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서우 씨한테 정말 그런 병이 있다고요?”제가 아는 최서우는 이성한테 아주 개방적인 사람이었고 혐오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기에 임유환은 쉽게 납득할 수가 없었다.그리고 임유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최서우도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들지 못했다.“그럼 가짜겠어요?”“근데 그때 병실에서는 왜...”“그건 서우가 유환 씨 꼬드겨서 연구실로 데려가려고 그런 거예요. 서우는 당신을 같은 남자는 다 싫어한다고요!”조명주가 말귀를 못 알아듣는 임유환을 흘기며 말했다.“아...”그때 임유환은 문득 최서우가 전에 남자에겐 관심 없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때는 장난인 줄 알았는데 그게 진짜였구나...“이제 무슨 병인지 알았으니까 고칠 수 있어요?”“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조명주의 걱정어린 질문에 임유환이 한숨과 함께 답을 했다.“이건 마음의 병이라 서우 씨 마음에 상처를 낸 사람만이 풀 수 있는 문제에요. 서우 씨가 직접 마주쳐야 한다는 말이죠. 그게 아니면...”“서우 씨 마음을 흔들 수 있는 다른 남자가 나타나야죠. 그 남자가 서우 씨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것도 가능하긴 한데... 그게 좀 어려운 일이잖아요. 그리고 치명적인 단점도 존재하고.”“단점이 뭔데요?”“어...”잠시 망설이던 임유환이 아무래도 사실대로 말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입을 열었다.“단점은 서우 씨가 평생 그 남자만 보고 살 거라는 거에요. 다른 남자는 다시 못 받아들일 거에요.”“물론 이건 그냥 이론일 뿐이고요. 실제로 어떻게 되는지는 그때 가서 봐야 아는 거예요.”“그리고... 최서우 씨한테 이런 병까지 있으니까 새로운 남자를 찾기도 쉽진 않을 거예요.”“이런 젠장!”그놈만 아니었어도 최서우가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조명주는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났다.“됐어 명주야. 나는 지금도 좋아. 너랑 같이 있으면 행복해.”최서우는 자신한테는 더는 중요해지지 않아진 남자 때문에 조명주가 화내는 게 싫어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우리 신의 양반
“저도 서우한테 한 짓이 미안해서 그거 되돌리려고 이렇게 왔어요.”조효동은 성공해서 돌아온 자신을 거절하는 여자는 없을 거라는 생각에 당당하게 말했다.“필요 없으니까 꺼져!”조명주는 살기 가득한 얼굴로 소리쳤다.“조 중령님이 서우 친한 친구인 건 아는데 그래도 이런 일은 본인 의견부터 들어봐야죠. 서우가 저 때문에 이상한 병까지 걸렸다던데 혹시 알아요, 제가 그걸 고칠 수 있을지?”조효동은 최서우의 마음의 병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다는 우월감에 취해 말했다.“너 따위가 무슨 수로?”조명주는 당장이라도 조효동을 찢어 죽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차가운 말투로 쏘아붙였다.“명주야, 저런 놈은 네가 화낼 가치도 없어.”최서우가 담담하게 말하며 더는 문을 막지 않고 일부러 열어두자 조효동이 저를 쫓아내지 않는 최서우에 우쭐대며 말했다.“서우야, 네가 아직 나 못 잊은 거 나도 알아.”“네가 뭔가 착각했나 본데?”최서우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으로 조효동을 보며 말했다.“너랑 나 사이엔 이제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아. 그리고 나 이제 남자친구도 생겼으니까 그만 귀찮게 했으면 좋겠어.”“남자친구가 생겼다고?”조효동은 떨리는 눈꼬리를 하고 임유환을 보며 말했다.“설마 저 사람이야?”“그래.”최서우의 평온한 대답에 코웃음을 친 조효동이 말을 이었다.“서우야, 네가 그날 일로 아직 화난 건 알겠는데 굳이 아무나 데려와서 남자친구인 척 연기할 필요까진 없는 거 아니야?”“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딜 봐도 너랑은 어울리지 않잖아.”조효동은 입은 옷들을 다 합쳐도 10만 원은 넘지 않을 것 같은 차림에 저한테는 상대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유환 씨 좋은 사람이야. 너보다는 훨씬 더.”하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딱 잘라 말하는 최서우에 조효동은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어디가 나보다 더 낫다는 거야? 미안한데 나는 싼 티 난다는 것밖에 모르겠는데?”“그래서 네가 유환 씨한테는 안 된다는 거야. 유환 씨는 적어도 돈으로 다른 사
