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욱은 더 캐묻지 않고 경찰한테 눈길을 돌렸다.“경찰관님, 제 동생 족쇄를 풀 수 있게 사람을 좀 불러와도 될까요?”경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히 가능하죠.”그러고는 무전기를 꺼내 본사에 지원요청을 했다.“이놈은 제가 먼저 경찰서에 데려가겠습니다.”“네.”김욱은 대답하며 다른 경찰이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겠다고 했다.“너희들이 뭔데 나를 데려가! 여긴 내 집이야! 너희들은 날 절대 데려갈 수 없어!”앨런은 격하게 반항했지만 경찰은 손쉽게 그를 제압했다.“총 쏘기 전에 순순히 따라와!”경찰도 점차 인내심을 잃어가고 있었다.“잠시만요!”갑자기 다락방에서 심유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모든 이의 시선이 다락방으로 향했다.“프레디!”아직 발이 묶여 있는 심유진은 다락방에서 내려올 수 없어 허공에 대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프레디 그 아이를 함께 데려가 줘요! 경찰관님! 아무래도 프레디가 지속적으로 가정폭력을 당한 것 같아요. 만약 가능하시다면 프레디의 몸에 상처가 있는지 검사해 주세요!”경찰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아가.”경찰은 프레디를 향해 손을 저으며 말했다.“이리 내 곁으로 와봐.”앨런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빨리 네 방으로 들어가!”프레디는 경찰과 앨런 사이에서 갈팡질팡 갈피를 잡지 못했다.“넌 입 다물어!”경찰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앨런에게 경고를 날린 뒤 부드러운 표정으로 프레디를 위로했다.“아가야, 무서워 하지 마. 아저씨가 널 지켜줄게.”경찰은 커다란 손을 프레디의 앞에 내밀었다. 프레디는 잠깐 고민을 하다가 조심스레 그의 손을 잡았다.경찰은 벅찬 마음으로 프레디를 칭찬했다.“그래, 아가! 넌 참 용감한 아이야.”프레디는 멀뚱히 경찰을 바라봤다.“혹시 아버지가 너를 학대했어? 경찰 아저씨한테 말해줘.”경찰은 프레디가 불안해할까 봐 부드러운 어조로 차근차근 물었다.프레디는 앨런의 냉혹한 눈빛에 무서워서 입을 열지 못했다.“이 아이를 잠시 돌봐 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먼저
심유진 발목에 채워진 족쇄가 너무 두꺼웠던 탓에 한참 후에야 끊어낼 수 있었다.족쇄가 풀린 순간 심유진은 여태껏 느껴본 적 없는 편안함을 느꼈다.심유진은 족쇄를 푸느라 수고한 경찰한테 감사 인사를 건네고 다락방에서 탈출했다.프레디는 이미 경찰과 함께 집을 떠났다. 아래층에는 김욱 혼자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멍을 때리고 있었다.“오빠?”심유진은 그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김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심유진의 발로 눈길을 돌렸다.“다 됐어?”“응.”심유진은 후련한 듯 총총 뛰었다.“그럼 우리 경찰서로 가자.”김욱은 심유진을 데리고 집 밖을 나섰다.“어서 가서 진술해야 해. 그리고 마리아 씨...”김욱은 독기 가득해서 말했다.“더 이상 도망칠 수 없을 거야.”김욱의 입에서 마리아의 이름이 나오자 심유진은 마음이 무거워 났다.“이게 다 오빠 때문이야!”심유진은 팔꿈치로 김욱을 꾹꾹 찌르며 원망의 눈초리를 보냈다.“오빠가 그렇게 매력이 많지만 않았어도 내가 납치될 일은 없었잖아.”“이제 와서 내 탓 하는 거야?”김욱은 미간을 찌푸리며 심유진을 탓했다.“네가 처음부터 너의 신분을 밝혔으면 될 일이었잖아. 사람들이 네가 내 동생인 걸 알았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그리고...그는 경찰차에 타고 있는 앨런을 짚으며 말했다.“저 변태 놈 자식은 네가 붙여 온 거잖아! 이게 나랑 뭔 상관인데!”심유진은 김욱의 손이 가리키는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마침 앨런과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앨런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눈빛으로 심유진을 빤히 쳐다봤다.심유진은 재빨리 눈길을 돌렸다.잠시 후 그들은 경찰서로 향했다.김욱과 심유진은 조사에 협조하기 위해 경찰차의 뒤를 따랐다.“공범이 있어요.”조사하는 도중 심유진은 마리아를 거론했다.“마리아 씨는 총으로 저를 위협하고 앨런 씨의 집에 데려다 놓았어요.”앨런은 마리아가 공범이라는 사실을 부인했고 이 사건은 납치 사건이 아니라고 했다.그는 끝까지
“하지만 앨런 그 자식은...”김욱은 불타오르는 화를 컨트롤 하기 위해 핸들을 꼭 잡았다.심유진은 문득 죄책감이 들었다.“사실 프레디가 좀 이상한 걸 여러 번 알아차렸지만 왜 학대를 당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지...”심유진은 자신이 만약 조금만 세심하고 예리했더라면 프레디가 이토록 힘들지 않았을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쓰렸다.“네 탓이 아니야.”김욱은 자기 탓 하고 있는 심유진을 일깨워줬다.“프레디가 그런 못된 아버지를 만났기에 그런 일을 당한 거야.”심유진은 더듬대며 어렵게 입을 뗐다.“그럼... 프레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지금 상황대로 라면 앨런은 감옥에 갇히게 된다. 게다가 프레디는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었다.“아마 보육원에 맡겨져서 새 부모를 기다려야 하는 거야?”“그건 아니야.”프레디한테 마음이 쓰였던 김욱은 경찰한테 물었었다.“프레디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다 살아계신대. 아마 그분들한테 맡겨질 거야.”심유진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그리고 방금 법무부에 전화해서 모어에서 우리 회사 기밀을 빼돌린 거에 대해 고소진행하라고 했어.”심유진과 마리아는 마침 차 안에서 이 사건에 대해 말이 나왔었다. 