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국에 있던 이천은 지환을 직접 대면할 필요가 없었지만, 업무를 보고할 때도 전전긍긍해야만 했다. 후에 이서의 상황이 눈에 띄게 좋아지자, 지환의 정서도 눈에 띄게 좋아졌고, 부하 직원들은 그제야 활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YS그룹에서 이서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살아있는 보살’로 모실 지경이었다. 바로 그때, 이천은 지환에게 설명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더욱 섬뜩한 장면을 맞이해야만 했다. 문밖에 서서 기다리던 이서가 갑자기 문 쪽으로 다가와 무언가를 중얼거린 것이었다.“이상하다, 분명히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이천이 곧바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문밖에 있던 이서는 다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하 선생님, 안에 계시는 거죠? 소리도 들리는데 왜 나와보지 않으시는 거예요?”이서는 말할수록 밀려오는 불안감과 조급함을 느꼈다.“설마 또 저번처럼 숨어서 저를 만나주지 않으시려는 거예요?” 지환이 이천을 노려보며 문 뒤에 숨으라고 눈짓했고, 곧이어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린 후, 지환을 마주한 이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제야 문을 여시는 거예요?”이서가 지환의 소매를 꽉 잡았다.“장희령이라는 사람이 선생님의 가면을 벗기려고 해서 화가 나신 거예요?” “저는 그 여자랑 아무런 관련도 없어요! 제가 시킨 게 아니었다고요!” 이서는 가면에 관한 일에 마음이 상한 지환이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 한 것이라 여기는 듯했다. 그녀조차도 지환의 얼굴을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말이다.지환이 웃는 듯 마는 듯하며 이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길을 마주한 이서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바보.”“지금 누구더러 바보라는 거예요?” “너.”지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바보도 아니면서 그런 말을 한 거야?” 이서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하긴, 장희령이 전에 나를 얼마나 괴롭혔는데, 우리 두 사람이 한 패일 수 있겠어.’ ‘하 선생님도 뇌
이서의 입가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는데, 지환의 ‘숨겨둔 애인’이 상상한 것과 많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서의 얼굴에 이상한 기색이 떠오르지 않는 것을 확인한 지환이 그제야 이천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천이라고 해, 내 비서야.” 이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던 지환은 곧바로 그녀의 엉뚱한 생각을 억누르려 했다. 이서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아, 비서시구나...” ‘깜짝 놀랐네.’이서를 바라보던 이천은 마음속에 억눌렸던 감정을 참지 못한 채 그녀의 손을 잡았고, 감격에 겨워하며 눈물까지 글썽였다. 이서가 당황스럽다는 듯 지환을 바라보았다. 지환의 치켜 올라간 눈썹은 이미 일직선을 이룰 지경이었지만. 이서를 만난 것에 대해 감격하느라 바빴던 이천은 자신의 오랜 친구가 또 다른 감격을 느끼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환이 인상을 찌푸렸다.‘이럴 줄 알았어. 이래서 이서와 만나지 않게 하려던 거였다고!’ 한참 후에야 이서가 입을 열었다.“선생님, 비서분이...” “이천!”지환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 이천은 그제야 자신의 추태를 깨달았고, 바삐 코를 훌쩍였다.“죄송합니다, 윤 대표님, 저...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이천은 영문도 모르는 이서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신경 쓸 필요 없어, 원래 저런 사람이거든.”지환이 자리를 내주며 말했다.“이서야, 들어와서 앉아.” 지환의 뒤로 깔끔하게 정리된 호텔 방을 본 이서가 턱을 살짝 치켜올렸다.“아니에요, 방이 엉망이잖아요.” 그녀는 이 말을 끝으로 훌쩍 떠나버렸다. 지환은 자존심이 강한 이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손끝으로 가면을 살짝 만졌고, 얼굴에 머금었던 따스함을 거두어들였다. 같은 시각.하은철과 협력방안을 정한 심동이 상쾌한 마음으로 차에 오르려 했다.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장희령이 심동을 대신하여 차 문을 열었고, 그가 앉기도 전에 물었다.“어떻게 됐어? 하은철이 협력하겠대?
