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하랑은 부시아의 손을 잡고 김시연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온하랑이 문을 열 때, 김시연이 감탄하면서 말했다.“그거 봐요. 부지런이랑 연도진 같은 사람들은 다 조금만 성공하면 쓰레기가 된다니까. 아무래도 그들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렇겠죠?”온하랑이 들어가면서 말했다.“맞아요.”“아, 민지훈 씨랑은 어떻게 됐어요? 둘이 잘 어울리는 거 같은데 만약 마음이 변하는 거 같으면 바로 차버려요.”김시연은 바로 소파에 누웠다.“아직 만나보고 있어요. 이번 주는 바쁘대요.”온하랑이 담담하게 말했다.옆의 부시아는 소파에 앉아있다가 두 사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제야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고개를 들고 물었다.“숙모, 부지런이 삼촌이에요?”“음...”온하랑은 약간 난감해졌다.“왜 삼촌이 지런인 거예요?”김시연이 말했다.“시아야, 내가 알려줄게. 네 삼촌이 다른 여자의 말에 쉽게 넘어가 지X을 해서 부지X이 될 뻔했는데 부지런으로 고쳐준 거야. 알겠어?”부시아는 의아해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부승민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온하랑의 경고를 떠올리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김시연은 씻자마자 바로 잠에 들었다.온하랑은 부시아와 놀아준 후 누웠다. 침대에 누운 그녀는 품에 부시아를 안고 물었다.“아주머니의 손자는 다 나았대?”“아니요. 오늘 전화해봤는데 심하게 아프대요. 폐렴으로 된 것 같아요.”“그럼 확실히 심하네. 내일 본가에 데려가 줄게. 내가 가서 봐야겠어.”“나도 가고 싶어요.”“안돼, 넌 아직 어려. 옮으면 어떡해.”부시아는 입술을 비죽 내밀고 애교했다.“마스크 끼면 안 돼요? 숙모, 제발 가게 해줘요! 숙모가 최고인데...”부시아는 머리를 온하랑의 몸에 대로 비볐다.온하랑은 또 마음이 약해져 허락할 뻔했다.“안돼. 시아야. 네 할머니는 나를 별로 안 좋아하셔. 그런데 나랑 있다가 병이라도 옮으면 네 할머니는 우리가 만나는 걸 반대할 거야. 알겠어?”부시아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고 입을 비죽 내밀었다.“네.”
사설탐정은 워낙 다른 사람의 보복을 당하기 쉬운 직업이므로 서우현은 가족 관계를 깊숙이 숨겨왔지만, 결국 들통나버리고 말자 간담이 서늘해졌다.[미안해요, 하랑 씨. 제가 혼자의 몸이라면 두렵지 않았을 테지만, 제 가족들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어요. 정말 미안합니다...]서우현은 간곡하게 설명했다. 온하랑도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이해해요, 우현 씨. 그리고 그동안 도와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저도 더 강요하지 않을게요. 나머지는 계약서대로 하세요.][이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당신의 정보를 유출하지 않을 겁니다. 부디 하루빨리 진실을 밝혀내 아버님 원수를 꼭 갚으시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답장을 보내고 휴대폰 화면을 꺼버린 온하랑은 멍하니 있었다. 그들이 서우현을 찾을 수 있다면 온하랑도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그러나 그녀는 아직 아무런 협박도 받지 않았다. 하긴 그녀도 아버지의 죽음이 그 납치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다른 사람들이 모르니 그들은 당연히 온하랑도 모른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녀는 떠올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저 서우현이 다른 이유로 그 납치 사건을 조사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할 터였다.다만 이제 서우현의 정보는 끊겨버리고 민지훈만 남았다. 온하랑은 민지훈에게 접근하기로 결심했지만, 그를 좋아하지 않는 마음은 여전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은근히 밀어내고 있었고, 항상 민지훈이 주동적으로 다가왔었다.하지만 요즘 민지훈은 그녀에게 조금 마음이 식은 것 같았다. 계속 이렇게 내버려두면 안된다. 온하랑은 결심을 굳히고 주동적으로 민지훈에게 문자를 보냈다.[한 주가 벌써 지나가네요. 요즘 회사 일은 어때요? 많이 바빠요?”휴대폰 화면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 몇 분이 지났지만 민지훈에게서 계속 답장이 오지 않았다. 온하랑은 휴대폰을 꺼버리고 옆에 놓았다. 그녀는 돌아눕자마자 부시아의 크고 동그란 눈과 마주쳤다. 왠지 모르게 온하랑은 마음이 뜨끔해졌다. 그녀는 목청을 가다듬고 부시아의 머리를
