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일 그렇게 없어요?”갑자기 나타난 이서가 하릴없이 떠들어대는 사람들을 나무랐다.사람들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일하기 시작했다. 이서의 시선이 아주 잠시 소희의 사무실로 향했지만, 그녀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사무실로 돌아왔다.같은 시각. 사무실 안의 심근영은 유리잔을 쓰다듬고 있었다. 누구를 상대해도 청산유수인 그는 늘 소희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20여 년 동안 실종된 딸에게는 진 빚이 많지 않겠는가. “소희야, 어제... 내가 한 말에 대해서는 생각해 봤니?”소희가 침착하게 심근영을 바라보았다. 운명을 받아들인 후, 그녀는 마음을 많이 내려 놓았다.“네, 충분히 생각해 봤어요. 약속대로 심씨 가문에서 지낼 생각이에요.” ‘약속대로’라는 말을 들은 심근영의 얼굴에 웃음이 굳어졌다.‘하긴, 어릴 때부터 집을 떠난 아이니까 정이 없는 것도 당연하지.’자신을 위로한 심근영이 웃으며 말했다.“네가 돌아오겠다니 파티를 열어야겠구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우리 심씨 가문의 딸이 돌아왔다는 걸 알려야 할 테니까.” 소희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파티는 하지 않았으면 해요.”“뭐?”심근영이 납득하지 못하고 물었다. “너무 떠벌리고 싶지는 않아요. 게다가 저는... 아직 호칭도 바꾸지 못했는걸요.” 그녀는 차마 심근영 부부를 ‘엄마’, ‘아빠’라고 부르지 못했다. 심근영이 속눈썹을 늘어뜨렸다.“소희야, 쉽게 네 신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얼마든지 이해한다. 너한테는 심히 당황스러운 일이겠지. 하지만 심씨 가문에 돌아오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파티는 열어야 해.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가 너를 중시하지 않는다는 소문이라도 돌면 어떡하니.” 심근영을 바라보던 소희는 어젯밤 파티에서 만난 고위층들을 생각하면서 무의식적으로 거절할 뻔했다. “물 한 잔 드시겠어요? 준비해 드릴게요.” 심근영이 고개를 끄덕였고, 소희는 그제야 일어나 떠났다. 그가 떠나자, 심근영은 소희의
수화기 너머에서 지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소희는 멍해졌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전화를 잘못 든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그렇지 않다면, 왜 수화기 너머에서 지환의 목소리가 들려오겠는가![소희 씨, 듣고 있어요?]다시금 지환의 분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희는 그제야 전화를 잘못 든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형부가 현태 씨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거신 거구나!’ “하... 아니, 형부, 웬일로 저한테 전화를 다 하셨어요?” [심 대표님이 소희 씨를 찾아갔다던데, 정말 심씨 가문으로 돌아갈 생각이에요?] 지환이 이 사실을 안다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다. “네, 형부가 저한테 전화를 다 주시다니, 제가 해야 할 일이라도 있는 거예요?” 소희가 단번에 자신의 의도를 알아차리자, 지환은 흐뭇하게 입꼬리를 올렸다.[심씨 가문이 소희 씨를 위한 파티를 열겠다고 하지 않던가요?] ‘그거까지 예측하다니!’소희는 지환의 예리함에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네, 저를 위한 파티를 열어주시겠대요. 하지만 저는 파티를 열고 싶지 않아요. 심씨 가문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윤씨 그룹에서 일한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의 미움을 사고 있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대대적인 파티까지 연다면, 심씨 가문 내에서도 저를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 생길 거예요.” “그래서 이리저리 생각해 보니까 파티를 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소희가 말했다. [아니요, 파티는 꼭 열어야 해요.]지환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왜요?”소희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파티를 열든 안 열든, 형부랑 무슨 상관이지?’ ‘형부와 심씨 가문의 원한은 심씨 가문이 이서 언니를 향한 압박을 풀면서 끝났던 거 아닌가?’ [분명한 이유가 있긴 하지만, 그거까지 알 필요는 없어요. 소희 씨, 하나만 물을게요. 이서를 믿어요?]소희가 무의식중에 이서를 한번 보았다. “그럼요, 당연히 이서 언니를 믿죠.” [그 말인 즉슨, 이서의 결정이라면 뭐든 따르겠다는 거네요, 그렇죠?
