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세라티 안. 뒷좌석에 앉은 안세리가 와인을 한 잔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예쁜 얼굴에는 분노와 원망이 가득했다.“망할 당씨 가문 남매! 감히 우릴 쫓아내다니? 꼭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어!” 안세리가 분개했다.“세리야, 진정해. 당씨 가문 사람들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지금은 정면으로 맞서는 게 좋지 않아.” 송영민이 타일렀다.“흥! 우리도 8대 명문가잖아. 우리 두 집안을 합치면 당씨 가문 따위가 무섭겠어?” 안세리가 불복했다.“무서워서가 아니라 불필요해서야.” 송영민이 고개를 저었다. 안씨 가문과 송씨 가문의 힘을 합치면 당연히 당씨 가문보다 강했지만, 정면 대결을 하면 결국 양쪽 다 피해를 볼 뿐이었다.“난 필요하다고 봐!”안세리가 눈을 부라렸다. “사람은 자존심이 있는 법이야. 우리 손에 회춘약이 있으니 이 기회에 당씨 가문을 제대로 눌러줘야 해!”“회춘약으로 당씨 가문에 타격을 줄 순 있겠지만, 치명상을 입히긴 힘들 거야.”송영민이 생각에 잠겨 말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우선 당씨 가문과 협력하다가 때가 되면 그들의 시장을 빼앗는 게 상책이었는데 말이야.”눈앞의 여자가 제멋대로 이익 배분을 최저로 낮추지만 않았어도 당씨 가문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등을 돌리진 않았을 텐데.“뭐야, 날 탓하는 거야?” 안세리가 미간을 찌푸렸다.“아니 아니, 내가 어떻게 널 탓하겠어?”송영민이 서둘러 미소 지었다. “주로 당지효 남매가 은혜를 모르는 거지. 우리가 10%나 양보했는데도 고마워하기는커녕 무례하게 굴다니, 정말 낯짝도 두껍네!”“흥! 그러게.” 안세리의 표정이 누그러졌다.“그런데 세리야, 방금 당지태의 태도를 보니 뭔가 대책이 있는 것 같던데, 혹시 그럴까?” 송영민이 문득 말을 꺼냈다.“당씨 금창약이 우리 회춘약 앞에선 쓰레기일 뿐이야. 무슨 대책이 있겠어?” 안세리가 비웃었다.말을 마치자 그녀는 뭔가 떠오른 듯 미간을 찌푸렸다. “잠깐... 우리가 누군가를 잊은 것 같아.”“유진우 말이야?” 송
유진우가 손을 멈추자 그제야 뒤에 서 있던 유공권이 입을 열었다.그는 계속 지켜보고만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아무리 뛰어난 의술이 있어도 적절한 약재가 없으면 병을 고칠 수 없는 법이다.“아저씨는 일단 안정되셨습니다. 하지만 이 상태가 얼마나 유지될지 모르겠어요. 빨리 약재를 모아 세골단을 만들어야 해요. 그래야만 완전히 치료할 수 있습니다.” 유진우의 표정이 무거웠다.진기로 목숨을 이어가는 건 임시방편일 뿐, 근본적인 치료가 될 수 없었다.게다가 시간이 갈수록 사철수의 병세는 더욱 악화될 것이다.이대로라면 죽음밖에 없었다.“제가 무능해서 아직도 나머지 두 가지 영약의 행방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유공권의 얼굴에 죄책감이 가득했다.그는 의약계에서 꽤 유명한 인물이라 자신의 인맥을 통해 세 가지 영약을 빨리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결과는 크게 실망스러웠다.“유 명의께선 자책하실 필요 없습니다. 극품 영약은 우연히 만날 수 있을 뿐 구하기 힘든 법이죠. 우리는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유진우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은공께서 빨리 쾌차하시길 바랍니다.” 유공권이 두 손을 모으고 중얼거렸다.똑똑똑...그때,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유진우가 몸을 돌려 문을 열자 왕현이 밖에 서 있었다.“무슨 일이에요?” 유진우가 물었다.“형님, 밖에 형님을 찾는 사람이 있어요.” 왕현이 대답했다.“오? 누구죠?” 유진우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모르는 사람인데, 꽤 거만해 보이더라고요.” 왕현이 말했다.“가서 보죠.”유진우는 더 묻지 않고 한마디 던진 뒤 곧장 별장을 나섰다.이때, 별장 밖.검은색 랜드로버 한 대가 정문 앞에 서 있었다.체격이 좋고 얼굴이 강인해 보이는 젊은 남자가 팔짱을 낀 채 차 문에 기대어 서서 냉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이 사람은 바로 최웅이었다.“이봐! 드디어 나오는구나? 난 네가 겁쟁이 거북이가 될 줄 알았지!”유진우가 나오자 최웅이 콧방귀를 뀌며 몹시 불만스러운
