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환의 입에서 나온 2만억 이사장님이라는 말에 조효동은 혹시 무슨 약점이라도 잡혔나 싶어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그냥 당신이 가진 이사장 자리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서.”불안한 마음을 감추려 애써 표정을 굳히는 조효동을 향해 임유환이 웃으며 말했다.“이사장 자리가 여자 덕분에 운 좋게 얻어걸린 것 같은데? 노력해서 이뤄냈다는 당신 말과는 좀 다르네.”“그리고 전에 결혼한 적 있지?”임유환의 나지막한 말이 조효동에게는 폭탄이 터지는 것처럼 크게 들렸다.조효동 본인의 눈이 커진 건 물론이고 듣고 있던 윤세아도 조효동이 결혼을 한 적이 있다는 소리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내 말이 틀렸어?”하지만 임유환은 여전히 웃으며 대답을 재촉했다.처음에는 이렇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까발리고 싶진 않았는데 조효동이 계속 주제도 모르고 날뛰며 최서우를 속여대니 더는 참아줄 수가 없었다.“효동 씨, 이게 사실이에요?”윤세아가 조효동을 보며 다그치자 조효동이 끝까지 시치미를 뗐다.“아주머니, 저... 저 자식이 제가 잘되는 걸 두고 볼 수 없어서 일부러 절 모함하는 거예요!”“내가 널 모함해?”임유환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회사 이름이 혜성테크놀로지 맞지?”임유환의 입에서 나온 제 회사 이름에 조효동은 눈을 크게 뜨고 임유환을 바라봤다.예상했던 반응에 입꼬리를 올린 임유환이 말을 이었다.“2년 전, 양유란 씨와 해외에서 결혼을 했던데? 나이는 56세, 해외에 상장한 회사가 하나 있고 자산이 2만 억 맞지?”“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넌 그냥 내가 질투 나는 거잖아!”“아직도 그런 말이 나와?”제 과거가 들추어지는 걸 보고도 전혀 부끄러운 기색이 없어 보이는 조효동에 임유환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표정을 굳혔다.“내가 꼭 끝까지 말해야겠어?”“네가 고생해서 직접 키운 회사라며. 네 입으로 그랬잖아. 근데 창시인이 왜 조효동이 아니라 양유란이야?”“그리고 이게 다 사실이 아니라 해도 혜성테크
“유환 씨, 얼른 앉아. 내가 차 가져올게.”제대로 된 황금사위를 맞은 윤세아는 너무 기뻐 입을 다물지 못했다.“하...”최서우는 그런 제 엄마를 보며 한숨을 쉬더니 임유환을 향해 멋쩍게 웃어 보였다.“우리 엄만 원래 저래요. 일단 앉아요, 유환 씨.”“네.”그렇게 임유환은 웃으며 최서우, 최대호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내가 직접 끓인 차야. 얼른 좀 마셔봐.”그때 윤세아는 평소에는 아껴두기만 하던 고급 찻잎으로 우려낸 차를 들고 나왔다.“이렇게 까지 안 하셔도 돼요.”“어머, 어쩜 이렇게 예의 바를까. 그런데 나한테는 안 그래도 돼. 이제 곧 한 집안사람이 될 텐데 뭐.”임유환이 예의 있게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윤세아가 손을 내저으며 눈웃음을 지었다.그 신분을 알고 나니 무슨 말을 해도 다 마음에 쏙 들었다.“네, 아주머니.”“그런데 유환 씨는 무슨 일을 해?”“작게 사업해요.”자리에 앉은 윤세아는 임유환의 직업부터 물었다.“사업?”어쩐지 돈이 많다 했더니 사업을 한다는 소리에 윤세아는 더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그런데 너무 겸손하네. 흑제 어르신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야?”“그냥 사업 같이하는 친구예요.”“아, 사업 파트너 뭐 그런 거?”흑제와 사업 파트너라니, 임유환의 자산은 만 억이 아니라 십만 억도 훌쩍 넘을 것 같았다.“역시 처음 볼 때부터 남다르더라니까.”“아니에요.”“우리 유환 씨는 너무 겸손하다니까, 난 이렇게 겸손한 사람이 좋더라.”윤세아는 입이 귀에 걸리도록 웃으며 말했다.“그런데 유환 씨, 우리 서우랑은 언제 혼인신고 할 거야?”“혼인신고요?”물을 마시던 임유환은 갑자기 혼인신고를 언급하는 윤세아에 물을 도로 뱉어낼 뻔한 걸 간신히 삼키고 물었다.“엄마, 나 유환 씨랑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그냥 가짜 남자친구 역할을 해달라고 임유환을 부른 것뿐인데 혼인신고까지 진도가 나가니 당황한 건 마찬가지던 최서우가 대신 소리쳤다.“넌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니? 나랑 네 아빠는 만난 지