아침을 먹은 후 온하랑은 먼저 본가에 전화했다. 부승민이 집에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부시아를 집에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혼자 선물을 사 들고 안문희의 손자 병문안을 다녀왔다.병실에서 나온 온하랑은 주차장으로 걸어가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무심코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훤칠하게 쭉 뻗은 다리와 다부진 몸매를 보니 부승민과 닮아 있었다. 그녀가 다시 눈여겨보았을 때, 그 사람의 모습은 이미 모퉁이를 지나 사라졌다.부승민이 아픈가?온하랑은 시선을 거두고 자기 차로 걸어가 잠금을 해제했다.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은 그녀는 급하게 시동을 걸지 않고 휴대폰을 꺼내 들여다보는데 민지훈에게서 마침 답장이 왔다.[누나, 미안해요. 요즘 좀 바쁜 건 맞지만 업무적인 일은 아니에요.]그러자 온하랑이 물었다.[무슨 일 있어요? 어려운 일 있으면 말해요.]민지훈은 이모티콘을 보냈다. 화면 너머로 그의 기쁨이 느껴졌다.[고마워요, 누나. 나 혼자 처리할 수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힘내요. 혼자 해결하기 힘들면 사양하지 말고 말해요.]온하랑은 싸늘한 표정으로 따뜻한 말을 써 내려갔다.[네. 누나는 정말 좋은 사람 같아요.][친구니까 당연한 거죠.]온하랑은 담담한 표정으로 화면을 보며 생각했다. 그리고 요즘 상영하는 영화를 찾아본 후 아무 영화 포스터나 캡처했다.[이거 보고 싶은데 주말에 나랑 같이 볼 사람?]영화 포스터 사진을 첨부해서 스토리를 올린 온하랑은 휴대폰을 껐다. 그녀의 눈에는 어두운 빛이 드리웠다. 이 게시물은 오직 민지훈만 볼 수 있게 설정했다.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민지훈이 어떤 어려움에 부딪혔는지 알아내고 만약 그녀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두 사람 사이가 더 가까워 지기 마련이다. 서우현이 발을 빼며 온하랑은 몹시 초조해졌다.하지만 민지훈은 지금 그녀에게 알려줄 마음이 없었고, 그녀가 계속 캐묻는다면 오히려 너무 들이대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민지훈이 지금 바쁜데 그녀가 ‘눈치 없이’ 그에게 같이 밥 먹자, 영화 보자 말하
그러나 민지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창 혈기 왕성하고 진취적인 청년으로서 억울함을 감수할 수 없었다. 집주인이 고의로 누명을 씌운 일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으며 다른 부서를 찾아가 재검사를 의뢰하려고 했다. 민성주는 한숨을 내쉬며 그를 말렸다.“가봤자 소용없어. 아버지가 몇십 년 살면서 깨우친 사실이 있는데 돈이 없고 지위가 없으면 감수할 수밖에 없어! 우리 재료가 문제없어도 문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그들이야. 검은색을 흰색이라고 우겨도 그저 그러려니 해야 해. 반박해 봤자 애꿎은 시간과 정력만 낭비할 뿐이야.”“아버지가 처음부터 협상하면 안 됐어요. 검사 결과에 문제가 있다고 했어야죠. 지금 다시 검사 결과에 이의를 제기해 봐도 늦었을 거예요.”하지만 민지훈은 토요일 다시 관련 부서를 찾아가 사람을 교체해서 검사해달라고 했지만 직원은 검사 결과 보고서가 절대 틀릴 수 없다며 재검사를 지원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했다.민지훈이 입이 닳도록 말해보아도 이런 결과였다. 여기서 반나절을 허비한 민지훈은 로비를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앞에 길을 바라보며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집으로 돌아가기도 싫었고, 머리 떨어진 파리처럼 근처에서 맴돌았다.걷고 걷던 민지훈은 갑자기 어젯밤 보았던 게시물이 떠올랐다. 그는 다시 들어가서 찾아보았다. 게시물은 그대로 있는 걸 보아 온하랑이 아마도 같이 영화 볼 사람을 찾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그는 온하랑의 대화창을 열었다.[누나도 ‘한 지붕아래 네 가족’가 보고 싶어요? 사실 나도 전부터 보고 싶었는데 같이 보러 갈 사람은 찾았어요? 아직이라면 우호에 같이 보러 갈래요?]이 문자를 본 온하랑은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좋아요.]그녀는 또 물었다.[점심은 먹었어요?]민지훈이 대답했다.[아직요. 아니면 같이 점심 먹고 영화 보러 갈까요?][그래요. 저 지금 금정광장에 있어요. 여기로 와요.][네!]답장을 보낸 민지훈은 얼른 택시를 잡고 금정광장으로 갔다. 온하랑은 음식점 주소와 메뉴를 보냈다.