마리아는 자신이 블루 항공과 진생 그룹이 협력한다는 정보를 폭로했다는 사실을 직접 범행을 인정했다. 이 증거로 모어 항공을 고소하기에 충분했다.“응”심유진은 한참을 뜸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오빠, 나 화요일에 경주로 돌아가.”“뭐?”심유진은 김욱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김욱은 그녀의 말을 듣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정신을 다잡았다.“너 회사일 때문에 가는 거야? 아니면 허태준을 위해서 가는 거야?”심유진은 김욱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회사 때문도 있고 태준 씨 때문이기도 해.”김욱은 꼬치꼬치 캐물었다.“그래서 어느 쪽이 더 큰 퍼센트를 차지하는데?”어느새 심유진은 입술이 바짝 말라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겨우 용기를 내 김욱한테 사실대로 말했다.“태준
심유진과 하은설은 화요일 아침 비행기를 예매했다.김욱은 당연한 듯 그들의 짐을 차에 싯고 비행기장에 데려다줬다.떠나기 전, 심유진은 집 열쇠와 하은설 주택 열쇠를 김욱한테 맡겼다. 그러면서 김욱한테 평소 자주 집에 가보고 청소 아주머니를 불으라고 재차 강조했다.김욱은 툴툴거렸다.“내가 네 보모라도 되는 줄 알아?”“당연히 그건 아니지.”심유진은 김욱의 팔짱을 끼며 애교를 부렸다.“오빠,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거 알지?”“정말?”김욱은 바로 심유진을 놀릴 생각에 신났다.“그럼 선택해. 나야? 허태준이야?”심유진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당연히 오빠지!”부탁할 일이 있을때에야 입에 사탕발린 말을 하는 심유진이 였다.게다가 어려운 일도 아니고 김욱의 기분이 풀린다면 뭐든 할 것 같았다.반면, 김욱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김욱은 침착하게 휴대폰을 꺼내 허태준과의 카톡 창을 열었다. 그는 음성메시지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그럼 다시 한번 말해봐. 나야? 허태준이야?”그제서야 심유진은 겁을 먹고 입을 꾹 닫았다.“흥!”김욱은 피식 웃으며 휴대폰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캐리어는 네가 알아서 끌어.”그러면서 김욱은 밀차에 한가득 쌓인 캐리어에서 손을 뗐다.심유진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밀차를 끌었다.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김욱을 뒤쫓아 갔다.“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오빠는 아니지만 그래도 오빠를 사랑하잖아! 오빠! 그러니까 화 풀어. 응?”김욱은 오글거려서 구역질 날 것 같았다.“너 메스껍게 굴지 마.”김욱은 발걸음을 재촉해 심유진을 피하려 노력했다.하은설은 뒤에서 부러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봤다.“너와 김욱 씨 사이가 참 좋아.”하은설은 감탄하며 말했다.“그렇지.”심유진은 비록 김욱과 자주 티격태격하긴 했지만 그는 심유진한테 허태준만큼 소중한 사람이였다. 김욱은 심유진이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존재였다.“뭐해?”김욱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그들을 바라봤다.한참이나 뒤 떨어진 두
“그래요.”하은설은 먼저 앞으로 다가가 김욱을 힘껏 껴안았다.김욱의 몸에서는 부드러운 우드 향이 났다.하은설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뭔지 모를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김욱과 떨어지게 돼서가 아니라, 10년 넘게 공부하고 생활한 제2의 고향을 떠나야 한다는 게 몹시 아쉬웠다.김욱이 혹시라도 눈치를 챌까 봐 하은설은 황급히 그를 놓아주고는 등을 돌렸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김욱은 하은설을 놀리기에 바빴다.“은설 씨, 부끄러워 하지 말아요.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요.”하은설은 극구 부인했다.“누가 운다 그래요! 저 안 울어요!”벅차오르는 감정을 꾸역꾸역 참는 하은설의 모습을 보다 못한 심유진은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울어도 돼. 괜찮아.”심유진은 하은설을 위로했다.“나 정말 울 생각 하나도 없었다니까?”심유진과 김욱이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하은설은 근심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그만하고 어서 가자. 저기 외국 사람들도 다 쳐다보잖아.”하은설은 김욱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김욱 씨, 저희 이만 가볼게요.”김욱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잘 가요.”...심유진은 항공권을 예매한 후 바로 허태준한테 비행기 티켓을 알려줬다.허태준은 사람을 보내 배웅하러 가겠다고 했었다.그 뒤로 허태준이 워낙 바빴던 지라 심유진은 차마 방해할 수 없어 연락을 하지 않았다.비행기가 착륙한 후에야 심유진은 허태준한테 연락했다.[저 도착했는데, 사람은 보냈어요?]허태준은 전화번호 하나를 보냈다.[여기로 전화해 봐요.]심유진이 전화를 걸자 상대방은 이미 비행장에 도착했으니 밖으로 나오라고 했다.둘은 서로를 바로 알아볼 수 있게 전화를 끊지 않았다.최근 해외에 바이러스 확진자가 늘면서 국내로 피신하는 사람이 많아졌다.국제선 입국장에서 마중 나온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휴대폰을 들고 손을 흔드는 검은 옷차림의 젊은 남자가 심유진의 시선에 들어왔다.남자는 심유진에게 자신을 소개했다.“저는 허 대표님의 비서, 홍인우라고 합니다.”홍인