“엄마, 진짜 왜 이래... 남편을 찾아주는 거야 아니면 돈다발을 찾아주는 거야?”임유환이 가짜가 아니었어도 아직 손도 못 잡아본 사이에 그런 걸 하라니, 최서우는 생각만으로도 얼굴이 빨개졌다.“넌 말을 그렇게밖에 못 해? 엄마도 이게 다 널 위해서잖아.”“유환 씨 같은 남자는 빨리 잡아야 한다고, 너 그러다 다른 여자한테 뺏긴다.”“유환 씨가 사람도 겸손하고 통도 크니까 네 남편감으로 딱 맞을 것 같아서 그런 거지! 저런 남편감 없다니까!”“나도 아는데...”최서우는 말을 하지는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최서우도 임유환이 좋은 사람인 건 알지만 그녀와 임유환은 그저 평범한 친구 사이일 뿐이었다.“거의 다 돼가는데 초 치지마.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해. 내가 설마 너 잘못되라고 등 떠밀겠니?”하지만 최서우와 임유환의 진짜 사이를 모르는 윤세아는 최서우를 흘기며 말했다.“넌 아무 말도 하지 마. 엄마가 다 알아서 할게. 엄마가 대신해서 유환 씨 맘이 어떤지 물어볼게.”“엄마!”최서우는 엄마가 또 무슨 말을 어떻게 내뱉을지 몰라 다급히 소리쳤다.“됐어, 넌 그냥 내 말만 들으면 돼. 얼른 가자, 유환 씨 기다리겠다.”말을 마친 윤세아는 최서우를 데리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미안해 유환 씨, 우리 서우가 너무 쑥스러움이 많아서 내가 가르칠 게 많네.”“엄마...”스스럼없이 말하는 윤세아에 최서우는 얼굴이 붉어진 채 대꾸했다.“아이고, 우리 서우가 이렇다니까.”“서우 씨 성격이 얼마나 좋은데요. 저랑 잘 맞아요.”임유환이 최서우를 감싸며 말하자 윤세아는 입이 귀에 걸리게 웃었다.최서우도 임유환이 저를 위해 일부러 좋게 말해주는 걸 알면서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윤세아는 그런 둘을 얼른 이어 놓으려고 또 입을 열었다.“그래? 그러고 보니까 또 잘 맞는 것 같네.”“유환 씨 먼 곳에서 오느라 고생했는데 밥이라도 먹고 가.”“그럼 감사히 먹겠습니다, 아주머니.”임유환은 웃으며 연기를 이어나갔다.이미 최서우에게 자신만 믿으
“네?”이게 최서우의 생각이라는 말에 임유환은 아까 최서우의 이상했던 행동들이 떠올랐다.“엄마!”최서우도 임유환을 집에서 재우려는 엄마의 생각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기에 깜짝 놀라 소리쳤다.그리고 최서우의 뜻이라고 생각할 임유환 때문에 더 부끄러워졌다.“봐봐, 우리 서우가 이렇게 부끄러움이 많다니까.”“저 아주머니, 서우 씨 할아버님도 제가 모셔다드려야죠.”집에서 자고 갈 생각까진 하지 않았던 임유환은 웃으며 저를 보는 윤세아를 향해 다급히 아무렇게나 둘러대기 시작했다.“유환 씨는 여기서 서우랑 같이 있어. 아버님은 내가 남편보고 모셔다드리라고 할게.”윤세아는 말을 하며 얼른 제 남편에게 눈짓했다.“여보, 아까 병원에 환자 있다고 하지 않았어? 가는 길에 아버님 모셔다드려.”“아, 그래! 있었지.”윤세아의 눈치를 보고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최운동은 얼른 임유환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유환 씨는 서우랑 여기 있어. 내가 가는 길에 아버지 모셔다드릴게.”최서우가 선택한 사람이니 서우만 좋으면 최운동도 지지할 생각이었다.“그... 아주머니, 제가 갈아입을 옷도 안 가져와서...”“옷은 걱정 마. 내가 씻어서 말리면 내일이면 입을 수 있을 거야. 아, 아저씨한테 새로 산 옷 한 벌이 있는데, 그거 입을래? 잠깐 기다려봐, 내가 가져올게.”임유환이 또 핑곗거리를 찾기 시작하자 윤세아는 황금 사위가 도망갈 틈을 주지 않고 얼른 방에 들어가 옷장을 뒤지기 시작했다.그렇게 1분 뒤, 윤세아는 새 잠옷과 수건을 임유환에게 건네주며 말했다.“유환 씨, 샤워하고 이거 입어. 서우랑 같이 자면 돼. 나는 방해 안 할게.”“어...”그렇게 더 이상 거절할 핑계를 찾지 못했던 임유환은 할 수 없이 최서우와 함께 윤세아의 기대에 찬 눈길을 받으며 방으로 들어갔다.최서우는 문을 안에서 한 번 더 걸어 잠그고는 어색하게 임유환 옆에 가 앉았다.최서우는 고개를 숙인 채 눈만 굴리고 있었고 임유환도 어색한지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럴 리가요!”