한 시간 후.최웅이 랜드로버를 몰아 마침내 어느 무관 앞에 멈춰 섰다.무관은 규모가 매우 커서 마치 학교 같았고, 각종 시설과 프로그램이 완비되어 있었다.정문 앞에는 커다란 석비가 서 있었는데, 그 위에는 ‘천하무관'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천하무관은 천하회의 사업체였다. 강호를 통틀어 가장 강한 3대 문파는 천하회, 주술교, 그리고 검종이었다.천하회는 제자들이 전국에 퍼져 있어 모두 합치면 무려 10만 명에 달했다!게다가 대부분이 정예였다!3대 문파 중 천하회가 제자 수가 가장 많고 세력도 가장 컸다.반면 주술교는 신출귀몰한 능력으로 유명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을 죽이는 수법은 모든 무림인들의 악몽이었다.검종은 한 마디로 강했다.검종의 제자 수는 극히 적었지만 한 명 한 명이 말도 안 되게 강했다.괴물 같은 존재들이었다!검종 제자들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한 번 나타날 때마다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40년 전, 무림인들 세계에서는 천지를 뒤흔드는 큰 사건이 있었다.천하회의 한 고위 간부가 권력을 남용해 한 검종 제자의 분노를 샀다.그 검종 제자는 혼자서 칼 한 자루를 들고 천하회 본부까지 쳐들어갔다.그리고 혼자의 힘으로 천하회의 최정예 강자 백여 명과 맞서 싸웠다.결국 검종 제자는 전사했지만, 천하회의 백 명 강자들도 거의 다 죽거나 다쳤다.이로써 검종은 일거에 명성을 얻게 되었다!그 이후로 누구도 감히 검종 제자들을 건드리지 못했다.당시 천하제일이라 불리던 천하회는 처음으로 패배를 맛보며 치욕의 역사를 쓰게 되었다.“여기가 약속 장소인가?”유진우가 차에서 내려 ‘천하무관'을 자세히 살펴보았다.그는 천하회에 대해 꽤 잘 알고 있었다.무림인의 세력이라고는 하지만 그 배후에는 관방의 배경이 있었다.결국 연경에서 자리 잡고 세력을 키우려면 자금성의 그분 허락 없이는 불가능했다.어느 군주도 자기 집 문 앞에 통제할 수 없는 불안 요소가 존재하는 걸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어때? 겁나나?”최웅
“어린 나이에 참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구나.”최성이 고개를 저었다. “알아둬라, 여긴 남쪽 구역이 아니라 용호가 숨어 있는 연경이다. 네 그 서툰 무공으론 여기서 큰 물결을 일으킬 순 없어.”“어르신, 싸우려면 빨리 합시다. 저 시간이 없거든요.”유진우는 말하면서 하품까지 했다. 마치 잠에서 덜 깬 것 같은 모습이었다.최근 구세당을 재건하느라 바쁜 데다, 사람들에게 옥로고 만드는 법을 가르치고, 금수옥과 빙심연의 행방을 찾아다니느라 정신이 없었고 앞뒤로 다리가 부러질 것 같았다.최씨 가문에 이용 가치가 조금이라도 없었다면 이런 데서 시간 낭비할 생각도 없었을 것이다.“이 녀석! 무례하구나!”유진우의 거만한 행동에 최씨 가문의 자제들이 순식간에 분노했다.그들은 수많은 오만한 인물들을 봐왔지만, 유진우처럼 최씨 가문을 완전히 무시하는 녀석은 처음 보았다.정말 죽고 싶어 환장했나 봐!“유진우! 너무 건방지게 굴지 마. 우리 셋째 형이 오면 넌 끝이야!” 최웅이 얼굴을 굳혔다.“뭐? 아직 안 왔다고?”유진우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불평했다. “그럼 나를 왜 부른 거야? 차 마시며 수다 떨려고? 시간이 곧 돈이란 걸 모르나? 나 바쁘다고!”이 말에 현장은 순식간에 들끓었다.“젠장! 이 녀석 정말 건방져. 우리 최씨 가문을 완전히 무시하네!”“너무하다! 정말 너무해!”“빌어먹을! 어제 다리만 다치지 않았어도 오늘 내가 직접 그 녀석을 때려죽였을 텐데!”“......”최씨 가문 자제들이 분노로 가득 찼고 모두가 화가 났다.심지어 침착한 최성도 미간을 찌푸렸다.이 녀석, 일부러 사람들을 자극하는 건가? 아니면 정말 무지하고 오만한 건가?“삼촌! 참을 수가 없어요. 저 녀석 입을 찢어버리겠습니다!”이때 덩치 큰 남자 하나가 갑자기 일어섰다.그는 온몸에 살이 붙어 있고 험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체격은 최웅보다 더 크고 마치 살덩어리 산 같았다.이 사람의 이름은 최혁. 최씨 가문의 방계였지만 무도 재능이 뛰어나 최씨 가문의 핵심
최혁이 패했다. 그것도 아주 처참하게.그의 거대한 몸은 벽에 구멍을 내고 상반신이 박혀 움직이지 못했다.멀리서 보면 마치 벽에 걸린 그림 같았다.“아?”이 광경을 본 모든 사람들이 멍했다.하나같이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이었다.최혁이 맹렬히 돌진했을 때만 해도 승리를 확신했는데,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듯했다.“방금 뭐가 일어난 거지? 혁이 형이... 진 거야?”“어떻게 가능해? 형 같은 강자가 어떻게 저런 녀석한테 질 수가 있어?”“사고야! 분명 우연이야!”잠깐의 정적 후 현장은 술렁이기 시작했다.누구도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다.최혁은 천부적인 괴력에 횡련 고수로, 방어력이 칼날도 막을 정도였다.이런 고수가 유진우의 한 수도 막지 못했다니, 정말 믿기 힘든 일이었다.탁!최성의 손에서 차 잔이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완전히 굳어버렸고, 태연한 척하던 모습도 사라졌다.눈앞의 상황이 너무나 예상 밖이었다.최씨 가문에서 3위 안에 드는 천재 제자가 유진우에게 한 방에 패배하다니.단순히 방심한 건지, 아니면 실력 차이가 너무 큰 건지...“젠장! 그 녀석 만만치 않다고 했잖아!”최웅이 침을 꿀꺽 삼키며 전에 자신이 두들겨 맞았던 장면이 떠올라 두려워졌다.둘의 상황이 얼마나 비슷한가. 다만 최혁이 확실히 더 심하게 다쳤다.이를 보면 전에 유진우가 자신을 때릴 때는 전력을 다하지 않았던 모양이다.정말 무서운 녀석이군!“덩치는 크지만 별 쓸모 없어. 그저 움직이는 표적일 뿐이야.”유진우가 천천히 주먹을 거두며 말했다.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마치 아주 사소한 일을 한 것처럼.“이 녀석! 네가 방금 어떤 수를 썼지?!”최성이 갑자기 탁자를 내리치며 일어났다. 그의 눈빛이 날카로웠다.최혁의 몸은 칼날도 막아내는데, 한 방에 중상을 입힌다는 건 또래들로선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래서 그는 유진우가 분명 어떤 비열한 수를 썼을 거라 의심했다.“어르신, 내
