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한 이서는 소희에게 받은 CCTV 녹화본을 들고 호텔로 돌아왔다. 지환의 방 입구에 다다른 이서는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마침내 용기를 내어 방문을 두드렸다. 방문이 열리고, 목욕 가운을 입은 지환의 모습을 마주한 이서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가운을 제대로 여미지 않아서 울퉁불퉁한 복근과 가슴 근육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지환이 온몸에서 뿜어내는 호르몬의 기운은 이서의 목을 더욱 타게 했다. 붉어진 이서의 귓불을 본 지환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가운 여몄다.“무슨 일 있어?” “그게...”이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지환을 보았을 때, 그는 이미 거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CCTV 녹화본이 삭제되었대요. 소희 씨가 하 선생님께서 이 방면의 타고난 천재라고 하던데... 한 번 봐주시겠어요?” 지환이 CCTV 녹화본을 건네받았다.“아주 간단한 일이야.” 이서가 눈을 크게 떴다.“아주 간단하다고요? 이미 많은 전문가가 복구하기 힘들 거라고 했다던데...” “하긴, 그 사람들은 틀림없이 복구할 방법이 없을 거야.”지환이 이서에게 물 한 잔을 따라주었다.“앉아 있어. 얼른 고쳐줄게.”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 앉은 이서는 지환이 뒤적거리며 도구를 찾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 모습은 이서의 머릿속에 또 한 번 어렴풋한 기억이 떠오르게 했다. ‘이... 이건!’ 과거의 기억이 그녀의 뇌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이서는 지환이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재빨리 시선을 핸드폰으로 옮겨 다른 곳으로 주의력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지환의 카리스마는 너무도 강했기에, 이서는 몇 번이나 그의 뒷모습으로 시선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의 뒷모습을 본 이서는 갑자기 머리가 찢어질 듯이 아팠다. 그녀는 팔걸이를 꽉 잡고 나서야 그 엄습하는 불안감에서 서서히 헤어 나올 수 있었다. 긴장한 이서가 지환을 바라보았을 때, 다행히도 그는 열심히 CCTV 녹화본을 수리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상한 낌새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한
지환은 결코 이서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화장실 위치를 가리켰다. 이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문을 닫는 순간, 그녀는 경련을 일으키며 바닥에 주저앉았고, 차가운 기운을 느끼며 몸을 떨기 시작했다. ‘괴로워...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 그녀는 가슴을 꽉 누른 채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고, 그 고통이 거리낌 없이 온몸에 퍼지도록 내버려두었다. 이서는 아무런 신음을 내지 않으려 했으나, 이내 이마에 수많은 땀방울이 맺혔다.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은 끊어진 구슬처럼 뺨으로 미끄러져 땅에 떨어지기 시작했다.“이서야!”문밖으로부터 지환의 매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정말 속이 안 좋은 거 맞아?” 이서가 깨물고 있던 입술을 천천히 풀며 태연한 어투로 대답했다.“네, 하 선생님, 혹시 약 좀 사다 주실 수 있어요?” 이 말을 들은 지환은 눈살을 찌푸리며 잠시 침묵했다.“알겠어, 사 올게.” 곧이어 문이‘쾅’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서는 이 소리를 듣고서야 구원을 받은 듯 신음을 내뱉었다. ‘드디어 가셨구나.’ “아... 아...”이서는 그제야 머리를 꽉 쥔 채 밀려오는 고통을 소리로 발산했다. 긴 경련과 발작 끝에 그녀는 마침내 고통을 이겨냈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이서는 거울 속의 창백한 자신을 보며 뺨을 힘껏 두드렸고, 볼에 불그스름한 빛이 떠오른 후에야 터덜터덜 화장실을 나섰다. 5분 후.약을 사 온 지환은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만지작거리는 이서를 보았고, 드디어 불안하던 마음이 제자리를 찾는 것을 느꼈다. “괜찮아?”지환이 이서에게 약을 건네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괜찮아요.”“그래도 약부터 한 알 먹어.” “네.”이서는 순순히 약 한 알을 먹었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입을 열었다.“오늘 간식을 하나 먹었는데, 그게 상했던 건지 계속 속이 불편하더라고요.” 그녀의 옆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지환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그렇구나.” “제가 먼저 파일을 열어봤는데
