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강한 시의 구르미 빌리지

"임지환, 이혼 서류에 사인해. 너도 알잖아, 지금 네 신분으로는 배 대표님한테 안 어울린다는 거. 배 대표가 너 불쌍하게 생각해서 보상도 많이 해줬어, 집 한 채에 차 한 대, 그리고 회사 주식이랑 현금 10억 준다고 했다니까. 이거 가지고 무슨 여자를 못 찾겠어?"

오피스룩을 입은 한 여자가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남자 옆에 서서 쉬지 않고 말했다.

여자의 짧은 치마 밑으로 검정색 스타킹을 신은 두 다리가 길게 뻗어있었다. 얼굴도 예쁘장한 여자는 무척 성숙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앞치마를 두른 채 설거지에 집중했다.

그는 날카로운 눈과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덕에 남자다워 보였다.

잘생겼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다른 이가 싫어할 상은 아니었다.

"임지환, 너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네가 원하든 말든 너 이혼 꼭 해야 돼."

말이 통하지 않는 임지환을 보며 여자가 화를 냈다.

임지환은 묵묵히 마지막 접시 하나를 선반 위에 올려놓더니 앞치마를 벗어 담배에 불을 붙이곤 여자를 바라봤다.

여자는 바로 남자의 와이프 배지수의 비서 겸 사촌 언니 한수경이었다.

"이유라도 알려줘요."

"뭐?"

임지환의 말을 들은 한수경이 멈칫했다.

"처형, 지수가 이혼하고 싶은 거라면 이유가 있어야 할 거 아니에요."

임지환이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말했다.

“처형이라고 부르지 마, 나는 너 같은 매제 둔 적 없으니까."

한수경이 임지환을 흘겨보며 다시 말했다.

"배 대표가 너랑 이혼하겠다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해?"

"왜 이유가 필요 없죠?"

임지환이 담담한 얼굴로 반문했다.

"그래, 네가 알고 싶다면 내가 다 말해줄게. 지금 배 대표 사업이 잘되어서 진씨 집안이랑 사이도 좋고 승승장구하고 있거든. 그런데 너는 그냥 쓰레기일 뿐이잖아, 그런 네가 어떻게 배 대표한테 어울리겠어? 방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 말을 들은 임지환이 씁쓸하게 웃었다.

"제가 지수한테 안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였군요."

임지환은 배지수와 결혼을 한 뒤, 성실하게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다 하기 위해 애썼다.

배지수가 금방 회사를 차렸을 때, 임지환은 늘 묵묵히 그녀를 도와주며 함께 밤을 새워 방법을 생각해 줬다.

밤이나 낮이나,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늘 직접 운전해 배지수의 출퇴근을 도우기도 했다.

게다가 주동적으로 모든 집안일을 맡아 배지수가 다른 걱정을 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애썼다.

그런데 배지수는 회사의 규모를 키우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임지환을 떠나려고 했다.

정말 이렇게 가차 없이 굴 필요가 있을까?

"진씨 집안?"

한 마디 중얼거린 임지환이 차갑게 웃었다.

진씨 집안도 임지환이 자신의 관계를 이용하여 몰래 배지수를 도와 엮어준 것이었다.

이런 운명의 장난이라니.

"응, 그러니까 너는 이제 배 대표한테 어울리지 않아."

한수경이 이혼서류를 테이블 위로 내려놓으며 말했다.

"눈치 챙기고 얼른 이혼서류에 사인해."

"만약 제가 사인하지 않겠다고 하면요?"

임지환이 반문했다.

"사인 안 하면 나 너 같은 건 얼마든지 괴롭힐 수 있어."

한수경이 건방진 얼굴로 말했다.

"회사 법무팀도 그저 월급 받는 게 아니야, 이런 이혼소송은 식은 죽 먹기 아니겠어?"

한수경이 두려울 것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런 한수경을 바라보던 임지환이 갑자기 말했다.

"사인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무슨 조건?"

한수경이 귀찮다는 듯 물었다.

"지수가 직접 저 찾아와서 말하는 거요."

"네가 뭐라고? 아직도 자기 주제를 그렇게 모르겠어?"

한수경이 기가 찬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배 대표 지금 바빠서 너랑 이런 얘기할 시간 없어!"

"그럼 저 사인 못해요."

그 대답을 들은 임지환이 단호하게 말했다.

"좋은 말로 할 때 사인해. 지금이라도 당장 사람 불러서 너 여기에서 나가게 하는 수가 있어."

한수경이 화가 나 말했다.

"마음대로 해보세요."

임지환의 눈빛에 차가움이 스쳐 지나갔다.

"언니, 내가 얘기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