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성연을 본 무진 또한 성연이 속상한 일을 일부러 들추고 싶지 않았다.성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괜찮아, 이미 다 지나 갔어. 뭐 먹고 싶어? 가자.”머릿속에서 먹고 싶은 걸 생각한 성연이 손가락으로 꼽으며 말했다.“베이징오리구이 먹고 싶어요. 지난번에 먹었던 해물죽도 괜찮았는데. 또 매콤한 마라탕과 꼬치를 먹고 땀을 푹 내면 엄청 시원할 것 같아요.”성연이 말한 요리들은 분명 모두 제각기 다른 식당의 메뉴들이었다.그러나 무진은 별다른 말 하지 않았다. 귀찮아 하지도 않았고.그저 부드러운 음성으로 가볍게 말했다. “그러자.”무진이 다가가서 성연의 손을 잡았다. 성연도 거부하지 않은 채 순순히 무진과 나란히 걸었.손을 잡고 있는 두 사람의 동작은 아무리 봐도 무척이나 다정했다.그러나 두 사람의 이런 모습을 여시화가 보았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기분이 좋지 않았던 여시화는 기분을 좀 풀고 싶은 마음에 가산에 올라와 있었다.그런데 뜻밖에도 성연을 보게 된 것이다.가산의 바위 틈 사이에 숨어서 성연이 여기 와서 뭐 하는지 볼 생각이었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무진이 온 것이다.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더니 손을 잡고 떠났다.여시화는 그들이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촬영했다.핸드폰으로 촬영한 영상을 보니 두 사람의 표정은 아무리 봐도 남매 같지 않았다.이거 송성연이 자신에게 찾아준 핑계거리가 아닐까?핸드폰을 잘 챙긴 여시화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이번에야 말로 정말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겼다.‘송성연, 설마 이번에도 도망갈 수 있을까?’‘어쩜 그리 청순한 이미지로 사람들을 모두 속이고 있는지.’ 성연과 무진이 떠난 뒤 학교 강당에서는 시상식이 열렸다.성연의 연극동아리가 일등을 했다.회장은 솔직이 너무 기뻐하지는 않으려고 했다.하지만 무대에 올라 상을 받을 차례가 되자 모두들 서로 밀어대고 난리였다.눈도 채 못 뜬 모양의 회장은 어찌 그리 무기력한지.회장이
이튿날 학교 게시판에는 성연과 무진의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두 사람의 친밀한 모습을 담은 사진을 올린 게시물 작성자는 악의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게시판에는 모두 성연을 비방하는 말들로 가득했다.게시물 주인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송성연은 정말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네요. 앞에는 진우진, 뒤에는 또 학교 이사장을 끼고 있으니 말이죠. 재단 이사장이 대부호이니 명단에 올리고 싶었나?]이후 성연은 허영심에 가득 찬 인물로 전교에 소문이 짝 퍼졌다.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서로 각자의 주장을 고집했다. 그 와중에도 많은 학우들이 성연의 편에서 말하기도 했다.[나는 송성연이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해. 함께 지낸 사람들은 모두 알아. 송성연은 정말 괜찮은 애야.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한단 거야.][위에서 송성연을 위해 합리화하는 애는 누구야? 송성연은 돈만 밝히는 쓰레기에 불과해. 정말 징그러워.][쯧쯧, 생각할수록 무섭다. 너희들 제발 생각이라는 걸 좀 해. 송성연은 얼마 전에 시골에서 전학왔어. 그런데 어떻게 학교에서 그렇게 제 마음대로 날뛸 수 있었겠어? 뒤에 저렇게 든든한 백이 있었던 거야. 한 번에 한 사람씩 꼬드기는데 확실히 우리가 어떻게 건드릴 수 있겠어?] [그렇게 말하니 꽤 일리가 있는 것 같지만, 송성연이 정말 재능이 뛰어나다는 건 왜 말 안해? 들으니 연극반에 큰 위기가 있었을 때 모두 송성연이 나서서 해결했대.][재능이 있으면 뭐 어쩌라고? 가치관이 잘못된 사람을 이렇게 치켜세우다니 정말 무섭다.]비록 성연의 입장에서 말하는 댓글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분위기에 편승해서 성연을 비방하는 글들이다.교실로 가는 계단에 걸터앉은 여시화는 휴대폰으로 게시판에 올라온 글들을 읽으며 웃음을 지었다.며칠 이래저래 농간을 부리다 드디어 마음에 드는 일이 하나 생겼다.핸드폰을 쥐고 있는 여시화의 눈에 웃음이 한가득이다.‘사람들에게 보여줄 거야. 송성연이 어떤 인간인지.’‘특히나 진우진이 성연의 정체를 알게 되면 분