서운함 가득한 눈길을 느낀 임유환이 다급히 해명했다.“그냥 좀 어색해서 그런 거죠...”“미안해요, 오해해서...”임유환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소리에 최서우는 안심하면서도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괜찮아요, 어차피 이제 집엔 못 갈 것 같은데요 뭘.”“우리 엄마 성격이 저래서... 오늘은 그냥 여기서 자고 가요. 미안해요.”최서우도 이성을 향해 자고 가라는 말을 하는 것은 처음이라 자연스레 얼굴이 뜨거워 났다.“네. 그래야죠.”최서우의 그런 쑥스러운 마음을 모르는 임유환은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최서우를 향해 물었다.“서우 씨, 아까 보니까 계속 마음이 불편해 보이던데, 아주머니가 무슨 얘기 하신 거예요?”“아니요...”임유환의 말에 최서우는 당황한 제 마음을 들키기라도 할까 봐 고개를 숙이며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췄다.“그럼 무슨 고민 있어요?”“아니에요. 그냥 오늘 유환 씨 너무 귀찮게 한 것 같아서 미안해서 그래요.”임유환의 걱정스러운 질문에 최서우는 대충 그럴듯하게 둘러댔다.애초에 엄마가 유환 씨한테 자고 가라고 할 줄 알았다는 소리는 할 수 없었으니.그리고 엄마의 말을 거절하긴 했지만 사실 최서우도 임유환이 자고 가길 바라는 마음은 똑같았다. 물론 윤세아의 말처럼 그런 걸 할 생각은 없었다.그렇게 엄마와의 대화를 떠올리던 최서우의 얼굴이 서서히 달아올랐다.“괜찮아요, 내가 도와주겠다고 한 건데 마무리는 해야죠.”최서우의 대답을 들은 임유환은 웃으며 말했다.“근데 서우 씨, 옷장에 혹시 남는 이불 있어요? 난 바닥에서 잘게요.”임유환이 최서우를 돕느라 어쩔 수 없이 남는 거긴 했지만 괜히 최서우와 불필요한 스킨십은 하고 싶지 않아서 그는 먼저 바닥에서 자겠다고 제안했다.“바닥에서 잔다고요? 괜찮겠어요?”“네. 저 원래 자는 곳 안 가려요.”당황한듯한 최서우를 향해 임유환이 환하게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그래도...”“나 진짜 괜찮아요.”“그럼... 그래요.”최서우는
“설마 내가 맞춘 건 아니지?”임유환의 반응을 본 윤세아는 눈을 더욱 가늘게 뜨며 물었다.“그럴 리가요...”임유환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둘러댔다.“그럼 내가 잘못 들은 거겠네. 바닥은 차니까 거기서 자면 감기 들까 봐 그랬어.”윤세아는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그리고 부끄러워하지 말고. 어차피 곧 결혼하면 다 한 집안사람인데, 남자가 좀 밀고 나가고 그래야지.”“과일은 여기 두고 나갈게. 나는 이제 방해 안 할게.”“그리고 서우 아빠가 요즘 감기 걸려서 밤에 추워하거든. 이 이불은 내가 가져갈게.”말을 마친 윤세아는 이불을 빼가며 최서우에게 눈짓했다.그에 최서우는 바로 얼굴이 빨개졌지만 임유환은 아직도 바닥에서 자려는 걸 들킬뻔했다는 생각에 이 상황이 어색해져 최서우의 얼굴은 미처 보지 못했다.그리고 윤세아가 나가자 임유환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아주머니 귀가 엄청 밝으시네요. 이불도 가져가셨으니 어떡해요. 아까 설마 들키진 않았겠죠?”“안 들켰을 거예요.”“유환 씨, 오늘은 그냥 침대에서 같이 자요. 엄마가 갑자기 들어올까 봐 무서워요.”최서우도 할 수 없이 같이 자자고 말을 하긴 했지만 임유환과 같은 침대에 누울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그래서 말을 하면서도 눈빛이 흔들렸고 시선은 줄곧 아래를 향해 있었다.“그래야죠.”윤세아만 잘 속이자는 게 임유환의 목적이었는데 아까 일로 윤세아에게 의심을 심어주었으니 또 떨어져 자다가 밤에 갑자기 들어와 들키기라도 하면 정말 지금까지 한 모든 일이 헛수고가 되는 것이었다.“네.”최서우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전에는 임유환을 도발도 하고 유혹했던 최서우였지만 막상 이렇게 판이 깔리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내숭 떠는 여자처럼 앉아있기만 했다.그리고 3년 전 사건 이후로 남자 손도 한 번 못 잡아본 최서우였기에 이런 쪽으로는 경험도 없었다.경험이 없는 건 임유환도 마찬가지였기에 그도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어색하게 만 굴리고 있었다.
