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유치하거나, 성숙해 보일 뿐이었다. “감사합니다만, 저는 이 옷이 적당하다고 생각해요.”소희는 모든 사람의 호의를 거절하고 에메랄드 빛깔의 긴 드레스 앞에 다다랐다.그 드레스는 온화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지나치게 눈에 띄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그녀가 주인공으로서 돋보이면서도 심씨 가문 사람들의 빛을 빼앗지는 않을 것이었다. 마치 그녀를 위해 완벽하게 맞춤 제작된 것만 같았다. “이거 한번 입어볼게요.”소희가 점원에게 말했다.점원은 매니저를 한 번 바라보았는데, 그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 한,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는 듯했다. 그 매니저는 심씨 가문 사람들의 안색을 보고 일을 처리하려 했다.심씨 가문의 사람들은 모두 이 매장의 단골손님이기 때문이었다.매니저는 그 누구보다 그들의 신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 전에 소희에게 추천한 드레스 몇 벌을 보고, 소희를 곤란하게 하려는 계획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그들 중 신분이 가장 높은 강경숙을 지켜보았다.강경숙은 심유인의 엄마였는데, 고용인이 왜 소희의 옷을 망가뜨렸는지 분명히 알고 있을 터였다.매니저의 눈빛을 마주한 강경숙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소희야, 잘 생각해. 그 옷, 입어 볼 거니?”“그냥 입어보는 건데도 생각이 필요한가요?” 소희가 물었다.“아, 깜빡 잊을 뻔했구나, 예전엔 네가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걸. 하긴, 윤 대표의 곁에서 1년 넘게 있었지만, 윤 대표도 하씨 가문 덕분에 상류 사회의 삶을 살았던 거잖니?” “그 가난한 남자와 결혼한 이후로는 1년 넘게 명품 매장을 돌아다니지 못했을 거야. 그러니까 네가 모르는 것도 당연하겠구나.” “이런 명품 브랜드에는 불문율이 하나 있단다. 입어본 옷은 모두 사야 하지.” 강경숙이 말했다. “그래요?”강경숙이 암암리에 이서를 깎아내리자, 소희의 얼굴색이 변했다.“이서 언니의 곁을 지키면서 명품 매장은 수도 없이 다녀봤지만, 그런 규칙은 처음 들어보네요.” “저를
이서가 옅게 웃었다.“소희 씨는 저의 전 동료예요. 소희 씨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인 줄 알았더라면, 고용하지 않았을 겁니다.”“즉, 저를 탓하실 일은 아니라는 뜻이죠.”“그래도 누군가를 탓하고 싶다면, 소희 씨를 잃어버렸던 그 아주머니를 탓하셔야 하지 않겠어요?” 안색이 변한 강경숙은 아직 반박할 말을 생각하지 못한 채, 이서의 다음 말을 들어야 했다. “그나저나, 환영 파티가 3일 앞으로 다가왔는데, 이제야 소희 씨 옷을 사주시는 거예요? 아랫사람들이 일을 제대로 못 하는 탓인가요, 아니면 이렇게 중요한 일을 깜빡한 탓인가요? 그것도 아니면, 옷이 망가진 건가요?” “어떤 이유든 심씨 가문의 고용인들이 자질이 부족한 것 같은데, 사모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이서가 물었다. 강경숙의 안색은 갈수록 흉해졌다. 그녀는 구구절절 심씨 가문의 고용인을 탓하는 듯했지만, 실은 심씨 가문 가족들의 잘못을 탓하는 것이었다. 강경숙은 동서들 앞에서 소희와 이서가 아직 끝나지 않은 관계라는 누명을 씌워, 소희를 경계하고 고립시키려 했다. 하지만 본인보다 한참이나 어린 이서에게 꾸중을 듣게 된 것이었다. 화가 난 강경숙이 막 입을 열려던 찰나, 이서가 먼저 말했다.“아, 방금 저더러 소희 씨 옷을 계산하라고 하셨죠? 못 할 일은 아닙니다만, 심씨 가문에 대한 소문이 안 좋게 날까 봐서 걱정이네요.” “심씨 가문이 드레스 한 벌 살 돈도 없다고 생각하거나, 드레스 한 벌조차 사주기 싫어서 소희 씨를 학대한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죠?” 강경숙의 안색이 푸르러졌다가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한참이 지나서야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았다. “허, 다들 윤 대표의 말재주가 뛰어나다고 하던데, 과연 그렇네요.” 이서가 일부러 겸손한 척 말했다.“과찬이십니다. 할 말을 했을 뿐인걸요.” 강경숙이 콧방귀를 뀌었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방금 내가 한 말은 못 들은 걸로 하세요. 농담이었으니까요.” “소희는 우리 심씨 가문의 딸이에요. 원하는 물건이 있다면,