‘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 “그거 말고 다른 말은 없었어?”이서는 가슴 위에 손을 얹었는데, 불길한 예감이 마음속에 맴도는 듯했다.“없었어요.” 소희가 고개를 저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이서에게 물었다.“이서 언니, 제가 형부의 말을 듣지 말았어야 했나요?” 마음이 심란한 이서가 책상 모서리를 짚었다.“소희 씨한테 그런 부탁을 한 건, 분명한 의도가 있기 때문일 거야. 그리고... 내가 물어본다고 해도 대답해 주지 않을 사람이야.” “그럼...”“우선 지환 씨가 시키는 대로 해. 대신, 지환 씨에게 또 연락이 온다면, 꼭 나한테 알려줘야 해.” “네, 이서 언니.”“그럼 저는 심 대표님께 가볼게요.” “어서 가봐.” 소희가 떠나자, 이서는 핸드폰을 꺼내 한참이나 주시하며 지환에게 전화를 걸어 묻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한편, 소희는 집안 파티에 관한 일을 확정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심근영은 그녀에게 사직하라는 말을 꺼냈다. “소희야, 네가 윤 대표와 사이가 좋다는 건 잘 알고 있단다. 하지만 너는 어디까지나 심씨 가문의 사람이야. 그런 네가 윤씨 그룹에 몸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란다. 회사에서 일하기를 원한다면, 심씨 가문에 와서 네가 원하는 대로 하면 돼.” 그녀가 반감을 갖게 될까 봐, 심근영은 성질을 참아가며 장단점을 분석했다. “잘 생각해 보렴. 네가 윤씨 그룹에 남아 있는 한, 윤씨 그룹 사람들의 의심을 피할 수 있을 것 같니? 심씨 가문 사람들의 의심은 제외하더라도...” “그만 좀 하세요, 심씨 가문으로 돌아가려던 순간부터 예상한 일이었어요.”“어차피 제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라는 것도 곧 공개될 거잖아요?” “그때가 되면 모든 사람이 제 신분을 알게 될 거예요. 그러면 저는 계속 윤씨 그룹에 남을 수 없게 되겠죠. 곧... 사직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생각이에요.” 소희가 말했다.그녀가 이렇게 철이 든 모습을 본 심근영은 꽤 뿌듯했다. 그러나 이런 성숙함은 분명히 많은 고난과 억울함을 겪으
짧디짧은 거리였으나, 소희는 무려 5분 넘게 걸음을 옮겼다. 심지어 문고리에 손을 올리는 순간에는 거의 힘을 잃고 쓰러질 뻔했다. “소희 씨?”안에서 인기척을 느낀 이서가 고개를 들어 입구를 바라보았다.소희는 마음을 안정시키고 몸을 곧게 폈다.“네.”바로 이때, 이서의 커피를 타 온 비서가 사무실 앞에 다다랐다. 그녀는 아직도 입구에 선 채 움직이지 않는 소희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볼 뿐이었다. 소희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한 번 바라보았다.“저한테 주세요.” 놀란 비서가 소희를 바라보았다.하지만 이내 손에 들고 있던 쟁반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소희는 쟁반을 들고서 이서의 사무실로 들어갔다.“이서 언니.”커피가 이서의 책상 위에 놓였다.“예전에는 제가 언니의 커피를 타 주곤 했었죠.” “윤씨 그룹에 온 이후로는 그럴 기회가 없었지만요.”소희가 말했다.“그러게, 하지만 소희 씨가 심씨 가문으로 돌아가면, 나한테 커피를 타 줄 기회는 더 없어지겠지.” 이서가 눈앞의 어린 여동생을 다정하게 바라보며 화제를 돌렸다.“어때, 사직서는 다 썼어?” “심씨 가문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후부터 서랍 안에 넣어뒀어요.” “왜 나한테 안 줬어?”“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평생 언니를 따르겠다고 약속했는데, 1년도 안 된 시점에서...”이 말을 뱉는 소희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혔다.“언니랑 헤어져야 하니까요.” “만약...” 이서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어. 내가 윤씨 그룹의 대표가 아니었다면, 우리 두 사람이 앞으로도 친구처럼 지낼 수 있었을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거지?” “소희 씨의 신분이 조금만 낮았더라도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었을 거야.” “하필이면 윤씨 그룹의 대표와 심씨 가문의 아가씨라니...” “심씨 가문과 윤씨 가문이 잠시 휴전 중이긴 하지만, 이익을 둘러싼 다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 거야.” “만약...”소희가 이서를 바라보았다.“더 강해진 윤씨 그룹이 하씨 가문에 맞설 수