심동이 핸드폰을 꺼내 보았다.그는 방금 하은철과 협력에 관해 이야기를 하느라, 방해받지 않으려고 핸드폰을 음소거로 전환해 두었다. 아마 부모님은 심동이 전화를 받지 않아서 장희령에게 연락했을 것이었다. “이상하네, 여동생을 찾으러 가셨던 거 아니었나? 그런데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오신 거지?”“설마, 벌써 내 여동생을 찾은 걸까?” 심동이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장희령이 대답했다. 그녀는 또 한 번 심동을 힐끗 바라보았다. “자기야, 이제 머리 아픈 일도 다 해결됐네.”“만약에, 그러니까 내 말은... 정말 만약에 자기의 부모님께서 잃어버렸다던 따님을 찾으신 거라면... 틀림없이 기뻐하시겠지?” 심동은 생각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당연하지.” 순간, 장희령의 눈동자가 밝아졌다.“그럼 기분이 좋아지신 자기의 부모님께서... 우리 두 사람을 허락할 수도 있는 거잖아? 그래서 말인데 자기는...”심동은 장희령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곧장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가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자기야, 이번에는 확실히 자기의 잘못도 있긴 하지만, 자기의 도움으로 하씨 그룹과 심씨 그룹의 협력을 성사시킨 셈이잖아? 이건 역사적인 순간이나 다름없어.”“내가 이 일을 우리 부모님께 알려드린다면, 두 분께서는 분명히 다른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실 거야.” “게다가 지금 두 분은 온 신경을 내 여동생을 찾는 데에 쏟고 계시잖아? 정말 만약에 내 여동생을 찾은 게 맞다면... 두 분은 틀림없이 아주 기뻐하실 거야. 그렇게만 되면, 우리 두 사람의 결혼은 두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하늘에서 별을 따달라는 부탁을 해도 흔쾌히 들어주실 거야. 아마 입이 귀에 걸리도록 좋아하실걸?”행복감을 느낀 장희령이 펄쩍 뛰기 시작했다. 그녀가 붉은 입술을 내밀며 애교를 부렸다.“자기의 부모님께서 따님을 찾으신 게 맞다면, 바로 우리의 결혼 이야기부터 꺼내봐야겠어.” “걱정할 거 없어.”심동이 장희령의 손을 꼭 잡았다.“넌 반드시 내 와이
그 사진의 주인공은 이서의 곁을 지키는 심소희였다!장희령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심소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라니.’이지숙의 웃는 얼굴을 마주한 장희령의 마음속에서는 미친 듯한 경종이 울리고 있었다. ‘내가 소지엽 씨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던 심가은은 내가 심씨 가문에 시집가는 걸 극도로 반대했었지. 그런 심가은이 죽어줬더니, 더 무서운 사람이 나타난 셈이라고!’‘게다가 이 사람은 이십몇 년 만에 되찾은 딸이잖아?’‘두 분이 심소희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거야. 이 여자가 돌아온다면, 내가 심씨 가문에 시집가려던 계획은 헛된 꿈이 되고 말 거라고!’ 숨을 깊게 들이마신 장희령이 천천히 냉정함을 되찾았고, 심동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자기야, 두 분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나는 여기서 자료를 보면서 자기의 여동생이 뭘 좋아하는지, 어떻게 이분에게 접근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테니까...” 심동이 웃으며 말했다.“그래.”“엄마, 그리고 아빠, 서재에 가서 또 다른 중요한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심근영 부부는 심동을 따라 서재로 올라갔고, 장희령은 그제야 다시 자료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다만 그녀의 눈빛에서는 거리낌 없는 잔혹함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럴 수가!’‘윤이서의 곁에 있는 사람이 심씨 가문의 아가씨였다니!’ 장희령은 죽을힘을 다하여 노력한다고 해도, 소희가 심씨 가문의 하인이 잃어버린 아이라는 사실을 바꿀 방법이 없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장희령이 고개를 들어 2층에 있는 서재를 바라보았다. ‘이야기는 대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거야?’ ‘심동 씨의 부모님께서 하씨 가문과 심씨 가문의 협력을 좋게 보셔서 우리 두 사람의 결혼을 흔쾌히 승낙하신다면 다행이지만...’ ‘혹시라도...’ 불안감을 느낀 장희령이 위층을 한 번 보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모든 가정부가주방에서 기쁜 마음으로 바삐 일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장희령은 용기를 내
