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토랑 문 앞에서 함께 있는 그 둘의 모습을 본 후로 심유진은 도통 잠이 오지를 않았다.마리아와 앨런이 웃고 있던 모습이 계속 머릿속에 떠올랐다.심유진은 그 웃음에 담긴 의미가 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 때문에 웃고 있는게 확실해 보였다....일요일 아침.심유진은 마리아한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유진 씨!”전화기 너머로 마리아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저 어제 집으로 돌아간 후, 실수로 팔찌를 끊어뜨렸어요... 혹시 어디서 고칠 수 있는지 알아요?”심유진은 아무렇지 않게 팔찌를 산 곳을 보내줬다.“제가 보낸 주소로 찾아가면 돼요. 제가 미리 샵주한테 얘기해 놓을게요.”“유진 씨, 저와 같이 가주면 안 돼요? 이런 적은 처음이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만약 샵주가 고쳐주지 않으면 어쩌죠?”“사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심유진은 사실 그대로 말했다. 사실 그녀도 인터넷으로 팔찌를 구매하기는 처음이었다. 그 샵이 비교적 유명한 곳이라 한번 믿어보는 마음으로 산 것이었다.“마음이 안놓이면 먼저 내버려두세요. 제가 나중에 믿을만한 곳이 있는지 찾아봐 줄게요.”“이 팔찌 유진 씨가 준 선물인데 어떻게 가만히 내버려둬요. 하루라도 빨리 고치고 싶어요.”마리아는 계속 고집을 부렸다.“유진 씨, 제발요. 저랑 같이 가요. 네?”심유진은 단호하게 거절하려던 찰나 주방으로 다가오고 있는 김욱을 발견했다.“알겠어요.”심유진은 바로 말을 바꿨다.“저 지금 옷 갈아입고 나갈게요. 제가 집 앞으로 데리러 갈 거니까 준비하고 있어요.”김욱은 통화 소리를 듣고 심유진한테 뭔가 물어보려 했다.심유진은 잽싸게 손가락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괜찮아요. 제가 신세를 지는 건데 데리러 오지 않아도 돼요.”마리아는 연신 거절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아니면 제가 유진 씨 데리러 갈게요.”심유진은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그래도 되죠.”“그럼, 저 지금 바로 출발할게요.”마리아는 그제야 흡족하게 전화를 끊었다.
유리컵은 바닥에 떨어져 조각조각 부서졌다.주스는 바닥에 쏟아졌고 심유진의 다리와 슬리퍼에도 주스가 튕겼다.“너...”김욱은 점점 가까이 흘러오는 주스를 보며 절망했다.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절대 말하지 않았을 거다.“왜! 왜! 무슨 일 있어?”하은설은 부랴부랴 방에서 달려 나왔다. 그녀는 주방 안에 꼴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이게 다 무슨 일이야?”김욱은 기침이 멈추지 않아 곧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는 힘겹게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물...”하은설은 단번에 뜻을 알아차리고 다급하게 물 한 잔을 따라서 김욱한테 건넸다.그는 물 반 컵을 비운 후에야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심유진은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마리아 씨가 스파이라고? 진짜야?”심유진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그렇지만 마리아 씨는 블루 항공에서 근무한 지 오래됐잖아. 그전에도 회사의 기밀이 모어 항공에 넘어간 적 있어?”“그전에는 없었지.”한바탕 기침하고 나니 김욱은 어느새 목이 잠겼다.“하지만 이미 증거를 확보했어.”심유진은 마음이 덜컥 내려앉은 것 같았다. “무슨 증거인데?”“나 마리아 씨의 이력서를 확인했어.”김욱은 물 한 모금 마시고 목을 축였다.“마리아 씨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어. 그녀는 어릴 적부터 엄마 손에서 자랐지. 게다가 그녀의 어머니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가정주부였어. 그 모녀는 보잘것없는 농촌에서 살았지만 생활이 풍족했대. 마리아 씨의 동창들도 그녀가 대학교 4학년 때부터 옷, 가방과 화장품이 모두 명품이었대.”“그 말은 즉, 마리아 씨가 후원받은 거라는 거야?”심유진이 그의 말을 듣자마자 이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김욱은 심유진을 째려보더니 한심한 듯 말했다.“네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참 궁금하네.”“그럼, 그 돈이 다 어디서 난 건데?”심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그게 수상했단 말이야.”김욱은 식탁을 탁탁 두드렸다.“그래서 내가 해커를 통해 뒷조사를 해봤는데 마리아 씨가 블루 항공에서 근무하기
“수고는 무슨...”하은설은 어색하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건데요.”....마리아는 심유진이 이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심유진은 어쩔 수 없이 원래 아파트로 돌아가 그녀를 기다려야 했다.김욱은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하은설의 차를 몰고 나왔다. 그는 아파트 아래 구석 쪽에서 자리를 잡았다.마리아는 아파트에 도착하자마자 심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심유진은 1층에서 잠시 시간을 때우다가 방금 나온 것처럼 연기했다. 그녀는 하이힐을 신은 채 총총걸음으로 달아나갔다.심유진이 차에 탄 후 마리아는 몸을 돌려 뒷좌석에서 M 로고가 찍힌 종이봉투를 그녀에게 건넸다. “너무 일찍 불러내서 아침밥도 못 먹었죠? 제가 오는 길에 먹을 것도 좀 사 왔어요.”심유진은 사양했다.“고마워요. 하지만 저는 이미 집에서 아침밥을 먹었어요.”