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 버튼을 누르고 화장실로 들어가려는데 또 알림음이 울렸다.띠링-역시나 최서우였다. 수락하지 않으면 계속 보낼 작정인 것 같아 임유환은 어쩔 수 없이 친구추가를 수락했다.마침 번호는 어떻게 알았는지 물어보고 싶기도 했으니까.친구 추가확인 메시지 뒤로 최서우의 문자가 보였다.[잘생긴 환자분, 누나가 친구추가 보냈는데 왜 거절했어요. 속상해요 저 진짜.]그 문자를 읽은 임유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나이도 자신보다 어리면서 말끝마다 누나누나 하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으니 일단은 따지지 않았다.임유환은 단도직입적으로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내 번호 어디서 났어요?][누나가 어떻게 가졌는지 맞춰봐요.]최서우는 입꼬리를 잔뜩 올린 채로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조명주 중령님이 준거죠?][빙고! 잘 맞추네요.]임유환도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한 답이었다.이어서 따봉 이모티콘을 보내오며 최서우가 말했다.[잘 맞췄으니까 상으로 퇴근하고 술 사줄게요. 나올래요?][아니요. 됐습니다.]저를 취할 때까지 먹이고 데려가서 연구하려는 속셈이 뻔한데 임유환이 거기에 걸려들 리가 없었다.[유환 씨 너무 정 없게 그러지 말고. 누나가 이래 보여도 처음 남자한테 데이트 신청한 건데. 평소 같으면 다른 사람들이 불러도 답장도 안 해요 나.]임유환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임유환은 당연히 최서우가 하는 말을 믿지 않았다. 이렇게 유혹적으로 나오는데 이미 많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당했을 것이 불 보듯 뻔했다.만약 최서우가 한 말이 다 사실이라고 해도 임유환은 최서우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그래서 임유환은 굳이 돌려 말하지 않았다.[저 시간 없습니다. 더 할 말 없으면 씻으러 가야 해서요.][씻는다고요?]최서우는 씻는다는 말에 갑자기 흥미가 생겨 임유환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X발."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에서 걸려오는 영상통화를 본 임유환은 낮게 욕을 내뱉으며 고민도 없이 거절했다. 정말 최서우는 제 예상을 빗나가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운 임유환의 머릿속은 내일 있을 파티와 서인아로 가득 찼다.임유환은 아무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부러 자신과 멀어지려고 차갑게 대했던 것도, 폐허에서 자신을 걱정하고 진심을 토로하며 울던 것도...그리고 임유환이 수술실로 들어간 뒤에도 바로 가지 않고 구석에서 울고 있었다는 간호사의 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하지만 눈물은 거짓될 수 없지 않을까.혹시 서인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생각하며 임유환은 습관적으로 긴 한숨을 뱉었다.폐허, 병원 그리고 7년 전의 일까지 내일 파티가 끝나면 물어볼 생각이었다.서인아가 연경에 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다시는 서인아를 볼 기회가 없다 해도 확실하게 해두고 싶었다. 언제까지고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혼자 착각하고 싶지 않았다....새벽녘, 작전 지역에서는 수십 대의 전투기가 굉음을 내며 하늘을 날고 있었다.그중에 검은색 전투기 하나가 착륙하더니 군복을 입은 남자가 문을 열고 내렸다.어깨에 달린 별이 4개인 것으로 보아 대장 정도는 돼 보였다.강인해 보이는 구릿빛 얼굴에는 오만한 기색도 역력했지만 대장을 모시러 온 일개 병사들이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존경 어린 표정을 하고 남자를 바라보았다.그 남자는 2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전장을 휩쓸고 돌아온 대하의 최연소 대장이었다.이번에는 십만 대군을 이끌고 또 한 번 전장에 나가 큰 공을 세우고 돌아왔으니 원수로 승진할 가능성도 충분했다.그러면 그는 온 대하의 최연소, 전무후무한 원수가 되는 것이다!그가 바로 정우빈이었다!"전쟁 매니아"라는 별명에 걸맞는 사람이었다.타고난 재능을 빼고도 그는 연경 작전 지역 제일가는 정 씨 집안 도련님이었다."정 대장님!"정우빈이 문을 열고 나오자 주위에 둘러섰던 병사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모든 병사들이 총을 거두고 정우빈의 향해 고개를 숙였다.정우빈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