“병이 다 나았다고?”조효동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되묻자 최서우가 담담히 대답했다.“그래.”“왜, 내가 다 나았다는데 넌 오히려 싫어하는 눈치네?”“그럴 리가 없어! 너 거짓말 하는 거지?”조효동은 눈에 띄게 당황하며 말했다.국내로 돌아오기 전 직접 사람까지 붙여서 확인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남자를 싫어하며 몇 년 동안 연애는커녕 남자와 썸조차도 타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 며칠 사이에 남자친구를 만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최서우는 깜짝 놀라는 조효동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난 너 못 믿어.”“당신이 서우 씨 상처 준 남자죠?”그때 임유환이 최서우 앞에 나서며 말했다.물론 사건의 자초지종은 잘 모르지만 눈앞의 남자 때문에 최서우가 남자를 혐오하게 되었다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그러고도 최서우 앞에 다시 나타나다니 양심이라곤 없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지?”조효동이 갑자기 말을 걸어오는 임유환을 가소롭다는 듯 쳐다보며 말했다.“당신이 계속 내 여자친구한테 들이대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당연히 나랑도 상관이 있는 일이죠.”임유환은 일부러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리고 당신이 왜 내 여자친구한테 서우라고 불러요?”“너!”순간 열 받은 조효동은 표정을 굳히고는 최서우를 향해 말했다.“서우야, 너 진짜 이딴 놈더러 계속 네 남자친구인 척하라고 할 거야?”“조효동, 내가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 나는 이제 너한테 아무 감정 없고 유환 씨는 진짜 내 남자친구야. 넌 아직도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아니?”최서우는 대꾸하기도 귀찮다는 듯한 말투로 쏘아붙였다.“그럼 증명해봐. 쟤가 진짜 네 남자친구이고 네 그 병이 다 나았다는 거 증명해보라고.”최서우의 말을 믿지 않은 조효동이 이를 악물며 증명을 요구했다.그러자 최서우는 임유환과 다정하게 팔짱을 끼며 손으로 그 팔을 매만지기까지 했다.그 과정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고 최서우의 얼굴에 옅은 홍조까지 피어오르자 조효동은 제 눈을 의심
조효동의 조롱 섞인 눈빛을 마주한 임유환이 고개를 저었다.“20억?”임유환이 욕심을 부린다는 생각에 조효동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20억은 저에게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굳이 따지지는 않았다.하지만 임유환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200억?”생각보다 큰 숫자에 조효동의 표정이 빠르게 어두워졌다.하지만 200억에 최서우를 되찾는다면 그것도 나름 수지가 맞는 거래라 생각하며 애써 화를 삼켰다.그런데 임유환이 또 고개를 저어댔다.“2천억?”2천억이라는 지출은 조효동에게도 아주 큰 금액이었기에 조효동은 이를 악물며 물었다.하지만 말을 제가 먼저 뱉었기에 인제 와서 주워 담기도 자존심 상한 일이니 조효동은 애써 괜찮은 척을 할 수밖에 없었다.“2천억이라뇨? 조 사장님 그 정도로 그릇이 작은 사람이었어요?”하지만 2천억이라는 금액에도 가소롭다는 듯 말하는 임유환에 조효동은 이번에는 정말 참지 못하겠는지 어금니가 깨질 정도로 이를 악물더니 소리를 질렀다.“2천억도 적어? 너 도대체 얼마를 원하는 거야!”이쯤 되니 최서우와 조명주도 임유환이 든 두 손가락이 대체 얼마를 의미하는지 궁금해 났다.“20만 억.”그때 더 이상 시간을 끌기 싫었는지 임유환이 금액을 불렀다.그리고 그 소리를 들은 조명주와 최서우가 바로 웃음을 터뜨렸고 최서우는 임유환이 지금 장난을 치고 있다는 걸 알기에 이 상황이 흥미롭다는 듯 눈빛을 반짝였다.“지금 나랑 장난해?!”말도 안 되는 금액에 조효동이 소리를 지르자 임유환은 더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조효동을 보며 말했다.“20만 억이 그렇게 많아요?”“그것도 없으면서 어디서 큰 소리야, 당장 나가요. 나랑 서우 씨 방해하지 말고.”조효동은 자산이 2만 억이나 되는 제가 임유환 같은 서민 나부랭이에게 농락당했다는 사실에 화가 나는지 깊은 한숨을 쉬고는 눈을 치켜뜨고 임유환을 보며 물었다.“그럼 너는 20만 억이 있다는 소리야?”“당연하죠. 고작 20만 억이 없겠어요?”담담히 말하는 임유환에 조효동은 속에서 천불이 끓
“신의 양반은 우리 서우 어떤 것 같아?”임유환의 마음이 궁금했던 최대호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성격 좋죠.”“하하, 그럼 됐어.”임유환이 별로 생각도 안 하고 답하자 최대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또 수염을 쓸어내렸다.임유환은 최대호가 그저 손녀 칭찬에 기뻐하는 줄로만 알았지만 최대호의 뜻을 알아들은 최서우는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그런데요 어르신, 서우 씨와 조효동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거에요? 그 이유라도 알면 병을 고치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요.”“아, 그 개자식.”임유환이 턱을 매만지며 말하자 최대호가 한숨을 한 번 쉬고 말을 이었다.“서우야, 이건 네가 직접 얘기해. 나는 먼저 방에 가 있어야겠다.”“그게...”말을 마친 최대호가 방으로 사라지자 최서우는 입술을 깨물며 망설였다.최서우는 혹시나 임유환이 자신을 이상하게 보기라도 할까 봐 그 일에 관해 얘기하고 싶지않았다.“서우야, 얼른 유환 씨한테 말해.”하지만 지금 최서우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임유환뿐이었기에 조명주는 그런 최서우를 재촉했다.