오전 중에 소문은 이미 전교에 다 퍼졌다.거의 모든 사람들이 성연의 행적을 알게 된 셈이다.자신의 목적이 이미 달성되었다는 생각에 여시화는 즐거운 표정으로 휴대폰을 주시한 채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드디어 지난 번의 수모를 갚을 수 있게 되었다.성연은 늘 자신과 맞서려고 했다.자신의 모습은 돌아보지도 않고서!점심때 식당에서 여시화와 가까이 지내는 여자애들 몇이 성연의 얘기를 하고 있었다.“새 이사장을 꼬시다니, 송성연 정말 대단한 능력이야. 어린 나이에 벌써 이렇게 타락해서는 원, 쯧쯧."“난 진즉 알아봤어. 송성연, 행실이 단정하지 않은 애라는 것 말이야. 매일 쟤 엉덩이를 쫓아다니며 ‘여신’이라고 하는 애들 도대체 뭘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아마도 말이지, 다들 송성연 외모에 현혹된 게 아닐까? 이제 소문이 다 났으니 송성연 명성도 구려지겠지. 그래도 송성연 옹호하는 애들이 있을까?”“시화야, 너 이번 계획 정말 절묘했어. 아이들에게 진상을 제대로 보여주다니.”“나는 단지 사실을 밝혔을 뿐이야. 진실은 언젠가는 드러나게 되어 있어.” 여시화의 입 꼬리는 올라가서 내려오질 않았다.여자애들의 말을 들으니 여시화는 마음이 편안해졌다.‘송성연은 예쁘긴 하지. 그래서 예쁘면 뭐? 어차피 행실이 나쁜 더러운 x일뿐인데.’마침 성연도 밥을 먹으러 식당에 왔다. 여시화의 친구들이 성연을 보고는 고의로 음성을 높여 떠들어댔다.듣고 있던 성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잠자는 호랑이의 코털을 건드려? 지금 날 무슨 물러 터진 홍시 취급하는 거야?’식판을 들고 지나가던 성연이 일부러 그 앞에서 넘어지는 척 비틀거리는 순간 식판이 날아갔다.그리고 아주 교묘하게 떨어지며, 식판에 담겼던 음식, 국이 한창 떠들어대던 여자애들에게로 쏟아졌다.식당 안이 난데없는 비명 소리로 가득했다.그 자리에서 멍청하게 보고 있던 여시화는 순간 놀라 얼어버렸다.그리고, 여시화는 자각하지 못했다. 흘러내린 국이 그녀의 화장을 싹 지워버리며 원래의 얼굴을 여실히 드러냈다
성연이 고의로 그랬다고 생각한 여시화는 화가 치밀었다.어찌 그토록 공교롭게 자신들에게 떨어트릴 수 있단 말인가?그러나 성연의 사과 태도는 아주 진지해서 진심으로 보였다. 식당에 있던 아이들 대부분이 성연의 말을 믿는 것 같았다.음식물 냄새가 여시화의 몸을 뒤덮었다. 흘러내리는 국물과 피부에 달라붙은 끈적한 기름기로 견디기가 힘들었다.그제야 여시화는 자신을 보고 있는 아이들의 시선을 눈치챘다.자신을 보는 표정들이 뭐라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웠다.여시화가 눈썹을 찌푸렸다.‘얘네들 눈빛이 왜 이래?’성연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저……여시화, 네 속눈썹이 떨어졌어. 그리고 쌍꺼풀 스티커도 사라졌어.”여시화 본인은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모를 것이다.미적 감각을 유지할 수 있을 줄 알았기에 성연과 그렇게 대립각을 세웠을 터.성연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대경실색을 한 여시화가 황급히 얼굴을 가리고 달아났다.화장 아래 자신의 모습은 자신만이 알고 있었는데.‘눈에 띄면 정말 큰일이야.’‘그동안 어렵게 유지해 온 이미지도 끝이야.’여시화는 자신의 동작이 이미 충분히 빠르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여시화보다 더 빠른 손이 있었다. 누군가 여시화의 본 얼굴을 게시판에 올렸다. 합성도, 필터링도 없이. 화장이 지워진 여시화의 피부는 커다란 모공에 얼룩덜룩했다.그리고 가짜 쌍꺼풀에 주근깨투성이 볼이라니.이 모습을 이전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전혀 다른 사람이다.예쁜 여시화의 얼굴은 완전히 화장발이었다.정말 많은 사람들을 속였다.심지어 여시화를 따라다니던 애들도 속았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저 수줍어하는 얼굴에 속았다는 생각만 해도 먹은 음식을 토하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나. 여시화도 정말 만만치 않아.][화장 솜씨가 거의 입신의 경지야. 평소 여시화가 저 얼굴로 거들먹거리던 모습을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지금 한 대 얻어 맞은 거 맞지? 그것도 정말 시원하게 말이지.][이게 바로 너네들이 말하는 여신이야. 아이고, 이게 랜선
성연은 처음엔 그저 여시화에게 따끔한 맛만 좀 보여줄 생각이었다.여시화의 악취 나는 입을 좀 씻겨주고 싶을 뿐.동시에 자신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걸 여시화에게 알려 줄 생각도.하지만 이런 결과가 될 줄은 몰랐다.성연은 매우 만족했다.오후 내내 여시화의 추악한 이중성에 대한 소문이 성연의 것을 이미 덮어버렸다.여시화의 본 모습이 폭로되자 다들 이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에 반해 성연에 관한 소문들은 이미 언급할 가치가 없는 듯 보였다.심지어 어떤 애들은 성연의 얼굴을 게시판에서 대조까지 했다.역시 노 메이크업, 노 필터. 그 결과, 여시화는 송성연과 비교도 되지 않음이 증명되었다.성연은 평소 화장품을 좀 하는 편이지만 학교에 있을 때는 화장을 하지 않는다.깨끗하고 보드라운 피부는 아무리 확대를 해도 모공 하나 보이지 않았다.정말 여자애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피부결이다.