혼자서는 자신이 없었지만, 함께 힘을 합치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그만!”그때, 무관 입구로 갑자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선두에 선 사람은 키가 크고 백발의 노인이었다. 노인의 얼굴에는 위엄이 서려 있었고 용처럼 걸어 들어오는 모습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것은 오랫동안 고위직에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강력한 기세였다.이때 노인의 옆에는 나라를 기울일 만큼 아름다운 절세미인이 함께 있었다. 여인의 이목구비는 정교하고 완벽했으며, 몸매는 아름답고 요염했다. 고고하고 고귀한 기품이 느껴졌고, 그녀의 모든 움직임에서 여왕다운 면모가 배어 나왔다. 그 여인은 바로 때맞춰 도착한 조선미였다!“무례하구나! 너희들은 누구냐? 감히 천하무관에 무단으로 들어오다니?!” 한 최씨 가문의 제자가 분노에 차 소리쳤다.“입 닥쳐!”최성의 안색이 크게 변하더니 최씨 가문 제자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그리고는 곧바로 방향을 돌려 노인 쪽으로 허둥지둥 다가가 공손히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진국공을 뵙습니다!”“뭐라고? 진국공이라고?!”이 말이 나오자 전체 분위기가 일변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매우 오만했던 최씨 가문의 자제들은 즉시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리며 쥐 죽은 듯 조용해졌고, 유난히 비천해 보였다. 현 조정의 국공으로서 그의 지위와 권세는 한 사람 아래 만 사람 위라고 할 만큼 높았다. 최씨 가문의 어르신이 만나도 예를 갖춰야 할 정도였다.“여긴 자금성이 아니니 예를 갖출 필요 없다.” 진학량이 담담히 말했다.“국공께서 귀한 발걸음을 하셨는데, 무엇 때문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최성이 조금 불안한 듯 물었다.진학량은 평소에 깊이 은거하며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공공연히 나타난 것을 보니 사람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특별한 가르침은 없다. 오늘 내가 온 건 순전히 구경하러 온 것뿐이니, 너희들은 할 일이나 해라. 나를 신경 쓰지 말고.” 진학량이 무
진학량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유진우의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알 수 없는 무형의 압박감이 밀려왔다.하지만 이런 상황은 이미 예상했던 터라, 꽤나 놀랐음에도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다.“저는 국공의 명성을 오래전부터 들어왔지만, 직접 뵌 적은 없습니다. 아마도 제가 대중적인 얼굴을 가져 국공께서 낯익게 느끼신 것 같습니다.” 유진우가 당당하게 설명했다.10년이 지나는 동안 그의 키, 외모, 그리고 분위기까지 모두 천지개벽할 정도로 변했다. 예전의 절친한 친구들조차도 단번에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그런가?”진학량이 다시 한 번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할아버지, 진우 씨는 정말 대단해요. 문무를 겸비했고 의술에도 정통해요. 전에 저를 여러 번 도와주기도 했어요. 연경 전체를 통틀어도 그만큼 뛰어난 젊은 인재를 찾기 힘들 거예요.” 조선미가 자랑스럽게 소개했다.자기 남자를 홍보하는 데 그녀는 언제나 열성적이었다.“허허... 이 계집애야, 너무 과장하는 것 아니냐.”진학량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연경엔 숨은 인재들이 많아. 대단한 사람들을 이루 헤아릴 수 없지. 이 녀석이 재주가 있다 해도 그 최고의 천재들과 비교하면 아직 멀었다.”“할아버지, 지금은 안 믿으시겠지만 곧 아시게 될 거예요.” 조선미가 신비롭게 미소 지었다.그녀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많은 일들은 직접 보아야만 진정으로 믿게 되니까.그녀는 확신했다. 유진우가 언젠가는 할아버지에게 큰 놀라움을 안겨줄 거라고.“자, 이제 자리에 앉지.”진학량이 한마디 하고는 몇 사람을 데리고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그의 뒤에 있던 호위들은 좌우로 나뉘어 서서 주변의 이상한 점을 경계했다.“최성 어르신, 이제 시작해도 좋겠네요.” 조선미가 담담하게 웃으며 구경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시작이라고요?”최성의 눈꼬리가 씰룩거렸다.어떻게 시작하지? 최혁도 졌는데, 일대일로는 지금 아무도 유진우의 상대가 되지 못할 텐데.최훈이 제때