소희는 이서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는데, 또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아서 얼른 말했다. “그럼... 이서 언니, 일하셔야 할 텐데 이만 가볼게요.” “아래층까지 바래다줄게.”“아니에요.” 소희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평소처럼 떠나고 싶어요. 여태 퇴근했던 것처럼, 내일 다시 카드를 찍고 출근할 것처럼요.” 안색이 어두워진 이서가 한참이 지나서야 말했다.“그래, 이만 가 봐.” 사무실을 나선 소희는 평소처럼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향했고, 얼굴 인식으로 출입 기록을 마친 후 사원증을 제출하고 떠났다. 윤씨 그룹 빌딩을 나서는 순간, 찬란한 노을빛이 그녀에게 떨어졌지만, 조금의 따스함도 느낄 수 없었다.이내 건물 앞에 주차된 차량이 보였다. 차 옆에 서 있는 사람은 현태였다.“피곤하지?”그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현태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소희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물었다.“오늘... 출근한 거 아니었어요?” 지환은 하은철이 이서에게 자신의 신분을 폭로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어둠의 세력에게 한시도 떠나지 않고 이서를 주시하며, 악의적인 사람들로부터 지키라고 했다. 현태는 이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것이었다. “하 대표님께서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하루 쉬라고 했어.” 소희의 눈가에 구슬 같은 눈물이 맺혔다.“형부가 언제부터 그렇게 다정한 사람이 된 걸까요?” “그러게, 예전에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지. 사실은 나도 조금 어색해.” 현태가 소희를 차에 태워주었다. 뒷좌석에 앉은 소희가 앞줄의 현태를 바라보며 말했다.“이서 언니가 부탁했나 봐요. 우리를 이렇게 세세하게 챙겨주는 건 이서 언니뿐이잖아요.” 이서 이야기가 나오자, 두 사람 모두 말을 이을 수 없었다.“앞으로는 윤 대표님도 소희 씨를 자주 볼 수 없을 텐데, 나도 마찬가지겠지?” 현태가 고개를 돌려 소희를 바라보았다.그녀는 미소를 지었으나, 이내 고개를 숙였다.“그렇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건데요?” 현태도 고개를 숙였다.“정말 그렇다면...
소희가 웃으며 말했다.“오빠, 왜 이렇게 유치해요?”그녀는 입으로 이렇게 말하면서도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현태와 약속했다.두 사람의 엄지손가락이 맞닿는 순간, 소희는 자신의 앞길이 그렇게 암담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한 사람만큼은 영원히 그녀의 곁을 지킬 테니....이서는 퇴근할 때까지 소희의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또 다른 비서가 들어와 물었다.“윤 대표님, 심 비서님은 이미 사직하셨는데, 얼른 이 사무실을 치우고 후임자를 채용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요, 이 방은 이대로 두고 새로운 방을 마련해주세요.”“이 방을 이대로 두는 건 너무 아깝지 않을까요?”비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한테 방 하나 처분할 자격도 없다는 말이에요?”비서의 안색이 변했다.“아니요,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얼른 청소 아주머니께 전해드리겠습니다.” 이 말을 마친 비서는 급히 사무실을 떠났다.‘아무래도 기분이 안 좋으신 것 같아. 어서 도망가는 게 좋겠어.’ 이서는 그런 비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뒤돌아서서 미련 없이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아래층으로 내려온 이서가 곧장 차를 몰고 호텔로 돌아왔을 때, 지환은 방에 있었다.“오늘 소희 씨한테 전화했었죠?”지환을 마주한 이서가 참지 못하고 전화 이야기를 꺼냈다.“응.”지환이 손에 든 화판을 이서에게 건넸다.“내가 그린 그림인데, 어때?”궁금증을 느낀 이서가 화판을 건네받았다.“이게 뭔데요?”그림을 본 순간, 이서는 말을 잇지 못했다.“나를 그린 거예요?”그녀가 그림 스케치를 보며 물었다.“안 닮았어?”미소를 지으며 묻는 지환의 눈동자에 작은 기대가 스쳤다. “닮았네요. 지환 씨가 그림을 이렇게 잘 그리는 줄 몰랐어요.”이서가 말했다.그녀는 절대 거짓말하지 않았다. 지환은 확실히 그림을 잘 그렸는데, 전공자와 배교해도 밀리지 않을 실력이었다. “이렇게 잘 그려줬는데, 작은 보상 정도는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이서가 그림을
[사흘 후에 심씨 가문이 심소희 씨를 위한 초호화 파티를 연다던데, 정말이에요?] [더 논의할 필요도 없는 일이에요. 4대 가문은 이미 초청장을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심씨 가문과 윤씨 그룹은 피가 터져라 싸웠잖아요. 윤이서 대표도 그 파티에 참석할까요?][그렇지 않을까요? 심소희 씨는 원래 윤씨 그룹에서 근무했었잖아요. 게다가 심씨 가문은 이미 윤씨 그룹을 겨냥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거 아니었어요?] [글쎄요, 파티에 가면 알게 되겠죠.] [...]같은 시각, 심씨 가문.소희는 초청장을 살펴보고 있었다.“하은철 사장님께는 이미 보냈나요?” 하루 전, 지환은 직접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하은철이 파티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하라고 했다. 소희는 이 순간까지도 지환이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인지 몰랐으나, 하은철을 겨냥하기 위한 일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며칠 전에 보냈는데요...”파티를 담당하는 고용인이 말했다.