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주경모는 이내 물러났다.심씨 가문이 답장받자마자 지환에게도 소식이 알려졌다.“하은철이 결심을 굳힌 모양이야. 아무래도 어떤 빈틈도 놓치지 않으려는 것 같아.” 지환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상언이 말했다.“환영 파티에서 이서한테 네 정체를 폭로하려는 건 아니겠지?” 지환이 차분한 얼굴로 눈앞에 놓인 지도를 바라보았다. 지도에는 붉은 점이 하나 있었는데, 사인펜으로 동그라미를 친 것이었다. 지도를 힐끗 바라본 상언은 그곳을 ‘공주묘’라고 불렀다. 그가 냉기를 한 모금 들이마시며 말했다.“계획은... 다 짰어?” 지환이 마침내 고개를 들어 상언을 보았다.“응, 이미 다 준비했어. 3일 뒤면 나와 하은철의 생사 싸움이 시작될 거야.” 상언은 그가 걱정되는 마음을 꾹 참았고, 위로의 말이 아닌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최근에 좋은 술을 많이 구했어. 우리가 같이 술을 마신 지도 꽤 오래된 것 같은데, 오늘은 죽도로 마셔보자.” 지환이 그를 한 번 바라보았다.“진심이야?”“진심이냐니?”상언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지환이 곧장 핸드폰을 꺼내 이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상의할 게 있어.] “에이, 그냥 술 한 잔 마시는 건데?”상언은 이렇게 말했지만, 곧바로 핸드폰을 들어 하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긍정적인 답장을 받은 그는 득의양양하게 지환에게 자랑했다. “봐, 하나 씨가 술 마셔도 된대!” 지환이 무표정한 얼굴로 상언에게 핸드폰을 보여주었다.“이서도 된대. 그런데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말라네?” “...”몇 초 후, 상언의 핸드폰이 울렸고, 그는 얼른 확인해 보았다.하나가 보낸 메시지였다.[건강이 걱정돼요. 너무 많이 마시진 마세요.] 상언은 자랑스럽게 핸드폰을 내밀었는데, 지환의 한마디에 말문이 막혔다. “내가 더 빨랐어. 하나 씨가 너를 걱정하는 것보다 이서가 나를 걱정하는 마음이 더 크다는 뜻이지.”상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두 사람이 유치한 싸움을 벌일 때, 이서와 하나는 카페 입구에서 커
“왜 인사도 못하게 해?” 하나는 소희가 몇 명의 여자들과 함께 백화점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만 보았다. 이서가 말했다.“됐어, 그럴 필요 없어. 소희 씨 옆에 있던 여자들 못 봤어? 다 심씨 가문 여자들이었잖아. 하나같이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우리가 가서 인사하면, 그 여자들이 뭐라고 하겠어.” “소희 씨가 지금은 화려해 보이지만, 힘든 상황일지도 몰라.” “폐를 끼칠 만한 일은 애초에 하지 않는 게 좋잖아.” “게다가 3일 후면 소희 씨를 만날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서두르려고 해?” “하긴... 소희가 심씨 가문 사람들한테 밉보이지만 않는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안아주고 싶어. 전보다 더 말라보이던데, 심씨 가문에서의 삶이 행복하지 않은 것 같아.”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던 이서가 말없이 시선을 거두었다. “그럼 우리는? 백화점에 안 갈 거야?” “쇼핑을 왜 안 해? 아직 소희 씨한테 줄 선물도 준비하지 않았잖아.”“나도, 어서 들어가자.”두 사람은 백화점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백화점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서와 하나는 소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심하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소희한테 무슨 선물을 해야 할까?”하나는 한 매장에서 마음에 드는 선물을 고르지 못했다. 이서 역시 빈손이었다. 두 사람은 어떤 선물을 해야 할지 몰라서 선물을 살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성대한 파티에는 특별한 선물이 어울리지 않겠는가. “3층으로 가보자!”3층에는 대형 브랜드 매장이 줄지어 있었다. 하나가 이서를 붙잡으며 말했다.“소희랑 그 여자들... 왠지 3층에 있을 것 같아.” “며칠 뒤면 파티니까 예복을 사러 오지 않았을까?”이서가 3층의 방향을 힐끗 보았다.“그 사람들은 인원이 많고 목표가 크니까 우리가 피하면 될 거야.” “그래, 올라가 보자.”하나가 이서를 끌고 엘리베이터로 들어섰다. 그들은 곧 3층에 다다랐다.과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소희의 모습이 보였다. 심씨 가문 사람