허태준이 자신을 데리고 파티에 참석하려고 예복을 준비했다고 심유진은 생각했다.하지만 그녀가 쇼핑백을 열었을 때, 안에 들어 있는 것은 검은색 벨벳 재질의 롱스커트였다.너무도 수수한 드레스라 파티에 입고 가기에는 어울리지 않았다.심유진은 불길한 느낌이 엄습했다. 그녀는 놀라서 급히 쇼핑백을 집어던지고 홍인우한테 달려가 물었다.“혹시... 누가 돌아가셨나요?”“네.”홍인우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우리 작은 아가씨께서...”심유진은 한참 생각한 후에야 “작은 아가씨”가 누구인지 감이 잡혔다.“허아리가?”“네.”심유진은 머리를 세게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너무 갑작스러운 소식에 심유진은 놀라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걔, 걔가...”지난번 허아리가 납치되고 납치범이 허태준한테 백만 억 원을 요구했다는 소식을 끝으로 심유진은 아무런 소식도 접하지 못했다.그 뒤로 후속 뉴스도 보도 되지 않았지만 괜히 아픈 곳을 건드릴까 봐 심유진은 굳이 허태준한테 묻지 않았다.하지만 허태준이 워낙 티를 내지 않아 심유진은 마냥 허아리가 구출되었다고 생각했었다.하지만 일은 그녀의 생각과 달리 흐르고 있었다...심유진은 허아리가 너무 싫어서 미울지경이 였다. 하지만 허아리도 아직은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그 아이가 이렇게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었다.홍인우는 심유진이 무엇을 묻고 싶은지 알고 있었지만 서둘러 말해주지 않았다.“이 일에 대해서는 허 대표님께서 자세히 설명해 주실 겁니다.”“네.”심유진은 수많은 의문을 뒤로 하고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홍인우는 심유진을 데리고 교외에 있는 장례식장으로 갔다.장례식장 앞의 넓은 공터에는 수많은 고급 승용차가 늘어서 있었다.“오늘 작은 아가씨를 조문하러 오신 분들이 많아요.”홍인우는 장례식장에 들어가기 전 심유진한테 귀띔해주었다.그리고는 홍인우는 조수석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장례식장에는 추모행렬이 끝이 없었다. 그중 허씨 가문은 가장 큰
허태준이 고개를 들자 심유진과 눈을 마주쳤다.“이리 와요.”허태준은 심유진을 향해 손을 내밀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손을 꽉 잡았다.허태준의 손은 언제나 그랬듯 차가웠다. 빈소에 난방을 켜지 않아 그의 손은 평소보다 더 차갑게 느껴졌다.심유진은 아무 말 없이 허리를 곧게 펴고 허태준의 옆자리에 섰다. 그녀는 허태준과 함께 추모객을 맞이했다.허태준의 인맥이 넓어 추모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장례식은 저녁이 되어서야 비로소 끝났다.심유진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하루 종일 허태준과 서서 추모객을 맞이했다. 물 한 모금도 마실 새가 없었지만 전혀 힘들지 않았다. 아마 마음이 너무 아팠던 나머지 신경이 마비된 것 같다.“오늘 밤 빈소를 지킬 거예요?”심유진은 조심스레 허태준한테 물었다.허아리의 시신은 내일 아침 묻을 거기 때문에 장례식은 이미 끝난 것과 마찬가지였다.허태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그러지 않아도 돼요.”허아리는 허태준의 친딸이 아니었다. 허태준한테 허아리는 낯선 사람보다는 익숙한 아이일 뿐이었다. 장례식도 허 아주버님과 허 아주머니의 강요하에 진행될 수 있었다.“힘들어요?”허태준은 걱정 가득한 눈빛을 하고 심유진한테 물었다.“그냥 배가 좀 고프네요.”심유진은 그제야 꼬르륵거리는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잠깐 나가서 밥 먹을까요?”“그래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장례식 밖으로 나갔다.심유진은 여전히 빈소에 남아있는 허 아주버님을 발견했다.“아저씨는 안 가신대요?”“아버지는 남아서 빈소를 지키겠대요.”허태준은 무덤덤하게 말했다.“허아리가 아버지의 친손녀는 아니지만 그래도 허씨 가문의 일원이죠. 둘째 삼촌네 가족이 모두 없으니 아버지라도 자리를 지킬 수밖에요.”“태서 씨는요? 태서 씨가 아리의 친아빠인데 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거죠?”허 씨네 집안은 참으로 파라만장했다. 허태준의 둘째 삼촌은 어린 여자아이를 성추행한 죄로 형을 선고받았고 허택양은 유럽에서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수감
허아리의 죽음이 허태준과 관련이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허태서가 도망간 날이었다.몇 년 동안 재정 악화가 지속되었던 YT 그룹은 파산의 위기에 놓여있었다. 오랫동안 권력을 잡았던 허태서는 미리 사람을 심어둔 덕에 미리 소문을 듣게 되었다. 소문을 들은 허태서는 경찰이 들이닥치기 전에 이미 짐을 싸고 도망쳤다.이에 경찰은 전 국민 수배령을 내렸고 허태준도 사람을 시켜 허태서를 찾는데 돌입했다.허태준이 찾아내기도 전에 허태서한테서 연락이 왔다.전화기 속 허태서의 말투는 투박스러웠다.“허태준, 네 딸이 내 손에 있어. 네 딸이 죽지 않길 바란다면 200억 현금과 차 한대를 준비해서 도원길 28번 입구에 세워둬! 경찰에 신고할 생각하지 마! 돈과 차를 받는 즉시 네 딸을 돌려주지!”“허아리 털끝 하나 건드리지 마요!”허태준은 허태서가 바라는 대로 조급한 척하며 그를 안심시켰다.“돈과 차 얼마든지 준비할 테니까 아리만 무사하면 돼요!” "한나절의 시간을 줄게. 오늘 자정까지 모든 물건을 내 눈앞에 가져다 놔!”이 말을 끝으로 허태서는 전화를 끊었다.허태준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그는 허태서가 새로운 사냥감을 찾지 못하도록 묶어둔 것이다.허태준은 허아리를 돌보는 보모한테 전화했다.신호음이 한참 울린 후에야 연락이 닿았다. 자신을 응급실 간호사라고 칭하는 사람이 전화를 받았다. 간호사는 보모가 누군가에게 심하게 맞아서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받는 중이라고 전했다.간호사는 한 번도 허아리를 거론하지 않았다. 정황상 허아리가 허태서 손에 있는게 확실해 보였다.허태준은 즉시 경찰한테 신고했다.그날 밤 경찰은 도원로 28번지 주위에서 잠복수사를 했다.하지만 현장에 나타난 것은 허태서의 심부름으로 차를 빼돌리러 온 무고한 행인이었다.사건 직후 허태서는 다시 한번 허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허태서는 화가 잔뜩 나 있었다.“허태준, 네가 날 갖고 놀아?”허태준은 입을 꾹 닫았다.“그래, 딸을 돌려받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허태서가