“아가씨, 벌써 잊으신 건가요?” “아니요, 그냥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었어요. 며칠 전에 보냈는데도 아무런 응답이 없는 건가요?” “오든 안 오든, 확실한 응답을 보내줘야 우리도 준비할 수 있는 거잖아요.”소희가 말했다. “준비라니, 무슨 준비?”의문을 품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혹시 하 사장님을 꾈 준비?” 소희가 몸을 돌리자, 팔짱을 낀 채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심씨 가문의 아가씨, 심유인이 보였다. 그녀는 심근영의 딸이 아닌, 심근영 큰아버지의 손녀였다.즉, 소희에게는 사촌 언니인 셈이었는데, 특별하지는 않은 사람이었다하지만 너무도 오래 심씨 가문의 아가씨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탓일까. 소희가 돌아온 후, 유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소희를 볼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들던 참이었다. 이미 이런 대우에 익숙해진 소희는 반박하지 않았고, 그저 하인을 향해 지시할 뿐이었다.“가서 여쭤봐 주실래요? 하씨 가문 쪽에서 언제쯤 소식을 줄 수 있는지 궁금해요.
하씨 가문 고택.“안에 계시죠? 심씨 가문에서 또 전화가 왔습니다. 심씨 가문의 따님인 심소희 아가씨의 환영 파티에 참석하시겠습니까?”주경모가 서재의 문을 두드리며 공손하게 물었다. “하, 또 전화해서 물어본 모양이네요. 하지만 심씨 가문도 잘 알 텐데요, 협력 도중에 도망가는 게 얼마나 비도덕적인 일인지요.”하은철이 이를 갈며 말하자, 옆에 있던 하도훈이 거들었다.“하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협력 관계였어. 그런데 갑자기 심씨 가문이 발을 뺐지. 이건 우리 하씨 가문을 배신한 거나 마찬가지야. 우리가 이번 환영 파티에 참석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심씨 가문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할 테지.” “한마디로, 이번 환영 파티에는 참석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구나.” 하은철이 말했다.“네? 심씨 가문은 분명히 이서도 초대했을 거예요. 모처럼 이서를 볼 수 있는 기회인데, 왜 안 된다는 거예요?” 하도훈이 눈살을 찌푸렸다.“은철아, 내가 이서를 포기하라고 하지 않았니? 계속 그 아이를 신경 쓰는 건 너에게도 도움이 안 돼.”“하지만 이대로 포기하는 건 너무 억울해요. 이서도 본인이 사랑하는 남자가 겁쟁이라는 건 알아야죠.” “하지환은 본인의 신분조차 알리지 않았어요.”“그런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이서의 사랑을 받냐고요!” 하은철이 일어서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정말 이렇게 참으실 거예요? 이대로 하지환한테 당하실 거냐고요! 하지환은 이제 하씨 그룹의 대주주예요. 이번에 발생한 회사 위기도 그 점을 이용해서 자기 멋대로 회사 컴퓨터에 바이러스를 심은 거라고요.” “계속 하지환과 한 편을 먹는 건, 호랑이와 함께하는 꼴이나 다름없어요.” “그러니 그 사람을 망치는 게 최선인 셈이죠, 안 그런가요?” 하도훈이 찌푸렸던 인상을 서서히 풀었다.“아버지가 저보다 더 잘 아시잖아요, 이서를 만나기 전의 작은 아빠가 얼마나 무서웠는지요? 작은 아빠의 약점을 아는데도, 이대로 포기하실 거예요?” 몸을 일으킨 하도훈이 서재에서 불안하다는
윤재하와 성지영, 고이서 세 사람은 여전히 이서가 치매에 걸려 윤씨 그룹을 손에 넣을 꿈에 들떠 있었지만, 정작 이서는 지환과 한 지붕 아래에서 지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고민에 빠져 있었다. 분명 병원에서 함께 지내던 때도 있어서 이번에도 별문제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집에서 같이 지내게 되니 묘하게 어색하고 불편했다. 이서는 귀를 바짝 세우고 문밖에서 나는 작은 소리 하나까지 신경 쓰면서도, 문밖에서 조금이라도 소리가 나면 그 소리가 금세 사라지길 바라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런 어이없는 감정에 시달리던 첫날 밤, 놀랍게도 이서는 오랜만에 불면증 없이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 이서는 눈을 뜨자마자 하나의 문자 폭탄을 받았다. [너, 형부랑 다시 합친 거야?] [같이 살기 시작했다던데, 화해하고 다시 시작하려는 거냐고!] [왜 그렇게 중요한 일을 나한테 말하지 않은 거야? 이 선생님이 말 안 해줬으면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나, 너한테 가장 친한 친구 아니었어?]이서는 할 말을 잃었다. 곧바로 소희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어제 두 사람이 손잡고 있는 거 보고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화해한 거였어요? 이렇게 큰일을 저한테도 숨긴 거예요?] 결국 이서는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환 씨랑 다시 화해한 거 아니야. 괜히 오해하지 마.] 그 순간, 나나도 단톡방에 뛰어들었다. [뭐라고요? 이서 언니가 형부랑 다시 화해했다고요? 대박! 들러리 자리 하나 예약할게요!]이서는 어이가 없어졌다. ‘대체 왜 내가 한 말은 안 보고 다들 자기 멋대로 상상하는 거야?’ 이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단체 영상 통화를 시도했다. “말했잖아, 화해한 거 아니라고.” 이서는‘화해한 적 없다’는 말을 특히 강조했다.그제야 세 사람은 조용해졌는데, 잠시 후에야 하나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근데 이 선생님 말로는 두 사람이 같이 산다고 하던데? 다시 화해한 게 아니면 왜 같이 사는 거야?]
