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에서야 선우영채는 자신이 당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러나 고이 앞에 놓여 있는 물건을 제대로 보지 않고 산 것은 본인이었으므로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물론 선우 가문의 권력을 이용해 반품하고 환불할 수도 있었으나 선우영채는 자신의 체면을 중히 여겼으므로 그럴 수도 없었다.그녀는 자신의 체면을 위해 결국 이를 악물고 넘어가려 했다.“선우 아가씨, 보아하니 당신이 거액을 들여 산 물건도 그다지 진귀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이때 손기태가 옆에서 한술 더 떠 불 난 집에 부채질하였다.“그 말은 맞지 않습니다. 비록 연도가 좀 부족하다지만 이 청련은 이미 진귀하고 일품이라 할 수 있어요.” 긴 셔츠 남자가 분위기를 풀어나가려 했다.“들었죠? 조금 모자라도 일품이라잖아요!” 그제야 선우영채의 안색이 조금 누그러졌다.“그럼 900년의 청련은 도대체 가치가 얼마나 됩니까?” 유진우가 웃으며 물었다.“그게...”남자가 난처한 표정으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다가 말했다. “약효와 연도로 따졌을 때 아마 600, 800억의 가치는 되겠죠?”“뭐요? 고작 가치가 600억?”말을 들은 선우영채가 하마터면 펄쩍 뛸 뻔했다.그녀가 청련을 산 가격은 6,000억이었는데.산 가격에 비해 10배나 눅은 셈이다. 밑져도 아주 크게 밑졌다.“허허... 선우 아가씨는 돈도 많고 기백이 넘치시는데. 이까짓 푼돈이 무엇이 그리 손해겠습니까.” 손기태가 농담하며 웃었다.“...”선우영채의 몸이 화를 못 이겨 부들부들 떨렸다. 안색은 흐려져 보기 흉했다.한참을 다른 사람을 엿 먹이느라 애썼는데 오히려 엿 먹은 쪽은 본인이었다.“손 회장님. 결국 오십보백보 아닙니까. 선우 아가씨도 밑진 것은 맞지만, 회장님도 이득을 보진 못하지 않았습니까.” 긴 셔츠 남자가 선우영채를 도와 말했다.“맞아요!!”선우영채의 눈빛이 확 밝아졌다. 그녀가 유진우의 품에 있는 보석을 가리키며 말했다.“비록 제 보물이 연도가 안 찼다 해도 적어도 당신들 그 루비보
“그래! 당신 같은 사람들만바보 같이 4,000억을 써서 이런 보석을 사지.”“이런 걸 바로 무식하게 돈만 많다고 하는 거야.”주위의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지적하기 시작했다.그들이 보기에 유진우는 당연히 자존심만 내세우는 멍청이였으니까.여지없이 패배하고 본전도 잃어놓고서 허풍을 떠는 사람이었으니까.“들었어요? 모두 당신을 멍청이라 생각하네요. 저 포함해서.” 선우영채가 비열하게 웃어 보였다.“그렇습니까?”유진우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보아하니 모두 모르는 것 같군요. 이것은 보통의 루비가 아니라 루비보다 훨씬 희귀한 혈정석이라는 겁니다.”“혈정석은 또 뭐예요? 난 들어본 적도 없어요!” 선우영채가 불쾌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렸다.“괜찮습니다. 제가 알려드리죠.”유진우가 말하면서 루비의 위쪽을 손으로 강하게 내리쳤다.'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루비에 순식간에 몇 갈래의 균열이 생겼다.균열이 빠르게 퍼지고 눈 깜짝할 사이에 깨져버려 땅에 루비 조각이 흩뿌려졌다.이 장면을 본 사람들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미쳤어. 이 자는 미친 거야!”“아무리 손해를 보았다 해도 화를 못 참고 보석을 깨뜨리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선우 아가씨의 말이 맞나 봐, 이 사람은 멍청이야.”유진우의 행위에 사람들은 경악하고 혀를 끌끌 찼다. 그러나 더 많은 것은 욕설과 질책이었다.‘어찌 되었든 진귀한 물건인데 이렇게 쓸 수도 없게 망가뜨리다니, 정말 어리석구나!’선우영채가 멍하니 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덩달아 크게 웃었다.“당신 뇌가 어떻게 된 거예요? 4,000억을 들여 산 보석을 깨뜨리다니. 당신처럼 멍청한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그녀의 웃음소리가 점점 작아지다 마침내 뚝 끊어졌다.보석이 깨지고 안에서 뜻밖에도 붉은빛이 도는 꽃 한 송이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이 핏빛 꽃은 투명하고 보송보송하며 마치 하늘이 내린 꽃처럼 조금의 흠도 잡아낼 수 없는 아름다운 꽃이었다.눈여겨보면 마치 붉은 액체가 천천히 감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
