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와 앨런은 앞으로도 만날 일이 없는 관계라서 심유진은 굳이 둘을 소개해 줄 생각이 없었다. “이쪽은 제가 킹 호텔에서 근무할 때 직속 상사였던 앨런이고 이쪽은 제 동료이자 친구인 마리아예요.”앨런은 젠틀한 모습을 뽐내려고 먼저 마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반가워요, 앨런 씨.”마리아는 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녀는 앨런의 손을 살짝 잡으며 인사했다.“제가 정정할게요. 저는 현재 유진 씨의 동료가 아니라 옛 동료예요.”“네? 유진 씨, 또 이직했나요?”“아니요.”심유진은 애써 멋쩍게 웃음을 유지했다.“저 지금은 백수예요.”“무슨 말이에요?”앨런의 눈에는 의혹으로 가득했다.심유진이 킹 호텔에서 퇴사할 때 앨런한테 집에서 운영하는 회사로 이직할 거라고 말했었다. 그 때문에 심유진은 앨런 앞에서 차마 자신이 잘렸다는 거짓말 할 수 없었다. 회사에서 잘렸다고 했다간 들통날 게 뻔했다. 게다가 마리한테 그녀의 정체를 들킬 수도 있었다.심유진은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마리아를 슬쩍 쳐다봤다.“그냥 저랑 안 맞는 것 같더라고요.”심유진은 마리아가 그녀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서라도 앨런한테 진실을 말할 리 없다고 확신했다.과연 마리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바로 눈치를 챘다.“네. 대표님이 유진 씨를 붙잡으려 온갖 노력을 다했어요. 그럼에도 유진 씨의 의지가 워낙 강해서 우리 부서 동료들도 다 섭섭했어요.”앨런은 그 둘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그는 심유진의 업무 능력이 강한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렇게 능력 있는 심유진이 잘린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지금 다니는 직장이 없다면 킹 호텔로 돌아오는 건 어때요?”앨런은 기대감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전 일단 좀 쉬고 싶어요.”심유진은 그의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했다.“그래요. 어쩔 수 없죠.”앨런은 굳이 그녀를 강요하지 않았다.“충분히 휴식을 취한 후 일할 의향이 있다면 언제든지 연락해 주세요.”거래처 고객이 아직 기다리고 있어 앨런은 이내 자리로 돌아
“갑자기 웬 선물이에요?”마리아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녀는 손목에서 반짝이는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심유진은 더 이상 마리아를 속이고 싶지 않았다.“저 다음 주에 한국으로 돌아가요.”“네?”마리아는 깜짝 놀랐다.“진짜 가서 영어 가르칠 생각이에요?”“아직은 모르겠어요. 돌아간 후에 상황을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심유진은 미소를 머금고 계속해서 말했다.“사실 집이 좀 그리워요. 혼자 외국에서 직장도 잃었고 너무 힘들더라고요.”“그렇긴 하겠네요.”마리아는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럼, 이제 또 여기에 올 거예요?”마리아는 내심 기대하며 물었다.“상황 봐서요. 제가 한국에서 새 직장을 찾으면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아요.”심유진은 조심스레 대답했다.“그럼 저분은 어쩌고요?”마리아는 그새를 못 참고 먼 곳에 앉아 있는 앨런을 보며 놀렸다.“앨런 씨는 유진 씨가 마음을 돌리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요!”심유진은 재차 해명했다.“앨런 씨와 저는 진짜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네, 알겠어요. 두 분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됐죠?”마리아는 여전히 키득거리며 심유진을 놀려먹었다. 심유진의 말을 믿지 않는 게 확실했다.앨런을 마주친 후로 심유진은 이번 식사에 대한 기대감이 뚝 떨어졌다.심유진은 마리아와 밥을 먹으면서 많은 대화를 할 계획이었다.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멀리서 바라보는 앨런의 눈빛이 그녀를 좌불안석으로 만들었다. 심유진은 부랴부랴 식사를 마친 후 결제를 한 뒤 빨리 떠나려 했다.심유진과 마리아가 레스토랑을 떠나려는 순간 앨런이 따라나섰다.“유진 씨!”그는 큰소리로 심유진을 불러세웠다.심유진은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봤다.“무슨 일 있어요?”“내일 일요일인데, 혹시 시간 돼요?”앨런은 다급하게 물었다.“사실 프레디와 나가서 놀 생각인데 유진 씨도 같이 갈래요?”“죄송해요. 시간이 안 될 것 같아요.”앨런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심유진은 거절했다.“부자끼리 좋은 시간 보내요!”“하지만 프레디가