“명주야, 나...”“됐어, 내가 대신 말 할게.”최서우가 계속 주저하자 조명주는 자신이 대신 말하겠다며 나섰다.조명주는 최서우가 얼른 그날의 그늘에서 벗어나길 바랐다오늘 최서우가 남자를 혐오하는 병에 걸렸다는 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그 얼굴을 들이미는 조효동에 조명주는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그래서 조명주는 최서우가 얼른 병을 극복하고 다른 남자를 만나 조효동에게 제대로 보여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유환 씨, 조효동은 서우랑 3년 전에 알던 사인데 그때까지 서우는 연애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어요.”“그래도 공부 잘하고 이쁘고 학생회 부회장까지 했었으니까 서우 좋아하는 남자는 많았죠.”“근데 최서우가 쟤가 의학에 미쳐서 동아리 활동만 하고 맨날 도서관에만 있었어요.”“서우 좋다는 남자들로 그 도서관이 늘 꽉 찼었죠. 근데 서우가 다 거절했거든요.”“그러다가 조효동 그 개자식이 나타난 거
“본색이요? 어떤 본색인데요?”이를 악물며 말하는 조명주에 임유환이 궁금한 듯 물었다.“그 자식이 연애를 엄청 많이 해본 쓰레기라는 거죠.”“처음에 서우랑 친해지고 나서부터 계속 다정하고 지고지순한 척 연기하면서 뭐 본인은 태어날 때부터 집이 가난해서 주변 사람들이 돈 때문에 병 치료도 제대로 못 한다고 그랬대요.”“그것 때문에 어릴 때부터 의사가 되고 싶었다고, 최선을 다해서 그런 어려운 사람 돕겠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댄 거죠.”“근데 문제는 돈 많이 벌어서 꼭 해외에 가서 계속 공부를 하고 싶다는 그 소리에 서우가 감동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놈 도와주겠다고 안 하던 카페 아르바이트까지 하면서 그동안 모은 돈을 다 준 거에요. 가서 공부하는 데 쓰라고.”“처음에는 뭐 이 돈을 어떻게 받냐는 둥 별 입에 발린 소리를 다 하면서 또 서우를 감동시켰죠. 그러면서 7일 뒤면 밸런타인데이니까 그때 같이 로맨스 영화 보러 가자고 서우한테 데이트 신청을 했어요.”“서우도 한창 그놈을 좋아하고 있을 때니까 당연히 좋다고 했죠.”“그렇게 7일 뒤에 둘이 같이 영화를 보러 갔어요.”“아,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냥 영화 분위기를 빌려 서우랑 한번 해보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때는 우리도 몰랐죠 그걸.”“서우가 좀 보수적이다 보니까 연애를 해도 스킨십 같은 건 전혀 안 했거든요. 아예 손도 안 잡아서 조효동이 영화관이 어두우니까 그때 키스도 하려고 했는데 서우가 피한 거죠.”“그때 피하길 잘했죠. 아니었으면 돈도 몸도 다 빼앗겼을 거예요.”“사실 서우는 이미 잘 만날 준비가 되어있었는데 아마도 하늘이 도왔던 것 같아요. 하느님도 더 이상 서우가 그런 놈한테 사기당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던 거죠.”“그러다가 영화가 절반쯤 지났을 때 조효동이 갑자기 전화를 받더니 집에 급한 일이 생겼다면서 먼저 갔어요. 서우도 별생각 안 하고 그냥 혼자 영화 보는 게 재미없어서 도서관에 가서 책이나 읽으려고 나갔는데.”“그 덕분에 바로 그 쓰레기를 현장에서 보게 된
“스무 살이요?”돈을 위해 스무 살이나 많은 여자를 만났다는 소리에 임유환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네, 진짜 개쓰레기죠!”조명주는 눈을 치켜뜨며 이를 악물고는 말했다.“근데 서우가 또 한 고집하잖아요. 전화로 확인하고도 못 믿겠다고 직접 눈으로 봐야겠다고 그 비 오는 날에 맞은편 정류장에서 4시간을 기다린 거예요.”“그리고 조효동과 그 여자가 호텔에서 웃으며 나오는 걸 보게 됐죠. 그때 분명히 조효동과 눈이 마주쳤는데 조효동은 아무렇지도 않았대요.”“그냥 이제 다 까발려졌구나 정도?”“그리고 그 여자도 서우를 보고 일부러 약 올리면서 영화 하나 본 걸로 뭐 비련의 여주인공 행세냐고, 겨우 몇백만 원으로 뭘 할 수 있냐고 도발했대요. 본인이 조효동한테 사준 명품 옷, 시계만 해도 몇억은 넘는다고 그리고 조효동 앞으로 해외에 집까지 사줄 거라면서 서우를 몰아붙인 거죠.”“서우도 그제야 안 거죠. 조효동이 그동안 말했던 뭐 가난하다 의사가 되고 싶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었다는 걸. 조효동은 진작에 돈 많은 아줌마한테 몸을 팔아왔다는 걸.”“그렇게 큰 충격을 받고 서우는 비를 맞으면서 기숙사로 돌아간 거죠.”“그리고 바로 쓰러졌는데 다행히 룸메이트가 있을 때라서 병원으로 옮겨져서 한 며칠은 입원했을걸요.”“그런데 조효동이 거기까지 찾아와서 용서해달라고 비는 거예요. 정말 어머니 수술비를 마련해야 하는데 집에 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거라면서.”“당연히 서우도 두 번은 안 속고 쫓아냈죠. 서우 룸메이트도 너무 열 받아서 조효동을 뺨을 때릴 정도였다니까요.”“그렇게 그 뒤로는 연락을 안 했어요. 조효동도 그 돈 많은 아줌마 따라서 해외에 갔다고 하던데 이렇게 또 돌아올 줄 누가 알았겠어요?!”“그런 놈이 자산이 2만 억이나 되는 이사장이 되어 돌아왔다니 정말 생각할수록 짜증 난다니까요!”말을 하다 보니 더 화가 나는지 조명주는 이를 갈기 시작했다.“진짜 우리 서우만 불쌍하다니까요. 어쩌다 그런 놈을 만나서 저 이쁜 애가 다른 남자