왜냐하면 그녀는 좋은 집안의 출신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돌린 장희령이 아래층의 자료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누에 서린 독기는 졸졸 흐르는 물처럼 소희의 정보가 쓰인 자료를 서서히 물들이는 듯했다. ...비록 소희가 톡방에서 자기가 한턱내겠다고 약속했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현태가 끝까지 자기가 내겠다고 고집하는 바람에 모두 7성급 호텔로 향해야만 했다. 이러한 식사 자리가 익숙하지 않았던 소희와 현태는 상석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몇 번이고 일어나 이서와 지환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두 사람이 몇 번이고 움직이자, 이서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번 식사 자리는 두 사람이 마련한 거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상석에 앉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요? 그리고 우리가 상석에 앉을 기회는 앞으로도 많을 거예요. 즉, 나중에 우리 두 사람이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그러고 나서 앉아도 늦지 않을 거란 말이죠.”“대신, 식사가 끝나면 야식은 우리가 살게요.” 다른 사람들이 분분히 입을 가리고 웃었다. 특히 나나와 하나가 이서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맞아요, 맞아요, 그래봤자 우리끼리인데, 이런 거까지 따질 필요는 없잖아요? 그냥 편하게 앉아요.” 소희는 그제야 편안하게 자리에 앉았으나, 현태만큼은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았다. ‘소희 씨는 윤 대표님과 자매처럼 친하니까 상관없지만, 내가 하 대표님과 있을 때는...’ ‘늘 손님석에 앉았어. 하 대표님께서 늘 상석에 앉으셨으니까 말이야.’지환이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뭘 그렇게 긴장해? 이미 이야기 다 끝났잖아?”이 말을 들은 현태가 눈을 크게 뜨고 지환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음속에 따뜻한 감정이 스며드는 듯했다. ‘이전의 하 대표님은 이런 사소한 것조차 용납하지 않으셨을 거야.’ ‘역시 윤 대표님을 만난 후에 정말 변하신 것 같아.’ 현태가 감격스럽다는 듯 이서를 바라보았다. 영문을 알 리가 없었던 이서는 현태가 자신을 보는 눈빛이 낯익다고 생각했다.‘어디선가 뵌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은 정말이지 알아듣기 쉬운 목소리였다.아니나 다를까 문이 열리고 정인화가 모습을 드러냈다.흥분한 그녀가 소희를 가리키며 말했다.“보이지? 저기 앉은 여자가 바로 내 딸이라고!” 소희의 표정을 살핀 매니저는 대충 어떤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즉시 말했다.“죄송합니다, 손님, 이분께서 손님의 어머님이신 줄 몰랐습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소희의 마음은 무기력과 굴욕으로 가득 차오르는 듯했다. ‘지난번 일을 겪고 고향으로 돌아가실 줄 알았는데...’ ‘결국 은행까지 따라오셨었지.’이미 정인화의 고집을 경험한 적이 있었던 이서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소희 씨, 차라리 경비를 불러서 저분을 내보내는 게 낫겠어.” ‘이런 행패는 폭력적인 수단으로 막아야 하는 법이야.’ 소희가 정인화를 힐끗 쳐다보았다. ‘하지만... 어찌 됐든 나를 낳고 길러주신 분이잖아.’이내 소희가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엄마, 오셨어요?” 상황을 지켜보던 정인화가 흥분하며 말했다.“그래, 너는 이렇게 잘 먹고 잘 지내는데, 나는 육교 밑에서 자면서 컵라면이나 먹는 신세구나. 얘, 이러고도 네가 양심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거니?”모두의 시선이 정인화에게 떨어졌다. 정인화가 입고 있는 옷은 명품이 아니었으나, 육교 밑에서 숙식을 해결했다는 말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깔끔하고 단정한 것이었다. 게다가 생기 있고 윤기까지 흐르는 얼굴이 어떻게 컵라면이나 먹으며 끼니를 때운 얼굴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엄마, 배가 고프시면 식사하고 가셔도 돼요. 하지만 또 돈 때문에 오신 거라면, 저는 나가달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어요!” 이 말을 들은 정인화가 곧장 달려와 사람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오늘은 돈 이야기를 하러 온 게 아니란다. 아니, 사실 맞긴 하지만...” 믿는 구석이 있던 정인화가 말끝을 흐렸다.“나도 너랑 씨름하고 싶지 않구나. 그래, 솔직하게 말하마. 나는 널 고소할 생각이야!”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분분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이 말을 마친 정인화가 주동적으로 몸을 일으켜 자리를 떠났다. 그녀는 자리를 떠나며 족발 하나를 집어 들기도 했지만, 지난번처럼 막무가내인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정인화가 떠나고 먹을 것에 흥미를 잃은 사람들이 잇달아 소희를 위로했다. 소희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모두 걱정하실 거 없어요, 저는 정말 괜찮으니까요. 게다가 법정은 공정성을 중요시하는 곳이니까 저희 엄마를 두둔하지는 않을 거예요.” 소희가 또 한 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는 정말 괜찮아요. 그나저나 물을 많이 마신 건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소희가 걸어 나가는 것을 본 현태가 바삐 일어나 그녀를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이서가 그를 막으며 말했다. “제가 가볼게요.”