너무 유치하거나, 성숙해 보일 뿐이었다. “감사합니다만, 저는 이 옷이 적당하다고 생각해요.”소희는 모든 사람의 호의를 거절하고 에메랄드 빛깔의 긴 드레스 앞에 다다랐다.그 드레스는 온화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지나치게 눈에 띄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그녀가 주인공으로서 돋보이면서도 심씨 가문 사람들의 빛을 빼앗지는 않을 것이었다. 마치 그녀를 위해 완벽하게 맞춤 제작된 것만 같았다. “이거 한번 입어볼게요.”소희가 점원에게 말했다.점원은 매니저를 한 번 바라보았는데, 그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 한,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는 듯했다. 그 매니저는 심씨 가문 사람들의 안색을 보고 일을 처리하려 했다.심씨 가문의 사람들은 모두 이 매장의 단골손님이기 때문이었다.매니저는 그 누구보다 그들의 신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 전에 소희에게 추천한 드레스 몇 벌을 보고, 소희를 곤란하게 하려는 계획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그들 중 신분이 가장 높은 강경숙을 지켜보았다.강경숙은 심유인의 엄마였는데, 고용인이 왜 소희의 옷을 망가뜨렸는지 분명히 알고 있을 터였다.매니저의 눈빛을 마주한 강경숙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소희야, 잘 생각해. 그 옷, 입어 볼 거니?”“그냥 입어보는 건데도 생각이 필요한가요?” 소희가 물었다.“아, 깜빡 잊을 뻔했구나, 예전엔 네가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걸. 하긴, 윤 대표의 곁에서 1년 넘게 있었지만, 윤 대표도 하씨 가문 덕분에 상류 사회의 삶을 살았던 거잖니?” “그 가난한 남자와 결혼한 이후로는 1년 넘게 명품 매장을 돌아다니지 못했을 거야. 그러니까 네가 모르는 것도 당연하겠구나.” “이런 명품 브랜드에는 불문율이 하나 있단다. 입어본 옷은 모두 사야 하지.” 강경숙이 말했다. “그래요?”강경숙이 암암리에 이서를 깎아내리자, 소희의 얼굴색이 변했다.“이서 언니의 곁을 지키면서 명품 매장은 수도 없이 다녀봤지만, 그런 규칙은 처음 들어보네요.” “저를
이서가 옅게 웃었다.“소희 씨는 저의 전 동료예요. 소희 씨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인 줄 알았더라면, 고용하지 않았을 겁니다.”“즉, 저를 탓하실 일은 아니라는 뜻이죠.”“그래도 누군가를 탓하고 싶다면, 소희 씨를 잃어버렸던 그 아주머니를 탓하셔야 하지 않겠어요?” 안색이 변한 강경숙은 아직 반박할 말을 생각하지 못한 채, 이서의 다음 말을 들어야 했다. “그나저나, 환영 파티가 3일 앞으로 다가왔는데, 이제야 소희 씨 옷을 사주시는 거예요? 아랫사람들이 일을 제대로 못 하는 탓인가요, 아니면 이렇게 중요한 일을 깜빡한 탓인가요? 그것도 아니면, 옷이 망가진 건가요?” “어떤 이유든 심씨 가문의 고용인들이 자질이 부족한 것 같은데, 사모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이서가 물었다. 강경숙의 안색은 갈수록 흉해졌다. 그녀는 구구절절 심씨 가문의 고용인을 탓하는 듯했지만, 실은 심씨 가문 가족들의 잘못을 탓하는 것이었다. 강경숙은 동서들 앞에서 소희와 이서가 아직 끝나지 않은 관계라는 누명을 씌워, 소희를 경계하고 고립시키려 했다. 하지만 본인보다 한참이나 어린 이서에게 꾸중을 듣게 된 것이었다. 화가 난 강경숙이 막 입을 열려던 찰나, 이서가 먼저 말했다.“아, 방금 저더러 소희 씨 옷을 계산하라고 하셨죠? 못 할 일은 아닙니다만, 심씨 가문에 대한 소문이 안 좋게 날까 봐서 걱정이네요.” “심씨 가문이 드레스 한 벌 살 돈도 없다고 생각하거나, 드레스 한 벌조차 사주기 싫어서 소희 씨를 학대한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죠?” 강경숙의 안색이 푸르러졌다가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한참이 지나서야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았다. “허, 다들 윤 대표의 말재주가 뛰어나다고 하던데, 과연 그렇네요.” 이서가 일부러 겸손한 척 말했다.“과찬이십니다. 할 말을 했을 뿐인걸요.” 강경숙이 콧방귀를 뀌었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방금 내가 한 말은 못 들은 걸로 하세요. 농담이었으니까요.” “소희는 우리 심씨 가문의 딸이에요. 원하는 물건이 있다면,
‘도대체 누굴 믿고 저렇게 설치는 거지?’‘그 가난뱅이 남편인가?’ 도대체 누가 그녀에게 저력을 주었습니까?웃음기를 머금은 소희의 목소리가 강경숙의 귓가에 전해졌다.“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극단적인 불문율이에요. 소비자 보호 센터에 신고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 말을 듣고 안색이 변한 매니저가 황급히 강경숙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그제야 이서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소비자 보호 센터는 무슨, 그냥 한번 입어보는 것일 뿐이잖니? 매니저님, 한 번쯤은 눈 감아주실 수 있죠?” 매니저가 식은땀을 훔치며 바삐 말했다.“그럼요, 당연합니다. 여러분은 저희 매장의 귀한 손님이시니까요. 그 정도 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가씨, 옷을 입어보고 싶으시다면, 얼마든지 입어보십시오.” 소희가 웃음기 없이 말했다.“저 때문에 괜히 매장의 규칙을 깨는 거 아닌가요?”“그럴 리가요!”매니저는 곧장 점원에게 옷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소희는 이내 옷을 들고 피팅룸으로 향했는데, 아첨하는 매니저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가까스로 입어 본 옷은 너무도 만족스러웠다. “이걸로 할게요.”