“왜? 왜?!”선우영채는 후회막급이었다.루비가 이토록 엄청난 가치가 있을 줄 알았더라면 절대 팔지 않았을 것이다.이제 희귀한 보물 혈정화를 시골 촌놈한테 두 손으로 받친 꼴이 되었다.“오늘 정말 운이 좋네!”유진우는 혈정화를 들고 입가의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그는 루비를 본 순간부터 그 안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혈정화는 일반 꽃이 아닌 희귀한 보물로 보통 혈정석 안에만 존재하는데 오늘 경매한 루비가 곧바로 그 희귀한 혈정석이었다.900 년 된 청련은 잃어서 유감이었지만 오늘 혈정화를 얻게 된 것은 하늘의 축복이었다.따라서 오늘 경매장에 온 것은 헛된 일이 아니었다.“선우영채 씨, 이것이 4,000억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유진우의 시선이 갑자기 선우영채를 향하더니 웃으며 물었다.“우리 둘 중 누가 진짜 바보일까요?”“당신...”선우영채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조금 전에 얼마나 기세등등했다면, 지금은 그만큼 수치스러웠다.그녀는 6,000억으로 불량품을 샀지만, 상대는 4,000억으로 아주 귀한 보물을 얻었으니 말이다.그 격차는 정말 어마어마했다.“선우영채 씨, 보물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중에 또 봐요.”유진우는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서 떠나려고 했다.“잠깐!”선우영채가 갑자기 소리쳤다.“내가 언제 가도 된다고 했어요?”“왜요? 저녁까지 사주시게요?”유진우가 빙그레 웃었다.“헛소리 그만하고 혈정화는 내가 가져갈 거니까 얼마면 돼요?”선우영채가 말했다. 혈정화는 천 년 백 년에 한 번 만날 수 있기에 오늘 놓치고 싶지 않았다.“아쉽겠지만, 이건 안 팔아요.”유진우는 단호했다.“안 판다고요?”선우영채는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그건 내가 원하는 물건이기 때문에 당신은 오늘 꼭 팔아야 해요.”“그래요? 언제부터 이 세상에 그런 규정이 있었나요?”유진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규정은 내가 정해요!”선우영채는 유진우를 노려보며 말했다.“손해 보게 안 할게요. 당신이 아까 20억으로
다음 날, 강능.고급 차들이 위풍당당하게 천향원으로 들어갔다.지나가는 곳마다 폭죽 소리가 울려 퍼졌다.진서현은 조씨 가문 일행과 함께 일찌감치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가 천천히 멈추자 화려하고 거만한 차림새의 선우영채가 먼저 내렸다.“영채야, 왔어? 안으로 들어가자!”진서현은 미소를 지으며 매우 따뜻한 태도로 말했다.선우영채는 선우희재의 친동생이고 또 선우 가문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아줌마, 오랜만이에요.”선우영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말했다.“선미 언니는요? 어디 갔어요?”“씻고 있어. 금방 나올 거야.”진서현이 웃으며 말했다.“영채가 온다고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는데 이리 와서 봐봐.”그때 옆에 있던 조준서가 두 손으로 달걀 크기의 사파이어를 건네주었다.선우영채는 외모도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집안 배경도 든든하여 조준서가 원하는 상대였다. 때문에 그녀한테 잘 보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그는 여자라면 보석의 유혹을 거부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사파이어를 준비했다.“고마워요.”선우영채는 보석을 힐끗 쳐다보더니 직접 받지 않고 하녀한테 받으라고 했다.“이건...”선우영채가 관심 없는 태도를 보이자, 조준서는 저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이 사파이어는 그가 선우영채한테 잘 보이려고 수억을 주고 단씨 여자한테서 산 것이었다. 그런데 선우영채가 이런 식으로 반응하자 화가 났다.이럴 줄 알았다면 절대 비싼 것을 준비하지 않았을 것이다.“영채야, 간식도 준비되어 있으니 들어가자.”진서현은 선우영채 일행을 별장 안으로 안내했다.모두가 자리에 앉자, 진서현이 물었다.“영채야, 강능에는 무슨 일로 왔어?”“아줌마, 오늘은 오빠의 혼사 때문에 왔어요.”선우영채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또다시 입을 열었다.“우리 두 가문의 약속에 따르면 20일 이후에 조씨 가문과 선우 가문은 혼사를 치러야 하는데 잘 준비되고 있는 거죠?”“걱정하지 마. 며칠 후에 조씨 가문의 송년회가 있는데 그때