심유진은 이런 출처가 불분명한 음식을 먹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네?”마리아는 얼떨떨해하더니 말했다.“조금 더 먹어요. 아직 따뜻한데! 아니면 커피라도 마실래요?”“진짜 괜찮아요.”심유진은 다시 한번 단호하게 거절했다.“저는 아침에 이미 많이 먹어서 배불러요.”“그래요.”마리아는 마지못해 음식을 다시 뒷좌석에 놓았다.그녀는 차에 시동을 걸고는 심유진한테 물었다.“어떻게 가는지 알아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휴대폰을 꺼냈다.“내비게이션을 따라갈까요? 제가 사실 방향 감각이 좀 없어요.”마리아는 미리 말해두었다.“잠시 후에 제가 길을 잘못 들어서도 욕하지 말아줘요.”심유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아마도 마리아가 길을 잘못 들어설 계획인 것 같았다.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것과 정반대 방향으로 방향을 틀었다.“아! 잘못 들어섰네!”마리아는 당황한 것처럼 소리쳤지만, 그녀의 손과 발은 일사불란했다.심유진은 김욱이 뒤따라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조급해 하지 않았다.이내 내비게이션은 새 경로를 다시
심유진은 미처 마리아가 총을 지녔을 꺼라고 생각지 못했다.모든 가능성을 다 예측해 보았지만 결국 이 하나의 가능성을 예측하지 못했다.경찰 외에 총을 지닌 사람을 본 적 없었기에 더욱 예측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심유진은 자신이 총을 지니고 다녀도 합법인 나라에 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마리아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심유진은 바로 휴대폰을 껐다.그럼에도 마리아는 만족하지 않았다.그녀는 옆좌석 창문을 열고 심유진한테 명령했다.“휴대폰을 내던져요.”이제 바꾼 지 한 달도 안 되는 휴대폰을 창밖으로 던지자니 마음이 찢어지듯 아팠다. 하지만 눈 한번 찔끔 감고 휴대폰을 내던질 수 밖에 없었다.마리아는 인차 창문을 다시 닫았다.심유진은 차 뒷바퀴가 휴대폰을 밟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저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예요?”심유진은 마리아에게 물었다.“당신이 알아야 필요가 없어요.”마리아는 쉽게 정보를 흘리지 않았다.“도착하면 알게 될 거예요.”“저는 저희가 친구라고 생각했어요.”심유진은 마리아를 아련한 눈길로 바라보며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친구?”마리아는 차갑게 웃었다.“친구라고 생각했다는 사람이 친구가 좋아하는 사람과 몰래 연애하고, 그들을 주선해 주는 척하면서 징그럽게 굴어요?”그녀의 말에 심유진은 어리둥절했다.“제가 언제 몰래 마리아 씨가 좋아하는 사람과 연애했어요?”심유진의 추측이 맞다면 마리아가 좋아하는 사람은 김욱일 것이다.확실히 심유진도 그녀를 김욱과 주선해 주려고 한 적 있었다.아무래도 마리아가 뭔가 큰 오해를 하고 있는것 같았다.“설마 김욱 씨와 사귄 거 아니에요?”마리아는 씩씩거리며 물었다.“저 그런 적 없어요!”심유진은 바로 반박해 나섰다.“저도 눈이 있어요! 저 벌써 눈치챘다고요!”마리아는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제가 블루 항공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 근무했는데 김욱 씨가 여자한테 상냥하게 대한 적 한 번도 없어요. 유진 씨만 빼고요. 이래도 발뺌 할 거예요?”“저희 진
마리아의 웃음은 음산하고 약간 잔인해 보였다.“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요?”마리아는 고개를 돌려 심유진을 바라보았다.“조금만 일찍 알려줬어도 제가 이렇게 많은 일들을 저지르지도 않았을 거예요. 제가 이 정도로 타락하지도 않았을 텐데...”마리아는 말하다가 멈춰버렸다.“도대체 뭘 하려는 건데요?”심유진은 따졌다.마리아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마리아가 충동적인 상황이라 심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기 시작했다.“진정하세요.”심유진은 다시 한번 그녀를 설득하려고 시도했다.“아직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아니에요. 만약 이쯤에서 그만두고 싶다면 오늘 일을 제 기억 속에서 지울게요.”“오늘은 없었던 거로 쳐요. 하지만 그 전의 일들은요? 제가 블루 항공의 기밀을 아빠한테 알려준 것도 없던 일로 쳐줄 수 있어요? 설령 유진 씨가 할 수 있다고 나서도 육 대표님은요? 김욱 씨는요?”마리아는 심유진을 놓아줄 생각이 추어도 없어 보였다.“어차피 이번 생은 김욱 씨의 마음을 얻을 수 없게 되었어요. 유진 씨가 제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꼭 유진 씨를 없애야겠어요. 유진 씨도 영원히 김욱 씨의 애인이 될 자격을 잃게 될 거예요!”마리아는 말하면서 점점 더 흥분했고 이미 반쯤 미쳐있었다.그녀는 각오가 되어 있는 듯했다. 자연스레 심유진도 뒤따라오는 김욱에게 희망을 걸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차는 하염없이 달리다가 마침내 3층짜리 단독주택 앞에서 멈췄다.주택은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중산층이 사는 동네 같았다.“가만히 있어요.”마리아는 심유진에게 경고하며 그녀는 먼저 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차 앞쪽을 지나 조수석 문을 열어 심유진을 끌어내렸다.마리아의 손에 총을 쥐고 있어 심유진은 반항은커녕 얌전히 따라갈 수밖에 없다.마리아는 심유진을 끌고 문 쪽을 향해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그녀가 초인종을 누르자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그러자 왠지 낯익은 얼굴이 드러났다.“앨런 씨?"심유진은 깜짝 놀랐다.하지
