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씨 가문 고택.“안에 계시죠? 심씨 가문에서 또 전화가 왔습니다. 심씨 가문의 따님인 심소희 아가씨의 환영 파티에 참석하시겠습니까?”주경모가 서재의 문을 두드리며 공손하게 물었다. “하, 또 전화해서 물어본 모양이네요. 하지만 심씨 가문도 잘 알 텐데요, 협력 도중에 도망가는 게 얼마나 비도덕적인 일인지요.”하은철이 이를 갈며 말하자, 옆에 있던 하도훈이 거들었다.“하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협력 관계였어. 그런데 갑자기 심씨 가문이 발을 뺐지. 이건 우리 하씨 가문을 배신한 거나 마찬가지야. 우리가 이번 환영 파티에 참석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심씨 가문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할 테지.” “한마디로, 이번 환영 파티에는 참석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구나.” 하은철이 말했다.“네? 심씨 가문은 분명히 이서도 초대했을 거예요. 모처럼 이서를 볼 수 있는 기회인데, 왜 안 된다는 거예요?” 하도훈이 눈살을 찌푸렸다.“은철아, 내가 이서를 포기하라고 하지 않았니? 계속 그 아이를 신경 쓰는 건 너에게도 도움이 안 돼.”“하지만 이대로 포기하는 건 너무 억울해요. 이서도 본인이 사랑하는 남자가 겁쟁이라는 건 알아야죠.” “하지환은 본인의 신분조차 알리지 않았어요.”“그런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이서의 사랑을 받냐고요!” 하은철이 일어서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정말 이렇게 참으실 거예요? 이대로 하지환한테 당하실 거냐고요! 하지환은 이제 하씨 그룹의 대주주예요. 이번에 발생한 회사 위기도 그 점을 이용해서 자기 멋대로 회사 컴퓨터에 바이러스를 심은 거라고요.” “계속 하지환과 한 편을 먹는 건, 호랑이와 함께하는 꼴이나 다름없어요.” “그러니 그 사람을 망치는 게 최선인 셈이죠, 안 그런가요?” 하도훈이 찌푸렸던 인상을 서서히 풀었다.“아버지가 저보다 더 잘 아시잖아요, 이서를 만나기 전의 작은 아빠가 얼마나 무서웠는지요? 작은 아빠의 약점을 아는데도, 이대로 포기하실 거예요?” 몸을 일으킨 하도훈이 서재에서 불안하다는
“예.”주경모는 이내 물러났다.심씨 가문이 답장받자마자 지환에게도 소식이 알려졌다.“하은철이 결심을 굳힌 모양이야. 아무래도 어떤 빈틈도 놓치지 않으려는 것 같아.” 지환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상언이 말했다.“환영 파티에서 이서한테 네 정체를 폭로하려는 건 아니겠지?” 지환이 차분한 얼굴로 눈앞에 놓인 지도를 바라보았다. 지도에는 붉은 점이 하나 있었는데, 사인펜으로 동그라미를 친 것이었다. 지도를 힐끗 바라본 상언은 그곳을 ‘공주묘’라고 불렀다. 그가 냉기를 한 모금 들이마시며 말했다.“계획은... 다 짰어?” 지환이 마침내 고개를 들어 상언을 보았다.“응, 이미 다 준비했어. 3일 뒤면 나와 하은철의 생사 싸움이 시작될 거야.” 상언은 그가 걱정되는 마음을 꾹 참았고, 위로의 말이 아닌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최근에 좋은 술을 많이 구했어. 우리가 같이 술을 마신 지도 꽤 오래된 것 같은데, 오늘은 죽도로 마셔보자.” 지환이 그를 한 번 바라보았다.“진심이야?”“진심이냐니?”상언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지환이 곧장 핸드폰을 꺼내 이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상의할 게 있어.] “에이, 그냥 술 한 잔 마시는 건데?”상언은 이렇게 말했지만, 곧바로 핸드폰을 들어 하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긍정적인 답장을 받은 그는 득의양양하게 지환에게 자랑했다. “봐, 하나 씨가 술 마셔도 된대!” 지환이 무표정한 얼굴로 상언에게 핸드폰을 보여주었다.“이서도 된대. 그런데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말라네?” “...”몇 초 후, 상언의 핸드폰이 울렸고, 그는 얼른 확인해 보았다.하나가 보낸 메시지였다.[건강이 걱정돼요. 너무 많이 마시진 마세요.] 상언은 자랑스럽게 핸드폰을 내밀었는데, 지환의 한마디에 말문이 막혔다. “내가 더 빨랐어. 하나 씨가 너를 걱정하는 것보다 이서가 나를 걱정하는 마음이 더 크다는 뜻이지.”상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두 사람이 유치한 싸움을 벌일 때, 이서와 하나는 카페 입구에서 커