조선미의 말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그녀가 그런 말을 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선미야,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야? 잠 덜 깼어?”진서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요. 유감스럽지만 저와 선우희재 씨는 어울리지 않아요.”조선미가 담담하게 말했다.“언니, 그게 무슨 말이야?”선우영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파혼할 거야!”조선미가 단호하게 말했다.“파혼?”선우영채의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말했다.“언니! 미쳤어? 감히 우리 선우 가문을 상대로 파혼하겠다고?”“선미야,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진서현이 서둘러 경고했다.선우 가문은 3대 가문 중 하나로서 인맥이든 세력이든 모두 조씨 가문을 쉽게 짓밟을 수 있는 존재였다.특별히 선우희재와 같은 천재가 선우 가문에 있음으로 가문의 위상은 더욱 치솟았으며 이미 3대 가문 중에서도 선두의 기세를 타고 있었다.얼마나 많은 귀족들이 선우 가문과 혼약을 맺으려고 하는데? 지금 파혼하겠다고?선우 가문을 뭐로 보는 건가?“파혼은 미안해! 사과할게! 만약 선우 가문의 체면 때문이라면 선우 가문에서 먼저 파혼 제의를 해도 돼. 어찌 됐든 난 선우희재 씨와 결혼하지 않을 거야.”조선미는 자신의 굳은 의지를 보여주었다.“언니! 이건 언니가 하겠다면 하고, 안 하겠다고 하면 안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이번 혼인은 두 가문에서 결정한 것이기에 언니가 결정할 수 있는 건 없어!”선우영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다른 건 가문의 의견을 따를 수 있지만 결혼은 절대 안 돼!"조선미가 냉정하게 말했다.“흠!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거야? 오빠의 눈에 들었다는 건 언니의 영광이야! 따라서 파혼 얘기도 우리 오빠만 할 수 있는 거야!”선우영채가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그럼, 오빠한테 연락해서 파혼하라고 얘기해줘.”“말도 안 돼, 그건 어림도 없는 거야!”선우영채는 단칼에 거절했다.“우리 오빠가 얻고자 하는 건, 누구도 못 말려. 언니가 동의하
“선미야! 약 잘못 먹었어? 누가 파혼을 허락했어?!”선우영채가 나가자마자 진서현은 더 이상 참지 않고 화를 냈다.가문의 명예와 성쇠가 걸린 문제였기에 딸이 변덕 부리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선미야, 선우희재와 결혼하는 건 너의 복이야. 그런데 지금 파혼이라니? 제정신이야?”조준서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딸을 보았다.'선우희재가 누구인가? 용국의 기둥이자 남성 최고의 천재이며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호풍장군이 아닌가!'얼마나 많은 가문에서 그를 사윗감으로 눈독을 들이고 있는지 모른다.그런데 지금 조선미는 그 행운을 차버리겠다고 하다니? 이해가 안 됐다.“내 결혼은 내가 결정해. 난 선우희재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결혼할 수 없어.”조선미는 담담하게 말했다.과거 같으면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이 결혼을 받아들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선우희재는 솔직히 흠잡을 데가 없었다.집안, 배경, 능력, 미래까지 완벽한 남자라고 할 수 있다.상대방과 결혼하는 것은 모두의 기대에 부응하는 일이다.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제 유진우뿐이었기에 다른 남자는 용납할 수 없었다.“지금 좋아하지 않아도 천천히 좋아하게 될 거야. 어찌 됐든 넌 무조건 이 결혼 해야 해.”진서현은 강한 어조로 말했다.“그래야만 너도 행복할 수 있고, 우리 가문도 무사할 수 있어. 만약 네가 파혼하면 조씨 가문 전체가 위기에 처할 거야!”“그래 선미야, 블랙지존이 있다는 걸 기억해. 선우 가문이 없으면 그 사람은 반드시 우리 가문에 칼을 휘두를 거야.”조준서는 심각하게 경고했다.“블랙지존의 문제는 내가 해결할 거야.”조선미는 미간을 찌푸렸다.“해결한다고? 어떻게 해결할 건데? 1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매년 조씨 가문의 사람들이 영문도 모르고 죽어 나가고 있어. 아버지랑 큰아버지가 고수들을 많이 고용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잖아. 그런 블랙지존을 네가 무슨 능력으로 해결해?”진서현이 물었다.“시간만 주시면 꼭