한 번만 봐도 앨런이 무슨 꿍꿍이 인지 훤히 보였다.심유진은 벗어나려고 젖 먹던 힘까지 썼다. 드디어 그녀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심유진은 아픔을 견디며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다락방에서 탈출하기도 전에 앨런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도망치지 마요.”앨런은 팔에 힘을 주어 조금씩 심유진을 안쪽으로 끌어당겼다.절망스러운 순간 아래층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심유진은 아래층에 분명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다.이 시간에 이곳에 나타날 수 있는 건 프레디뿐이었다.이게 심유진이 도망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녀는 목청껏 소리쳤다.“프레디! 도와줘!”앨런이 입을 막으려 하자 심유진은 그의 손가락을 꽉 물었다.새빨간 피가 심유진의 이빨 사이사이에 묻었다. 하지만 그딴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이미 마지막 희망을 프레디한테 걸었다.“프레디! 나 다락방에 있어! 프레디! 빨리 경찰에 신고해 줘!”드디어 피아노 소리가 멈췄다.다행히도 프레디가 심유진의 목소리를 들었다.하지만 앨런은 아랑곳하지 않고 심유진을 다락방 중앙으로 끌고 가 족쇄와 점점 가까워졌다.“가만히 있어요!”앨런은 점차 인내심을 잃어갔다. 그는 결국 커다란 손을 들어 올려 심유진의 뺨을 내리쳤다.1.9미터 되는 큰 키에 심유진보다 배가 큰 체격을 가진 앨런이 힘은 말할 것도 없었다.심유진은 뺨이 얼얼해 났다. 입안의 피비린내가 더 심해진 것 같았다.그녀는 머리가 어지러워 나더니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이 틈을 타 앨런은 재빨리 그녀에게 족쇄를 채웠다.“드디어...”그는 심유진의 발에 채워진 족쇄를 보고는 득의양양한 웃음을 지었다.“드디어 유진 씨 당신을 손에 넣었네요.”“유진 씨는 모를 거예요. 제가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를.”그는 심유진의 어깨 위로 손을 올리며 말했다.옷을 사이에 두고 심유진은 앨런의 차갑고 매끄러운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그 모습은 마치 호시탐탐 먹잇감을 노리는 사자 같았다.심유진
심유진의 인상 속에 앨런은 킹 호텔에서 일할 땐 엄숙하지만 사적으로는 세심한 상사였다.프레디 한테는 언제나 섬세하고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앨런이 거친 욕을 하는 것을 본 적 없었다.심유진은 문득 프레디가 동안의 이상했던 점들과 지난번 가출했던 일이 떠올랐다.심유진은 몸이 파르르 떨렸다.프레디를 줄곧 학대하고 있었다니, 괴물이 따로 없었다.두 사람의 발걸음이 멀어지고 두 사람의 소리도 금세 줄어들었다.앨런이 문을 연 것 같았다.심유진은 문득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 무슨 얘기하는지 들리지 않았다.조금 후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유진아! 심유진!”한국어가 심유진의 귀에 뚜렷이 들려왔다.김욱이었다.드디어 김욱이 심유진을 데리러 온 것이다!심유진은 바닥에 엎드려 온 힘을 다해 바닥을 두드렸다. 그녀는 김욱의 주의를 끌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오빠! 나 여기 있어! 3층 다락방! 빨리 와서 구해줘!김욱의 다급한 발소리가 빠르게 다가오더니 급기야 다락방 아래에서 멈췄다“안에 누구예요?”한 남자가 영어로 물었다.앨런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제 와이프에요.”심유진은 바로 영어로 아래층을 향해 소리쳤다.“저 이 사람 와이프가 아니에요! 저는 납치된 겁니다! 제발 저 좀 구해주세요.”낯선 남자의 목소리는 더욱 엄숙해졌다.“당장 다락방 문을 열어요!”“안에 여자분 진짜 저의 와이프예요. 약간의 부부 갈등이 있어서 괜히 거짓말하는 거예요.”앨런은 다급히 핑계를 둘러댔다.“못 믿으시겠다면 저의 아들한테 물어보시죠.”“프레디! 프레디! 이리 와봐.”앨런은 프레디를 불러냈다.“경찰 아저씨, 제 여동생이 다락방에 갇혔어요. 하지만 어떤 관계든 간에 이건 이미 학대 아닌가요?”당황해하는 앨런과 달리 김욱이 훨씬 침착해 보였다.“다락방 문을 열고 제 동생을 꺼내주세요. 아빠!”경찰도 굳은 표정으로 명령했다.“어서 문을 여세요!.”앨런은 여전히 나 몰라라 했다.“열
앨런은 다락방 열쇠를 뺏으려고 아득바득 애를 썼다. 하지만 이내 경찰이 그를 막아섰다.경찰은 허리춤에 준비해 둔 총을 만지작거리며 경고했다.“움직이지 마!”앨런은 총을 발견한 후에야 뒤로 물러섰다.앨런이 얌전히 물러나자 경찰은 수갑을 꺼내 그의 손에 채웠다.김욱은 그 틈을 타, 재빨리 다락방에 채워져 있는 자물쇠를 열었다.김욱이 문을 열자 미세한 불빛이 다락방에 비쳤다.다락방이 워낙 깜깜했던 지라 김욱은 허공을 대고 심유진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유진아?”반면 김욱이 밝은 곳에 서있어서 심유진은 그를 한눈에 발견할 수 있었다.“오빠! 나 여기 있어!”눈앞이 여전히 깜깜했지만 김욱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걸어갔다.드디어 심유진의 윤곽이 눈앞에 나타나자 김욱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유진아!”“오빠!”심유진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경찰은 소리를 듣고 물었다.“찾았어요?”김욱은 감격스러워 뒤돌아 말했다.“네! 제 동생이 여기 있어요!”그의 말을 듣고 경찰은 험악한 표정으로 앨런을 바라봤다.“다른 할 말 있어요?”앨런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고집을 부렸다.“제가 제 와이프랑 잠시 불화가 있었을 뿐인데 당신들이 뭔 상관이에요!”“와이프랑 불화가 있든 말든 제 알 바가 아니지만 폭력을 사용하면 위법이죠.”경찰은 전혀 그의 거짓말에 속지 않았다.“전 폭력을 행사한 적 없어요! 때린 적도 없다고요!”앨런은 점점 감정이 격해졌다.“신체검사해 보면 알겠네! 전 거짓말 한 적 없어요!”“앨런 씨가 저한테 폭력을 쓰지 않았어요.”심유진이 끼어들어 차분하게 말했다.“하지만...”심유진은 발에 채워진 족쇄를 흔들며 그의 범행을 밝혔다.쇠사슬이 서로 부딪치는 찰랑이는 소리가 김욱의 귀에까지 전해졌다.“저를 노예처럼 쇠사슬로 붙잡아 두었으니 이건 명백한 납치죠.”김욱은 그제야 그녀의 발에 채워진 족쇄를 발견했다.이어서 그가 족쇄를 풀어보려 했지만 그리 쉽게 풀리지 않았다.심유진은 슬그머니 귀띔해 줬다