하은설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시간 없어, 빨리 가자! 너 기다리다 네 남편 목 빠지겠네!”심유진은 빨리 걷기 위해 두 손으로 얼른 웨딩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응, 그래.”화창한 날씨에 황금빛 햇살이 꽃잎 사이로 레드카펫을 비추고 있었다.심유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온실 문 앞까지 걸어왔다.온실 대문 앞에는 육윤엽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별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별이는 심유진의 등장에 잡고 있던 육윤엽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엄마, 오늘 천사 같아요!”심유진도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 우리 별이!”오늘 결혼식의 화동인 별이는 정장 차림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앙증맞은 손에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온실 안에서 곧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육윤엽은 심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가자.”심유진은 애써 웃고 있지만 눈물이 맺힌 육윤엽을 보고 갑자기 꼬끝이 찡해졌다.하은설은 그녀가 울려고 하자, 옆에서 한마디 했다.“참아, 울면 안 돼!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화장 번지면 안 예쁘잖아.”심유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고 육윤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별이도 앞에 서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면서 바구니 속의 꽃잎들을 한 웅큼씩 집어서 하늘로 흩뿌렸다.신부의 등장에 하객들은 잇달아 박수를 쳤고 심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태준은 예식장 단상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는 심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결혼식장이 크지 않은 탓에, 육윤엽과 심유진은 2분도 안 되어 예식장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행복함에 싱글벙글하던 허태준은 육윤엽이 굳은 얼굴로 헛기침을 몇 번 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아버님.”육윤엽은 심유진을 한 번
육운영과 김욱은 블루 항공이 설 연휴에도 쉬지 않은 탓에 경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다만 심유진은 보름 정도 되는 설 연휴 중 절반 시간을 허씨 가문의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은 상황이라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육운영과 김욱은 짧은 휴가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했다.별이도 설 연휴가 끝난 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허태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이의 유치원 픽업을 위해 일부러 허태준과 심유진이 사는 동네에 집까지 샀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블루 항공 경주 지사의 재건축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김욱은 몇 명의 핵심 직원들을 경주 지사 쪽으로 파견시켜 심유진과 함께 회사 초반 운영을 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운영은 정상 궤도에 올랐고 일부 본사의 업무도 경주 지사 쪽으로 넘어왔다.회사가 눈코 뜰 새 바빠지자, 심유진은 5월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허태준이 결혼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기에 바쁜 일정 속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서 결혼식 준비를 했다....5월이 되자, 모두의 예상대로 코로나는 국내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다.블루 항공은 다행히 코로나가 N시티에서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부서를 이동한 상황이라 큰 타격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성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의 여러 의료기기 공장을 설립하고 마스크 등 의료 물자를 전 세계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반면 모어 항공은 블루 항공과의 소송에서 패한 뒤, 입소문이 나쁘게 퍼져서 고객들을 블루 항공에 뺏긴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역이었던 마리아는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는 중, 심유진과 허태준의 결혼식 날도 다가왔다.심유진은 결혼식 날이면 해방감이 들 줄 알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YT 그룹이 부