두 장의 사진을 비교해보면, 성연은 마치 하늘의 밝은 달과 같다. 그러나 여시화는 한줌의 흙 같이 느껴질 정도이니. 마치 존재의 이유가 바로 성연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인 듯하다.하지만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도 많았다.[이런 피부가 진짜 존재한다고? 게시자가 함부로 만들어 낸 거 아냐?][내 말이. 조작한 것 같지 않아? 지금 이런 피부를 가진 건 아마 아기들뿐일 걸?][근데, 너무 비교 되지 않아? 여시화가 이렇게까지 추해지는 날이 올 줄은 몰랐어.]성연을 의심하는 글도 게시판에 보였다.결국 성연의 짝이 나섰다. 게시판 아래에 실명을 까며 글을 올렸다.[나는 송성연의 반 짝지다. 매일 이런 미인과 같이 지내다 보니 정말 내가 끝까지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다. 진짜 내가 증인이다. 송성연의 피부는 정말 너무 섬세하고 보드랍다. 사진에 보이는 피부 상태보다 훨씬 더 좋다. 매일 미인의 옆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너희들도 짐작할 수 있을 거다. 송성연은, 진짜 타고난 미인이다. 화장으로 만든 여시화의 미모는…… 일초면 원래 대로 돌아가 버리겠지만.]
저녁에 수업이 끝나자 집으로 돌아갈 생각에 성연이 학교를 나왔다.늘 하던 대로 학교 근처 구석에 세워진 승용차로 갔다. 오늘도 운전기사가 골목 입구에서 성연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성연은 차문을 열고 강씨 집안의 승용차에 올라탔다.묵묵히 성연의 뒤를 따라 가던 진우진이 이 장면을 보았다.진우진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처음부터 그 소문을 믿지 않았던 그는 좀 늦었지만 확실하게 말하려고 성연을 따라온 것이다.자신은 성연을 믿는다고.그런데 송성연이 고급승용차에 타는 걸 직접 눈으로 목격한 것이다.진우진의 집안도 괜찮은 편이었다. 그래서 자연히 알았다. 저 승용차는 결코 돈이 있다고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는 걸.‘송성연이…….’진우진이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송성연이 돈을 쫓는 여자애라는 소문은 처음부터 사실이었다.그는 속으로 분개했다.‘애초에 내가 눈이 멀었지.’‘어떻게 저런 아이를 좋아했을까?’사실 성연은 자신을 뒤따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진우진은 너무 숨기지 않았다. 성연이 이 정도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요 몇 년 동안 헛수고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성연은 신경 쓰지 않았다.차를 타고 떠날 때 진우진이 기둥 뒤에 숨어 있는 것도 보았다.여전히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진우진을 알게 되면서 이렇게 귀찮은 일들이 생길 줄 진즉 알았더라면차라리 진우진이라는 애와 알고 지내지 않았을 것이다.여시화는 진우진을 좋아하면서도 감히 말 못하고 있다가 결국 자신에게 분풀이한 게 아닌가.그 화풀이를 자신이 감당할 이유가 없었다. 자신과 진우진 사이에 뭐가 있다고.진우진이 자신을 게시판에 올라온 소문 그대로라고 믿는다 해도 상관없었다.처음부터 진우진과는 친하지도 않았으니까.성연의 눈에는 진우진은 게시판의 그 아이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어쩌면 진우진은 자신에 대해 아주 아주 약간 감정이 있을 지도 모른다.하지만 마침 이런 모습을 보았으니 진우진을 단념시킬 수도 있을 터.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다.성연이
성연의 대답에 무진은 속으로 좀 실망했다.‘이 아이는 여전히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아.’그러나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저녁을 먹은 후 무진은 서재로 가서 업무를 처리했다.성연이 늘 그렇듯 게임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천둥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우르릉 쾅쾅, 우르릉 쾅쾅.” 천둥과 번개가 소리가 꽤나 대단했다. 마치 폭우가 쏟아질 듯한 기세였다.성연은 개의치 않았다. 이런 천둥소리는 성연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잠시 놀다가 지친 성연이 방으로 돌아가 쉬었다.뛰어난 수면의 질을 가진 성연은 침대에 눕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중간에 깨지 않을 것이다.막 달콤한 수면을 취하고 있던 성연이 한참동안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깼다.성연이 눈을 가늘게 떠서 보니 그제야 평소 자신의 곁에서 자고 있어야 할 무진이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성연은 미간을 찌푸리고 일어나 문을 열었다.