어느 강변 별장 앞에 벤츠 한 대가 천천히 멈췄다.“청아 씨, 혼자 들어가는 게 좋겠어. 어제 셋째 할머니한테 찻잔을 엎어서 나를 보면 기분이 안 좋을 거야.”유진우가 웃으며 말했다.“그래 알았어. 여기서 기다려, 금방 갔다 올게.”이청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 별장으로 들어갔다.같은 시각, 별장 안에서.오금란은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었고, 이서우가 옆에서 어깨를 주물러주고 있었다.“사모님, 이청아 씨가 뵙고 싶어 합니다.”이때 한 나이가 많은 하인이 다가와 정중하게 보고했다.“왜 또 왔지? 혹시 빌러 온 거 아닐까요? 능력이 없으니, 할머니께서 한 번만 봐달라고요.”이서우가 말했다.“들어오라고 해.”오금란은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무심하게 말했다.“네.”곧이어 그녀는 이청아를 데리고 들어왔다.“무슨 일이니?”오금란은 눈꺼풀을 치켜들었다.“할머니, 할머니께서 말씀하신 거 완성했어요. 여기 2,000억짜리 수표입니다. 확인하세요.”이청아는 준비해 온 수표를 건네며 말했다.“2,000억 수표라고? 장난하는 거지?”이서우는 수표를 집어 들고 보더니 순식간에 표정이 굳어졌다.“진... 진짜로 2,000억이라니?”“어디 보자.”수표를 받아 든 오금란도 수표를 살펴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하루 사이에 어딜 가서 이 많은 돈을 구한 거야?”오금란은 오래전에 사람을 시켜 이청아를 철저하게 조사했었다. 그 결과에 따르면 이청아는 절대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10억이라는 투자를 받을 수 없었다.따라서 오금란은 이 돈에 분명 수상한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어디에서 구했는지는 할머니한테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저의 인맥이니까요.”이청아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흠! 우리 이씨 가문은 정당하고 떳떳한 가문이야. 출처가 확실하지 않으면 인정 못 해!”오금란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맞아! 이걸 훔친 건지, 뺏은 건지 누가 알아? 오늘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인정하지 못해!”이서우도 동참했다.“굳이 알고 싶어
“할머니, 공정하셔야죠. 이건 일부러 괴롭히는 거잖아요!”이청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겨우 얻어온 2,000억의 투자금을 이런 식으로 가로채다니 참을 수가 없었다.“닥쳐! 어떻게 버릇없이 우리 할머니한테 그런 식으로 말을 해?”이서우가 화를 내며 소리쳤다.“빚이 있으면 갚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유진우가 할머니를 때렸으면 대가를 치러야지!”“됐고, 이제 2,000억을 더 가져오면 회장 자리는 네 거야. 못하겠으면 지금 있는 자리에서 당장 내려와.”오금란은 귀찮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그의 표정은 마치 너는 나를 어쩌지 못한다고 하는 것 같았다.“아직도 거기 서서 뭐 해? 당장 꺼져!”이서우가 재촉했다.“할머니가 이토록 공정하지 않으시면 저는 족장님한테 얘기할 수밖에 없어요. 그분한테 직접 오셔서 지금 상황을 정리해달라고 해야겠어요!”이청아는 그렇게 말하며 나갈 준비를 했다.“잠깐만!”순간 오금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네가 감히 나를 협박해? 이봐라, 이 년의 뺨을 쳐라!”“네!”이서우가 잽싸게 달려가 이청아의 뺨을 두 대 때렸다.붉게 물든 다섯 손가락 자국 두 개가 선명하게 보였다.이청아는 충격과 분노에 얼굴을 가렸다.“왜? 억울해? 두 대 더 때려!”오금란이 고함을 질렀다.“알았어요!”이서우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이청아의 뺨을 두 대 더 때렸다.그녀는 오래전부터 이청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시골 촌년이 왜 이렇게 예뻐?’이청아는 입술을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만은 오금란을 똑바로 응시했다.“아직도 납득이 안 돼? 더 때려! 세게!”이청아의 도발적인 눈빛에 오금란은 화가 치솟았다.이씨 가문에서 감히 그녀에게 반항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쳐!”이서우가 명령하자, 이청아를 향한 폭력이 시작되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이청아의 얼굴에는 온통 상처뿐이었다.“이년아! 감히 우리 할머니를 도발해? 오늘 혼나봐야 정신 차리지!”이서우는 때리는 동안 끊임없이 내면의 질투심을 표출하며 소