하나가 이서의 말을 거들었다.“그래요, 지금은 이서를 보내는 게 나을 것 같아요.” 현태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아야만 했다. “괜찮을 거예요.”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몸을 일으켰고, 룸에서 나와 화장실로 걸어갔다. 그녀는 곧 닫히지 않은 화장실의 변기에 앉아 울고 있는 소희를 발견했다. 이서가 휴지를 꺼내 소희에게 건네주었다.당황한 소희는 급히 고개를 들었고, 이서를 보자마자 의지할 사람을 찾았다는 듯이 그녀의 품에 안겨 맘껏 울기 시작했다. 이서는 소희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지만 어떠한 말을 하지는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소희가 훌쩍거리며 말했다.“이서 언니, 저는 괜찮아요.”“단지... 엄마가 저를 고소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뿐이에요.” “게다가 이 모든 일의 원흉이 제가 동생이 노트북을 사는 데 필요한 400만원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니...” 소희가 또 한 번 두 무릎을 끌어안았다.“제가 살던 곳은 작은 마을이었어요. 그래서 남녀 차별이 아주 심했던 것 같아요.” “물론 저희 집도 그랬지만... 저는 저희 부모님이 제게 정말 잘해주신다고 생각했어요. 제 또래의 여자아이들은 동생을 위해서 본인을 희생해야 했지만, 저는 계속 공부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늘
“정말 이상하네.”이서가 말했다.“집안 사람 중에 법률을 배우는 사람이 없다면, 소희 씨의 어머니께 소송이라는 방법을 가르쳐 준 사람은 누굴까?” 비록 지금은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여서 노인들도 날마다 스마트폰을 통해 많은 정보를 습득한다지만, 소송과 같은 법적인 문제는 여전히 노인들에게 먼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노인들은 사적으로 일을 해결하는 것이 다반사였으며, 법정에 서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정인화의 의기양양한 태도는 이미 판사가 2억이라는 보상금을 그녀에게 판결한 것 같았다. 이것이 바로 이서가 소희에게 질문한 이유였다. 소희가 인상을 찌푸린 채 곰곰이 생각했고, 또 한 번 고개를 가로저었다.“친척들의 대부분은 중학교에 입학한 후에 학업을 포기했어요. 겨우 고등학교에 입학한 사람들도 대학에 합격하지는 못했고요...” “대부분 아르바이트하거나 장사하는 사람들이에요.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질만한 사람은... 전혀 없어요.”소희가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이서는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아무래도 소희 씨의 친척들이 소희 씨의 어머니에게 조언해 준 건 아닌 것 같아.” “그러니까... 저희 엄마에게 소송이라는 방법을 알려준 사람이 가족이 아니라는 말씀이세요?” 이서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그런 것 같아.”“하지만 소희 씨는 전혀 걱정하거나 신경 쓸 필요 없어. 내가 법무팀에 똑똑히 조사하라고 지시할게. 내가 이 일을 처리하는 동안, 소희 씨는 현태 씨와의 연애에 집중하기만 하면 돼.” 마지막 한마디가 소희의 미간에 서려 있던 우수를 날려버렸다. 순간, 소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두 사람이 룸으로 돌아왔을 때, 소희는 눈에 띄게 밝아져 있었는데, 식사 자리도 덩달아 활기를 띠게 되었다.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각자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차에 오르던 현태가 감격스럽다는 듯 이서에게 말했다.“윤 대표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서는 여전히 현태가 지난 1년 동안 자신의 차
“그게 무슨 말이죠? 하도훈과 관련된 것도 다 거짓말이라는 겁니까?”“그럴 리가요. 하도훈과 관련된 건 진짜예요. 물론 두 사람을 이어주려고 하는 것도 진짜죠.” 지환은 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대체 왜 우리를 이어주려고 하는 겁니까?” “그거야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만 행복해 보이니까 그렇죠. 행복한 나날만 계속된다면, 내 월급도 오를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지금처럼 두 사람을 이어줄 기회가 있는 걸 마다할 이유가 없죠. 설마, 내가 두 사람을 이어주는 게 싫은 겁니까?” “...”지환은 말이 없었지만, 어둠의 호리병은 전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알아서 한다고 해놓고 여태 아무런 진전이 없었잖아요.” “우린 지금 같이 살고 있습니다. 이게 진전이 아니면 뭐란 말이죠?”“하하, 웃기지 좀 마세요. 하도훈이 아니라면 두 사람이 같이 살 수 있었겠어요? 지금은 하도훈 덕분에 두 사람이 같이 사는 거라고요.”“나중에 이상언 씨가 다크웹의 나머지 두 명까지 찾아내면, 그땐 두 사람이 같이 살 핑곗거리도 사라질걸요?”지환은 말문이 막혔지만, 어둠의 호리병은 담벼락 위에 앉아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나한테 부탁해 보세요. 