민지훈이 ‘우리 아버지’라는 말을 내뱉을 때 온하랑의 심장 박동이 반 박자 빠르게 뛰었다. 그녀는 새우를 집어 와 천천히 껍질을 벗기고 입에 집어넣었다. 민지훈이 말을 마치자 온하랑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에 넣은 음식을 삼켰다.“지훈 씨 말을 들어보니 확실히 일부러 노린 것 같네요.”민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확실해요. 그 사람이 저한테 주는 느낌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게 아니라 우리 아버지를 해결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어요.”온하랑은 민지훈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설령 자재에 문제가 있더라도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은 인테리어 회사에 있지 않나요?”민지훈이 설명했다.“회사는 종속적인 관계일 뿐이고 자재 문제는 아버지가 책임지거든요.”온하랑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새우 한 마리를 집어 들고 민지훈의 눈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감쳐물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실례지만, 지훈 씨 아버지가 사용하는 인테리어 재료는 정말 문제없어요? 내가 못 믿어서가 아니라 이게 관건이거든요.”민성주는 유괴범이다. 도덕적이지 않고 법을 어기는 사람이 불합격 재료를 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민지훈의 눈에 민성주는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였기 때문에 무조건 그를 신뢰했다.민성주는 사건을 뒤집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미 체념했을 테지만 민지훈은 아무것도 모른 채 속고 있는 것 같았다. 민지훈은 단호하게 말했다.“문제없어요. 우리 아버지는 매우 성실한 분이에요. 오랜 세월 인테리어를 하며 한 번도 이런 일은 없었어요.”‘매우 성실하다’는 말을 들은 온하랑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눈에는 설핏 비웃음이 비꼈다. 온하랑은 갈비찜을 집어다가 먹으며 말했다.“혹시 지훈 씨네 가족이 금방 귀국해서 현재 국내 상황에 대해 잘 모르고 급하게 일을 받다가 재료 공급업체에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민지훈은 멈칫하더니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럴 가능성도 있어요.”온하랑은 뜨거운 물을 한 입 마셨다.“이러면 어때요. 제가 사람을
정말 단순했다. 민지훈은 자기 아버지가 거짓말할 거라고는 한 치의 의심도 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이게 바로 경험이 적은 젊은 사람의 전형적인 사고방식이었다.보통 친구로 지내는 거라면 괜찮지만 미래의 반쪽으로 온하랑은 절대 그를 선택하지 않는다. 그녀는 다른 사람이 성장하는 과정을 함께해 줄 흥미 따위는 없었다. 만약 민지훈이 민성주의 아들만 아니라면 그녀는 이미 깔끔하게 선을 그었을 것이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쇼핑센터에 있는 영화관으로 갔다. 아직 영화 상영 시간이 되지 않았다. 민지훈은 방금 산 팝콘을 온하랑에게 건넸다.“누나, 먼저 저기 앉아서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요.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온하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지훈은 영화관에서 나와 쇼핑몰의 표지판을 따라 화장실을 찾았다. 쇼핑몰의 화장실은 외진 곳에 있었다. 민지훈은 모퉁이를 돌다가 갑자기 누군가와 부딪혔다.이윽고 쿵, 소리와 함께 밀크티가 바닥에 떨어지며 그 충격으로 포장이 터져 밀크티가 사방으로 튀었다.민지훈은 무의식적으로 두 걸음 뒤로 물러나 엎질러진 밀크티를 보다가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죄송합니다.”눈앞에 있는 사람은 하얀 피부에 예쁘장한 얼굴의 젊은 여자였다. 그녀는 바닥에 엎질러진 밀크티를 바라보며 눈가에는 심란한 기색이 비쳤지만 민지훈을 보며 옅게 웃었다.“괜찮아요. 그냥 밀크티 한 컵일 뿐인데요. 뭐.”그리고 그녀는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밀크티 컵을 집어 들고 돌아서서 화장실로 걸어갔다.쇼핑몰의 남녀 화장실은 세면대를 공유했다. 세면대 옆에는 쓰레기통이 있었고 구석에는 사용하지 않은 걸레 몇 개가 놓여 있었다. 민지훈은 여자가 금이 간 밀크티 컵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구석에 있는 대걸레를 가지러 가는 것을 보았다. 이 모습을 본 민지훈은 다가가서 여자의 손에 있는 대걸레를 뺏으려다가 실수로 여자의 손을 잡았다. 그는 재빨리 손을 놓았다. 귀는 서서히 빨개졌다. “미안해요. 이리 줘요. 제가 닦을게요.”여자가 말하려는 순간 대걸레를 씻던 청소부