소희가 옷을 건네자, 매니저가 직원을 향해 말했다.“얼른 포장하세요.” 하지만 그는 강경숙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아가씨, 이 드레스는 원래 6천만원인데, 특별히 5천만원에 드리겠습니다, 어떠십니까?” “좋아요.”소희가 손을 뻗어 카드를 찾기 시작했다. 어차피 심씨 가문의 돈이니 별로 아까울 것도 없었다. 처음에는 확실히 죄책감이 들었으나, 심유인이 매일 흥청망청 사는 것을 보고는 그런 마음을 거두어들였다. ‘현태 오빠 말이 맞아. 내가 아니더라도 심씨 가문 사람들이 쓸 돈이야.’ ‘이왕 이렇게 된 거, 내가 혼자 다 써버려야겠어.’ 잠시 더듬거려 보았으나, 집을 나서기 전에 이지숙이 준 카드를 찾을 수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가방 안을 뒤지고 나서야 카드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바로 이때, 알면서도 일부러 묻는 강경숙
“왜 그러니?”강경숙의 비꼬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돈을 안 가져왔다고 해서 울 필요는 없잖니? 몇천만원 정도는 우리가 대신 내 줄 수 있어.” 강경숙의 이번 목적은 다른 심씨 가문 가족들이 소희를 향한 심근영의 마음이 겉치레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직접 움직여야 했다. 게다가 이런 행동을 함으로써 심근영의 체면을 세울 수도 있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아니에요.”고개를 들어 올린 소희의 눈동자에는 잦아들지 않은 눈물이 고여 있었다. 하지만 강경숙을 마주하니, 혐오감만이 짙어질 뿐이었다. “제가 다 지불할 수 있어요.”강경숙의 안색이 살짝 바뀌었다.“너는 돈이 없잖니?” 소희가 강경숙을 바라보았다.“저는 한 번도 돈이 없다고 말한 적 없는 것 같은데, 왜 그렇게 단정을 지으세요?” 강경숙은 안색이 변했지만 곧 핑계를 댔다.“그거야... 네가 카드를 꺼내지 않으니까 지불할 돈이 없는 줄 알았지.” “외출하기 전에 아주머니께서 제 카드로 돈을 입금해 주셨어요.” 소희는 여전히 이지숙을 ‘엄마’라고 부를 수 없어서 아예 ‘아주머니’라고 불렀다.하지만 이지숙은 ‘아주머니’라는 호칭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으며, 오히려 그녀를 아주 배려했다. “그랬구나.”흉악해진 낯빛의 강경숙은 소희를 재촉하기 시작했다.“돈이 없는 게 아니라면, 얼른 지불부터 하려무나.” 그녀의 눈빛은 전혀 달갑지 않았다.소희는 강경숙과 쓸데없는 말을 나누지 않고 월급 카드를 매니저에게 건네주었다. 매니저가 카드로 결제하는 순간, 그녀는 마음이 너무도 아팠다. 왜냐하면, 그 카드안에 있는 돈은 이서가 입금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심씨 가문 사람들이 허튼수작을 부린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서는 재무팀에게 1억원을 입금하라고 지시했다.강경숙은 소희의 카드에 정말 5천만원이 있는 것을 보고는 입술을 오므릴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이 계집애에게 망신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내
“하나야, 왜 그래? 왜 그렇게 쳐다봐?” 넋을 잃은 하나는 얼른 정신을 차렸다“어, 아무것도 아니야.” 다만, 이서의 말투를 들어보면 본인이 윤재하의 딸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물론 그 일은 이서가 기억을 잃기 전에 일어난 일이니,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맞다, 하나야.” ““왜?하나가 긴장하며 이서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들, 어디로 갔는지 알아?” “그 사람들?”“윤재하랑 성지영 말이야. 나랑 하은철의 결혼식에는 모습을 드러냈었는데, 그 이후로는 자취를 감췄어. 두 사람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 “나는 전혀 모르겠어.”하나가 고개를 저었다.“형부가 너를 구한 후로 하은철이 보복할까 봐 두려워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 같아. 소식이 전혀 없더라고.” “그렇구나.”“이서야, 두 사람을 그리워하는 건 아니지?” “아니야, 내가 왜 그 사람들을 그리워하겠어. 단지... 소희 씨가 집으로 돌아가는 걸 보고 나한테도 부모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네 부모님이라는 사람들 말이야...”하나가 이서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냥 그런 사람들은 처음부터 없었다고 생각하는 게 좋겠어. 확실하진 않지만... 그 사람들은 네 친부모님이 아닌 것 같거든.” 하나는 마지막 한 마디를 아주 작게 말해서 이서는 들을 수 없었다. “그래, 차라리 없다고 생각하는 게 나아. 그 사람들이 또 나타난다면, 예전처럼 끊임없이 나를 귀찮게 할 테니까.”두 사람은 이내 차에 올랐고, 하나가 모는 차는 호텔로 향했다. 지환의 방에 도착하니, 만취한 술꾼 두 명이 보였다. “진짜 마음껏 마셨구나?”하나는 바닥에 흩어진 값비싼 와인병들을 보자 마음이 아팠다. “이 사람들, 어서 침대로 옮기자.” “이렇게 자게 놔두면 감기 걸릴 거야.” “이 선생님을 다른 곳으로 보내는 건, 이 비서님한테 부탁하는 게 좋겠어.” 하나는 상언을 발로 툭툭 건드렸으나,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두 사람