하은설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시간 없어, 빨리 가자! 너 기다리다 네 남편 목 빠지겠네!”심유진은 빨리 걷기 위해 두 손으로 얼른 웨딩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응, 그래.”화창한 날씨에 황금빛 햇살이 꽃잎 사이로 레드카펫을 비추고 있었다.심유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온실 문 앞까지 걸어왔다.온실 대문 앞에는 육윤엽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별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별이는 심유진의 등장에 잡고 있던 육윤엽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엄마, 오늘 천사 같아요!”심유진도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 우리 별이!”오늘 결혼식의 화동인 별이는 정장 차림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앙증맞은 손에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온실 안에서 곧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육윤엽은 심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가자.”심유진은 애써 웃고 있지만 눈물이 맺힌 육윤엽을 보고 갑자기 꼬끝이 찡해졌다.하은설은 그녀가 울려고 하자, 옆에서 한마디 했다.“참아, 울면 안 돼!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화장 번지면 안 예쁘잖아.”심유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고 육윤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별이도 앞에 서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면서 바구니 속의 꽃잎들을 한 웅큼씩 집어서 하늘로 흩뿌렸다.신부의 등장에 하객들은 잇달아 박수를 쳤고 심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태준은 예식장 단상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는 심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결혼식장이 크지 않은 탓에, 육윤엽과 심유진은 2분도 안 되어 예식장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행복함에 싱글벙글하던 허태준은 육윤엽이 굳은 얼굴로 헛기침을 몇 번 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아버님.”육윤엽은 심유진을 한 번
육운영과 김욱은 블루 항공이 설 연휴에도 쉬지 않은 탓에 경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다만 심유진은 보름 정도 되는 설 연휴 중 절반 시간을 허씨 가문의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은 상황이라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육운영과 김욱은 짧은 휴가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했다.별이도 설 연휴가 끝난 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허태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이의 유치원 픽업을 위해 일부러 허태준과 심유진이 사는 동네에 집까지 샀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블루 항공 경주 지사의 재건축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김욱은 몇 명의 핵심 직원들을 경주 지사 쪽으로 파견시켜 심유진과 함께 회사 초반 운영을 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운영은 정상 궤도에 올랐고 일부 본사의 업무도 경주 지사 쪽으로 넘어왔다.회사가 눈코 뜰 새 바빠지자, 심유진은 5월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허태준이 결혼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기에 바쁜 일정 속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서 결혼식 준비를 했다....5월이 되자, 모두의 예상대로 코로나는 국내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다.블루 항공은 다행히 코로나가 N시티에서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부서를 이동한 상황이라 큰 타격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성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의 여러 의료기기 공장을 설립하고 마스크 등 의료 물자를 전 세계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반면 모어 항공은 블루 항공과의 소송에서 패한 뒤, 입소문이 나쁘게 퍼져서 고객들을 블루 항공에 뺏긴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역이었던 마리아는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는 중, 심유진과 허태준의 결혼식 날도 다가왔다.심유진은 결혼식 날이면 해방감이 들 줄 알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YT 그룹이 부