“이서야!”지환이 이서의 손을 잡았다.“병원에서 검사를 받는 건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야.” 고집스러운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알겠어요, 하지만 회사의 홍보팀과 먼저 연락을 해봐야겠어요.”“그래, 그건 병원에 가는 길에 하면 되지 않을까?” 이서는 하는 수없이 지환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가 병원으로 향했다. 그녀는 곧 홍보팀 팀장인 최미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사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요? 누가 이런 파란을 일으킨 건지 증명할 수 있는 증거는 찾은 거예요?” 최미영은 이때까지도 야근을 하고 있었는데,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윤 대표님, 이번 파란을 일으킨 게 누군지 알아냈습니다. 뜻밖에도 거짓 뉴스를 퍼뜨린 언론들이 모두 심씨 가문의 회사더군요. 하지만 이 언론들은 심씨 가문에 직접적으로 소속된 게 아니라, 제3자를 통해 심씨 가문과 엮여 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이 일의 배후에 심씨 가문이 있다는 걸 대중에게 알리고 싶으시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 회사들이 어떤 3자를 통해 심씨 가문과 엮여 있는지 알아내야 할 테니까요.] 최미영이 말했다. 눈살을 찌푸린 이서가 잠시 생각한 후 입을 열었다.“12시간 더 드릴게요. 내일 아침, 즉 10시까지는 완벽한 증거들을 찾아주셨으면 해요.” [네, 알겠습니다.]수화기 너머의 긍정적인 대답을 들은 이서는 그제야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지환과 이서는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고 호텔 부근의 병원에 다다랐다. 이곳은 개인 병원이었는데, 들어가자마자 환한 미소를 띤 간호사가 두 사람을 맞이해주었다.“두 분, 무슨 일로 오셨어요?” 지환이 이서를 한 번 보았다.“전반적인 검사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이서가 눈을 크게 뜬 채 지환을 바라보며 말했다.“저는 배가 조금 아플 뿐이예요. 전반적인 검사를 할 필요는 없어요.” 지환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그녀는 더 이상 말을 하
이서와 지환이 다시 만나려던 찰나, 간호사가 그녀에게 검사 결과가 나왔다는 사실을 전했다. “이렇게 빨리요?”이서가 간호사를 보며 물었다.“일을 정말 효율적으로 하시나 봐요! 앞으로는 꼭 여기 와서 검사받아야겠어요.” 간호사가 빙긋 웃었다.‘어떻게 빠르지 않을 수 있겠어요?’‘원장님께서 신신당부하신 귀한 분이신데요.’ ‘두 분, 도대체 뭐 하는 분들이실까?’ ‘원장님을 직접 나서게 할 정도면 평범한 분들은 아닌 것 같은데...’ 간호사가 곧 검사 결과 보고서 한 부를 이서에게 건네주었다. 그녀가 보고서를 한번 보고 나서야 지환을 향해 득의양양하게 말했다.“보세요, 제가 문제없을 거라고 했죠? 왜 제 말을 믿지 않으신 거예요?” 지환이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미소를 지었다. 차갑던 그의 눈가에 웃음기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문제없으면 됐어, 이만 돌아가자.” “네.”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이날 밤, 그녀는 아주 편안한 숙면을 했다. 이서가 마음이 편안한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첫 번째는 지환을 속였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남은 일은 홍보팀이 조사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내일이면 그 언론사들과 심씨 가문의 관계를 밝힐 만한 증거를 찾을 수 있을 거야. 장희령의 민낯이 드러나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그러나, 이 좋은 꿈은 아침이 밝자마자 끝이 났다. 수많은 알람이 이서의 핸드폰 화면 전체를 가득 채웠다. 그녀는 아무것이나 하나를 눌렀는데, 그것은 나나가 있는 영화팀이 그녀와의 계약을 해지했다는 소식이었다. 이서가 눈살을 찌푸린 채 기사 중 하나를 누르자마자 제작진이 발표한 성명이 화면에 떠올랐다. [서나나 씨가 영화 팀 내의 동료를 폭행하고, 업무에 협조하지 않은 점을 고려하여 아래와 같은 결정을 내렸습니다. 정상적인 영화 팀의 업무를 전개하기 위하여, 우리 제작진은 서나나 씨를 우리 영화 팀에서 퇴출하고, 손실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는 바입니다.] 이 시점에서 나나를 해고하는 것으로 보아, 제작진도 모든 일이 나나