최성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오늘이 바로 전의 치욕을 씻을 좋은 기회야. 유진우만 이기면 마음의 응어리를 풀 수 있고 너의 무도 수련도 한 단계 올라갈 거야!”최웅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욕을 하고 싶었지만 감히 그럴 수 없어 억지로 말했다. “삼촌, 저번에 다친 상처가 아직 다 낫지 않았어요. 혹시... 다른 사람으로 바꿀 순 없을까요?”“바꿀 게 뭐야! 그깟 작은 상처 가지고. 대수롭지 않아. 어서 올라가. 우리 최씨 가문의 체면을 구기지 마!” 최성이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네... 알겠습니다.”최웅은 울고 싶은 심정으로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원래는 구경하러 왔는데 오히려 자신이 희생양이 되다니,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싶었다.“최웅, 정말 나랑 싸울 거야?” 유진우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유진우! 우리 최씨 가문의 사내들은 결코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아. 오늘 내가 중상을 입긴 했지만, 너를 두려워하지 않아. 덤벼봐!”최웅은 겉으로는 의기양양한 모습이었지만 속으로는 애처롭게 울부짖고 있었다.‘형님, 제발 살살 해주세요. 우리 둘 사이에 무슨 원수가 있는 것도 아닌데 목숨 걸고 싸울 필요 없잖아요.’‘대충 두어 번 주고받다 말자고요. 다음에 밥이라도 사드릴게요.’“좋아! 역시 사내대장부로군!”유진우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전에는 좀 얕봤는데, 이렇게 기개가 있을 줄은 몰랐어. 정말 대단해!”“흥! 당연하지!” 최웅이 고개를 치켜들며 뿌듯해했다.“너같은 사람은 정말 드물어. 네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이번엔 전력을 다해 싸우겠어. 우리 생사를 하늘에 맡기자고!” 유진우가 공손히 인사를 했다.“엥?!”최웅의 두 다리가 풀려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형님, 저는 그냥 말로만 한 거예요.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실 필요 없잖아요?’칼날도 뚫지 못하는 최붕도 한 방에 반죽음이 됐는데, 자신이라면 얼마나 더 비참해질까?“최웅, 준비됐어? 이제 공격할 거야!” 유진우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아직 절 기억해주고 계셔서 감사합니다. 저 아직 살아있습니다.”유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성종의 과거사를 몰랐던 터라 갑자기 흥분한 모습을 보니 조금 의아했다.“살아있었다니... 정말 다행입니다.”은성종은 놀라면서도 기뻐했다.“벌써 10년이나 지났어요. 그사이 세자 전하께서 이렇게 성장하시다니...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그러네요. 10년 동안 많은 게 변했습니다.”유진우는 감탄하며 말했다.10년 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10년 후에는 아버지가 암살당했다. 10년 사이에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는 게 참으로 안타까웠다.“제후님, 아까 제 형을 보면 서경왕부를 전폭적으로 도와주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지금 형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약속을 어기진 않으실 거죠?”유천우가 떠보듯 물었다.“만약 세자 전하께서 왕위를 이어받으시겠다고 한다면 난 목숨을 걸고서라도 세자 전하가 왕의 자리에 앉도록 도와줄 거야.”은성종이 진지하게 말했다.조금 전까지 냉정하고 덤덤했던 모습과는 달리 지금의 그는 투지가 넘쳤고 온몸에서 전에는 본 적 없는 강렬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좋습니다. 제후님은 역시 약속을 잘 지키시네요.”유천우는 웃어 보이고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역시 형이 나서야 했어.’그가 아무리 애를 써도 은성종을 설득하지 못했는데 유진우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모든 게 쉽게 해결되었다.비록 10년이 흘렀지만 유씨 가문 천재라는 명성은 여전히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었고 만인의 존경을 받았다.“제후님, 제가 서경에 돌아온 사실을 아직 외부에는 알리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을 때까지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어요.”유진우가 당부했다.“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절대 입 밖에 꺼내지 않겠습니다.”은성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좋은 그는 당연히 유장혁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위왕이 호룡각의 잔당들에게 살해당했고 유태범은 왕위를 빼앗으려 혈안이 되어있었다. 정말 여러 가지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