갑자기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듯하더니, 이서가 지환의 품으로 쓰러졌다.그녀는 막 일어나려 할 때 뒤통수가 잡혔는데, 조금 전 가벼운 입맞춤은 강렬하고 지배적인 키스로 변해버렸다. 이서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고, 한참 동안 온 힘을 다 쓰고 나서야 지환을 밀쳐낼 수 있었다. “이거 보세요, 하지환 씨! 진짜 취한 거예요, 아니면 취한 척하는 거예요?” 이서가 곤히 잠든 지환을 노려봤다. 그는 어떻게 보더라도 정말 잘생긴 사람이었다. 술에 취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날렵한 턱선과 콧날, 그리고 입술 선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였다.잠시 후, 그가 또 한 번 매섭게 이서의 허리를 감았다.“...” ‘하나도 안 취한 거 아니야?’‘취한 척하는 것 같은데?’ “이서야...”눈을 감은 지환의 표정이 점점 더 괴로워졌다.이 모습을 본 이서는 심장이 무언가에 찔린 듯하여 덩달아 인상을 찌푸렸다. “이서야...”살짝 벌어진 지환의 입에서는 이서의 이름만이 터져 나올 뿐이었다. 그녀가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지환이 정말 취한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음에도, 그가 자신의 손길을 느끼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이서는 그를 꼭 붙잡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요. 여기에요.”“이서야...”지환은 얇은 입술을 다시 한번 움직였지만, 표정은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았다.“나는 너를 놓아줄 수 없어.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야!” 심장이 저린 것을 느낀 이서가 그의 손을 꼭 잡았다.“나도요, 나도 절대 지환 씨의 손을 놓지 않을 거예요.” 이서의 말을 들은 것일까. 술에 취한 지환은 찌푸렸던 미간을 서서히 풀고는 조용히 잠에 들었다. 이서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흘러 소희의 환영 파티 날이 다가왔다. 퇴근 시간이 되자, 이서는 하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사람은 퇴근 후에 함께 스타일링을 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이서는 하나를 마중 나갔다. “형부는 너랑 안 간대?”뒷좌석에 사람이 없는 것을
윤재하와 성지영, 고이서 세 사람은 여전히 이서가 치매에 걸려 윤씨 그룹을 손에 넣을 꿈에 들떠 있었지만, 정작 이서는 지환과 한 지붕 아래에서 지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고민에 빠져 있었다. 분명 병원에서 함께 지내던 때도 있어서 이번에도 별문제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집에서 같이 지내게 되니 묘하게 어색하고 불편했다. 이서는 귀를 바짝 세우고 문밖에서 나는 작은 소리 하나까지 신경 쓰면서도, 문밖에서 조금이라도 소리가 나면 그 소리가 금세 사라지길 바라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런 어이없는 감정에 시달리던 첫날 밤, 놀랍게도 이서는 오랜만에 불면증 없이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 이서는 눈을 뜨자마자 하나의 문자 폭탄을 받았다. [너, 형부랑 다시 합친 거야?] [같이 살기 시작했다던데, 화해하고 다시 시작하려는 거냐고!] [왜 그렇게 중요한 일을 나한테 말하지 않은 거야? 이 선생님이 말 안 해줬으면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나, 너한테 가장 친한 친구 아니었어?]이서는 할 말을 잃었다. 곧바로 소희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어제 두 사람이 손잡고 있는 거 보고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화해한 거였어요? 이렇게 큰일을 저한테도 숨긴 거예요?] 결국 이서는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환 씨랑 다시 화해한 거 아니야. 괜히 오해하지 마.] 그 순간, 나나도 단톡방에 뛰어들었다. [뭐라고요? 이서 언니가 형부랑 다시 화해했다고요? 대박! 들러리 자리 하나 예약할게요!]이서는 어이가 없어졌다. ‘대체 왜 내가 한 말은 안 보고 다들 자기 멋대로 상상하는 거야?’ 이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단체 영상 통화를 시도했다. “말했잖아, 화해한 거 아니라고.” 이서는‘화해한 적 없다’는 말을 특히 강조했다.그제야 세 사람은 조용해졌는데, 잠시 후에야 하나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근데 이 선생님 말로는 두 사람이 같이 산다고 하던데? 다시 화해한 게 아니면 왜 같이 사는 거야?]
