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연이 비틀거리면서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연도진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안경 너머로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넋을 놓았다. 머리 속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그녀는 무슨 조폭 마누라마냥 그를 복도에서 가로막았었다.“연도진. 나 너 좋아해. 내 남자 친구 해라. 어때?”지금도 그녀의 성격은 그다지 바뀌지 않았는데 호칭은 쓰레기로 변했다.김시연은 민지훈이 일부러 이슬비의 승부욕을 자극해서 동창회를 열게 만들었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는 이슬비가 무조건 도발을 할 것이라 생각했고 김시연이 성격을 참지 못하고 이슬비의 도발에 넘어가서 동창회에 참가할 거란 것도 알았다.올 때 문 앞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엄청난 정신력으로 겨우 평정을 유지했다.김시연은 룸 앞에까지 가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룸에 있던 모든 사람이 대화를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김시연은 원형 테이블에 사람이 하나도 없고 테이블 근처에도 사람이 안 보이자 이상함을 눈치챘다.종업원이 이미 테이블을 치웠다고?온하랑은?소파에 있던 중년의 남성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아가씨, 혹시 방 잘못 찾아온 거 아니에요?”김시연은 말을 한 사람을 바라보면서 어리둥절하게 머리를 긁적였다.언제부터 저렇게 나이 많은 동창이 있었지?담임이 찾아온 건가?이주혁은 몸을 일으켜 중년의 남성에게 사과의 뜻을 담아서 웃으면서 말했다.“죄송합니다. 제가 데려다주고 올게요. 시연 씨. 나가요.”중년의 남성은 어느 프로그램의 피디였는데 이주혁은 그 프로그램에 나가고 싶어서 피디를 매니저랑 같이 이번 점심 식사 자리에 초대한 것이었다.누구도 김시연이 갑자기 쳐들어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가까이 다가서자, 이주혁은 김시연 몸에서 풍기는 짙은 술 냄새를 맡아냈다. 불그스레한 얼굴을 보니 적잖이 많이 마신 듯했다. 어쩐지 조금 어리벙벙해 보였다.김시연은 고개를 들고 멈칫하더니 눈을 깜박였다.“이주혁 씨? 어떻게 우리 동창회에 있어요?”이주혁은 그녀의 팔을 밖으로 끌면서
눈앞에 있는 사람의 모양새를 보면 김시연이 정신없는 틈을 타서 무슨 짓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김시연은 이주혁의 옷깃을 끌어당기면서 말했다.“이주혁 씨는 낯선 사람 아니야. 이주혁 씨는 내 친구야!”이주혁은 연도진을 보면서 눈썹을 치켜뜨면서 되물었다.“들으셨어요?”연도진도 이주혁을 보면서 말했다.“취했잖아요. 룸도 못 알아보는데 친구도 못 알아볼 수 있죠!”오고 가는 눈빛에서 불꽃이 튕기는 것만 같았다.누구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하지만 룸 안에는 아직 손님이 있어서 이주혁은 오래 자리를 비우기가 난처했다. 그는 눈빛을 거두고 고개를 돌려 김시연에게 물었다.“누구랑 같이 왔어요.”“하랑이요. 온하랑 어디 갔어요? 왜 저 안 기다렸대요?”김시연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호기심에 차서 물었다.이주혁은 그 말을 듣고 바로 물었다.“온하랑이 어느 룸에 있는데요. 제가 가서 데려올게요.”눈앞의 남자가 취한 김시연을 데리고 가는 건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연도진은 그를 보고 담담하게 말했다.“0307.”이주혁은 고개를 돌려 몸 뒤의 김시연을 쳐다봤다.“온하랑 찾으러 같이 갈까요?”“좋아요!”김시연은 병아리처럼 대답했다.“가죠.”김시연은 이주혁의 팔뚝을 잡고 얌전하게 그를 따랐다.그녀는 둘 사이에서 이주혁을 더 믿는 게 보였다.연도진은 한 발짝 떨어져서 걸었다. 안경 너머의 눈빝은 더없이 깊었다. 연도진은 아무 소리도 없이 따라 걸었다.룸은 딱 두 개 문을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연주혁이 바로 문을 열고 옆으로 섰다. 그러고는 이주혁을 흘겼다.이주혁은 들어가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온하랑을 찾았다.온하랑도 그와 김시연을 발견하고 바로 일어났다.“이주혁?”“하랑 씨!”김시연은 그녀를 보고 헤헤 웃으면서 안겼다.온하랑은 중심을 잡고 김시연의 허리를 안았다.“어떻게 여기 있어?”이주혁은 연주혁에 대한 적의를 거둬들이고 다정하게 웃으면서 말했다.“여기서 밥 먹고 있는데 방을 잘못 찾아왔더라고.”“고마워.”온하랑은 김시연