“왕위를 이을 생각이 없다면서 왜 싸우려는 건데?”은성종이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전 서경왕이 될 자격이 부족하지만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게다가 그 사람은 유태범보다 더 어울려요.”유천우가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그게 누군데?”은성종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제 형님 유장혁입니다.”유천우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유장혁?”은성종은 실눈을 뜨더니 인정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세자 전하께서 서경왕이 되는 건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문제는 실종된 지 10년이 넘었고 감감무소식이라는 거야.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왕위를 이을 수 있겠어?”“제 형님은 죽지 않았고 이미 서경에 돌아왔습니다. 서경왕의 자리에 앉을 사람은 형님밖에 없습니다.”유천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말로만 해서는 안 돼. 증거가 있어?”은성종이 물었다.만약 유장혁이 정말로 서경에 돌아왔다면 벌써 서경 전체에 소문이 퍼졌을 것이다. 하여 유천우가 단지 그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핑계를 대는 것이라 생각했다.“제후님, 증거를 드릴 수는 있는데 그 전에 물을 게 있어요. 만약 제 형님이 왕위를 물려받는다면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실 겁니까?”유천우가 되물었다.“그건...”은성종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망설이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유천우가 하도 자신감이 넘쳐서 오히려 확신이 없어졌다.“제후님, 서경에는 좋은 왕이 필요합니다. 제 형님보다 더 서경왕에 적합한 사람은 없어요. 제후님도 잘 알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유천우가 말했다.“그래. 만약 내가 직접 세자 전하를 만난다면 널 도와줄게. 만나지 못하면 다른 사람한테 부탁해야 할 거야.”은성종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약속하는 겁니다.”유천우는 웃으면서 유진우를 돌아보았다.“형, 이젠 형이 나설 때가 됐어요.”유진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무 말 없이 얼굴에 쓰고 있던 가면을 벗고 본모습을 드러냈다.“당신은...”은성종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믿을
은성종은 유천우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자신과 유천우에게 술 한 잔씩 따라 주었다. 그리고 잔을 가볍게 부딪친 후 술을 단숨에 마셨다.“좋은 술이군.”은성종은 혀를 차면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유천우도 다그치진 않고 술을 다 마신 다음 은성종을 바라보며 말하기를 기다렸다.“유태범이 나한테 손을 잡자고 하더라고. 엄청난 이익을 약속했지만 모두 거절했어.”이 말을 들은 유천우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이어진 은성종의 말에 살짝 당황했다.“아직 너무 기뻐하진 마. 유태범의 제안을 거절하긴 했지만 너도 도울 생각은 없어.난 전쟁을 싫어해서 중립을 선택할 거야.”은성종이 솔직하게 말했다.“중립이라고요?”유천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바로 설득했다.“제후님, 서경의 일원으로서 서경이 무너지는 걸 그냥 보고만 계실 겁니까?”“난 능력이 부족해서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어.”은성종이 고개를 내저었다.“그리고 난 야심이 없어서 그저 편안하게 살고 싶어. 이런 권력 다툼에는 참여하고 싶지 않아. 내가 가진 작은 땅만 잘 지킬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해.”은성종이 잠깐 멈칫하다가 또 말을 이었다.“솔직히 말해서 너랑 표기 대장군 모두 유씨 가문의 핏줄이라 누가 서경왕이 되든 나한테는 아무런 차이가 없어. 말이 반란이지, 그저 왕위 다툼일 뿐이야.”“그건...”유천우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상대방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천우야, 난 성격이 솔직한 편이라 혹시 불쾌한 점이 있다면 부디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은성종이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제후님이 평화를 바라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전쟁이 시작되면 제후님도 무사하지 못해요.”유천우가 다시 설득했다.“태평은 변경의 작은 도시이고 가난하고 가진 게 없어서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여기까지 쳐들어올 일은 없어.”은성종이 담담하게 말했다.“게다가 이미 유태범과도 합의했어. 내가 싸움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태평에는 절대 쳐들어오지 않겠다고.”“제