임유환의 말에 조명주가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임유환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유환 씨도 우리랑 생각이 같다니 의외네요. 역시 내가 사람은 잘 봤어요.”임유환은 차갑던 눈을 접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서우 씨는 저한테 맡기고 마음 편히 작전 구역으로 돌아가세요.”“그래요, 혹시 무슨 일 생기면 불편해하지 말고 바로 나한테 연락해요. 서우는 내 제일 친구예요. 나도 서우가 다치는 건 보고 싶지 않아요.”“네, 그럴게요.”의리 있는 조명주의 말에 임유환도 웃으며 답했다.“그럼 나 먼저 갈게요. 작전 지역에서 계속 재촉하네요.”“네.”“조심히 가 명주야.”“응, 잘 있어. 나 먼저 갈게.”“응, 잘 가.”조명주와 최서우가 서로 손을 흔들며 인사를 마치고 조명주가 별장을 나서자 거실에는 최서우와 임유환만이 남게 되었다.그렇게 둘의 시선이 부딪치자 최서우가 난감해하며 말했다.“미안해요, 또 귀찮게 해서...”“아니에요. 이건 어떤 남자가 봐도 다 그냥 넘어가지 못했을 일이에요. 당연히 도와야죠.”고개를 저으며 정의로 불타는 그 맑은 두 눈을 저에게로 고정한 채 말하는 임유환에 최서우는 또 얼굴이 붉어졌다.그리고 가슴도 살짝 두근거리는 것 같았다.임유환은 다른 남자들과는 달라 보였다.“고마워요, 유환 씨.”“왜 자꾸 고맙다고 그래요, 나 적응 안 되게.”“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예요. 계속 나 도와주고 있잖아요.”기분이 나아진 듯 예쁜 미소를 띠며 말하는 최서우에 임유환도 웃으며 말했다.“서우 씨가 괜찮다니 저도 마음이 놓이네요. 그럼 오늘은 먼저 가볼게요.”“아 그리고 할아버지 약 처방은 좀 있다 줄게요. 그 처방에 적힌 대로 하루에 세 번씩 드시면 2주 정도 지나면 다 나으실 거예요.”“네.”최서우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데려다줄까요?”“아니요, 서우 씨는 할아버지 보살펴야죠. 이미 기사 불렀어요.”“그래요, 조심히 가요.”말을 하는 최서우의 눈빛은 한없이 다정했다.“네.”임유환이 고개
임유환과 윤여진은 최서우의 병이 악화될까 염려하여 일부러 그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임씨 집안으로 향했다.임씨 집안으로 가는 차 안에서 윤여진은 사건의 자초지종에 대해 간략하게 전해 듣게 되었다.영상 속의 그 여자는 임유환의 시중을 들던 나비라는 이름의 메이드이고 그 메이드를 남자들에게 건네준 이가 임준호라는 사실까지 다 듣고 난 윤여진도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윤여진이 알고 있는 임준호는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었는데 그런 분이 한 일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잔인한 행동에 15년 전 자신의 친아들을 직접 내쫓던 그때의 임준호가 떠올라 윤여진은 온몸이 오싹해났다.아마도 15년 전 그날부로 임준호가 완전히 변한 게 아닌가 싶었다.30분 뒤 그들은 임씨 집안에 도착했지만 워낙 깊은 밤이라 저택의 대문은 당연히 잠겨있었고 흑기군을 데리고 대문 앞에서 한참 동안 대기하고 있던 흑제가 임유환을 보고 인사를 건네왔다.“임 선생님.”“오셨어요?”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세계 제일 갑부의 느닷없는 등장이 윤여진은 놀랍기만 했다.임유환을 대하는 흑제의 태도가 지나치게 깍듯해 그 둘의 사이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라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할 때라서 윤여진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영상에서 봤던 모습을 떠올리며 윤여진이 다시 표정을 굳히자 아까부터 냉랭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임유환이 앞으로 나서더니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임준호, 당장 나와!”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저택 사람들 몇 명이 눈을 떴고 하인 두 명이 달려 나왔다.밖에 나와 상황을 살피던 하인 두 명은 익숙한 임유환의 얼굴에 깜짝 놀랐지만 그런 놀라움도 얼마 오래가진 못했다.하인들은 이내 비아냥거리며 임유환을 향해 말했다.“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임유환 도련님 아니세요?”입으로는 도련님이라 하고 있었지만 그 말투 속에 진하게 녹아나 있는 조롱은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을 정도였다.“무슨 도련님이야, 버려진 도련
임유환의 몸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주인님, 그건 저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이 영상도 그 경찰에 대해 조사할 때 경찰 시스템을 뒤지다 발견한 겁니다.”“경찰 시스템?”“그럼 이것도 정씨 집안에서 한 짓이란 말이야?”“그것까진 아직 모르겠는데... 제가 알아본 바로는 저 여자분은 주인님... 아버님께서 직접 저 남자들 손에 넘긴 거였습니다.”이 일이 임유환의 아버지와 관련되어있기도 했고 영상 속의 여자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면 더 위험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아 흑제는 대답을 망설였다.“아버지?”“네, 주인님.”