주위에서 몰래 속닥거리던 사람들도 이 말을 듣고 시선을 보내왔다.주위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온하랑은 잠깐 멈칫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이주혁은 저희 친구예요.”친구들이 부러운 눈길을 보내면서 온하랑에게 말했다.“그럼, 하랑 씨, 시연아. 이주혁 싸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저도 갖고 싶어요. 부탁할게요...”“나도, 나도. 시연아, 고마워. 고마워요 하랑 씨.”“나도 갖고 싶어. 시연아...”온하랑이 채 말하기도 전에 김시연이 가슴을 치면서 승낙했다.“그래! 문제없어!”“너무 좋다, 시연아!”“고마워, 시연아!”“시연아, 너 이주혁이랑 엄청 사이좋지? 무려 직접 데려다주기까지 하잖아.”온하랑은 눈빛이 어두워졌다.많은 친구가 김시연을 둘러싸고 말했다.이슬비는 이 모습을 보자 눈에 질투가 어려서 주먹을 움켜쥐었다.왜?왜 사람들은 그녀보다 김시연을 더 좋아해 주지? 친구들도 그렇고, 온하랑도 그렇고?내가 김시연한테 꿀리는 게 뭔데?또 다른 사람이 물었다.“시연아. 다른 아는 연예인 있어?”김시연은 트림을 하고는 말했다.“있지. 무슨...”그녀는 손가락을 접으면서 연예인들의 이름을 대려는 순간이었다.온하랑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시연 씨, 배불리 먹었어요?”“배불러요.”김시연은 바로 화제가 바뀌었다.“술은? 술은 어딨어? 난 술 마실래!”“안 돼요. 더 마시면 안 돼요. 돌아갈 때가 됐어요.”“싫어요. 난 더 마실래요!”김시연은 미간을 누르면서 손을 뻗어 온하랑의 팔을 붙잡았는데 이미 눈이 풀려 있었다.“안 돼요.”온하랑은 일어나서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집에 가야 해요.”“아유. 하랑 씨. 시연이가 가기 싫어하는데 그냥 조금 더 앉아 있다 가세요.”옆에 있던 친구가 권했다.김시연은 고개를 들어 온하랑을 보면서 애 같은 표정으로 입을 뚱하게 내밀었다.“안 갈 거예요. 마실 거라고요!”온하랑은 어쩔 수 없이 몸을 숙여 작게 귓속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이슬비랑 연도진이 당신 술주정 부리는
만약 이번 동창회가 아니었다면, 그 복잡한 일은 아마 영원히 그녀 마음속 깊은 구석에 숨겨졌을 것이다.온하랑은 그제야 김시연이 인터넷에서 남자 모델들 사진을 수집하는 걸 좋아하고 남자를 불러 같이 술을 마시고 노래는 불러도 연애는 안 하는지 알 것 같았다.아마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한 번도 연도진을 잊어 본 적이 없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에게 상처를 크게 받아서 다시는 사랑을 믿지 않게 된 걸지도 모른다.“...내가 그렇게 비굴하게 다시 만나자고 빌었는데... 남아 달라고 바랬는데, 그래도 갔어요... 그렇게 7년을 떠났으면, 돌아오긴 왜 돌아와?”김시연은 목이 메었다.물기에 젖은 목소리가 떨리자 듣는 온하랑의 마음도 아팠다.그녀는 김시연이 이렇게까지 억울해하는 건 처음 봤다.7년 전, 김시연이 갓 대학에 붙었을 시점이었다.“하랑 씨. 제가 얼마나 걔를 좋아했는지 모를 거예요... 부모님은 제가 유학 가길 바랐는데 걔 놓치기 싫어서, 제가 부모님 설득해서 남았거든요... 근데, 걔는 갑자기 가버렸어요... 일말의 여지도 안 남겨주고... 돌아오면 돌아왔지... 왜 굳이 다시 내 앞에 나타나냐고...”김시연은 뒤에서 뭐라 중얼거렸지만 소리가 점점 더 작아져서 온하랑은 제대로 듣지 못했다.그러다가 그녀는 뒷좌석에서 잠이 들었다. 얼굴에는 이미 마른 눈물자국만 남아 있었고 입은 여전히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집에 도착하자 온하랑은 조용히 내려서 부시아를 데려왔다.그는 미리 부시아에게 말했다.“시연 이모가 뒷좌석에서 자고 있으니까, 조수석에 앉아. 차에서 큰 소리로 말하면 안 돼.”부시아는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차가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 지하 주차장에 주차했다.온하랑은 김시연을 깨웠다.“시연 씨, 일어나 봐요. 집에 도착했어요! 집에 가서 자요.”두 번을 불러서야 김시연은 한쪽 눈만 뜨고 눈물이 나올 정도로 하품했다.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창밖을 보면서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집 도착했어요?”“네. 올라가서 자요.