레스토랑 문 앞에서 함께 있는 그 둘의 모습을 본 후로 심유진은 도통 잠이 오지를 않았다.마리아와 앨런이 웃고 있던 모습이 계속 머릿속에 떠올랐다.심유진은 그 웃음에 담긴 의미가 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 때문에 웃고 있는게 확실해 보였다....일요일 아침.심유진은 마리아한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유진 씨!”전화기 너머로 마리아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저 어제 집으로 돌아간 후, 실수로 팔찌를 끊어뜨렸어요... 혹시 어디서 고칠 수 있는지 알아요?”심유진은 아무렇지 않게 팔찌를 산 곳을 보내줬다.“제가 보낸 주소로 찾아가면 돼요. 제가 미리 샵주한테 얘기해 놓을게요.”“유진 씨, 저와 같이 가주면 안 돼요? 이런 적은 처음이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만약 샵주가 고쳐주지 않으면 어쩌죠?”“사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심유진은 사실 그대로 말했다. 사실 그녀도 인터넷으로 팔찌를 구매하기는 처음이었다. 그 샵이 비교적 유명한 곳이라 한번 믿어보는 마음으로 산 것이었다.“마음이 안놓이면 먼저 내버려두세요. 제가 나중에 믿을만한 곳이 있는지 찾아봐 줄게요.”“이 팔찌 유진 씨가 준 선물인데 어떻게 가만히 내버려둬요. 하루라도 빨리 고치고 싶어요.”마리아는 계속 고집을 부렸다.“유진 씨, 제발요. 저랑 같이 가요. 네?”심유진은 단호하게 거절하려던 찰나 주방으로 다가오고 있는 김욱을 발견했다.“알겠어요.”심유진은 바로 말을 바꿨다.“저 지금 옷 갈아입고 나갈게요. 제가 집 앞으로 데리러 갈 거니까 준비하고 있어요.”김욱은 통화 소리를 듣고 심유진한테 뭔가 물어보려 했다.심유진은 잽싸게 손가락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괜찮아요. 제가 신세를 지는 건데 데리러 오지 않아도 돼요.”마리아는 연신 거절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아니면 제가 유진 씨 데리러 갈게요.”심유진은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그래도 되죠.”“그럼, 저 지금 바로 출발할게요.”마리아는 그제야 흡족하게 전화를 끊었다.
유리컵은 바닥에 떨어져 조각조각 부서졌다.주스는 바닥에 쏟아졌고 심유진의 다리와 슬리퍼에도 주스가 튕겼다.“너...”김욱은 점점 가까이 흘러오는 주스를 보며 절망했다.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절대 말하지 않았을 거다.“왜! 왜! 무슨 일 있어?”하은설은 부랴부랴 방에서 달려 나왔다. 그녀는 주방 안에 꼴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이게 다 무슨 일이야?”김욱은 기침이 멈추지 않아 곧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는 힘겹게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물...”하은설은 단번에 뜻을 알아차리고 다급하게 물 한 잔을 따라서 김욱한테 건넸다.그는 물 반 컵을 비운 후에야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심유진은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마리아 씨가 스파이라고? 진짜야?”심유진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그렇지만 마리아 씨는 블루 항공에서 근무한 지 오래됐잖아. 그전에도 회사의 기밀이 모어 항공에 넘어간 적 있어?”“그전에는 없었지.”한바탕 기침하고 나니 김욱은 어느새 목이 잠겼다.“하지만 이미 증거를 확보했어.”심유진은 마음이 덜컥 내려앉은 것 같았다. “무슨 증거인데?”“나 마리아 씨의 이력서를 확인했어.”김욱은 물 한 모금 마시고 목을 축였다.“마리아 씨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어. 그녀는 어릴 적부터 엄마 손에서 자랐지. 게다가 그녀의 어머니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가정주부였어. 그 모녀는 보잘것없는 농촌에서 살았지만 생활이 풍족했대. 마리아 씨의 동창들도 그녀가 대학교 4학년 때부터 옷, 가방과 화장품이 모두 명품이었대.”“그 말은 즉, 마리아 씨가 후원받은 거라는 거야?”심유진이 그의 말을 듣자마자 이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김욱은 심유진을 째려보더니 한심한 듯 말했다.“네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참 궁금하네.”“그럼, 그 돈이 다 어디서 난 건데?”심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그게 수상했단 말이야.”김욱은 식탁을 탁탁 두드렸다.“그래서 내가 해커를 통해 뒷조사를 해봤는데 마리아 씨가 블루 항공에서 근무하기
