝나겠죠.”“천우야, 지체할 시간 없어. 병부를 들고 흑용군 주둔지로 가서 그 장수들을 만나. 신분을 확실히 밝혀야 해. 유태범이 틈탈 구석이 없도록.”주한휘가 서둘러 재촉했다.“병부는 매우 중요한 물건이야. 유태범이 순순히 보고만 있진 않을 테니 가는 길은 결코 만만치 않을 거다. 철저히 준비해야 해.”은성종이 경고하듯 말했다.“알겠습니다, 제후님. 이미 어머니께도 상의드렸어요. 열 개 정찰팀을 꾸려 여러 갈래로 성을 나갈 거고, 저 역시 그중 한 무리에 섞여서 움직일 겁니다. 유태범이 대비하고 있어도 쉽게 제 위치를 알아내진 못하겠죠. 유태범이 위협을 눈치챌 무렵이면 저는 이미 흑용군 주둔지에 도착해 있을 거예요.”유천우가 굳은 얼굴로 답했다.“그거면 충분하겠군.”은성종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한번 당부했다.“천우야, 이번 행선지는 너랑 왕비님만 아는 걸로 해. 괜히 입 밖에 새면 사고가 터질 수 있어.”“명심하겠습니다, 제후님.”“자, 그럼 빨리 움직이자.
“안 돼요! 그건 너무 위험해요!”육진우가 모험을 강행하려 하자 유천우는 곧바로 제지하고 나섰다.유천우는 그가 강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유태범의 주변에는 정말 많은 고수가 몰려들어 있었다.두 주먹이 네 손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처럼, 만약 암살에 실패라도 하면 수많은 고수들의 포위망에 걸려들 위험이 컸다. 장차 서경왕이 될 몸으로서, 유천우는 결코 함부로 유진우가 위험을 감수하도록 둘 수 없었다.“천우야, 때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야. 지금 같은 중요한 시기에는 누군가 희생을 감내해야 하지. 게다가 호위는 하나일 뿐인데 그렇게까지 긴장할 필요가 있을까?”주한휘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안 된다면 안 되는 겁니다!”유천우는 거의 고함치듯 외쳤다.강한 기세가 순간 터져 나와 주한휘는 뒷걸음질 치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사람들까지 서로 눈길을 주고받으며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했다.아무도 유천우가 이렇게까지 격한 반응을 보이리라 예상하지 못했다.자신이 좀 과격했음을 깨달은 듯, 유천우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담담히 말을 이었다.“제후님, 호위의 목숨도 저희와 똑같이 소중해요. 괜히 헛된 희생을 치르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어떻게 모두를 납득시키겠어요?”“그래, 그래... 네 말도 일리가 있네.”주한휘는 어색하게 웃었다. 속으로는 그가 호위 하나 때문에 호들갑을 떤다고 생각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된다면, 저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설마 그냥 손 놓고 당하기만 할 생각은 아니겠죠?”장범규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제게 좋은 방법이 하나 있긴 합니다.”제갈영군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오? 어떤 방법인데요?”이의진이 살짝 미간을 올리며 물었다.“유태범이 믿는 가장 큰 무기는 흑용군이에요. 우린 이 점을 공략하면 됩니다.”제갈영군은 신중하게 말을 이어갔다.“다들 아시다시피, 전쟁 시기가
석태혁의 발언은 순간적으로 모든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이의진은 무언가 말하려다가 머뭇거리며 술을 다물었다.석태혁은 왕부의 친위이자 그녀가 굳게 신뢰해 온 인물이기에 솔직히 그가 목숨을 걸고 위험에 뛰어들길 바라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보다 더 적합한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장군님께서는 워낙 강하시고 충성도 깊으니 유태범을 암살하러 간다면 가능성이 있겠죠.”장범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의 친위대장인 만큼 실력이나 충성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장군님, 제가 괜히 이런 말씀 드리는 건 아니지만 혼자 가시는 건 좀 무리가 있을 수도 있어요.”제갈영군이 갑작스레 말했다.“잠깐! 아직 그 전설 속의 인도가 있잖아요?”주한휘가 문득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인도란 이름은 모르는 사람이 없겠죠. 인도의 실력이라면 장군님 못지않을 텐데요?”