온하랑은 부시아의 손을 잡고 김시연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온하랑이 문을 열 때, 김시연이 감탄하면서 말했다.“그거 봐요. 부지런이랑 연도진 같은 사람들은 다 조금만 성공하면 쓰레기가 된다니까. 아무래도 그들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렇겠죠?”온하랑이 들어가면서 말했다.“맞아요.”“아, 민지훈 씨랑은 어떻게 됐어요? 둘이 잘 어울리는 거 같은데 만약 마음이 변하는 거 같으면 바로 차버려요.”김시연은 바로 소파에 누웠다.“아직 만나보고 있어요. 이번 주는 바쁘대요.”온하랑이 담담하게 말했다.옆의 부시아는 소파에 앉아있다가 두 사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제야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고개를 들고 물었다.“숙모, 부지런이 삼촌이에요?”“음...”온하랑은 약간 난감해졌다.“왜 삼촌이 지런인 거예요?”김시연이 말했다.“시아야, 내가 알려줄게. 네 삼촌이 다른 여자의 말에 쉽게 넘어가 지X을 해서 부지X이 될 뻔했는데 부지런으로 고쳐준 거야. 알겠어?”부시아는 의아해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부승민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온하랑의 경고를 떠올리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김시연은 씻자마자 바로 잠에 들었다.온하랑은 부시아와 놀아준 후 누웠다. 침대에 누운 그녀는 품에 부시아를 안고 물었다.“아주머니의 손자는 다 나았대?”“아니요. 오늘 전화해봤는데 심하게 아프대요. 폐렴으로 된 것 같아요.”“그럼 확실히 심하네. 내일 본가에 데려가 줄게. 내가 가서 봐야겠어.”“나도 가고 싶어요.”“안돼, 넌 아직 어려. 옮으면 어떡해.”부시아는 입술을 비죽 내밀고 애교했다.“마스크 끼면 안 돼요? 숙모, 제발 가게 해줘요! 숙모가 최고인데...”부시아는 머리를 온하랑의 몸에 대로 비볐다.온하랑은 또 마음이 약해져 허락할 뻔했다.“안돼. 시아야. 네 할머니는 나를 별로 안 좋아하셔. 그런데 나랑 있다가 병이라도 옮으면 네 할머니는 우리가 만나는 걸 반대할 거야. 알겠어?”부시아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고 입을 비죽 내밀었다.“네.”
사설탐정은 워낙 다른 사람의 보복을 당하기 쉬운 직업이므로 서우현은 가족 관계를 깊숙이 숨겨왔지만, 결국 들통나버리고 말자 간담이 서늘해졌다.[미안해요, 하랑 씨. 제가 혼자의 몸이라면 두렵지 않았을 테지만, 제 가족들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어요. 정말 미안합니다...]서우현은 간곡하게 설명했다. 온하랑도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이해해요, 우현 씨. 그리고 그동안 도와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저도 더 강요하지 않을게요. 나머지는 계약서대로 하세요.][이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당신의 정보를 유출하지 않을 겁니다. 부디 하루빨리 진실을 밝혀내 아버님 원수를 꼭 갚으시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답장을 보내고 휴대폰 화면을 꺼버린 온하랑은 멍하니 있었다. 그들이 서우현을 찾을 수 있다면 온하랑도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그러나 그녀는 아직 아무런 협박도 받지 않았다. 하긴 그녀도 아버지의 죽음이 그 납치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다른 사람들이 모르니 그들은 당연히 온하랑도 모른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녀는 떠올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저 서우현이 다른 이유로 그 납치 사건을 조사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할 터였다.다만 이제 서우현의 정보는 끊겨버리고 민지훈만 남았다. 온하랑은 민지훈에게 접근하기로 결심했지만, 그를 좋아하지 않는 마음은 여전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은근히 밀어내고 있었고, 항상 민지훈이 주동적으로 다가왔었다.하지만 요즘 민지훈은 그녀에게 조금 마음이 식은 것 같았다. 계속 이렇게 내버려두면 안된다. 온하랑은 결심을 굳히고 주동적으로 민지훈에게 문자를 보냈다.[한 주가 벌써 지나가네요. 요즘 회사 일은 어때요? 많이 바빠요?”휴대폰 화면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 몇 분이 지났지만 민지훈에게서 계속 답장이 오지 않았다. 온하랑은 휴대폰을 꺼버리고 옆에 놓았다. 그녀는 돌아눕자마자 부시아의 크고 동그란 눈과 마주쳤다. 왠지 모르게 온하랑은 마음이 뜨끔해졌다. 그녀는 목청을 가다듬고 부시아의 머리를