흑제의 말에 당황하던 임유환은 재차 확인을 거친 후에 또다시 기운을 뿜어내며 당장이라도 임준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임유환은 어떻게 자신이 직접 데려온 아이를 또 내다 버릴 수가 있는지 임준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당연히 제 한 목숨 부지하고자 행한 나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저 사람들 손에 끌려가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내어준 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짓인지 의문이 갔다.영상 속 사람들이 말하는 비밀 열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임유환은 나비가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임준호!”갑자기 소리 지르는 임유환 때문에 방 안에 있던 윤여진은 화들짝 놀랐다.“흑제.”“예, 주인님.”“지금 당장 흑기군 준비해서 나랑 임씨 집안으로 간다.”“예, 주인님.”지금 임유환은 약해빠진 임준호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었다.그래서 직접 집으로 쳐들어가서 대체 나비를 누구에게 넘겨준 것인지, 나비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살아있다면 직접 얼굴을 봐야 했고 죽었다면 그 시체라도 봐야 진정될 것 같았다.임유환은 나비가 그 짐승 같은 놈들 손에 놀아나도록 두고 볼 수가 없었다.살아있다면 당장 데려다가 직접 치료를 해줄 것이고 죽었어도 데리고 와서 묻어줄 생각으로 눈이 빨갛게 충혈된 임유환은 차오르는 분노와
“나비?”아까는 얼굴이 제대로 안 보여서 몰랐는데 영상 속의 여자는 바로 임유환만 보면 도련님이라 부르며 해맑게 웃던 나비였다.그렇게 밝고 예쁘게 웃던 아이가 피범벅이 된 채 모진 고문을 견뎌내는 걸 보고 임유환은 낯빛이 창백해졌고 머리가 울려왔으면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서 쫓겨난 지도 15년이니 나비도 많이 커서 얼굴만 보면 못 알아봤겠지만 나비 문양의 반점 덕분에 한눈에 그녀의 알아볼 수 있었다.나비라는 아이는 5살의 어린 나이에 임씨 집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름도 없어서 나비도 임유환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나비는 어릴 때 강도들의 손에 부모님을 잃고 그들에게 이끌려 여기저기 팔려 다니던 이이였는데 그런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임준호가 큰돈을 들여 데리고 오는 바람에 임씨 집안에서 메이드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나비는 임유환을 보자마자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때릴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슬퍼 보여서, 웅크린 몸을 떨고 있는 아이가 너무 애처로워 보여서 임유환은 아직까지도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 들어온 이상 더는 그 어떤 괴롭힘도 없을 거라고 다독여봐도 나비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었다.다른 메이드들을 시켜 깔끔히 씻기고 머리도 빗겨주고 깨끗한 옷까지 갈아입혀 주니 왼쪽 얼굴에 있는 나비 모양의 반점도 드러났다.임유환이 그 반점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비는 신분이 낮은 제가 얼굴에 난 반점으로 임유환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어 동굴 속에서 강도들에게 폭행당하던 것처럼 맞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반점을 가리며 몸을 떨었다.그에 임유환은 바로 나비의 손을 잡아주며 자신은 그들과는 다르다고 천천히 타일러주었다.그리고는 나비의 긴장과 두려움을 해소해주기 위해 정원 산책까지 데리고 갔다.드넓은 정원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있었고 그것들이 함께 조화로운 향도 만들어내고 있었다.이런 아름다운 곳은 처음 보는 나비는 처음에는 몸이 굳어버리며 어색해했지만 이
“아!”남자의 행동과 함께 흘러나온 여자의 처절한 비명이 밀실을 가득 채웠다.화면을 뚫고도 전해지는 여자의 절망과 고통에 핸드폰을 들고 있던 임유환의 몸도 떨려왔고 마찬가지로 비명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윤여진도 임유환 쪽으로 다가오며 화면을 바라보았다.“어머!”사람한테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 영상 속 인간들 때문에 윤여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소리쳤다.너무 집중해서 본 나머지 옆에 윤여진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던 임유환이 다급하게 화면을 가리며 말했다.“여진아, 넌 보지 마.”“오빠, 이 사람들 누구예요?”“아직 모르겠어.”얼굴과 입술이 창백해진 윤여진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임유환은 한숨부터 쉬며 대답했다.“여진아, 네 방 화장실 좀 쓸게.”