“수고는 무슨...”하은설은 어색하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건데요.”....마리아는 심유진이 이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심유진은 어쩔 수 없이 원래 아파트로 돌아가 그녀를 기다려야 했다.김욱은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하은설의 차를 몰고 나왔다. 그는 아파트 아래 구석 쪽에서 자리를 잡았다.마리아는 아파트에 도착하자마자 심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심유진은 1층에서 잠시 시간을 때우다가 방금 나온 것처럼 연기했다. 그녀는 하이힐을 신은 채 총총걸음으로 달아나갔다.심유진이 차에 탄 후 마리아는 몸을 돌려 뒷좌석에서 M 로고가 찍힌 종이봉투를 그녀에게 건넸다. “너무 일찍 불러내서 아침밥도 못 먹었죠? 제가 오는 길에 먹을 것도 좀 사 왔어요.”심유진은 사양했다.“고마워요. 하지만 저는 이미 집에서 아침밥을 먹었어요.”심유진은 이런 출처가 불분명한 음식을 먹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네?”마리아는 얼떨떨해하더니 말했다.“조금 더 먹어요. 아직 따뜻한데! 아니면 커피라도 마실래요?”“진짜 괜찮아요.”심유진은 다시 한번 단호하게 거절했다.“저는 아침에 이미 많이 먹어서 배불러요.”“그래요.”마리아는 마지못해 음식을 다시 뒷좌석에 놓았다.그녀는 차에 시동을 걸고는 심유진한테 물었다.“어떻게 가는지 알아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휴대폰을 꺼냈다.“내비게이션을 따라갈까요? 제가 사실 방향 감각이 좀 없어요.”마리아는 미리 말해두었다.“잠시 후에 제가 길을 잘못 들어서도 욕하지 말아줘요.”심유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아마도 마리아가 길을 잘못 들어설 계획인 것 같았다.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것과 정반대 방향으로 방향을 틀었다.“아! 잘못 들어섰네!”마리아는 당황한 것처럼 소리쳤지만, 그녀의 손과 발은 일사불란했다.심유진은 김욱이 뒤따라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조급해 하지 않았다.이내 내비게이션은 새 경로를 다시
심유진은 미처 마리아가 총을 지녔을 꺼라고 생각지 못했다.모든 가능성을 다 예측해 보았지만 결국 이 하나의 가능성을 예측하지 못했다.경찰 외에 총을 지닌 사람을 본 적 없었기에 더욱 예측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심유진은 자신이 총을 지니고 다녀도 합법인 나라에 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마리아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심유진은 바로 휴대폰을 껐다.그럼에도 마리아는 만족하지 않았다.그녀는 옆좌석 창문을 열고 심유진한테 명령했다.“휴대폰을 내던져요.”이제 바꾼 지 한 달도 안 되는 휴대폰을 창밖으로 던지자니 마음이 찢어지듯 아팠다. 하지만 눈 한번 찔끔 감고 휴대폰을 내던질 수 밖에 없었다.마리아는 인차 창문을 다시 닫았다.심유진은 차 뒷바퀴가 휴대폰을 밟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저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예요?”심유진은 마리아에게 물었다.“당신이 알아야 필요가 없어요.”마리아는 쉽게 정보를 흘리지 않았다.“도착하면 알게 될 거예요.”“저는 저희가 친구라고 생각했어요.”심유진은 마리아를 아련한 눈길로 바라보며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친구?”마리아는 차갑게 웃었다.“친구라고 생각했다는 사람이 친구가 좋아하는 사람과 몰래 연애하고, 그들을 주선해 주는 척하면서 징그럽게 굴어요?”그녀의 말에 심유진은 어리둥절했다.“제가 언제 몰래 마리아 씨가 좋아하는 사람과 연애했어요?”심유진의 추측이 맞다면 마리아가 좋아하는 사람은 김욱일 것이다.확실히 심유진도 그녀를 김욱과 주선해 주려고 한 적 있었다.아무래도 마리아가 뭔가 큰 오해를 하고 있는것 같았다.“설마 김욱 씨와 사귄 거 아니에요?”마리아는 씩씩거리며 물었다.“저 그런 적 없어요!”심유진은 바로 반박해 나섰다.“저도 눈이 있어요! 저 벌써 눈치챘다고요!”마리아는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제가 블루 항공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 근무했는데 김욱 씨가 여자한테 상냥하게 대한 적 한 번도 없어요. 유진 씨만 빼고요. 이래도 발뺌 할 거예요?”“저희 진