아침을 먹은 후 온하랑은 먼저 본가에 전화했다. 부승민이 집에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부시아를 집에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혼자 선물을 사 들고 안문희의 손자 병문안을 다녀왔다.병실에서 나온 온하랑은 주차장으로 걸어가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무심코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훤칠하게 쭉 뻗은 다리와 다부진 몸매를 보니 부승민과 닮아 있었다. 그녀가 다시 눈여겨보았을 때, 그 사람의 모습은 이미 모퉁이를 지나 사라졌다.부승민이 아픈가?온하랑은 시선을 거두고 자기 차로 걸어가 잠금을 해제했다.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은 그녀는 급하게 시동을 걸지 않고 휴대폰을 꺼내 들여다보는데 민지훈에게서 마침 답장이 왔다.[누나, 미안해요. 요즘 좀 바쁜 건 맞지만 업무적인 일은 아니에요.]그러자 온하랑이 물었다.[무슨 일 있어요? 어려운 일 있으면 말해요.]민지훈은 이모티콘을 보냈다. 화면 너머로 그의 기쁨이 느껴졌다.[고마워요, 누나. 나 혼자 처리할 수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힘내요. 혼자 해결하기 힘들면 사양하지 말고 말해요.]온하랑은 싸늘한 표정으로 따뜻한 말을 써 내려갔다.[네. 누나는 정말 좋은 사람 같아요.][친구니까 당연한 거죠.]온하랑은 담담한 표정으로 화면을 보며 생각했다. 그리고 요즘 상영하는 영화를 찾아본 후 아무 영화 포스터나 캡처했다.[이거 보고 싶은데 주말에 나랑 같이 볼 사람?]영화 포스터 사진을 첨부해서 스토리를 올린 온하랑은 휴대폰을 껐다. 그녀의 눈에는 어두운 빛이 드리웠다. 이 게시물은 오직 민지훈만 볼 수 있게 설정했다.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민지훈이 어떤 어려움에 부딪혔는지 알아내고 만약 그녀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두 사람 사이가 더 가까워 지기 마련이다. 서우현이 발을 빼며 온하랑은 몹시 초조해졌다.하지만 민지훈은 지금 그녀에게 알려줄 마음이 없었고, 그녀가 계속 캐묻는다면 오히려 너무 들이대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민지훈이 지금 바쁜데 그녀가 ‘눈치 없이’ 그에게 같이 밥 먹자, 영화 보자 말하
그러나 민지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창 혈기 왕성하고 진취적인 청년으로서 억울함을 감수할 수 없었다. 집주인이 고의로 누명을 씌운 일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으며 다른 부서를 찾아가 재검사를 의뢰하려고 했다. 민성주는 한숨을 내쉬며 그를 말렸다.“가봤자 소용없어. 아버지가 몇십 년 살면서 깨우친 사실이 있는데 돈이 없고 지위가 없으면 감수할 수밖에 없어! 우리 재료가 문제없어도 문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그들이야. 검은색을 흰색이라고 우겨도 그저 그러려니 해야 해. 반박해 봤자 애꿎은 시간과 정력만 낭비할 뿐이야.”“아버지가 처음부터 협상하면 안 됐어요. 검사 결과에 문제가 있다고 했어야죠. 지금 다시 검사 결과에 이의를 제기해 봐도 늦었을 거예요.”하지만 민지훈은 토요일 다시 관련 부서를 찾아가 사람을 교체해서 검사해달라고 했지만 직원은 검사 결과 보고서가 절대 틀릴 수 없다며 재검사를 지원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했다.민지훈이 입이 닳도록 말해보아도 이런 결과였다. 여기서 반나절을 허비한 민지훈은 로비를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앞에 길을 바라보며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집으로 돌아가기도 싫었고, 머리 떨어진 파리처럼 근처에서 맴돌았다.걷고 걷던 민지훈은 갑자기 어젯밤 보았던 게시물이 떠올랐다. 그는 다시 들어가서 찾아보았다. 게시물은 그대로 있는 걸 보아 온하랑이 아마도 같이 영화 볼 사람을 찾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그는 온하랑의 대화창을 열었다.[누나도 ‘한 지붕아래 네 가족’가 보고 싶어요? 사실 나도 전부터 보고 싶었는데 같이 보러 갈 사람은 찾았어요? 아직이라면 우호에 같이 보러 갈래요?]이 문자를 본 온하랑은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좋아요.]그녀는 또 물었다.[점심은 먹었어요?]민지훈이 대답했다.[아직요. 아니면 같이 점심 먹고 영화 보러 갈까요?][그래요. 저 지금 금정광장에 있어요. 여기로 와요.][네!]답장을 보낸 민지훈은 얼른 택시를 잡고 금정광장으로 갔다. 온하랑은 음식점 주소와 메뉴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