그래야만 지금 앉아 있는 이 자리라도 지킬 수 있다.지금 왕위를 이어받을 자격과 능력을 갖춘 사람은 표기 대장군 유태범밖에 없었다.첫째로 유태범은 유씨 가문 사람이라 왕족에 속했기에 명분이 정당했다. 둘째로 표기 대장군으로서 서경의 절반에 달하는 군대를 거느리고 있어 권력이 하늘을 찔렀다. 셋째로 유태범은 오랜 시간 동안 힘을 키워왔다. 인맥, 위신, 공로 모두 왕위에 오르기에 충분했다.현재 유태범이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적지 않은 관원들은 애도를 표한 후 바로 대장군 저택으로 가서 유태범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었다.이러한 움직임은 당연히 서경왕부의 감시망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의진은 그들을 제압할 힘이 없었다.“어머니, 벌써 종일 여기 계셨어요. 들어가서 쉬세요. 이러다가 몸이 상하실까 걱정됩니다.”수심과 피곤이 가득한 어머니의 얼굴을 본 유천우가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내가 어찌 편히 쉴 수 있겠어.”이의진이 고개를 내저었다.“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더 조심해야죠. 서경왕부가 흔들리고 있는 지금 왕비인 어머니가 버티셔야 합니다. 절대 쓰러져선 안 돼요.”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하지만...”이의진은 뭐라 더 얘기하고 싶었지만 유천우가 가로챘다.“어머니, 이번에는 제 말을 들어주세요. 먼저 들어가서 쉬고 내일 아침에 다시 아버지 곁을 지켜도 괜찮아요.”이의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유천우는 도우미 두 명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너희 둘, 어머니를 방으로 모시고 잘 보살펴드려.”“알겠습니다.”두 도우미는 대답한 후 이의진을 부축했다. 무릎을 하도 오랜 시간 꿇고 있어 다리가 저린 나머지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천우야, 너도 몸 잘 챙겨. 절대 방심해선 안 돼.”이의진이 당부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유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나가는 걸 본 후에야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렸다.“다들 돌아가. 여긴 나 혼자 지키면
그 시각 서경왕부 문 앞.유태범 등 3인은 한 무리의 근위병들을 이끌고 서둘러 걸어 나왔다.서경왕부를 떠난 후 조군영이 참다못해 물었다.“대장군님, 이의진 모자가 주제도 모르고 저렇게 날뛰는데 계속 가만히 내버려 둬야 합니까?”“당연히 내버려 둘 순 없지. 하지만 너무 대놓고 움직여서도 안 돼. 흑용군의 대부분 고급 장교들이 서경왕부에 충성해서 정말 싸우기라도 한다면 우리한테 좋을 게 없어.”유태범이 실눈을 뜨고 말했다.“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조군영이 또 물었다.“대놓고 움직일 수 없다면 몰래 압력을 가해야지.”유태범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서경에 내란이 일어서 서경왕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진정한 리더가 누구인지 알게 될 거야.”“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서 이간질시킬게요. 백성들의 원한이 커져서 서경왕부도 감당이 안 될 때 대장군님이 구세주처럼 등장하는 겁니다. 그때가 되면 서경의 백성들은 대장군님께 고마워할 것이고 새로운 서경왕으로 모시겠죠.”눈치가 참 빠른 조군영이었다.“맞아. 아주 영특하구나, 너. 나중에 내가 서경왕 자리에 앉으면 표기 대장군 자리는 네 것이 될 거야.”유태범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 대장군님.”조군영은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얼른 움직여. 빠를수록 좋아. 절대 그 어떤 흔적도 남겨선 안 된다는 거 명심해.”유태범이 신신당부했다.“알겠습니다. 제가 깔끔하게 처리하겠습니다.”조군영은 인사를 올린 후 자리를 떠났다.“대장군님, 일반적인 내란이라면 서경왕부의 뿌리를 흔드는 건 불가능할 거예요. 반드시 강력한 무언가가 있어야 해요.”고원이 귀띔했다.“그건 나도 알고 있어.”유태범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동안 난 내 사람을 몰래 키워왔어. 8대 제후 중에 절반이 내 사람이야. 내 명령 한마디면 주저하지 않고 날 도와줄 거야.”“진작 준비하고 계셨군요. 제가 괜한 걱정을 했네요.”고원이 웃으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서경왕이 되면 절대 섭섭지 않게 해줄게.”