그러면 윤이서 씨를 설득해서 다시는 이혼하자는 소리 안 나오게 해줄게요.” 지환은 노골적으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어둠의 호리병은 전혀 기분 나빠 하지 않고 말했다. “그런 표정을 짓는 것도 이해는 돼요. 하지만 하 대표님이 아직 모르는 게 있다고요.”“난 단순한 킬러가 아니라 또 다른 별명을 갖고 있어요.” 지환은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게 뭐죠?” “‘여심 방화범’이요! 내 전 여자 친구들만 모아도 지구 한 바퀴는 돌 수 있을 거예요. 못 믿겠으면 내가 아이디어를 하나 줄게요. 그걸 써보고 효과가 있으면 그때 나한테 와서 부탁해도 되는 거잖아요.” 하지만 지환은 여전히 무반응이었고, 어둠의 호리병은 다급하게 따라붙었다. “아니다, 아이
우기광과의 통화를 마친 이서는 핸드폰을 내려놓았지만, 곧바로 거실로 돌아가진 않았다. ‘아무래도 지금 상태로 하지환 씨와 단둘이 있는 건 적절하지 않아.’ 이서가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던 순간, 갑자기 귀를 찢을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고, 무슨 일인지 반응할 새도 없이 총성이 이어졌다. 탕! 탕! 탕!거실에서 총성을 들은 지환은 노트북을 내팽개치고 곧장 달려 나왔고, 이서를 보자마자 단숨에 그녀를 끌어안으며 다급하게 물었다. “괜찮아?” 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멀리서 총성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고, 두 사람은 그대로 얼어붙은 듯 한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총성이 완전히 사라지고 주변이 고요해진 순간, 농담이 서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 언제까지 그렇게 끌어안고 있을 거죠?” 어둠 속에서 나타난 어둠의 호리병이 두 사람을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서의 얼굴은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고, 급히 지환에게서 떨어지며 시선을 피했다. 반면 지환은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상황이죠?” “차 한 대가 집 앞을 지나가면서 사격한 것 같아요. 아마 여기에 설치된 보안 시스템을 시험하려는 의도였겠죠.”“하도훈의 짓이에요.” 이서는 바로 허도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이제 애도 생겼으니, 후손에게 그룹을 물려줄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졌잖아요.” 이서는 비꼬는 듯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나랑 하지환 씨가 같이 있어서 망정이지... 만약 혼자였다면...’ 이서는 그다음 상황을 상상하기조차 싫었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총성은 고요한 일상에 커다란 돌멩이가 던져진 것처럼 모든 걸 뒤흔들었다. 늘 평화로운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이런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기 어렵겠지만, 하도훈은 사람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고 ‘예측 불가능한 기습’을 노렸다. 어둠의 호리병이 입을 열었다.“그쪽이 먼저 움직인 건 확실해요. 우리는 언제 또 공격당할지 모르는 상황이 된
“지금은 제가 윤씨 그룹의 대표니까요. 물론 부대표님께서 윤 대표님과 친분이 깊다는 건 잘 압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회사에서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회사에선 회사의 규정을 따라야죠.”고이서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는데, 이 말을 들은 우기광은 더 황당해졌다. “규정을 따라야 한다고요? 그럼 대체 어떤 규정을 근거로 날 해고하겠다는 겁니까?”고이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 대신 테이블 위에 해고 통보서를 내놓았다. “이만 돌아가 주시죠. 더 버티시면 보안팀을 부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고이서는 책상 옆에 놓인 전화기를 잡았지만, 우기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납득할 만한 이유를 내놓지 않으면,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우기광은 명예직이었으나, 고이서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일부러 우기광을 겨냥해 ‘본보기’로 삼으려는 것임이 분명했다. 게다가 우기광은 이서와 오래된 인연으로 잘 알려져 있었기에, 그를 해고하는 건 곧 이서를 겨냥한 행동이었다. “그럼 어쩔 수 없죠.” 고이서는 내선 전화를 걸며 덧붙였다. “보안팀이죠? 대표실로 와서 우기광 씨 좀 모시고 나가 주세요.” “당신...!” 분노로 가득 찬 우기광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고이서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말했다. “사람들 보기에 좀 그렇지 않겠어요? 괜히 보안팀에 끌려 나가는 건 보기에 안 좋잖아요.” 