“아니요, 홍복홍께서는 저보다 훨씬 뛰어나십니다.”석태혁이 차분하게 답했다.그가 친위대장이기는 해도 왕부의 진정한 비책은 사실 인도 홍복홍이다. 서경의 세 고수 중 검선은 세상을 떠났고, 주광은 행방이 묘연하다. 결국 남은 인도가 서경에서도 손꼽히는 고수다.대 마스터 급의 인도는 그가 견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와, 그럼 잘됐네요! 인도가 장군님보다 훨씬 강하시다면, 그분께 부탁드리는 게 훨씬 확실하지 않을까요?”주한휘가 기대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유감이지만, 홍복홍께서는 왕부를 떠나신 뒤로 지금까지 종적을 감추셨어요. 그분께 부탁드리긴 힘들 것 같네요.”석태혁이 고개를 저었다.“종적이 묘연하다니...”장범규가 미간을 찌푸렸다.“홍복홍이라는 분, 왕부가 이렇게 위태로운데 어디 가신 건지 모르겠군요.”“설마 상황이 안 좋아 보이니까 도망쳐 버린 건 아니겠죠?”주한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주 제후, 그런 말씀은 삼가주세요. 홍복홍께서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몸 바쳐 오신 분이에요. 도망칠 리가 없습니다.”석태혁의 얼굴이 굳어졌다.“아, 죄송해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주한
“방법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문제가 좀 있어요.”제갈영군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새 왕이 즉위하려면 폐하의 허가와 백관의 승인이 필요한데,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납득하기 어려워요. 게다가 폐하의 뜻을 받고 백관을 모시려면 앞뒤로 최소 사흘은 걸려요. 지금 우리 상황으로는 그렇게 오래 버틸 수 없죠.”“에이, 설마? 즉위가 그렇게나 복잡해요?”장범규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다들 천우가 어르신의 아들이라는 걸 알잖아요. 그럼 당연히 서경왕 자리를 잇는 게 맞지 않나요?”“맞아요! 급할 때는 융통성도 발휘해야 하는 거잖아요.”주한휘가 곁에서 맞장구쳤다.“두 분 다 서경왕위를 산적 두목 뽑듯 생각하시는 건가요? 깃발 하나 꽂고 술 몇 사발 마신 다음 큰소리 몇 마디로 끝낼 일이 아니에요. 농담하지 마세요.”제갈영군이 약간 어이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서경왕위는 서경 백성만이 아니라 천하 모든 사람의 안위와도 연결돼 있죠. 서경이 혼란스러워지면 천하가 뒤숭숭해지고, 서경이 안정되면 천하도 평안해져요. 과장이 아니라 서경왕위의 무게는 폐하의 황위에 전혀 뒤지지 않아요. 그런 중요한 자리를 함부로 정하고 아무나 앉을 수 있겠습니까?”“맞아요. 저도 천우가 빨리 왕위를 이어서 군심을 안정시키면 좋겠지만, 왕위 계승은 장난이 아니죠. 너무 서두르면 오히려 역효과만 날 거고 남들 입방아에 오르기 딱이니까요.”이의진이 고개를 저었다.규율과 절차 없이는 질서가 서기 어려운 법. 서경왕 자리의 무게는 그만큼 무겁다. 폐하의 명령과 문무백관의 증인이 없으면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어렵다.“다들 너무 규칙만 따져서 이 좋은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고 있어요.”장범규가 못마땅한 듯 말했다.“지금 도련님이 왕위를 잇지 못하면 유태범의 대군이 쳐들어올 때 어쩌자는 겁니까?”주한휘가 난처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은 제후님, 혹시 다른 방도가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냥 말씀 좀 해주세요. 더는 뜸 들이지 말고요.”제갈영군이 은성종을 바라봤다.“두
“뭐라고요? 목격자를 전부 없애버린다고요?”그 말을 듣자 장범규의 안색이 급변했다.“농담하는 거 아니죠? 북쪽 4대 제후는 모두 유태범의 사람인데 적과 아군을 구별하지 않고 전부 죽인다는 게 말이 돼요?”“큰일을 하는 자는 마음이 독해야 하는 법입니다. 오랫동안 전장을 누빈 사람한테 약간의 희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제갈영군이 덤덤하게 말했다.“물론 이건 마지막 계획이에요. 만약 북쪽 4대 제후가 무사히 왕위를 빼앗고 병부를 손에 넣는다면 유태범은 위험을 감수할 필요 없이 바로 왕위를 이어받으면 됩니다. 하지만 만약 북쪽 4대 제후가 실패하면 유태범은 큰일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예요.”욕심이 많은 자일수록 더욱 광기 어린 행동을 보일 것이다.예전에 유태범은 위왕에게 억눌려 힘을 숨기고 기회를 기다렸다. 