“샤워요?”샤워라는 단어 하나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무르익었고 임유환은 침을 삼키며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움직이는 임유환의 울대를 보던 최서우가 그의 오해를 풀어주려 빨개진 얼굴로 말했다.“내 말은 더우면 씻고 오라는 뜻이었어요. 계속 더우면 힘드니까...”“아, 알겠어요.”그제야 최서우의 뜻을 이해한 임유환이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그런데 생각해보니 지금 씻으면 갈아입을 속옷이 없어 그냥 잠옷만 입어야 할 판이었다.“그냥 이 옷 입고 있을게요.”그 상태로 잠옷을 입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던 임유환이 최서우를 향해 말하니 최서우도 단번에 임유환의 뜻을 알아차렸다.“그... 그냥 갈아입어요. 엄마가 좀 있다 세탁기 돌리실 거에요.”“어...”그제야 윤세아라는 큰 관문이 남았음을 인지한 임유환이 알겠다고 대답했다.“알겠어요, 그럼... 나 먼저 씻을게요.”“네.”최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임유환이 수건과 잠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가는 걸 지켜보았다.5분쯤 지나자 찬물로 샤워를 하며 마음을 진정시킨 임유환이 잠옷 차림으로 걸어 나왔다.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던 최서우는 얇은 잠옷 너머로 단단한 가슴팍의 근육들이 언뜻언뜻 보이는 모습에 귀까지 빨개지며 다시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그, 나 다 씻었어요.”“그럼... 내가 씻을게요.”말하는 임유환도 어색했고 듣고 있던 최서우도 이 상황이 숨 막혔기에 서둘러 잠옷을 들고 욕실로 달려들어 갔다.펑.“후...”욕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임유환은 조금 긴장을 풀 수 있었다.하지만 오늘 밤을 최서우와 함께 한 침대에서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다시 어색해지는 것 같았다.이제 8시 좀 넘은 시간이니 씻고 바로 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잠옷 차림의 남녀가 온밤 불을 켜고 있는 것도 이상했고 그리고 여기서 제일 문제는 바람이 스치는 아래의 그것이었다.이런 상황일 줄 알았다면 아까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빠져나가는 것인데 모든 것은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그때 욕실에서는
“속... 속옷이요?”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 단어를 머릿속으로 되뇌면 되뇔수록 점점 선명해지는 형체에 임유환은 깊은숨을 들이마셨다.“네.”최서우는 그런 임유환을 보며 흔들리는 눈동자를 하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아까 너무 긴장해서 급하게 들어오다가 놓쳐버린 것 같은데 평소라면 그저 잠옷을 입고 나가서 가져왔을 테지만 지금은 이 방에 임유환이라는 존재가 더 있었다.그러니 속이 다 비치는 잠옷 차림으로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어... 어디 있어요?”부탁을 받은 임유환은 할 수 없이 속옷의 위치를 물었다.“제일 아래에 있는 서랍에요.”“가... 가져다줄게요.”얼굴이 빨개진 채 말하는 최서우에 임유환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는 그녀의 지시대로 제일 밑에 위치한 서랍을 열었다.그러자 순식간에 흰색, 핑크색, 검은색의 수많은 속옷들이 임유환의 시야에 들어왔다.속옷은 처음 만져보는 임유환은 코끝부터 뜨거워 나는 이상한 느낌에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검은색 레이스 속옷을 집어 들고는 몸을 옆으로 하고 최서우에게 건네주었다.틈 사이로 혹시나 최서우를 보기라도 할까 봐 일부러 몸을 트는 임유환의 매너 있는 행동에 최서우는 다시 한번 그에게 흔들렸다.그런데 임유환이 건네준 속옷을 본 순간 최서우는 눈동자가 세차게 떨리며 그것을 빼앗듯이 받아들고는 고맙다는 짤막한 인사와 함께 다급히 욕실 속으로 모습을 감춰버렸다.“후...”속옷 하나 건넨 게 무슨 큰 일라고 임유환은 등에 땀이 흐르는 것도 모자라 안도의 숨까지 내쉬었다.그리고는 열을 식히려 아주머니가 놓고 간 수박을 입에 욱여넣었다.차가운 그 느낌에 긴장이 조금 가시자 임유환은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그렇게 2, 3분쯤 지났을까, 욕실 문이 다시 열렸고 이번에는 최서우가 베이지색 잠옷을 입은 채로 걸어 나왔다.길게 뻗은 하얀 다리에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해 헤매던 임유환은 자연스레 제일 눈에 띄는 그 가슴에 집중하게 되었다.글래머러스한 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임유환과 윤여진은 최서우의 병이 악화될까 염려하여 일부러 그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임씨 집안으로 향했다.임씨 집안으로 가는 차 안에서 윤여진은 사건의 자초지종에 대해 간략하게 전해 듣게 되었다.영상 속의 그 여자는 임유환의 시중을 들던 나비라는 이름의 메이드이고 그 메이드를 남자들에게 건네준 이가 임준호라는 사실까지 다 듣고 난 윤여진도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윤여진이 알고 있는 임준호는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었는데 그런 분이 한 일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잔인한 행동에 15년 전 자신의 친아들을 직접 내쫓던 그때의 임준호가 떠올라 윤여진은 온몸이 오싹해났다.아마도 15년 전 그날부로 임준호가 완전히 변한 게 아닌가 싶었다.30분 뒤 그들은 임씨 집안에 도착했지만 워낙 깊은 밤이라 저택의 대문은 당연히 잠겨있었고 흑기군을 데리고 대문 앞에서 한참 동안 대기하고 있던 흑제가 임유환을 보고 인사를 건네왔다.