허아주머니는 특별히 심유진을 위해 아침밥을 남겨두었다.심유진은 허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고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허태준과 별이는 그녀가 아침을 다 먹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때마침 허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만두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허태준에게 건넸다.“자, 이거 잊지 마.”“고맙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떠나도 될까요?”심유진은 어젯밤의 일로 토라져서 답도 하기 싫었지만, 허아주머니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짧게 답했다.“네, 가죠.”그녀는 답을 하고 나서 별이의 손을 잡고는 허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허태준도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허태준이 별이에게 미리 증조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말했고, 별이는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폭풍 질문을 던졌다.“증조할아버지는 왜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인 건가요?”“증조할아버지는 무서워요?”“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만두를 먹을 수 있어요?”...허태준은 별이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했다.그동안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은 냉랭한 심유진의 태도에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과한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하는 자기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어젯밤 생각에 몸이 반응해 오면서 또 피가 끓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별이를 안고 묘지 입구에서 산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몸을 굽혀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할아버지, 저 왔습니다.”심유진도 허태준의 할아버지를 보자,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무덤을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심유진은 사진 속의 자상한 노인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태준 씨 아내 심유진이에요.”그러고는 별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유진이 혼자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질문 세례를 했다.“태준이는? 왜 같이 내려오지 않았어?”“아빠는 어디 있어요? 불꽃놀이 시켜준다고 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심유진은 방에서 나오면서 침착하게 둘러댔다.“샤워하고는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어요.”어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김욱만이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시했다.별이는 실망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아빠 미워! 오늘 같은 날 왜 이렇게 빨리 주무시는 거죠?”심유진은 그런 별이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어. 내일 아빠가 우리 별이랑 같이 불꽃놀이 해주실 거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그녀의 말이 끝나고 허태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세뱃돈을 심유진과 별이에게 건넸다.허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심유진은 허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뜨겁게 포옹했다.“어머님, 고마워요.”허아주머니는 심유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우리 유진이는 너무 착해.”이어 육운엽과 김욱도 세뱃돈을 건넸고, 별이는 많은 세뱃돈을 받은 것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늦은 시간 탓에 몇몇 어른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때마침 허아주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지.”심유진도 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허태민, 너도 이제 자야지.”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별이를 재운 뒤에도 허태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했다.다들 잠들었는지 온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유진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그녀가 켜놓았던 무드등조차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겼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발끝으