말을 마친 임유환은 화장실로 들어가서 다시 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화면 속의 여자는 여전히 은침에 찔린 손을 들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온몸을 비틀려고 발버둥 치는 여자는 마치 불판 위에 올라간 미꾸라지 같기도 했다.하지만 검은 옷차림의 남자는 그런 여자가 불쌍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차가운 눈을 하고 두 번째 은침을 꺼내 들어 여자의 다른 손가락에 찔러넣었다.“아!”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고통에 여자는 순간 고개를 확 젖혀버렸고 이미 흑과 말라 굳어버린 핏자국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이 여자의 얼굴을 가렸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몰라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그냥 날 죽여줘요 제발...”“죽여주세요...”남자가 아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여자는 울며불멸 죽기를 애원하고 있었다.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으면 죽는 걸 원하고 있을까 싶어 임유환은 비통하다 못해 화까지 나고 있었다.“말했잖아, 얘기하면 죽여준다고.”말을 마친 남자는 섬뜩하게 웃더니 나머지 손가락에도 하나하나 은침을 꽂아 넣었고 여자는 온몸에 경련이 일듯 몸을 떨어대다가 한계에 다다른 건지 다시 한번 기절했다.은침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열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들은 빠르게 작은 웅덩이
“마음의 준비요?”의미심장한 흑제의 말에 임유환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영상인데 그래요?”“혼자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미 암호 걸어서 이메일 보내놨어요.”임유환이 영상을 보면 어떤 반응일지 알기에 흑제는 말을 내뱉기가 어려웠다.“알겠어요.”임유환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빠르게 흑제가 보내온 이메일을 확인했다.이메일의 정체는 5분쯤 되는 영상이었는데 영상의 장소는 어두운 밀실같이 보였다.밀실 안에는 똑같은 옷차림을 한 남자가 다섯이나 있었는데 그들은 전부 눈 하나만 내놓고 있었다.임유환은 그들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핸드폰 화면으로만 들여다보고 있음에도 무시무시한 그들의 기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남자들의 발밑에는 거의 죽어가는 젊은 여자 하나가 누워있었다.남루한 옷차림의 여자는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몸에는 채찍에 맞느라 생긴 생채기들이 한가득이었다.생채기 주위의 살들은 진작에 터져나갔고 팔은 안에 있는 뼈가 다 보일 정도로 앙상했다.그리고 몸에 난 상처는 그뿐만이 아니라 담배로 인해 생긴 작은 화상 자국들도 빼곡했다.옛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새로 난 상처들은 이미 옷과 붙어버려 여자의 처참한 상태를 더욱 잘 보여주고 있었다.영상을 보고 있던 임유환도 서서히 여자가 불쌍해졌다.다섯 남자들은 대체 누구길래 여자한테 이토록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그리고 여자는 또 누구인지 임유환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영상 하단에 떠 있는 시간을 보니 아직 5분 1밖에 진행되지 않은 영상에 임유환은 계속해서 화면을 들여다봤다.화면은 빠르게 전환됐고 여전히 같은 복장을 한 남자 다섯 명과 아까와 다를 게 없는 밀실이 나타났지만 아까 그 일로부터 며칠은 지난 듯 보였다.영상 속의 남자는 찬물을 들어 쓰러져있는 여자의 몸 위로 뿌렸고 여자는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고통 속에서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검은 복면을 쓴 남자 하나가 입을 열자 나머지 네 명도 여자를 차갑게 바라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검사할 거예요 오빠?”그때 귀를 간질거리는 윤여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부끄러워하면서도 도발적인 말을 뱉어내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심장이 쿵쾅거렸다.“여진아, 나는...”오해를 풀어보려고 고개를 돌려 윤여진을 보던 임유환은 몸을 앞으로 숙인 탓에 훤히 드러난 검은색 슬립 아래의 몸매에 다시 말을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임유환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은 시각 동물인지라 완벽한 몸매와 유독 눈에 띄는 풍만한 가슴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반응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감정도 이내 임유환의 이성에 묻혀버렸다.“후...”임유환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여진아, 진짜 이제 그만해. 진짜 실수한다니까.”