“왜 인사도 못하게 해?” 하나는 소희가 몇 명의 여자들과 함께 백화점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만 보았다. 이서가 말했다.“됐어, 그럴 필요 없어. 소희 씨 옆에 있던 여자들 못 봤어? 다 심씨 가문 여자들이었잖아. 하나같이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우리가 가서 인사하면, 그 여자들이 뭐라고 하겠어.” “소희 씨가 지금은 화려해 보이지만, 힘든 상황일지도 몰라.” “폐를 끼칠 만한 일은 애초에 하지 않는 게 좋잖아.” “게다가 3일 후면 소희 씨를 만날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서두르려고 해?” “하긴... 소희가 심씨 가문 사람들한테 밉보이지만 않는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안아주고 싶어. 전보다 더 말라보이던데, 심씨 가문에서의 삶이 행복하지 않은 것 같아.”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던 이서가 말없이 시선을 거두었다. “그럼 우리는? 백화점에 안 갈 거야?” “쇼핑을 왜 안 해? 아직 소희 씨한테 줄 선물도 준비하지 않았잖아.”“나도, 어서 들어가자.”두 사람은 백화점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백화점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서와 하나는 소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심하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소희한테 무슨 선물을 해야 할까?”하나는 한 매장에서 마음에 드는 선물을 고르지 못했다. 이서 역시 빈손이었다. 두 사람은 어떤 선물을 해야 할지 몰라서 선물을 살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성대한 파티에는 특별한 선물이 어울리지 않겠는가. “3층으로 가보자!”3층에는 대형 브랜드 매장이 줄지어 있었다. 하나가 이서를 붙잡으며 말했다.“소희랑 그 여자들... 왠지 3층에 있을 것 같아.” “며칠 뒤면 파티니까 예복을 사러 오지 않았을까?”이서가 3층의 방향을 힐끗 보았다.“그 사람들은 인원이 많고 목표가 크니까 우리가 피하면 될 거야.” “그래, 올라가 보자.”하나가 이서를 끌고 엘리베이터로 들어섰다. 그들은 곧 3층에 다다랐다.과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소희의 모습이 보였다. 심씨 가문 사람
너무 유치하거나, 성숙해 보일 뿐이었다. “감사합니다만, 저는 이 옷이 적당하다고 생각해요.”소희는 모든 사람의 호의를 거절하고 에메랄드 빛깔의 긴 드레스 앞에 다다랐다.그 드레스는 온화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지나치게 눈에 띄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그녀가 주인공으로서 돋보이면서도 심씨 가문 사람들의 빛을 빼앗지는 않을 것이었다. 마치 그녀를 위해 완벽하게 맞춤 제작된 것만 같았다. “이거 한번 입어볼게요.”소희가 점원에게 말했다.점원은 매니저를 한 번 바라보았는데, 그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 한,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는 듯했다. 그 매니저는 심씨 가문 사람들의 안색을 보고 일을 처리하려 했다.심씨 가문의 사람들은 모두 이 매장의 단골손님이기 때문이었다.매니저는 그 누구보다 그들의 신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 전에 소희에게 추천한 드레스 몇 벌을 보고, 소희를 곤란하게 하려는 계획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그들 중 신분이 가장 높은 강경숙을 지켜보았다.강경숙은 심유인의 엄마였는데, 고용인이 왜 소희의 옷을 망가뜨렸는지 분명히 알고 있을 터였다.매니저의 눈빛을 마주한 강경숙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소희야, 잘 생각해. 그 옷, 입어 볼 거니?”“그냥 입어보는 건데도 생각이 필요한가요?” 소희가 물었다.“아, 깜빡 잊을 뻔했구나, 예전엔 네가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걸. 하긴, 윤 대표의 곁에서 1년 넘게 있었지만, 윤 대표도 하씨 가문 덕분에 상류 사회의 삶을 살았던 거잖니?” “그 가난한 남자와 결혼한 이후로는 1년 넘게 명품 매장을 돌아다니지 못했을 거야. 그러니까 네가 모르는 것도 당연하겠구나.” “이런 명품 브랜드에는 불문율이 하나 있단다. 입어본 옷은 모두 사야 하지.” 강경숙이 말했다. “그래요?”강경숙이 암암리에 이서를 깎아내리자, 소희의 얼굴색이 변했다.“이서 언니의 곁을 지키면서 명품 매장은 수도 없이 다녀봤지만, 그런 규칙은 처음 들어보네요.” “저를