이튿날 아침.해수욕장은 아주 시끌벅적했다.오늘 11시, 서인아가 주최하는 축제가 예정대로 호텔 로비에서 열릴 것이다.그때가 되면 서인아가 직접 청년을 선발하여 그녀의 S시 대표로 삼을 것이다!이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꿈꾸던 것인가!하여 9시도 안 된 이른 시간이지만 해수욕장 입구의 야외 주차장에는 이미 각양각색의 스포츠카가 주차되어 있었다.축제에 초대된 사람들은 모두 S시 최상위의 사람들이었다.많은 명문가의 재벌 2세들은 서인아의 사랑을 받는 청년이 되기를 기대했다.임유환과 윤서린 역시 일찌감치 해수욕장에 도착했다.윤서린은 머리를 어깨까지 길게 늘어뜨리고, 옅은 노란색 긴 드레스를 입고 허리에는 노란색 벨트를 차고 있어서 그녀의 몸매는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오늘 그녀는 임유환을 만나기 위해 특별히 옅은 화장을 하고 립스틱까지 발랐다.“서린아, 너 오늘 진짜 예쁘네.”온화하고 아름다운 여인을 마주한 임유환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윤서린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수줍은 듯 눈길을 피하더니 다시 큰마음을 먹고 임유환을 바라봤다.어제 하루 종일 고민한 끝에 그녀는 드디어 결정을 내렸다. 앞으로 그녀는 더 적극적으로 변할 것이다.임유환은 이런 윤서린의 마음을 알지 못한 채,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웃더니 인산인해인 모습을 보고는 말했다.“서린아, 우리 먼저 들어가자. 입구에 사람이 너무 많네.”입구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저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축제에 들어갈 자격도 없었다.하지만 이는 서인아에 대한 그들의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그들은 축제가 끝난 후 해수욕장 입구에서 서인아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다.“네...”윤서린이 고개를 끄덕였다.서인아는 어디에 있던지 이렇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서인아에 비하면, 임유환 옆에 있는 그녀는 평범하기에 그지없었다...“왜 그래, 서린아?”임유환은 윤서린의 기분이 가라앉은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아니... 그저 조금 긴장돼서요. 가요, 우리 들어가
“우리 초대장은 당연히 진짜지!”윤서린은 화가 단단히 나 있었다.[허유나는 왜 이렇게 야박해진 거야!]“진짜?”허유나의 입꼬리가 그녀의 경멸한 태도만큼 올라갔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윤서린에게 초대장을 요구하며 말했다.“그럼 보여줘. 우리가 갖고 있는 정품이랑 비교해 보게.”“그래!”윤서린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고는 가방에서 초대장을 꺼내 허유나에게 보여주려 했다.“서린아, 이런 사람한테 설명할 필요 없어. 상대하면 할수록 더 자기가 잘난 줄 알고 난리야.”임유환이 손을 뻗어 제지했다.그의 큰 손이 윤서린의 손목에 닿았다.“유환 씨.”윤서린이 고개를 들어 임유환을 쳐다봤다. 그의 눈에서 흐르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본 그녀는 삽시간에 화가 가라앉았다.윤서린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가자.”임유환이 웃으며 윤서린의 손을 잡고 VIP 통로로 걸어갔다.“임유환, 너 무슨 뜻이야? 이 찌질이 같은 놈, 누가 난리라는 거야!”임유환의 태도에 허유나는 적잖이 자극받았다.임유환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너, 이 나쁜 놈, 거기 서, 제대로 설명하고 가!”“서라고 했다, 들었어!”“못난 놈!”허유나는 공기처럼 뒤에서 소리를 질렀다.욕설을 들은 윤서린은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괜찮아, 개가 문다고 너도 같이 물 거야?”허유나의 욕설에 임유환은 그저 가볍게 웃어넘겼다.“임유환, 누구보고 개라는 거야!” “거기 서!”하지만 임유환과 윤서린은 이미 보안검색대를 통과한 뒤 해수욕장으로 들어간 뒤였다.“아! 짜증 나!”허유나는 분이 풀리지 않아서 미칠 지경이었다.그러다 문득 멈춰서더니 말했다.“쟤네 지금 들어간 거야?”“그래, 딸.”옆에 있던 허미숙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허! 분명 윤서린 이 년이 다른 수단을 써서 초대장을 손에 넣은 걸 거야. 왕 사장님이랑 잤나 보지.”허유나는 냉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엄마, 태웅아, 우리도 들어가자!”그녀는 갑자기 태도를 바꿔 옆에 있는 장문
해수욕장 내부의 경치는 아주 아름다웠다.햇빛이 눈부시게 비치고 주위에는 잔디가 푸르르게 자라고 있었다.호텔 로비로 향하는 길 양옆에는 음악분수가 우아한 선율에 맞추어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햇빛, 공기, 모든 게 다 좋았다.임유환은 해수욕장을 걸으며 주위의 아름다운 풍경을 느끼며 마음이 편안해졌다.서인아가 이런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었다.“유환 씨, 여기 너무 예쁘네요!”윤서린도 마음이 개운해졌다.“사진 찍어줄까?”임유환이 웃으며 물었다.“좋아요!”윤서린이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윤서린이 “V”자 포즈를 취하자, 임유환이 휴대전화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유환 씨, 저도 사진 찍어 줄게요.”윤서린이 웃으며 말했다.“아... 난 괜찮아.”임유환이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그는 평소에 사진 찍는 습관이 없었다.“여기까지 왔는데 한 장만 찍어요.”윤서린은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그래.”임유환이 대답했다.그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 지 몰라서 쭈뼛거리며 포즈를 취했다. 