집사와 손건호가 문 밖에서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성연이 일어나 나오는 것을 본 집사가 얼른 말했다.“사모님, 어서 가서 도련님 좀 봐 주세요. 사고가 있었습니다.”당황한 성연이 물었다.“무슨 일이에요?”저녁에 집에 돌아왔을 때 무진은 멀쩡했다. 성연과 게시판 이야기도 나누었고.그런데 집에 멀쩡히 있다가 어떻게 사고가 난다는 말인가?그러나 집사와 손건호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본 성연의 눈도 초조함 기색을 띠기 시작했다.성연은 곧바로 집사와 손건호를 따라 서재로 달려갔다.그런데 서재 문이 안에서 잠겨 있었다. 문 앞으로 다가가니 안에서 물건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무언가 쓰러진 것 같았다.성연의 눈에 의아함이 들어찼다. 손을 들어 힘껏 문을 두드렸다.“무진 씨, 무진 씨. 괜찮아요? 어서 문 열어요.”서재 안은 다시 조용해졌고, 무진은 대답이 없었다.상황이 이상함을 느낀 성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성연을 쳐다보던 손건호는 이 일에 대해
“그 당시 아직 어렸던 보스가 부모님이 외출하시지 못하게 말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전 대표님과 사모님은 집을 나서셨지요. 그 후, 비가 오는 밤은 보스의 발작을 자극하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다만, 사모님이 오신 이후로 한동안 발작을 일으키지 않았는데, 오늘 밤 다시 발작이 시작…….”손건호의 안색이 완전히 굳어 있었다.무진은 부모님의 비행기 사고 과정에 함께 있지는 않았지만,비가 오는 밤이면 늘 그 장면을 떠올리게 되었다. 부모님의 사고 소식이 그에게 준 타격은 두말할 것 없이 치명적이었다.요 몇 년 동안 줄곧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받아왔지만 끝내 악몽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줄곧 힘들게 버티며 고통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성연이가 온 이후 무진은 힘들게 고통을 참을 필요가 없었다.하지만 성연으로 인한 효과가 예상치 못하게 효력을 잃은 듯했다.손건호의 설명을 들은 성연의 안색도 그리 좋지 않았다. 손건호를 돌아본 성연이 물었다.“심리 상태가 안 좋은 걸 알면서 멍하니 서서 뭐 하는 거예요? 비상 키 가져오세요.”성연도 어떤 때는 심리적인 고통이 신체적인 상처에 의해 더 사람을 괴롭힐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무진은 지금,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는 중이었다.아마 그는 부모님의 비행기 사고가 발생했던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을 것이다.부모님이 자신 앞에서 죽는 모습을 두 눈 뜨고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지켜보고 있을 게, 가히 짐작되었다.성연의 말을 들은 집사가 대답했다.“작은 사모님, 우리에겐 예비용 키가 없습니다. 이 서재는 도련님만 열쇠가 가지고 계십니다. 이 자물쇠도 특수 제작된 것이라 부수기 어렵습니다.”무진은 자신의 상황을 알게 된 후 스스로 이런 환경을 만들었다.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까 봐 방에 자신을 가두는 선택을 한 것이다.발작이 끝나면 무진은 거의 죽다 살아난 상태였다. 서재도 완전히 아
“얘들아, 너희들은 어느 집 아이들인데 지금 회사에 있는 거니?”온화한 모습으로 살짝 몸을 숙인 채,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예민주의 모습에는 어떤 허세도 보이지 않았다.두 아이는 이전에 이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아빠와 사이가 좋은 모습을 본 데다가, 이렇게 부드러운 태도인 걸 보고는 무의식적으로 ‘우호적’이라는 꼬리표를 붙였다.흥분한 표정으로 초롱초롱한 눈빛을 빛내면서 사진이 가장 먼저 대답했다.“저희는 여기를 구경하고 싶어요.”사진은 여린 목소리로 거절할 수 없는 이유를 말했다.고개를 살짝 끄덕인 예민주는 고개를 돌려서 무진을 한 번 보았다. 무진은 복잡한 눈빛으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그래, 그럼 아줌마가 너희들 회사 구경을 시켜줄까?”“이제 곧 점심 시간이야. 너희들도 회사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 있어. 아줌마가 맛있는 걸 사줄까?”예민주의 제안은 시원시원하고 아주 열정적이라서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어느새 다가온 무진이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말했다.잘 이해가 되지 않는 듯한 목소리였다.“민주야, 이 두 아이는 내력이 분명하지 않아. 그렇게 애들을 여기 남겨두고 놀게 하다가, 무슨 일에 엮일 지도 몰라.”