“임 선생님.”“오셨어요?”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세계 제일 갑부의 느닷없는 등장이 윤여진은 놀랍기만 했다.임유환을 대하는 흑제의 태도가 지나치게 깍듯해 그 둘의 사이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라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할 때라서 윤여진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영상에서 봤던 모습을 떠올리며 윤여진이 다시 표정을 굳히자 아까부터 냉랭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임유환이 앞으로 나서더니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임준호, 당장 나와!”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저택 사람들 몇 명이 눈을 떴고 하인 두 명이 달려 나왔다.밖에 나와 상황을 살피던 하인 두 명은 익숙한 임유환의 얼굴에 깜짝 놀랐지만 그런 놀라움도 얼마 오래가진 못했다.하인들은 이내 비아냥거리며 임유환을 향해 말했다.“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임유환 도련님 아니세요?”입으로는 도련님이라 하고 있었지만 그 말투 속에 진하게 녹아나 있는 조롱은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을 정도였다.“무슨 도련님이야, 버려진 도련
임유환의 몸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주인님, 그건 저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이 영상도 그 경찰에 대해 조사할 때 경찰 시스템을 뒤지다 발견한 겁니다.”“경찰 시스템?”“그럼 이것도 정씨 집안에서 한 짓이란 말이야?”“그것까진 아직 모르겠는데... 제가 알아본 바로는 저 여자분은 주인님... 아버님께서 직접 저 남자들 손에 넘긴 거였습니다.”이 일이 임유환의 아버지와 관련되어있기도 했고 영상 속의 여자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면 더 위험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아 흑제는 대답을 망설였다.“아버지?”“네, 주인님.”흑제의 말에 당황하던 임유환은 재차 확인을 거친 후에 또다시 기운을 뿜어내며 당장이라도 임준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임유환은 어떻게 자신이 직접 데려온 아이를 또 내다 버릴 수가 있는지 임준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당연히 제 한 목숨 부지하고자 행한 나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저 사람들 손에 끌려가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내어준 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짓인지 의문이 갔다.영상 속 사람들이 말하는 비밀 열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임유환은 나비가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임준호!”갑자기 소리 지르는 임유환 때문에 방 안에 있던 윤여진은 화들짝 놀랐다.“흑제.”“예, 주인님.”“지금 당장 흑기군 준비해서 나랑 임씨 집안으로 간다.”“예, 주인님.”지금 임유환은 약해빠진 임준호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었다.그래서 직접 집으로 쳐들어가서 대체 나비를 누구에게 넘겨준 것인지, 나비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살아있다면 직접 얼굴을 봐야 했고 죽었다면 그 시체라도 봐야 진정될 것 같았다.임유환은 나비가 그 짐승 같은 놈들 손에 놀아나도록 두고 볼 수가 없었다.살아있다면 당장 데려다가 직접 치료를 해줄 것이고 죽었어도 데리고 와서 묻어줄 생각으로 눈이 빨갛게 충혈된 임유환은 차오르는 분노와
“나비?”아까는 얼굴이 제대로 안 보여서 몰랐는데 영상 속의 여자는 바로 임유환만 보면 도련님이라 부르며 해맑게 웃던 나비였다.그렇게 밝고 예쁘게 웃던 아이가 피범벅이 된 채 모진 고문을 견뎌내는 걸 보고 임유환은 낯빛이 창백해졌고 머리가 울려왔으면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서 쫓겨난 지도 15년이니 나비도 많이 커서 얼굴만 보면 못 알아봤겠지만 나비 문양의 반점 덕분에 한눈에 그녀의 알아볼 수 있었다.나비라는 아이는 5살의 어린 나이에 임씨 집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름도 없어서 나비도 임유환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나비는 어릴 때 강도들의 손에 부모님을 잃고 그들에게 이끌려 여기저기 팔려 다니던 이이였는데 그런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임준호가 큰돈을 들여 데리고 오는 바람에 임씨 집안에서 메이드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나비는 임유환을 보자마자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때릴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슬퍼 보여서, 웅크린 몸을 떨고 있는 아이가 너무 애처로워 보여서 임유환은 아직까지도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 들어온 이상 더는 그 어떤 괴롭힘도 없을 거라고 다독여봐도 나비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었다.다른 메이드들을 시켜 깔끔히 씻기고 머리도 빗겨주고 깨끗한 옷까지 갈아입혀 주니 왼쪽 얼굴에 있는 나비 모양의 반점도 드러났다.임유환이 그 반점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비는 신분이 낮은 제가 얼굴에 난 반점으로 임유환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어 동굴 속에서 강도들에게 폭행당하던 것처럼 맞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반점을 가리며 몸을 떨었다.그에 임유환은 바로 나비의 손을 잡아주며 자신은 그들과는 다르다고 천천히 타일러주었다.그리고는 나비의 긴장과 두려움을 해소해주기 위해 정원 산책까지 데리고 갔다.드넓은 정원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있었고 그것들이 함께 조화로운 향도 만들어내고 있었다.이런 아름다운 곳은 처음 보는 나비는 처음에는 몸이 굳어버리며 어색해했지만 이