윤서린도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가요, 유환 씨.”휴대전화 갤러리에 임유환의 사진이 한 장 늘어난 것을 본 윤서린은 아주 만족스러웠다.“그래.”임유환도 활짝 웃었다.두 사람은 축제가 열리는 홀리데이 호텔로 향했다.파티 현장으로 들어가니, 로비는 호화로운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다.중앙에는 레드카펫이 깔려있고 양옆에는 손님들이 자유롭게 먹을 수 있도록 다양한 고급 뷔페가 놓여있었다.파티장 안에는 S시 각계각층의 유명 인사들이 일찌감치 모여있었다.윤서린은 약간 당황했다.이런 엄청난 장면은 난생처음이었다.“서린아, 너무 긴장할 필요 없어. 내가 있잖아.”임유환이 윤서린의 손을 가볍게 잡으며 말했다.윤서린은 그제야 긴장했던 몸이 풀렸다. 그녀는 웃으며 임유환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고마워요, 유환 씨.”“우리 사이에 그럴 필요 없어.”임유환이 따뜻하게 웃고는 앞에 놓인 음식들을 보며 말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허유나였다.그녀는 장문호의 팔짱을 끼고 비웃으며 임유환을 향해 걸어왔다.임유환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그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냉철함과 무관심이 배어있었다.이런 그의 무시는 허유나로 하여금 더 흥분하게 했다.“임유환 씨, 임유환 씨, 널 어떡하면 좋을까? 겨우 얻은 식견을 넓힐 좋은 기회를 이용해 유명 인사들과 인사를 나누지 않고, 허겁지겁 뷔페나 먹으러 오다니?”“도대체 얼마나 가난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거야? ”허유나의 눈에는 경멸로 가득 차 있었다.“누나, 뭐 하러 이런 사람이랑 얘기해. 설사 누구한테 아부하려 해도, 누가 이런 신분의 사람을 상대하겠어?”허태웅도 비웃으며 말했다.그는 이 기회를 빌려 찌질이에게 제대로 모욕을 주려고 했다!임유환은 두 사람을 공기처럼 대하고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쳇, 또 시치미를 떼려고?”허유나가 비웃으며 말했다.말을 마친 그녀는 임유환 접시에 눈길을 돌렸고 위에 놓인 쿠키를 보자 더 비웃으며 말했다.“난 또 뭘 먹는가 했더니, 쿠키였어. 세상 물정 모르기는!”“내가 알려줄 테니까 잘 들어. 이런 고급스러운 장소에서는 와인과 스테이크가 기본이야!”“허허, 딸, 넌 저런 찌질이한테 뭘 그렇게 많이 알려주고 그래. 저런 자식이 와인을 알기나 하겠어?”허미숙도 불쾌해하며 말했다.“설마 당신들한테는 와인과 스테이크가 고급은 아니겠죠?”이 말을 한 사람은 윤서린이었다.그녀는 허유나가 임유환을 모욕하도록 가만두지 않았다.“아니면? 설마 저 쿠키는 아니겠지?”허유나는 자신이 고급인 것처럼 경멸의 눈길로 윤서린을 쳐다봤다.“그래. 유환씨는 이 쿠키를 좋아해. 뭐 어쩔 건데!”윤서린이 그녀와 논쟁을 벌였다.“하하, 그래서 저급하다는 거야. 너를 포함해서 저 사람 옆에 있는 사람들 다!”허유나가 비웃었다.“너!”윤서린은 화가 나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이 말을 들은 조명주도 울화가 치밀어 저도 모르게 눈썹을 치켜떴다.그녀가 돌아서 나가려고 하는데 임유환이 천천히 입
그 말을 들은 허유나의 표정이 굳어졌다.임유환이 조 중령님의 친구라고?임유환도 어안이 벙벙해졌다.조명주가 자기를 도와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조 중령, 의리가 있네.]“조 중령님, 방금...저 찌질이가 중령님의 친구라고 말씀하신 건가요?”허유나가 고개를 들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조명주를 바라봤다.“누구보고 찌질이라는 거죠?”조명주가 눈을 치켜뜨고 물었다.허유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아서 다급히 설명했다.“임유환이요. 임유환은 제 전남편이에요. 5년 동안 제가 먹여 살렸더니 바람을 피워서 결국 제가 뻥 차버렸거든요. 중령님...혹시 저 자식한테 속은 건 아니시죠?”“지금 이 중령의 눈을 의심하는 건가요?”조명주가 차갑게 물었다.“그...그럴리가요...”허유나는 안색이 창백해졌다.“그럼, 그 입 닥치세요.”조명주가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네...”허유나는 입을 다물었다.그녀는 감히 P시의 중령을 건드리지는 못했다.“조 중령님, 화 푸세요.”장문호는 상황을 지켜보고는 나서서 말했다.“방금 저의 약혼녀가 말이 좀 심했습니다. 화나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유나도 중령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이용당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겁니다.”“옆에 있는 저 녀석은 제 약혼녀의 전남편이 맞습니다. 누구나 인정하는 기생오라비인데 지금 윤서린과 붙어있는 건, 윤씨 가문이 S시에서 힘이 있으니 그 덕을 보려는 겁니다.”“하지만 중령님께서 이런 기둥서방이랑 함께 어울려 다니시는 건 신분에 맞지 않습니다!”“그래서, 당신도 이 중령을 가르치려 드는 겁니까?”조명주가 눈을 치켜뜨며 장문호를 쳐다봤다.“그럴 리가요...저는 그저 좋은 뜻으로 드리는 말씀일 뿐, 악의는 없습니다.”장문호는 고개를 숙여 최대한 진정성 있게 보이려 노력했다.“그럼, 그 거짓된 호의는 거둬요. 이 중령도 눈이 있으니 직접 판단할 겁니다.”조명주는 장문호의 체면은 안중에도 없이 말했다.“하...”장문호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다른 볼일 없으면 나한테서 떨어