2층에서 소란을 듣고 있던 윤재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1층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와는 다르게 고이서 혼자만이 만족스럽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이서는 바로 뒤에 있던 짐가방을 든 직원들에게 자리를 내주며 말했다. “들어오세요.” 직원들이 들고 있는 쇼핑백들이 모두 명품 브랜드임을 본 성지영과 윤재하는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서야, 그 많은 걸 대체 무슨 돈으로 산 거야?” 성지영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직원들이 짐을 다 내려놓고 나가자, 고이서는 여유롭게 말했다. “엄마, 아빠, 두 분을 위해 산 선물인데, 한번 보세요. 마음에 드실진 모르겠네요.” 성지영은 가까이 있던 쇼핑백 하나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LV 로고가 새겨진 명품 의류가 들어 있었다. 성지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이서야, 어디서 이렇게 큰돈을 구한 거야?” 고이서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윤씨 그룹의 돈으로 샀어요.” “뭐? 회사 공금을 횡령했다고?” 윤재하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렇게 많은 걸 샀으니 금방 들키고 말 거야. 윤이서가 내일 회사에 출근하면, 바로 알아챌 거라고! 당장 환불하렴. 윤이서한테 들키면 정말 큰 일이니까!” 고이서는 소파에 편하게 앉으며 미소 지었다. “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윤이서는 절대 모를 거예요. 이 돈, 다 합법적인 절차로 나온 거거든요.” 윤재하와 성지영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고이서는 다리를 꼬고 앉아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윤이서가 저한테 회사를 맡겼어요.” “뭐? 그게 정말이야?” 윤재하와 성지영은 깜짝 놀라며 고이서를 바라보았다. “물론 임시로 맡긴 거긴 하지만... 윤이서가 왜 저한테 회사를 맡겼는지 아세요?” 두 사람이 고개를 젓자, 고이서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오늘 윤이서가...”고이서는 오늘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성지
이서는 지환의 대답을 듣고 나서 참지 못하고 말했다. “아까 분명히 얘기했잖아요, 화해한 척 연기하는 거라고요! 지엽이도 없는 데서 굳이 연기할 필요는 없어요.”지환은 살짝 눈을 들어 이서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이서야, 아무리 토사구팽이라지만, 이렇게 빨리 쳐내는 건 좀 심하지 않아?” 더 이상 이 주제로 대화하고 싶지 않은 이서는 곧바로 소희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자료는 다 읽어봤어? 정말 심태윤이 벌인 짓이야?”“네, 자료에는 심태윤이 어떻게 가짜 증거를 만들었는지도 다 나와 있었어요. 이 증거들만 경찰에 넘기면, 심태윤은 바로 잡혀가고 말 거예요.” 이서는 소희의 말투에서 뭔가 망설임이 느껴져 물었다. “왜 그래? 혹시 심태윤이 잡혀가면 소희 씨의 양부모를 돌볼 사람이 없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 소희는 가볍게 웃었다. “언니, 저를 너무 착하게 보신 거 아니에요?”“그 사람들이 돈을 이유로 저한테 어떻게 했는지 다 아시잖아요. 그 이후로 저는 그 사람들한테 기대한 것도 없고, 미련도 없었어요. 단지 이 일이 심태윤 혼자 한 짓이 아닌 것 같아서 그래요. 분명히 배후가 있을 거라고요.” “그 배후만 찾아내도 앞으로 골치 아플 일은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심씨 가문 사람들이 이서 언니의 남편이 하 대표님이라는 걸 알게 된 후에는 더 이상 직접적으로 날 괴롭히지 않았지만, 언젠가 이서 언니와 하 대표님이 헤어진다면, 나를 몰아내려는 사람들은 다시 들고일어날 거야.’ “혹시 이미 의심 가는 사람이 있는 거야?” 이서는 소희가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마음을 정확히 읽어냈는데, 역시 자매다운 호흡이었다. 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 말을 다른 사람한테 하면 오해받을 수도 있겠지만, 언니한테는 말해도 될 것 같아요.”“제 생각엔... 강경숙이 관련된 것 같아요.” “강경숙?”“제가 심씨 가문에 돌아온 이후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이 강경숙과 심유인이잖아