2층에서 소란을 듣고 있던 윤재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1층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와는 다르게 고이서 혼자만이 만족스럽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이서는 바로 뒤에 있던 짐가방을 든 직원들에게 자리를 내주며 말했다. “들어오세요.” 직원들이 들고 있는 쇼핑백들이 모두 명품 브랜드임을 본 성지영과 윤재하는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서야, 그 많은 걸 대체 무슨 돈으로 산 거야?” 성지영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직원들이 짐을 다 내려놓고 나가자, 고이서는 여유롭게 말했다. “엄마, 아빠, 두 분을 위해 산 선물인데, 한번 보세요. 마음에 드실진 모르겠네요.” 성지영은 가까이 있던 쇼핑백 하나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LV 로고가 새겨진 명품 의류가 들어 있었다. 성지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이서야, 어디서 이렇게 큰돈을 구한 거야?” 고이서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윤씨 그룹의 돈으로 샀어요.” “뭐? 회사 공금을 횡령했다고?” 윤재하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렇게 많은 걸 샀으니 금방 들키고 말 거야. 윤이서가 내일 회사에 출근하면, 바로 알아챌 거라고! 당장 환불하렴. 윤이서한테 들키면 정말 큰 일이니까!” 고이서는 소파에 편하게 앉으며 미소 지었다. “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윤이서는 절대 모를 거예요. 이 돈, 다 합법적인 절차로 나온 거거든요.” 윤재하와 성지영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고이서는 다리를 꼬고 앉아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윤이서가 저한테 회사를 맡겼어요.” “뭐? 그게 정말이야?” 윤재하와 성지영은 깜짝 놀라며 고이서를 바라보았다. “물론 임시로 맡긴 거긴 하지만... 윤이서가 왜 저한테 회사를 맡겼는지 아세요?” 두 사람이 고개를 젓자, 고이서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오늘 윤이서가...”고이서는 오늘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성지
이서는 지환의 대답을 듣고 나서 참지 못하고 말했다. “아까 분명히 얘기했잖아요, 화해한 척 연기하는 거라고요! 지엽이도 없는 데서 굳이 연기할 필요는 없어요.”지환은 살짝 눈을 들어 이서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이서야, 아무리 토사구팽이라지만, 이렇게 빨리 쳐내는 건 좀 심하지 않아?” 더 이상 이 주제로 대화하고 싶지 않은 이서는 곧바로 소희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자료는 다 읽어봤어? 정말 심태윤이 벌인 짓이야?”“네, 자료에는 심태윤이 어떻게 가짜 증거를 만들었는지도 다 나와 있었어요. 이 증거들만 경찰에 넘기면, 심태윤은 바로 잡혀가고 말 거예요.” 이서는 소희의 말투에서 뭔가 망설임이 느껴져 물었다. “왜 그래? 혹시 심태윤이 잡혀가면 소희 씨의 양부모를 돌볼 사람이 없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 소희는 가볍게 웃었다. “언니, 저를 너무 착하게 보신 거 아니에요?”“그 사람들이 돈을 이유로 저한테 어떻게 했는지 다 아시잖아요. 그 이후로 저는 그 사람들한테 기대한 것도 없고, 미련도 없었어요. 단지 이 일이 심태윤 혼자 한 짓이 아닌 것 같아서 그래요. 분명히 배후가 있을 거라고요.” “그 배후만 찾아내도 앞으로 골치 아플 일은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심씨 가문 사람들이 이서 언니의 남편이 하 대표님이라는 걸 알게 된 후에는 더 이상 직접적으로 날 괴롭히지 않았지만, 언젠가 이서 언니와 하 대표님이 헤어진다면, 나를 몰아내려는 사람들은 다시 들고일어날 거야.’ “혹시 이미 의심 가는 사람이 있는 거야?” 이서는 소희가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마음을 정확히 읽어냈는데, 역시 자매다운 호흡이었다. 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 말을 다른 사람한테 하면 오해받을 수도 있겠지만, 언니한테는 말해도 될 것 같아요.”“제 생각엔... 강경숙이 관련된 것 같아요.” “강경숙?”“제가 심씨 가문에 돌아온 이후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이 강경숙과 심유인이잖아