“제후님께서 도련님이 오실 걸 알고 저더러 미리 나와 기다리라 하셨습니다.”늙은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내가 올 걸 알고 있었다고요?”유천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면서 옆에 있는 유진우를 쳐다봤다. 저도 모르게 불안감이 밀려왔다.은성종이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건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었다.제갈영군이 전화로 알렸거나 유태범의 사자가 먼저 와서 선수를 친 것이다.“도련님, 제후님께서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늙은 집사가 허리를 굽히면서 손짓으로 안내했다.유천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여기까지 온 이상 중간에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아무리 위험한 곳이라고 해도 뚫고 나가야 했다.일행은 늙은 집사를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여러 시설을 지난 후 식당에 도착했다.식당 안에 푸짐한 음식과 술이 준비되어 있었다. 음식 냄새와 술 냄새가 뒤섞여 식욕을 돋우었다.유천우 일행은 하루 종일 이동하느라 식사할 시간도 없었다. 눈앞에 차려진 푸짐한 음식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고 배에서도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도련님, 먼 길을 오느라 배고프실 텐데 식사부터 하시죠.”늙은 집사가 공손하게 말했다.“제후님은요?”유천우가 물었다.“곧 오실 것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늙은 집사가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유천우는 웃으면서 손짓했다.“너희들, 얼른 와서 먹어.”“네.”근위병 몇 명은 대답을 마치자마자 바로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맛보기 시작했다.훈련을 잘 받은 근위병들은 3일 밤낮으로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이렇게 행동하는 건 음식에 독이 든 건 아닌지 유천우 대신 시험해보기 위한 것이었다.항상 방심해서는 안 되었다. 만약 은성종이 음식에 약을 넣었다면 그들이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도련님, 아무 문제 없습니다.”모든 음식을 다 맛본 후에야 근위병들은 유천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유천우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더
해 질 무렵, 유천우와 유진우 일행은 변경 요새 도시인 태평에 도착했다.태평은 회음 제후 은성종의 영역이었고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낙후한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은성종의 통치 아래 짧은 10여 년 만에 서경에서 5위 안에 드는 도시가 되었다. 군사, 경제, 정치, 문화, 교육, 의료까지 모든 면에서 최고 수준을 자랑했다.태평이 오늘날의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건 은성종의 뛰어난 재능과 지식 덕이었다.만약 제갈영군이 난세의 영웅이라면 은성종은 세상을 다스린 명신이었다.그 시각 회음 제후 저택 밖.검은색 승합차 한 대가 길가에 천천히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자 유진우와 유천우 일행이 잇달아 내렸다.“형, 여기가 마지막 목적지예요.”유천우는 저택 간판을 바라보면서 감탄했다.“회음 제후 은성종은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울 뿐만 아니라 마음이 따뜻하고 의협심도 강해요. 게다가 제갈영군의 편지까지 있으니 이번에는 문제없을 겁니다.”“섣불리 판단해선 안 돼.”유진우는 고개를 내저었다.“마지막 순간이 될수록 더욱 긴장을 늦추면 안 돼. 은성종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서 유만수조차도 은성종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지 못했어. 아무도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혹시 변수가 생길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유천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유태범이 이미 제갈영군과 연락했으니까 분명히 은성종과도 접촉했을 거야. 은성종이 유태범한테 설득당해서 유태범의 진영에 합류할까 봐 걱정돼.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지금 저택에 들어가는 건 죽음을 자초하는 거나 마찬가지야.”유진우가 분석했다.유태범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표기 대장군까지 오른 사람이라면 지혜와 용맹을 모두 갖추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건 유태범도 당연히 생각했을 것이다.유천우 일행이 사방에서 사람들을 모으고 있을 때 절대 가만히 보고만 있을 유태범이 아니었다.전에 제갈영군을 끌어들이려고 도시 두 개를 제시했다는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남쪽 4대 제후 중에서 장범규는