“아!”남자의 행동과 함께 흘러나온 여자의 처절한 비명이 밀실을 가득 채웠다.화면을 뚫고도 전해지는 여자의 절망과 고통에 핸드폰을 들고 있던 임유환의 몸도 떨려왔고 마찬가지로 비명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윤여진도 임유환 쪽으로 다가오며 화면을 바라보았다.“어머!”사람한테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 영상 속 인간들 때문에 윤여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소리쳤다.너무 집중해서 본 나머지 옆에 윤여진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던 임유환이 다급하게 화면을 가리며 말했다.“여진아, 넌 보지 마.”“오빠, 이 사람들 누구예요?”“아직 모르겠어.”얼굴과 입술이 창백해진 윤여진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임유환은 한숨부터 쉬며 대답했다.“여진아, 네 방 화장실 좀 쓸게.”말을 마친 임유환은 화장실로 들어가서 다시 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화면 속의 여자는 여전히 은침에 찔린 손을 들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온몸을 비틀려고 발버둥 치는 여자는 마치 불판 위에 올라간 미꾸라지 같기도 했다.하지만 검은 옷차림의 남자는 그런 여자가 불쌍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차가운 눈을 하고 두 번째 은침을 꺼내 들어 여자의 다른 손가락에 찔러넣었다.“아!”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고통에 여자는 순간 고개를 확 젖혀버렸고 이미 흑과 말라 굳어버린 핏자국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이 여자의 얼굴을 가렸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몰라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그냥 날 죽여줘요 제발...”“죽여주세요...”남자가 아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여자는 울며불멸 죽기를 애원하고 있었다.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으면 죽는 걸 원하고 있을까 싶어 임유환은 비통하다 못해 화까지 나고 있었다.“말했잖아, 얘기하면 죽여준다고.”말을 마친 남자는 섬뜩하게 웃더니 나머지 손가락에도 하나하나 은침을 꽂아 넣었고 여자는 온몸에 경련이 일듯 몸을 떨어대다가 한계에 다다른 건지 다시 한번 기절했다.은침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열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들은 빠르게 작은 웅덩이
“마음의 준비요?”의미심장한 흑제의 말에 임유환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영상인데 그래요?”“혼자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미 암호 걸어서 이메일 보내놨어요.”임유환이 영상을 보면 어떤 반응일지 알기에 흑제는 말을 내뱉기가 어려웠다.“알겠어요.”임유환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빠르게 흑제가 보내온 이메일을 확인했다.이메일의 정체는 5분쯤 되는 영상이었는데 영상의 장소는 어두운 밀실같이 보였다.밀실 안에는 똑같은 옷차림을 한 남자가 다섯이나 있었는데 그들은 전부 눈 하나만 내놓고 있었다.임유환은 그들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핸드폰 화면으로만 들여다보고 있음에도 무시무시한 그들의 기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남자들의 발밑에는 거의 죽어가는 젊은 여자 하나가 누워있었다.남루한 옷차림의 여자는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몸에는 채찍에 맞느라 생긴 생채기들이 한가득이었다.생채기 주위의 살들은 진작에 터져나갔고 팔은 안에 있는 뼈가 다 보일 정도로 앙상했다.그리고 몸에 난 상처는 그뿐만이 아니라 담배로 인해 생긴 작은 화상 자국들도 빼곡했다.옛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새로 난 상처들은 이미 옷과 붙어버려 여자의 처참한 상태를 더욱 잘 보여주고 있었다.영상을 보고 있던 임유환도 서서히 여자가 불쌍해졌다.다섯 남자들은 대체 누구길래 여자한테 이토록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그리고 여자는 또 누구인지 임유환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영상 하단에 떠 있는 시간을 보니 아직 5분 1밖에 진행되지 않은 영상에 임유환은 계속해서 화면을 들여다봤다.화면은 빠르게 전환됐고 여전히 같은 복장을 한 남자 다섯 명과 아까와 다를 게 없는 밀실이 나타났지만 아까 그 일로부터 며칠은 지난 듯 보였다.영상 속의 남자는 찬물을 들어 쓰러져있는 여자의 몸 위로 뿌렸고 여자는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고통 속에서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검은 복면을 쓴 남자 하나가 입을 열자 나머지 네 명도 여자를 차갑게 바라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검사할 거예요 오빠?”