허아주머니는 특별히 심유진을 위해 아침밥을 남겨두었다.심유진은 허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고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허태준과 별이는 그녀가 아침을 다 먹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때마침 허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만두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허태준에게 건넸다.“자, 이거 잊지 마.”“고맙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떠나도 될까요?”심유진은 어젯밤의 일로 토라져서 답도 하기 싫었지만, 허아주머니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짧게 답했다.“네, 가죠.”그녀는 답을 하고 나서 별이의 손을 잡고는 허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허태준도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허태준이 별이에게 미리 증조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말했고, 별이는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폭풍 질문을 던졌다.“증조할아버지는 왜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인 건가요?”“증조할아버지는 무서워요?”“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만두를 먹을 수 있어요?”...허태준은 별이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했다.그동안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은 냉랭한 심유진의 태도에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과한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하는 자기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어젯밤 생각에 몸이 반응해 오면서 또 피가 끓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별이를 안고 묘지 입구에서 산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몸을 굽혀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할아버지, 저 왔습니다.”심유진도 허태준의 할아버지를 보자,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무덤을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심유진은 사진 속의 자상한 노인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태준 씨 아내 심유진이에요.”그러고는 별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유진이 혼자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질문 세례를 했다.“태준이는? 왜 같이 내려오지 않았어?”“아빠는 어디 있어요? 불꽃놀이 시켜준다고 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심유진은 방에서 나오면서 침착하게 둘러댔다.“샤워하고는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어요.”어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김욱만이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시했다.별이는 실망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아빠 미워! 오늘 같은 날 왜 이렇게 빨리 주무시는 거죠?”심유진은 그런 별이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어. 내일 아빠가 우리 별이랑 같이 불꽃놀이 해주실 거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그녀의 말이 끝나고 허태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세뱃돈을 심유진과 별이에게 건넸다.허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심유진은 허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뜨겁게 포옹했다.“어머님, 고마워요.”허아주머니는 심유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우리 유진이는 너무 착해.”이어 육운엽과 김욱도 세뱃돈을 건넸고, 별이는 많은 세뱃돈을 받은 것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늦은 시간 탓에 몇몇 어른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때마침 허아주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지.”심유진도 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허태민, 너도 이제 자야지.”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별이를 재운 뒤에도 허태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했다.다들 잠들었는지 온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유진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그녀가 켜놓았던 무드등조차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겼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발끝으
