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이번 동창회가 아니었다면, 그 복잡한 일은 아마 영원히 그녀 마음속 깊은 구석에 숨겨졌을 것이다.온하랑은 그제야 김시연이 인터넷에서 남자 모델들 사진을 수집하는 걸 좋아하고 남자를 불러 같이 술을 마시고 노래는 불러도 연애는 안 하는지 알 것 같았다.아마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한 번도 연도진을 잊어 본 적이 없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에게 상처를 크게 받아서 다시는 사랑을 믿지 않게 된 걸지도 모른다.“...내가 그렇게 비굴하게 다시 만나자고 빌었는데... 남아 달라고 바랬는데, 그래도 갔어요... 그렇게 7년을 떠났으면, 돌아오긴 왜 돌아와?”김시연은 목이 메었다.물기에 젖은 목소리가 떨리자 듣는 온하랑의 마음도 아팠다.그녀는 김시연이 이렇게까지 억울해하는 건 처음 봤다.7년 전, 김시연이 갓 대학에 붙었을 시점이었다.“하랑 씨. 제가 얼마나 걔를 좋아했는지 모를 거예요... 부모님은 제가 유학 가길 바랐는데 걔 놓치기 싫어서, 제가 부모님 설득해서 남았거든요... 근데, 걔는 갑자기 가버렸어요... 일말의 여지도 안 남겨주고... 돌아오면 돌아왔지... 왜 굳이 다시 내 앞에 나타나냐고...”김시연은 뒤에서 뭐라 중얼거렸지만 소리가 점점 더 작아져서 온하랑은 제대로 듣지 못했다.그러다가 그녀는 뒷좌석에서 잠이 들었다. 얼굴에는 이미 마른 눈물자국만 남아 있었고 입은 여전히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집에 도착하자 온하랑은 조용히 내려서 부시아를 데려왔다.그는 미리 부시아에게 말했다.“시연 이모가 뒷좌석에서 자고 있으니까, 조수석에 앉아. 차에서 큰 소리로 말하면 안 돼.”부시아는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차가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 지하 주차장에 주차했다.온하랑은 김시연을 깨웠다.“시연 씨, 일어나 봐요. 집에 도착했어요! 집에 가서 자요.”두 번을 불러서야 김시연은 한쪽 눈만 뜨고 눈물이 나올 정도로 하품했다.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창밖을 보면서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집 도착했어요?”“네. 올라가서 자요.
온하랑은 부시아의 손을 잡고 김시연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온하랑이 문을 열 때, 김시연이 감탄하면서 말했다.“그거 봐요. 부지런이랑 연도진 같은 사람들은 다 조금만 성공하면 쓰레기가 된다니까. 아무래도 그들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렇겠죠?”온하랑이 들어가면서 말했다.“맞아요.”“아, 민지훈 씨랑은 어떻게 됐어요? 둘이 잘 어울리는 거 같은데 만약 마음이 변하는 거 같으면 바로 차버려요.”김시연은 바로 소파에 누웠다.“아직 만나보고 있어요. 이번 주는 바쁘대요.”온하랑이 담담하게 말했다.옆의 부시아는 소파에 앉아있다가 두 사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제야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고개를 들고 물었다.“숙모, 부지런이 삼촌이에요?”“음...”온하랑은 약간 난감해졌다.“왜 삼촌이 지런인 거예요?”김시연이 말했다.“시아야, 내가 알려줄게. 네 삼촌이 다른 여자의 말에 쉽게 넘어가 지X을 해서 부지X이 될 뻔했는데 부지런으로 고쳐준 거야. 알겠어?”부시아는 의아해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부승민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온하랑의 경고를 떠올리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김시연은 씻자마자 바로 잠에 들었다.온하랑은 부시아와 놀아준 후 누웠다. 침대에 누운 그녀는 품에 부시아를 안고 물었다.“아주머니의 손자는 다 나았대?”“아니요. 오늘 전화해봤는데 심하게 아프대요. 폐렴으로 된 것 같아요.”“그럼 확실히 심하네. 내일 본가에 데려가 줄게. 내가 가서 봐야겠어.”“나도 가고 싶어요.”“안돼, 넌 아직 어려. 옮으면 어떡해.”부시아는 입술을 비죽 내밀고 애교했다.“마스크 끼면 안 돼요? 숙모, 제발 가게 해줘요! 숙모가 최고인데...”부시아는 머리를 온하랑의 몸에 대로 비볐다.온하랑은 또 마음이 약해져 허락할 뻔했다.“안돼. 시아야. 네 할머니는 나를 별로 안 좋아하셔. 그런데 나랑 있다가 병이라도 옮으면 네 할머니는 우리가 만나는 걸 반대할 거야. 알겠어?”부시아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고 입을 비죽 내밀었다.“네.”