이서가 옅게 웃었다.“소희 씨는 저의 전 동료예요. 소희 씨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인 줄 알았더라면, 고용하지 않았을 겁니다.”“즉, 저를 탓하실 일은 아니라는 뜻이죠.”“그래도 누군가를 탓하고 싶다면, 소희 씨를 잃어버렸던 그 아주머니를 탓하셔야 하지 않겠어요?” 안색이 변한 강경숙은 아직 반박할 말을 생각하지 못한 채, 이서의 다음 말을 들어야 했다. “그나저나, 환영 파티가 3일 앞으로 다가왔는데, 이제야 소희 씨 옷을 사주시는 거예요? 아랫사람들이 일을 제대로 못 하는 탓인가요, 아니면 이렇게 중요한 일을 깜빡한 탓인가요? 그것도 아니면, 옷이 망가진 건가요?” “어떤 이유든 심씨 가문의 고용인들이 자질이 부족한 것 같은데, 사모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이서가 물었다. 강경숙의 안색은 갈수록 흉해졌다. 그녀는 구구절절 심씨 가문의 고용인을 탓하는 듯했지만, 실은 심씨 가문 가족들의 잘못을 탓하는 것이었다. 강경숙은 동서들 앞에서 소희와 이서가 아직 끝나지 않은 관계라는 누명을 씌워, 소희를 경계하고 고립시키려 했다. 하지만 본인보다 한참이나 어린 이서에게 꾸중을 듣게 된 것이었다. 화가 난 강경숙이 막 입을 열려던 찰나, 이서가 먼저 말했다.“아, 방금 저더러 소희 씨 옷을 계산하라고 하셨죠? 못 할 일은 아닙니다만, 심씨 가문에 대한 소문이 안 좋게 날까 봐서 걱정이네요.” “심씨 가문이 드레스 한 벌 살 돈도 없다고 생각하거나, 드레스 한 벌조차 사주기 싫어서 소희 씨를 학대한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죠?” 강경숙의 안색이 푸르러졌다가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한참이 지나서야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았다. “허, 다들 윤 대표의 말재주가 뛰어나다고 하던데, 과연 그렇네요.” 이서가 일부러 겸손한 척 말했다.“과찬이십니다. 할 말을 했을 뿐인걸요.” 강경숙이 콧방귀를 뀌었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방금 내가 한 말은 못 들은 걸로 하세요. 농담이었으니까요.” “소희는 우리 심씨 가문의 딸이에요. 원하는 물건이 있다면,
‘도대체 누굴 믿고 저렇게 설치는 거지?’‘그 가난뱅이 남편인가?’ 도대체 누가 그녀에게 저력을 주었습니까?웃음기를 머금은 소희의 목소리가 강경숙의 귓가에 전해졌다.“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극단적인 불문율이에요. 소비자 보호 센터에 신고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 말을 듣고 안색이 변한 매니저가 황급히 강경숙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그제야 이서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소비자 보호 센터는 무슨, 그냥 한번 입어보는 것일 뿐이잖니? 매니저님, 한 번쯤은 눈 감아주실 수 있죠?” 매니저가 식은땀을 훔치며 바삐 말했다.“그럼요, 당연합니다. 여러분은 저희 매장의 귀한 손님이시니까요. 그 정도 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가씨, 옷을 입어보고 싶으시다면, 얼마든지 입어보십시오.” 소희가 웃음기 없이 말했다.“저 때문에 괜히 매장의 규칙을 깨는 거 아닌가요?”“그럴 리가요!”매니저는 곧장 점원에게 옷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소희는 이내 옷을 들고 피팅룸으로 향했는데, 아첨하는 매니저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가까스로 입어 본 옷은 너무도 만족스러웠다. “이걸로 할게요.”소희가 옷을 건네자, 매니저가 직원을 향해 말했다.“얼른 포장하세요.” 하지만 그는 강경숙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아가씨, 이 드레스는 원래 6천만원인데, 특별히 5천만원에 드리겠습니다, 어떠십니까?” “좋아요.”소희가 손을 뻗어 카드를 찾기 시작했다. 어차피 심씨 가문의 돈이니 별로 아까울 것도 없었다. 처음에는 확실히 죄책감이 들었으나, 심유인이 매일 흥청망청 사는 것을 보고는 그런 마음을 거두어들였다. ‘현태 오빠 말이 맞아. 내가 아니더라도 심씨 가문 사람들이 쓸 돈이야.’ ‘이왕 이렇게 된 거, 내가 혼자 다 써버려야겠어.’ 잠시 더듬거려 보았으나, 집을 나서기 전에 이지숙이 준 카드를 찾을 수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가방 안을 뒤지고 나서야 카드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바로 이때, 알면서도 일부러 묻는 강경숙