“새해 복 많이 받아요.”왜인지 심유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왜 그래요?”허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불꽃놀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완전 좋았어요!”“근데 왜 우는 거예요?”허태준은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심유진이 울면 허태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너무 감동적이어서요.”심유진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거렸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사랑하는 사람...”허태준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더니 심유진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저도 사랑해요, 유진 씨.”그는 머리를 숙이고 심유진의 이마에 키스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워낙 세게 껴안아 밀어 지지 않았다.“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심유진은 이성을 잃은 허태준을 일깨워 줬다.김욱은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불꽃 쇼도 끝난 상황에 허태준과 위에 오래 무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심유진은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허태준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기에 그녀를 놓아줬다.“잠시 후에 꼭 보충해야 해요.”허태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어떻게 때울까요?”심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둘러 내려가지 않았다.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허태준의 턱으로부터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이러면 돼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웃음치며 그를 유혹했다.“아니면 이렇게?”그녀는 허태준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허태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 빛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하지만 그는 꾹꾹 참으며 인내심 있게 심유진의 다음 유혹을 기다렸다.“우리... 스릴 넘치게 놀아 볼래요?”심유진은 허태준의 턱을 잡으며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마치 섹시한
설날에 모처럼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들 모두 약주를 하자 허 아주머니는 육윤엽과 김욱을 모두 집에 못 가게 막았다.아침 일찍 일어나 쉴 새 없이 바빴던 심유진은 저녁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허 아주머니는 피곤해하는 심유진을 발견하고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하지만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졸음을 떨쳐내려 애썼다.“조금만 더 버텨볼게요.”심유진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먼저 자고 싶지 않았다.올해 그녀는 더 이상 떠돌이 처지가 아닌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허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극구 말렸다.“먼저 올라가서 눈 붙이고 있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기 전에 깨워줄게요.”허태준은 심유진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졌다.허태준이 말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별이 마저도 심유진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잠을 권했다.결국 심유진은 그들의 의견을 꺾지 못하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유진아! 심유진! 빨리 일어나! 12시야!”누군가 심유진의 뺨을 툭툭 치면서 깨웠다.심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김욱이 있었다.심유진은 김욱의 손을 치우고 그를 세게 때렸다.복수를 마친 심유진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왜 오빠가 날 깨우러 온 거야? 태준 씨는?”“아래층에 있어. 별이가 태준 씨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올라왔지.”김욱은 방금 맞은 곳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우지 않는 건데.”“오빠가 먼저 날 때렸잖아! 내 탓 하지 마!”심유진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지금 몇분이야?” 김욱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말했다.“11시 59분이야. 이미 카운트 다운 시작됐어.”“이렇게 빨리?”조금만 잔줄 알