‘도대체 누굴 믿고 저렇게 설치는 거지?’‘그 가난뱅이 남편인가?’ 도대체 누가 그녀에게 저력을 주었습니까?웃음기를 머금은 소희의 목소리가 강경숙의 귓가에 전해졌다.“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극단적인 불문율이에요. 소비자 보호 센터에 신고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 말을 듣고 안색이 변한 매니저가 황급히 강경숙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그제야 이서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소비자 보호 센터는 무슨, 그냥 한번 입어보는 것일 뿐이잖니? 매니저님, 한 번쯤은 눈 감아주실 수 있죠?” 매니저가 식은땀을 훔치며 바삐 말했다.“그럼요, 당연합니다. 여러분은 저희 매장의 귀한 손님이시니까요. 그 정도 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가씨, 옷을 입어보고 싶으시다면, 얼마든지 입어보십시오.” 소희가 웃음기 없이 말했다.“저 때문에 괜히 매장의 규칙을 깨는 거 아닌가요?”“그럴 리가요!”매니저는 곧장 점원에게 옷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소희는 이내 옷을 들고 피팅룸으로 향했는데, 아첨하는 매니저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가까스로 입어 본 옷은 너무도 만족스러웠다. “이걸로 할게요.”소희가 옷을 건네자, 매니저가 직원을 향해 말했다.“얼른 포장하세요.” 하지만 그는 강경숙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아가씨, 이 드레스는 원래 6천만원인데, 특별히 5천만원에 드리겠습니다, 어떠십니까?” “좋아요.”소희가 손을 뻗어 카드를 찾기 시작했다. 어차피 심씨 가문의 돈이니 별로 아까울 것도 없었다. 처음에는 확실히 죄책감이 들었으나, 심유인이 매일 흥청망청 사는 것을 보고는 그런 마음을 거두어들였다. ‘현태 오빠 말이 맞아. 내가 아니더라도 심씨 가문 사람들이 쓸 돈이야.’ ‘이왕 이렇게 된 거, 내가 혼자 다 써버려야겠어.’ 잠시 더듬거려 보았으나, 집을 나서기 전에 이지숙이 준 카드를 찾을 수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가방 안을 뒤지고 나서야 카드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바로 이때, 알면서도 일부러 묻는 강경숙
“왜 그러니?”강경숙의 비꼬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돈을 안 가져왔다고 해서 울 필요는 없잖니? 몇천만원 정도는 우리가 대신 내 줄 수 있어.” 강경숙의 이번 목적은 다른 심씨 가문 가족들이 소희를 향한 심근영의 마음이 겉치레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직접 움직여야 했다. 게다가 이런 행동을 함으로써 심근영의 체면을 세울 수도 있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아니에요.”고개를 들어 올린 소희의 눈동자에는 잦아들지 않은 눈물이 고여 있었다. 하지만 강경숙을 마주하니, 혐오감만이 짙어질 뿐이었다. “제가 다 지불할 수 있어요.”강경숙의 안색이 살짝 바뀌었다.“너는 돈이 없잖니?” 소희가 강경숙을 바라보았다.“저는 한 번도 돈이 없다고 말한 적 없는 것 같은데, 왜 그렇게 단정을 지으세요?” 강경숙은 안색이 변했지만 곧 핑계를 댔다.“그거야... 네가 카드를 꺼내지 않으니까 지불할 돈이 없는 줄 알았지.” “외출하기 전에 아주머니께서 제 카드로 돈을 입금해 주셨어요.” 소희는 여전히 이지숙을 ‘엄마’라고 부를 수 없어서 아예 ‘아주머니’라고 불렀다.하지만 이지숙은 ‘아주머니’라는 호칭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으며, 오히려 그녀를 아주 배려했다. “그랬구나.”흉악해진 낯빛의 강경숙은 소희를 재촉하기 시작했다.“돈이 없는 게 아니라면, 얼른 지불부터 하려무나.” 그녀의 눈빛은 전혀 달갑지 않았다.소희는 강경숙과 쓸데없는 말을 나누지 않고 월급 카드를 매니저에게 건네주었다. 매니저가 카드로 결제하는 순간, 그녀는 마음이 너무도 아팠다. 왜냐하면, 그 카드안에 있는 돈은 이서가 입금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심씨 가문 사람들이 허튼수작을 부린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서는 재무팀에게 1억원을 입금하라고 지시했다.강경숙은 소희의 카드에 정말 5천만원이 있는 것을 보고는 입술을 오므릴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이 계집애에게 망신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내