“쟤요?”장문호는 너무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정신을 차린 후에도 그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조 중령님, 그런 농담 하지 마세요.”“그러니까요, 저 녀석일 리 없잖아요!”허유나도 딱 잘라 부정했다. 말투에는 강한 경멸이 녹아있었다.“설사 S시 사람들이 모두 죽는다 해도, 쟤한테는 차례가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아, 그래?”조명주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보아하니, 임유환 전처도 별로 사람 보는 눈이 없네.]“조 중령님, 중령님께서 안목이 있고 능력이 뛰어나시다는 거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틀리신 것 같습니다.”이때, 허유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방금 있은 일 때문에 그녀는 마음속에 억눌려 있던 나쁜 감정들을 분출하고 싶었다.조명주가 그녀 앞에서 안 좋은 꼴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그럼, 우리 조금 있다가 확인 해보죠.”조명주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임유환을 쳐다봤다.“임유환 씨 설마 그때 가서 날 실망하게 하지는 않겠죠?”임유환은 대답이 없었다.“보아하니 내 추측이 맞았나 보네.”조명주 입가의 미소가 더 깊어졌다.“찌질이 주제에 잘난 척 하기는, 이따가 괜히 망신당하지 않게 조심해!”허유나는 임유환을 보니 갑자기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됐어, 유나야. 저런 사람이랑 똑같이 굴지 마. 축제가 곧 시작될 텐데, 결과는 자연스럽게 알게 되겠지. 쟤는 자기가 매번 운 좋게 자리에 오를 줄 아나 봐?”장문호가 자신만만해하며 말했다.그는 이번 대표 자리는 그와 허유나가 떼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다.왜냐하면 서인아가 얼마 전에 그들한테 며칠 뒤에 큰 서프라이즈 선물을 줄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서인아가 그 말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축제가 열린다는 소식이 S시에 퍼졌다.그리고 그들도 예상대로 축제의 초대장을 받았다.서인아가 그들에게 주겠다는 서프라이즈가 이게 아니고 뭐겠는가?바로 그때,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수 비서예요, 수 비서가 왔어요!”모든 사람의 눈이 연회장의 백스테이지로 쏠렸다
임유환과 윤여진은 최서우의 병이 악화될까 염려하여 일부러 그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임씨 집안으로 향했다.임씨 집안으로 가는 차 안에서 윤여진은 사건의 자초지종에 대해 간략하게 전해 듣게 되었다.영상 속의 그 여자는 임유환의 시중을 들던 나비라는 이름의 메이드이고 그 메이드를 남자들에게 건네준 이가 임준호라는 사실까지 다 듣고 난 윤여진도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윤여진이 알고 있는 임준호는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었는데 그런 분이 한 일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잔인한 행동에 15년 전 자신의 친아들을 직접 내쫓던 그때의 임준호가 떠올라 윤여진은 온몸이 오싹해났다.아마도 15년 전 그날부로 임준호가 완전히 변한 게 아닌가 싶었다.30분 뒤 그들은 임씨 집안에 도착했지만 워낙 깊은 밤이라 저택의 대문은 당연히 잠겨있었고 흑기군을 데리고 대문 앞에서 한참 동안 대기하고 있던 흑제가 임유환을 보고 인사를 건네왔다.“임 선생님.”“오셨어요?”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세계 제일 갑부의 느닷없는 등장이 윤여진은 놀랍기만 했다.임유환을 대하는 흑제의 태도가 지나치게 깍듯해 그 둘의 사이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라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할 때라서 윤여진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영상에서 봤던 모습을 떠올리며 윤여진이 다시 표정을 굳히자 아까부터 냉랭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임유환이 앞으로 나서더니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임준호, 당장 나와!”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저택 사람들 몇 명이 눈을 떴고 하인 두 명이 달려 나왔다.밖에 나와 상황을 살피던 하인 두 명은 익숙한 임유환의 얼굴에 깜짝 놀랐지만 그런 놀라움도 얼마 오래가진 못했다.하인들은 이내 비아냥거리며 임유환을 향해 말했다.“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임유환 도련님 아니세요?”입으로는 도련님이라 하고 있었지만 그 말투 속에 진하게 녹아나 있는 조롱은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을 정도였다.“무슨 도련님이야, 버려진 도련