“유태범은 오랫동안 야심을 숨겨왔어요.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으니 이 기회에 무조건 권력을 빼앗으려고 할 겁니다. 이 일 아직 끝나려면 멀었어요.”유천우가 수심에 찬 얼굴로 말했다.“맞아. 대놓고 움직이진 못해도 뒤에서 온갖 수단을 동원할 거야. 앞으로 적지 않은 문제가 생길 게 분명해.”이의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위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절대 함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형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유천우가 한탄하듯 말했다.“천우야, 네 능력도 네 형 못지않아. 네 형이 할 수 있는 일은 너도 할 수 있을 거라 믿어.”이의진이 그를 격려했다.“어머니, 제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어요. 형님에 비하면 한참 부족합니다.”유천우가 고개를 내저었다.“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지 마.”이의진이 엄격한 얼굴로 말했다.“네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어. 장례식이 끝난 후에 폐하께 말씀드려서 너한테 왕위를 물려주게 할 거야. 앞으로 서경왕은 너고 그 중책을 맡아야 해.”“어머니, 왕위는 형 거예요. 전 그 자리를 물려받을 생각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서경왕은 형만이 물려받을 자격이 있다고요.”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천우야, 다른 일은 남한테 양보해도 이건 절대 안 돼!”이의진이 어두운 목소리로 호통쳤다.“그 자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꿈에 그리는 자리인지 알아? 놓치면 평생을 후회할 거라고!”“전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요. 저한테 있어서 권력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아버지처럼 매일 애쓰고 힘들게 사는 것보다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유천우가 고개를 내저었다.‘왕이 되면 좋을 게 뭐가 있다고. 걱정거리만 태산일 텐데. 그럴 바엔 맨날 먹고 놀면서 편히 살겠어. 그게 더 좋은 거 아닌가?’“이 녀석아, 일이 네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전에 자유롭게 살 수 있었던 건 다 네 아버지가 있어서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금 아무 권력도 손에 쥐지 않는다면 나중에 아주 처참한 결말을 맞이할 거란
“유장혁?”그 소리에 주변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한때 유씨 가문의 천재는 이름을 널리 떨쳤었다. 그런데 10년 전 자금성의 난이 터진 후 완전히 종적을 감추었고 현재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런 그의 이름을 갑자기 들으니 놀랄 만도 했다.“도련님,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세자 전하의 생사도 불투명한 데다가 어디 있는지도 아무도 몰라요. 그런 분한테 서경왕의 자리를 맡긴다는 건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 아닌가요?”조군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두 손까지 펼쳐 보였다.“그러게요, 도련님. 제발 현실을 잘 알고 말씀하세요. 세자 전하께 기댈 바엔 차라리 대장군님께 기대는 게 더 낫죠.”고원도 나서서 맞장구를 쳤다.유천우가 자기 자신을 얘기할 줄 알았는데 실종된 지 10년이나 된 사람을 얘기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정말 이보다 더 터무니없는 얘기는 없었다.“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형도 꼭 돌아올 겁니다. 그때 가서 형이 왕위를 이어받아도 문제없죠.”유천우가 싸늘하게 말했다.“도련님, 제가 하는 말이 거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만약 세자 전하께서 이미 돌아가셨으면 어떡해요? 서경왕의 자리를 계속 비워둘 작정인가요?”조군영이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형님 죽지 않았고 멀쩡하게 살아있어요. 그러니까 조 장군님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유천우가 말했다.“살아있다면 지금 어디 계시는 거죠? 왜 나타나지 않는 겁니까?”조군영은 일부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형님한테 소식을 전했으니 꼭 올 겁니다.”유천우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도련님, 설마 지금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는 건 아니죠?”조군영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위왕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퍼지면 서경 전체가 크게 흔들릴 거예요. 기다릴 시간이 많지 않다고요. 지금 당장 그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맞아요, 도련님. 대국을 생각하셔야죠!”고원도 나서서 유천우를 설득했다.“형한테 자리를 물려주는 건 아버지의 유언이에요. 지금 명령을 거역하겠단 겁니까?”