“하나야, 왜 그래? 왜 그렇게 쳐다봐?” 넋을 잃은 하나는 얼른 정신을 차렸다“어, 아무것도 아니야.” 다만, 이서의 말투를 들어보면 본인이 윤재하의 딸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물론 그 일은 이서가 기억을 잃기 전에 일어난 일이니,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맞다, 하나야.” ““왜?하나가 긴장하며 이서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들, 어디로 갔는지 알아?” “그 사람들?”“윤재하랑 성지영 말이야. 나랑 하은철의 결혼식에는 모습을 드러냈었는데, 그 이후로는 자취를 감췄어. 두 사람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 “나는 전혀 모르겠어.”하나가 고개를 저었다.“형부가 너를 구한 후로 하은철이 보복할까 봐 두려워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 같아. 소식이 전혀 없더라고.” “그렇구나.”“이서야, 두 사람을 그리워하는 건 아니지?” “아니야, 내가 왜 그 사람들을 그리워하겠어. 단지... 소희 씨가 집으로 돌아가는 걸 보고 나한테도 부모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네 부모님이라는 사람들 말이야...”하나가 이서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냥 그런 사람들은 처음부터 없었다고 생각하는 게 좋겠어. 확실하진 않지만... 그 사람들은 네 친부모님이 아닌 것 같거든.” 하나는 마지막 한 마디를 아주 작게 말해서 이서는 들을 수 없었다. “그래, 차라리 없다고 생각하는 게 나아. 그 사람들이 또 나타난다면, 예전처럼 끊임없이 나를 귀찮게 할 테니까.”두 사람은 이내 차에 올랐고, 하나가 모는 차는 호텔로 향했다. 지환의 방에 도착하니, 만취한 술꾼 두 명이 보였다. “진짜 마음껏 마셨구나?”하나는 바닥에 흩어진 값비싼 와인병들을 보자 마음이 아팠다. “이 사람들, 어서 침대로 옮기자.” “이렇게 자게 놔두면 감기 걸릴 거야.” “이 선생님을 다른 곳으로 보내는 건, 이 비서님한테 부탁하는 게 좋겠어.” 하나는 상언을 발로 툭툭 건드렸으나,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두 사람
갑자기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듯하더니, 이서가 지환의 품으로 쓰러졌다.그녀는 막 일어나려 할 때 뒤통수가 잡혔는데, 조금 전 가벼운 입맞춤은 강렬하고 지배적인 키스로 변해버렸다. 이서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고, 한참 동안 온 힘을 다 쓰고 나서야 지환을 밀쳐낼 수 있었다. “이거 보세요, 하지환 씨! 진짜 취한 거예요, 아니면 취한 척하는 거예요?” 이서가 곤히 잠든 지환을 노려봤다. 그는 어떻게 보더라도 정말 잘생긴 사람이었다. 술에 취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날렵한 턱선과 콧날, 그리고 입술 선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였다.잠시 후, 그가 또 한 번 매섭게 이서의 허리를 감았다.“...” ‘하나도 안 취한 거 아니야?’‘취한 척하는 것 같은데?’ “이서야...”눈을 감은 지환의 표정이 점점 더 괴로워졌다.이 모습을 본 이서는 심장이 무언가에 찔린 듯하여 덩달아 인상을 찌푸렸다. “이서야...”살짝 벌어진 지환의 입에서는 이서의 이름만이 터져 나올 뿐이었다. 그녀가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지환이 정말 취한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음에도, 그가 자신의 손길을 느끼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이서는 그를 꼭 붙잡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요. 여기에요.”“이서야...”지환은 얇은 입술을 다시 한번 움직였지만, 표정은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았다.“나는 너를 놓아줄 수 없어.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야!” 심장이 저린 것을 느낀 이서가 그의 손을 꼭 잡았다.“나도요, 나도 절대 지환 씨의 손을 놓지 않을 거예요.” 이서의 말을 들은 것일까. 술에 취한 지환은 찌푸렸던 미간을 서서히 풀고는 조용히 잠에 들었다. 이서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흘러 소희의 환영 파티 날이 다가왔다. 퇴근 시간이 되자, 이서는 하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사람은 퇴근 후에 함께 스타일링을 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이서는 하나를 마중 나갔다. “형부는 너랑 안 간대?”뒷좌석에 사람이 없는 것을