“괜찮아요. 이 두 아이가 무슨 나쁜 생각을 가지고 있겠어요. 그저 단지 여기를 지나다가 궁금해서 좀 더 구경하고 싶을 뿐일 거예요.”예민주가 시간을 보니 마침 12시가 다 되었다.“같이 한 바퀴 돌아볼래요? 오빠도 한참동안 나하고 함께 있지 못했잖아요.”철이 든 모습의 예민주가 기대에 찬 시선으로 무진을 바라보았다.결국 무진의 마음속 예민주에 대한 미안함이 이성에 승리를 거두었다.두 아이는 지금도 무진에 대해서 희망을 품고 있었다.‘사무실에 있을 때는 우리한테 냉담했지만, 결국 우리 친아빠야.’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잘 알지 못해서 잘못했던 부분이 있을 수도 있어.’모두 처음 겪은 일이기에, 잠시 동안 기분이 다운되어 있었던 아이들도 마음을 놓았다.‘어렵게 왔는데, 아빠하고 좀 더 있을
그렇게 친했던 두 사람이기에, 낯선 사람처럼 행동해야 하는 심정이 얼마나 잔인한지 알 수 있었다....손건호는 지난 5년 동안 여전히 무진의 곁을 따랐다.당연히 무진의 성질을 잘 알고 있다. ‘지금 만약 아이들이 여기에 더 오래 머무른다면, 일을 수습하기가 곤란해질 거야.’결국 손건호는 서한기의 눈빛을 피해서 다른 곳을 보면서, 그들 두 사람만이 들을 수 있게 작은 목소리로 재빨리 말했다.“빨리 가지 않고 뭐 해? 잠시 후에 경비원이 오면 처리하기 곤란하단 말이야.”약간 떨어져 있는 무진을 바라보는 서한기의 그윽한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과 더불어 여전한 존경심도 담겨 있었다.‘지금은 일을 크게 해서는 안 돼. 지금 가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겠지.’여전히 억울한 표정의 두 아이를 바라보자, 서한기는 자책감이 들었다.그러나 결국 감정을 억누르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이들을 위로했다.“사진아, 사무야, 우리 가자.”세 사람은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무진 오빠, 저 두 아이는 누구에요?”바로 그때, 서한기와 아이들이 막 떠나려고 했을 때, 다른 한쪽에서 한 여자가 이쪽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무진의 곁에 와서 서한기를 바라보면서, 아리따운 여자는 자연스럽게 무진의 팔짱을 꼈다.요염한 눈길로 두 아이를 바라보던 여자는, 두 아이의 모습을 자세히 보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주변의 공기마저 순식간에 싸늘해진 듯했다.‘저, 저 두 새끼는 무진 씨하고 똑같이 생겼어. 완전히 무진 씨 판박이야!’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예민주의 머릿속도 순식간에 하얗게 변했다.지금 예민주는 표정을 전혀 컨트롤할 수가 없었다.분노와 당황스러움, 증오와 초조함이 교차했다.‘왜?’‘송성연은 그렇게 절망 속에 있으면서도 왜 여전히 이 두 아이를 낳는 걸 선택했지?’‘강무진이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을 포기한 뒤로는 더 이상 아무 접촉도 없었던 게 분명해.’‘애초에 그렇게 단호하게 헤어졌기 때문에, 송성연은 당연히 절망 속에 빠졌어야 해. 더 이상 강무진에게
말을 마친 사무는 옆의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뚱뚱한 남자를 재빠르게 발견했다.“아저씨, 바로 저 사람이 사진이를 이렇게 다치게 했어요!”사무는 우렁찬 목소리로 방금 엘리베이터를 나온 남자를 가리켰다.팍!쿵!서한기가 재빨리 깔끔하게 손을 쓰자, 남자의 커다란 몸은 바로 바닥에 쓰러졌다.심지어 미처 반응하지도 못한 채, 남자는 온몸의 뼈마디가 어긋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이 아이들은 네가 감히 건드릴 수도 감당할 수도 없어! 꺼져!”피에 굶주린 듯 핏발선 눈으로 쏘아보면서, 서한기가 나지막하게 외쳤다.쓰러져 있던 남자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온몸의 통증을 느끼면서 무의식적으로 일어나 도망치려고 했다.그러나 막 일어나려던 남자는 등줄기의 시큰한 통증에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아!”다시 몇 번이나 일어나려고 했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결국 주저앉은 채 고통스럽게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이때 다른 쪽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열렸다.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무진은 자연스럽게 이쪽의 소동에 시선이 향했다.사람들 속에서 처참한 모습의 마케팅팀 팀장과, 그 앞에 서서 온몸에서 싸늘한 기운을 풍기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미간을 찌푸린 무진은 고개를 살짝 돌려서 뒤를 바라보았다.“아이들이 아직 안 갔어?”그리고 무진이 엘리베이터 문을 나설 때, 손건호는 여러 해 동안 보지 못했던 서한기를 알아차렸다.