“오빠는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나긋나긋하게 말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뜨거운 숨결 때문에 점점 본능이 들끓고 있었던 임유환은 이대로 있었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런데 그 순간 윤여진이 임유환의 손을 덥석 잡아 오자 우유 크림처럼 부드러운 그 느낌에 임유환은 일어서려던 다리마저 굳어버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유환 오빠, 나 장난하는 거 아니라니까요.”윤여진은 여전히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하며 잡고 있던 임유환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그 모습에 임유환은 순간 머리가 하얘졌고 이 손을 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하고 있었다.그런데 마침 타이밍 좋게 울린 전화벨 소리에 둘 다 화들짝 놀랐고 임유환도 또 한 번 울리는 벨 소리에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윤여진도 겁먹은 고양이마냥 손을 빼내며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나... 전화 좀 받을게.”임유환이 어색하게 말하자 윤여진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네.”아까의 대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끄럼 타는 고양이 같은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리던 임유환이 전화를 받았다.흑제에게서 온 전화라 조금 긴장한 채로 받았는데 역시나 전에 지시했던 일
가슴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임유환은 애써 윤여진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장난치지 말라니까.”윤여진이 여전히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한 임유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말을 돌렸다.“아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다고 했잖아, 그거 알려줄게.”“그 얘긴 나중에 하고, 오빠 아직 내 말에 대답 안 했잖아요.”“어... 그 얘기 먼저 하자, 불 끄면 졸려서 못 할 것 같아.”임유환은 기대에 찬 윤여진의 얼굴이 보였지만 어떻게든 이 숨 막히는 상황부터 끝내보고자 평소답지 않게 우겨댔다.그리고 사실 윤여진이 한 말이 장난인지 아닌지 제대로 분간도 가지 않아 아까부터 심장이 떨리고 있었다.장난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장난이 아니라면 아주 어색해질 것 같았다.“오빠, 왜 아까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리는 것 같죠?”그때 임유환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을 보며 윤여진이 부드럽게 물어왔다.“그... 그래?”“긴장한 거예요 설마?”임유환에게 질문을 하며 코앞까지 다가온 윤여진 때문에 둘의 거리는 3㎝도 채 남지 않게 되었다.정말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닿을 것같이 가까운 거리라서 임유환은 윤여진이 내뱉는 호흡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뜨거운 숨결과 함께 풍기는 향기에 임유환은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여진아, 이제 진짜 그만해.”사람 둘은 족히 앉을 정도로 떨어져서야 임유환은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장난 아니라니까요.”임유환이 저에게서 멀어지자 윤여진은 살짝 실망한 듯 보였지만 이내 연애 수첩 제1항을 떠올린 그녀는 다시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그래서 윤여진은 긴장한 듯 굳어있는 임유환을 보며 익살스레 웃어 보였다.“유환 오빠, 누가 그러는데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긴장을 한대요.”“오빠 설마 나 좋아하는 거예요?”윤여진이 이 질문을 할 때 임유환은 이게 장난이든 진심이든 간에 서둘러 이 화제가 지속되는 것부터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둘이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상해지는 방 안의