임유환의 몸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주인님, 그건 저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이 영상도 그 경찰에 대해 조사할 때 경찰 시스템을 뒤지다 발견한 겁니다.”“경찰 시스템?”“그럼 이것도 정씨 집안에서 한 짓이란 말이야?”“그것까진 아직 모르겠는데... 제가 알아본 바로는 저 여자분은 주인님... 아버님께서 직접 저 남자들 손에 넘긴 거였습니다.”이 일이 임유환의 아버지와 관련되어있기도 했고 영상 속의 여자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면 더 위험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아 흑제는 대답을 망설였다.“아버지?”“네, 주인님.”흑제의 말에 당황하던 임유환은 재차 확인을 거친 후에 또다시 기운을 뿜어내며 당장이라도 임준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임유환은 어떻게 자신이 직접 데려온 아이를 또 내다 버릴 수가 있는지 임준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당연히 제 한 목숨 부지하고자 행한 나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저 사람들 손에 끌려가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내어준 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짓인지 의문이 갔다.영상 속 사람들이 말하는 비밀 열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임유환은 나비가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임준호!”갑자기 소리 지르는 임유환 때문에 방 안에 있던 윤여진은 화들짝 놀랐다.“흑제.”“예, 주인님.”“지금 당장 흑기군 준비해서 나랑 임씨 집안으로 간다.”“예, 주인님.”지금 임유환은 약해빠진 임준호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었다.그래서 직접 집으로 쳐들어가서 대체 나비를 누구에게 넘겨준 것인지, 나비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살아있다면 직접 얼굴을 봐야 했고 죽었다면 그 시체라도 봐야 진정될 것 같았다.임유환은 나비가 그 짐승 같은 놈들 손에 놀아나도록 두고 볼 수가 없었다.살아있다면 당장 데려다가 직접 치료를 해줄 것이고 죽었어도 데리고 와서 묻어줄 생각으로 눈이 빨갛게 충혈된 임유환은 차오르는 분노와
“나비?”아까는 얼굴이 제대로 안 보여서 몰랐는데 영상 속의 여자는 바로 임유환만 보면 도련님이라 부르며 해맑게 웃던 나비였다.그렇게 밝고 예쁘게 웃던 아이가 피범벅이 된 채 모진 고문을 견뎌내는 걸 보고 임유환은 낯빛이 창백해졌고 머리가 울려왔으면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서 쫓겨난 지도 15년이니 나비도 많이 커서 얼굴만 보면 못 알아봤겠지만 나비 문양의 반점 덕분에 한눈에 그녀의 알아볼 수 있었다.나비라는 아이는 5살의 어린 나이에 임씨 집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름도 없어서 나비도 임유환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나비는 어릴 때 강도들의 손에 부모님을 잃고 그들에게 이끌려 여기저기 팔려 다니던 이이였는데 그런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임준호가 큰돈을 들여 데리고 오는 바람에 임씨 집안에서 메이드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나비는 임유환을 보자마자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때릴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슬퍼 보여서, 웅크린 몸을 떨고 있는 아이가 너무 애처로워 보여서 임유환은 아직까지도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 들어온 이상 더는 그 어떤 괴롭힘도 없을 거라고 다독여봐도 나비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었다.다른 메이드들을 시켜 깔끔히 씻기고 머리도 빗겨주고 깨끗한 옷까지 갈아입혀 주니 왼쪽 얼굴에 있는 나비 모양의 반점도 드러났다.임유환이 그 반점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비는 신분이 낮은 제가 얼굴에 난 반점으로 임유환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어 동굴 속에서 강도들에게 폭행당하던 것처럼 맞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반점을 가리며 몸을 떨었다.그에 임유환은 바로 나비의 손을 잡아주며 자신은 그들과는 다르다고 천천히 타일러주었다.그리고는 나비의 긴장과 두려움을 해소해주기 위해 정원 산책까지 데리고 갔다.드넓은 정원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있었고 그것들이 함께 조화로운 향도 만들어내고 있었다.이런 아름다운 곳은 처음 보는 나비는 처음에는 몸이 굳어버리며 어색해했지만 이