“적어도 내가 다른 사람을 찾기 전까지는 그렇게 할게.” “지엽아...” “그런 표정 짓지 마.” 지엽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그러면 내가 또 희망을 품을 것 같잖아.” 이서는 입술을 꾹 다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보다 내가 먼저 가도 될까?” 이서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줘. 내 마지막 소원이야.”지엽의 진지한 눈빛에 이서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지엽은 잠시 이서를 바라보더니, 이서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기억에 새기듯 눈에 담은 후, 미소를 짓고 조용히 돌아섰다. ...한편, 고택 입구에서는 소희와 지환이 두 사람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온 사람은 지엽 혼자였다. 지엽이 혼자 돌아오는 모습을 본 순간, 지환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환은 한걸음에 다가가 지엽의 멱살을 움켜잡으며 거칠게 물었다. “이서는 어디 있어?” 지엽은 차분한 눈빛으로 지환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표님은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정말 부럽다니까요?” 하지만 지환은 지엽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이서는 어디 있냐고 묻잖아!” 마침 그때 이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환이 지엽을 몰아붙이고 있는 모습을 본 이서는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 “하지환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서가 무사히 나오는 걸 본 지환은 그제야 손을 놓았다. “너... 괜찮아?” 이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안 괜찮을 건 없지.” 지엽은 헝클어진 옷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서야, 봤지? 저 사람이 바로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널 아주 사랑하면서도 과할 정도로 집착하는 남자가 저 사람이라고.” 이서는 입술을 움직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지엽은 쓸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저 남자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분명히 보여주는 게, 내가 널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
차가 심씨 가문의 고택에 다다르자, 이서는 가장 먼저 지엽을 발견했다.지엽 역시 차에서 내리는 지환을 보고 얼굴이 굳어 버렸는데, 특히 이서가 자연스레 지환의 팔짱을 낀 순간, 지엽의 눈썹이 몇 번이나 심하게 떨렸다. “두 사람...” 지엽이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찰나, 고택의 대문이 열리며 소희가 나왔다. “오셨네요!” 몇 초 후, 두 사람이 팔짱을 낀 모습을 본 소희는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두 분... 화해하신 거예요?” 이서는 지엽의 반응을 슬쩍 살피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됐어.”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지엽이 떠난 뒤에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소희는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하나 언니는 아직 모르죠? 지금 바로 알려줘야겠어요!” 이서는 다급하게 소희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으며 말했다. “잠깐만!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먼저 소희 씨 얘기부터 하자. 지엽아, 얼른 조사한 결과부터 소희 씨한테 보여줘.”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이 함께 있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고, 이서가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소희에게 조사 결과를 건넸다. “소희 씨에게 누명을 씌운 건 심태윤이었어요. 소희 씨가 여태 친동생인 줄 알았던 그 사람이요.”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 쪽에 신경이 쏠려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그 안에 다 적혀 있으니까 잘 읽어보면 돼요...” 지엽이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서야, 잠깐 나랑 따로 얘기할 수 있을까?” 그 순간,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이서는 지환을 한 번 바라보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서가 지환의 팔에서 손을 빼내려 하자, 지환은 더욱 강하게 이서의 손을 잡았다. 이서는 당황한 표정으로 지환을 올려다보며 눈빛으로 놓아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 대표님, 제가 이서랑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면