“적어도 내가 다른 사람을 찾기 전까지는 그렇게 할게.” “지엽아...” “그런 표정 짓지 마.” 지엽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그러면 내가 또 희망을 품을 것 같잖아.” 이서는 입술을 꾹 다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보다 내가 먼저 가도 될까?” 이서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줘. 내 마지막 소원이야.”지엽의 진지한 눈빛에 이서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지엽은 잠시 이서를 바라보더니, 이서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기억에 새기듯 눈에 담은 후, 미소를 짓고 조용히 돌아섰다. ...한편, 고택 입구에서는 소희와 지환이 두 사람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온 사람은 지엽 혼자였다. 지엽이 혼자 돌아오는 모습을 본 순간, 지환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환은 한걸음에 다가가 지엽의 멱살을 움켜잡으며 거칠게 물었다. “이서는 어디 있어?” 지엽은 차분한 눈빛으로 지환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표님은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정말 부럽다니까요?” 하지만 지환은 지엽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이서는 어디 있냐고 묻잖아!” 마침 그때 이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환이 지엽을 몰아붙이고 있는 모습을 본 이서는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 “하지환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서가 무사히 나오는 걸 본 지환은 그제야 손을 놓았다. “너... 괜찮아?” 이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안 괜찮을 건 없지.” 지엽은 헝클어진 옷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서야, 봤지? 저 사람이 바로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널 아주 사랑하면서도 과할 정도로 집착하는 남자가 저 사람이라고.” 이서는 입술을 움직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지엽은 쓸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저 남자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분명히 보여주는 게, 내가 널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
차가 심씨 가문의 고택에 다다르자, 이서는 가장 먼저 지엽을 발견했다.지엽 역시 차에서 내리는 지환을 보고 얼굴이 굳어 버렸는데, 특히 이서가 자연스레 지환의 팔짱을 낀 순간, 지엽의 눈썹이 몇 번이나 심하게 떨렸다. “두 사람...” 지엽이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찰나, 고택의 대문이 열리며 소희가 나왔다. “오셨네요!” 몇 초 후, 두 사람이 팔짱을 낀 모습을 본 소희는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두 분... 화해하신 거예요?” 이서는 지엽의 반응을 슬쩍 살피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됐어.”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지엽이 떠난 뒤에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소희는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하나 언니는 아직 모르죠? 지금 바로 알려줘야겠어요!” 이서는 다급하게 소희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으며 말했다. “잠깐만!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먼저 소희 씨 얘기부터 하자. 지엽아, 얼른 조사한 결과부터 소희 씨한테 보여줘.”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이 함께 있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고, 이서가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소희에게 조사 결과를 건넸다. “소희 씨에게 누명을 씌운 건 심태윤이었어요. 소희 씨가 여태 친동생인 줄 알았던 그 사람이요.”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 쪽에 신경이 쏠려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그 안에 다 적혀 있으니까 잘 읽어보면 돼요...” 지엽이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서야, 잠깐 나랑 따로 얘기할 수 있을까?” 그 순간,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이서는 지환을 한 번 바라보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서가 지환의 팔에서 손을 빼내려 하자, 지환은 더욱 강하게 이서의 손을 잡았다. 이서는 당황한 표정으로 지환을 올려다보며 눈빛으로 놓아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 대표님, 제가 이서랑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면