우기광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허, 오늘 일을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야!” 우기광이 이 말을 끝으로 사무실을 떠나자마자, 고위층 임원들이 우기광의 곁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대체 무슨 일입니까?” 사람들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우기광을 향하자, 그는 잠시 눈살을 찌푸리더니 침착하게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니 각자 자리로 돌아가서 일들 하세요. 그리고... 앞으로 당분간은 신중하게 행동해야 할 거 같습니다.” 우기광은 그렇게 한마디의 경고를 남기고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남은 사람들은 우기광
‘분명히 미쳐버린 거야!’ ‘절대 하지환 씨가 좋아서가 아니라고!’ 이서는 속으로 절박하게 외쳤지만, 머릿속에서 다른 목소리가 비웃듯이 튀어나왔다.‘과연 그럴까?’ 하필이면 그때 아래층에서 지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서야, 포도 묘목이 도착했는데, 같이 심을래?”이서는 천천히 커튼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봤고, 여전히 셔츠를 단정히 입고 있는 지환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그냥 혼자 하세요.” “그래, 그럼 나 혼자 심을게.” 지환의 대답을 듣고 있자니, 이서는 어쩐지 지환이 불쌍하게 느껴져서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어차피 나도 할 일 없으니까 같이 심어요.” 지환은 이서를 향해 환히 웃어 보였고, 햇살 아래 지환의 미소는 마치 사람을 홀리는 듯한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했다. ‘차마 못 보겠어.’ 이서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빠르게 아래층으로 내려갔지만, 지환에게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후회가 밀려왔다. 가까워질수록 지환의 짙은 향기와 넘치는 남성미가 더 강하게 느껴져서 도망칠 곳조차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서는 최대한 멀리 떨어진 자리를 찾아 지환에게 말했다. “여기... 이쪽 벽 근처에 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중에 지지대를 세우기도 편하잖아요.” 지환은 이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네가 원하는 데다 심자.” 이서는 지환이 미소를 지을 때마다 정신이 아득해져서, 애써 지환의 존재를 무시하고 급히 포도 묘목을 집어 들고 땅에 심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상일이 뜻대로 되지 않듯, 지환은 이서의 속마음을 읽지 못한 듯 다가왔고, 이서가 열심히 묘목을 심는 모습을 보고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포도는 그렇게 심는 거 아니야. 내가 가르쳐줄게.” 이서가 ‘괜찮아요’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지환이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봐, 이렇게 해야 해.” 이서는 이미 지환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온 신경은 어느새 등에
“아...” 이서가 순간 멍해졌고, 가슴 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흘러나오는 것 같아서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지환의 눈을 피했다. “저기... 밥은 먹었어요?” 지환이 나직하게 대답했다. “응, 먹었어.” 지환은 이서의 얼굴에 번진 수줍음을 보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이서가 얼굴을 붉히는 모습은 변함없이 예쁘구나.’ 그 모습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다. “포도 말고, 다른 건 필요 없어?” “필요 없어요. 그게... 아직 배가 덜 찼거든요. 먼저 가서 밥 좀 더 먹을게요!” 이서는 말을 마치기 무섭게 황급히 자리를 떴는데, 지환이 또다시 심장을 뛰게 만드는 무언가를 말할까 봐 도망치듯 달아난 것이었다. 지환은 이서가 급히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사실,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지환도 이서가 자신을 완전히 미워하고 싫어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참이었다. 문제는 지환이 이서를 속였다는 점과 그가 하은철의 작은아버지라는 사실이었다. 하씨 가문이 과거에 이서에게 큰 상처를 준 만큼, 이서는 지환과 함께 있는 매 순간 하은철을 떠올릴 것이었으니 말이다.즉, 이서가 하은철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지환과의 관계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지환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몸을 숙여 꽃을 심기 시작했다.‘그냥 흐름에 맡기라는 상언이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 ‘하지만...’지환은 흙 속에 심어진 꽃모종을 바라보며 표정을 살짝 찡그렸다.‘이렇게 애매한 상태로 마음이 흔들리는 건 싫은데...’지환은 이서와의 관계에 분명한 경계를 짓고 싶었다. 한편, 주방에서 밥을 먹던 이서는 몸은 주방에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바깥 정원으로 날아가 있었다. 햇볕 아래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지환을 본 순간, 지환의 셔츠 아래 단단한 근육과 팽팽한 가슴 근육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리고 그 위로 흐르는 땀방울이 주는 묘한 자극까지... ‘안 돼!’ 이서는 급