사람들이 뒤돌아보니 거친 삼베옷을 입고 상복 모자를 쓴 젊은 남자가 차가운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남자는 위엄이 넘쳤고 온몸에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오랜 시간 전장을 누빈 조군영과 고원마저도 그를 보자마자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표정이 진지해졌다.그 남자는 다름 아닌 유만수의 작은 아들 유천우였다.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유천우는 온 집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하여 예전에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도 많이 저질렀었고 서경의 사고뭉치라 불리기도 했다.그런데 최근 2년 동안 유천우는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변한 듯 더는 빈둥빈둥 놀지 않고 군에 들어가 열심히 살기 시작했다.처음에 사람들은 유천우가 군대에서 3일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어릴 적부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산 도련님이 군대의 혹독한 훈련을 버틴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그런데 뜻밖에도 유천우는 군대에서 자리를 잡았고 공까지 세웠다.짧은 2년 사이에 병사에서 흑용군의 부장으로 성장했다. 든든한 배경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무척이나 놀라운 성과였다.사람들은 그제야 유천우가 응석받이로 자란 도련님이 아니라 군사 천재라는 걸 알게 되었다.“천우야, 드디어 온 거야?”아들을 보자마자 이의진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겨우 가라앉았던 슬픔이 다시 저도 모르게 밀려왔다.“어머니, 소식 다 들었어요. 제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유천우는 어머니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군영과 고원에게 시선을 옮겼다.“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이렇게 몰아붙이는 겁니까?”“그게...”조군영은 고원의 눈치를 슬쩍 봤다가 어쩔 수 없이 말했다.“도련님, 오해하지 마세요. 저희도 대국을 위해서 이러는 겁니다. 현재 서경왕부에 리더가 없어서 누군가 나서서 이끌어가야 합니다. 안 그러면 많은 문제가 생길 거예요.”“맞아요, 도련님. 대국을 생각하셔야죠.”고원은 충성을 다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대국?”유천우는 코웃음을 치고는 더는 두 사람을 거들떠보지 않
“서경 대원수의 직위는 매우 중요합니다. 내부 투표를 거칠 뿐만 아니라 폐하께 보고하여 최종적으로는 폐하의 결정을 받아야 해요. 우리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어요.” 이의진의 눈빛이 경계로 가득했다.유태범이 왔을 때 그녀는 처음에는 형제 간의 정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조군영과 고원의 몇 마디 말에 그녀는 갑자기 깨달았다. 일이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유태범은 흑용군에서 유만수 다음가는 위망을 가지고 있었다.표기대장군으로서 그는 많은 심복 장수들을 거느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절반의 병권도 장악하고 있었다.왕이 세상을 떠난 후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사람은 유태범이 분명했다.가장 중요한 것은 유태범이 지금 이미 자신의 야심을 드러냈다는 점이다.왕이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권력을 탈취하려 하다니, 그녀는 그의 불순한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심지어 유만수의 죽음이 이 자들과 호룡각 잔당들이 암묵적으로 결탁한 결과일지도 모른다!만약 유태범이 병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무시무시할 것이다.“마마, 급할 때는 권력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이런 상황에서 어찌 폐하의 결정을 기다릴 시간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반드시 빨리 국면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조군영이 계속해서 말했다.“맞습니다!”고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장수가 밖에 있으면 군령도 받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폐하는 상황을 전혀 모르니 결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반드시 우리가 스스로 결정해야 하며 그래야만 소인배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폐하에게 보고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내부 투표를 거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모두가 승복할 수 있어요.” 이의진이 다시 말했다.“투표라니요? 이게 투표할 일입니까? 전 서경을 둘러봐도 대장군님보다 원수 자리에 더 적합한 분이 누가 있습니까?” 조군영이 말했다.“그렇습니다, 왕비마마! 공적으로 보나, 위망으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무공으로 보나 어르신을 제외하고는
고원이 갑자기 큰 소리로 외치며 바로 땅에 무릎을 꿇고 세 번 크게 머리를 조아렸다.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고 가까운 사람을 잃은 듯한 모습이었다.비록 똑같이 연기였지만 조군영보다는 훨씬 진실되어 보였다.“표기대장군 도착하셨습니다!”이때 문밖에서 우렁찬 외침이 울렸다.곧이어 금빛 갑옷을 입고 기상이 비범한 중년 남자가 급하게 걸어 들어왔다.이 사람이 바로 일품 표기대장군 유태범이었다!유태범은 표기대장군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유만수의 사촌 동생이기도 했다.유태범은 어릴 때부터 문무를 겸비하고 천부적 재능이 있어 모든 면에서 매우 뛰어났다.만약 유만수가 없었다면 분명 유씨 가문의 가장 빛나는 천재였을 것이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유만수라는 세상에 둘도 없는 영웅 앞에서는 아무리 대단한 천재라도 빛이 바랠 수밖에 없었다.“대장군께 인사드립니다!”