그때 귀를 간질거리는 윤여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부끄러워하면서도 도발적인 말을 뱉어내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심장이 쿵쾅거렸다.“여진아, 나는...”오해를 풀어보려고 고개를 돌려 윤여진을 보던 임유환은 몸을 앞으로 숙인 탓에 훤히 드러난 검은색 슬립 아래의 몸매에 다시 말을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임유환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은 시각 동물인지라 완벽한 몸매와 유독 눈에 띄는 풍만한 가슴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반응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감정도 이내 임유환의 이성에 묻혀버렸다.“후...”임유환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여진아, 진짜 이제 그만해. 진짜 실수한다니까.”“오빠는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나긋나긋하게 말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뜨거운 숨결 때문에 점점 본능이 들끓고 있었던 임유환은 이대로 있었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런데 그 순간 윤여진이 임유환의 손을 덥석 잡아 오자 우유 크림처럼 부드러운 그 느낌에 임유환은 일어서려던 다리마저 굳어버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유환 오빠, 나 장난하는 거 아니라니까요.”윤여진은 여전히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하며 잡고 있던 임유환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그 모습에 임유환은 순간 머리가 하얘졌고 이 손을 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하고 있었다.그런데 마침 타이밍 좋게 울린 전화벨 소리에 둘 다 화들짝 놀랐고 임유환도 또 한 번 울리는 벨 소리에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윤여진도 겁먹은 고양이마냥 손을 빼내며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나... 전화 좀 받을게.”임유환이 어색하게 말하자 윤여진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네.”아까의 대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끄럼 타는 고양이 같은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리던 임유환이 전화를 받았다.흑제에게서 온 전화라 조금 긴장한 채로 받았는데 역시나 전에 지시했던 일
가슴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임유환은 애써 윤여진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장난치지 말라니까.”윤여진이 여전히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한 임유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말을 돌렸다.“아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다고 했잖아, 그거 알려줄게.”“그 얘긴 나중에 하고, 오빠 아직 내 말에 대답 안 했잖아요.”“어... 그 얘기 먼저 하자, 불 끄면 졸려서 못 할 것 같아.”임유환은 기대에 찬 윤여진의 얼굴이 보였지만 어떻게든 이 숨 막히는 상황부터 끝내보고자 평소답지 않게 우겨댔다.그리고 사실 윤여진이 한 말이 장난인지 아닌지 제대로 분간도 가지 않아 아까부터 심장이 떨리고 있었다.장난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장난이 아니라면 아주 어색해질 것 같았다.“오빠, 왜 아까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리는 것 같죠?”그때 임유환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을 보며 윤여진이 부드럽게 물어왔다.“그... 그래?”“긴장한 거예요 설마?”임유환에게 질문을 하며 코앞까지 다가온 윤여진 때문에 둘의 거리는 3㎝도 채 남지 않게 되었다.정말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닿을 것같이 가까운 거리라서 임유환은 윤여진이 내뱉는 호흡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뜨거운 숨결과 함께 풍기는 향기에 임유환은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여진아, 이제 진짜 그만해.”사람 둘은 족히 앉을 정도로 떨어져서야 임유환은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장난 아니라니까요.”임유환이 저에게서 멀어지자 윤여진은 살짝 실망한 듯 보였지만 이내 연애 수첩 제1항을 떠올린 그녀는 다시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그래서 윤여진은 긴장한 듯 굳어있는 임유환을 보며 익살스레 웃어 보였다.“유환 오빠, 누가 그러는데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긴장을 한대요.”“오빠 설마 나 좋아하는 거예요?”윤여진이 이 질문을 할 때 임유환은 이게 장난이든 진심이든 간에 서둘러 이 화제가 지속되는 것부터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둘이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상해지는 방 안의