이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정말... 같이 먹고, 같이 잔다고요?”지환은 그 말에 이서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걸 눈치채고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지만, 일부러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응, 어쩔 수 없잖아. 어둠의 호리병을 반으로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당분간은 같이 지내야겠어요.” 지환의 미소는 더 깊어졌는데, 그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하도훈은 언제 처리할 수 있어요? 설마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니죠?” 지환은 깊은숨을 내쉬며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이 다크 웹의 1위와 2위의 위치만 알아낸다면, 하도훈과 정면 승부를 가릴 수 있을 텐데 말이지...”“어둠의 호리병은 그 둘의 위치를 모르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어둠의 호리병도 순위에 올라 있는 킬러일 뿐, 그 사람들과 친구는 아니거든.” “단서도 전혀 없어요?” 지환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망하게 해서 미안하지만, 지금은 없어.” 이서는 실망이라기보다는 하도훈이라는 골칫거리를 빨리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럼, 우린 이제 어디로 가요?” “회사로.” 고개를 끄덕인 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두 사람이 탄 차는 윤씨 그룹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이서는 지엽의 전화를 받았다. “소희 씨에 대한 일은 어느 정도 해결된 거야?”이서는 기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얼른 가서 소희 씨한테 알려줘. 분명히 엄청나게 기뻐할 거야.” 수화기 너머의 지엽은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말했다.[이서야, 난 소희 씨랑 이제 막 알게 된 사이라 조금 어색한데, 네가 같이 가주면 안 될까?] 이서는 곁눈으로 지환을 한 번 바라보며 생각하다가 말했다. “알았어.” 그 순간, 이서를 태우고 있던 지환은 잠시 핸들을 놓칠 뻔했
“고이서를 바로 내쫓으면 분명 편하긴 하겠죠. 하지만 내 손에 있는 윤씨 그룹의 자산 중 일부는 원래 윤씨 가문의 것이었어요.”“그 인간들의 만행이 제대로 폭로되지 않으면, 과거 윤씨 그룹에 몸담았던 몇몇 내부 인사들은 고이서와 손을 잡고 말 거예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반드시 그 인간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지 모두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일부러 고이서를 회사의 대표 자리에 앉힌 거야? 그 여자가 빨리 본색을 드러내도록 하려고?” “네.”짧게 대답한 이서는 무심코 거울 속 자신을 보았고, 활짝 웃고 있는 자기 모습에 잠시 멍해졌다. ‘하지환 씨 앞에 서면 점점 자유로워지는 것 같아.’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는데, 이서에게 더 난감한 것은 지환이 자신의 정체를 속였던 일조차 잊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 내려오라고 한 거예요?”아래층으로 내려온 이서는 지환의 차에 올랐다. “하도훈이 이렇게 오랫동안 잠적한 이유가 뭔지 알아?”“자식을 만드느라 바쁜 거겠죠.” “맞아.”“그동안 꽤 많은 여자를 만났고, 그중 한 여자가 진짜로 임신했다더라.” 이서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그럼 이제 하도훈이 다시 우리한테 신경 쓸 여유가 생겼다는 거네요?” 지환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이서를 바라보았다. 이서는 지환의 표정을 보고 의아하게 물었다. “그 표정은 또 뭐예요? 설마... 예전에 내가 하도훈한테 여자를 붙여보라고 했던 그 작전을...”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그 임신했다는 여자, 하지환 씨가 보낸 사람이에요?” “아니었으면 한 번에 임신했을 리가 없잖아.” 이서는 입을 살짝 벌리고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럼 그 아이는 하도훈의 아이가 아닌 거예요?” 지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이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훈은 그 사실을 알면 미쳐버릴 거예요.” “미치면 더 좋지 않아?” 지환은 담담하게