위왕이 세상을 떠난 지금 속박을 벗어난 유태범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그렇다면 정말 조심해야 할 것 같네요.”장범규는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흑용군은 서경에서 가장 강하고 세계 최강의 전투력을 지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흑용군을 장악한다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만약 유태범이 표기 대장군이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다시 왕실을 구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운다면 흑용군을 대량으로 동원할 가능성이 컸다.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었다. 오직 승자만이 왕이 되고 패자는 반역자가 될 뿐이니까.“제후님들은 모두 서경의 기둥입니다. 혹시 좋은 해결책이라도 있습니까?”이의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전 싸우는 것만 잘하지, 머리를 쓰는 건 절대 안 돼요.”장범규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저도 그렇습니다.”주한휘도 고개를 내저었다.“회음 제후님은 재능이 뛰어나니 뾰족한 수가 있으면 얘기해보시죠.”제갈영군의 시선이 은성종에게 향했다.그들이 성문 앞의 십만 대군을 설득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은성종의 회유책 덕분이었다.장교들의 가족과 친구를 이용하여 그들을 설득하고 항복하게 했다.많
지금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유태범이 흑용군을 이끌고 오는 것이었다.“너희 둘은 주모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력자야. 사형은 면해도 처벌은 면치 못해.”이의진이 차갑게 말했다.“여봐라. 저 두 놈을 끌고 가서 감시하고 내 명령 없이는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거라.”“알겠습니다.”몇 명의 친위대가 재빨리 다가가 포박된 진승민과 강윤기를 강제로 끌고 갔다.“장군님, 항복한 병사들을 처리해 주십시오. 오늘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으니 더 이상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이의진이 석태혁을 보며 말했다.“알겠습니다.”석태혁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왕비님 자비에 진심으로 감탄했습니다.”그때 네 명이 군중 속에서 걸어 나왔다.그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병사들이 자동으로 길을 터주었는데 네 사람이 바로 남쪽 4대 제후였다.맨 왼쪽으로부터 제갈영군, 그다음은 은성종, 주한휘, 장범규가 나란히 서 있었다.“저희가 너무 늦게 온 바람에 왕비님께서 많이 놀라셨죠? 부디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은성종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맞잡고 겸손한 태도로 예를 표했다.“그런 말씀 마십시오. 만약 제때 와주시지 않았다면 왕부가 위험에 처했을 겁니다. 제후님들 모두 공신이십니다.”이의진은 재빨리 다가가 허리 굽힌 은성종을 일으켜 세웠다.사실 남쪽 4대 제후가 이렇게 빨리 군대를 보내 지원해 줄 거라는 건 그녀의 예상 밖이었다. 다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밤낮으로 달려왔다는 걸 보아낼 수 있었다.“왕부를 지키고 서경을 지키는 건 우리의 책임이고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은성종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맞습니다. 만약 위왕님께서 저를 살려주지 않으셨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겁니다. 왕부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기꺼이 내놓을 수 있어요.”장범규가 호탕하게 말했다.남쪽 4대 제후 중에서 그는 가장 솔직하고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다.“왕비님, 앞으로 우리는 한 가족입니다. 왕부의 어려움은 곧 우리의 어려움이니 당연히 도와야죠.”주한휘가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