“어...”단도직입적인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은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임유환의 생각이 불순한 건 맞지만 그게 오로지 임유환의 잘못은 아니었다.이미 성인이 된 그들은 15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윤여진은 얼굴이며 몸매며 누가 봐도 예쁜 여자로 성장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멀쩡할 남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임유환 역시 남자였으니 검은색 레이스 속옷에 슬립까지 입고 제 눈앞을 돌아다니고 있는 윤여진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슬립 아래로 보일 듯 말 듯 한 윤곽이 아까부터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임유환은 지금 온 정신력을 다 쏟아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자신의 눈이 윤여진의 몸으로 향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임유환이기에 당연히 같이 자자는 그녀의 요구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모든 남자들의 워너비인 그 몸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밤을 조용히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오빠, 이상한 생각 한 거 맞죠?”한편 윤여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임유환을 보며 기쁨이 섞인 목소리로 장난스레 물었다.“어...”임유환은 이젠 정말 자신이 무슨 생각인지도 잘 모를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정말 윤여진을 두고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말하기에는 그는 윤여진이 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그녀의 몸만 보면 저절로 뜨거워지는 가슴이 대신해서 부정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여진아, 사실... 나는...”다그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해명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진심이 전달될지 몰라 말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임유환에게 윤여진은 여전히 15년 전 꼬맹이였고 임유환 또한 그때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그는 윤여진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오해하는 것도 원치 않았고 또 윤여진도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대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여전히 그때처럼 윤여진이 힘들 때 그녀에게 힘이 돼주는 든든한 오빠가 되고 싶었는데 이 마음을 전하기에 말 한마디
“아니야, 그냥 네가 아까 한 말 생각하고 있었어.”“그럼 오빠도 나랑 같이 있고 싶은 거예요?”다급히 해명하는 임유환에 시무룩해 있던 윤여진은 다시 밝게 웃으며 물었다.“그럼.”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사실 그와 윤여진이 말한 같이 있는다는 서로 전혀 다른 뜻이었다.“그럼 오빠,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임유환의 팔을 감싸 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간드러지게 말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몸이 먼저 반응할 뻔한 걸 간신히 참고는 물었다.“여기서 너랑 같이 밤을 보내자고?”“네!”윤여진이 이런 부탁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임유환이기에 제 팔에 닿아오는 말랑거리는 그 느낌도 까맣게 잊은 채 놀랐다.그런 임유환의 반응을 보던 윤여진은 혹시라도 거절당할까 봐 다급하게 한마디 더 보탰다.“여기서 자는 건 처음이라 좀 무서워요, 워낙 낯설기도 하고...”“어...”윤여진의 부탁도 일리가 있어 보여 임유환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오빠, 그냥 남아서 나랑 같이 자면 안 돼요?”윤여진은 임유환의 팔을 좌우로 흔들며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임유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가만히 있어도 예쁜 얼굴인데 애교까지 부리니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모습이 섞여 있어 웬만한 남자라면 다 윤여진한테 넘어갈 것 같았다.인내심과 자제력 하나는 자부하면서 살아왔던 임유환도 윤여진의 애교 공세에 3초도 못 버티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알... 알겠어.”임유환은 저도 모르게 긍정의 대답을 해버렸다.정말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바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저를 향해 애원의 눈빛을 보내는 윤여진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역시, 오빠는 내 말 들어줄 줄 알았어요!”결국 제 말을 들어준 임유환에 윤여진의 촉촉한 눈망울에서는 빛이 나기 시작했다.“너랑 같이 있어 줄 수는 있는데, 난 바닥에서 잘 거야.”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는 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 돼버렸으니 임유환은 나름대로 그 안에서 최선책을 찾으려고 노력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