문이 닫히자마자 다른 임원들이 다급하게 물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왜 부대표님을 호출하는 거죠?” 우기광은 담담하게 답했다.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다들 걱정할 필요 없어요. 모두 자리로 돌아가서 일하세요. 별일 아닐 겁니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임원들은 어쩐지 일이 단순하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모두가 근심 가득한 얼굴로 서 있자, 우기광은 다시 한번 차분하게 말했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윤 대표님을 믿습니다. 그분이 고 팀장에게 그렇게 중요한 자리를 맡긴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우리는 고 대표와 일한 시간이 짧아서 그 사람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번 일로 그 사람을 섣불리 판단하는 건 옳지 않아요. 자, 여기서 이렇게 서 있어 봐야 해결될 일도 아니니, 모두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서 상황을 직접 지켜봅시다. 고 팀장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이죠.” 다른 임원들은 우기광의 설득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각자의 자리로 향했다....그 시각, 이서는 위층에서 여유롭게 아침 식사를 하던 중, 정원에서 분주히 일하고 있는 지환을 발견했다. 이서는 정원으로 내려가 다가가며 물었다. “벌써 출근한 줄 알았는데,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집안이 조용해서 당연히 지환이 출근한 줄 알았던 이서는, 지환이 정성스럽게 꽃과 나무를 손질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의아해했다. 지환은 막 심은 장미 한 송이를 다듬으며 일어섰다. “벌써 잊었어? 우리는 서로 떨어지지 않기로 했잖아. 그런데 내가 어떻게 혼자 출근할 수 있겠어?” 지환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네가 기억을 잃고 난 이후로 여긴 방치돼 있었어. 이제 네가 돌아왔으니, 이곳을 멋진 정원으로 꾸미고 싶어. 사계절 내내 꽃이 피어 있는 정원, 정말 아름다울 것 같지 않아?” 이서는 지환에게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어차피 모든 일이 끝나면, 그들과
이서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래요? 저는 왜 전혀 기억이 안 나는 거죠?] 고이서는 능청스럽게 응수했다. “대표님, 아직 충분히 쉬지 못했다는 증거예요. 좀 더 시간을 갖고 푹 쉬셔야 할 것 같은데, 회사 일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하면 되니까요.”[네, 고 팀장님이 그렇게 말해 주니 마음이 놓이네요.]이서는 다시 중얼거렸다.[내가 왜 전화했을까...?] 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고, 고이서도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전화를 끊은 후, 고이서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속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녹음해 놓길 잘했어. 본인 입으로 나더러 회사 사람들을 마음대로 해고해도 된다고 했으니까!’ ‘그렇다면 첫 번째로 할 일은...”고이서는 옆에 놓인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김 비서, 들어오세요.” 김하늘이 잔뜩 긴장한 채 방으로 들어오자, 고이서가 날카롭게 물었다. “내가 회삿돈을 썼다는 거, 김 비서가 대표님께 알린 거죠?” 김하늘은 깜짝 놀라 거의 심장이 멎을 뻔했다. “아니에요, 고 팀장님! 제가 어떻게 그런 걸 대표님께 말씀드리겠어요!!” 고이서는 몇 초 동안 김하늘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만족스럽게 다리를 꼬고는 말했다. “하긴, 김 비서한테 그럴 깡은 없겠죠. 그럼 대체 누가 내가 회삿돈을 썼다는 걸 윤 대표님께 알린 거죠?”김하늘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없이 고개만 숙였고, 고이서는 비꼬듯 말했다.“말하기 싫어요? 아, 그 사람한테 밉보일까 봐 겁나는 거예요? 그럼 말 안 해도 돼요.” 김하늘이 안도의 한숨을 쉬려는 순간, 고이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장 재무팀에 가서 이번 달 월급이나 정산받으세요.” 