영화관에서 나온 온하랑은 손을 뻗어 옆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불합격 판정을 받은 재료가 아직 집에 있어요?”민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집에 아직 한 묶음이 있어요. 원래는 그 집주인한테 보내려고 했는데 보내기 전에 신고 당했어요.”“그럼 집에 가서 좀 가져가요.”“네.”두 사람은 주차장에 도착했다. 온하랑은 운전석에 앉고, 민지훈은 조수석에 앉았다. 그는 안전벨트를 매고 온하랑이 시동을 거는 것을 지켜보다가 갑자기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누나, 제가 운전할까요?”온하랑은 고개를 돌려 살짝 미소를 지었다.“내가 할게요. 해외 면허라 국내에서는 다시 신청해야 돼요.”“나중에 신청하러 갈게요.”민지훈이 말했다....반 시간 후, 온하랑은 민지훈의 집 앞 공용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가서 가져와요. 난 안 올라갈래요.”“그러면 여기서 기다리세요. 금방 갖고 올게요.”말을 마친 민지훈은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문을 닫으려는 순간 온하랑이 그를 불렀다.“부모님께는 내 얘기 하지 마요.”민지훈은 멈칫하며 반사적으로 물었다.“왜요? 누나가 이렇게 큰 도움을 주셨는데, 우리 집에 초대해 식사하고 싶어요!”진짜 이유는 민성주가 그녀의 정체를 알고 의심하고 경계하게 될까 봐서였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온하랑은 얼굴도 붉히지 않고 심장도 두근거리지 않은 채 그윽한 눈길로 빛을 뿜어내며 민지훈을 바라보았다.“내가 이혼했잖아요... 대부분 부모님들은 자녀가 나이 많고 이혼한 여자를 만나는 걸 원하지 않을 거예요.”특히 민지훈처럼 비교적 우수한 사람일 경우.민지훈은 갑자기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입꼬리가 점점 위로 올라가더니 마치 큰 강아지처럼 귀여운 덧니를 드러내며 웃었다.“알았어요, 누나! 절대 말하지 않을게요.”그는 온하랑에게 손을 흔들고 유쾌한 마음으로 집으로 갔다.누나가 그렇게 말한 건 나한테 마음이 있기 때문이겠지. 혹시 나랑 만날 의향이 있는 게 아닐까?!민지훈은 너무 좋아서 날아갈 것 같았다. 발걸음마저 가벼
민지훈의 기대에 찬 눈빛을 마주한 온하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천천히 근처 광장을 향해 걸어갔다. 길가의 행인들은 빠른 발걸음으로 걷고 있었고, 두 사람만 대화를 나누며 느긋하게 걷고 있었다.갑자기 민지훈의 팔이 흔들리면서 온하랑의 손에 닿았다. 온하랑은 반사적으로 뒤로 치우고 계속 앞으로 걸으며 중얼거렸다.“... 금정 근처에 있는 여러 케이크 가게에서 다 먹어봤는데...”눈을 내리깔고 있던 민지훈은 온하랑의 말을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 귀가 살짝 빨개지고 눈을 꾹 감았다 뜨며 용기를 내어 갑자기 온하랑의 부드럽고 가느다란 작은 손을 덥썩 잡았다.그의 손은 온하랑의 손보다 컸고 그녀의 손을 꼭 감싸 쥐었다. 피부가 닿는 느낌이 들자 온하랑은 몸이 흠칫 굳으며 반사적으로 벗어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온하랑은 입술을 감쳐물고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 순간 그녀는 가시방석 위에 앉은 것처럼 어색하고 불편한 느낌만 들었다. 머릿속에는 뜬금없이 부승민의 얼굴이 떠오르며 그녀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왜 또 그를 생각하는 거야?그녀는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마음이 혼란스럽고 민지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고 애써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민지훈이 웃으며 말했다.“누나 손이 좀 차가워요. 다음부터는 나올 때 더 따뜻하게 입어요. 감기 걸리지 않게요.”“그냥 체질 탓이에요. 겨울이면 항상 차가워요.”“그럼 앞으로 겨울마다 제가 손을 따뜻하게 해줄게요.”민지훈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온하랑은 침묵했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민지훈은 그저 그녀가 부끄러워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이미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으니 딱히 상관없었다.두 사람은 케이크 가게에 도착했다. 진열장에 진열된 여러 종류의 케이크를 보던 민지훈은 온하랑의 초롱초롱한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누나, 어떤 거 좋아해요? 초콜릿케이크?”온하랑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