이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정말... 같이 먹고, 같이 잔다고요?”지환은 그 말에 이서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걸 눈치채고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지만, 일부러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응, 어쩔 수 없잖아. 어둠의 호리병을 반으로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당분간은 같이 지내야겠어요.” 지환의 미소는 더 깊어졌는데, 그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하도훈은 언제 처리할 수 있어요? 설마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니죠?” 지환은 깊은숨을 내쉬며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이 다크 웹의 1위와 2위의 위치만 알아낸다면, 하도훈과 정면 승부를 가릴 수 있을 텐데 말이지...”“어둠의 호리병은 그 둘의 위치를 모르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어둠의 호리병도 순위에 올라 있는 킬러일 뿐, 그 사람들과 친구는 아니거든.” “단서도 전혀 없어요?” 지환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망하게 해서 미안하지만, 지금은 없어.” 이서는 실망이라기보다는 하도훈이라는 골칫거리를 빨리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럼, 우린 이제 어디로 가요?” “회사로.” 고개를 끄덕인 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두 사람이 탄 차는 윤씨 그룹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이서는 지엽의 전화를 받았다. “소희 씨에 대한 일은 어느 정도 해결된 거야?”이서는 기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얼른 가서 소희 씨한테 알려줘. 분명히 엄청나게 기뻐할 거야.” 수화기 너머의 지엽은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말했다.[이서야, 난 소희 씨랑 이제 막 알게 된 사이라 조금 어색한데, 네가 같이 가주면 안 될까?] 이서는 곁눈으로 지환을 한 번 바라보며 생각하다가 말했다. “알았어.” 그 순간, 이서를 태우고 있던 지환은 잠시 핸들을 놓칠 뻔했
“고이서를 바로 내쫓으면 분명 편하긴 하겠죠. 하지만 내 손에 있는 윤씨 그룹의 자산 중 일부는 원래 윤씨 가문의 것이었어요.”“그 인간들의 만행이 제대로 폭로되지 않으면, 과거 윤씨 그룹에 몸담았던 몇몇 내부 인사들은 고이서와 손을 잡고 말 거예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반드시 그 인간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지 모두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일부러 고이서를 회사의 대표 자리에 앉힌 거야? 그 여자가 빨리 본색을 드러내도록 하려고?” “네.”짧게 대답한 이서는 무심코 거울 속 자신을 보았고, 활짝 웃고 있는 자기 모습에 잠시 멍해졌다. ‘하지환 씨 앞에 서면 점점 자유로워지는 것 같아.’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는데, 이서에게 더 난감한 것은 지환이 자신의 정체를 속였던 일조차 잊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 내려오라고 한 거예요?”아래층으로 내려온 이서는 지환의 차에 올랐다. “하도훈이 이렇게 오랫동안 잠적한 이유가 뭔지 알아?”“자식을 만드느라 바쁜 거겠죠.” “맞아.”“그동안 꽤 많은 여자를 만났고, 그중 한 여자가 진짜로 임신했다더라.” 이서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그럼 이제 하도훈이 다시 우리한테 신경 쓸 여유가 생겼다는 거네요?” 지환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이서를 바라보았다. 이서는 지환의 표정을 보고 의아하게 물었다. “그 표정은 또 뭐예요? 설마... 예전에 내가 하도훈한테 여자를 붙여보라고 했던 그 작전을...”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그 임신했다는 여자, 하지환 씨가 보낸 사람이에요?” “아니었으면 한 번에 임신했을 리가 없잖아.” 이서는 입을 살짝 벌리고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럼 그 아이는 하도훈의 아이가 아닌 거예요?” 지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이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훈은 그 사실을 알면 미쳐버릴 거예요.” “미치면 더 좋지 않아?” 지환은 담담하게