마리아의 웃음은 음산하고 약간 잔인해 보였다.“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요?”마리아는 고개를 돌려 심유진을 바라보았다.“조금만 일찍 알려줬어도 제가 이렇게 많은 일들을 저지르지도 않았을 거예요. 제가 이 정도로 타락하지도 않았을 텐데...”마리아는 말하다가 멈춰버렸다.“도대체 뭘 하려는 건데요?”심유진은 따졌다.마리아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마리아가 충동적인 상황이라 심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기 시작했다.“진정하세요.”심유진은 다시 한번 그녀를 설득하려고 시도했다.“아직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아니에요. 만약 이쯤에서 그만두고 싶다면 오늘 일을 제 기억 속에서 지울게요.”“오늘은 없었던 거로 쳐요. 하지만 그 전의 일들은요? 제가 블루 항공의 기밀을 아빠한테 알려준 것도 없던 일로 쳐줄 수 있어요? 설령 유진 씨가 할 수 있다고 나서도 육 대표님은요? 김욱 씨는요?”마리아는 심유진을 놓아줄 생각이 추어도 없어 보였다.“어차피 이번 생은 김욱 씨의 마음을 얻을 수 없게 되었어요. 유진 씨가 제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꼭 유진 씨를 없애야겠어요. 유진 씨도 영원히 김욱 씨의 애인이 될 자격을 잃게 될 거예요!”마리아는 말하면서 점점 더 흥분했고 이미 반쯤 미쳐있었다.그녀는 각오가 되어 있는 듯했다. 자연스레 심유진도 뒤따라오는 김욱에게 희망을 걸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차는 하염없이 달리다가 마침내 3층짜리 단독주택 앞에서 멈췄다.주택은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중산층이 사는 동네 같았다.“가만히 있어요.”마리아는 심유진에게 경고하며 그녀는 먼저 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차 앞쪽을 지나 조수석 문을 열어 심유진을 끌어내렸다.마리아의 손에 총을 쥐고 있어 심유진은 반항은커녕 얌전히 따라갈 수밖에 없다.마리아는 심유진을 끌고 문 쪽을 향해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그녀가 초인종을 누르자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그러자 왠지 낯익은 얼굴이 드러났다.“앨런 씨?"심유진은 깜짝 놀랐다.하지
한 번만 봐도 앨런이 무슨 꿍꿍이 인지 훤히 보였다.심유진은 벗어나려고 젖 먹던 힘까지 썼다. 드디어 그녀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심유진은 아픔을 견디며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다락방에서 탈출하기도 전에 앨런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도망치지 마요.”앨런은 팔에 힘을 주어 조금씩 심유진을 안쪽으로 끌어당겼다.절망스러운 순간 아래층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심유진은 아래층에 분명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다.이 시간에 이곳에 나타날 수 있는 건 프레디뿐이었다.이게 심유진이 도망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녀는 목청껏 소리쳤다.“프레디! 도와줘!”앨런이 입을 막으려 하자 심유진은 그의 손가락을 꽉 물었다.새빨간 피가 심유진의 이빨 사이사이에 묻었다. 하지만 그딴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이미 마지막 희망을 프레디한테 걸었다.“프레디! 나 다락방에 있어! 프레디! 빨리 경찰에 신고해 줘!”드디어 피아노 소리가 멈췄다.다행히도 프레디가 심유진의 목소리를 들었다.하지만 앨런은 아랑곳하지 않고 심유진을 다락방 중앙으로 끌고 가 족쇄와 점점 가까워졌다.“가만히 있어요!”앨런은 점차 인내심을 잃어갔다. 그는 결국 커다란 손을 들어 올려 심유진의 뺨을 내리쳤다.1.9미터 되는 큰 키에 심유진보다 배가 큰 체격을 가진 앨런이 힘은 말할 것도 없었다.심유진은 뺨이 얼얼해 났다. 입안의 피비린내가 더 심해진 것 같았다.그녀는 머리가 어지러워 나더니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이 틈을 타 앨런은 재빨리 그녀에게 족쇄를 채웠다.“드디어...”그는 심유진의 발에 채워진 족쇄를 보고는 득의양양한 웃음을 지었다.“드디어 유진 씨 당신을 손에 넣었네요.”“유진 씨는 모를 거예요. 제가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를.”그는 심유진의 어깨 위로 손을 올리며 말했다.옷을 사이에 두고 심유진은 앨런의 차갑고 매끄러운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그 모습은 마치 호시탐탐 먹잇감을 노리는 사자 같았다.심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