유태범을 보자 조군영과 고원은 즉시 가식적인 표정을 거두고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그들 둘은 모두 유태범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진정한 측근 장수들이었다.마치 유만수와 석태혁의 관계처럼 영광도 함께 하고 손실도 함께했다.“형님!”유태범은 두 심복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영당에 들어서자마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땅에 무릎을 꿇었다.그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었고 입술은 떨리며 얼굴에는 비통함과 분노의 빛이 어려 있었다.“어찌 이럴 수가? 우리 형님이 어찌 돌아가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도대체 누가 한 짓입니까?!”유태범이 붉은 눈으로 연달아 분노의 외침을 터뜨렸다.“호룡각의 잔당들입니다. 그들이 자객을 부내에 잠입시켜 어젯밤 어르신을 암살했습니다.” 이의진의 얼굴이 흐리멍덩했다.“호룡각?”유태범이 이를 갈며 분노에 차 있다가 즉시 고함쳤다. “누구 없느냐! 즉시 군대를 집결시켜 전 성을 수색하라. 반드시 범인을 체포해야 한다!”“잠깐만요!”이의진이 갑자기 나서서 제지했다.“태범 씨, 매우 비통한 것을 알지만 지금은 아직 일을 크게 만들 수 없습니다.”“형님이 이미 돌아가셨는데 무
이 말이 나오자 조군영과 고원의 안색이 순간 변했다.두 사람이 오늘 온 것은 본래 기세를 과시하려는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이의진이 이렇게 강경한 태도를 보일 줄은 몰랐다.입을 열자마자 반역이라는 죄명을 들이대다니.이런 죄가 뒤집어씌워진다면 그들은 아마 왕부의 대문을 살아서 나가지 못할 것이다.“마마, 농담 마십시오. 반역은 사형감입니다. 저희가 아무리 대범하다 해도 그런 일은 감히 못 하지요!” 고원이 연달아 해명했다.“맞습니다. 저희는 왕께 항상 충성을 다해왔는데 어찌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조군영도 따라서 부인했다.비록 두 사람 모두 그런 야심이 조금은 있었지만 명백히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적어도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반역할 생각이 없다면 어째서 갑옷을 입고 부내에 들어오시는 것입니까? 규칙도 모르십니까?” 이의진이 조금도 봐주지 않고 꾸짖었다.그저 이품 장군일 뿐인데 군권이 조금 있다고 감히 왕부 안에서 눈깔을 찌푸리고 있다니.유만수가 살아있을 때 이 둘은 감히 이러지 못했다.“아이고! 제 정신 좀 보세요, 왕부의 규칙을 잊었네요. 마마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조군영이 헛웃음을 지었다.이어서 갑옷을 벗고 차고 있던 칼을 내려 왕부의 경비에게 건넸다.“저희가 급히 오느라 깊이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의도치 않은 행동이었으니 개의치마시지요.” 고원이 웃으며 말했고 즉시 갑옷과 칼을 벗었다.이 광경을 보고 이의진의 안색이 비로소 조금 누그러졌지만 어조는 여전히 차가웠다. “갑자기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왕께서 자객의 습격을 받아 위험한 상황이라는 소식을 듣고 저희 둘이 특별히 문안드리러 왔습니다.”고원이 가식적으로 말했다.“소식통이 꽤나 빠르군요. 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이의진이 차갑게 말했다.“늦었다니요? 무슨 뜻입니까?” 두 사람이 의아한 척했다.이의진은 설명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고 몸을 돌려 영당으로 향했다.왕부 밖은 비록 동정이 없었지만 왕부 안에는 이미 흰 만장이 가득
“알겠습니다. 제가 경비병 신분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들어가시기 전에 먼저 변장을 하셔야 합니다.” 손도운이 결국 타협했다.비록 위험이 있긴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정오 무렵, 서경 왕부 안.비록 유만수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봉쇄되었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관리들이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어떤 이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조문을 왔고 또 어떤 이들은 다른 목적을 품고 있었다.“보국대장군 도착!”“운미대장군 도착!”왕부 문 앞에서 두 번의 외침이 들렸다.곧이어 갑옷을 입은 체격이 우람한 중년 남자 둘이 각각 친병들을 대동하고 걸어 들어왔다.이 친병들은 모두 허리에 장도를 차고 있었고 보기에도 험상궂었다.온 이들은 바로 이품 관직인 보국대장군 조군영과 운미대장군 고원이었다.“두 분, 왕부에 들어오시기 전에는 반드시 갑옷과 무기를 해제하셔야 합니다.”한 왕부 친위가 조군영과 고원을 막아서며 동시에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흥! 난 밖에 나올 때 갑옷을 벗지 않아. 꺼져!” 조군영이 노하여 꾸짖었다.“조 장군, 이건 왕부의 규칙입니다. 따라주시기 바랍니다.”왕부 친위가 말했다.“규칙? 나한테 감히 규칙을 운운한 건가?”조군영이 왕부 친위의 얼굴을 때리며 소리쳤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감히 규칙을 들먹이며 나를 압박하느냐? 죽고 싶나?”“조 장군, 소인도 명령을 받들어 행하는 것뿐입니다.” 왕부 친위는 동요하지 않았다.“헛소리 작작 하고 비켜. 그렇지 않으면 네 목을 벨 것이다!”조군영이 갑자기 칼을 뽑아 왕부 친위의 목에 겨누었고 그의 모습은 매우 포악하고 극도로 횡포했다.“제 머리를 베신다 해도 규칙은 지켜야 합니다.” 왕부 친위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이 개자식! 관짝을 보기 전에는 정신을 못 차리겠구나!”조군영은 마침내 화를 내며 칼을 거세게 들어 왕부 친위의 팔을 향해 내리쳤다.“멈추세요!”이때 한 소리의 여성의 호통이 울렸다.삼베 흰옷을 입은 이의진이 석태혁 일행을 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