사설탐정은 워낙 다른 사람의 보복을 당하기 쉬운 직업이므로 서우현은 가족 관계를 깊숙이 숨겨왔지만, 결국 들통나버리고 말자 간담이 서늘해졌다.[미안해요, 하랑 씨. 제가 혼자의 몸이라면 두렵지 않았을 테지만, 제 가족들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어요. 정말 미안합니다...]서우현은 간곡하게 설명했다. 온하랑도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이해해요, 우현 씨. 그리고 그동안 도와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저도 더 강요하지 않을게요. 나머지는 계약서대로 하세요.][이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당신의 정보를 유출하지 않을 겁니다. 부디 하루빨리 진실을 밝혀내 아버님 원수를 꼭 갚으시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답장을 보내고 휴대폰 화면을 꺼버린 온하랑은 멍하니 있었다. 그들이 서우현을 찾을 수 있다면 온하랑도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그러나 그녀는 아직 아무런 협박도 받지 않았다. 하긴 그녀도 아버지의 죽음이 그 납치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다른 사람들이 모르니 그들은 당연히 온하랑도 모른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녀는 떠올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저 서우현이 다른 이유로 그 납치 사건을 조사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할 터였다.다만 이제 서우현의 정보는 끊겨버리고 민지훈만 남았다. 온하랑은 민지훈에게 접근하기로 결심했지만, 그를 좋아하지 않는 마음은 여전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은근히 밀어내고 있었고, 항상 민지훈이 주동적으로 다가왔었다.하지만 요즘 민지훈은 그녀에게 조금 마음이 식은 것 같았다. 계속 이렇게 내버려두면 안된다. 온하랑은 결심을 굳히고 주동적으로 민지훈에게 문자를 보냈다.[한 주가 벌써 지나가네요. 요즘 회사 일은 어때요? 많이 바빠요?”휴대폰 화면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 몇 분이 지났지만 민지훈에게서 계속 답장이 오지 않았다. 온하랑은 휴대폰을 꺼버리고 옆에 놓았다. 그녀는 돌아눕자마자 부시아의 크고 동그란 눈과 마주쳤다. 왠지 모르게 온하랑은 마음이 뜨끔해졌다. 그녀는 목청을 가다듬고 부시아의 머리를
아침을 먹은 후 온하랑은 먼저 본가에 전화했다. 부승민이 집에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부시아를 집에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혼자 선물을 사 들고 안문희의 손자 병문안을 다녀왔다.병실에서 나온 온하랑은 주차장으로 걸어가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무심코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훤칠하게 쭉 뻗은 다리와 다부진 몸매를 보니 부승민과 닮아 있었다. 그녀가 다시 눈여겨보았을 때, 그 사람의 모습은 이미 모퉁이를 지나 사라졌다.부승민이 아픈가?온하랑은 시선을 거두고 자기 차로 걸어가 잠금을 해제했다.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은 그녀는 급하게 시동을 걸지 않고 휴대폰을 꺼내 들여다보는데 민지훈에게서 마침 답장이 왔다.[누나, 미안해요. 요즘 좀 바쁜 건 맞지만 업무적인 일은 아니에요.]그러자 온하랑이 물었다.[무슨 일 있어요? 어려운 일 있으면 말해요.]민지훈은 이모티콘을 보냈다. 화면 너머로 그의 기쁨이 느껴졌다.[고마워요, 누나. 나 혼자 처리할 수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힘내요. 혼자 해결하기 힘들면 사양하지 말고 말해요.]온하랑은 싸늘한 표정으로 따뜻한 말을 써 내려갔다.[네. 누나는 정말 좋은 사람 같아요.][친구니까 당연한 거죠.]온하랑은 담담한 표정으로 화면을 보며 생각했다. 그리고 요즘 상영하는 영화를 찾아본 후 아무 영화 포스터나 캡처했다.[이거 보고 싶은데 주말에 나랑 같이 볼 사람?]영화 포스터 사진을 첨부해서 스토리를 올린 온하랑은 휴대폰을 껐다. 그녀의 눈에는 어두운 빛이 드리웠다. 이 게시물은 오직 민지훈만 볼 수 있게 설정했다.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민지훈이 어떤 어려움에 부딪혔는지 알아내고 만약 그녀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두 사람 사이가 더 가까워 지기 마련이다. 서우현이 발을 빼며 온하랑은 몹시 초조해졌다.하지만 민지훈은 지금 그녀에게 알려줄 마음이 없었고, 그녀가 계속 캐묻는다면 오히려 너무 들이대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민지훈이 지금 바쁜데 그녀가 ‘눈치 없이’ 그에게 같이 밥 먹자, 영화 보자 말하