사람들은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대중들이야 나나의 행동을 보지 못한 채 제작진의 편을 든다고 여길 수 있었지만, 윤씨 그룹의 연예인들까지 모두 나서서 제작진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없을 것이었다. 혹시라도 이서의 살인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회사 내의 연예인들조차도 참을 수 없을 것이었으며, 그 사건에 대해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 연예인들은 회사의 압박을 받았다는 오해를 받기 십상이기 때문이었다.그래서 대중들의 타오르는 주목은 다시 이서에게로 향했다. 차가운 얼굴로 소희의 보고를 들은 이서가 말했다.“우선 내버려둬. 다른 연예인들한테 입장을 표명하지 말라는 말을 할 필요도 없어.”“오히려 나는 우리가 지원하는 연예인 중에 현명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알고 싶으니까. 어리석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면, 일이 끝난 후에 바로 해고하면 그만이야.” [네.]이서가 말을 이어 나갔다.“그리고 10시 전에는 나를 찾지 말아줘. 인터넷상의 일이 아무리 심각해지더라도, 그 누구도 나에게 연락하거나 소식을 전해주지 않았으면 해.” [네, 언니.] 이서가 빵을 한 입 깨물며 말했다. “지금 바로 회사로 갈게.” 하지만 소희의 말투는 더 이상 그렇게 확고하지 않았다.[이서 언니, 아무래도 오늘은 회사에 오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왜?”[그게... 이미 회사 입구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는 기자들 때문에 앞문이고 뒷문이고 할 거 없이 막혀버렸거든요.] [그리고 인터넷 소식을 본 회사 직원들의 민심도 흉흉해요.] [만약 지금 회사로 오신다면, 밖에 있는 기자들은 물론이고... 회사 직원들의 민심도 달래셔야 할 것 같아요.]소희는 자신이 아무 말을 하지 않더라도, 이서라면 지금 회사의 상황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꼭 가야 해.”“무슨 일이 있어도 당장 오늘 사건의 경위를 밝혀야 해. 게다가 나는 사건의 중심인물이니까 반드시 회사에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고.” 소희는 또 한 번 만류하는 말을 하려고 했으나, 전화
“나나를 해고하라고요? 그럼 저는요? 제 사건이 모든 일의 도화선이 된 건데, 저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설마, 저를 물러나게 하시려는 건 아니죠?” 이 말이 나오자, 시장처럼 떠들썩하던 회사 로비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사람들은 분분히 서로를 바라보았는데, 이서가 한 말이 그들의 마음속에 피어난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하은철이 윤씨 그룹을 겨냥한 건 윤 대표님 때문이잖아?’ ‘그리고 이번에 윤 대표님은 살인사건에 연루되기까지 하셨어.’사실, 윤씨 그룹이 어려움을 겪는 동안, 고위층 임원들은 사석에서 의논한 바가 있었다.그것은 바로... 이서를 물러나게 한다면, 윤씨 그룹이 겪고 있는 위기를 완벽히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것. 그래서 아까 그 사람도 나나를 해고하자고 한 것이었다. 한참이나 침묵하던 그 사람이 다시 입을 열었다.“상황이 이렇게까지 악화되었으니...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씨 그룹이 우리의 윤씨 그룹을 겨냥한 건 모두 대표님 때문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대표님은 어마어마한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셨고요. 그래서 저는 차라리 대표님께서 은퇴하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대표님께서 물러나 주신다면, 하씨 그룹은 더 이상 윤씨 그룹을 겨냥하지 않을 테니까요. 이것만이 윤씨 그룹의 발전과 우리 모두를 위한 일입니다.”“하씨 그룹이 우리의 윤씨 그룹을 겨냥한 게 저 때문이고, 제가 물러나기만 하면 그들이 윤씨 그룹을 겨냥하지 않을 거라는 말을 흘린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서가 화살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한 사람을 노려보았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 사람이 웅얼거리며 말했다.“그...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저 제가 스스로 한 생각이었을 뿐입니다.”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그렇게나 확신에 찬 어투로 말씀하신다고요?”“혹시, 하씨 그룹에게 포섭되신 거 아닙니까?” 그녀의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모든 사람의 주의를 끌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제야 이서의 뒤에 또 하나의 높고 우뚝 솟은 그림자