제갈영군의 날카로운 눈빛과 창을 바라보면서도 유천우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제후님, 도시 두 개의 유혹이 매우 큰 건 사실입니다. 저였더라도 거절하지 못했을 거예요. 만약 제후님이 제 목숨으로 도시 두 개를 바꾸고 싶으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표하면서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그래? 죽는 게 두렵지 않아?”제갈영군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말했다.“아니면 내가 감히 널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죽는 건 당연히 두렵습니다. 살 수 있다면 죽음을 택하지 않아요.”유천우가 담담하게 말했다.“게다가 제후님은 여러 해 동안 전쟁을 치르시면서 앞길을 막는 자는 전부 다 죽였죠. 그런 분이 저의 목숨 따위 가져가는 건 순간일 것이고 힘을 들일 필요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죽는 게 두렵다면서 왜 이렇게 태연한 거지?”제갈영군은 조금 의아해했다.“죽는 걸 두려워하는 건 한 가지 일이고 죽음을 맞이할 용기가 있는 건 또 다른 일입니다. 저택에 들어온 순간부터 최악의 상황까지 대비했습니다.”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게다가 제후님이 정말로 저를 죽이려고 한다면 도망갈 수도 없어요. 차라리 깔끔하게 죽는 게 그나마 고통을 덜 수 있다고 생각해요.”“재밌는 녀석이군.”제갈영군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더니 천천히 창을 내려놓았다.“피는 못 속인다더니 오늘 보니까 맞는 말 같군. 유씨 가문에는 쓸모없는 자식이 하나도 없어.”“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후님.”유천우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됐어. 농담 그만할게. 유태범의 부하들이 날 찾아온 건 맞지만 이미 내가 다 죽였어.”제갈영군이 손가락을 튕기자 곧바로 몇 명의 호위병이 시신을 끌고 와 유천우의 발밑에 던졌다.“자, 얘네들이 유태범이 보낸 사람들이야.”제갈영군은 발로 시신을 툭툭 치면서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제후님, 유태범이 주겠다는 도시 두 개를 포기하겠단 겁니까? 전 그렇게 좋은 걸 드릴 수
한바탕 공격이 지나간 후 연무장에는 제갈영군 혼자만 남았다.“실력이 점점 더 형편없어지는구나. 앞으로 더 열심히 훈련하도록 해. 알았어?”제갈영군이 호위병들에게 호통쳤다.“네.”호위병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됐어. 모두 나가 봐.”제갈영군은 손을 휘둘러 호위병을 전부 내보낸 다음 돌아서서 유천우 일행을 쳐다보았다.“제후님의 창술은 정말 신이 내린 창술입니다. 서경 전체를 통틀어 적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정말 존경합니다.”유천우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아무 일 없이 여기까지 올 리는 없을 테고. 무슨 일로 이 먼 곳까지 왔지?”제갈영군은 수건을 들고 땀을 닦기 시작했다.“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실례도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유천우가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표했다.“네 아버지 때문에 왔지?”제갈영군은 마치 예상한 듯 전혀 놀라지 않았다.“제후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유천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서경왕이 암살당한 게 얼마나 큰일인데 내가 모를 수가 있겠어?”제갈영군은 차를 마시면서 혼자 자리에 앉았다.“그럼 북쪽 4대 제후가 반란을 일으킨 것도 알고 계십니까?”유천우가 다시 물었다.“소문은 들었어.”제갈영군이 고개를 끄덕였다.“제후님은 충의로운 분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부디 위기에 처한 서경왕부를 도와주십시오.”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허리 굽혀 인사했다.“만약 네 아버지가 왔다면 난 당연히 도왔을 거야. 왜냐하면 난 그분을 존경하거든. 근데 넌... 아직 자격이 부족해.”제갈영군은 찻잔을 들어 한 번에 다 마셔버렸다. 내뱉는 말도 매정하기 그지없었다.유천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곧바로 평정을 되찾았다.그는 제갈영군이 오만하고 변덕이 심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저택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난처함을 겪을 준비를 마쳤다.“제후님, 아버지와 비교하면 전 정말 보잘것없고 제후님께 뭔가를 요구할 자격도 없다는 걸 알고 있어요.”유천우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하지만 전 유씨 가문 사람이