그러나 민지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창 혈기 왕성하고 진취적인 청년으로서 억울함을 감수할 수 없었다. 집주인이 고의로 누명을 씌운 일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으며 다른 부서를 찾아가 재검사를 의뢰하려고 했다. 민성주는 한숨을 내쉬며 그를 말렸다.“가봤자 소용없어. 아버지가 몇십 년 살면서 깨우친 사실이 있는데 돈이 없고 지위가 없으면 감수할 수밖에 없어! 우리 재료가 문제없어도 문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그들이야. 검은색을 흰색이라고 우겨도 그저 그러려니 해야 해. 반박해 봤자 애꿎은 시간과 정력만 낭비할 뿐이야.”“아버지가 처음부터 협상하면 안 됐어요. 검사 결과에 문제가 있다고 했어야죠. 지금 다시 검사 결과에 이의를 제기해 봐도 늦었을 거예요.”하지만 민지훈은 토요일 다시 관련 부서를 찾아가 사람을 교체해서 검사해달라고 했지만 직원은 검사 결과 보고서가 절대 틀릴 수 없다며 재검사를 지원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했다.민지훈이 입이 닳도록 말해보아도 이런 결과였다. 여기서 반나절을 허비한 민지훈은 로비를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앞에 길을 바라보며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집으로 돌아가기도 싫었고, 머리 떨어진 파리처럼 근처에서 맴돌았다.걷고 걷던 민지훈은 갑자기 어젯밤 보았던 게시물이 떠올랐다. 그는 다시 들어가서 찾아보았다. 게시물은 그대로 있는 걸 보아 온하랑이 아마도 같이 영화 볼 사람을 찾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그는 온하랑의 대화창을 열었다.[누나도 ‘한 지붕아래 네 가족’가 보고 싶어요? 사실 나도 전부터 보고 싶었는데 같이 보러 갈 사람은 찾았어요? 아직이라면 우호에 같이 보러 갈래요?]이 문자를 본 온하랑은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좋아요.]그녀는 또 물었다.[점심은 먹었어요?]민지훈이 대답했다.[아직요. 아니면 같이 점심 먹고 영화 보러 갈까요?][그래요. 저 지금 금정광장에 있어요. 여기로 와요.][네!]답장을 보낸 민지훈은 얼른 택시를 잡고 금정광장으로 갔다. 온하랑은 음식점 주소와 메뉴를 보냈다.
민지훈이 ‘우리 아버지’라는 말을 내뱉을 때 온하랑의 심장 박동이 반 박자 빠르게 뛰었다. 그녀는 새우를 집어 와 천천히 껍질을 벗기고 입에 집어넣었다. 민지훈이 말을 마치자 온하랑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에 넣은 음식을 삼켰다.“지훈 씨 말을 들어보니 확실히 일부러 노린 것 같네요.”민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확실해요. 그 사람이 저한테 주는 느낌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게 아니라 우리 아버지를 해결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어요.”온하랑은 민지훈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설령 자재에 문제가 있더라도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은 인테리어 회사에 있지 않나요?”민지훈이 설명했다.“회사는 종속적인 관계일 뿐이고 자재 문제는 아버지가 책임지거든요.”온하랑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새우 한 마리를 집어 들고 민지훈의 눈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감쳐물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실례지만, 지훈 씨 아버지가 사용하는 인테리어 재료는 정말 문제없어요? 내가 못 믿어서가 아니라 이게 관건이거든요.”민성주는 유괴범이다. 도덕적이지 않고 법을 어기는 사람이 불합격 재료를 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민지훈의 눈에 민성주는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였기 때문에 무조건 그를 신뢰했다.민성주는 사건을 뒤집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미 체념했을 테지만 민지훈은 아무것도 모른 채 속고 있는 것 같았다. 민지훈은 단호하게 말했다.“문제없어요. 우리 아버지는 매우 성실한 분이에요. 오랜 세월 인테리어를 하며 한 번도 이런 일은 없었어요.”‘매우 성실하다’는 말을 들은 온하랑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눈에는 설핏 비웃음이 비꼈다. 온하랑은 갈비찜을 집어다가 먹으며 말했다.“혹시 지훈 씨네 가족이 금방 귀국해서 현재 국내 상황에 대해 잘 모르고 급하게 일을 받다가 재료 공급업체에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민지훈은 멈칫하더니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럴 가능성도 있어요.”온하랑은 뜨거운 물을 한 입 마셨다.“이러면 어때요. 제가 사람을