“왜 그러니?”강경숙의 비꼬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돈을 안 가져왔다고 해서 울 필요는 없잖니? 몇천만원 정도는 우리가 대신 내 줄 수 있어.” 강경숙의 이번 목적은 다른 심씨 가문 가족들이 소희를 향한 심근영의 마음이 겉치레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직접 움직여야 했다. 게다가 이런 행동을 함으로써 심근영의 체면을 세울 수도 있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아니에요.”고개를 들어 올린 소희의 눈동자에는 잦아들지 않은 눈물이 고여 있었다. 하지만 강경숙을 마주하니, 혐오감만이 짙어질 뿐이었다. “제가 다 지불할 수 있어요.”강경숙의 안색이 살짝 바뀌었다.“너는 돈이 없잖니?” 소희가 강경숙을 바라보았다.“저는 한 번도 돈이 없다고 말한 적 없는 것 같은데, 왜 그렇게 단정을 지으세요?” 강경숙은 안색이 변했지만 곧 핑계를 댔다.“그거야... 네가 카드를 꺼내지 않으니까 지불할 돈이 없는 줄 알았지.” “외출하기 전에 아주머니께서 제 카드로 돈을 입금해 주셨어요.” 소희는 여전히 이지숙을 ‘엄마’라고 부를 수 없어서 아예 ‘아주머니’라고 불렀다.하지만 이지숙은 ‘아주머니’라는 호칭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으며, 오히려 그녀를 아주 배려했다. “그랬구나.”흉악해진 낯빛의 강경숙은 소희를 재촉하기 시작했다.“돈이 없는 게 아니라면, 얼른 지불부터 하려무나.” 그녀의 눈빛은 전혀 달갑지 않았다.소희는 강경숙과 쓸데없는 말을 나누지 않고 월급 카드를 매니저에게 건네주었다. 매니저가 카드로 결제하는 순간, 그녀는 마음이 너무도 아팠다. 왜냐하면, 그 카드안에 있는 돈은 이서가 입금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심씨 가문 사람들이 허튼수작을 부린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서는 재무팀에게 1억원을 입금하라고 지시했다.강경숙은 소희의 카드에 정말 5천만원이 있는 것을 보고는 입술을 오므릴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이 계집애에게 망신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내
“하나야, 왜 그래? 왜 그렇게 쳐다봐?” 넋을 잃은 하나는 얼른 정신을 차렸다“어, 아무것도 아니야.” 다만, 이서의 말투를 들어보면 본인이 윤재하의 딸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물론 그 일은 이서가 기억을 잃기 전에 일어난 일이니,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맞다, 하나야.” ““왜?하나가 긴장하며 이서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들, 어디로 갔는지 알아?” “그 사람들?”“윤재하랑 성지영 말이야. 나랑 하은철의 결혼식에는 모습을 드러냈었는데, 그 이후로는 자취를 감췄어. 두 사람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 “나는 전혀 모르겠어.”하나가 고개를 저었다.“형부가 너를 구한 후로 하은철이 보복할까 봐 두려워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 같아. 소식이 전혀 없더라고.” “그렇구나.”“이서야, 두 사람을 그리워하는 건 아니지?” “아니야, 내가 왜 그 사람들을 그리워하겠어. 단지... 소희 씨가 집으로 돌아가는 걸 보고 나한테도 부모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네 부모님이라는 사람들 말이야...”하나가 이서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냥 그런 사람들은 처음부터 없었다고 생각하는 게 좋겠어. 확실하진 않지만... 그 사람들은 네 친부모님이 아닌 것 같거든.” 하나는 마지막 한 마디를 아주 작게 말해서 이서는 들을 수 없었다. “그래, 차라리 없다고 생각하는 게 나아. 그 사람들이 또 나타난다면, 예전처럼 끊임없이 나를 귀찮게 할 테니까.”두 사람은 이내 차에 올랐고, 하나가 모는 차는 호텔로 향했다. 지환의 방에 도착하니, 만취한 술꾼 두 명이 보였다. “진짜 마음껏 마셨구나?”하나는 바닥에 흩어진 값비싼 와인병들을 보자 마음이 아팠다. “이 사람들, 어서 침대로 옮기자.” “이렇게 자게 놔두면 감기 걸릴 거야.” “이 선생님을 다른 곳으로 보내는 건, 이 비서님한테 부탁하는 게 좋겠어.” 하나는 상언을 발로 툭툭 건드렸으나,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두 사람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