“아!”남자의 행동과 함께 흘러나온 여자의 처절한 비명이 밀실을 가득 채웠다.화면을 뚫고도 전해지는 여자의 절망과 고통에 핸드폰을 들고 있던 임유환의 몸도 떨려왔고 마찬가지로 비명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윤여진도 임유환 쪽으로 다가오며 화면을 바라보았다.“어머!”사람한테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 영상 속 인간들 때문에 윤여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소리쳤다.너무 집중해서 본 나머지 옆에 윤여진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던 임유환이 다급하게 화면을 가리며 말했다.“여진아, 넌 보지 마.”“오빠, 이 사람들 누구예요?”“아직 모르겠어.”얼굴과 입술이 창백해진 윤여진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임유환은 한숨부터 쉬며 대답했다.“여진아, 네 방 화장실 좀 쓸게.”말을 마친 임유환은 화장실로 들어가서 다시 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화면 속의 여자는 여전히 은침에 찔린 손을 들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온몸을 비틀려고 발버둥 치는 여자는 마치 불판 위에 올라간 미꾸라지 같기도 했다.하지만 검은 옷차림의 남자는 그런 여자가 불쌍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차가운 눈을 하고 두 번째 은침을 꺼내 들어 여자의 다른 손가락에 찔러넣었다.“아!”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고통에 여자는 순간 고개를 확 젖혀버렸고 이미 흑과 말라 굳어버린 핏자국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이 여자의 얼굴을 가렸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몰라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그냥 날 죽여줘요 제발...”“죽여주세요...”남자가 아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여자는 울며불멸 죽기를 애원하고 있었다.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으면 죽는 걸 원하고 있을까 싶어 임유환은 비통하다 못해 화까지 나고 있었다.“말했잖아, 얘기하면 죽여준다고.”말을 마친 남자는 섬뜩하게 웃더니 나머지 손가락에도 하나하나 은침을 꽂아 넣었고 여자는 온몸에 경련이 일듯 몸을 떨어대다가 한계에 다다른 건지 다시 한번 기절했다.은침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열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들은 빠르게 작은 웅덩이
“마음의 준비요?”의미심장한 흑제의 말에 임유환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영상인데 그래요?”“혼자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미 암호 걸어서 이메일 보내놨어요.”임유환이 영상을 보면 어떤 반응일지 알기에 흑제는 말을 내뱉기가 어려웠다.“알겠어요.”임유환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빠르게 흑제가 보내온 이메일을 확인했다.이메일의 정체는 5분쯤 되는 영상이었는데 영상의 장소는 어두운 밀실같이 보였다.밀실 안에는 똑같은 옷차림을 한 남자가 다섯이나 있었는데 그들은 전부 눈 하나만 내놓고 있었다.임유환은 그들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핸드폰 화면으로만 들여다보고 있음에도 무시무시한 그들의 기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남자들의 발밑에는 거의 죽어가는 젊은 여자 하나가 누워있었다.남루한 옷차림의 여자는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몸에는 채찍에 맞느라 생긴 생채기들이 한가득이었다.생채기 주위의 살들은 진작에 터져나갔고 팔은 안에 있는 뼈가 다 보일 정도로 앙상했다.그리고 몸에 난 상처는 그뿐만이 아니라 담배로 인해 생긴 작은 화상 자국들도 빼곡했다.옛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새로 난 상처들은 이미 옷과 붙어버려 여자의 처참한 상태를 더욱 잘 보여주고 있었다.영상을 보고 있던 임유환도 서서히 여자가 불쌍해졌다.다섯 남자들은 대체 누구길래 여자한테 이토록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그리고 여자는 또 누구인지 임유환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영상 하단에 떠 있는 시간을 보니 아직 5분 1밖에 진행되지 않은 영상에 임유환은 계속해서 화면을 들여다봤다.화면은 빠르게 전환됐고 여전히 같은 복장을 한 남자 다섯 명과 아까와 다를 게 없는 밀실이 나타났지만 아까 그 일로부터 며칠은 지난 듯 보였다.영상 속의 남자는 찬물을 들어 쓰러져있는 여자의 몸 위로 뿌렸고 여자는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고통 속에서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검은 복면을 쓴 남자 하나가 입을 열자 나머지 네 명도 여자를 차갑게 바라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검사할 거예요 오빠?”그때 귀를 간질거리는 윤여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부끄러워하면서도 도발적인 말을 뱉어내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심장이 쿵쾅거렸다.“여진아, 나는...”오해를 풀어보려고 고개를 돌려 윤여진을 보던 임유환은 몸을 앞으로 숙인 탓에 훤히 드러난 검은색 슬립 아래의 몸매에 다시 말을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임유환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은 시각 동물인지라 완벽한 몸매와 유독 눈에 띄는 풍만한 가슴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반응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감정도 이내 임유환의 이성에 묻혀버렸다.