같은 시각.이서는 홍보팀이 있는 층에 도착하여 바삐 걸음을 옮겼다.홍보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조급하게 일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최미영의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최미영은 부하직원이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온 것인 줄 알고 격동되어 고개를 들었다.하지만 사무실에 들어선 사람이 이서라는 것을 알아차린 그녀 곧바로 정신이 멍해지는 듯했다. “조사는 어떻게 됐어요?”이서는 최미영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녀의 눈에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또 뭐가 문제인 겁니까?” 멍하니 있던 그녀는 잠시 후에야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이번 사건에서 주로 힘을 쏟은 큰 언론매체는 분명 심씨 가문의 회사가 맞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여전히 제3자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끝까지 어떤 회사가 심씨 가문과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알아내지 못한다면, 대중들은 모든 일의 배후에 심씨 가문이 있다는 걸 쉽게 믿지 못할 텐데 말이죠...” 이서가 시간을 힐끗 바라보았다.‘곧 10시가 될 거야. 더 이상 이 일을 미룰 수는 없어!’ 늘 홍보팀에게 주어진 골든 타임은 72시간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그녀가 최미영에게 마지막으로 12시간을 준 이유이기도 했다.‘정말... 방법이 없단 말이야?’‘장희령이 여러 수단을 동원해서 나와 나나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했다는 게 밝혀진다면, 그 여자의 명성은 처참히 망가질 수 있을 텐데...’ ‘그때가 되면, 연예계를 헤집고 다니는 장희령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이서는 희령이 자신을 겨냥하는 때를 이용하여 그녀를 호되게 짓밟을 수 있기를 바랐다. ‘정말 이대로 포기해야 하는 거야?’ 벽에 걸린 시계가 조금씩 10시를 향해 다가가자, 조급하던 이서의 마음이 한순간에 풀려버리는 듯했다. 몸을 일으킨 그녀가 그만두겠다고 말하려던 찰나, 한 직원이 신이 나서 들어왔다. “알아냈습니다, 알아냈어요! 그 언론매체 중에 가장 큰 회사는 다른 회사에게 의지해서 심씨 가문의 지원을 받는 게 아니었습니다. 즉, 자선단체가 개설한 뉴미디어 회사였다는
대중들은 한동안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본래 그 단편 소설 대회는 매년 소수의 참가자로 진행되는 것이었으나, 하이먼 스웨이의 합류로 인해 M국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다. 하지만 바다 건너 다른 쪽에 있던 H국 사람들로서는 당연히 심가은이 경기에서 벌인 수작을 알 리가 없었다.그래서 그들은 동영상을 보고 나서야 가은이 우승을 거머쥐기 위하여 대가의 원고를 사들여 자신의 원고인 양 사칭하였고, 모든 수작이 드러나자 하이먼 스웨이를 죽이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현장의 CCTV에서는 가은이 험상궂은 얼굴로 이서를 향해 달려드는 장면이 생생히 찍혀 있었다. 오죽하면 사람들은 화면을 사이에 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한을 느낄 지경이었다. ‘시상식 당일, 그곳에는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있었는데도 심가은은 윤이서를 죽이고 싶다는 표정을 전혀 감추지 않았어.’‘그런 사람이 사석에서 윤이서를 가만히 내버려뒀을 리가 없잖아? 아마 본인만 알 수 있는 끔찍한 일을 계획했을지도 모르지.’ 이 동영상이 세상 밖으로 나오자, 가장 분노한 사람들은 하이먼 스웨이의 팬이었다. 그들은 하이먼 스웨이가 친딸을 간절히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녀가 친딸을 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기뻐하며 축복을 보냈었다.하지만 찾았다던 그 딸이 가짜였을 뿐만 아니라, 꼬리가 백 개 달린 여우짓을 하며 하이먼 스웨이를 죽이려 했다니... 하이먼 스웨이의 팬들은 동영상 아래에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으나, 한 편으로는 궁금해하는 것이 있었다.[이 영상은 심가은의 악한 면을 보여준 것일 뿐이잖아요. 정말 윤이서가 심가은을 죽인 게 아닌 걸까요?][하지만 영상을 보면 윤이서는 심가은의 곁에 서 있잖아요. 만약 윤이서가 심가은을 죽인 거라면, 왜 CCTV에는 윤이서가 총을 들고 있는 모습이 찍히지 않은 걸까요?] [꼭 그녀가 총을 들고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닙니다. 사격수를 고용했을 수도 있는 거니까요.] [에이, 저는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주장이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