“형부가 어떤 사람인지는 네가 가장 잘 알잖아.”속눈썹을 늘어뜨린 이서가 거리의 가로등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래, 지환 씨의 능력은 내가 잘 알지만... 그렇지만... 지환 씨가 무사했으면 좋겠어.” 두 사람은 곧 심씨 가문에 다다랐다. 마중 나온 심씨 가문의 고용인들은 이서를 한 테이블로 안내했다. 그 테이블은 4대 가문 권력자들의 자리였다. 하나는 이서의 친구였기에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2개의 가문 사람은 오지 않았는데, 그 자리에는 이서와 하나만이 있어서 다소 쓸쓸해 보였다. 하나는 맞은편에 하은철의 이름이 쓰인 명패를 볼 수 있었다. “하마터면 깜빡할 뻔했는데, 이런 자리에서는 꼭 하은철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밥을 먹어야 하잖아. 그 자식 얼굴만 생각하면 속이 메스꺼운 것 같아.” 이서가 가볍게 웃었다.“생각을 안 하면 되잖아.” “나도 생각하기 싫어. 하지만 조금만 있으면 여기로 걸어 들어올 거고, 우리 맞은편에 앉겠지. 내가 아는 하은철은... 무슨 말을 떠들어 댈지 몰라.” “이왕 여기까지 온 거, 마음을 너그럽게 가져.”이서가 하나의 어깨를 두드렸다.“나는 화장실에 좀 다녀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알겠어.”이서는 이내 화장실로 향했다. 손을 씻고 화장실을 나서려던 그녀는 허둥지둥하는 발소리를 들었다.곧이어 또 하나의 발소리가 들렸지만, 앞의 발소리보다는 훨씬 차분했다.“어때요, 일은 잘 처리됐어요?”목소리의 주인공은 젊은 여자였다. 이서는 그들이 떠난 후에 테이블로 돌아가기로 했다.이때, 밖에서 또 한 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또 다른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는데, 심히 난감한 듯했다. “이미 처리했습니다. 아가씨는 드레스를 입을 수 없을 겁니다.”“좋아요, 어쨌든 오늘은 가장 평범한 옷을 입고 파티에 참석해야 한다는 거네요!” “네.”“흥, 한 번 지켜보자고요, 어떻게 행동하는지!” 두 사람은 몇 마디를 더 나누었고,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멀어지기 시작
1분 1초의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파티 시간이 임박한 것을 본 하나가 하은철 자리를 주시하며 말했다.“하은철은 왜 아직이지?” 파티 시작은 5분 앞으로 다가온 상황이었다.이서가 고개를 저었다.바로 이때, 만연한 미소를 띤 채 2층에서 내려오는 심근영 부부가 보였다. “소희 씨도 곧 내려오겠네.”하나도 심근영 부부를 바라보았다.“그러게, 하은철이 곧 도착할 모양이야.” 하지만 이서의 마음은 하은철이 아니라, 천천히 내려오는 심근영 부부를 향하고 있었다. 한편, 도시의 다른 한쪽에서는 황량한 교외로 내몰린 하은철이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라고 했다. “도련님!”운전기사는 긴장한 표정으로 차창을 통해 자신들을 에워싼 차들을 바라보았다. 맞은편에는 총 여섯 대의 차가 있었고, 그들과 막상막하인 듯했지만, 왜인지 전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차 세우라니까요!”하은철이 차갑게 말했으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운전기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차를 세우자, 뒤따르던 차들과 그들을 이곳으로 몰아넣은 차들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하은철이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이 광경을 본 차 안의 경호원들은 매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잇달아 차에서 내렸고, 손에 든 무기를 꼼짝도 하지 않는 차 6대를 향해 겨누었다. 하지만 그 차들은 여전히 기척을 보이지 않았다. 하은철은 줄곧 그 차량을, 특히 가장 중간에 있는 포르쉐를 주시하고 있었다. “나를 여기까지 몰아넣은 이상, 직접 내려서 맞서야 하는 거 아닙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가운데에 있던 포르쉐에서 누군가가 내렸다.하지만 그는 지환이 아닌 경호원이었는데, 공손히 포르쉐 문을 열어젖힐 뿐이었다.하은철은 단번에 안에 앉은 지환을 볼 수 있었다. 비록 큰 키와 거대한 몸짓, 턱선뿐이었지만 말이다. “역시 당신이었어.”하은철이 포르쉐를 향해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는 오늘 고택에서 나오자마자 누군가 자신을 뒤따르는 것을 알아차렸다. 처음에는 단순한 미행일 것이라 생각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