“후...”임유환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여진아, 진짜 이제 그만해. 진짜 실수한다니까.”“오빠는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나긋나긋하게 말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뜨거운 숨결 때문에 점점 본능이 들끓고 있었던 임유환은 이대로 있었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런데 그 순간 윤여진이 임유환의 손을 덥석 잡아 오자 우유 크림처럼 부드러운 그 느낌에 임유환은 일어서려던 다리마저 굳어버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유환 오빠, 나 장난하는 거 아니라니까요.”윤여진은 여전히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하며 잡고 있던 임유환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그 모습에 임유환은 순간 머리가 하얘졌고 이 손을 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하고 있었다.그런데 마침 타이밍 좋게 울린 전화벨 소리에 둘 다 화들짝 놀랐고 임유환도 또 한 번 울리는 벨 소리에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윤여진도 겁먹은 고양이마냥 손을 빼내며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나... 전화 좀 받을게.”임유환이 어색하게 말하자 윤여진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네.”아까의 대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끄럼 타는 고양이 같은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리던 임유환이 전화를 받았다.흑제에게서 온 전화라 조금 긴장한 채로 받았는데 역시나 전에 지시했던 일
가슴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임유환은 애써 윤여진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장난치지 말라니까.”윤여진이 여전히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한 임유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말을 돌렸다.“아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다고 했잖아, 그거 알려줄게.”“그 얘긴 나중에 하고, 오빠 아직 내 말에 대답 안 했잖아요.”“어... 그 얘기 먼저 하자, 불 끄면 졸려서 못 할 것 같아.”임유환은 기대에 찬 윤여진의 얼굴이 보였지만 어떻게든 이 숨 막히는 상황부터 끝내보고자 평소답지 않게 우겨댔다.그리고 사실 윤여진이 한 말이 장난인지 아닌지 제대로 분간도 가지 않아 아까부터 심장이 떨리고 있었다.장난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장난이 아니라면 아주 어색해질 것 같았다.“오빠, 왜 아까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리는 것 같죠?”그때 임유환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을 보며 윤여진이 부드럽게 물어왔다.“그... 그래?”“긴장한 거예요 설마?”임유환에게 질문을 하며 코앞까지 다가온 윤여진 때문에 둘의 거리는 3㎝도 채 남지 않게 되었다.정말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닿을 것같이 가까운 거리라서 임유환은 윤여진이 내뱉는 호흡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뜨거운 숨결과 함께 풍기는 향기에 임유환은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여진아, 이제 진짜 그만해.”사람 둘은 족히 앉을 정도로 떨어져서야 임유환은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장난 아니라니까요.”임유환이 저에게서 멀어지자 윤여진은 살짝 실망한 듯 보였지만 이내 연애 수첩 제1항을 떠올린 그녀는 다시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그래서 윤여진은 긴장한 듯 굳어있는 임유환을 보며 익살스레 웃어 보였다.“유환 오빠, 누가 그러는데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긴장을 한대요.”“오빠 설마 나 좋아하는 거예요?”윤여진이 이 질문을 할 때 임유환은 이게 장난이든 진심이든 간에 서둘러 이 화제가 지속되는 것부터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둘이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상해지는 방 안의