“어...”단도직입적인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은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임유환의 생각이 불순한 건 맞지만 그게 오로지 임유환의 잘못은 아니었다.이미 성인이 된 그들은 15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윤여진은 얼굴이며 몸매며 누가 봐도 예쁜 여자로 성장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멀쩡할 남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임유환 역시 남자였으니 검은색 레이스 속옷에 슬립까지 입고 제 눈앞을 돌아다니고 있는 윤여진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슬립 아래로 보일 듯 말 듯 한 윤곽이 아까부터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임유환은 지금 온 정신력을 다 쏟아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자신의 눈이 윤여진의 몸으로 향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임유환이기에 당연히 같이 자자는 그녀의 요구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모든 남자들의 워너비인 그 몸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밤을 조용히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오빠, 이상한 생각 한 거 맞죠?”한편 윤여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임유환을 보며 기쁨이 섞인 목소리로 장난스레 물었다.“어...”임유환은 이젠 정말 자신이 무슨 생각인지도 잘 모를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정말 윤여진을 두고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말하기에는 그는 윤여진이 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그녀의 몸만 보면 저절로 뜨거워지는 가슴이 대신해서 부정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여진아, 사실... 나는...”다그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해명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진심이 전달될지 몰라 말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임유환에게 윤여진은 여전히 15년 전 꼬맹이였고 임유환 또한 그때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그는 윤여진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오해하는 것도 원치 않았고 또 윤여진도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대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여전히 그때처럼 윤여진이 힘들 때 그녀에게 힘이 돼주는 든든한 오빠가 되고 싶었는데 이 마음을 전하기에 말 한마디
“아니야, 그냥 네가 아까 한 말 생각하고 있었어.”“그럼 오빠도 나랑 같이 있고 싶은 거예요?”다급히 해명하는 임유환에 시무룩해 있던 윤여진은 다시 밝게 웃으며 물었다.“그럼.”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사실 그와 윤여진이 말한 같이 있는다는 서로 전혀 다른 뜻이었다.“그럼 오빠,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임유환의 팔을 감싸 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간드러지게 말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몸이 먼저 반응할 뻔한 걸 간신히 참고는 물었다.“여기서 너랑 같이 밤을 보내자고?”“네!”윤여진이 이런 부탁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임유환이기에 제 팔에 닿아오는 말랑거리는 그 느낌도 까맣게 잊은 채 놀랐다.그런 임유환의 반응을 보던 윤여진은 혹시라도 거절당할까 봐 다급하게 한마디 더 보탰다.“여기서 자는 건 처음이라 좀 무서워요, 워낙 낯설기도 하고...”“어...”윤여진의 부탁도 일리가 있어 보여 임유환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오빠, 그냥 남아서 나랑 같이 자면 안 돼요?”윤여진은 임유환의 팔을 좌우로 흔들며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임유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가만히 있어도 예쁜 얼굴인데 애교까지 부리니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모습이 섞여 있어 웬만한 남자라면 다 윤여진한테 넘어갈 것 같았다.인내심과 자제력 하나는 자부하면서 살아왔던 임유환도 윤여진의 애교 공세에 3초도 못 버티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알... 알겠어.”임유환은 저도 모르게 긍정의 대답을 해버렸다.정말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바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저를 향해 애원의 눈빛을 보내는 윤여진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역시, 오빠는 내 말 들어줄 줄 알았어요!”결국 제 말을 들어준 임유환에 윤여진의 촉촉한 눈망울에서는 빛이 나기 시작했다.“너랑 같이 있어 줄 수는 있는데, 난 바닥에서 잘 거야.”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는 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 돼버렸으니 임유환은 나름대로 그 안에서 최선책을 찾으려고 노력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