모두 반대의 목소리뿐이었지만, 이서는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불만 있으면 사직서 쓰세요.” 이 한마디에, 회사 고위층들은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서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고이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오늘부터 고 팀장님이 아닌 고 대표님이 된 거예요.”‘고 대표’라는 말을 듣는 순간, 고이서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새어 나오는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다. 너무나 큰 기쁨에, 아무리 억제하려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으니 말이다.“저는 이만 가 볼게요.” 이서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사무실을 떠났고, 고이서는 문이 닫힌 후에도 몇 초간 멍하니 서 있었다.5분이 지나도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고이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서의 책상으로 다가가 나뭇결을 쓰다듬었다. ‘이제 이 모든 건 다 내 거야...!’ 고이서는 마치 꿈속을 걷는 사람처럼 대형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는 순간, 마치 가죽 의자가 아니라 구름 위에 앉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자리만 차지하면... 다시 예전처럼 호화로운 삶을 즐길 수 있을 거야. 원하는 대로 화려한 드레스를 사고, 반짝이는 보석도 망설임 없이 살 수 있고... 돈 걱정 따위는 안 해도 되겠지! 아, 내가 좋아하는 남자도 내 마음대로 만날 수 있을 거야.’ 고이서의 마음이 격렬히 요동치던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고이서는 마치 제 발 저린 도둑처럼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고, 몇 초가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온 김하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 팀장님, 회의 시간이 다 됐습니다.” ‘고 팀장’이라는 호칭에 고이서는 속으로 불쾌감을 느꼈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김하늘’이라는 이름을 새겨 두었다.‘며칠만 지나면 내가 정식으로 대표가 될 텐데, 그때 가장 먼저 잘라버릴 사람은 바로 네가 될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김하
고이서는 이서가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성지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윤이서는 사실 아주 멍청한 사람이야.”“정말 똑똑한 사람이었으면, 하은철처럼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두고, 굳이 가난한 남자를 택했겠니?” 고이서는 예전에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윤이서가 정말 그렇게 멍청하다면, 누구도 살리지 못했던 회사를 그렇게 짧은 시간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H 국의 4대 가문 중 하나로 만들진 못했을 거야.’‘그것도 혼자만의 힘으로.’‘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윤이서는 정말 멍청한 것 같아.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다니까?’‘이 회사의 대표가 된 것도 전부 운 덕분이었던 것 같아.’ “고 팀장님?”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이서는 정신을 차렸다. “네, 대표님.” 이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큰 일이에요. 오늘은 제가 한 말을 잊어버린 정도로 끝났지만, 앞으로는 계약서 서명 같은 중요한 일을 잊어버릴지도 모르잖아요.” “고 팀장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잠시 쉬어야 할 것 같긴 한데...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일은 누구한테 맡겨야 할까요?”이서는 갑자기 고이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래요, 고 팀장님! 고 팀장님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요!”고이서는 당황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 팀장님이 꼭 저를 도와줘야 해요. 고 팀장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 회사에는 저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고이서는 일부러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감히...”“별거 아니에요.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운영만 도맡아주면 돼요. 저는 회복하는 대로 다시 돌아올게요.” 고이서는 겉으로는 고개를 저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이렇게 큰 회사를 저한테 맡기셨다가 큰 문제라고 생기면 어떡하시려고요.” 비록 이렇게 말했지만, 고이서는 속으로 이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