다음 날 오전, 남운.유진우와 유천우는 밤을 새워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목적지인 남운에 도착했다.남운은 무릉 제후 제갈영군이 지키고 있었고 남쪽 4대 제후 중에서도 병력이 가장 많으며 경제력이 가장 강한 도시였다.하지만 제갈영군은 성격이 괴팍하고 변덕이 심해서 화를 내면 유만수의 체면조차 봐주지 않았다. 하여 유천우는 제갈영군을 설득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형, 무릉 제후 저택에 도착했어요.”차가 멈춘 후 유천우와 유진우 일행이 잇달아 차에서 내렸다.“벌써 둘째 날이야. 네가 제후 저택을 다니고 있다는 소식이 곧 알려질 테니 서둘러야 해.”유진우가 당부했다.“알고 있어요.”유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제갈영군은 다루기 힘든 사람이지만 또 함부로 배신하는 소인배는 아니에요. 충분한 대가를 제시하고 감정으로 호소하면 설득할 수 있을 거예요.”“그럼 좋고.”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들어가자.”유천우는 옷을 정돈하고 얼굴을 매만져 정신을 차린 후 발걸음을 옮겨 저택 호위병에게 신분을 밝혔다.전과 마찬가지로 일행은 순조롭게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하지만 이번에 만난 장소는 저택의 거실이 아니라 제갈영군의 개인 연무장이었다.모두가 알다시피 제갈영군은 무술광이었다. 평소 직접 군대를 이끌고 훈련을 했기 때문에 그가 이끄는 장병들 모두 용맹하고 뛰어났다.“도련님, 제후님 지금 안에서 훈련 중이십니다. 들어가 보십시오.”호위병은 그들 일행을 연무장 문 앞까지 안내한 후 가버렸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연무장 가운데서 건장한 체격에 온몸이 근육질인 중년 남자가 수십 명의 정예 호위병과 함께 훈련하고 있었다.중년 남자는 창을 들고 위풍당당하게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양손으로 창을 휘두르자 창이 용이나 뱀처럼 움직였는데 민첩할 뿐만 아니라 파워도 넘쳤다.주변에 칼과 방패를 든 수십 명의 정예 호위병들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났고 공격을 전혀 막아내지 못했다.이들은 제후 저택의 정예병으로서 혼자서 백 명을 거뜬히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을 지녔다
“여봐라. 가서 펜과 종이를 가져와.”주한휘는 바로 부하에게 펜과 종이를 가져오라고 하고는 혼약을 맺을 준비를 했다.이런 기회는 좀처럼 얻기 힘든 좋은 기회였다. 딸이 서경왕부에 시집간다면 미래의 왕비가 될 것이다. 그러면 그의 외손자가 차기 서경왕이 될 가능성이 있다.이 내기는 어떻게 계산해도 이익밖에 없었다.“도련님, 잠깐만요. 인생의 중대사인데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야죠.”유진우가 귀띔했다.“뭐?”주한휘가 얼굴을 찌푸리면서 불만을 드러냈다.‘호위병 주제에 어디서 지적질이야? 버르장머리 없이. 만약 내 부하였더라면 진작 매를 들었어.’“설득할 필요 없어. 난 이미 결정했어.”아직 유진우의 정체를 들켜선 안 되기에 유천우도 호위병을 대하듯 했다. 유천우는 유진우를 돌아보면서 웃었다.“제후님의 따님은 얼굴도 예쁘고 현명해서 그런 여자와 결혼하는 건 내 복이야. 복이 스스로 굴러들어왔는데 거절할 이유가 있겠어?”“역시 넌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까.”주한휘는 기회를 놓칠세라 바로 추켜세웠다.“도련님...”유진우가 뭐라 얘기하려던 그때 주한휘가 호통쳤다.“건방진 놈! 감히 주인의 결정에 끼어들어? 버르장머리 없이.”유진우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분노를 터트리려 하자 유천우가 말렸다.“됐어. 난 이미 결정했으니까 더는 뭐라 하지 마.”그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혼약서에 사인하고 지장을 찍었다.유진우는 마음 아픈 나머지 한숨을 내쉬었다.‘내 동생 많이 컸구나. 이젠 무슨 일을 하든 항상 대국을 생각하고.’이 점은 유진우마저도 따라갈 수 없었다.“제후님, 혼약도 정해졌으니 부디 약속을 지키시길 바랍니다.”유천우가 두 손을 맞잡고 인사했다.“걱정하지 마. 앞으로 우린 한 가족이야. 서경왕부에 무슨 어려움이 있든 발 벗고 도와줄게.”주한휘가 가슴을 툭툭 치면서 장담했다.“감사합니다, 제후님. 전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유천우는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인사했다.“내가 문 앞까지 배웅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