“새해 복 많이 받아요.”왜인지 심유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왜 그래요?”허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불꽃놀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완전 좋았어요!”“근데 왜 우는 거예요?”허태준은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심유진이 울면 허태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너무 감동적이어서요.”심유진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거렸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사랑하는 사람...”허태준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더니 심유진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저도 사랑해요, 유진 씨.”그는 머리를 숙이고 심유진의 이마에 키스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워낙 세게 껴안아 밀어 지지 않았다.“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심유진은 이성을 잃은 허태준을 일깨워 줬다.김욱은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불꽃 쇼도 끝난 상황에 허태준과 위에 오래 무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심유진은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허태준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기에 그녀를 놓아줬다.“잠시 후에 꼭 보충해야 해요.”허태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어떻게 때울까요?”심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둘러 내려가지 않았다.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허태준의 턱으로부터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이러면 돼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웃음치며 그를 유혹했다.“아니면 이렇게?”그녀는 허태준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허태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 빛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하지만 그는 꾹꾹 참으며 인내심 있게 심유진의 다음 유혹을 기다렸다.“우리... 스릴 넘치게 놀아 볼래요?”심유진은 허태준의 턱을 잡으며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마치 섹시한
설날에 모처럼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들 모두 약주를 하자 허 아주머니는 육윤엽과 김욱을 모두 집에 못 가게 막았다.아침 일찍 일어나 쉴 새 없이 바빴던 심유진은 저녁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허 아주머니는 피곤해하는 심유진을 발견하고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하지만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졸음을 떨쳐내려 애썼다.“조금만 더 버텨볼게요.”심유진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먼저 자고 싶지 않았다.올해 그녀는 더 이상 떠돌이 처지가 아닌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허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극구 말렸다.“먼저 올라가서 눈 붙이고 있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기 전에 깨워줄게요.”허태준은 심유진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졌다.허태준이 말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별이 마저도 심유진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잠을 권했다.결국 심유진은 그들의 의견을 꺾지 못하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유진아! 심유진! 빨리 일어나! 12시야!”누군가 심유진의 뺨을 툭툭 치면서 깨웠다.심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김욱이 있었다.심유진은 김욱의 손을 치우고 그를 세게 때렸다.복수를 마친 심유진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왜 오빠가 날 깨우러 온 거야? 태준 씨는?”“아래층에 있어. 별이가 태준 씨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올라왔지.”김욱은 방금 맞은 곳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우지 않는 건데.”“오빠가 먼저 날 때렸잖아! 내 탓 하지 마!”심유진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지금 몇분이야?” 김욱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말했다.“11시 59분이야. 이미 카운트 다운 시작됐어.”“이렇게 빨리?”조금만 잔줄 알