두 사람은 마치 텔레파시라도 통한 듯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그들 두 사람은 예전 진성 조직의 공동 대장이었다. 여러 해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전우인 것이다.그러나 지금은 지난 일 때문에 서로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이 가슴이 찢어질 듯한 느낌도 그들 두 사람만 알 수 있을 뿐...왜인지는 모르지만 서한기의 망설임이 느껴지자, 무진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약간 초조한 기색으로 말했다.“아직도 안 가보고 뭐 해?”‘저 두 아이는 뭔가 나와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아.’머릿속에서 어떤
아직도 물린 곳에 통증을 느끼고 있던 마케팅팀 팀장은, 갑자기 사무가 이런 모습으로 자신에게 다가오자 무의식적으로 심적으로 위축되었다.‘어린 애가 어떻게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지?’‘방금 전에 행동은 치밀하게 생각하고 한 건가?’자신도 모르게 당황했던 마케팅팀 팀장은 곧 한숨을 돌렸다.‘내가 뭘 무서워하는 거야? 기껏해야 아이일 뿐인데 뭐 별다른 일이야 있겠어?’이렇게 생각하자 곧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변했다.“이 조그만 녀석이 어른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이렇게 버릇없게 말이지!”사무는 코웃음을 치면서 냉랭하게 말했다.“너는 그런 말 할 자격 없어!”“이 버릇없는 새끼가 감히 욕을 해! 보아하니 너는 혼나는 걸로도 부족하겠어!”두 사람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을 때, 줄곧 말을 하지 않던 무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됐어, 너희 두 아이는 빨리 나가거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 때문에 너희 엄마가 회사의 징계를 받게 돼.”사무는 무진의 얘기하는 모습을 힐끗 보았다. 전혀 감정이 없는 눈빛으로 볼 뿐.‘자기 아이가 다른 사람에게 ‘맞는’ 걸 보면서도 이렇게 냉정할 수 있는 이런 아버지라니! 얼마나 마음이 독한 사람인지 충분히 알겠어.’‘오늘 아버지를 찾아온 건 결코 잘한 선택이 아닌 것 같아.’사무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저 마케팅팀 팀장을 흘겨보기만 했다. ‘얼마나 더 웃을 수 있는지 보겠어. 조금 있다가 한기 아저씨가 시원하게 혼내 줄 테니까!’조심스럽게 여동생을 일으켜 세운 사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여동생을 바라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사진아, 가자!”사진도 지금은 여기에 더 있고 싶지 않았기에, 이를 악문 채 오빠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입구로 걸어가던 사진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책상 앞에 앉은 남자를 쳐다보았다.무진도 마침 사진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무진은 왠지 가슴이 아팠다.그러나 무진이 움직이기 전에, 고개를 돌린 사진은 오빠와 함께 바깥으로 나갔다.마침내 소동이 마무리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이 두 아이는 쌍동이겠지. 한 네다섯 살 정도 된 것 같아.’‘아이들 나이와 지금 상황을 보면...’‘혹시 이 두 아이가 정말 보스와 사모님 사이의 아이인 거야?’‘사모님이 낙태한 뒤 출국한 게 아니라, 모두를 속이고 아이들을 낳은 건가?’너무나 엄청난 상상이라서, 손건호는 곧 뭔가 큰일이 닥칠 거라는 느낌마저 들었다.지금은 원래 마케팅팀 팀장이 보고하면서 무진의 눈에 들 기회를 찾던 중이었다.그러나 오늘 보고는 그리 순조롭지 않았다. 무려 30분 동안이나 저기압인 대표의 기세에 눌려 있던 상태였다.‘지금 대표의 골칫거리를 해결하면 칭찬을 받겠지.’눈빛을 빛내던 남자는 손을 비비면서 재빨리 앞으로 나왔다.“너희들 여기가 어딘지는 알아? 빨리 나가지 않고 뭐 해!”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면서, 마케팅팀 팀장이 사진의 여린 팔을 꽉 쥐었다.“어린 애들이 함부로 아빠라고 거짓말이나 하다니, 도대체 부모가 가정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야? 이게 얼마나 심한 장난인지 알기나 해?”마케팅팀 팀장은 거칠게 아이의 팔을 잡아당기면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무방비 상태였던 사진은 그저 팔이 꽉 잡힌 채 끌려갈 뿐이다.사진은 본능정으로 몸부림쳤다.하지만 어린아이가 어떻게 어른의 힘을 당해낼 수 있을까?사진의 발버둥은 결국 전혀 무의미한 몸짓에 불과했다.“오빠, 오빠, 사진이 너무 아파!”“아아, 아파...”팔의 통증에 몸부림치던 사진은 기어이 기회를 틈타서 남자의 팔을 물었다.갑작스럽게 팔에 통증을 느끼자, 남자는 아이들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두 아이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면서 나뒹굴었다“아! 이 계집애가 감히 나를 물었어!”잔뜩 살이 찐 남자가 불쾌한 표정으로 나지막하게 으름장을 놓았다.갑자기 바닥에 떨어졌지만, 사무는 별다른 이상 없이 일어섰다.하지만 팔을 물린 남자는 사진을 떨쳐내려고 거칠게 밀쳤다.결국 힘에 밀린 사진은 의자에 이마와 팔을 부딪혔다. 부딪친 곳은 바로 빨갛