모두 반대의 목소리뿐이었지만, 이서는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불만 있으면 사직서 쓰세요.” 이 한마디에, 회사 고위층들은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서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고이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오늘부터 고 팀장님이 아닌 고 대표님이 된 거예요.”‘고 대표’라는 말을 듣는 순간, 고이서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새어 나오는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다. 너무나 큰 기쁨에, 아무리 억제하려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으니 말이다.“저는 이만 가 볼게요.” 이서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사무실을 떠났고, 고이서는 문이 닫힌 후에도 몇 초간 멍하니 서 있었다.5분이 지나도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고이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서의 책상으로 다가가 나뭇결을 쓰다듬었다. ‘이제 이 모든 건 다 내 거야...!’ 고이서는 마치 꿈속을 걷는 사람처럼 대형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는 순간, 마치 가죽 의자가 아니라 구름 위에 앉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자리만 차지하면... 다시 예전처럼 호화로운 삶을 즐길 수 있을 거야. 원하는 대로 화려한 드레스를 사고, 반짝이는 보석도 망설임 없이 살 수 있고... 돈 걱정 따위는 안 해도 되겠지! 아, 내가 좋아하는 남자도 내 마음대로 만날 수 있을 거야.’ 고이서의 마음이 격렬히 요동치던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고이서는 마치 제 발 저린 도둑처럼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고, 몇 초가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온 김하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 팀장님, 회의 시간이 다 됐습니다.” ‘고 팀장’이라는 호칭에 고이서는 속으로 불쾌감을 느꼈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김하늘’이라는 이름을 새겨 두었다.‘며칠만 지나면 내가 정식으로 대표가 될 텐데, 그때 가장 먼저 잘라버릴 사람은 바로 네가 될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김하
고이서는 이서가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성지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윤이서는 사실 아주 멍청한 사람이야.”“정말 똑똑한 사람이었으면, 하은철처럼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두고, 굳이 가난한 남자를 택했겠니?” 고이서는 예전에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윤이서가 정말 그렇게 멍청하다면, 누구도 살리지 못했던 회사를 그렇게 짧은 시간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H 국의 4대 가문 중 하나로 만들진 못했을 거야.’‘그것도 혼자만의 힘으로.’‘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윤이서는 정말 멍청한 것 같아.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다니까?’‘이 회사의 대표가 된 것도 전부 운 덕분이었던 것 같아.’ “고 팀장님?”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이서는 정신을 차렸다. “네, 대표님.” 이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큰 일이에요. 오늘은 제가 한 말을 잊어버린 정도로 끝났지만, 앞으로는 계약서 서명 같은 중요한 일을 잊어버릴지도 모르잖아요.” “고 팀장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잠시 쉬어야 할 것 같긴 한데...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일은 누구한테 맡겨야 할까요?”이서는 갑자기 고이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래요, 고 팀장님! 고 팀장님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요!”고이서는 당황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 팀장님이 꼭 저를 도와줘야 해요. 고 팀장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 회사에는 저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고이서는 일부러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감히...”“별거 아니에요.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운영만 도맡아주면 돼요. 저는 회복하는 대로 다시 돌아올게요.” 고이서는 겉으로는 고개를 저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이렇게 큰 회사를 저한테 맡기셨다가 큰 문제라고 생기면 어떡하시려고요.” 비록 이렇게 말했지만, 고이서는 속으로 이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