정말 단순했다. 민지훈은 자기 아버지가 거짓말할 거라고는 한 치의 의심도 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이게 바로 경험이 적은 젊은 사람의 전형적인 사고방식이었다.보통 친구로 지내는 거라면 괜찮지만 미래의 반쪽으로 온하랑은 절대 그를 선택하지 않는다. 그녀는 다른 사람이 성장하는 과정을 함께해 줄 흥미 따위는 없었다. 만약 민지훈이 민성주의 아들만 아니라면 그녀는 이미 깔끔하게 선을 그었을 것이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쇼핑센터에 있는 영화관으로 갔다. 아직 영화 상영 시간이 되지 않았다. 민지훈은 방금 산 팝콘을 온하랑에게 건넸다.“누나, 먼저 저기 앉아서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요.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온하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지훈은 영화관에서 나와 쇼핑몰의 표지판을 따라 화장실을 찾았다. 쇼핑몰의 화장실은 외진 곳에 있었다. 민지훈은 모퉁이를 돌다가 갑자기 누군가와 부딪혔다.이윽고 쿵, 소리와 함께 밀크티가 바닥에 떨어지며 그 충격으로 포장이 터져 밀크티가 사방으로 튀었다.민지훈은 무의식적으로 두 걸음 뒤로 물러나 엎질러진 밀크티를 보다가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죄송합니다.”눈앞에 있는 사람은 하얀 피부에 예쁘장한 얼굴의 젊은 여자였다. 그녀는 바닥에 엎질러진 밀크티를 바라보며 눈가에는 심란한 기색이 비쳤지만 민지훈을 보며 옅게 웃었다.“괜찮아요. 그냥 밀크티 한 컵일 뿐인데요. 뭐.”그리고 그녀는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밀크티 컵을 집어 들고 돌아서서 화장실로 걸어갔다.쇼핑몰의 남녀 화장실은 세면대를 공유했다. 세면대 옆에는 쓰레기통이 있었고 구석에는 사용하지 않은 걸레 몇 개가 놓여 있었다. 민지훈은 여자가 금이 간 밀크티 컵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구석에 있는 대걸레를 가지러 가는 것을 보았다. 이 모습을 본 민지훈은 다가가서 여자의 손에 있는 대걸레를 뺏으려다가 실수로 여자의 손을 잡았다. 그는 재빨리 손을 놓았다. 귀는 서서히 빨개졌다. “미안해요. 이리 줘요. 제가 닦을게요.”여자가 말하려는 순간 대걸레를 씻던 청소부
영화관에서 나온 온하랑은 손을 뻗어 옆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불합격 판정을 받은 재료가 아직 집에 있어요?”민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집에 아직 한 묶음이 있어요. 원래는 그 집주인한테 보내려고 했는데 보내기 전에 신고 당했어요.”“그럼 집에 가서 좀 가져가요.”“네.”두 사람은 주차장에 도착했다. 온하랑은 운전석에 앉고, 민지훈은 조수석에 앉았다. 그는 안전벨트를 매고 온하랑이 시동을 거는 것을 지켜보다가 갑자기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누나, 제가 운전할까요?”온하랑은 고개를 돌려 살짝 미소를 지었다.“내가 할게요. 해외 면허라 국내에서는 다시 신청해야 돼요.”“나중에 신청하러 갈게요.”민지훈이 말했다....반 시간 후, 온하랑은 민지훈의 집 앞 공용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가서 가져와요. 난 안 올라갈래요.”“그러면 여기서 기다리세요. 금방 갖고 올게요.”말을 마친 민지훈은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문을 닫으려는 순간 온하랑이 그를 불렀다.“부모님께는 내 얘기 하지 마요.”민지훈은 멈칫하며 반사적으로 물었다.“왜요? 누나가 이렇게 큰 도움을 주셨는데, 우리 집에 초대해 식사하고 싶어요!”진짜 이유는 민성주가 그녀의 정체를 알고 의심하고 경계하게 될까 봐서였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온하랑은 얼굴도 붉히지 않고 심장도 두근거리지 않은 채 그윽한 눈길로 빛을 뿜어내며 민지훈을 바라보았다.“내가 이혼했잖아요... 대부분 부모님들은 자녀가 나이 많고 이혼한 여자를 만나는 걸 원하지 않을 거예요.”특히 민지훈처럼 비교적 우수한 사람일 경우.민지훈은 갑자기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입꼬리가 점점 위로 올라가더니 마치 큰 강아지처럼 귀여운 덧니를 드러내며 웃었다.“알았어요, 누나! 절대 말하지 않을게요.”그는 온하랑에게 손을 흔들고 유쾌한 마음으로 집으로 갔다.누나가 그렇게 말한 건 나한테 마음이 있기 때문이겠지. 혹시 나랑 만날 의향이 있는 게 아닐까?!민지훈은 너무 좋아서 날아갈 것 같았다. 발걸음마저 가벼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