심유진은 생각을 되짚어보고는 문득 허태준이 유럽으로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허태준은 허택양의 일을 처리하러 유럽으로 가는 거라 핑계를 댔었다.“허태준은 너보다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육윤엽은 코웃음 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는 참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 생각밖에 안 하네.”“아이참...”심유진은 헛웃음 지으며 이를 꼭 깨물었다.그녀는 이미 들킨 바에 모든 사실을 다 털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사실, 저와 태준 씨 이혼한 적 없어요. 저 이미 6년 전에 태준 씨와 결혼 했었어요.”허태준은 이 사실을 육윤엽한테 말한 적 없었다.심유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윤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희 둘...”육윤엽은 가슴을 쥐어 잡고 괴로워했다.심유진과 김욱은 급히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요? 심장이 아파요?”육윤엽은 심유진의 뒤통수를 공격한 후에야 표정이 온화해졌다.그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심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앞으로 또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다간 더 아프게 때릴 줄 알아.”육윤엽은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다.심유진은 뒤통수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다시는 안 숨길게요!”허태준의 부모님은 육윤엽과 김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서부터 허 아주머니는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내오며 쉬지도 않고 대접했다.육윤엽은 젠틀하게 허태준의 부모님을 대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심유진을 실컷 욕한 덕분일 수 있다.게다가 육윤엽은 두 사람의 선물도 준비해 왔다.그는 허 아주버님한테 비싼 브랜드 시계를, 허 아주머니한테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싼 보석 세트를 선물로 줬다.두 사람은 한참 거절하다가 끝내 심유진의 설득에 못 이겨 선물을 받았다.양쪽 부모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아이들과 같이 설을 보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두 분과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그들이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준과
심유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저녁밥을 먹은 후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잘 준비를 했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그때 허태준은 별이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심유진은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저 지금 너무 걱정돼요.”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뭐가 걱정돼요?”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일 저의 아버지가 여기에 오시잖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버님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심유진은 내일 육윤엽과 허태준의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뻐근했다.“아버님은 현명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허태준은 심유진을 다독였다.“아버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 분은 아니잖아요.”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준 씨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던데요?”허태준은 마른기침하며 핑계를 둘러댔다.“그것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허태준은 이미 겁에 잔뜩 질려 육윤엽이 없어도 감히 그의 나쁜 말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은 이를 이미 알아차렸다.“아무래도 오빠한테 전화해서 신신당부해야겠어요.”그녀가 충전 케이블을 뽑자 휴재폰 충전이 중단되었다.허태준은 다급하게 그녀를 뜯어말렸다.“두 분 이미 잠에 드셨을 거예요. 할 말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때 해도 늦지 않았어요.”심유진은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긴. 그렇긴 하네요.”허태준은 심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됐어요. 얼른 자요.”허태준은 방안의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뒀다.“내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쪽잠을 잘 시간도 없을 거예요.”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태준을 쳐다봤다.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저 잠 좀 재워주지 않을래요? 아무 이야기를 해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