김하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안 돼요, 그러시면 안 돼요! 저희 집엔 부모님과 어린 동생들이 있고, 한 달에 수백만 원씩 대출금도 갚아야 하는데, 제가 직장을 잃으면 가족들이 다 굶어 죽게 된다고요. 제발 저를 내쫓지 말아 주세요!” 고이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는 법은 없었다.고이서는 한참을 망설인 끝에야 이를 악물고 전화를 받았는데, 손에 쥔 핸드폰이 그녀에겐 시한폭탄처럼 느껴졌다. 고이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수화기 너머의 이서에게 말했다. “네, 대표님.” 하지만 돌아온 이서의 목소리는 고이서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으며, 전혀 화가 난 기색을 띠지 않았다. 심지어 어딘가 즐거운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공금을 횡령했다면서요?]“그게... 제 얘기 좀 들어주세요!”고이서는 더 이상 이서의 말투에 신경 쓸 여유도 없이 급하게 해명하려 들었다.[아니요, 해명할 필요 없어요. 고 팀장님이 그 돈을 쓴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테니까요. 고 팀장님, 저는 고 팀장님을 친구로 생각하는 이상, 고 팀장님을 전적으로 믿을 생각이에요.]이서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어쨌든 회사를 위해 그 돈을 썼을 거잖아요, 그렇죠?]고이서는 얼어붙었다. ‘윤이서가 이런 말을 할 줄이야. 방금 그 말은 치매가 오지 않은 이상 절대 할 수 없는 말이었어!’ 보아하니, 이서의 병세가 꽤 심각해진 것 같았다. ‘며칠만 더 지나면 내가 윤씨 그룹의 대표 자리를 확실히 굳힐 수 있을 것 같아.’“네, 맞습니다! 사실 진행이 안 되던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그 담당자에게 큰 선물을 보냈더니 기분이 좋아졌는지 며칠 내로 프로젝트를 승인해 준다고 하더군요. 대표님, 제가 이렇게 한 게 회사 규정에 어긋나는 건 아니겠죠?”[그럼요, 지금은 고 팀장님이 윤씨 그룹의 대표니까 고 대표님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요. 제가 전화를 한 이유도 이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서였어요.][임원들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말아요. 대표 자리에 앉은 이상, 고 팀장님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요. 심지어 직원들을 해고하는 것도 가능하죠.]고이서의 눈이 커졌다. “제가 회사 직원들도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다는 말씀이세요?”[그렇다니까요? 아까 말했잖아요, 지금 회사의 실질적인 주
전화 건 사람은 우기광이었다. 이서는 우기광의 목소리를 듣고는 꽤 의외라는 듯 말했다.“웬일로 저한테 직접 전화하신 거죠?” 사실 우기광도 전화를 걸고 싶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몇몇 임원들이 회사에 우기광을 붙잡아 두는 바람에, 이서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윤 대표님, 혹시 지금 윤씨 그룹의 대표 업무를 수행하는 고이서 팀장이 공금을 횡령한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아, 그게 언제 있었던 일이죠?]이서의 어조에서는 전혀 불쾌감이 느껴지지 않았고, 되려 흥미로움이 묻어나는 듯했다. 우기광은 그런 이서의 반응에 잠시 의아해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어제 일입니다. 대표님께서 고이서 팀장에게 회사를 맡기자마자 그런 황당한 일을 저지른 거죠. 대표님, 저는 대표님께서 윤씨 그룹을 맡기 전부터 대표님과 함께 일해왔으니, 대표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표님의 능력은 누구나 인정할 정도니까요. 하지만 회사 운영을 재무팀 팀장에게 맡기신 건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이서가 웃으며 말했다.“제 결정을 무조건 지지해 줄 수 있으신가요?” 우기광은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조심스러운 어조로 답했다. [그건 대표님의 결정이 회사에 이익이 되는 경우에 한합니다. 만약 회사에 손해가 되는 일이라면 저는 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서의 미소가 더욱 밝아졌다. “그 말씀이면 충분합니다. 이제야 안심이 되네요. 하지만 고 팀장님의 일에 대해서는 개입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다른 임원들이 아무리 압박을 가하더라도 반드시 버텨 주셔야 하고요.” [대표님, 혹시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며칠만 기다리시면 알게 될 겁니다.”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고, 곧장 김하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서의 전화가 걸려 오자, 김하늘은 겁에 질린 채 전화를 받을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몇 초 동안 망설이다가 결국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김하늘은 전화를 받자마자 울먹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