사진은 행복한 표정이었다. 어제 오빠 컴퓨터에서 아빠의 사진을 봤을 때도 천하제일 미남인 아빠 모습에 감탄했지만!오똑한 콧날에 굳게 닫힌 두 입술, 단정한 헤어 스타일에 온몸에 남성미가 가득한 건장한 모습!지금 그곳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경외심이 들면서 엄숙한 분위기였다. 이 모든 아우라는 바로 책상 앞에 앉은 무진에게서 비롯된 것이다.‘그야말로 완벽한 남자야!’‘우리한테 이런 멋진 아빠가 있다니!’ 지금 사진은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아빠!”두 아이는 곧바로 책상 앞으로 달려갔고, 사진이 크게 외쳤다.가뜩이나 일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중에 ‘아빠’라는 소리가 들리자, 무진은 미간을 점점 찌푸리면서 그윽한 눈빛으로 두 아이를 훑어보았다.“어디서 온 애들이야? 언제부터 우리 회사가 아이를 데리고 출근할 수 있게 됐지?”불쾌한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무진은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뒤로 젖혔다.“게다가 아무 데서나 아빠라니?”기쁨에 겨워 아빠에게 다가가려던 사진은 무진의 바로 말에 걸음을 멈추었다. 아이의 눈에서는 순식간에 눈물이 솟아났다.애절하게 흐느끼면서 사진이 말했다.“아빠, 바로 우리 아빠잖아! 우리는 오늘 특별히 아빠를 찾으러 온 거야.”아이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자, 무진은 마치 가슴속이 꽉 막힌 듯했다. 당황한 무진은 얼른 내선전화의 수화기를 들었다.두 아이를 힐끗 쳐다보면서 말하는 무진의 목소리에는 왠지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나는 너희들 아빠가 아니야. 거짓말하면 안 돼. 얼른 너희 엄마한테 가야지.”잠시 후, 수화기에서 시원스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네, 보스.]무진은 다시 두 아이를 바라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들어와서 두 아이를 데려가.”[아이들요?] 손건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무의식적으로 반문했다.“응.”무진은 단지 한 마디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아빠는 우리가 그렇게 싫어요?”갑자기 사진의 옆에 서 있던 남자아이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앳된 얼굴이지만
사무가 눈을 치켜뜨면서 말했다. “그래야 해?”다시 한 번 우유 막대사탕을 입에 넣은 채, 사진이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그럼, 오빠 그건 아직도 분명하지 않은데?”“하지만 내 말은 사실이야, 설마 네 오빠가 뛰어나지 않다는 거야?”사무는 자신이 지금 얼마나 진지한지 전혀 느끼지 못했다.잔뜩 인상을 찌푸리던 사진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손사래를 치면서 다시 빌딩을 바라보았다.“우리 그래도 일을 해야지. 사람들이 우리가 아빠를 찾으러 올라가게 할까?”웃음을 거둔 사무는 입술을 꼭 닫은 채 앞을 보면서 진지 모드로 돌입했다.“당연히 우리를 못 들어가게 할 거야.”“그럼 어떡해?”사진은 바로 풀이 죽었다.‘이미 집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아빠 회사에 들어가지 못하는 곤란한 일이 생기면 정말 피곤해.’다음 순간.사진은 익숙한 오빠 손에 이끌려서 따라갔다.사무가 앞에 서고 사진은 따라서 함께 빌딩의 옆쪽의 작은 문으로 걸어갔다.입구에 선 두 아이는 작은 키 때문에 아주 순조롭게 입구의 경비원 순찰을 피할 수 있었다. 한바탕 민첩하게 왔다 갔다 한 끝에 이미 계단 앞에 도착했다.고개를 든 두 아이는 계단 위를 바라보았다. 입을 삐죽 내민 사진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텔레비전에 나오는 회장 사무실은 모두 맨 꼭대기층에 있어. 오빠, 아빠도 꼭대기층에 있는 건 아니겠지.”사무도 이 많은 계단을 보자 약간 풀이 죽었다.그래도 앳되지만 무게 있는 목소리로 사무가 나지막히 말했다.“그 점은 드라마도 틀리지 않았어.”“아!” 오빠가 말을 하자 사진의 작은 다리는 벌써 맥이 풀리는 것 같았다.‘만약에 이렇게 높은 층을 걸어서 올라간다면, 오늘 내 다리는 아마 망가지겠지?사진이 자신의 짧은 다리를 위해 ‘묵념’을 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사무가 다시 입을 열었다.