심유진은 생각을 되짚어보고는 문득 허태준이 유럽으로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허태준은 허택양의 일을 처리하러 유럽으로 가는 거라 핑계를 댔었다.“허태준은 너보다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육윤엽은 코웃음 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는 참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 생각밖에 안 하네.”“아이참...”심유진은 헛웃음 지으며 이를 꼭 깨물었다.그녀는 이미 들킨 바에 모든 사실을 다 털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사실, 저와 태준 씨 이혼한 적 없어요. 저 이미 6년 전에 태준 씨와 결혼 했었어요.”허태준은 이 사실을 육윤엽한테 말한 적 없었다.심유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윤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희 둘...”육윤엽은 가슴을 쥐어 잡고 괴로워했다.심유진과 김욱은 급히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요? 심장이 아파요?”육윤엽은 심유진의 뒤통수를 공격한 후에야 표정이 온화해졌다.그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심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앞으로 또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다간 더 아프게 때릴 줄 알아.”육윤엽은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다.심유진은 뒤통수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다시는 안 숨길게요!”허태준의 부모님은 육윤엽과 김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서부터 허 아주머니는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내오며 쉬지도 않고 대접했다.육윤엽은 젠틀하게 허태준의 부모님을 대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심유진을 실컷 욕한 덕분일 수 있다.게다가 육윤엽은 두 사람의 선물도 준비해 왔다.그는 허 아주버님한테 비싼 브랜드 시계를, 허 아주머니한테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싼 보석 세트를 선물로 줬다.두 사람은 한참 거절하다가 끝내 심유진의 설득에 못 이겨 선물을 받았다.양쪽 부모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아이들과 같이 설을 보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두 분과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그들이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준과
심유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저녁밥을 먹은 후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잘 준비를 했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그때 허태준은 별이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심유진은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저 지금 너무 걱정돼요.”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뭐가 걱정돼요?”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일 저의 아버지가 여기에 오시잖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버님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심유진은 내일 육윤엽과 허태준의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뻐근했다.“아버님은 현명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허태준은 심유진을 다독였다.“아버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 분은 아니잖아요.”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준 씨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던데요?”허태준은 마른기침하며 핑계를 둘러댔다.“그것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허태준은 이미 겁에 잔뜩 질려 육윤엽이 없어도 감히 그의 나쁜 말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은 이를 이미 알아차렸다.“아무래도 오빠한테 전화해서 신신당부해야겠어요.”그녀가 충전 케이블을 뽑자 휴재폰 충전이 중단되었다.허태준은 다급하게 그녀를 뜯어말렸다.“두 분 이미 잠에 드셨을 거예요. 할 말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때 해도 늦지 않았어요.”심유진은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긴. 그렇긴 하네요.”허태준은 심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됐어요. 얼른 자요.”허태준은 방안의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뒀다.“내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쪽잠을 잘 시간도 없을 거예요.”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태준을 쳐다봤다.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저 잠 좀 재워주지 않을래요? 아무 이야기를 해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