“어...”단도직입적인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은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임유환의 생각이 불순한 건 맞지만 그게 오로지 임유환의 잘못은 아니었다.이미 성인이 된 그들은 15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윤여진은 얼굴이며 몸매며 누가 봐도 예쁜 여자로 성장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멀쩡할 남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임유환 역시 남자였으니 검은색 레이스 속옷에 슬립까지 입고 제 눈앞을 돌아다니고 있는 윤여진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슬립 아래로 보일 듯 말 듯 한 윤곽이 아까부터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임유환은 지금 온 정신력을 다 쏟아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자신의 눈이 윤여진의 몸으로 향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임유환이기에 당연히 같이 자자는 그녀의 요구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모든 남자들의 워너비인 그 몸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밤을 조용히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오빠, 이상한 생각 한 거 맞죠?”한편 윤여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임유환을 보며 기쁨이 섞인 목소리로 장난스레 물었다.“어...”임유환은 이젠 정말 자신이 무슨 생각인지도 잘 모를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정말 윤여진을 두고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말하기에는 그는 윤여진이 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그녀의 몸만 보면 저절로 뜨거워지는 가슴이 대신해서 부정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여진아, 사실... 나는...”다그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해명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진심이 전달될지 몰라 말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임유환에게 윤여진은 여전히 15년 전 꼬맹이였고 임유환 또한 그때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그는 윤여진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오해하는 것도 원치 않았고 또 윤여진도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대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여전히 그때처럼 윤여진이 힘들 때 그녀에게 힘이 돼주는 든든한 오빠가 되고 싶었는데 이 마음을 전하기에 말 한마디
“아니야, 그냥 네가 아까 한 말 생각하고 있었어.”“그럼 오빠도 나랑 같이 있고 싶은 거예요?”다급히 해명하는 임유환에 시무룩해 있던 윤여진은 다시 밝게 웃으며 물었다.“그럼.”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사실 그와 윤여진이 말한 같이 있는다는 서로 전혀 다른 뜻이었다.“그럼 오빠,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임유환의 팔을 감싸 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간드러지게 말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몸이 먼저 반응할 뻔한 걸 간신히 참고는 물었다.“여기서 너랑 같이 밤을 보내자고?”“네!”윤여진이 이런 부탁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임유환이기에 제 팔에 닿아오는 말랑거리는 그 느낌도 까맣게 잊은 채 놀랐다.그런 임유환의 반응을 보던 윤여진은 혹시라도 거절당할까 봐 다급하게 한마디 더 보탰다.“여기서 자는 건 처음이라 좀 무서워요, 워낙 낯설기도 하고...”“어...”윤여진의 부탁도 일리가 있어 보여 임유환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오빠, 그냥 남아서 나랑 같이 자면 안 돼요?”윤여진은 임유환의 팔을 좌우로 흔들며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임유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가만히 있어도 예쁜 얼굴인데 애교까지 부리니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모습이 섞여 있어 웬만한 남자라면 다 윤여진한테 넘어갈 것 같았다.인내심과 자제력 하나는 자부하면서 살아왔던 임유환도 윤여진의 애교 공세에 3초도 못 버티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알... 알겠어.”임유환은 저도 모르게 긍정의 대답을 해버렸다.정말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바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저를 향해 애원의 눈빛을 보내는 윤여진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역시, 오빠는 내 말 들어줄 줄 알았어요!”결국 제 말을 들어준 임유환에 윤여진의 촉촉한 눈망울에서는 빛이 나기 시작했다.“너랑 같이 있어 줄 수는 있는데, 난 바닥에서 잘 거야.”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는 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 돼버렸으니 임유환은 나름대로 그 안에서 최선책을 찾으려고 노력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