“가자, 위층으로 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자!”2층.지금은 출근 시간이라서 대다수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집중하고 있느라, 오히려 두 아이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진 오빠의 이전 기억이 다시 되살아나면, 내가 했던 짓도 모두 드러나지 않을까?’예민주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처럼 느꼈다.‘약효가 줄어들면 그 뒤에는 반드시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 발생할 거야.’ ‘안 돼. 방법을 생각해야 해. 그런 상황이 절대 일어나게 해서는 안 돼.’찢어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무진을 보자, 예민주의 머릿속에 방법이 하나 떠올랐다.‘그 약을 다시 한번 더 먹여도 될까?’‘하지만... 하지만 또 복용하면, 나도 잊어버리는 부작용이 생겨.’‘이거 어떻게 해야 해?’일시에 모든 좋은 점과 나쁜 점이 모두 머릿속에 맴돌면서, 가뜩이나 초조한 예민주는 머리가 터질 듯했다.얼마나 지났을까? 몸을 돌린 무진의 눈은 전혀 초점도 맞지 않은 채 암울해 보였다.걸음을 떼고도 마음의 피로로 인해서 이미 얼마나 붕 떠있는지도 몰랐다.무진이 예민주의 곁으로 다가가자, 예민주가 무의식중에 무진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무진은 다른 사람의 접촉을 원하지 않는 듯이 아주 교묘하게 예민주의 손길을 피했다.차로 향하면서 예민주에게 단 한 마디만 남겼을 뿐이다.“좀 있다가 너 혼자 돌아가. 오늘 일은 잠시 미루자.”그리고 곧바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남겨진 예민주만 어수선한 심정이었다.이어진 며칠 동안 무진은 여전히 평소와 마찬가지로 바빴다. 낮에는 업무를 볼 뿐만 아니라 접대도 해야 했다.그날, 산기슭의 별장 2층.위층에서 성연의 차가 점차 사라지는 걸 본 두 아이는 신속하게 작은 숄더백을 꺼냈다.사진은 동그란 두 눈을 반짝거리면서 맞은편에 있는 사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오빠, 정말로 이렇게 할 거야?”고개를 끄덕이는 사무의 눈에는 확고한 결의가 가득했다.“응, 엄마가 그날 돌아온 뒤 요 며칠 상태가 어떤지 못 봤어? 엄마는 분명히 아버지를 만났을 거야.” “내가 이미 아버지 위치를 알아냈어. 우리는 곧 아버지를 찾아갈 거야!”지금 집에 두 아이들밖에 없다. 외국에서 생활하는 습관이 되었기 때문에, 성연은 낯선
“그렇게 트집을 잡겠다고?”“나는 단지 이 옷을 매우 좋아할 뿐이에요. 나와 무진 오빠의 결혼식에서 입고 싶은데 당신들도 마음에 들었는지는 몰랐는데요?”억울한 듯한 예민주의 얼굴.임서희는 마음이 우울했다. ‘무슨 이런 여우 같은 년이 다 있어? 그야말로 겉만 번드르르한 년이네!’“2억2천만 원! 빨리 카드 결제해요!”말을 마친 성연이 몸을 돌려 가려고 했다. 예민주는 마치 성연이 가는 방향을 알고 있는 것처럼 바로 성연의 앞을 막았다.짝!성연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바로 예민주의 따귀를 때렸다.얼굴의 통증을 느끼자 예민주는 무의식적으로 직접 만든 독약을 꺼내려고 했다. 그러나 성연은 이미 진작부터 예민주가 그럴 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성연의 오른손에 갑자기 가는 은침 하나가 나타나더니, 예민주의 팔에 바로 박히면서 순식간에 꼼짝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좋은 개는 길을 막지 않는 법이야!”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지금 성연의 눈에서는 불꽃이 타오르면서 온몸의 피가 들끓는 듯했다.“서희야, 가자!”말이 끝나자 성연은 임서희를 데리고 웨딩 숍을 나섰다.오른쪽 얼굴의 화끈한 통증과 주위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느끼자, 어쩔 줄 몰라 하면서 화가 난 예민주가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무진 오빠!”그러나 다음 순간, 곧바로 문밖으로 나간 무진은 차의 시동을 걸고 바로 성연을 따라갔다. 울부짖는 예민주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방금 회사를 나섰던 성연은, 임서희를 먼저 회사로 돌려보낸 뒤에 자신은 혼자 차를 몰고 떠났다.차 안.백미러를 통해 자신의 뒤를 바짝 뒤쫓는 무진을 발견하자, 성연의 마음은 더욱 초조해졌다.‘뭘 하려는 거야?’마음이 초조하자, 액셀러레이터를 바로 끝까지 밟았다. 성연의 차는 넓은 도로 위를 나는 듯이 달려갔다.고가도로 위.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무진의 차가 성연의 차에 부딪치면서 곧바로 멈추게 만들었다. 빠른 속도로 달렸기 때문에 관성에 의해서 부딪친 것이다.성연은 입가가 찢어지면서 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